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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문화/교양[나누기] 스크랩 붓다시대의 사상과 부처님 생애
Dr.love 추천 0 조회 174 10.08.02 12: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불기 2554년 4월8일에..

 

 

 

 

붓다시대의 사상과 부처님 생애

 


I. 머리말

 

기원전 5C경 *붓다가 출현하면서 인도에서 불교가 시작하게 된다.

도솔천 내원궁에 계셨던 그 분이 왜 하필 B.C 5C쯤 인도라는 땅을 선택하신 것일까?

 

무한대의 우주 속에서 그 분은 사바세계를 선택하셨고 사바 가운데 인도라는 곳을

선택하여 따스하고 향기로운 사월 우리 곁으로 오신 것이다. 

 

*부처님이 태어나신 땅 인도. 인도는 어떠한 나라일까?

역사적 인물로서의 고오타마 싯달타 그분을 둘러싼 시대상황은 어떠했었는가?

 

그 당시 인도는 부처님께서 모든 중생을 위해 당신의 사상과 마음을 펼 수 있을 만큼의

정신적인 수준과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이 마련되어 있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그리고 어떠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는 같은 시대 같은 장소를 살고 있으면서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시대나 장소가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상황을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이 문제가 된다.

 

부처님과 같은 세상을 살수도 있고 아수라와 같은 세상을 살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부처님과 같은 세상을 살고 싶다면 우리는 부처님이 어떤 분이며 무엇을 가르치셨으며

어떻게 사셨는지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

부처님의 일생과 더불어 인도는 어떤 곳이며 당시 인도의 사회와 사상적 조류를 알아 보고자한다.

 

 

Ⅱ. 인도의 자연환경과 종교

 

印度(India)의 자연환경은 바다와 산맥에 의해 고립되어 있어 다른 동양지역과는

또 다른 독특한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히말라야 산계의 남쪽에 가로놓인 유라시아 대륙의 반도로서 면적은 약 450만 Km로

서유럽과 맞먹으며 현재 인도 공화국. 파키스탄 및 분리 독립한 방글라데시. 네팔. 부탄.

시킴이 있고 약 9억의 인구가 생활하고 있다.

 

풍토는 위도 상으로 본다면 열대에서 온대에 걸쳐 있지만 거의 열대 기후에 속하며

무더운 여름(3-5월). 장마철(6-8월). 건조한 겨울(10-2월)등의 세계절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찌는 듯한 더위, 높은 습도, 건조한 대기가 주민들을 더욱더 사색적 종교적으로

형성 시켰으리라 추측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인도는 세계적인 종교의 발상지인 동시에 근거지이다.

각 시대를 통해 인도인들은 강한 종교적 기질을 보여 왔는데 이러한 기질 때문에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시크교 등 고유종교가 발달했을 뿐 아니라 이슬람교. 그리스도교.

유태교. 조로아스터교 등 외래종교 또한 성장할 수 있었다.

가장 오래된 인도의 종교는 애니미즘으로 아직도 산탈족. 빌족. 곤드족 등 외딴지역에

거주하는 부족들에 의해 신봉되고 있다.

 

그러나 인도의 전통종교 중 가장 오래된 것은 바라문교로 그 기원은 B.C 2000-1500년경

아리아족이 성립시킨 베다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인도국민의 약 83%가 믿는 힌두교는 강력한 국민통합 요소이기도 하지만

카스트제도와 함께 분열 요소로서 작용하기도 한다.

 

자이나교와 불교는 B.C 6-5C경 성립된 종교이다.

자이나교는 지금도 구자르트와 라자스탄 지역에 넓게 퍼져있다.

이 종교의 비폭력주의와 금욕주의는 힌두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마하트마 간디도 이 두 원칙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불교는 이 종교를 신봉했던

마우리아 왕조의 아쇼카왕 시기에 인도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확산 되었다.

 

그러나 아쇼카왕 사후에 불교의 영향은 점점 줄어들어 다시 힌두교에 우위를 빼았겼다.

하지만 불교는 북방으로는 티벳. 몽골. 중국. 한국. 일본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전파되었고

남방으로는 스리랑카를 거쳐 태국. 미얀마. 베트남 등으로 전파되어 세계적인 종교가 되었다.

이와는 달리 자이나교는 인도에만 국한 되었다.

 

현재 인도에는 불교도가 약 400만 명 자이나교도가 약 3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외래종교를 살펴보면 정복자들에 의해 최초로 도입된 이슬람교가 가장 깊은 뿌리를 내렸다.

이슬람교는 처음에는 상인들에 의해 도입 되었으나 이슬람교도의 침입으로 힘을 얻어

16C 무굴제국이 건설된 이후에는 인도의 대부분 지역에 널리 퍼져 나갔다.

