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대표 문화유산 세계문화유산 10점
6. 언제나 훌륭한 소풍 장소이자 나들이 코스이자 답사지 - 경주 역사유적지구 (2000) 경주역사유적지구는 한반도를 천년이상 지배한 신라왕조의 수도로 남산을 포함한 경주 주변에 한국의 건축물과 불교 발달에 있어 중요한 많은 유적과 기념물들을 보유하고 있다. - 문화재청 김해에서 태어나고 자란 저로서는 경주는 언제나 손쉽게 다녀올 수 있는 가장 좋은 소풍장소이자 데이트코스이기도 하며 아이들과 나들이에도 가장 만만한 곳이며 문화유산 답사에도 그만입니다. 그렇지만 실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계절에 따라, 가는 곳에 따라, 언제나 좋습니다. 일본의 역사유적지구인 교토, 나라와 비교해도 유적의 밀집도와 다양성에서 더 뛰어나다고 합니다. 경주 역사유적지구은 5개 지구로 나누어집니다. 1. 불교 미술의 보고 - 남산지구 2. 천년 왕조의 궁궐터 - 월성지구 3. 신라 왕을 비롯한 고분군 분포지역 - 대릉원지구 4. 신라 불교의 정수 - 황룡사지구 5. 왕경 방어시설의 핵심 - 산성지구 경주 남산은 거대한 야외박물관이라 불릴 정도로 유적이 엄청납니다. 대충 세어봐도 보물만 14개입니다. 미추왕릉, 미륵곡 석불좌상, 칠불암 마애석불, 남산리 삼층석탑 등 남산만 보는데도 하루 온종일 가지고 모자랍니다. 월성지구에는 월성과 계림, 그리고 첨성대가 있구요, 대릉원지구에는 천마총을 포함한 산만한 무덤들이 천지입니다. 사람 없을 때 살짝 무덤 꼭대기에 올라가봐도 재미있습니다. 들키면 쪽팔립니다. 황룡사지구에는 황룡사터와 분황사가 있구요 산성지구에는 명활산성이 있습니다. 유홍준 선생의 감탄과 감동을 자아낸,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문무왕이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여기에 뿌려라! 용이 되어 왜구의 침략을 막겠다" 경주 대릉원 전경. 저 무덤 꼭대기는 못 올라간다. 올라가는 사람도 없고, 보는 사람이 너무 많다. 시내에서 좀 떨어진 무열왕릉 정도에 가면 한번 도전해 볼 만하다. 황남대총이다. 멀리서 보면 정말 여인의 가슴이다. 무덤인데도 불구하고 경주의 이 무덤들은 정겹다. 무덤 앞에서 돗자리깔고 김밥 싸온 거 까묵으면 정말 맛있다. 동양 최고의 천문시설인 첨성대..... 라고 되어있는데.... 저 안에 들어가서 별을 보면 좀 더 잘 보일래나??? 맨 위가 네모나서 스크린처럼???? 그리고 저 안에는 어떻게 들어가나? 사다리 받치나??? 음... 쫌 의문스럽다. 여하간 모양자체는 폼 난다. 전국 향교중에서 전주향교 다음으로 큰 규모를 자랑하는 경주향교다. 향교는 국립대학의 기능이지만 사당의 기능도 충실히 수행한다. 서원이 그런 것처럼. 그래서 앞의 명륜당은 교실, 뒤의 대성전은 사당이다. 서원은 배향하는 선비가 대체로 정해져 있다 치고... 그럼 향교는? 공자를 비롯한 5대 성인, 송조 6현, 공자 수제자 10철, 한국 18현.... 머 이런 사람들을 제향한다고 한다. 머.. 다른 나라 사람들이 많네.... 절경이다. 안압지는 신라시대의 궁궐이다. 즉, 왕들이 심심하면 언니들이랑 노는 별궁이었다. 2개의 전각이 복원되었고, 전체 궁궐도 복원계획을 가지고 있다. 단, 돈이 없다. 까마귀가 신라 소지왕의 목숨을 구했다는 서출지. 여기는 이요당이라는 정자가 있다. 요산요수, 뒤의 남산도 좋고 앞의 서출지도 좋아서 이요당이다. 아름다운 풍경의 서출지에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정자 이요당의 조합이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천년 고도의 가장 찬란했던 황룡사의 흔적은 이제 모두 유채꽃밭이 되고..... 황룡사터 옆에 있는 구황동 당간지주만이 우뚝 솟아 그저 짐작만 할 수 있게 한다. 써 놓고 보니 아직 못 가본 곳이 많습니다. 하긴 뭐 여유있게 보려면 일주일 가지고 되겠습니까만...... 암만 봐도 대단한 도시입니다. 