시모노세키 여행6 - 성아래 마을 죠후에서 러일전쟁의 장군 노기신사를 보다!
8월 12일 시모노세키역 광장에서 버스를 타고 성 아래 마을 죠카마치 죠후 (城下町長部) 의
이미노미야 진자 를 구경하고 노기진자 乃木神社(내목신사)로 가는데 도리이 가 보입니다.
노기 신사는 1912년 메이지왕(천황) 장례식날 에 부인과 함께 일왕(천황)을 따라 자결한
일본 육군대장 인 노기 마레스케 乃木希典 (내목희전) 를 모신 신사 라고 합니다.
옛날부터 성이 함락되면 성주는 부인 및 자식과 함께 모두 자결 하는게 전통인 듯 합니다.
그런데 참 엉뚱하게도 신사 입구 에는 “입시 합격 기원” 이라는 큰 간판이 세워져 있고
신사안의 부속 건물에도 “합격 학업성취” 라는 깃발이 서있어 실소를 자아냅니다.
일왕을 따라 죽은 장군을 기리는 신사가 대학 합격을 기원 하는 신사로 바뀌었으니? 규슈
다자이후 텐만구 신사는 학자 스가와라 미치자네를 모시니 그렇다지만 여긴 생뚱맞습니다?
러일전쟁 때의 장군인 노기 마레스케 는 바로 이곳 죠후(長部) 태생 으로 메이지유신 때
인 1868년 무진전쟁에서 조슈군 으로 참전해 에도의 바쿠후군과 싸웠으며.....
청일전쟁 때는 여단장 으로 조선에 출전해 공을 세운후 대만총독 을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러일전쟁 때는 대만 총독을 지내고 휴직 중 이었는데도... 궂이 자원해 입대하여
제3군 사령관으로 만주의 뤼순(여순) 을 공격 했는데 이 전투에서.....
휘하 병력 13만명 중에 5만 9000명을 희생 시키고 자기 아들 두 명도 전사 합니다.
쓰시마 해전 과 더불어 양대 전투 중 하나인 여순 전투 에서 승리하여 러일전쟁을 승전 으로
이끌었으나 많은 부하를 죽인 죄책감 에서 벗어나지 못하고는 결국 자결 했던 것이지요!
비록 승전했다고 하지만 무모한 돌격명령으로 6만명을 죽였으니 부모들에게는 죄인이라?
1894년의 청일전쟁 때 일본군은 아베 신조의 외고조부 오시마 요시마사 가 4천으로 인천에
상륙해 서울에 무혈입성한후 경복궁을 공격해 고종을 포로로 잡아 조선군의 항복 을
받은후 아산으로 내려가 청군을 몰살 시키고 올라와서는 다시 평양에서 청나라군 을
일거에 대파하고 압록강을 건너 단이틀간 전투로 여순을 함락하고 요동반도를 차지 합니다.
하지만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의 3국간섭 으로 요동반도 를 토해놓는데 이 공으로 "러시아는
여순을 조차" 하고 하얼빈에서 철도를 부설한후 군사 요새화 합니다. 청일전쟁에서
차지한 "요동반도를 3국 간섭" 으로 뺏겼으니 일본은 피눈물을 흘리는데, 하지만 아무리
분해도 독일, 프랑스 및 러시아 3국을 동시에 상대해서 전쟁 을 할 수는 없었던 것 입니다?
조선의 왕과 대신들은 원래 모두 친청파 였는데 이완용의 경우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하니
친미파 가 되었고, 삼국 간섭으로 일본이 무릎을 꿇는 것을 보고는 친러파 가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고종이 아관파천 으로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피해서는 친러내각 을
세우니 일본은 조선을 39도선 에서 남북으로 갈라 먹자고 제의하나 러시아는 거절 합니다.
조선을 러시아와 반으로 나누자는 제안 조차도 러시아는 고종을 자국 공사관에 보호 중인지라
거절하니... 일본은 절치부심 국력을 쌓아 전투력을 증강하고 영일동맹 과 미국을 후원 세력
으로 삼으니 이번에는 자국내 민중봉기 혁명 으로 다급해진 러시아가 조선 분할 을 제의 합니다.
옛일을 생각해 보건대.... 조선을 최초로 분할 하려는 시도는 임진왜란 때 고니시 유키나가 와
명나라 심유경 이 조선 8도를 남북으로 4도씩 나누자는 협상이 있었는데.... 저게 실패하니
일어난게 정유재란 으로 왜군은 남해안에 28개 왜성 을 쌓고 경상, 충청, 전라도 를 유린합니다.
일본과 러시아 사이에서 이처럼 두차례나 39도선에서 나누는 협상은 결렬 되었으나...