그러나 이슬람교가 지배적이던 지역이 독립당시 파키스탄으로 분리됨으로써 현재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은 인도국민의 10%를 약간 넘는 정도이다.

 

그리스도교의 일종인 조로아스터교는 7-8C 이슬람교의 박해를 피해 인도로 흘러들어 온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도입 되었다. 오늘날 그 후손들은 주로 봄베이에 모여 산다.

그리스도교는 B.C 52년 사도의 한사람인 토마가 인도 서해안에 상륙하여 몇 개의

교회를 건설 하면서 처음 전파 되었고 19C 유럽인의 진출과 함께 그리스교도의 개종이

다시 시작 되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수는 전체 인도국민의 약 3%에 머물고 있으며

코친을 중심으로 한 일부 서해안 지역에 집중 되어있다.

 

 

 

Ⅲ. 붓다시대의 사상과 배경

 

1. 정치사회의 변화

 

B.C 5-6C 즉 부처님 출생 당시 인도는 강대한 신흥왕국의 출현과 도시의 형성 등으로 급격한 정치.

사회적 변화가 나타나고 이에 따라 종교 사상계 또한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러면 불교의 출발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인도문명의 큰 흐름과 함께 붓다 당시의 정치?

사회적 변동을 살펴보도록 하자.

 

인도의 고대문명은 B.C 3000년경부터 개척되기 시작하여 대략 1000년 동안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른바 인더스 문명이 그것이다. 그들은 정연하고도 장대한 도시를 건설하고

청동기 시대의 문명을 형성하였는데 수준 높은 이 고대문명은 문다(Munda)족

드라비다(Dravida)족등을 비롯하여 일찍부터 인도대륙에 살아온 여러 종족들에 의해 이룩되어 왔다.

 

한편 코카서스(Caucasus) 지방으로부터 인더스강 상류의 펀잡 지방에 침입해 온

아리아(Arya)인들에 의해 주도 되었다. 이들이 문다족? 드리비다족과 같은 선주민들을 정복하고

대륙의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후기 인도문명의 형성에 새 주역이 된 것이다.

이들에 의해 정치?경제 시회적으로 현저한 변동이 일어나면서 당시 존재하고 있던 여러 부족이

점차 통합하여 국가 형태를 이루었고 그것은 다시 군소국가의 병합을 통해 강대한

국가체제를 형성해 나갔다.

 

이 무렵 인도에는 16강대국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특히 강성했던 나라는 마가다(Magadha)?

코살라(Kosala)? 밤사(Vamsa)? 아반띠(Avanti) 등이었으며 전체적인 국왕이 통치하는

군주정체의 이들 4대국에 의해 군소 국가들은 점차 정복 합병되어 각각 강대한

신흥왕국으로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씨족제로서 농촌사회의 촌락 공동체를 기반으로 점차 농업생산이 증대되고

인구의 증가 및 상공업의 발달이 촉진됨에 따라 곳곳에 도시를 형성하고 경제적 번영을 이루어 갔다.

 

이 같은 국가적 정세에 부흥하여 사회의 구성도 점차 변모해 나갔다.

인도에 있어서 사회구성의 두드러진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사성(四性) 계급제도이다.

이 제도는 사제자(司祭者)이며 지식인들인 브라흐만(brahman 婆羅門), 무사 또는

왕족들인 크샤트리야(ksatriya 刹帝利). 상인 서민들인 바이샤(vaisya 毘舍), 노예,

육체노동자들인 수드라(sudra 首陀羅)의 네 가지 커다란 집단들 즉 카스트(caste)로 갈라진다.

 

그런데 붓다시대 무렵에 이르러 이러한 계급제도는 점차 변모하고 있었다.

즉 정치적 패자(覇者)로서의 국왕과 경제적 실력자들인 자산가(資産家)들의 등장이다.

국왕은 종전의 농촌사회에 있어서는 단순히 부족의 수장(首長)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동방의 신흥왕국에서는 이들이 지방적 분권(分權)이기는 하지만 이미 국가의

지배자로서 그 지위를 갖기에 이르렀다.

 

또 자산가(居士)란 도시를 배경으로 한 상업 자본가나 지방의 거대한 토지의 소유자를 가리킨다.

이 시대에 이르러 이들은 서민 계급과는 구별되는 하나의 사회적 신분으로 간주 되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長者로 불리는 직업조합의 장들은 상업 자본가들의 대표로서 사회적으로

중요한 지위에 있었다.

이처럼 국왕이나 자산가가 사회에 커다란 세력을 갖게 됨에 따라 예로부터 내려오던

계급제도는 점차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한편 아리아인들이 동방으로 진출함으로써 증가되기 시작한 원주민과의 혼혈 등으로 인해

인종적으로도 계급붕괴의 현상이 가속화 되어갔다.

