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hwp
향교와 서원의 주요 배향 인물
오성
문선왕(文宣王) 공자 (孔子, B.C.552~B.C.479)
중국 춘추(春秋)시대 교육자,철학자,정치사상가,유교창시자
공부자(孔夫子), (본명) 구(丘), (자) 중니(仲尼)
노(魯)나라 창평향(昌平鄕) 추읍,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추현(鄒縣) 노원촌(魯原村) 출생.
父 숙량흘(叔梁紇), 母 안징재(顔徵在)
니구산(尼丘山) 출생-(이름) 구, 자를 중니라 함. 3세 때 父 여의고 母에게 학문 익힘.
위리(委吏,창고관리)와 승전리(乘田吏) 등 말단 관리로도 근무. 공자의 스승 모름.
예(禮),악(樂),사(射,활쏘기),어(御,기마술),서(書),수(數.수학)등 육예(六藝)에 능통.
역사와 시에 밝았기 때문에 30대에 이미 훌륭한 스승으로 높은 명성.
40대 말에 장관, 재판관인 대사구(大司寇)등 정치를 통해 人本主義 실현 위해 노력.
당시 세도가 계손자(季孫子) 가문 견제, 왕 측근과 마찰. 56세 때 자신의 이상을 펼칠 수 있는 나라를 찾아 떠남.
중국을 돌아다닌 12년 동안 많은 제자들 뒤 따름. 67세 때 귀향, 제자들을 가르치며 저술에 몰두, 73세에 별세.
역대 군주의 시호(諡號) -> 송(宋) 진종(眞宗)-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
원(元) 무종(武宗)-대성(+), 세종(1530년)-지성선사(至聖先師)
우리나라-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논어(論語)』-제자들이 구전(口傳)과 문서로 된 공자의 말을 모아 편집.
인간 됨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효(孝), 인간이 지녀야할 최고 덕목인 인(仁)도 효를 통해 얻어진다고 봄.
자기 수향을 사회 질서 바탕으로 삼고 국가를 안정시켜 천하를 평화롭게 만드는 것을 이상적인 목표로 여김.
안자 (顔子, B.C.514~B.C.483)
춘추시대 철학자, (본명) 회(回), (자) 자연(子淵). 父 무요(無繇), 母 강씨, 노나라 태생.
공자 제자. 공자보다 37년 아래. 학문을 좋아하여 덕행에 뛰어났고 거의 성인의 지위에 이르렀으나 32세에 별세.
원 문종(文宗)-연국복성공(兗國復聖公), 명 세종-복성안자(復聖顔子)라 개칭.
증자 (曾子, B.C.505~B.C.436)
춘추시대 철학자, (본명) 삼(參), (자) 자여(子輿). 父 증점(曾點), 노나라 남무성(南武城)사람.
효행 뛰어남, 공자 제자, 공자보다 46년 아래.
공자 세상 떠날 때 26세, 공자 손자(자사) 제자로 삼아 유학 전통 전수.
저서-『대학(大學)』
원 문종-성국종성공(郕國宗聖公), 명 세종-종성증자(宗聖曾子)라 개칭.
자사 (子思, B.C483~B.C.402)
공자 손자, 공리(孔鯉) 아들, (본명) 급(伋), (자) 자사.
어려서 증자 문하에서 수업, 유학 전통 계승.
저서-『중용(中庸)』
원 문종-기국술성공(沂國述聖公), 명 세종-술성자사자(述聖子思子)라 개칭.
맹자 (孟子, B.C371~B.C.289)
전국(戰國)시대 철학자, (본명) 가(軻), (자) 자여(子與), 자거(子車 도는 子居).
노나라(공자출생지) 인접 국가 추(鄒)나라 태생.
맹모삼천(孟母三遷)-전형적인 어머니상으로 숭배(아들교육위해 묘지,시장,학교 부근 이사).
자사(공자 손자) 제자.
한때 제(薺)나라 관리, 각국 돌며 제후들에게 인에 의한 정치 베풀 것을 조언.
그러나 그의 선정(善政)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王道政治) 실현 노력 실패.
자신의 통치 철학을 실천하고자 하는 제후가 한명도 없음에 좌절, 고국에 돌아와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냄.
『맹자』- 제자들이 그의 언행을 기록한 것, 인간의 성선설(性善設) 주장.
공자의 유학 계승 발전, 공자와 함께 유교 공동 창시자로 평가, 공자 다음 성인으로 존경.
송 신종(神宗)-추국공(鄒國公) 추봉(追封), 공자묘에 배향.
원 문종-추국아성공(鄒國亞聖公), 명 세종-아성맹자(亞聖孟子)라 개칭.
10철
민손 (閔損) / 안민(顔閔)으로 불리워지다 당(唐) 현종(玄宗) 720년 비공(費公)
(자) 자건(子騫), 노나라 사람, 공자보다 15년 아래.
