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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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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기순례후기 스크랩 순례후기 추억속의 보덕각시을 찾아나선 연화도 순례기.(부제:관세음 보살을 부르자)
뜬구름 추천 0 조회 326 07.07.26 08:26 댓글 11
게시글 본문내용

지난 달 한 달 정도 떠난 해외여행 에서도 불교 성지를 참배 하고 왔지만  귀국하여 카페 들어가 보니

부산 경남 울산 법우님들의 정기 지역 순례에서 통영 연화도 연화사- 보덕암 순례 공지되여 있어 일정을

보는 순간 통영과 보덕각시란 말에 가슴이 두근 거리는 충동을 느끼며  곧 장 바로 참가 신청을 했었다.

 

통영은 옛 忠武시로 충무는 이순신장군의 시호(諡號)로  젊은시절 20代의 海軍 水兵 時節의 기억과  

연화도-보덕암이란 관세음 보살의 화신이신 보덕 각시 이름에서  "관음 성지순례"라는 생각에 나는  

젊은 시절  관세음보살 찾고 부르던 나를 찾아 떠나는 순례의 길이 되기 때문이였다,

 

7월14일 순례날 경남,제주 쪽에는 일본 쪽으로 지나는 태풍의 영향으로 연화도로 가는 뱃길이 끊어져

게시판에는 일정 변경 공지 되였는데 "彌來寺"에서 일박하고 日氣에 따라 연화사 순례 하는 일정으로

게시 되여 있지만 대구에서 함께간 법우님들과 함께 1차 집결지 통영 연안 부두 내항에 도착 하였다.

 

충무 통영의 내항은 텅빈 하늘을 스치는 태풍 속에 잿빛 구름과 한가로이 떠 있는 관람용 거북선이 눈에

먼저 들어 왔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말 없이 우두커니 바라 보면서 나는 30 여년 전의 水兵時節의 記憶

들을 만나며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이곳 충무에서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을 참배하고 작은 함정을 타고

모함으로 귀대 하던 중 갑짝스런 돌풍을 만나 전복하여 유명(幽明)을 달리한 해군 159기 159명의 영혼

들의 명복을 마음 속으로 빌었다.  (당시 나는 함대사령부  군종병으로 장례행사 요원이였다.)

 

갑짜기 나리는 비를 피해 일찍 찾아 간 미륵도 彌來寺.편백나무 숲과 정원이 아름답게 잘 꾸며져 있었다

편백 나무 숲 속으로 산책 길를 따라 가노라면 한산섬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미륵 부처님을 만나게된다

 

 ""세상의 모든일에 부딪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

   슬픔없이 티끌없이 안온한 것 이것이야 말로 더 없는 행복이네""

 

도착하여 이곳 저곳을 둘러 오았는데...금강산 양봉래에 계셨다는 도인 석두스님의 비문이 있었다 

석두 스님은 효봉스님의 스승 이시며  전해 오는 일화가 있는데...

일제 강점기에 해인사 주지로 있는 이회광(李晦光, 1862-1933) 스님 과의 이야기다.

그는 친일을 대표하는 인물,1910년 무렵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이회광 스님이 법문을 하는 날이다. 
위풍당당하게 법상에 올라 구름 같이 모인 사부대중 앞에서 사자후를 하였다.

“팔만 사천 법문이 다 이 산승의 입으로부터 나왔느니라.”
이때였다. 선방의 한 스님이 법상 앞에서 삼배를 올리고 법담을 청하였다.

“팔만 사천 법문이 다 스님의 입으로 나왔다면, 그럼 스님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한 말씀 일러 주십시오.” ..... 선문답을 한 스님이 바로 석두 스님이다.

효봉스님은 일본의 식민지 시절 한국 최초의 판사가 된 이찬형(李燦亨)으로 죄인에게 선고를 내렸다.
"사형!"  죄인은 독림운동을 위하여 투쟁하다 붙잡혀 법정에 선 독립투사였다.
사형을 선고하는 순간 이찬형은 독립투사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것을 보았다.