 

 

 


2. 부처님 당시의 사상계

 

1) 정통 바라문 사상

 

정치, 경제적 변화 등을 포함하여 사회가 크게 변동함에 따라 종교 사상계에도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었다.

당시 철학 또는 종교에 관한 사상계는 크게 정통적인 바라문과 이들을 비판하면서

등장한 沙門 등 두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당시 바라문이 독점했던 제식은 현세의 이익을 기원하는 의례였다.

현세 이익은 어느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서민의 종교적 요청이었던 것이다.

 

먼저 바라문 사상은 베다(Veda), 브라흐마나(Brahmana 梵書), 아란야까(Aranyaka 森林書),

우파니샤드(Upanisad 奧義書)라는 일련의 문헌들을 통해 전개된 종교 사상들을 말한다. 

아리아인들은 자연현상과 대자연의 구성요소를 의인화 한 하늘의 신들에게 소원 성취를 기원 하였다.

'리그베다'는 신들을 찬미하는 詩歌 모음집으로서 B.C 1500-1000년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를 베다시대라 하며 바라문 문화의 제1기에 해당한다.

 

신들의 거룩한 행위에 대한 찬미와 富, 多産, 長壽, 勝戰등과 같이 인간에게 유익한 것을 원하고

자연신교 적이며 다신교적인 경향을 반영 근원적인 세계의 원리를 탐구하는 사유가 싹트고 있는 시대이다.

 

신들에 대한 찬미, 기원과 관련해서 베다시대의 인도인들의 삶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은 儀禮와 祭祀였다.

B.C 1000-800년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는 브라흐마나(梵書)는 이러한 의례나

제사에 관한 규정을 자세하게 밝힌 문헌들이다.

따라서 제사가 중심이 되었던 이 시대를 브라흐마나 즉 梵書시대라 부르며 바라문 문화의 제 2기이다.

 

신들께 드리는 제사의 형식이 점점 복잡하고 정교하게 되면서 신을 움직이게 하는 제사의 전담자는

큰 권능을 가지게 되며 사회적 지위 또한 향상 강화되면서 司祭至上主義 사회를 이루게 된다.

이렇게 바라문 중심주의 제사 지상주의에 빠져있을 때 이런 현실에 회의를 느껴 새로운 의식을 갖는

사람들이 나오게 되는데 바로 우파니샤드(Upanisad 奧義書)시대의 사상가들이 그들이다.

 

의례와 제사를 만능으로 삼는 지나친 종교적 색채가 반성이 되고 철학적 사색이 심화된 이 시기는

B.C 800-600년경으로 바라문 문화의 제3기이다.

 

이 시대의 문헌은 새로운 의식을 지닌 사상가들이 숲 속에서 秘義를 노래한 내용의

'아란야끼 (Aranyaka)'와 그 중에서도 특히 철학적인 사색이 더욱 체계화된 일단의 '우파니샤드'가

있다. 의례와 제사 대신에 사색을 통한 知的추구가 더욱 중시 되면서 우주의 질서와 그 裏面의

통일성에 관해 사색하고 절대존재와 개체적 자아의 한계에 대해 탐구 하였다.

 

'우파니샤드'에 있어서 자기본질인 아트만은 동시에 우주 그 자체의 본질이다. 그것은 우주의

근본이며 보편적 원리인 브라흐만과 다른 것이 아니다. 이것이 梵我一如의 기본적 의미이다.

 
2) 새로운 사상운동

 

바라문이 독점한 제사는 일상생활에서 야기되는 위기를 조절, 구제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현세 이익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 일반인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종교성은 종종 그 단계를 넘기도 한다. 우주의 근본원리나 영혼. 인간존재의 문제.

죽음과 윤회 등 좀 더 깊은 차원이 고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인도에서는 기원전 10-6세기 경에 이와 같은 철학적인 문제의식과 사상이 심화되었던 것이다.

범아일여의 사상과 수행법은 이러한 발전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梵은 브라흐만으로서 우주의 근본원리를 지칭한다.

我는 아트만 atman 으로서 '호흡하다'(at)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 말은 단순히 나 자신이 아니라 가장 종교적? 철학적인 의미에서의 자기의 본질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즉 자기 존재의 근저에 있으면서 사후에도 소멸되지 않는 영원불변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러한 관념은 이 시대부터 표면화 되는 輪廻, 轉生의 관념과 결합되어 영혼적인 것이 되었다.

이 시대부터 인간의 개인 존재와 우주의 여러 현상의 대비, 相卽이 주목되기 시작하였다.