“효재 민자건(孝哉 閔子騫)-계모와 형제들을 돌보며 효성 지극(공자가 칭)
공문 4가지 학과(덕행, 언어, 정치, 문학) 중 덕행 으뜸.
염경 (冉耕) / 당 현종-운공(鄆公)
(자) 백우(伯牛), 노나라 사람. 공자 제자 중 안민 다음으로 평가.
악질(惡疾)로 죽을 때 공자가 손을 잡고 병으로 죽음을 탄식.
염옹 (冉雍) / 당 현종-설공(薛公)
(자) 중궁(仲弓), 노나라 사람, 공자보다 29년 아래.
사람됨이 훌륭하여 임금의 도량이 있으므로 공자가 “염옹은 제후가 될 만하다”고 함.
덕행과에 1인자로 안민과 쌍벽.
재여 (宰予) / 당 현종-제공(齊公)
(자) 자아(子我), 노나라 사람. 언어과에 자공(단목사)과 쌍벽(그러나 말이 지나침)
단목사 (端木賜) / 당 현종-여공(黎公)
(자) 자공(子貢), 위(衛)나라 사람, 공자보다 31년 아래. 언어에 능하고 재주가 뛰어남.
염구 (冉求) / 당 현종-서공(徐公)
(자) 자유(子有), 노나라 사람, 공자보다 29년 아래. 재주가 많고 정치과에 능함.
중유 (仲由) / 당 현종-위공(衛公)
(자) 자로(子路), 노나라 사람, 공자보다 9년 아래.
언언 (言偃) / 당 현종-오공(吳公)
(자) 자유(子遊), 오(吳)나라 사람, 공자보다 45년 아래. 문학에 능함.
복상 (卜商) / 당 현종-위공(魏公)
(자) 자하(子夏), 위나라 사람, 공자보다 44년 아래.
증자 이후 가장 뛰어났고 문학에 능함.
공자 사후 서하(西河)에서 은거, 위나라 문후(文侯)의 스승이 됨.
전손사 (顓孫師) / 당 현종-영천후(潁川侯)
(자) 자장(子張), 진(陳)나라 사람, 공자 보다 48년 아래.
송조6현
주돈이 (周敦頤, 1017~1073)
송나라 도주(道州)사람, (자) 무숙(茂叔) -> 왕의 이름과 같아 후에 돈이(敦頤)로 고침.
(호) 염계(濂溪), 57세에 별세. 1241년 문묘 종사(從祀) -> 도국공(道國公)
정호 (程顥, 1032~1085)
주돈이의 제자, (자) 백순(伯淳), (호) 명도(明道), 송나라 하남(河南) 사람.
54세에 별세. (시호) 송 영종(寧宗)-순공(純公), 1241년 문묘 종사 -> 예국공(豫國公)
정이 (程頤, 1033~1107)
(자) 정숙(正叔), (호) 이천(伊川), 정호의 동생.
18세에 인종에게 상소하여 마음(心)을 왕도로 삼을 것을 권함.
철종이 즉위한 뒤 사마광(司馬光)의 추천을 받아 관직에 나감, 75세에 별세.
1241년 문묘 종사 -> 낙국공(洛國公)
소옹 (邵雍, 1011~1077)
(자) 요부(堯夫), (호) 강절(康節), 하남 사람.
정호가 그의 학문을 “내성외왕(內聖外王)의 학(學)"이라 함.(주자 학문과 다소 차이)
1267년 문묘 종사 -> 신안백(新安伯)
장재 (張載, 1020~1077)
(자) 자후(子厚), (호) 횡거(橫渠), 대량(大梁) 사람. 정호와 정이 형제를 만나 학문 익힘.
58세에 별세. 1241년 문묘 종사 -> 미백(郿伯)
주희 (朱憙, 1130~1200)
(자) 원회(元晦), (호) 회암(晦菴), 휘주(徽州) 사람.
이동(李侗)에게 수학, 성리학을 집대성. 71세에 별세.
(시호) 영종 때-문공(文公), 1241년 문묘 종사 -> 휘국공(徽國公)
동국18현
설총 (薛聰, 655~?)
신라(경덕왕) 대학자, (자) 총지(聰智), 경주 태생. 父 신라 고승 원효대사(元曉大師), 母 요석공주.
『삼국유사(三國遺事)』-출생기록, 무열왕(武烈王)대에 태어난 듯.
어려서부터 총명, 널리 경사(經史)에 능했으며, 신라 10현(新羅十賢)의 한 사람.
신라 3문장(강수. 최치원. 설총)
이두(吏讀)를 집대성하여 정리-국문학계의 커다란 업적으로 평가.
저서-719년에『감산사 아미타여래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
『삼국사기』『열전(列傳)』-“화왕계(花王戒)” 산문 수록(우화로 임금을 일깨움)
『동문선(東文選)』- “풍왕서(諷王書)” 이름으로 수록.
