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뼘 / 윤정구
한 뼘 남짓 될까,
학의 다리로 만들었다는 하얀 뼈피리
간 봄 떨어진 동백꽃 울음으로
삼경 지나는 초승달 소리로
별 총총 새벽하늘 건너갈 때
가느다란 두 다리가 가지런히 모아 펴고
겨울 바다 깊숙이 뛰어들더니
꿈결이었나,
올곧은 다리가 저어 간 은하의 밤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전생(前生)의 한 뼘
흰 옷 입은 아이 / 윤정구
두만강가 토막집 앞마당
햇볕 쪼이는 흰 옷 입은 아이
불끈 솟은 광대뼈 위의 까만 두 눈이
대추씨처럼 단단하다
겨우내 입은 겨자 빛 무명저고리
누르스름한 얼굴
방금 만리장성을 넘어온 오랑캐가 영락없다
누가 덤벼들기라도 할세라
부릅뜬 작은 눈
여차하면 박치기라도 해댈 기세다
그래도 쏘아보는 눈매 한 구석이 정답다
험준한 알타이산맥
꽁꽁 얼어붙은 바이칼호
모래바람 산을 옮기는 고비사막
허허로운 만주벌판 걷고 걸어서
금수강산에 이른
아득한 수천 년이 보이는 것 같다
새의 깃털 한 점씩 머리에 꽂고
무리 지어
큰 활 메고 달려가고 싶다
가파른 저녁 / 윤정구
비가 와야 하는데 가물이 한참 가려나 노을이 붉다
귀가 떨어진 채로 수천 년을 졸고 있는 스핑크스 너머로
해 지기 전 새끼들 밥부터 먹여야 한다고
청나일강 넘치기 전 집부터 고쳐야 한다고
제 지구를 굴리고 가는 쇠똥구리의 저녁이 가파르다
앙리 루소의 클라리넷 독주 / 윤정구
앙리는 클라리넷 연주자가 아니었다
제대로 그림 공부를 한 일도 없다
세금 징수원이었던 그는
그냥 그림이 좋아서 일요일에 그렸다
그는 물론 아열대숲을 본 일이 없다
상상으로 천진무구한 정글을 그렸을 뿐
폭풍 속 정글에서 떨고 있는 호랑이와
예쁜 뱀과 놀고 있는 이브를 그렸다
집시의 사막에 떠오르는 달을
상상하고 또 상상하고 다시 상상하였다
만돌린 위 하얀 달 둥실 떠오를 때까지
그러니까 언제 멕시코를 다녀왔냐고
인생이 어땠었냐고 앙리에게 묻지 말게
그냥 그림이 좋아서 평생 그렸고
틈틈이 클라리넷을 불었을 따름이니까
* 앙리 루소 : 프랑스를 떠나본 ㅇ일이 없는 입체파의 선구적인 화가로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상상 속의 정글을 소재로 개성적인 작품을 그렸다.
봉저난상鳳翥鸞翔
⸺石田 황욱黃旭 선생의 악필握筆 글씨 앞에서
윤정구
신들린 글씨를 샘내었던가,
수전증手顫症이 오자 나뭇가지처럼 붓이 떨리고
물결처럼 글씨가 흔들리었다
여차하면 목숨까지 흔들어 떨어뜨릴 기세였다
이제 그는 끝났다고
끌끌 모두 혀를 찼다
선생은 주먹을 움켜쥐듯 손바닥으로 붓을 잡고
엄지로 붓꼭지를 눌러
든바다 난바다를 함께 잠재웠다
다섯 손가락 사이로
후들후들 신기神氣를 느끼며
떨며 써 내려간 네 글자 봉저난상鳳翥鸞翔
봉황이 휘돌아 날고
난새가 날아오르듯
활기차게 살아라
한 올의 맥박이라도 살아 남았거든
하늘로 하늘로
날아오르는 목숨 되어라
거친 돌무더기를 딛고
먼 섬을 향해 내닫는 날갯짓 소리 힘차다
[ 윤정구 시인 약력 ]
* 1948년 경기도 평택 출생.
* 199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시집 『눈 속의 푸른 풀밭』 『햇빛의 길을 보았니』 『쥐똥나무가 좋아졌다』 『사과 속의 달빛 여우』
『한 뼘이라는 적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