 

자연의 리듬과 주기 다양한 기상과 그 밖의 사람들은 범상치 않은 자연의 여러 현상 속에서

자신과 함께 울고 웃으며 생활하는 모습을 발견 하였던 것이다.

현대의 합리적 지성과는 달리 당시의 사람들의 마음은 자연과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자연의 하나하나의 움직임은 인간에 비교되는 생명체의 움직임이며 인간과

공감적 유대를 갖는 사물로 간주 되었다.

고대 인도에서는 언제부터인가 이러한 감각에서 인간과 우주, 그리고 자연의 동일과 합일이

거론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 이 시대에 전혀 새로운 형태의 종교 수행자가 나타났다.

그들은 沙門 Sramana, Samana라고 한다. 이것은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인데 古 우파니샤드에

는 나타나지 않는 새로운 종교인의 무리였다.

이들은 바라문의 法典에서 규정하는 4가지 생활단계에 그대로 따르지 않았고

집을 버리고 걸식 생활을 하며 직접 유행기의 생활로 들어간다.

 

그리고 청년기부터 금욕생활을 하고 숲 속으로 들어가 명상(Yoga 瑜伽)의 수행을 하거나

혹독한 고행에 몸을 바쳤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생의 진리를 체득하고 不死를 획득하려 했던 것이다.

당시 사상계의 주도적 역할을 했던 사문으로서 六師外道가 있었는데

이 여섯 사람 모두 제자들을 잘 통솔하고 교단의 우두머리로서 존경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 여섯 사람은 다음과 같다.


 ① 뿌라나 까사파 Purana Kassapa - 도덕부정론

 ② 마칼리 고살라 Makkhali Gosala - 숙명론

 ③ 아지타 케사 캄바린 Ajita Kesakmbalin - 유물론

 ④ 파쿠다 카차야나 Pakudha Kaccayana - 7요설

 ⑤ 산자야 벨라티풋다 Sanjaya Belatthiputta -회의론 

 ⑥ 니간다 나타풋타 Nigantha Nataputta - 자이나교

 


1. 뿌라나 까사파

 

이 사람들이 가장 중요시 했던 것은 선악의 행위(業)는 결과(報)를 가져오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것이었다. 뿌라나는 사람을 죽이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더라도 악을 행한 것은 아니며,

선악의 행위는 도덕적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고 설함으로써 일체의 도덕관념을 부인 했다.

 

2. 미칼리 고살라

 

고살라는 인간은 발전을 하건 혹은 타락하건 간에 거기에는 인도 없으며 연도 없다고 하여 우연론

숙명론을 제창했다.

그의 교단을'아지비카'라고 하는데 불교경전에서는 사명외도라고 번역된다.

본래는 "엄격한 생활 법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고행주의자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는 불교나 자이나교와 함께 후세까지도 유력한 교단의 하나였다.

고살라는 자이나교의 大勇과 함께 수행했다고도 하며 고행을 통해 해탈을 얻으려 한 수행자였던 것 같다.

 

3. 아지타 케사 캄바린

 

아지타는 地, 水, 火, 風의 4가지 물질적 원소만이 참된 실재라고 인정하고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였다.

인간은 죽음과 함께 斷滅하고 신체는 모두 4가지 원소로 환원된다.

내세와 같은 것도 있을 수 없고 선악에 대한 과보도 없으며 현세가 인생의 전부라 하였다.

그는 철저한 유물론자였으며 생의 가치 면에서는 쾌락주의의 입장을 취했다.

 

4. 파쿠다 카차야나

 

인간 존재는 地?水?火?風의 4가지 원소와 苦?樂?生命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이 7요소는 實在하는 것으로서 불변이므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괴롭히거나 즐겁게 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비록 사람을 죽이더라도 칼은 이 7요소의 間隙을 통과했을 뿐이며 살인은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이러한 요소만의 실재를 인정하는 사고방식은 후세의 勝論學派로 계승 발전되어 갔다.

        

5. 산자야 벨라티풋타

 

산자야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 서술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不可知論的 입장에서

형이상학적인 문제에 관한 한 확정적인 대답은 주지 않았다.

그는 내세의 존재나 선악의 과보 등의 질문에 대해 언제나 애매한 대답을 하여 판단을 중지한 것이다.

불타의 뛰어난 두 제자 사리풋다와 목건련은 그의 제자였다고 한다.

 

6. 니간타 나타풋타

 

니간타는 바로 자이나교의 개조인 마하비라(大勇)이다. 니간타란 '속박을 떠났다'는뜻이다.

몸과 마음의 속박을 떠날 것을 목적으로 고행을 하고 있던 사람들의 교단을 말한다.