앞서 살펴본 석굴암과 불국사도 세계문화유산이고, 경주 자체도 세계문화유산이고, 또 뒤에서 살펴 볼 양동마을도 세계문화유산입니다. 그러고보니 우리나라의 10개 문화유산 중에 3개가 경주에 있네요..... 제가 사는 동네도 역사적으로 봐선 경주에 비견 될 만한 동네지만 온 천지 공장밖에 안 보이고. 좀 많이 샘이 나는 동네입니다. 더하여, 얼마전에 신라 왕궁을 복원하고 황룡사도 다 복원하고.... 머 그런 것이 확정되었다고 합니다. 2025년까지 약 1조원 가까이를 들여서 추진한다고 합니다. 반가운 소식입니다. 십년 후면 황룡사 9층탑을 볼 수 있다니..... 다만 하는 김에 제대로 했으면 하는 바램은 간절합니다. 7. 거석 문화의 한국 대표 - 고창 · 화순 · 강화 고인돌 유적 (2000) 고창, 화순, 강화의 선사유적들은 거대한 석조로 만들어진 2,000∼3,000년 전의 무덤과 장례의식 기념물로서 선사시대 문화가 가장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으며 당시의 기술과 사회현상을 가장 생생하게 보여주는 유적이다. - 문화재청 거석 문화는 아직도 우리에겐 여전히 신비입니다. 이집트 피라미드도, 영국의 스톤 헨지도, 그리고 가장 경이로운 이스터섬의 모아이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되니까 외계인설도 나오고 그럽니다. 고인돌도 옛날 우리 할배들이 심심해서 취미생활로 만들지는 않았을 겁니다. 뭔가 그 시대에서 나름 의미가 있고, 그 사람들한테는 쫌 절박한 무언가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니까 그토록 열심히 만들었겠지요.... 칠레 산티아고에서 약 3700Km 떨어진 이스터섬의 거대 석상 모아이. 생김새가 너무나 해학적이다. 돌하르방의 서양 버전쯤 될까나...... 고인돌은 전세계적으로 6만기가 있다고 하는데 그 중에 3만기가 한반도에 있고 그 3만기중에 2만기가 전라도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라도 일부 동네에서는 집을 지으려고 보니까 무지막지한 돌덩이가 막고 있고 치우기도 너무 크고 해서 그냥 안에 두고 지은 뒤 알고 보니 고인돌이더라하는 집도 더러 있었댑니다. 무엇보다 그 큰돌을 운반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작업이었을텐데요, 1톤의 돌을 옮기는데 장정 10명정도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울나라 고인돌 중에 가장 큰 것은 80톤정도 나간다고 하는데요, 그러니까 약 800명의 장정이 있어야 그 돌을 옮길 수가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전북 고창에 있는 고인돌 유적지입니다. 한동네에 수백기가 모여있어서 한국의 스톤헨지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예전부터 돌을 가지고 잘 놀았는지 고창읍성도 원래 상태로 잘 남아있다고 합니다. 세바퀴를 돌면 무명장수한다고 하는 고창읍성. 실제 돌아보면 졸라 빡시다고.... 그래서 세바퀴를 돌면 무병장수는 게 아니라 무명장수할 사람만이 세바퀴를 돌 수 있다고.....ㅎㅎ 근데 이냥반도 하도 구라가 심해서...ㅋㅋ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했다던 그 감은사지 삼층석탑이다. 우리나라 석탑계의 대표선수이다. 감은사탑을 보러 가서, 혹시나 무슨 말을 걸어줄까 싶어 오래 옆에 앉아 있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탑이 말을 걸었을까? 원래 용이 된 문무왕을 모실려고 여기에 절을 세웠다. 문무대왕릉이 가까이에 있다.이런 왕구라를? 라고 했다능.... 근데 이건 역사적 사실이랜다. 저 돌들이 인위적으로 만든 왕릉이냐, 그냥 화장해서 유해만 뿌린거냐.... 머 이런 논란은 아직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머 그런 사실적 관련이 중요하것냐.... 믿고 안믿고 하는 우리 마음이 더 중요하지.
