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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지금 여기 있습니다
- 이향아
1
나는 이 시간 나에게 응답해 준 이 시대와 내 나라에 감사한다. 사랑하는 내 이웃과 친구와 가족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하나님이야 하나님이니까 감히 세상과 함부로 섞어서 말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끊임없이 부르짖는 내 청원과 소원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내가 요청하는 것 중에는 응답하기 어려운 것도 있었을 것이며, 분수에 맞지 않은 것도 있었을 것이다. 도저히 들어줄 수 없을 만큼 난처한 것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가당치 않다고 고개 젓지 않았다. 무작정 매달리는 나를 오히려 측은하게 여기면서 용기를 주었다.
부득이 내 부름에 응답해 주지 못할 때에도, 내가 장차 걸어가야 할 길을 일러주면서 갖추어야 비품과 지녀야 할 도구들을 챙겨주었다.
“주저앉지 말고 힘을 내! 잘 될 거야.”
“지금처럼만 하면 돼. 너는 할 수 있어.”
얼마나 고마운 말인가? 그들의 응원을 나는 믿었다.
그중에서도 1980년대는 내게 특별한 연대다.
소설적 구성으로 본다면 갈등에서 절정으로 옮겨지는 부분이라고 할까? 흐르다가 지체되기도 하고 숨을 고르느라 젖혀두기도 했던 내 청원이 잠겼던 문을 열기 시작한 1980년대.
내가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한 것은 1981년 8월이었다.
“집에서 애들이나 기르지 이제야 무슨 대학원이냐”고, 입학할 때부터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낸 대학동기도 있었다. 그의 말처럼 집에서 애들이나 기르지 왜 대학원에 입학하고 싶었을까, 마치 무엇에 홀린 듯이 갑자기 저지른 일이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이유가 없진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1979년 5월 25일이었다. 경희대학교 총장 조영식 박사님은 매년 모교 출신 작가들을 위하여 출판기념회를 열었는데 그게 1979년 5월 그날이었다.
그날 국문과 선배 K씨가 내게 자기 명함을 내밀었다. 그가 어느새 조교수가 되어 있다는 걸 명함을 읽고서야 알았다. K는 재학시절 내게 친근한 포즈를 몇 번 표현했었고, 나는 한창 건방져 있었다. 도대체 그동안 나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명함을 들여다보면서 참담하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진학을 결심하였다. 대학원 입학시험은 7월 4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석사학위를 받은 지 한 학기 후, 박사과정 입학공부를 하고 있는 동안 광주의 호남대학교 전임강사가 되었다. 응답할 자가 진작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기다리고 있는데 내가 오히려 게으름을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나보다 1년 앞서 광주 조선대학교로 가 있었다. 그는 무작정 신설된 지 몇 년 되지 않은 호남대학교의 이사장을 찾아가서 나를 천거하였다고 했다.
“여자 교수가 학생들의 데모를 막을 수가 있겠습니까?”
“학생의 시위는 물리적으로 막는 게 아니고, 정서적인 설득과 감화가 필요하지요.”
“국문학과 교수는 강의 외에도 학교신문이며 교지며 할 일이 많은데 그런 어려운 일들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일이라면 이 사람이 어느 누구보다도 적임자입니다. 이 사람을 들여놓으시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학교홍보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고요.”
훗날 들은 얘기다. 아무런 방비도 없이 맨얼굴로 자기체면 같은 것은 생각지도 않 고 아내를 앞세우는 그를 보고 호남대학교 이사장이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저런 사람을 우리 대학으로 데려오면 좋겠다, 마음이 동했다고도 했다.
호남대학교 이사장은 여덟 명의 지원자 중에서 유일하게 여성인 나를 선택하였다. 그때까지 나는 대학 강단에는 시간강사 한 시간도 서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사장은 그동안 펴낸 저서만 한 보따리 안고 그것이 유일한 힘인 듯이 당돌하게 요청한 나를 의심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편은 지금도 “당신을 대학교수로 세워놓은 사람은 나야. 그런 줄이나 알고 계셔.” 입버릇처럼 말한다.
당시 경희대학교 국문학과 학과장이셨던 서정범 선생님께 대학으로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을 때 선생님은 수화기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이향아 만세” 를 외치셨다. 아, 이것은 만세를 부를 만큼 큰일이구나.