輪廻로부터 벗어나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고행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업을 소멸하는 한편 새로운 업의 유입을 방지하여 영혼을 정화하기 위해서 육체(물질)에

고통을 주는 고행이 최상의 방법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므로 자이나교는 고행을 비롯하여

감각의 억제, 정욕으로부터의 자유로움, 세상으로부터의 초연함, 무소유 그리고 裸體, 懺悔와 같은

수행이 강조된다.  

 

지금까지의 두 계통의 사상을 정리해보면 그것은 정통 바라문의 '轉變說'과 이에 대응하는 사문들의

'積聚說'로 요약 할 수 있다.

즉 자아나 세계는 유일한 브라흐만(梵)에서 유출 전변했다고 보는 것이 轉變說이다.

이에 대해 積聚說은 그러한 유일의 절대자를 인정하지 않는 대신 개개의 요소를

불멸의 실재로 믿고 그것들이 모여 인간과 세계 등 일체가 성립 한다고 보는 것이다.

 

수행의 방법으로서는 禪定을 닦고 마음을 가라앉혀 해탈을 실현하려고 하는'修正主義'와

苦行을 통해 마음을 속박하고 있는 미혹의 힘을 끊고 해탈하려고 하는 '苦行主義'의 둘이 있었던

것이다.

 

여하튼 불타가 나타난 시대에는 전통적인 베다의 종교는 이미 빛을 상실하고 그것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적 권위는 아직 확립되어 있지 않았으며 그래서 많은 사상가들  이 자기의 마음속에서

진리를 발견해 보려고 애쓰고 있었던 것이다.

 

붓다 시대를 전후로 많은 사문이 배출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시대가 사상의 변혁기를 맞고 있었던

점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당시 중인도가 많은 출가자를 부양할 수 있는 경제적 여력을 갖고 있었던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갠지스 강 중류에 위치한 중인도는 아리아인이 정착하여 농경생활을 하면서 진보된 기술의 벼농사로

식량이 풍부했다.

열대기후로 말미암아 부패가 빠른 탓으로 조리한 음식이 남으면 버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때문에 걸식생활을 하며 수행하는 사문의 배출이 용이했던 것이다. 

 

 


Ⅳ. 부처님 생애


우리는 부처님의 생애를 더듬어 보기 위해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래서 그 시대의 분위기와 느낌이 되고 그 당시의 일부가 되어 기록으로 남아있는 여러가지 사실을

놓고서 깊은 사색 속으로 빠져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과연 어떤 분이셨을까? 어떠한 어린시절을 보낸 것일까?

청년이 된 그 분의 사랑과 삶에 대한 고민과 문제의식은 무엇이었을까?

한결같았던 그 분의 삶 속에는 항상 신화적인 면과 아주 인간적인 면이 함께 기록으로 남아있는데

우리 부처님 제자 된 이들은 그 어느 것도 모두 완벽한 사실로서 온 영혼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면 지금부터 부처님 생애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1. 부처님의 탄생과 성장

 

불타를 가리킬 때 석존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석존이란 석가모니(Sakyamuni 釋迦族출신의 성자)의

약칭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석존은 샤캬sakya族 출신으로서 姓을 고타마(Gotama 瞿曇)라 하고

출가하기 전의 이름을 싯달타 라고 했다.

샤카 족은 네팔과 인도의 국경부근에 거주하고 있던 작은 부족으로 수도 카필라바스투( kapilavastu)이며 크샤트리아부족으로 농업에 종사하고 벼농사를 주로 짓고 있었다.

석존의 아버지는 淨飯王 (Suddhodana)이고 어머니는 마야부인이었다.

 

어느 날 마야부인은 白象(흰 코끼리)을 품는  아주 상서로운 꿈을 꾸고서 아기를 잉태하게 되었는데

그 후 따뜻한 봄 룸비니 동산 무우수나무 아래서 *부처님이 탄생하시게 된다.

태어나시면서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시니 문득 연꽃이 땅으로부터 솟아 태자의 발을 받치고

한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또 다른 한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마치 사자처럼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 -하늘 위 하늘 아래 생명 있는 모든 것은 그 자체로

존엄하다. - 삼계가 모두 고통에 헤매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는 말씀을 하시자

온 天下는 六種으로 진동하며 향기로운 꽃비가 하늘에서 내리고 찬란한 오색 광명이 세상에 가득하며

아홉 마리의 용이 물을 뿜어내어 부처님을 목욕시켜 드리고 온 시방세계는 평화와 안락함으로

가득했다고 한다.

 

그 후 마야부인은 7일만에 세상을 떠나고 싯달타 태자는 이모인 마하파사바제에 의해 자상하게

양육된다. 싯달타 태자는 온갖 복덕을 누리며 최고의 스승들로부터 왕자로서 배워야 할 모든 것을

학습하였는데 몹시 총명하고 아름다웠으며 사색적인 소년시절을 보낸 것 같다.