8. 게으르게 시간 보내기 좋은 곳, 그리고 왕과의 대화 - 조선 왕릉 (2009)
조선시대의 왕릉은 조선시대의 국가통치 이념인 유교와 그 예법에 근거하여 시대에 따라 다양한 공간의 크기, 문인과 무인 공간의 구분, 석물의 배치, 기타 시설물의 배치 등이 특색을 띠고 있다. 특히 왕릉의 석물 중 문석인, 무석인의 규모와 조각양식 등은 예술성을 각각 달리하며 시대별로 변하는 사상과 정치사를 반영하고 있어서 역사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뛰어난 문화유산에 속한다. - 문화재청
우리동네에도 왕릉이 있습니다. 김수로왕릉과 허왕비릉입니다. 어릴 때 소풍도 가고 커서도 산책하기 좋은 코스라 가끔 다녀오곤 합니다. 가까이 경주만 가도 산만한 왕릉이 많아 무덤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오곤 했습니다. 조선 왕릉은 멀리 있음 성묘하러 가기 힘들어서, 영월에 귀양가서 죽은 단종릉과 세종의 릉이 있는 여주 영릉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양에서 100리 안에 있습니다.
왕릉은 물론 무덤이 제일 중요하지만, 제사를 모시는 공간(정자각)도 있고, 왕릉이라 무덤을 지키는 문지기가 기거하는 공간(수복방)도 있고, 무덤앞에는 여러가지 석상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잠깐 공부를 좀 해보고 갈까요???? 물론 저도 공부 이런 거 별로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그래도 왕릉 갈때 이 정도만 알고 가도 마눌한테 쫌 우세는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ㅎㅎㅎ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이다. 죽으면서 고향땅인 함흥에 묻어달라고 했다는데, 아들 이방원이 그냥 가까운데 묻었다고 한다. 그래도 아버지의 유언이 있는지라 함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가 능에 심었다고 한다.
현종의 무덤인 숭릉이다. 효종의 아들이다. 이 분은 조선 역대 왕들중에 유일하게 외국(청나라)에서 태어나셨다. 왕릉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각(보물 1742호, 보통의 정자각은 맞배지붕이나 이 정자각은 팔작지붕이다. 화려하다.)을 가졌다는 평이다.
숙종의 릉인 서오릉중의 하나인 영릉이다. 인현황후랑 나란히 누워계시다. 살아서 억세게 여복이 터진 숙종은 돌아가셔서도 여복이 터졌다. 여기에 장희빈의 묘까지, 마누라 4명이 누워계신다. 아마도 졸라 시끄러울것 같은...ㅋㅋ 그래도 좋으시려나???
단종이 죽고, 세조의 서슬퍼른 눈초리에 시신 수습을 아무도 안했는데, 지역의 호장이었던 엄흥도란 냥반이 시신을 수습해서 뒷산에 묻었다. 그냥 봉분도 없는 평평한 자리라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할 수 없는데, 그래도 이 자리가 동네에서는 아무도 밟지 않는 신성한 자리로 여겨졌다고 한다. 숙종 때 장릉으로 복원되면서 목숨을 걸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이 엄홍도는 사육신 다음의 높은 공을 인정받았다.
중종의 묘인 정릉의 석인
가장 파란만장했던 삶을 산 정조의 무덤인 건릉이다.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묻혀 있는 융릉과 같이 수원(정확히는 화성)에 있다. 수원 답사길에 화성과 함께 보면 좋을 듯하다. 정조의 묘는 그래서 한번 가서 보고 싶다. 정조에게 여러가지 물어 볼 것도 좀 있고......