2
1981년 나는 서울영등포여자고등학교에 있었다. 이른 아침 만원버스를 타고 중간에 다시 갈아타고 한강을 건너야 했다. 비라도 오는 날이면 골목길 진흙수렁에 발목까지 빠졌다. “아침 여덟 시 살아서 간다/강까지 건너면서 살려고 기를 쓴다(<도강 渡江>)”고 중얼거렸던 것은 다른 길을 열어달라는 다급한 요청이었을 것이다. 나는 늘 떨어진 그곳이 내 땅인 줄 알았을 뿐, 투정이나 까탈을 부리지 않았었다. 그런데 왜 쉽게 순응할 수 없었을까?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영등포여고로 오기 몇 달 전에,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명문인 공립K여자고등학교 교감의 프러포즈를 받았었다.
“이향아 선생님이십니까? 새 학기에 전출하시게 되지요? 저희학교에는 선생님 같으신 분이 꼭 필요합니다.”
“영광입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공립학교라서 5년마다 전출이 되는데 이듬해 3월이면 어디로곤 옮기게 되어있었고, K여고 교감의 친절한 전화까지 받았으므로 나는 한 가지 숙제가 해결된 듯이 우쭐하였다. 가만히 기다리고만 있어도 K여고가 알아서 나를 불러줄 것이 아닌가. 그러나 결과는 엉뚱하였다. 동료들은 나를 바보라고 놀렸다.
“K여고 교감이 그런 말을 왜 했겠어? 이 선생이 찾아와서 인사를 하라는 말이었는데 그걸 모르다니….”
나는 지금도 바보 같은 나를 나무라고 싶지 않다.
나의 요청은 꼭 1년 후 “서울을 떠나라”, “서울을 떠나 대학으로 가거라.”는 응답으로 왔다. 응답은 지엄하여 명령과 같았고, 나는 1982년 3월이 되기 전에 서울을 떠났다. 돌이켜 생각하면 서울을 떠남으로 잃어버리는 것들이 많고 영영 포기해야 할 것도 적지 않다는 걸 당시에는 몰랐다. 나는 선택받았다고만 생각하였고 이러한 혜택은 놀라운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2학년, 고등학교 1학년. 세 아이들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있었다.
“내 딸이 대학교수가 되었네. 가거라, 얼마든지 걱정 말고 가거라.”
아이들을 친정어머니께 맡겨놓고 내외 둘이서만 멀리 떨어져 살겠다고 한 것은 얼마나 용감하고 무모한 짓이었는지, 얼마나 불효막심한 일이었는지. 결손가정이라는 말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하였다. 나는 마치 외간남자와 눈이 맞아서 자식들 셋을 미련 없이 떼어놓고 멀리 숨어서 딴살림을 차린 것 같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어머니는 아이들 공부에 방해가 된다며 TV를 과감히 철거하시고 독서를 하셨다. 임어당의 <마른 잎은 굴러도 대지는 살아있다>, 펄벅의 <대지>, 미우라 아야꼬의 <빙점>, 토마스 하디의 <테스> 등 많은 소설을 읽으셨다. 주인공의 이름이 어려우면 노트에 따로 적기까지 하셨다.
“내가 저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랐구나.” 나는 내 어머니의 딸인 것이 자랑스러웠다.
그보다 2년 전인 1980년 1월부터 신달자, 유안진 두 시인과 더불어 <문채 文彩>라는 시동인을 결성했었다. 문채는 1년에 두 번씩 동인지를 발간하면서 한국 문학사에 무엇인가 남기자고 다짐했다. 우리는 치열한 열정을 경주했고 동인지 외에 수필집도 여러 번 내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 그만두자는 확실한 선언도 없이 20년도 지속하지 못하고 시들해졌다. 그 책임의 일부를 나도 당연히 짊어져야 할 것이다.
3
목요일 밤이나 금요일이면 어김없이 서울행 고속버스를 탔다. 어떻게 매주 서울-광주를 오르내리세요? 얼마나 피곤하세요? 남들이 자주 물었다. 그때마다 나는 정말로 못 견디겠다는 듯이 죽는 시늉을 했지만 속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피곤이라니, 어쩌다가 부득이 서울에 가지 못하는 주말이면 오히려 온갖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몰려와 자리에 눕고 싶었다.
서울 사람들은 내게 광주 소식을 묻고 광주 사람들은 내게 서울 소식을 물었지만 나는 아는 것이 없었다.
“서울도 모르고 광주도 몰라요. 고속도로에 대해 물어보세요. 요즘은 오동꽃이 만발했어요.”
서울에 오면 아이들 먹을거리 챙기고 세금이며 공과금이며 낼 것 내고 경희대학교 박사과정 수업을 들으면서 교양국어 한 강좌 맡아서 강의를 하고, 그러면 2박 3일이 훌러덩 가버렸다. 나의 일주일은 7일이 아니라 4일이었다.