 

싯달타 태자의 나이 열두 살 되던 해의 봄, 그는 아버지를 따라 농민의 날(春耕祭)행사에 참석하여

농민들의 일하는 모습을 관찰하였다. 강렬하게 내리쬐는 햇살을 받으며 알몸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땀과 흙으로 뒤범벅이 된 농부들이 쟁기를 끌며 힘겹게 일하고 있었다.

흙이 뒤집히고 많은 벌레들이 허리가 동강난 채 꿈틀거린다.

바로 그때 참새는 동강난 벌레를 재빨리 쪼아 물고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궁중에서의 사치스럽고 화려하며 안락한 생활과 새까맣게 탄 얼굴로 쉼 없이 일하고 있어야 하는

농부들의 모습. 그리고 노예나 노동자는 오로지 봉사하기 위해서 태어났으며 주인에게 희생함으로써

그 운명을 다할 뿐이라는 사성계급의 사회적 관념의 견고함. 생태계의 양육강식. 산 것들은

저토록 왜 서로 잡아먹어야 하는가? 왜 세상은 함께 행복할 수 없는 것일까?

이런 모든 상황을 목격하게 된 싯달타는 많은 의문점을 품고 冥想에 잠기게 된다.

 

다음은 四門遊觀이라 일컬어지는 또 하나의 사건이 있는데 싯달타는 城 밖 동, 서, 남, 북, 네 곳에서

사람들이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모습과 한 沙門을 만나게 된다.

人間은 그 누구나 반드시 태어난 이상 늙어야 하고 병들어야 하고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결해야 하는지 이 문제는 싯달타 태자의 가슴에 깊숙히 사무쳐 삶의 가장 근원적인

문제의식이 된다.

싯달타는 야쇼다라 라는 미모의 여인과 결혼을 하게 되며'라훌라'라는 아들도 낳았다.

그러나 삶에 대한 의문점은 더욱더 심화되어 갔다.

궁중에서 큰 잔치가 베풀어지던 어느 날 밤 그는 아름다운 아내와 사랑스런 아들과 모든 사람들에게

말없는 작별을 하고 깊은 밤 출가를 결심한다.

 

2. 출가와 고행

 

싯달타는 마부 차익(車匿)을 깨워 愛馬 칸타카(kanthaka)를 타고 성벽을 넘어 숲 속으로 어둠을 뚫고

달려갔다. 어디쯤에서 싯달타는 멈춰 서서 입고 있던 옷과 장신구를 모두 울고 있는 마부 차익에게

준다. 그리고 낡고 더러운 옷으로 바꿔 입으며 머리를 자르고 그를 달래어 궁중으로 돌려보내고

춥고 어두운 숲 속으로 혼자서 맨발로 걸어 들어간다.

무엇을 위해 싯달타 태자는 따뜻하고 찬란한 궁중의 생활을 버리고 저 어둡고 막막한 숲 속으로

떠나가는 것일까? 출가란 무엇인가?

 

그는 이제 더 이상 왕자가 아니다.

부서지기 쉬운 것, 무너져 가고 있는 것, 허망하고 거짓된 것을 버리고 제 본래의 무한 생명을

발견하기 위해 그는 삶의 대 전환을 감행을 한 것이다.

경전에는 출가할 때의 마음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는 일체 중생을 죽음에서 구하기 위해 출가 하나니 위없는 큰 깨침(무상보리)을 성취하기 전에는

결코 돌아가지 아니하리라.'  -본생경전-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싯다르타는 당시 가장 훌륭한 스승들을 찾아간다.

그래서 그들의 사상과 철학. 수행방법을 철저히 배우고 나이란자나강(Nairanjana . 니련선하)이

굽이쳐 흐르는 우르벨라촌의 가야산 고행림 속으로 들어갔다.

 

싯달타는 가야산 고행림 속에서 인류 역사상 다시없는 극한적인 고행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머리의 살갗은 마치 익지 않은 오이가 말라비틀어진 것 같았다. 뱃가죽을 쥐려 하면 등의 뼈가

잡히고 일어서려고 하면 머리를 땅에 박고 넘어졌다.

손바닥으로 몸을 만지면 몸의 털은 썩은 毛根과 함께 뽑혀 나갔다. 이러한 나를 본 어떤 사람은

'沙門  고타마는 검다'하고 혹은'沙門 고타마는 갈색이다'하고

혹 어떤 사람은'사문 고타마는 누렇다'고 하였다.' -파리증지부-


'또 온갖 고행 끝에 숨을 쉬지 않는 禪定에 들고자 하였다. 입과 코로 드나드는 숨을 쉬었을 때

두 귀에서 나오는 바람은 굉장한 소리를 내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왔다'


'나는 단식을 하기로 뜻을 세웠다. 조금씩 먹는 양을 줄여갔다.