사형수의 눈에서 뿜어져 나온 분노와 연민과 멸시의 눈빛이 날카로운 창끝이 되어

그의 가슴을 깊게 찔러왔다.
한국 최초의 판사라는 영예를 안았지만,

시절의 인연 잘못 만난 이찬형은 결국 동족의 가슴에 못을 박고 만 것이었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지는 못할 망정 그는 독립투사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게

한 민족의 원흉이 되어버렸다. 사흘 동안 이찬형은 골방에 누워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사흘만에 일어난 이찬형은, 그 길로 방랑길에 들어섰다. 

집을 나설 때 입고 있던 양복을 팔아 허름한  한복 두 벌을 마련하였다.

그리고는 발길 닿는 대로 떠돌다가 엿장수가 되었다.

그는 '반성'이란 엿판을 메고 다니며 쩔렁쩔렁, 가위 소리로 '참회'를 노래하며 다니는 엿장수였다.
그렇게 떠돌기를 3년.  1925년 어느 날 이찬형은 금강산에 들어갔다.

그는 유점사에 들러 스님에게 부탁을 하였다.


"스님! 불법을 공부하고 싶습니다. 제 스승이 될만한 스님을 한 분 소개해 주십시오."
이찬형은 당시 '금강산 도인'으로 소문난 석두(石頭) 스님을 소개받았다.

그 스님은 신계사의 보운암이란 작은 암자에 머물고 있었다.
"어디서 왔는고?"   석두 스님이 물었다.

"유점사에서 왔습니다."  "몇 걸음에 왔는고?"

그러자 이찬형은 벌떡 일어나 스님이 머물고 있는 방을 한 바퀴 빙 돌고 나서 대답하였다.
"이렇게 왔습니다." 석두 스님은 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허허, 십 년 공부한 수좌보다 낫구만 그래." 

 그때부터 석두 스님의 제자가 되어 불법을 익혔다. 그가 바로 효봉(曉峰) 스님이다.

 

차담 하러 들어간 주지 스님의 방안  선반 위에 작은 초당을 만들어 부처님을 모셔 놓고 있었다  

또 효봉스님의 제자이신 구산 스님(조계총림 초대 방장)의 일화로는

어느날 구산 스님이 공양간에 나타나 구석구석 살피시는데 마침 수채 구멍에 밥티가 몇 알 떨어져

있었다. 구산 스님은 바늘을 꺼내더니 밥티를 하나하나 찍어 잡수시는 것이었다.

이후로 공양간 바닥에 밥티 흘리는 행자가 없었다 한다

 

안내문에 보면 1954년이라면... 6.25 전쟁이 끝나고 폐허가 된 이 강토 이 자리에 송광사 방장스님 

구산 스님께서 어른들 모시기 위해 여기에  토굴을 지어 셨다는 이야기.....

(편백나무 숲길 속을 150m 가면 언덕위레 미륵 부처님이 모셔져 있었다 한산도가 바로 눈 앞이다)  

미륵산 미래사에는 비가 부슬 부슬 내리고 있었다 

30 여년 전 학생 시절 부터 워낙 많이 들어온 유명한 효봉 스님의 일화를 기억하며 되 새기다 보니.

아~ 옛 큰 스님들의 구도 이야기야 말로 다음 來世에 오신다는 미륵 부처님의 법문 이 아닌가 싶었다.

 

투철한 구도자의 길을 걸어 오신 지금은 모두  떠나신  옛 어른들의 뒷 자리를 잇어가고 있는 우리 세대

는 그 시절 일제 강압기의 나라 잃은 설움과 조국 해방과 함께 찾아온 혼란과  동족간의 6.25 전쟁을 겪어

오신 그 시대 어르신들의 아픔과 어려움을 잊은체 너무 풍요한 호화와 사치 속에 살아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다음날 7/15일 아침 새벽  예불을 마치고 일출을  마중 하러  미륵불 앞으로 나선 법우님들)   

 

일출 직전의 앞바다 한산도 섬이 고요에서 조용히 일어나는것 같다...한산섬 하면 충무공 이야기가... 

아침 공양후 뱃길이 열려다는 반가운 소식으로 운영진 법명 법우는 부두로 달려갔고....