(시호)고려 현종(顯宗) 13년(1022) -> 홍유후(弘儒侯) 추증(追贈), 문묘에 배향.
최치원 (崔致遠, 857~?)
신라 말기 학자이자 문장가. (자) 고운(孤雲). 해운(海雲), 경주 최씨(慶州崔氏)의 시조.
868년 당나라 유학, 874년 과거에 장원급제,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郞 侍御史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 받음.
879년 “황소의 난” 발발시『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난 평정에 큰 공. 28세 때(884년) 귀국.
그뒤 한림학사 겸 병부시랑이 되었으나, 당에서 배운 경륜을 마음껏 펼쳐볼 기회가 되지 못함을 느끼고 지방 관리 자원.
대산(大山,(現)태인).천령(天嶺,(現)함양).부성(富城,(現)서산)등의 태수 역임, 사신으로 당나라에 다녀온 일도 있음.
시무책 10조(894년)-귀족의 부패와 지방 세력의 반란 등 사회 모순에 대한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 받아들여지지 않음.
신라 사회가 이미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사회가 아니라는 것을 인식, 어지러운 세상을 비관, 각지를 유랑.
만년에는 가야산 해인사에 머물렀으며,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는 알 수 없음.
다만 그의 저서『신라 수창군 호국성 팔각등루기(新羅壽昌郡護國城八角燈樓記)』를 통하여
효공왕(孝恭王) 12년(908) 말까지 생존하였다는 것이 확인.
유학자이면서도 불교, 도교, 풍수지리설까지 수용 이해,
말년에 소극적인 은둔 생활로 일관하여 시대의 제약을 극복하지 못한 한계.
고려 현종 11년(1020)-문창후(文昌侯)에 추봉, 문묘에 배향.
조선시대-태인의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의 서악서원(四岳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栢淵書院) 등에 제향(祭享, 나라에서 올리는 제사).
저서-『계원필경(桂苑筆耕)』,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석순응전(釋順應傳)』, 『사산비명(四山碑銘)』 등.
안향 (安珦, 1243~1306)
고려 명신(名臣), 학자. (본관) 순흥(順興), (초명(初名)) 유(裕), (자) 사온(士蘊), (호) 회헌(晦軒). 1260년 과거에 급제,
1270년 삼별초 항쟁 때 강화도에 억류되었다가 탈출, 감찰어사가 됨.
1275년 경상도 상주판관에 있으면서 민중을 현혹시키는 무당을 엄중히 다스려 미신을 타파,
1288년 원나라에 들어가 『주자전서(朱子全書)』베껴 돌아와 주자학 연구.
학문 진흥을 위해 섬학전(贍學錢)이라는 육영재단을 창설. 국학에 대성전을 지어 공자의 초상화를 비치,
제기(祭器)와 서적을 사들이기도 하였음.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로 불림.
(시호) 문성(文成), 고려 충숙왕(忠肅王) 6년(1319) 문묘에 배향.
순흥의 소수서원(紹修書院), 곡성의 회헌영당(晦軒影堂) 등에 제향 되었음.
정몽주 (鄭夢周, 1337~1392)
고려 말기 학자이자 문신. (본관) 영일(迎日),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경상도 영천 출생, (초명) 몽란(夢蘭) 또는 몽룡(夢龍).
1360년 문과에 장원 급제, 예문관 검열과 수찬을 거쳐 1363년 동북면 도지휘사의 종사관으로 여진족 토벌에 참가,
이어 성균관 박사와 사성을 역임한 뒤 1372년에는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함.
1376년 성균관 대사성으로 있으면서 이인임(李仁任) 등의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노선을 반대하다가 언양에 유배,
이듬해 풀려남. 1380년 이성계와 함께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를 토벌, 1384년에는 명나라에 다녀와 국교 회복에 큰 공 세움.
1389년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공양왕(恭讓王)을 왕위에 세워 “순충논도동덕좌명공신(純忠論道同德佐命功臣)”의 호를 받음.
조준(趙浚), 정도전(鄭道傳)등이 이성계를 새 왕으로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제거하려고 하였으나
이방원이 이를 눈치채고 먼저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꾸밈. 정몽주는 정세를 살피기 위해 이성계를 문병하고 돌아오던 중에
선죽교(善竹橋)에서 이방원이 보낸 조영규에게 피살.
그는 성리학을 연구하여 조예가 싶었으며,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로 추앙.
수차례 명나라에 다녀오는 등 외교 정책에도 뛰어났으며, 기울어 가는 고려 왕조를 일으키고자 노력하였으나 이성계 일파에 의해 좌절.
비석에 고려 때의 관직만 쓴 것이나 시조 『단심가(丹心歌)』는 고려에 대한 그의 충절을 잘 보여 줌.