그래도 그 기간에 가장 많은 글을 썼다. 저서 발간을 연대별로 분류하면 80년대에 가장 많은 출간을 했을 것이다. 흔히 바쁘면 글을 쓸 수 없다고 하지만 내 경험으로는 그렇지 않다. 박사과정을 하면서 건조한 논문 속에 파묻혀 있을 때, 문득 호소력이 있는 가요 한 곡조만 스쳐 지나가도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논문은 꼭 써야 한다는 필요에 의해 썼지만, 시나 수필은 말이 그리워서 썼다. 거기에도 관성이란 것이 있는지 논문이건 창작이건 자꾸 쓰다 보니 오히려 글이 순조롭게 써졌다.
바쁘게 오가는 동안 초등학교 6학년이던 막내 셋째도 고등학교 학생이 되었지만 그는 부모가 없는 그 긴 시간들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의 방에 올라가보면 수학이나 영어 참고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제 어미의 시집이나 수필집이 놓여 있곤 하였다.
“이 녀석아! 너 정신이 있는 거야? 넌 대한민국의 고3이야!”
나무라고 설득을 하고 책을 감추어도 그는 다음 주에도 여전히 이향아의 독실한 애독자가 되어 있었다. 내 글이 좋아서 읽은 것이 아닐 것이다. 어미의 냄새를 찾아 읽었을 것이다. 그 애는 “왜 엄마는 베스트셀러가 아니어요?” 몹시 불만이라는 듯이 묻기도 했다.
“나는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 것도, 훌륭한 교수가 되는 것도 원치 않아. 20년쯤 후에 누가 내게 당신은 무슨 작품을 썼느냐고 물으면 나는 너희들을 일렬횡대로 세워 놓고 이 아이들이 내 대표작입니다 말할 거야. 나는 너희들만 잘 자라면 돼.”
아이들도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였다.
우리 내외는 광주로 내려가기 전부터 가정예배를 보았었다. 내게 특별한 신앙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애들이 한참 자랄 때인데 아무리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도 그들을 제대로 감당할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가정예배란 하나님께 전송하는 SOS였다. 예배시간은 매일 밤 11시,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어른과 아이들, 다섯 가족이 하루에 한 사람씩 순서를 짜서 기도한 후, 성경 한 장을 돌아가며 읽었다. 그리고 각자의 하루를 이야기한 다음, 내일 할 일을 알리고 서로를 응원하였다. 그리고 주기도문을 암송하면 예배의 끝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가정예배는 우리가 서울을 떠난 후에도 그들끼리 이어졌다. 그러나 기다리지 못하고 졸다가 잠을 자는 녀석도 있고 흐지부지 빼먹는 날도 있는 모양이지만, 추궁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들인데 나무랄 일이 왜 없겠는가? 남들은 일주일 두고두고 가르칠 것을 단 이틀로 압축했으므로 농도가 진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광주로 내려오는 고속버스에서 창밖을 보는 척 얼굴을 돌리고 울었다.
“너는 지금 누구를 가르치러 가는 것이냐.”
“네 자식들은 팽개치고 어디를 가고 있느냐.”
서울을 떠나 있는 4반세기 동안 나는 문단의 행사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주말에야 귀가하여 다시 집을 비울 염치가 없었던 것이다.
4
1980년대 광주는 혼란스러웠다.
5.18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서 거리도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도 그 사람들이 끌고 가는 일들도 우울하였다. 쉽게 꺼내기 어려운 비밀이 있지만 그것을 함부로 누설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눌려 있는 표정들. 사람들이 입을 벌리기만 하면 너무 많은 말이 쏟아져 나올 것처럼 모두들 입을 봉하고 쉬쉬하였다.
광주로 오기 전 1980년 5월 서울에서였다. 교무실에서 여교사들끼리 모여 앉아 도시락을 막 펼치려고 할 때 교감선생님이 자기 책상에서 나를 불렀다. 내게 전화가 걸려왔던 것이다. 정말 그때만 해도 교무실 전화는 오로지 교감선생님 책상 위에 놓인 것, 그것 하나뿐이었다. 광주에 다니러 갔던 친지의 전화였다.
“언니, 여기는 전쟁이 일어난 것이나 다름없어. 나 무서워서 꼼짝할 수가 없어. 서울로 가야 하는데 갈 수나 있을는지 몰라.” 그는 떨고 있을 뿐, 살벌한 현장의 상황을 내게 제대로 전하지도 못했다.