미국은 자국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소련의 대일본전 참전 을 끈질기게 요청하여
마침내 1945년 소련의 참전대가 로 미국에 의해 38선에서 분할 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러시아가 제의한 조선 39도선 분할 문제는 영국과의 동맹과 미국의 후원 을 약속받아 전쟁준비를
완료한 일본 이 협상결렬을 선언하고 인천에서 러시아 군함 바랴크 를 기습하여 격침 시킵니다!
일본은 연합 함대를 북상 시켜서는 1904년 2월 8일 15척의 군함과 20척의
어뢰정 을 동원해 요동반도 의 러시아 군사요새 인 여순항을 기습 합니다.
러일전쟁 의 시작인데.... 전함 12척 으로 이루어진 러시아 태평양 제1 함대 는 일본 해군
의 포격과 기뢰 부설로 고전 을 하지만 일본군도 여순항을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합니다.
이에 노기 마레스케 장군의 일본 제3군 13만명 은 만주를 가로질러서 8월 19일 후방에서
고구려시대 비사성터인 여순을 공격 하나 러시아 맥심 기관총 의 십자포화 를 받는데
1894년 공주 우금치 에서 동학 농민군 이 일본군 미나미 소좌 가 통합 지휘하는
조선군 신정희와 이두황 부대의 기관총 십자포화 에 전멸한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집니다.
일본군은 십년 전에 공주 에서 자국의 미나미 소좌 가 구사했던 기관총 십자포화 전술 에 된통
당했으니.... 당시 청군이 지키던 여순을 단 이틀만에 함락 했던 추억 때문 이었을까요?
청일전쟁에서 이긴 자만심 탓인지 현대전을 이해하지 못하고 옛날 구태의연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노기대장 은 러시아군 요새진지를 향해 부하병사들을 연이어 돌격 시킵니다.
남산 전투에서 장남 가츠스케가 전사 하고 203고지 전투에서는 차남 야스스케를 잃으니...
4개월간 13만 병력 중에서 2만명이 전사 하는등 무려 5만 9천명을 희생 시키는 것이지요?
그러니 저는 저 노기 마라스케가 승장이 아니라 부하를 떼죽음으로 내몬 패장이라는 생각이....
휴직 중에 스스로 자원하여 복직 해서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승장 이지만 노기 대장의
개선때에는 전사자둘의 성난 유가족들이 항의 를 하기 위해 항구에 대거 모여들었으니
전쟁에 승리해 화려하게 개선 하는 부대였지만 마주한 일본인들의 민심은 흉흉 했습니다!
분노에 가득찬 전사자들의 유족들이 비난을 퍼부을려는 순간에 배에서 내려오는
노기대장의 양 옆 에는 여순전투에서 전사 한 "두 아들의 관" 이 있었으니
항구에 성이 나 있었던 가족들이 이 광경을 보고는 "모두 함께 울었다고" 합니다!
6.25 전쟁 때에 사회 지도층 인사로 미군은 워커 8군 사령관 부자 와 밴플리트
장군, 클라크 장군 및 아이젠하워 대통령 의 아들 2명 합쳐서 4명등
수십명이 죽었으며...... 중국도 모택동 주석의 아들인 모안청 마저
중공군 으로 참전하여 전사 하는 등 고위층 자제들이 많이 전사 했다고 합니다.
한국군 은 몇십년 전에 신동아 특집 에 보면 1,000 여명의 사회지도층 중에 전사자 를
조사했더니 6.25 전쟁 3년 동안에 전사자가 야당 국회의원 아들로....
육군 소위 한명과 일본군 출신 장군의 아들로 하사 한명 등 단 "2명" 에 불과했습니다?
자식들을 뒤로 감추거나 후방으로 빼돌렸던 것이라 노블레스 오블리주 가 없는 것이지요?
서민들이야 전쟁터에서 죽으면 되지, 고귀하신 사회지도층 자제분 까지 전쟁터 그
험한데 가서야 되겠는가? 지금도 국회 청문회를 하면 으례 병역미필 이 단골 메뉴라!
어느 대통령 후보는 당선이 당연시 되었지만 두 아들이 병역미필 이라 2번 다 낙선 했지요?
십 몇년전에 천안함 격침 으로 청와대 지하 벙커 에서 비상 안보회의 가 열렸을때
현역인 합참의장을 제하면, 군에 갔다온 멤버는 국방장관 뿐 이었다던가요?
대통령과 비서실장, 청와대 수석에 국정원장과 법무장관에 총리 등.... 실제로는
두어명 더 있었다지만 그렇다 쳐도 안보회의 멤버의 70% 는 병역 미필자 들 이라....