나는 그 때 하루에 대추 한 알만을 먹는 사람이었다. 내 몸은 극히 쇠약해 갔다. 내 사지는 마치 갈대나

칼라 풀 같이 되었다. 또 나는 멥쌀 한 알을 먹는 사람이 되었다.'-파리상응부 . 파리증지부-

 

'과거의 어떤 수행자라도 현재의 어떤 수행자라도 또 미래의 어떤 출가 행자라도 이보다 깊은

고행을 닦은 자도 없고 닦을 자도 없으리라.'  -파리증지부85 보리왕자경-

 

부처님은 스스로 고행시절을 이렇게 회고하고 계신 것이다.

당시 고행주의자들은 고행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고행하는 행위를 자랑으로 생각한다거나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 고행을 하고 있었다.

 

고오타마 싯달타는 온몸의 피가 마르는 죽음에 가까운 고행을 했으나 원하는 바의 삶의 의문점은

전혀 해결이 되질 않았고 아직 세상의 법(人法)을 뛰어넘는 聖者의 지혜를 얻지도 못했다는 자각으로

쓰러질 듯 앙상하고 처절한 몸을 이끌고 고행을 단호히 포기하고 깨달음에 이르는 다른 길을 찾아

가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그는 다시 제2의 출가를 감행하는 것이다.

 

그 당시는 ‘고행 제일주의’ 풍토였기 때문에 고행을 버린다는 것은 타락자로 버림받는 행위였던

것이다. 또 다른 고정관념과 사회 관습으로부터 걸어 나와 니련선하 강가에서 목욕하고

牧牛女 수자타(sujata)가 주는 우유죽을 드시고 보리수 아래에 가서 吉祥草 위에 앉아 명상에 드신

것이다.


3. 부처님의 교화활동

 

부처님께서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서 깊은 명상에 들어 있을 때 하늘의 魔王波旬은 그의 영토가

무너져 내리는 진동에 크게 놀라 분개하면서 魔群을 몰고 공격해 온다.

魔王波旬은 貪慾 憎惡 飢渴 愛着 倦怠 ?眠 恐怖 疑惑 虛榮과 固執이라는 마구니를 이끌고 와서 온갖

유혹과 협박을 하지만 부처님은 內外에 존재하는 번뇌라는 온갖 마구니를 극복해 내고 마침내

새벽하늘의 샛별을 보고 깨달음을 얻으신다.

 

“이제 어둠은 영영 사라졌도다. 이제 다시 生死의 길 따르지 않으리니 이것을 고뇌의 최후라 선언하노라.”  -본생경 권1-

 

온 시방세계에 거룩한 꽃비가 내리고 향기가 진동하며 천신들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찬탄

한다. “거룩하셔라 세존이시여. 거룩하셔라 세존이시여. 마치 넘어진 자를 일으킴과 같이 또

어둠 속에 등불을 가지고 와서 ‘눈 있는 자는 보라’고 말씀하심과 같이 이 같이 세존께서는 온갖 방편을

세우사 법을 설하여 밝히셨나이다.”   -중아함경17-

 

부처님께서는 成道 後 충분한 사유를 하시고 갠지즈강을 넘어 바라나시의 녹야원으로 떠나신다.

그 곳에서 교진여 등 다섯 비구에게 中道와 四聖제  八正道등 최초의 설법을 하시게 된다.

다섯 수행자 中 카운디냐는 마침내 아라한의 경지를 성취하게 되는데 부처님께서 그의 깨달음을

너무도 기뻐하시며 감격해 하신다. 다섯 비구는 그 후 차례로 깨달음을 얻게 되고

이제 佛.法.僧 三寶가 최초로 성립된다.

 

“수행자들은 두 극단을 버려야 한다. 하나는 모든 욕망에 탐닉하는 것이니 이것은 어리석고 추하다.

다른 하나는 스스로 고행에 열중하는 것이니 이것은 어리석고 추하다.

如來는 이 두 극단을 버리고 中道을 깨달았다.” -초전법륜경 권1-

 


그 後 바라나시의 富豪 長者의 아들인 야사와 그의 친구 50여명이 함께 출가 하는 것을 시작으로

우루벨라 당대 최고의 바라문인 가섭 삼형제가 천명의 무리를 이끌고 불의 神을 숭배하고 있다가

부처님의 위신력에 감화하여 모두 출가하는 등 승가교단은 점점 체계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

 

부처님께서는 제자들과 똑같이 매일 바루를 들고 탁발을 하셨으며 섭씨 50도에 가까운 인도의 태양

아래를 맨발로 걸어 다니시면서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과 사건들을 만나 그때 그 사람에게 적합한

법문을 말씀해 주신다.