뱃시간 기다리는 한 시간 가량에 근처에 있는 용화사를 ?았다.......용화사 보광전...    

옛시절 용화사는 절이지만 동시에 해군 본부에 해당하는 수군통제영에서 만든 관림사찰이라고 한다.

 

하여 용화사의 승님들은 부처님를 모시면서..군인으로써 수군의 의무를 겸했으며  절간 자체가 수군의

막사로 사용 되였다 한다 .이렇게 충무는 이순신 장군과 수군의 이야기가 군데 군데 숨겨져 있다...

관음과 미륵과 용화사상..? 용화사를 둘러보고 배 시간을 마추어 부두로 나가 우리는 연화도로 떠났다.

 

연화는 는 무엇인가 불교를 뜻하는 연꽃으로 연화대는 부처님이 앉아 계시는 법 보리좌 이다.

그리고 보덕암이란 삼국유사에 전해오는 보덕 각시가 살던 보덕 굴로 관세음 보살이신 보덕각시와

관세음 보살을 친견을 갈구하던 회정스님의 사랑(?) 이야기 이다...

 

나는바다를 보면 늘 하늘 빛을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바다는 하늘의 얼굴을 담아 안고 있기 때문 이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해 보면서도 나는 늘 바다 위를 지나는 항해 같아 하늘도 바다를 닮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짙은 구름 속을 지날때는 앞이 보이지 않는 海雲의 안개속을 지나는 착각도 들고.....

 

 

학생시절 나는 절집에서 초발심자경문도 배우고 법화경의 "보문품"을 독경하며 정근으로" 관세음 보살"

을 많이 불러 보문품은 지금도 그의 외우고 있다. (그때 머리 깎고 출가 할 뻔 했는데....허허.)

 

누구나 그 젊은 시절에는 고뇌들이 많겠지만 나는 관세음보살을 간절히 많이 부르며 보낸것 같다.

이번 순례 때도 신법사님이 집전 하는 관음 정근 시간이 있었는데...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나중에 길을 걸으며 "일행지" 법우가 "관세음 보살" 부르는 목소리가 좋다며... 괜한 칭찬(?)을 하기에

쑥스럽게 웃으며..그래~소리도 목이 터져야 하는데... 한때 그런 적이 있었노라고 이야기 해 주었다.

그렇다 그렇게 간절히 부르고 부르다 보면 몸에 익어져 모르지만 듣는 이에게 그렇게 들리나 보다.

 

나는 한때 젊은시절의 고뇌를 회피 하려  대학3년 을 마치고 1972년 3월 해군에 지원 입대를 했었다.

3개월의 신병 훈련을 마치고 함대 예비대에서 근무지 발령을 대기하던 중 함대군종실의 "윤승훈"수병을

만나 그 윤수병의 별명이 목탁 이였고 이야기 등등 하다 보니 반야 심경 한번 외워 보라고 하여 외우니

대뜸 목탁 칠 줄 아나 하기에 예~했더니 다음날 군종과 사무실에서 법사님 같이 만나 뵙자고 하였다.

막 훈련소 마치고 나온 신병 이등병 시절 이야기이다 .

 

그때 만난 김수남 법사님은 몇 마디 물으시고.... 그래 그렇구나~!  하시며 인연이구나....

우선 해상 근무 하고나서 윤수병 제대하면 후임으로 같이 일 하자고 하셨다.

그리고 나는 해상근무 첫발을 해군 6전단 전탐 기지 지원 요원으로 발령을 받고 동기생 12명과 함께

수리함인 R-1 함을 타고 백령도,연평도 대청도,어청도 등등 서해안에서 제주도 추자도까지 갔었다. 