병역 미필자 들이 많다 보니 5.16 군사쿠데타 후 28세가 넘은 공무원과 선생님 을 비롯 1만 4천명 이
남강댐 도로공사, 양구·화천 간 도로공사, 정선선 철도공사, 영주 경북선 선로공사, 섬진강댐
도로공사, 울산 공업도시 간선도로 및 제주도 5.16 도로 건설에 투입됐는데.... 이후 군입대를
당연시 하는 분위기에, 2023년 12월에는 방탄소년단 의 남은 멤버들이 입대하는 모범을 보였습니다.
노기 장군 은 귀국후 젊은이들의 목숨에 대한 책임 을 느끼고 메이지왕(천황) 에게 자결을
허락해 달라고 간청하나 일왕(천황) 은 자신이 살아있을 때는 불허한다 고 말합니다.
명령을 충실히 따른 그는 수년후 메이지왕이 죽자마자 부인과 함께 자결 하는 것이지요?
자결은 아시다시피 칼로 배를 가르는 것이니 그 아픔과 고통은 상상을 불허 하는 것이지요?
노기대장은 이후 일본 육군의 군신 으로서 신사 가 만들어 지고 숭배 대상이 되는데
여기 시모노세키 죠후 말고도 도쿄 하라주쿠역 앞 다케시다도리 근처에도 신사 가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서울 남산 의 서울 애니메이션 센터 위에 있는 리라 초등학교 바로
옆에 노기 신사 가 있었으니.... 지금의 “남산원” 이라고 부르는 곳이라 합니다.
재일 교포 작가인 윤달세 씨는 그의 저서에서 노기의 선조 를 임진왜란 때 잡혀온 10만에
달하는 조선인 포로 중에 한사람이라고 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었으니..... 그
조선인이 다지마의 일본인 사사키 씨 눈에 들어 사위가 되니 소생 冬糾(동규) 의 손자인
瑞昌(서창) 이 의사 가 되어 조슈번 노기마을에 근무하면서 성을 노기 乃木 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후손이 대가 끊어지니 일본인을 양자 로 들이고는 그 후손 이 노기 마레스케
라고 하니.... 족보로는 조선인의 후예 가 맞지만 핏줄로는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 입니다.
후원 에는 어신수 라고 해서 노기 가족이 길어먹던 우물 이 남아 있고 장군이
타던 말 이며 부부의 초상이 조각상 으로 세워져 있는 모습을 구경합니다.
여기 노기 신사 안에는 생전에 부부가 살던 집 이 있는데 대만 총독에 육군대장 을 지낸
명망가 치고는..... 너무나도 검소 해서 다시한번 놀라게 됩니다! 하기사 일본에서는
재벌그룹 회장의 60대 사모님 도 가정부나 운전수 를 고용하지 않고 20~30평 주택에
살며 할머니가 매일 자전거 를 타고 시장을 봐서 회장님 저녁상 을 차린다고 했던가요?
나라의 녹 을 먹는 자 는 이처럼 결백성 이 지나칠 정도로 청렴하고 검소 해야 하는
법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황희 정승의 부인 이 남의집 옷 바느질
을 해서 가난한 살림에 보태자 황희 정승이 호통을 쳤다던가요? 그래도
우린 굶지는 않는다, 당신이 더 가난한 이웃 일거리를 뺏는다는 생각은 왜 못하는가?
한국에서는 포철 을 만든 박태준 정도 일러나? 그는 집을 판돈 10억 마저 박원순의 아름다운 재단 에
맡기고 무일푼으로 죽었으니 치료비 마저 없었다고 하네요? 일본에 가서 와세다대 스승에게
읍소해 농업분야에 배정된 1억$ 을 포철 건설로 용도변경을 하니, 신일본제철 기술자들 이 일본
기계를 뜯어와 포항에서 조립 하고 한국인 직공들을 기술자로 훈련시키면서 첫 쇳물 까지 뽑아줍니다.
만약에 박태준이 모교 은사에게 매달리지 못햇더라면 포항제철은 탄생하지 못했고 저 1억불은 한국 농촌에
쓰였을라나? 회상을 접고는 노기 신사 를 나와서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禪寺) 양식으로
국보로 지정된 고잔지 (功山寺)를 갈까, 일본 최고 금속화폐 가 발견된 가쿠온지 (覺苑寺)로 갈까 망설입니다.
그도 아니면...... 죠후 모리 저택 長府 毛利宗家故居 을 찾아 나가야 長屋 (사무라이주택 ) 며
또 그 근처에 조후정원 長府庭園 을 볼까 판단이 서지않아 길거리에 서서 잠시 망설입니다.
내가 결심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연일 계속된 여행에 지친 울 마눌이 밥 부터 먹자고
해서 점심을 먹으려고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얼른 마땅한 집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생선회 가 나오는 정식은 너무 비싼 것 같고 우동집이며 소바집 은 보이지
않는지라 우물쭈물 하다가 그럼 조금 걸어가면서 찾아보기로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