조선 태종 때에 영의정에 추증, 중종 12년(1517)에 성균관 유생의 상소로 문묘에 배향.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등 13개 서원에 제향, 영천 임고서원(臨皐書院)-초상화 봉안. (시호) 문충(文忠),
저서-『포은집(圃隱集)』
김굉필 (金宏弼, 1454~1504)
조선 전기 문신이자 학자. (본관) 서흥(瑞興), (자) 대유(大猷), (호) 사옹(蓑翁).한훤당(寒喧堂).
父는 김유(金紐), 母는 중추부사 한승순(韓承舜)의 딸.
김종직에게 『소학(소학)』이수후 심취하여 30세가 되도록 다른 책을 보지 않음.
1480년 생원(生員)시험에 합격, 성균관에서 공부,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발탁, 관직 생활을 시작.
군자감 주부, 사헌부 감찰, 형조 좌랑이 되었으나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문인으로
붕당(朋黨)을 만들었다 하여 희천(熙川)으로 유배, 2년 뒤 순천(順天)으로 옮겨짐. 유배 기간에도 그는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힘썼는데,
특히 조광조에게 학문을 전수, 성리학의 맥을 잇게 함.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무오당인(戊午黨人)이라는 죄목이 더해져 51세에 극형에 처해짐.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뒤 신원(伸寃) 회복 도승지에 추증며, 다시 1517년에는 우의정에 추증, 문경(文敬)이란 시호가 내려짐.
또 1610년에는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로 문묘에 종사, 영의정에 추증. 현재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순천의 옥천서원(玉川書院) 등에
제향. 저서-『경현록(景賢錄)』,『한훤당집(寒喧堂集)』,『가범(家範)』등
정여창 (鄭汝昌, 1450~1504)
조선 전기 문신이자 학자. (본관) 하동(河東), (자) 백욱(伯勗), (호) 일두(一蠹).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혼자 독서에 힘쓰다가 김굉필과 함께 김종직의 문하에서 수학,
한때 지리산에 들어가 오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 1483년 진사(進士)가 되었고,
1490년 문과에 급제, 예문관 검열을 거쳐 세자인 연산군을 가르침.
1495년 안음현감에 임명,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에게 칭송. 1498년 무오사화 때 함경도 종성에 유배,
그가 죽은 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부관참시(剖棺斬屍) 됨.
당시 성리학의 대가로 추앙, 경사에 통달, 역행(力行)실천을 위한 독서에 전념. 중종 때 우의정에 추증,
광해군 2년(1610)에 문묘에 배향. 나주의 경현서원(景賢書院),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 등에 제향.
(시호) 문헌(文獻).
저서-『용학주소(庸學註疏)』,『주객문답설(主客問答說)』,『진수잡저(進修雜著)』등이 있었으나 무오사화 때 부인이 모두 소각.
정구(鄭逑)-『문헌공실기(文獻公實記)』에 『일두유집(一蠹遺集)』이 전해지고 있음.
조광조 (趙光祖, 1482~1519)
조선 중기 문인. (본관) 한양(漢陽), (자) 효직(孝直), (호) 정암(靜庵).
17세 때 父의 부임지에서 희천에 유배중이던 김굉필에게 학문을 익힘.
『소학』,『근사록(近思錄)』등을 토대로 성리학 연구에 힘써 김종직 학통을 이은 사림파의 우두머리가 됨.
1510년 진사, 1515년에 문과에 급제. 이후 중종의 두터운 신임,
유교로써 정치와 교화의 근본을 삼아야 한다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
1517년 향촌 상호 부조를 기본으로 하는 향약(鄕約)을 8도에 실시하게 하였고, 이듬해 미신 타파를 위하여 소격서(昭格署)를 없앰.
과거시험을 치르지 않고 추천 받아 관직에 등용하는 현량과(賢良科)를 실시, 신진사류들을 요직에 배치.
반대 세력인 훈구파를 지방직으로 몰아냄.
중종반정 때 정국공신이 너무 많다하여 공신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76인의 훈작(勳爵)을 박탈.
이러한 급진적인 개혁은 훈구파의 강력한 반발을 사게 됨.
훈구파들은 “주초위왕(走肖爲王)” 사건을 조작, 조광조 일당을 탄핵, 급진 개혁에 염증을 느끼던 중종은 훈구파 지지.
전라도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곧바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남.
이때 조광조를 비롯하여 수많은 사림들이 화를 입었는데,
이를 기묘사화(己卯士禍)라 함. 결국 사림파가 훈구 세력을 축출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이루려던 계획은 실패.
이것은 이들이 정치적 경륜도 짧은데다 개혁을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이루려다 노련한 훈구 세력의 반발을 샀기 때문.
그뒤 조광조는 선조 때에 이르러 신원, 영의정에 추증. 또 광해군 2년(1610) 성균관 유생의 상소로 문묘에 배향,
능주의 죽수서원(竹樹書院), 희천의 양현사(兩賢祠) 등에 제향.
