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꽃에 관한 시모음 5)
어리연꽃 /권순자
빗방울들 들이친다
무성한 잎사귀들 사이로 여린 꽃송이 내밀었다
진흙탕 딛고 올라선 저 내밀한 힘이
화관을 밀어올린 것이다
자그마한 할머니 화관 바구니 들고서 전철 안에 피었다
한 푼 두 푼 빗방울들 떨어지듯 순간순간 찰랑대는 소리
잠시잠시 환해지는 물결들 잔잔히 조금씩 퍼져나가면서
승객들, 선선한 얼굴들 모두가 다 잎사귀로 떠 흔들린다
물 위에 서로 내놓은 얼굴들, 서로 다른, 연의 잎사귀들
하지만 물 아래서는 서로 엉기듯이 의지하여 살아가니까
여리디여린 꽃잎 내민 작은 할머니의 화관 바구니는 결코
외롭지도 않아, 어두운 물밑을 지팡이 한 자루로 더듬어가며
지탱하는 힘, 질퍽한 이 세상에 여름 비 시원하게 맞으면서
고운 꽃부리 한 다발을 활짝 피워 올려놓으신 것이다
도드라진 힘줄 선 팔, 가녀린 목 꼿꼿이 세우시고서
긴 우기를 고집스러이 견뎌나가시는, 연약하게도
단단한 저 어리연꽃 한 송이,
천천히 천천히 물길을 헤쳐나가고 계신 것이다.
연못에서 연꽃이 피는 이유를 /이동식
-양수리 세미원에서
삶이 아름답기 위하여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다운 생각을 하지만
사람이 산다는 것은
어딘가에는 반드시
진흙탕이 있더라.
진흙탕 같은 연못에서
연꽃이 피는 이유를,
살아오면서 채워진
진흙탕 같은 미움, 그 미움위에
연꽃을 피워낸다면
아름다운 것을 보고
아름다운 생각을 한 삶이
비로소 아름다워질 수 있는 것 아니랴.
연(蓮)꽃 /신창홍
작열하는 8월의 태양에
갈증 난 바람들이
목 축이며 쉬어가는 작은 연못
욕망을 벗어버린 그 마음 진실인 듯
갯벌 같은 탁한 연못에
삼라만상에 마음을 열어 놓고
태양의 행렬들에 몸을 정화하고
달빛의 행렬들에 마음을 가다듬어
마침내 탄생한 백련화의 기품이여
풍파는 변질되어 고행은 간데없고
돌아서면 변심하는 세상인심 이기에
의연한 너에게 정도를 묻는다
가시연꽃 Ⅱ /하성용
가슴 태우며
몇 년을 기다려도
몸 속 어딘가에
숨어있던 님은
물의 살을 찢고
가시로 무장된
갑옷 속에서
두려움 가득찬 얼굴로
살그머니 다가와
내 곁에 서있다
정적을 흔드는
불청객들에게
짓밟히고
부서져도
아프게 부어오른
가시 옷 벗고
선경(仙境)의 수정 같은
애잔한 눈망울로
속세에 빛을 발한다.
연꽃 옆에서 /김옥자
언젠가 어디에서 본듯한데
한마디 말도 건네지 못하고
한줄기 곧은 성품에 곱게도 피었네
너의 요염한 자태에 흠뻑 취해버린
언제쯤 솔직히 고백해야 하나
옆에서 뚫어지게 바라만 보네
세월이 흘러도 잊을 수 없어
무엇이 그렇게 발목을 잡는지
생각만 해도 흐뭇한 그리운 첫사랑
너의 매력에서 헤어날 수가 없구나
아늑한 가슴깊이 파고드는 눈빛
어쩌면 좋아 너를 어쩌면 좋아
연꽃 일기 6 /임재화
동그란 초록 우산처럼 활짝 펼치고
연잎 다섯 장이 방긋 웃음 웃으며
맑은 물 위에서 둥실 떠 있습니다.
어느새 하얀 뿌리도 제법 자라서
진흙 위에서 가만히 뿌리내리려 하고
창문 너머에서 햇빛 따갑게 비치면
연잎 다섯 잎 새 얼굴 살짝 찡그리고
또다시 그늘이 조금이라도 드리워지면
언제 그랬냐 하며 활짝 웃음 웃습니다.
흰 연꽃 /이은경
–수련 중에서-
사막 갔다가 상처 투성이인 채로
시골 장독에 산다는 그 분을 다시 만나면
나도 깔쌈한 시집 한 권 더 만들려고
온갖 백팔번뇌 혼자 만들고 없애고 있다고 말하리.
아! 덥다.
선풍기 윙윙 도네.
가시연꽃 /初月 윤갑수
청아한 연꽃들이 탁해진 물속에서
오랜 세월 멈춘 숨 참아내고 세상에
나와 해맑게 웃고 있으니 널 바라보는
순간만큼은 세상 시름 다 사라 진다
강물이 흐르다 멈춘 이곳에 자리 잡고
살아온 세월이 얼마이더냐
시궁창 냄새 진동하던 때가 언제더냐
잊혀진지 오래라 인고의 삶을 통해
정화된 그대들의 보금자리엔 하얀
연꽃 무희들이 살랑 이는 바람결에
춤을 추니 그 고운 자태 아름답구나.