통화를 끝내고 자리로 돌아온 내 얼굴이 굳어 있었나보다. 동료들이 연유를 물었고 나는 대강의 분위기를 전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했던 수학선생님이,
“그쪽 사람들은 왜 그렇게 불만이 많아?”
그는 늘 그랬듯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날의 그 조용한 목소리는 잔인하기 이를 데 없는 폭언으로 내 마음에 들어와 박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도 할 만한 말도 없었던 것이다.
학교에서는 계속 시위만 계속되었고 수업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교수들은 학생들 뒤에 진을 치고 서서 더 이상 그들이 희생이 되지 않기만 바랐다.
나는 다시 서울로 돌아오지 않고 광주에서 못 박혀 살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마치 그렇게 할 사람처럼 그 땅에 깊은 정을 묻었다. 광주 여성문학인회 <시누대>를 창설하고, YWCA에 문예창작반을 만들어 <가교 假橋>라는 이름을 붙였다. 호남대학교 평생교육원 문학반 <청미래>를 결성하고, 백제권 여성시인들로 <기픈시문학회>를 만들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시 동인인 <원탁시>에 참여하고 광주문인협회에도 가입하였다. 광주문학상도 받고, 전라남도 문화상도 받았다. 강사은행에 등록된 강사로서 도서지방과 산간벽지까지 강의 요청이 오면 가능한 한 거절하지 않았고, 맡은 이상은 최선을 다했다. 내 전공이 문학인데도 현실적 조건은 그렇지 않았다. 여성의 사회활동, 육아, 독서지도, 미혼모 교육,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 그들이 정했다.
그러나 내가 거기 갔을 때, 나를 초청한 기관의 대표는 자랑처럼, 지난주에는 서울에서 누가 왔었노라고 내 친구의 이름을 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내가 받은 갑절이나 되는 강의료를 지불하고, 오가는 항공료를 부담하고 호텔 혹은 여관을 잡아서 1박 2일 동안을 체류하게 하면서 관광까지 시켜주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나는 생각하였다. 그러면 나는 무엇인가? 그들은 대동맥이요, 나는 모세혈관인가? 대동맥이 중요한 만큼 모세혈관에게도 그에 못지않은 역할이 있다. 모세혈관인 것을 섭섭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저들은 나를 가족으로 알고 일일이 사정을 알리듯이 저런 말까지 할 것이다.
왕복 몇 시간씩 스스로 운전하면서 고달프거나 귀찮지 않았던 것은 내가 그 지역의 주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차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소리 내어 기도하였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건강한 몸으로 이렇게 나다닐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감사합니다. 당신이 주신 목숨으로 최선을 다하게 해주십시오.”
그러고 나면 산천은 온통 은혜로 가득하였다. 나는 광주를 사랑하고 전라도를 사랑하였다. 따뜻한 사람들. 푸짐한 정, 뜨거운 피 때문에 와와 떠들어도 실속은 챙기지 못하는 사람들, 나는 전라도 사람들을 사랑하였다. 정년퇴직을 하고도 몇 년 동안을 서울로 돌아와야 한다는 생각을 못하고 광주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내가 광주를 떠난다고 했을 때 그곳 사람들은 나의 배신을 아무 말 없이 참아주었다.
돌아온 서울은 매우 낯설다. 존경하는 문단의 선배들 중에는 작고하신 분들이 많고 기라성처럼 떠오른 후배들은 알 수 없는 얼굴이며 그들 또한 나를 모른다. 그리고 내 동년배들은 빛나는 별이 되어 멀리 떠있다.
“서울로 아주 오셨어요? 광주에는 안 가세요?” 묻는 사람들도 많다. 아직도 나를 광주사람으로서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벌써 중견을 넘어 원로에 속한다는 것이 나를 놀라게 한다. 원로가 된 것은 해놓은 일이 많아서가 아니라 지나온 세월이 길었기 때문이다.
서울이 낯설다느니 어떻다느니 말하는 건 얼마나 미숙한 푸념인가. 낯설지 않고 친숙하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너는 문단을 사교장으로 알고 있는가. 치열한 고독에서 창조된 글일수록 예각의 광채가 있지 않은가. 지금부터라도 정신을 차려야겠다. 정신을 차리고 이 아름다운 저녁 시간을 아껴가며 음미해야겠다. 예, 지금 여기 있습니다. 최후의 소리인 듯이 목소리를 가다듬어 대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2016년「수필과 비평」5월호 테마에세이 -응답하라 1980년-에 수록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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