또한 선조 때에는 그의 무덤이 있는 용인 묘소 밑에 심곡서원(深谷書院)이 세워져 그를 봉안. (시호) 문정(文正),
저서-『정암집(靜庵集』
이언적 (李彦迪, 1491~1553)
조선 중기 성리학자, (본관) 여주(驪州), (자) 복고(復古), (호) 회재(晦齋).자계옹(紫溪翁).
이수회(李壽會)의 손자, 이번(李蕃)의 아들, 母는 경주 손씨로 계천군(鷄川君) 손소(孫昭)의 딸.
본래 이름은 이적(李迪), 나중에 중종의 명에 의해 언(彦)자를 앞에 붙임.
이언적이 태어난 곳은 경주 양좌촌(良佐村), 부친이 처음 이 터를 마련하여 살게 되었고 그 이전에는 경주에 살았다고 함.
회재는 외숙부인 손중돈(孫仲暾)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19세 때인 중종 8년(1513) 생원 시험에 합격.
이듬해 별시에 응시, 감독관 김안국(金安國)이 그의 문장을 보고 장차 왕을 보좌할 인물이라고 감탄.
24세 때에 문과에 급제, 사헌부 지평, 경상어사, 이조 정랑, 사헌부 장령, 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에는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이 됨.
이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파직, 경주 자옥산(紫玉山)에 독락당(獨樂堂)을 짓고 학문 연구에 전념,
1537년 김안로가 축출되자 다시 관직에 복귀.
그해에 홍문관의 응교(應敎), 교리(校理), 직제학(直提學)을 거치고 이듬해 전주부윤이 되어 선정을 베푼 끝에 백성들이 송덕비를 건립.
이어 이조.예조.형조의 판서를 역임, 1545년에 좌찬성(左贊成)이 되었을 때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관직에서 물러남.
1547년에 양재역 벽서 사건(良才驛僻書事件)에 연루되어 평안도 강계로 유배, 그곳에서『구인록(求人錄)』,『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봉선잡의(奉先雜儀)』등 많은 저술을 남기고 63세 되던 해에 별세.
조정에서는 영의정에 추증, 문원(文元)이란 시호를 내림. 광해군 2년 태학생 임숙영(任叔英)의 상소로 문묘에 배향,
1612년 마을사람들이 독락당 아래에 옥산서원(玉山書院)을 세우고 위패를 모시게 됨.
성리학을 정립한 선구자로 평가, 성리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역할.
스승없이 독자적으로 학문을 수립, 주희의 주리론적(主理論的)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고자 노력.
27세 때에는 영남의 학자인 손숙돈(孫叔暾)과 조한보(趙漢輔) 사이에서 논의된 무극태극논쟁(無極太極論爭)에 끼여들어 두 학자의
견해를 모두 비판,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힘. 이 논쟁에서 주리론적 입장에서 이선기후설(理先氣後說)과 이기불상잡설(理氣不
相雜說)을 강조, 이(理)가 기(氣)에 우선한다는 그의 견해는 이황에게 계승되어 영남학파 성립에 선구자가 됨.
이황 (李滉,1501~1570)
조선 중기 문신이며 학자. (본관) 진보(眞寶), (자) 계호(季浩).경호(景浩), (호) 퇴계(退溪).퇴도(退陶).도수(陶叟).도옹(陶翁).
경상북도 안동 좌찬성 이식(李埴)의 7남 1녀 가운데 막내로 출생. 27세 때 진사, 34세에 문과에 급제, 호조 좌랑.홍문관 수찬 등을 역임.
그뒤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46세 때 낙동강 상류의 토계(兎溪)에 암자를 짓고 독서에 전념.
이때 토계를 퇴계(退溪)라 고쳐 부르고 자신의 호로 삼음.
그뒤 여러 번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부패한 조정을 피하여 단양군수, 풍기군수 등 지방직을 자청하여 부임.
특히 풍기군수로 있을 때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 편액.서적.토지 등을 하사할 것을 요청, 실현. 이것이 사액(賜額) 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紹修書院).
그뒤 관직에 수십 회 임명되었지만 사양, 도산에 서당을 짓고 독서와 저술에 전념, 제자들을 지도. 67세에 선조의 부름을 받아 다시 한양
으로 올라갔으나 69세에 귀향을 허락, 이듬해 별세.
조정에서는 영의정에 추증, 문순(文純)이라는 시호를 내림. 광해군 2년(1610) 성균관 유생들의 상소로 문묘에 종향(從享),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단양의 단암서원(丹巖書院)등 전국 40여 개 서원에 배향.
퇴계의 사상은 8년에 걸쳐 기대승(寄大升, 1527~1572)과 논쟁을 벌인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잘 나타나 있음.
주자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발전시켜 이(理)가 발하여 기(氣)가 따르는 것이 사단(四端)이며,
기가 발하여 이가 타는 것이 칠정(七情)이라 함. 즉 우주 만물은 이와 기의 이원적 요소로 구성,
이는 절대적 가치를 가졌고 기는 상대적 가치를 가진 것이라 함.