 

김법사님은 송광사스님으로 동국대를 졸업하셨고 육군 사병으로 제대하고  다시 해군 군종장교로 입대

해군과 해병대에서 포교할동 하시던 중 과로로  순직 하시어 지금은 국립묘지에 계신다._()_

 연화도 연화사 일주문

1973년 나는 해군수병으로 함대에서 해난구조선 도봉함 승조원으로 사관실 당번 병 시절의 일이다   

도봉함은 해난 구조선으로 정식 명칭은 대양 보조 예인함(曳引艦, tugboat) ATA-3로 다른 함정과는 달리

특수 임무를 수행하는 군함으로 UDT,UDD와 더불어 해군의 특수부대인 심해 잠수(深海 潛水) 부대원

인 SSU (SHIP SALVAGE UNIT)대원 10여명이 함께 승조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전에 TV 뉴스로 보았지만 신안 앞바다에서 그 유명한 청자 등 보물을 인양 하던 그 군함이다.

 

도봉함은 침몰한 배는 건져내고 또 상륙 작전중 해안 뻘이나 모래 자갈 또는 암초 등에 얹혀 오도 가도

못하는 조난선을 구조 해내는 특수 임무의 배로 당시에는 해군에는 ATA-2와 우리배 2척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해군 앵카(닻)중 가장 큰 앵카인 해난구조용 앵카(약1톤 무게의 SALVAGE ANCHOR)가

함미(艦尾)에 CHAIN에 묶여 고정되여 싣어져 있다.

 

평상시 과업은 동해로 서해로 출동 나가는 戰艦들의 함포사격 훈련을 위해 목표물인 TARGET를 끌고

해상 사격 훈련장 인 형제도 부근으로 나아가 낮 부터 밤 야간까지 사격 훈련을 돕는 군함 이다.

우리가 끌고 가는 타켓트를 향해 전함들이 불을 뿜는다 .전술학교에서 나온 감사관 들이 점수도 매기고

그런데 야간 사격시에는 정말 장관이다....

바다 밤하늘 예광탄(曳光彈)으로 밝히고 각종 예광탄 들이 우렁찬 소리를 내며 터져 나오는데 불꽃놀이

처럼  포탄들은 물속으로 바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다 표면에서 반사되여 통~ 통 튕기면서  물 위을

예쁜 불빛으로 ? 번이나 튕겨저 나간다. 마치 강가에서 돌 팔매질로 돌 튕기기 놀이 하는 것 처럼....

 

야간 훈련을 마치고 거제도를 지나  진행항으로 귀향시에 해군 사관 학교 언덕 위 호국사 절 에서

비추이는 불빛을 보면서 김법사님 약속으로  근무하게 될 곳이므로 마음을 설래이기도 했었다.

 

당시 해군 사관학교 호국사 법당/ 계단식 의자로 불단에는 관세음 보살 입상 만 모셔져 있었다

73년 5월 초 우리배 도봉함은 맑은 하늘과 호수같이 잔잔한 진해만을 출항 미끌어 지듯이 빠져 나갔다 

당시 임무는 육군의 바지선 두척을 끌고 인천항으로 가는 것으로 육군의 보안대 요원 2명도 함께 승선.

작은 군함 으로 함장님 소령 안병태(해군 20대 참모총장 역임)총각 이셨고 부장님 (박 대위)도 총각으로

결혼 하신다고 휴가로 下船 하셨고 대신에 함대에서 항해사 장교님 두분이 파견으로 타셨다.

작전관 김중위 포술장 특교대 출신의 장교도 총각..6,25 참전 하신 갑판사관님과 기관장만 기혼이셨네...

육상에 정박해 있을대는 총각 장교님들 모두 아침식사 배에 출근해 해결 하시는라 또 모두 열정의 젊은

총각 장교로 지난 밤 과음에 속 쓰리다 하여 당시에 아침 라면  많이 끓여 드렸는데...모두 어디 계실까?

 

작전관은 종종 야~ 임마~임수병 너  군대만 아니면 우리 친구 되는 건데 하면...농담도 많이 하다가..

정말 어느날 시집간 큰 누님이 대구 산부인과 의사라며 누나집 간다 하여 같이 대구 외박 가자 하여

함께 나와 진해역에서 군용 열차 타고 삼랑진에서 표도 없이 특급 열차타고 동대구역에 내려 튀어~하며

개찰구 아닌 다른 곳으로 튀어 나온 기억 새롭내요 아~기억나네요 김상옥 중위님이네요 ㅎㅎㅎ

 

내가 처음 우리배에 부임해 왔을때 상병 고참이신 송수병이 당번으로 있었고 동기생 우종술(?) 수병이

함대 취사병으로 있었는데 수병 병과의 최 말단이 취사병 하는게 일반적이고 하사관은 병과가 따로있다.

