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갑오정권의 성립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뒤 민씨정권은 더욱 청에 기대면서 정권유지 차원의 개화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동도서기 사상(우리의 전통적인 제도와 사상은 지키되, 근대 서구의 기술은 받아들이자는 이론)을 가진 개화파들은
민씨정권의 개화정책에 매우 제한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조선사회를 변혁하려는 움직임은 농민전쟁 형태로 아래로부터
터져나오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민씨정권은 더 이상 개혁을 미룰 수만은 없었다.
스스로 농민군을 진압할 힘을 가지지 못했던 민씨정권은 1894년 4월에 청에 파병을 요구하였고,
갑신정변 이후 조선을 장악할 기회를 엿보던 일본도 이를 구실로 인천을 통해 군대를 파병하였다.
농민군이 진압된 후에도 일본은 청에게 조선의 내정개혁이 진전될 때까지 계속 군대를 주둔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청이 이를 거절하자 일본은 청과 전쟁을 벌일 구실을 찾는 한편,
조선 정부에 미리 짜놓은 내정개혁안의 시행을 강요하였다.
이보다 앞서 민씨정권은 일본의 간섭을 막으려는 목적에서 개혁기구인 교정청을 설치하였지만,
일본은 6월 21일 새벽 혼성여단 2개 대대로 경복궁을 점령하였다.
이로서 민씨정권은 무너지고 새로운 친일 갑오정권이 수립되었다.
갑오정권에는 1880년대 개화정책에 깊이 참여하였던 개화파 김홍집·김윤식 등과
개화정책을 통해 성장한 신진관료 출신인 김가진·유길준 등이 참여하였으며,
이들은 민중을 중심으로 한 농민혁명을 예방하기 위해 개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을 지지해 줄 민중 세력이 아직 계급·사상적으로 성숙하지 못했었고,
일본군의 진주 속에서 겨우 개혁의 고삐를 잡을 수 있었으므로 이들의 개혁은 자주적 근대화에 큰 손상을 입고 출발하였다.
2. 개혁내용과 의미
갑오정권에 참여한 개화파는 이전부터 추진하고자 했던 개혁안을 중심으로 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을 일부 받아들여
개혁정책을 시행하려 하였다. 그러나 1894년 7월 첫 내각이 출범한 이후 1896년 2월 아관파천까지 내각이 6차례나 바뀌는 등
혼란을 거듭하였다.
1차 개혁에 김홍집·이준용 내각은 정치·경제·교육 등 사회전반에 걸치 3개월 동안 210여 건의 근대 제도를 수립하였다.
이 때 개혁을 담당한 기구는 군국기무처였고 2차 개혁에 견주에 일본이 청과 전쟁을 막 시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인 자주성을 확보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봉건적인 전제군제주 아래에서 구별되지 않던 국정과 왕실기구를 개편하였는데,
이는 전제군주권을 약화시키고 내각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리고 갑오정권은 관리임용제도 또한 개혁하여 과거제를 폐지하고 인물 본위의 채용을 중심으로 하였다.
경제개혁도 단행되어 은본위의 화폐제도를 실시하여 신식화폐를 발행·유통시켰으며 외국 화폐 또한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이는 일본 화폐가 국내에 유통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 후에 일본이 조선의 경제를 장악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또 대동법 실시 이후 일부 시행되던 지세의 금납화를 완전히 실시하였다.
이 외에도 법적으로나마 신분제를 완전히 타파하였고, 공·사노비를 폐지하였으며,
기존의 사회폐습을 폐지하는 등 사회개혁을 단행하였다.
갑오정권의 1차 개혁은 갑신정변의 정령이나 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을 상당히 받아들이고 형식에서 근대사회를 지향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지만, 봉건적 토지제도를 개혁할 방안을 마련하지 않아 개혁의 기본 방향은 민중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지주의 입장을 옹호하려는 것이었다.
한편 청일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이 내정에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하면서 개혁방향 또한 바뀌어갔다.
1894년 12월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이 들어서면서 개화파정권의 친일적 성격은 더욱 짙어졌으며,
왕실은 일본공사 이노우에의 건의를 받아들여 '홍범 14조'를 발표하였다.
이때부터 1895년까지 2차 개혁(을미개혁)이 실시되었다.