이후 영남을 배경으로 한 퇴계학파를 형성한 것은 물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유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침.
저서-『성학십도(聖學十圖)』,『역학계몽전의(易學啓蒙傳疑)』,『주자서절요(朱子西節要)』,『심경후론(心經後論)』등,
이이와 더불어 주자학을 집대성한 대유학자로 평가받고 있음.
김인후 (金麟厚, 1510~1560)
조선 중기 성리학자이자 문신. (본관) 울산(蔚山), (자) 후지(厚之), (호) 하서(河西).담재(湛齋).
父 참봉 김영(金齡), 母 옥천 조씨로 전라도 장성에서 태어남. 열 살 때(1519년) 김안국의 문하에서『소학』을 배웠고, 1
531년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에서 공부. 1540년 문과에 급제, 곧 홍문관 박사.부수찬이 되어 세자를 가르쳤으며,
특히 기묘사화 때 죽음을 당한 제현(諸賢)들의 시원을 주장.
1545년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핑계로 장성으로 낙향, 이후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除授), 모두 사양. 51세로 별세.
현종 때 이조 판서에 추증,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짐.
정조 20년(1796) 유생 홍준원(洪準源)의 상소로 문묘에 배향, 영의정에 추증. 현재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
옥과(玉果)의 영귀서원(詠歸書院) 등에서 제향.
저서-『하서집(河西集)』,『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西銘四天圖)』,『백련초해(百聯抄解)』등.
이이 (李珥, 1536~1584)
조선 중기 성리학자이며 정치가. (본관) 덕수(德水), (자) 숙헌(叔獻), (호)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등.
강릉 오죽헌에서 출생.
父 이원수(李元秀), 母 신사임당(申師任當). 어려서부터 母에게 학문을 배웠고, 13세에 진사 시험에 합격.
그러나 벼슬보다는 학문에 몰두했으며 16세 때 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파주 자운산에 장례를 지내고 3년 동안 묘를 지킴.
母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금강산에 들어가 “죽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진리를 깨닫기 위하여 정진.
그러나 참선도량에 들어간지 1년이 못 되어 하산, 다시 유학에 전념.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 이듬해 처가에서 강릉으로 가는 도중 예안(禮安)에 있던 이황을 방문.
그해 과거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 급제한 율곡은 이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서 장원.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란 칭호. 처음 관직으로 호조 좌랑에 임명, 33세 때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명종실록(明宗實錄)』편찬에도 참여.
그뒤 율곡은 청주목사.사간원 대사간.황해도관찰사.사헌부 대사헌.이조판서.형조판서.병조판서.촤찬성.판돈녕부사 등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특히 병조 판서로 있으면서 서울에 2만, 각도에 1만씩 10만 명을 양병(養兵), 장차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자는 “10만 양병설”을 주장.
49세에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별세, 파주 자운산에 묻힘. 문성(文成)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숙종7년(1681) 태학생 이연보(李延普) 등의 상소로 문묘에 종향,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
강릉의 송담서원(松潭書院)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
율곡은 조선 유학계에 이황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학자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
이황의 이기이원론에 대하여 “기발이승일도론(氣發理乘一途論)”과 “이통기국(理通氣局)”을 주장.
학문을 민생 문제와 직결시켜 대동법(大同法)과 사창(社倉)을 실시할 것을 주장, 동서 분당을 조정하기 위해 노력.
저서-『성학집요(聖學輯要)』,『격몽요결(擊蒙要訣)』,『기자실기(箕子實記)』,『학교모범(學校模範)』등이
『율곡전서』에 전하고 있음.
성혼 (成渾, 1535~1598)
조선 중기 성리학자. (본관) 창녕(昌寧), (자) 호원(浩原), (호) 묵암(默庵).우계(牛溪).
서울 순화동 태생, 파주 우계에서 성장. 17세 때(1551년) 생원과 진사 시험에 모두 합격, 병이 있어 벼슬 포기, 학문연구에만 전념.
파주에 유배되어 온 백인걸(白仁傑)의 문하에서 『성서(尙書)』를 배웠으며, 율곡과 사귀게 되면서 평생 가장 친한 벗이 됨.
1568년 경기감사의 추천으로 전생서 참봉에 임명, 이듬해 장원 서장원, 적성현감 등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음.
임진왜란 중에는 세자의 부름으로 우참찬(右參贊)이 되었고, 좌참찬으로 있을 때 유성룡과 함께 일본과 화친(和親)을 주장하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아 사직, 낙향.
그가 죽은 뒤 1602년 기축옥사(己丑獄事)와 관련되어 관작(官爵)을 삭탈당했으나
1633년 회복, 좌의정에 추증, 문간(文簡)이란 시호가 내려짐.