동기생이라 둘이서 군대 생활 푸념도하고 절친 했었다 , 부산 기장에서 일반 어선 탈때 화장  했다한다

화장이란 요리사로 뱃사람들은 화장(火匠?)이라 한다하며 제대하고 요리사로 외항선 타려고 해군 입대

했다고,이 친구 함께 있을때 웃지 못할 재미나는 일화도 많다...ㅎㅎ 생각하니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다음날 항해는 아마 목포 쪽을 지나 흑산도 부근 어디를 지날때 쯤 배는 로링과 피칭으로 많이 흔들렸다.

로링은 배가 좌우로 흔들리는 것이고 핏칭은 배가 파도를 타고 올라갔다 내려 갔다 하는 것이다.

점심 식사후 하늘과 바다는 점점 거칠어져 갔다  "각부서 황천(荒天:비바람이 심한 날씨)준비" 명령이다

움직여 떨어지거나 열리는 문,서랍장 등을 로프 줄로 묶어 두는 작업이다.

 

식당의 각 그릇 등도 넣어두는 함이 육상과는 다르다 식기함(函)은 위로 해서 아래로 넣고 중간부위 는

터져 그릇을 잡은 손은 상하로 움직일수 있도록 되여 있다 .

 사관실의 식탁은 자리가 정해져 있다 함장님의 자리는 사령관이 방문 해 와도 내어주지 않는다.

그리고 함장님의 식기및 숟가락 포커등 모두 은 제품으로 예술품 처럼 예쁜 조각들이 세공 되여있다.

(모두 미군에서 인수시 받은 그대로이다/ 당시는 모두 미군함 폐함?을 인수 수리해 사용하든 시절이다)

 

식사 시간에 국 그릇도 절반 이하로 담아둔다 배가 크게 요동치면 그릇도 움직 이지만 그릇이야 식탁보

위에 두면 미끄러 지지 않지만 국그릇 속에는 파도가 일어 요동을 쳐 국이 넘치기 때문이다...

물론 사병식당에는 탁자에는 식타보가 없어 움켜지고 식사를 해야하는 경우도 있다 .

 

벌써 육군에서 오신 손님들은 침실에서 꼼짝 하지도 않고 배멀미에 고통 스러워 내내 누워 있었다.

당직 요원들 외에는 모두들 꼼짝하지 않는 상태 ....

그래도 뱃전에 부디치는 파도로 배는 뒤뚱거리고 여기저기 쿵 쿵 하는 소리들이 둔탁하게 들리기도하고

밖같 하늘은 어두워지고 폭풍의 바다로 험상 해지고 있었다.

 

아~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함미에서 300야드(yd)거리에서 빵방하게 끌려오든 바지선들이 험난한

파도에 밀려 타고 오면서 느슨해 지기도하고 때로는 파도에 밀려 3인치 와이어(wire)Rope가 당겨지면서

끊어질듯이 탕~탕~소리를 내고 배는 로링(Rolling)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배의 통로인 햇치 문을 열라치면 손으로 제어 하기도 힘들어 지면서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내가 커피 포트에 뜨거운 물로 커피를 준비해 간신히 올라간 마스터 함교에는 로링 게이지가 좌우 진폭

이 거의 좌우 각 각 90도에 까가운 진폭 180도 가까웠다.  

(제주도 산방산 밑에서 상륙함(LSM) 구조작전 마치고 한가한 시간에 도봉함의 함수 뱃머리에서

뒤편 왼쪽 작전부 통신의 全하사 -고등학교 동기생이다/다음이 선임 당번 송수병 그리고 나....) 