사실,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조선 왕들의 무덤에 많은 의미를 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진입공간이니, 제향공간이니, 능침공간이니 하는 것도 그렇고..... 단지 그저 아내와 아이들이 같이 가서 돗자리 펴고 앉아, 옛날의 그 왕들에 대해서 쓸데없는 공상을 하며 하루쯤 게으르게 보내기 딱 좋은 곳, 머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9. 우리나라 국가대표 마을 -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 (2010)
안동 하회마을
경주 양동마을
한국의 대표적 씨족마을이면서 양반마을인 하회와 양동은 모두 조선시대(1392~1910)에 양반문화가 가장 화려하게 꽃피었던 한반도 동남부(영남지방)에 위치하고 있다. 두 마을은 한국의 대표적인 마을 입지 유형인 배산임수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여름에 고온다습하고 겨울에 저온건조한 기후에 적응하기 위한 건물의 형태와 유교 예법에 입각한 가옥의 구성을 지니고 있다. 두 마을에는 양반씨족마을의 대표적인 구성요소인 종가, 살림집, 정사와 정자, 서원과 서당, 그리고 주변의 농경지와 자연경관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유형 유산과 더불어 이들과 관련된 많은 의례, 놀이, 저작, 예술품 등 수많은 정신적 유산들을 보유하고 있다. - 문화재청
화회마을과 양동마을은 여기 세계문화유산중에 하나의 챕터에서 다루기에는 사실 내용이 너무 방대합니다. 어디까지 가봤니? 울나라 건축물 14 - 하회마을에 있는 고택과 옛 건물 정도로 해서 다루어야 될 내용입니다. 그 만큼 의미있는 옛 건축물들이 즐비한 동네가 하회마을과 양동마을입니다. 여기서는 하회마을의 고택중에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양진당과 충효당, 그리고 이 마을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운 화경당(북촌댁)을, 양동마을도 보물 건축인 관가정, 무첨당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낙동강물이 굽이 돌아가는 마을인 하회河回마을의 전경이다. 풍산 류씨의 집성촌이자 하회 별신굿 탈놀이로도 유명하다. 원래 하회마을에는 김해 허씨와 광주 안씨가 모여 살았다. 하회탈도 김해 허씨들이 처음 만들었다고 하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풍산 류씨들의 가문이 점점 번성하게 되고 허씨와 안씨들은 일부 이주도 하고 해서 결국은 류씨 왕국이 되었다.
고택들이 즐비하다. 풍산 류씨 대종택인 양진당, 그리고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고 그 외에도 남촌댁, 북촌댁, 하동고택 등등, 그리고 옥연정사, 원지정사 등등.... 그런 큰 집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초가집들도 많아 볼거리가 쏠쏠하다. 그 초가집에는 현재에도 사람이 살고있다.
현재는 100가구 정도가 살고있다. 주민의 70%가 풍산 류씨라고.... 이렇게 같은 성씨들이 한 마을에서 오랫동안 사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고 한다. 그러니까 세계문화유산이겠지....
하회마을이 결정적으로 유명해진 건 바로 이 할머니땜시.... 1999년에 방문해서 여기서 생일상을 받았는데.... 이에 열받은 라이벌 양동마을도 뭔가 해야지하고 이 이후부터 양동마을도 대대적으로 정비를 했다는 후문이.... 근데 이 할매 아직도 정정하시댄다. 나도 저 할매땜시 처음 하회마을에 가봤다. 그 때 엄니랑 막내이모님이랑 같이 갔었는데, 류시원네 집 대청마루에 앉아 햇볕쬐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류씨 마을의 상징, 풍산 류씨 대종택 양진당이다. 서애 류성룡의 형인 겸암 류운룡의 종택이자 아버지인 입암 류중영의 집이라는 입암고택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이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집이다.
입암 류중영 (1515 ~ 1574)은 황해도 관찰사, 경연관등의 벼슬을 하고 새로운 터를 잡기 위해 유람한다. 그러던 중 도산서원에 가서 퇴계 선생한테 명당자리를 묻는다. 퇴계선생 왈 부용대로 가거라... 부용대에 올라서니 낙동강이 굽이치는 마을 하회가 보인다. 미리 터를 잡고 있던 허씨 안씨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 집 양진당을 짓는다. 진리를 기르는 집. 99칸으로 지어졌으나 현재 53칸이 남아있다.