숙종 7년 성균관 유생 이연보 등의 상소로 문묘에 배향. 1689년에 한때 배향에서 빠지기도 했으나, 1694년 다시 배향.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 여산의 죽림서원(竹林書院) 등에서 제향.
저서-『우계집(牛溪集)』,『주문지결(朱門旨訣)』,『위학지방도(爲學之方圖)』등.
김장생 (金長生, 1548~1631)
조선 중기 학자이자 문신. (본관) 광산(光山), (자) 희원(希元), (호) 사계(沙溪).
1560년 송익필(宋翼弼)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등을 배웠고, 20세 무렵 이이의 문하에 들어감. 1578년 학행으로 천거(薦擧),
참봉 교관(敎官), 현감 등을 지냄. 임진왜란 때 호조 정랑으로 명나라 군사의 군량 조달에 공을 세웠고,
이후 남양부사와 안성군수를 역임.
계축옥사에 그의 동생이 관련되어 관직을 사퇴, 연산으로 내려가 학문에 전념.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장령에 임명되어 집의, 공조 참의, 동지중추부사를 지냄.
1627년 정묘호란 때는 의병을 일으켜 세자를 호휘, 청나라와 화친하는 데 반대.
이듬해 형조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고향에 내려가 교육에 전념.
과거를 거치지 않았고,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여 요직이 많지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 서인의 우두머리 격으로 영향력이
매우 컸음.
송익필, 이이, 성혼의 학문적 영향, 특히 송익필의 영향으로 예론(禮論)을 깊이 연구, 예학파(禮學派)의 한 주류를 형성.
숙종 14년(1688) 문묘에 배향, 안성의 도기서원(道基書院),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 등 10여 개 서원에 제향. (시호) 문원(文元),
저서-『상례비요(喪禮備要)』,『전례문답(典禮問答)』,『가례집람(家禮輯覽)』,『의례문답(疑禮問答)』,『예기기의(禮記記疑)』등.
조헌 (趙憲, 1544~1592)
조선 중기 학자이며 문신, 의병장. (본관) 백천(白川). (자) 여식(汝式), (호)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경기도 김포에서 출생.
이이와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
1567년 문과에 급제, 정주교수를 거쳐 교서관 박사로 있으면서 왕이 사찰에 향을 하사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삭탈관직.
1574년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호조 좌랑.이조 좌랑을 역임,
통진현감 재직시 죄인을 엄히 다스리다 죽인 죄로 탄핵을 받고 부평에 유배.
1586년 공주제독관이 되어 이이와 성혼 등을 추착(推捉, 죄를 들추어서 붙잡아 옴)하려는 동인(東人)에 반대하는 상소를 했다가
파직당함.
관직에서 물러난 뒤 옥천에서 후율정사(後栗精舍)를 짓고 후진 양성, 학문 연구에 전념.
1591년 일본 사신이 오자 도끼를 짊어지고 상경, 대궐 앞에서 사신 처단과 일본의 침략에 대비한 국방력 강화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승장(僧將) 영규(靈圭)와 합세, 청주성을 탈환.
이어 전라도로 향하는 일본군과 금산(錦山)에서 싸우다가 7백 의병과 함께 전사.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봉(冊封), 1734년 영의정에 추증.
고종 20년(1883) 문묘에 배향, 옥천의 표충사(표충사), 김포의 우저서원(牛渚書院) 등에 제향. (시호) 문열(文烈).
율곡의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학자로 평가, 이이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켰음.
김집 (金集,1574~1656)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 (본관) 광산(光山), (자) 사강(士剛), (호) 신독재(愼獨齋).
18세 때 진사, 37세에 참봉이 되었다가 광해군의 문란한 정치로 은퇴.
1523년 인조반정 뒤 부여현감으로 등용,
지평, 집의, 공조 참의 등을 역임하다 인조 중기 이후 퇴직. 효종이 즉위하자 김상헌(金尙憲) 등과 함께 다시 등용,
예조 참판과 사헌부 대사헌을 거쳐 이조 판서가 되어 효종과 함께 북벌을 계획.
80세에 좌참찬을 거쳐 이듬해에는 판중추부사에 임명 되었으나, 초야(草野)에 묻혀 아버지인 김장생의 학문을 이어받으려고 노력.
이이와 김장생의 학통을 이어받아 송시열에게 전해 줌으로써 기호학파를 형성하는 데 공헌,
예론을 깊이 연구, 예학의 체계를 세움. 고종 20년(1883) 영의정에 추증, 문묘에 배향.
연산의 돈암서원, 부여의 부산서원(浮山書院) 등에 제향. (시호) 문경(文敬),
저서-『신독재문집(愼獨齋文集)』,『의례문해속(疑禮問解續)』등.
송시열 (宋時烈, 1607~1689)
조선 중기 학자이자 문신.
(본관) 은진(恩津), (자) 영보(英甫), (호) 우암(尤庵).우재(尤齋).