홍범 14조는 청과 절연, 국왕의 친정과 이에 따른 법령 준수, 왕비와 종친의 정치 간여 배체 등에 중점을 두었는데,
이 개혁안의 대부분은 일본인 고문들에 의해 입안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발표된 개혁안은 이의 실현을 위해 추진한 차관도입이 무산되면서 실시되지 못했다.
개화파는 근대자본주의의 성립을 바라면서도 제국주의가 만들어놓은 새로운 지배질서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따라서 갑오개혁이 국가주권의 일본 종속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고
그 대비책도 가지지 못하였다. 그들의 주관적 애국사상은 결과적으로 제국주의 침략의 발판으로 바뀔 수 있었으며,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한 것이 이들의 중요한 한계였다고 볼 수 있다.
갑오개혁은 조선이 근대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갖추어야 할 겉모습을 담고 있었으나,
개혁을 뒷받침해야 할 민중을 소외시키고 일본에만 의지하려 하였다.
이는 곧 일본에 정치적으로 예속되는 결과를 낳았으며,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숨기면서 민족의 자존심마저 버리는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그 결과 전국에서 반일 의병봉기가 끊임없이 일어나게 되었고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하면서
이완용 등이 친러내각을 세우게 되었고, 이에 친일 갑오정권은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갑오정권에 참여했던 개화파 인사들과 관료들은 역적으로 몰려 살해되거나, 일본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마한 역사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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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개화파 내각에 의해 추진된 근대적 제도개혁.
갑오경장(甲午更張)이라고도 한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민씨정권은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청국이 이를 수락하고 군대를 파견하자 일본도 1884년의 톈진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청·일 양군이 주둔한 가운데 양국간에 전쟁 기운이 높아지자 조선 정부는 다시 양국군의 철수를 요청하였다.
이미 조선에서 정치적 지배력을 구축하고 있던 청국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침략의 명분으로서
조선에 내정개혁을 요구하였다. 민씨정권이 이를 내정간섭이라 하여 거절하자 일본군은 7월 23일 궁중에 난입하여
무력으로 민씨정권을 타도하고 흥선 대원군을 다시 영입하는 한편,
김홍집 등 개화파 인사들로 신내각을 구성하게 하였다.
이어 7월 27일에는 내정개혁 추진기구로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다. 여기에는 김홍집을 비롯한 박정양·김윤식·유길준 등
주로 개화파 인사들로 구성된 17명의 의원이 참여하여 개혁사업을 총괄 지휘하였다.
군국기무처가 설치되면서 진행된 개혁사업은 일본의 간섭 정도와 개혁주체의 성격변화에 따라 3단계로 나누어진다.
제1차 개혁은 군국기무처가 설치된 7월 27일부터 12월 17일까지 약 210건 개혁안을 제정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 제1차 개혁기간 동안에 일본은 청일전쟁을 치르는 데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혁과정에 집중적으로 개입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이 시기 개혁에는 갑신정변 이래 개화파가 줄기차게 추구해온 개혁구상이 비교적 충실히 반영되었다.
또한 갑오농민전쟁에서 농민군이 제기한 요구도 부분적으로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일본의 압력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또한 개화파 자신이 친일적 성향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이익을 보장하는 내용의 개혁도 상당 부분 존재했다.
먼저 정치제도의 개혁을 보면, 7월 30일의 의정부관제안과 8월 22일의 궁내부관제안에 따라 정부와 왕실이 제도적으로
분리되었고, 의정부관제안에 따라 국왕의 권한이 대폭 축소되면서 조선 후기 이래 유명무실화되었던 의정부가 정치의
중추기구로 자리잡았다.
또한 조선 초기부터 사무분장 기구였던 6조가 내무·외무·탁지·군무·법무·학무·공무·농상의 8아문으로 개편되었으며,
관료선발 장치로서의 과거제가 폐지되는 대신에 총리대신을 비롯한 각 아문 대신들에게 관리 임용권이 부여되었고,
18등급의 품계를 12등급으로 축소하여 칙임관(勅任官)·주임관(奏任官)·판임관(判任官)으로 개편하였다.
그밖에 청국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년의 사용을 의무화하여 청국과의 사대관계를 단절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과거의 봉건적 정치제도를 근대적인 것으로 일신시켰을 뿐 아니라,
군국기무처를 장악한 개화파로 하여금 국왕의 간섭에 구애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개혁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다음 사회개혁의 측면에서는 문벌제도와 반상차별 등의 신분제 철폐, 죄인연좌법 폐지, 조혼 금지 및 과부재가 허용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이들 조처는 갑오농민전쟁에서 제기된 요구와 대부분 일치되는 것들이었다.