사실 저 집도 집이지만 지금 저 집에 살고 있는 사람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양진당의 제사는 불천위 포함 일년 18번이다. 그 제사가 우리집 제사 같겠냐고..... 한번 할 때마다 엄청날텐데...... 종부들이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요즘 저 집에 며느리로 들어갈 색시가 있으려나.... 내가 다 걱정이 된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종택 충효당이다. 겸암과 서애 모두 퇴계 선생의 제자들이다. 둘다 무지 똑똑하고 엘리트 코스를 밟았는데, 형은 벼슬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서애 선생의 가장 멋진 점은 물론 학문도 뛰어났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바다에는 이순신, 땅에서는 권율 장군을 각각 임명하고 그들이 잘 싸울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한 일이다. 열씨미 일해라고만 하지, 열심히 일 할 환경을 조성해 주는 상사나 회사는 많지 않다. 누구는 좀 본받아야 된다. 류성룡의 손자 때 와서 그의 제자와 유림들이 십시일반 돈을 걷어 52칸의 집을 지었는데 이것이 충효당이다.
57세에 삭탈관직 아니? 이런 분도?? 당하고 고향에 내려와서 책을 쓴다. 임진왜란에 대해서 여러가지 자기의 생각을 적었다. 징비록이다. 국보다. 그리고 초가삼간에서 안빈낙도하다 66세의 일기로 눈을 감는다. 유언은 이렇다. 첫째, 임금과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다. 둘째, 벼슬은 지나치게 높았는데 일찍 물러나지 못했다. 세째, 도를 배우겠다는 뜻을 품었으나 이룩한 것이 없다.... 아, 유언도 자기 반성형이다.
징비록을 썼다는 옥연정사. 징비라는 것이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여 미래를 대비하자.... 머 이런 뜻이다. 옥연정사의 정사精舍라는 것은 도 닦은 집이다. 건들지 마라는 거다.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가 생각나고 나라가 어지러우면 훌륭한 재상이 생각난다... 라는 말에 딱 들어맞는 인물이 서애 선생이다. 그럼 우리 아내는???
하회마을에서 가장 큰 규모(72칸)이며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받는 집, 화경당 북촌댁이다. 이 집의 품격은 사랑채에서도 나타나는데, 할배가 사는 북촌유거, 아들이 사는 화경당, 손자가 있는 수신와가 각각 분리되어 있다.
이 집이 안동에서 명성을 얻은 것은 1859년에 일어난 홍수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때 강 저쪽 부용대에서 오던 배가 뒤집어졌다. 수십명이 물에 빠졌다. 강변에는 화경당을 지어려고 류도성이 애지중지 3년간 말린 나무들이 쫙 있었는데, 이 냥반이 그냥 구조용 웃기 대신으로도 쓰고 불 피우는 장작용으로도 쓰고... 그래서 많은 사람을 구했다. 류도성은 어렵사리 춘양목을 다시 구해서 또 3년 동안 말려서 이 집을 지었다고 한다. 이 때부터 이 집은 많은 인심을 얻었다.
뿐만 아니라 소작료도 다른 집보다 싸게 받았다고 한다. 다른 집이 6할 받을 때, 이 집은 5할을 받고 그도 여의치 않으면 4할로 감면해주고.... 부자들 때려잡는 동학군도 여기 와서는 그냥 정중하게 인사만 하고 갔다는 소문이..... 역시 부자가 모범을 보이면 나라가 흥한다. 지금 우리 시대 부자들은 어떤가??? 할 만 한가??? 우리 회장님, 졸라 부잔데, 더 부자될려고 회사돈 끌어쓰다 들켜서 지금 감옥 살고 계신다. 이거 미친거다.... 씨봐.
초가집도 멋지고, 골목길도 좋고. 하회마을을 더욱 매력적이게 해주는 초가집과 골목이다.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의 집성촌 양동마을. 현재 150가구가 살고있다. 우리나라 양반 마을의 형태를 잘 보여주는 동네다. 경작지 와 주거지, 그리고 의식 공간이 구별되어 있다. 높은 곳에 양반집이 있고 그 아래 상민들이 사는 집들이 양반집을 둘러 싸듯 배치되어 있다. 원래는 손씨의 집성촌이었는데, 이씨들이 처가 살이 하면서 같이 살게 되었고, 이언적이라는 당대의 석학이 나타나면서 이제는 이씨들이 훨씬 더 잘나가는 동네가 되었다.