父는 송갑조(宋甲祚), 母는 곽자방(郭自防)의 딸로 충청도 옥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26세 때까지 살았음.
어려서는 父께 학문을 배웠고, 김장생.김집 부자의 문인으로 학업을 마쳤음.
27세 때 생원과 진사 시험에 장원 급제, 봉림대군(鳳林大君,뒤에 효종)의 사부가 되었으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세자가 끌려가자 좌절한 나머지 벼슬을 사양하고 낙향, 10여 년간 학문에만 몰두.
효종이 즉위한 뒤 이조 판서가 되어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활약.
그러나 1659년 효종이 급서하고 예송(禮訟) 논쟁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재차 낙향.
이후 1668년 우의정,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어 잠시 조정에 나갔을 뿐 거의 관직을 단념.
이렇듯 재야에 은거해 있으면서도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조정의 대신들이 서인의 우두머리인 송시열의 의견을 물은 뒤 매사를 결정했기 때문.
그러다가 제자 윤증(尹拯)과의 사이에 불화가 생겨 서인은 노론(老論)과 소론(小論)으로 나뉘어졌고,
1689년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에 반대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된 뒤 서울로 압송 도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음.
1694년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게 되자 관작이 회복, 이듬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짐.
영조 32년(1756) 문묘에 배향, 현재 전국의 70여 개 서원에서 그를 제향.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로 한번 잘못되면 끝까지 화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음.
문장과 서체에도 뛰어났으며, 조광조.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진 기호학파의 학통을 충실히 계승 발전.
저서-『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주자어류소분(朱子語類少分)』,『이정서분류(二程書分類)』,『주문초선(朱文抄選)』,
『계녀서(戒女書)』를 비롯하여 방대한 저술, 문집으로는 『송자대전(宋子大全)』이 있음.
송준길 (宋浚吉, 1606~1672)
조선 중기 문신이자 학자. (본관) 은진, (자) 명보(明甫), (호) 동춘당(同春堂).
어려서 율곡에게 배웠고 20세 때 김장생의 문하생이 되어 송시열과 동문수학.
1624년 진사가 되었으나 이후 거의 관직에 나가지 않았음.
1659년 병조 판서가 되어 국정에 참여하던 중 효종이 죽고 예송 논쟁이 일어나자 송시열의 기년설(朞年說)을지지, 남인과 대립.
이조판서.대사헌.좌참찬 등에 제수, 계속 사퇴, 그가 죽은 뒤 1673년 여의정에 추증.
이듬해 효종비가 죽고 2차 예송 논쟁으로 남인(南人)이 정권을 잡게 되자 관작을 삭탈, 1680년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복구,
1681년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짐.
영조 32년(1756) 문묘에 배향,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 연기의 봉암서원(鳳巖書院) 등에 제향.
송시열과 학문 경향을 같이하여 율곡의 학설을 지지, 특히 예학에 밝았음.
저서-『어록해(語錄解)』,『동춘당집(同春堂集)』
박세채 (朴世采,1631~1695)
조선 중기 학자이자 정치가. (본관) 반남(潘南), (자) 화숙(和叔), (호) 현석(玄石).남계(南溪).
그의 가문은 명문세족으로 증조부로부터 대사헌, 형조판서, 홍문관 교리를 지냈으며,
박세당(朴世當).박태유(朴泰維).박태보(朴泰輔)등도 그의 혈족.
이러한 가계를 바탕으로 주요 관직에 나아가 정치에 참여, 때에 따라 수난을 겪기도 하였음.
1649년 진사가 되었으나 이이, 성혼의 문묘종사를 반대한 영남 유생 유직(柳稷)의 상소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가
효종의 비답(批答, 상소에 대한 임금의 하답)에 분개, 과거의 뜻을 버리고 학문에 전념.
1651년 김상헌과 김집에게 학문을 배웠고, 1659년에 천거로 다시 관직에 나감.
효종이 죽고 복제(服制)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송시열,손준길의 기년설을 지지하여 서인측의 이론가가 됨.
1674년 2차 예송 논쟁 때 관작을 삭탈, 양근, 지평, 원주, 금곡 등으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오히려 학문에 전념.
1680년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다시 등용되어 사헌부 집의에서 공조 참판,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거쳐 우참찬에 이름.
1684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당될 때 양당의 대립을 막으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소론의 편에 서게 되었고,
송시열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우의정.좌의정을 거치며 소론의 우두머리가 됨.
영조 41년(1765) 왕의 특명으로 문묘에 배향, 배천의 문회서원, 연안의 비봉서원에도 제향. (시호) 문순(文純).
저서-『범학전편(範學全編)』,『시경요의(時經要義)』,『춘추보편(春秋補編)』,『육례의집(六禮疑輯)』,
『남계독서기(南溪讀書記)』,『심학지결(心學至訣)』등 많은 저술과 70여 권의 문집이 전함.
전라 서원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