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선거 개표 방송을 보고난 후에 절망감에 어찌할 바를 모를 때가 있었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직선제를 쟁취하고 치러진 대선에서 군부독재를 청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양김씨의 분열로 무산되었을 때의 그 절망감을 잊지 못한다. 1986년 유구중학교에 첫발령을 받고 근무할 때였다. 하숙집에 TV가 없어서 학교 교무실에서 새벽까지 TV를 봤었다. 이미 전날 저녁때에 승패를 알았지만 차마 그냥 돌아갈 수가 없었다. 새벽에 하숙집으로 돌아가면서 찬바람 몰아치는 겨울 추위 때문이 아니라 절망감으로 몸을 떨었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계속되었고, 어떻든 여러면에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낙선했을 때도 분노와 실망감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몰라했었다. 김대중 후보의 나이를 고려할 때 다음 대선에서 또 출마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쉬움은 더 컸었다.
그러나 그 이후의 대선에서 지지하는 후보가 낙선했어도 실망했지만 절망적일 정도는 아니었다. 이번 대선도 마찬가지이다. 솔직하게 이야기 하자면 국민의 힘은 최악의 후보를 가지고도 0.7%의 차이로 겨우 이긴 것이고, 민주당은 최악의 후보를 가지고도 불과 0.7%의 차이로 선전한 것이다. 만약에 국민의 힘에서 윤석열 후보 대신에 홍준표씨나 유승민씨가 나왔다면 10% 가까이 차이나게 국민의 힘이 이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고, 이재명 후보 대신에 이낙연씨가 후보가 되었으면 어쩌면 민주당이 이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과 국민의 힘의 선거 캠페인의 주요 목표가 상대당 후보를 악마화하는 것이었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윤석열 후보를 사악한 배우자를 둔 무식한 꼴통에다 무당과 신천지 같은 사이비 종교에 쩔은 멍청이로 만들려고 했고, 국민의 힘 지지자들은 이재명 후보를 형수에게도 욕을 서슴치 않는 패륜아에 대장동 비리의 몸통이고 배우자를 비롯한 가족들은 모두 범죄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거짓말을 예사로 하는 양아치로 몰아붙였다. 이런 네가티브 캠페인은 자신들의 강성 지지자들에게는 결집하게 하는 근거로 먹혔지만, 좌우로 흔들리는 중간층에게는 양당의 후보들을 역대 유례없는 비호감 후보들로 만들고 말았다.
선거를 패배한 후에 그 원인을 자기가 아닌 남에게 돌리면 선거 패배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게 된다. 2017년 대선과 2018년 지방선거, 2020년 총선에서 민주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준 '위대한 국민들'이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수구보수언론의 거짓말에 넘어가 갑자기 수구꼴통이 되기라도 했단말인가. '위대한 국민들'은 어떤 경우에도 민주당을 지지해야 하는가? 윤석열 후보를 찍은 사람들 중에서 도저히 대화가 불가능한 수구꼴통들이 있을 것이고 언제나 국민의 힘을 찍어야 마음이 놓이는 완고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야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지난 세번의 선거에서 민주당을 지지했지만 이번 대선에서 국민의 힘을 지지한 사람들과 기권한 사람들은 단순하게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선거가 끝난지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벌써 패배의 원인으로 이낙연씨와 심상정 후보를 지목하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 패배를 반성하는 사람의 태도인가? 어처구니가 없다. 같은 당의 경선 후보를 수박이나 똥파리라고 조롱해 이에 마음 상한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이 이재명 후보가 아닌 윤석열 후보를 지지하게 만든 극렬 분자들이 할 소리는 아니다. 민주당 내부에 토론과 건설적인 비판을 사라지게 만들어 이번 대선의 패배에 가장 많은 책임이 있는 자들이 할 소리가 아니다. 왜 심상정 후보가 민주당의 패배에 책임을 져야하는가. 민주당이 대표적인 정치개혁으로 선전하던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양당의 위성정당때문에 무력화되어 정의당의 의석은 오히려 감소했고, 또 총선 후에 180석의 압도적인 의석을 얻은 민주당이 어떤 진보적 가치를 가진 정책을 입법하고 실행했다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이명박대통령은 종편을 만들어 보수 세력에 큰 선물을 주었다. 민주당이 진보진영에 도움되는 어떤 일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런 민주당이 이번 대선에서 패배의 책임을 심상정 후보에게 지운다면 너무 염치없는 일이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양당 통틀어서 가장 의미있는 공약은 민주당에서 공약한 다당제 통합정부를 위한 정치개혁 공약이지만 너무 시기가 늦어 진정성을 의심받았다.
이번 대선에서 민주당이 패배한 원인은 모두 알고 있다. 민주당 정부의 부동산 정책실패와 내로남불의 오만한 행태와 극렬지지자들의 갈라치기로 민주당에 토론과 비판 문화가 사라졌고, 180석의 압도적인 의석을 몰아주었지만 정권교체가 되어도 지속될 수 있는 의미있는 개혁입법이 없었고, 이재명 후보의 대장동 책임론 때문에 선거에 패배한 것이다. 문제는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이 다른 핑계대지 않고 이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뼈 아픈 자기 혁신을 할 수 있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