양동마을에 와서 고택투어를 한번 하면 아마 웬만해서는 옛집에 대해 질릴거다. 그만큼 운치있는 옛집들이 즐비하다. 대략적으로 기와집 오십여채, 초가집 백열채가 있다.
손씨의 종택 서백당이다. 조선 초기 개국공신인 손소가 원래 여기 살던 풍덕 류씨 집안으로 장가들어 터를 잡았다. 그리고 이 서백당을 짓는다. 1454년. 500년도 넘은 집이다. 여기서 둘째 아들 손중돈이 태어난다. 이 양반 건교부 장관까지 지내고 벼슬아치의 최고 영예인 청백리를 하사 받는다. 조선에서 청백리를 하사 받은 선비는 총 219명.
손중돈의 여동생이 서백당에 몸 풀러 왔다. 아들 낳음. 손중돈은 아이의 떡잎을 일찍부터 알아보고 직접 가르친다. 그 아이가 바로 동방오현중의 한명인 회재 이언적. 서백당을 지을 때 도인이 이 집에서 현인이 3명 난다고 했는데.... 손중돈과 이언적, 그리고 한명은 아직인데......ㅎㅎㅎ
양동마을에 처음 이사온 이번이 서백당을 보고 지은 집 무첨당. 여강 이씨의 종택이다. 이제 우리도 집 생겼다. 손씨들이랑 같이 살자. 무첨당, 조상에게 욕됨이 없게 하는 집. 보물 건축이다. 위 건물은 공부도 하고 차도 마시고 하는 별당이자 제사를 지내는 제당이기도 하다.
대원군이 무첨당을 찾았다. 이 집... 보통이 넘는군!!. 하룻밤 묵고 숙박료는 무조건 일필휘지. 좌금서해 左海琴書 선비는 책을 읽지만 풍류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도 김마담한테 간다. 이 현판은 아직도 무첨당에 걸려있다. 이 집에는 현판이 많다. 물애서옥 (물애는 무첨당이 있는 곳), 오체서실 (이언적의 다섯 손자가 공부하는 곳), 창산세거 (설창산에서 대대로 살아오는 집) 등등
무첨당에서의 어부인......
손소의 아들 손중돈이 분가해서 지은 집.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듯이 자식이 커 가는 모습을 본다 라는 뜻의 관가정이다. 엄마와 함께 느림 여행이라는 책을 지은 최경숙 건축가는 이 책에서 관가정을 보고 신사의 품격이 느껴지는 집이라 했다. 향단이 남에게 보이는 것을 중요시하여 지은 집이라면, 관가정은 내가 보는 시선을 중요시하여 지은 집이다. 그래서 관가정에서 내려다 보이는 전망은 빼어나다.
손중돈은 여동생의 아들, 회재 이언적을 어릴 때부터 글을 가르치고 뜻을 세우게 하고 관직에 나가도록 했다. 숙부이자 스승이었던 셈이다. 손중돈과 이언적 이후 두 가문은 선의의 경쟁을 펴기도 하고 또 때론 서로 도우면서 이 양동마을을 대표 양반마을로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서로 싸웠다는 얘기도 많더라
경절공 우재 손선생 고택이다. 경절공은 손중돈 선생이 사후에 받은 시호다.
관가정에서의 어부인.....ㅎㅎ
요건 향단. 어디까지 가봤니? 울나라 건축물 8 - 한번쯤 묵어가고 싶은 우리 옛 살림집 편 참조하시면 되겠다.
문이 굳게 닫혀있다. 어느 싸이트에 들어가니 향단에서 한옥스테이는 계속 하던데..... 잘 모르겠다. 문중에서 개방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가 나온다는 소문도 있고.... 하긴 관람객인 우린 좋지만, 사는 사람은 하루이틀도 아니고.... 각 집에 대해 관람료를 따로 받으면 좋을텐데..... 보는 사람도 당당해지고, 종가측에서도 관리비가 생기고...
