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는다 / 홍수연
이 도시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는, 길치에다 심각한 공간 인식 장애자다.
북구청에서 민원서류를 발급받아야 할 일이 생겼다. 네이버 길 찾기에 ‘북구청’을 물어보았다. ‘남산정역’ 방향 도시 철도를 타고 ‘구포역’에서 하차하라고 알려 준다. 구포역은 내가 사는 곳에서 네 정거장만 가면 된다.
구포역에 내렸다. 출구를 모르겠다. 사람들을 따라서 역사驛舍를 빠져나왔다. 감으로 그냥 걷는다. 가을이었고 하늘은 쾌청하였으며, 사람들의 발걸음 또한 남녀노소 구분 없이 가볍고 경쾌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산책로로 접어들었다. 가을꽃들 환하게 피어있고, 오늘따라 나무들도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다. 모르는 길이었지만, 나도 무엇이 신났는지 하얀색 운동화가 재바르다. 산책길 모퉁이에서 어르신들이 운동기구에 올라타 허리를 좌우로 돌리기도 하고, 거꾸로 매달리기도 한다. 어디를 가든 운동할 수 있는 소도구들이 갖추어져 있는 우리나라 산책길과 소공원, 이것 하나만은 칭찬하고 싶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가면 온 세상 어린이들 다 만나고 오겠네” 라던 동요가 생각난다. 동요의 제목대로 무조건 <앞으로>만 나아갈 일은 아니었다. 모를 때는 물어보아야지. 마침 앞서 걷고 있던, 하얀색 긴 팔 티셔츠에 꽉 끼는 검정 스키니 진을 입고 검정 백 팩을 멘, 스포티한 차림의 긴 머리 젊은 여성에게 ‘북구청’가는 길을 물었다. 다행히 상세하게 알려주는 것이 아닌가. 한 달 전인가 서면 대로변에서 젊은 여성에게 길을 물었을 때, 무슨 빚쟁이 취급하며 대꾸조차 없이 지나쳐버리거나, 어떤 여성은 몹쓸 파리를 내쫓기라도 하듯 한쪽 손을 탈탈 털기도 하였다. 오늘은 운이 좋았다. 날씨가 좋고 아름다운 산책길이라는 이야기도 나누었다.
북구청이다. 묻기 대장인 내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이렇게 묻기가 생활화된 탓은 내가 세상살이에 허술한 탓도 있지만, 무엇이든 확실하게 일처리를 마치자는 나의 귀여운 완벽성에 기인한다. 어수룩한 나를 믿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입구에 앉은 도우미 여성에게 번호표 뽑는 곳부터 시작하여 민원처리기에서 내가 출력한 서류의 이름까지 재확인하고 나서야, 다시 산책로로 접어들 수 있었다.
산책로 한 귀퉁이에 서 있는 동글동글한 무궁화에게 인사를 건넨다. 무궁화에게 현생은 살만한지 물어본다.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그것을 아느냐고 묻고 싶은 것을 참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어딘가에 투자한 자금을 사기당하고 쓰라린 가슴에 못 마시는 소주를 들이붓기도 하였고, 때로는 교활한 친구의 계략에 빠져 직장에서 곤란을 겪기도 했다. 때로는 가족과의 불화로, 때로는 힘든 투병 생활로 미래가 보이지 않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조금은 심심한 듯하고 지루한 일상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시간이었는지를…. 그런 막막한 날엔 어디선가 들려오는 귀뚜리에게도 길을 묻고 싶었다. 휘영청 밝은 달빛을 난사하는 달에게도 묻고 싶었다. 세 살 어린아이라도 붙잡고 나의 억울함을 묻고 싶었다.
여전히 나는 묻는다. 나에게 묻고 또 묻고, 세상에게 묻고 또 묻는다. 모든 문학의 출발점이 ‘묻기’라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나의 물음은 권장되어야 마땅하고 더 확장되어야 할 ‘물음’이다.
문장부호 물음표(?)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지려고 하자, 몸의 중심이 한쪽으로 쓰려지려 하자, 아래의 작은, 하지만 결코 작지 않은, 묵직한 마침표 같은 점이 허리를 곧추세워 바로 서게 한다.
묻는 행위는 바르게 알겠다는 의지다. 세상을 허투루 살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바람에 자꾸만 휘어지는 모가지에게 중심을 찾아주겠다는 결심이자 자신에게 건네는 위로이다. 내가 잘 살고 있다는, 내가 길을 잘 찾아가고 있다는, 향후 어떤 길이 펼쳐지던 내 선택에 책임을 지겠다는, 갈팡질팡 더 이상 헤매지 않겠다는 엄중한 자아 성찰이자 혹독한 자아비판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 옆자리에 앉은 어르신께서 길을 묻는다. 역사驛舍를 지나치기 전, 얼른 어르신을 일으켜 세운다.
“다음, ‘신평’역에서 내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