이에 따라 수백 년간 지속되어온 봉건적 관습이 적어도 법률적으로는 완전히 폐기되었다.
마지막으로 경제부문의 개혁은 재정개혁과 화폐개혁 중심이었다. 재정부문에서는 그동안 각 궁방과 관청에서 자체 경비를
조달하던 방식을 지양하고 모든 국가 재정을 탁지아문에서 전관하도록 하였으며, 조세의 금납화를 의결하였다.
화폐제도면에서는 12월에 신식화폐장정을 제정하여 은본위제를 채택하였으며, 일본화폐의 조선내 통용권을 허용하였다.
제2차 개혁은 1894년 12월 17일 청일전쟁의 승리를 눈 앞에 둔 일본이 대원군을 퇴시키고 군국기무처를 폐지하는 한편,
일본에 망명중이던
박영효 등을 귀국시켜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을 구성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시기 일본의 영향력은 이전보다 더 강화되었고, 농민군이 패배함에 따라 사회개혁의 추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때문에 개혁과정에서 개화파의 주도성은 거의 상실되었다.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은 고종으로 하여금 청국과의 전통적인 사대관계 단절, 종친과 척족의 정치간여 금지,
정부 각 기관의 사무분장, 재정제도의 정비 등을 주 내용으로 한
홍범(洪範)14조를 발표하게 하였다.
이 홍범14조는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띤 법령이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새 내각은 총 213건의 개혁안을 제정, 실시하였다.
먼저 의정부와 각 아문의 명칭을 내각과 부(部)로 변경하고 농상아문과 공무아문을 농상공부로 통합, 7부를 설치하는 등의
개혁이 진행되었으며, 궁내부 관제는 대폭 축소되었다.
지방제도도 크게 변경되었는데, 종래의 도·부·목·군·현 등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하여 23부 337군으로 개편하였다.
재정제도에서는 전국에 9개 소의 관세사와 220개 소의 징세서를 설치하여 조세사무를 전관하도록 하였다.
이밖에 군부관제·훈련대사관양성소관제·경무청관제 등을 제정하여 근대적인 군사·경찰 제도를 확립하였고,
재판소구성법·법관양성소규정 등을 제정하여 사법제도의 근대화를 기하였다.
그러나 제2차 개혁은 개혁방향에 불만을 품은 일본측과 고종·중전 민씨 등의 공격에 의해
박영효가 다시 일본으로 망명함에 따라 끝나고 말았다.
박영효가 망명한 이후 다시 김홍집이 내각수반이 되어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것이 1895년 8월 24일부터 1896년 2월 2일까지 추진된 제3차 개혁이다. (을미개혁)
박영효를 몰아낸 민씨세력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몰아내려고 시도했다.
그 때문에 3차 김홍집 내각 발족 초기 일본의 영향력은 상당히 퇴색하였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에 의해 중전 민씨가 학살된 후(을미사변),
개혁은 오로지 일본의 뜻대로만 진행되다시피 하였다.
이 시기에도 연호의 제정, 단발령 실시, 태양력의 채택, 종두법 실시, 소학교령의 발포 등 총 140여 건의 개혁안이
심의·의결되었다.
그러나 이때 공포된
단발령은 전국 각지에서 보수적인 유생들로 하여금 의병을 일으키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김홍집 내각의 친일적 성격에 대한 민중의 불만에 불을 붙여 급기야
아관파천 이후 김홍집을 비롯한 내각 요인들이
살해당하는 상황을 빚어내게 되었다.
김홍집 내각이 붕괴됨에 따라 2년 가까이 지속된 갑오개혁은 끝을 맺었다.
갑오개혁은 19세기 이래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한 내재적 개혁의 흐름이면서도,
청일전쟁의 결과 동아시아에 형성된 일본중심의 근대적 제국주의 질서 속에 조선이 편입된 과정을 법제화한 양면성을 띤
개혁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것은 대내적으로 반봉건 근대화의 이념에 의한 부국강병의 근대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였으나,
대외적으로 반침략자주화의 민족적 과제를 상실한 예속적 개혁운동으로, 일제 식민지화의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