그대들은 꽃 중의 꽃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청춘의 꽃 마음의 꽃일세라.
연꽃 /박가월
넓적한 말발굽형에
맺힌 이슬방울
또
르
록
여과하는 뿌리와 달리
물을 허락 않는
이
파
리
동네어귀 큰 연못에
부처님 가부좌로
앉
은
像
구정물이 고인 곳에
설화의 소담스런
꽃
이
여
!
연꽃이 대답하다 /박얼서
태초에 에덴을 넘겨받았건만
왜 이처럼 썩혔는가!
오염의 정도가 심각하다
악취가 넘치는 세상이다
병들어 썩어가는 양심을
되살려 낼 더 이상의
구세주는 없는 걸까?
진흙탕 속에서 희망을 본다
연꽃이 희망을 속삭인다.
연꽃 찬가 /김원규
연 꽃잎 위에
새긴 선한 마음
부드러운 언행
인자함으로 피는
고귀한 진리를
흠모합니다
청결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 넋으로
악을 선으로 보듬는
당신의 이름을
어머니라 부릅니다
진흙 속에서도
순결과 청순함으로
숭고한 영혼으로
세상에 빛을 주며
미움을 잉태하여도
온갖 인내로
사랑으로 탄생시키는
순결한 희생입니다
연꽃 에밀레 /손택수
연꽃 잎위에 비가 내려친다
에밀레종 종신에 새겨진 연꽃을
당목이 치듯 가라앉은
물결을 고랑고랑
일으켜 세우며 간다
수심을 헤아릴 길 없는
끔직하게 고요한
저 연못도 일찍이
애 하나를 삼켜버렸다
애 하나를 삼키고 나선 단 한번도
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다
어린 내가 아침마다 밥 얻으로 오던
미친 여자에게 던지던 돌멩이 처럼
비가 내려칠 때마다 연꽃 퍼져나간다
당목이 종신에 닿은 순간 종도
저처럼 연하게 풀어져 떨고 있었으리라
에밀레 에밀레 산발한 바람이
수면에 닿았다 튀어오른
빗줄기를 뒤로 힘껏 잡아당겼다
내 연인 같은 연꽃이야 /요산 한상조
칠흑 같은 구렁속에서
숨은 어떻게
또 잠은 어이 이루었을까
여명을 타고
아직도 비몽사몽 간에
얼굴을 비비는
내 여인 같은 연꽃이여
마냥
한숨이라도 더 자렴
이윽고 따스한 햇볕에
살며시 눈을 뜨면
태양은 이글거리고
산천은 구름을 타고 날으련다
그제서야
입가에 솟아오른 미소를 감추며
애타게 그린님을 찾아 헤맨다
어디 갔다 이제 왔노
곱디 고운 너의 자태는
새 새댁 보다도 더 온후하고
설레 임이 가득 하구나
연꽃 /김병래
시골가 늪지에
연꽃이 피어 있네
연분홍 바람 안고
곱게곱개 피어 있네
한 발 다가 서니
사바가 눈 앞이고
두 발 다가 서니
모두가 관음이네
예쁜 연꽃처럼 /김용호
내게 있는 외로움이란
명분 속에
묻어 나오는 마음의 상흔에
난해한 그리움이 찾아온다.
살며시 등 밀어
보내야 할 이 그리움을
두근거림으로 맞이할
나의 그대는 없다.
나처럼
그대가 없는 사람은
내가 보낸 이 그리움을
반가움으로 맞이했으면 좋겠다.
연못에 아름답게 핀
예쁜 연꽃의 자존은
형태도 없는 바람에 흔들린다.
낯설음으로 다가올
좋은 인연을 꿈꾸며
예쁜 연꽃 같은
여인의 마음을 흔들어 보고 싶다.
낯설음으로 다가올
좋은 인연을 꿈꾸며
예쁜 연꽃처럼
내 마음은 흔들려보고 싶다.
연꽃 웃고 있네 /김동리
귀뚜리 소리, 귀뚜리 소리 난다
돌 속에 귀뚜리 소리 난다
여치 소리, 여치 소리 난다
벽 속에 여치 소리 난다
寂滅은 차라리
宇宙를 채우는 꽃송이
十`一`面 관음 다 돌아보고, 다시
大佛 앞에 서니
귀뚜리 소리 여치 소리
모두 간 곳 없고
涅槃은 그대로
無를 채우는 햇빛인데
화강암덩이, 희멀건 화강암덩이
한 송이 연꽃 웃고 있네
연꽃 /해련 류금선
진흙땅에 뿌리 내리고도
오물에 물들지 않은
고고한 그대 모습
선홍빛 아름다움은
천상의 웃음이어라
이슬방울에도 젖지 않는
꼿꼿한 몸가짐은
피 끓이던 날의 울음소리를
안으로만 피워낸 깨달음
방울방울 눈을 뜬
연화세계 그대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