여기는 경산서원.... 마루에 걸터 앉은 막내 아들이 운치가 있다....
170년된 아주 청년같은 집, 안골 맨 꼭대기에 있는 집, 창은정사이다. 전형적인 ㅁ자 고택에다 아주 공들여 잘 지은 집이라고 한다. 이 좋은 집에 현재 사람이 살진 않는다. 집 주인은 서울에서 직장생활하고 있다고.... 친척분이 관리차원에서 울산과 경주를 왔다갔다 하고 있다고 한다.
사방으로 갇힌 ㅁ자형 집은 경북 북부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집인데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나라의 기강이 헤이해져서 집과 가족들의 보호 차원에서 이런 식으로 많이 지었다고 한다. 석등이 있는 아담한 정원이 인상적이다.
그리고 여기는 그 유명한 수졸당이다. 수졸당을 승효상 선생이 설계한 유홍준 선생의 집인 줄로만 알았었다... 첨에는.... 이런게 부끄럽다. 그 수졸당 못지 않게 운치가 있는 원조 수졸당이다.
10. 병자호란, 인조, 그리고 아픈 역사 - 남한산성 (2014)
남한산성은 16세기와 18세에 이르는 기간 동안 동아시아의 한국과 중국 일본 간에 산성 건축술이 상호 교류한 중요한 증거이다. 남한산성은 국제 전쟁을 통해 동아시아 무기 발달과 축성술이 상호 교류한 탁월한 증거로, 조선의 자주권과 독립성을 수호하기 위해 유사시의 임시수도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계획적으로 축조된 유일한 산성 도시이다.
또한, 남한산성은 7세기부터 19세기까지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 단계와 무기 체계의 변화상을 잘 보여준다. 남한산성은 험한 지형을 활용하여 성곽과 방어시설을 구축함으로써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단계를 잘 나타내고 있다 - 문화재청
임금은 젖은 땅에 무릎을 꿇었다. 임금이 이마로 땅을 찧었다. 구부린 임금의 저고리위로 등뼈가 드러났다. 비가 등뼈를 적셨다. 임금의 어깨가 흔들렸고, 임금은 오래 울었다. 막히고 갇혔다가 오래 터져나오는 울음이었다. 눈물이 흘러서 빗물에 섞였다. 임금은 깊이 젖었다. 바람이 불어서 젖은 옷이 몸에 감겼다. 아무도 말리지 못했다. - 김훈의 남한산성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피난가던 인조의 어가행렬이 청의 군사를 피해 남한산성으로 들어가는 12월 14에서 출성하는 1637년 1월 30일까지의 47일간의 기록인 김훈의 남한산성.... 소설에서 결국 인조는 청나라 칸에게 무릎을 굽히고 머리를 조아립니다. 그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곳 바로 남한산성입니다.
인조반정 즉 광해군을 왕에서 끌어내리는 쿠데타의 주역중에 이서 라는 냥반이 계신데 이 양반이 1623년에 수방사 총사령관이 되어서, 신라 문무왕때 쌓은 주장성 옛터에 남한산성을 축조하러 옵니다. 그리고 스님들과 열씨미 쌓아서 3년만에 남한산성이 완공됩니다. 인조는 미리 예상했을까요?? 그리고 꼭 10년 후 인조는 여기로 피난오게 됩니다.
남한산성에서 바라 본 서울.....
피난와서 인조는 더 힘듭니다. 적은 바로 앞에 있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합니다. 고통의 시간입니다. 온몸이 바늘 찌르듯이 아프다 라는 말이 이해됩니다.