 

함교에서 내려오며 사관실앞 통신실을 문 열고 보니 고등학교 동기생인  全하사는 책상을 잡고 쓰레기통

을 양발로 껴 안고 고개를 숙인체 계속해서 구토을 하고 있었고 바닥에는 보통 때는 보이지도 않든 천장

전기및 통신 배선 라인 위에 숨어 살던 쥐 새끼가 배 멀미로 떨어져 나와 로링에 따라 좌우로  때굴 때굴

구르고 있었다.

허기야 배가 침몰 하려면 쥐 새끼들이 먼저 알고 호줄 타고 부두에서 내린다는 이야기도 있읍니다.

또 배가 부두에 계류하면 각 호줄에는 쥐마게를 답니다. 쥐가 배에 못 오르게요 ㅎㅎㅎ.

 

처음 근무지인 6전단 전탐기지 소속으로 서해안 각 섬들을  지원 다닐 때 전단 사령부  군견 훈육대

에서 훈련된 軍犬을 각 섬 기지 마다  배치 한적이 있는데 그때 보니 훈련된 군견이라도 며칠씩 군함타고

가니 멀미에 힘못쓰고 혀 바닥 내밀고 축 처지는 것을 보았읍니다 만 배에 타고 있던 작은 쥐 새끼가

구르는 것은 처음 보았지요 .평소에는 보이지 않는데.

 

바깥 사정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나는 수시로 함교로 뛰어가 사정 보고도 했었다.

어쩌면 당직병도 아닌 수병이 함교로 마음데로 갈수 있었던 것은 함교는 사관실 바로 위이고 또한 내가

당번병 이기 때문이다.

 

바지선을 견인하는 3 인치 와이어 로프는 함미 쪽의 살베지 앵카의 양귀의 한 가운데 오목한 부분을 지나

바지선쪽으로 늘어져 있었는데 와이어로프는 파도에 늘어졌다 당겼다 하며 앵카를 치게 되고 로링으로

앵커는 자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앵커를 묶어둔 한 쪽 체인이 끊어 지면서 묶여져 있는 다른 한 쪽을

그 축으로 해서 거대한 살베지 앵커는 갑판 위를 로링의 힘에 의해 반원을 그리며 무차별로 함미 잠수창

고(잠수 장비를 넣어둔 곳)와 배의 좌 우현의 벽면을 치고 난장판 이였다

설상가상으로 함미의 육중한 살베이지 엥카 자리 밑에 함미의 타기를 움직이든 체인을 보호하는 보호구

라인도 육중한 살베이지의 요동에 휘여져 그속의 체인도 움직이지 않게되여 배는 타기 고장으로 방향을

잡을 수 없게 되였고 파도에 밀린 바지선은 우리배 측면 까지 와 덮칠 것 같은 상황도 일어나고 타기가 고장난 배는 방향을 못잡고 파도와 조류에 밀려  방향이 잡히면 그때야 엔진 풀(ENGINE FULL)로 하여

앞으로 내닿고 방향이 다시 파도에 틀어지면 "엔진 스톱" 하길  여러차례 타기란 방향을 잡아주는 것인데

그것이 고장나 방향을 잡지 못하고 추풍 낙엽처럼 파도에 이리저리 밀리고 있었다.

   

함장님의 명령에 따라 바지선을 끌고 있던 3인친 외이어 로프는 함에 비치된 비상용 도끼로 간신히  절단

되고 바지선은 태평양 바다로 둥둥 혼자 떠다니게 되여 우리배에서 멀어지고 바지선이 덮칠 위험은 피했

지만 우리는 또"투묘 요원"으로 배치되여  함수창고로 달려도 가서 앵카 체인이 잘 풀리도록 작업도 하고

갑판 위에서는 함수 앵카로 정박 투묘도 하게 되는데 좌우현의 양쪽 앵카를 투묘 하기는 처음 이였다.

 

간신히 배는 양 앵카의 체인에 의지해 위치 확보 하고 있었으나 결국은 밤새 내리는 비바람과 돌풍의

거대한 파도에 한쪽 앵카 체인이 떨어져 나가 배는 다시 파도에 몰려 뱅뱅 돌고 있었고 이미 함미의 잠수

창고와 마실수 있는 깨끗한 물을 담아 두는 청수(淸水)탱크의 뚜껑 헷지도 떨어져나가 물 탱크에는 바다

물이 들어 가고 잠수 창고는 잠수 장비인 슈트와 잠수용 산소 실린더등 장비가 떠올라 파도에 떠 흡쓸려

나가고 난장판이였다.