빔비사라 왕이 기증한 죽림정사를 기증 받으시기도 하고 가난한 여인의 작은 등불을 보시 받으시기도

하며 천민으로 태어나 똥지게를 짊어지고 다니는 니이다이의 손을 잡고 강가에 내려가 그를 씻어

주시기도 한다.

눈이 어두운 제자 아니룻다를 위해 바늘에 실을 꿰어 주시는 부처님.

살인마 앙굴리마라를 따뜻이 제도시켜 깨달음에 이르게 도와주시는 모습. 이발사였던 우바리를

일곱 왕자보다 출가를 먼저 허락 하시어 왕자들의 아만을 엄히 경계하고 서 계시는 부처님.

 

부왕인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아사세왕이 자책감으로 마음은 열병으로 들뜨고 온 몸은

瘡病으로 문드러져 괴로워하고 있을 때 그의 죄업을 참회시키고 깨달음을 얻게 해주시는 부처님.

 

위제희 부인을 위해 신통으로 아미타 부처님이 계신 극락세계를 환희 보여주시고 그곳에 갈 수 있는

수행방법을 알려 주시는 부처님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또 항상 부처님을 비방하는 데바닷다를

상대하셔야 하시기도 했고 외도들에 의해 교단이 모함을 받는 일이며 부처님의 조국인 석가족이

멸망하는 모습도 지켜보셔야 했다. 몸이 아프셔서 당신은 누워 쉬시고 제자 아난에게 설법을 대신

부탁하시기도 하는 등 우리들이 그 분께 다가설 수 있는 많은 친근함과 감동을 남겨 주셨다.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에 머무셨던 80년 동안 아함경 반야경 법화경 열반경에 이르는

팔만 사천 법문을 통해 가장 인간적인 모습에서부터 우리의 사량으로는 감히 헤아릴 수 없는

佛菩薩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중생들을 위해서 如一한 慈悲心으로 법을 설해 주신 것이다.

 

마지막 여정인 구시나성의 사라쌍수에서 대장장이 춘다의 공양을 마지막으로 부처님께서는

“자기 스스로가 등불이 되고 의지처가 될 것이며 부디 다른 사람을 의지처로 삼지 말라.

또한 마땅히 진리의 법을 등불로 삼고 의지 할 것이며 부디 다른 것을 의지처로 삼지 말라.

게으름 없이 항상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말씀을 남기시고 슬퍼하는 제자들을 남겨 놓으신 체

열반에 드신다.

 

如來法身은 가고 옴이 없다는데 석가모니 부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가?    

 

 


Ⅴ. 맺음말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얻기 前이나 깨달으신 後. 前生의 삶이나 이 生의 삶이 한결같으시다.

삶을 대하는 그 분의 태도와 자세는 언제 어디서나 지혜롭고 자비로우시며 따스하고 위엄이

있으신 것이다.

 

부처님과 같은 삶을 살고 싶다고 항상 외치고 있는 나는 과연 얼마만큼 처음과 끝이 한결같은 것일까?

좋은 것과 싫은 것을 대하는 나의 마음은 얼마나 여일한 평화로움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매순간 번뇌의 흐름은 쏟아지는 폭포수와 같다고 했다.

우리는 지금 그곳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얼마나 힘이 들겠는가?

그 너머에 다녀오신 분. 다행히도 그 분은 너무도 자상하게 그곳에 오르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고

계신다.

 

어찌 생각하면 막막하여 숨이 막히지만

오늘도 내일도 “自燈明 法燈明”을 가슴에 품고 올라가야 하지 않겠는가? 

 

 

글을 가져온 곳 : http://cafe.daum.net/hopelight

이미지들은 구글에서 추출후 재작업하였습니다.

 

 

 

* 부처, 붓다

부처(불타; 붓다, Buddha)는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부르는 말이다.

불교에서 모든 생물은 전생의 업보를 안고 살며 그 업보가 사라질 때까지 윤회한다고 하는데,

해탈에 이르러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면 윤회를 벗어난다고 한다.

석가모니 부처는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설하였으며 이 부처가 됨을 성불(成佛)이라 한다.

석가모니 부처는 소승불교 교리에서의 28부처 중 하나이나,

일반적으로 부처라 하면 석가모니를 가리킨다.
 

 

 

 

 

GAURANGA KARUNA (8:56)
'Please be merciful Lord Gauranga'
by Narottama Das Thakur
(16th century, Beng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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