김상헌의 목소리가 떨려나왔다. "화친은 가당치 않사옵니다. 심양에서 예까지 내려온 적이 빈손으로 돌아갈 리도 없으니 화진은 곧 투항일 것이옵니다. 화친으로 적을 대하는 형식을 삼더라도 지킴으로서 내실을 돋우고 싸움으로써 맞서야만 화친의 길이 열릴 것이며 싸우고 지키지 않으면 화친의 길은 마침내 없는 것이옵니다. 적의 문서를 군병들 앞에 불살라 보여서 싸우고 지키려는 뜻을 밝히소서"
최명길은 더욱 낮은 소리로 말했다. "예판의 말은 말로써 옳으나 그 헤아림이 얕사옵니다. 화친을 형식적으로 내세우면서 적이 성을 서둘러 취하지 않음은 성을 말려서 뿌리 뽑으려는 것이온데, 앉아서 말라 죽을 날을 기다릴순 없사옵니다. 안이 피폐하면 내실을 도모할 수 없고, 내실이 없으면 어찌 나아가 싸울 수 있겠습니까. 싸울 자리에서 싸우고 지킬 자리에서 지키고, 물러설 자리에선 물러서는 것이 사리일진대, 여기가 대체 어느 자리이겠습니까. - 김훈의 남한산성
나보고 우짜라고!!! 우이씨!!! 왜 맨날 나만 가지고 그래??? 너거가 왕해!!! 나 안해!!!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지은 건축물이다. 이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에 있던 5개의 장대중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며, 성 안에 남아 있는 건물 중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사진은 1892년에서 1893년 사이에 찍은 것이며, 파리 만국박람회의 엽서 그림으로도 사용되었다.
인조가 삼전도에 나아가 칸에게 세번 절하고, 한번 절 할때마다 이마을 세번씩 조아려햐 했던 삼배구고두의 치욕과 청나라 심양에 8년 동안 볼모로 잡혀있다 돌아왔지만 끝내 한을 풀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 이들의 원한을 잊지말라는 뜻에서 영조는 무망루라는 현판을 이 수어장대에 달게 했다.
남한산성은 하회마을과 안동마을에 이어 올해 4년만에 10번째 세계문화유산이 되었습니다. 세계유산(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을 모두 포함)으로 따지면 11번째입니다. 무엇보다 경사입니다.
참고로 제주도의 한라산과 성산일출봉, 그리고 거문오름 용암동굴계는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계라는 이름으로 2007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세계자연유산 제주 성산일출봉. 어이쿠...... 무서우신 사모님 나오셨어요???
우리의 세계문화유산은 참 거닐기 좋은 곳이라는 인상을 글 쓰는 내내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랑스럽고 훌륭한 유산이 있는가 하면 역사적으로 참 가슴 아픈 유산도 있습니다. 창덕궁 낙선재가 그렇고 수원 화성이 그렇고 남한산성이 그렇습니다.
죽기 전에 꼭 가봐야 된다고 협박하는 책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정말 안 가보면 안될 것 같아 굳이 남의 나라까지 보고 오는 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물론 여유가 되면 남의 것도 한번 가 보는 것 적극 추천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여유있게 거닐고 싶은 우리의 대표 문화유산이, 남들의 그것보다 더 아름답고 또 아픈 유산들이 있습니다. 그럼 한번 아이들 손 잡고 거닐어 볼까요.....
이용재 선생의 인문학적인 집짓기와 독서 같은 여행 비니버미님, 그리고 엽토 51님의 쏠쏠한 일상의 블로그에서 대부분의 사진과 글을 옮겨왔습니다. 그 외에 흐르는 강물처럼님과 발랄한 학생일기님의 티스토리, 다음의 바람꽃과 솔사리, 충주전통문화회, 사월과 오월, 오후의 산책처럼, Kida의 행복한 수다님의 블로그, 네이버의 하데스, BlueMiR, 산 강 숲에서 우리 함께 머무를수 있다면님의 블로그, 성낙주의 석굴암 미학연구소, 연합뉴스, 이글루스의 하늘사랑님 블로그, 위키백과와 엔하위키 미러, 그리고 문화재청의 글을 참고하였습니다.
|
첫댓글 그리고 2015년에 백제역사유적지구가, 2018년에 한국의 전통 산사 7곳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해남 대흥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순천 선암사, 양산 통도사)이 추가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총 12개가 되었습니다.
좋은 정보 고맙습니다.
여행시 도움이 많이 될 듯 합니다.
그렇지요. 주위에 둘러보면 갈 만한 곳이 많습니다.
도움이 되었디니 기쁩니다.
이야기에 폭 빠져드네요. 감사합니다.
경주도 살아보기해보고싶은곳이네요^^
갈때마다 실망하지 않고 항상 만족입니다.
룸메인 들이 아버님추천이니 조만간 여행가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