잠수창고옆 격실이 발전기 격실로 수압으로 잠수창고가 깨어진다면 기관실의 발전기도 끝장 이였다

잠시 파도가 잠잠해 진 틈을 이용해 함내 총원 잠수창고 물 퍼내기를 했는데 펌프 P-300,P500등 작업자

로 배치되여  물 펌프 시동을 걸어지만 어찌된 셈인지 비친된 이동식 펌퍼들은 모두 작동되지 않고 모두

는 손에 손에 5가론 페인 빈통으로 릴레이로  물을 퍼내고 하편 인력 요원 배치되여 쇠 파이프및 나무

작대기로 함미 타기를 대원들이 직접 배치되여 일력타 로 제어도 해 보고 온 몸은 비와 파도에 흠뻑 적셔

져 있었다. 긴급한 상황은 지나고 젖은 몸으로 돌아와 사관실 문에 기대니 가족과 침구들 그리운 얼굴들

정말 영화의 필름 처럼 지나갔다. 어쩌면 모두 침몰 할 런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고 나는 나도 모르게

관음경인  보문품의 한귀절을 외고 있었다...

假使黑風이吹其船舫하여飄墮羅刹鬼國이라도 其中에 若有乃至一人이라도

稱 觀世音菩薩名者면 是諸人等이 皆得解脫羅刹之難 하나니 以是因緣으로

名-觀世音이니라....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천수경의 原典 격인 "천수천안 관세음보살 광대원만 무애대비심 다라니경"을

줄여서 '대비심 다라니경","관음경" 천수경" 이라하며 唐 西 天竺 沙門  가범달마 (伽梵達磨)가 번역

하였으며 이 경의 첫 줄은 이렇게 시작 되고있다 

 如是我聞. 一時  釋迦牟尼佛. 在 補陀落迦山. 觀世音宮殿 . 寶莊嚴道場中......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타낙가산에 있는 보배로장엄된 관세음궁전에 계실때).....

관세음 보살은 일체 모든 고난에서 빠져있는 모든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서원의 이야기다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근본도량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 항상 위험에 처 할수 있는 뱃사람들이 많은 곳이기 때문이리라 생각이 든다. 

 

인도에서는 남쪽 해안의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이 관세음보살의 상주처이며,

중국은 주산열도(舟山列島) 보타도(補陀島)의 조음동(潮音洞)이 관음성지이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 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남해-보리암, 서해 강화-보문사, 동해는 낙산사-홍련암,등과

여수의 향일암 등이 모두 바닷가에 있다, 연화도 보덕암도 바로 바닷가 섬이아닌가.....

연화도 보덕암 관세음 보살을 찾아가는 순례길 ........

기억은 30여년 전의 해군시절 도봉함 승조원 당시 전우들과 조난 당한 때를 기억하지 않으 수 없었다. 

정말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추억의 영화 처럼 생생한 기억으로 다시 떠 오른다. 

  바다에서 바라본 연화도 보덕암 

 

고래등 같은 아닌 산(山)같은 파도 속에 배는 쑤~욱 떠오르고 다시 푹~내려도 가고 비 바람에  철새인지

갈매기인지 날아오르다 바람에 날리고 다시 마스터에 앉고 다시 바람에 날리고 어둠속에 비추이는 작업

등 불빛 속으로 빗줄기가 휘익 날리고 먼 발치 어둠속에는 우리를 구조 하러 온 큰 구축함 들도 옆에 와

있었고 초계함 순천함도 보이고  그제서야 다소 안심이 되였지만 거친 파도로 접근은 할 수 없어 지켜 보

고만 있었다. 그리고 피로에 겹친 나는 사관실에서 의자에 기대어 쓰러졌 버렸고..... 

 

그리고 일어나 보니 날이 밝아 우리배는 초계함인 순천함에 예인되여 해금강을 지나고 있었다

나는 갑판위로 나가 젖은 옷을 모두 벗어 제친 팬티 바람으로 갑판에 벌렁 누워 버렸다...

하늘에서 비추이고 있는 따스한 햇살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마운 것 인지 그때야 알게 되였고 또 바다의

갯 냄새와 허공의 하늘을 바람에 가르고 있는 먹구름 들이 지나는 것을 보며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

그저  고마운 일이고 감사 하기 만 했다.

 

당시 파견된 항해사 장교로 부터  당번병~ 멀미도 않고 네가 제일 용감 하더구나~ 영원한 뱃놈이야

말둑 박아라~ 하는 칭찬(?)도 들었지만 그사건으로 해서 함장님은 저를 잊지 않으시고 참모 총장이되여

취임 하시여 지나온 세월을 회고하는 월간잡지에 인터뷰에서  나의 이야기도 남기시고 전우로 해군본부

로 초청도 해주시고 하는 인연이 되였다.

   

상황이 끝나고 진해만 외항에 정박하여 알고보니 당시에 피항 명령이 함대 본부에서 암호 전문으로 보내

왔는데 암호를 푸는 기암사가 멀미로 암호해독을 늦추어 피항하지 못했고 또 작전관이나 함장님의 결제

없이 퇴함 침몰 중.... 구조 요청을 한 통신사들도 모두 처벌도 받았고 잃어버린 장비에 대한 손망실 보고

도 하고 그 후로는 각 함포및 장비에는" 이 장비의금액은 **입니다 

갈고 딱아 내 몸같이 아껴쓰자" 하는 문귀를 적어두게되였다.

 

그때에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 일로 해서 3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저를 불러 주시는 총장님이 되신

함장님과의 인연을 돌아봐도 어찌 관세음 보살님의 가피가 아니랴...

나무관세음보살,나무관세음보살,구고구난 대자대비 나무관세음보살~_()_   

 

 ◆용바위가 보이는보덕암의 백의 관음 용바위가 보이는 언덕이니 海龍을 타고 있다고나...

 

금강산 만폭등의 관음기도 도량으로 유명한 보덕굴의 회정스님과 보덕 각시 이야기....

이러한 관음성지 기도 도량에는 영험한 설화들을 간직하고 있다.

 보덕암에서 바라본 바다  멀리 용바위 가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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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07.26 11:43

    첫댓글 역사와 일화와 교훈과 감동이 있는 후기 이네요.... 저도 요즘 법화경보고 있는데 제게 많은 자극이 되는 후기 잘보고 갑니다.. ()...

  • 작성자 07.07.26 12:52

    관음 보살님의 가피가 늘 함께 하시길...._()_....

  • 07.07.26 15:21

    담주면 뵙겠네요.^^ 늘 좋은글과 귀한자료 감사히 잘보있습니다...

  • 작성자 07.07.26 17:25

    건강하시고 잘 계시지요...다음주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 07.07.26 16:47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 작성자 07.07.26 17:27

    좋은 기회 만들어 주셔 고맙고요....어제는 엄궁 Lotte 마트앞에서 그대 생각 했다오...

  • 07.07.26 22:58

    통영출신 저 보다도 만이 아시네요..감사합니다.다음에 통영에서 한번만나서 장어구이에 더득주 한잔 하입시다. 늘 건강 하세요..

  • 07.07.27 03:26

    조은글 감사합니다....()...

  • 07.07.27 09:07

    앗.. 좋은 영화 한편 본 것 같습니다.. 젊으셨을 때도 역쉬!~ 완소남 이셨군요~ ^________________^

  • 07.07.27 15:46

    잘 봣습니다 마음에 고요한 감동이.... 감사합니다

  • 07.07.27 16:15

    뜬구름님 정말 대단하신 것 같군요 글을 많이 올리시고 사이사이 사진도 넣으시고 잘 보았습니다,,, 순례때 시간이 더 있었더라면 저도 보덕암에 대한 유례를 법우들에게 이야기해 주고 싶었는데 아쉬웠습니다.... 건강 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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