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성한 교통의 조건들
1요 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1: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1:7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1: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
1: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해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2: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2:4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2: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2: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2: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의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2: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것은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
2: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요
2:10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2:11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두운 가운데 있고 또 어두운 가운데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어두움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니라
요한일서 1장 5절부터 2장 11절에서는 신성한 교통의 조건들이 있다. 첫째 조건은 1장 5절부터 2장 2절까지의 우리의 죄들을 자백함이며, 둘째 조건은 2장 3절부터 11절까지의 하나님과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1. 죄들을 자백함
(1) 죄
1) 죄와 허물과 불의
우리는 주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다. 이것은 거듭나기 전에 지은 죄들을 자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죄들을 자백함은 거듭난 후에 지은 우리의 죄들과 허물들과 불의들을 자백하는 것이다. 죄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 행한 것들이며, 허물들은 사람들에 대하여 잘못 행한 것들이다. 죄와 허물은 불의이다. 불의는 잘못된 행위의 더러운 것들, 즉 오점이나 표시이다.
죄들을 자백하기 위해서 우리는 여전히 육신 안에 거하는 죄를 가지고 있으며 죄를 지을 가능성이 항상 있음을 깨닫을 필요가 있다. 범죄할 때마다 우리는 죄를 자백해야 한다. 그래야 죄와 허물로 인하여 하나님과의 교통이 깨어져 신성한 생명의 누림을 잃은 것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죄와 허물로 인하여 우리는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올바르지 않게 된다. 하나님이나 사람에게 올바르지 않는 우리의 범죄에 대하여는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하고, 우리의 더러움에 대하여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시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끊어진 교통을 회복하려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시는 것과 깨끗하게 하시는 것 모두 필요하다.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것은 죄들의 허물에서 우리를 해방하시는 것이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은 불의의 더러운 것을 씻어주시는 것이다. 죄들의 허물에서의 해방과 불의의 더러운 것에서의 깨끗함은 우리가 선한 양심, 곧 거리낌이 없는 양심(딤전 1:5, 행 24:16)을 가지고 끊임없이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죄와 허물을 범할 때마다 하나님께 자백해야 한다. 우리의 자백은 하나님의 예비하심, 곧 그 아들 예수의 피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의로우심과 대언자(변호자)와 우리의 화해이신 그리스도에 근거한다.
2) 죄와 죄들
죄들(sins)은 죄있는 행위들, 즉 내주하는 죄의 열매들을 가리키고, 죄(sin)는 내주하는 죄를 가리킨다. 1장 7절의 모든 죄는 우리가 거듭난 후에 짓는 하나 하나의 모든 죄를 가리킨다. 이러한 하나 하나의 모든 죄는 정결하게 된 양심을 더럽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통 가운데서 주님의 피로 깨끗하게 되어야 한다.
우리의 죄, 곧 본성 안에 거하는 죄(롬 7:17)는 속죄제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처리되었다(레 4장, 사 53:10, 고후 5:21, 히 9:26, 요 1:29). 또 우리의 죄들, 우리의 잘못들은 속건제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처리되었다(레 5장, 사 53:11, 고전 15:3, 히 9:28, 벧전 2:24). 그러나 우리는 거듭난 후에도 1장 8절에서 지적한 우리의 본성 안에 있는 죄 때문에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죄제로 취해야 하고, 1장 9절에서 지적한 우리의 행위 안에 있는 죄들 때문에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건제로 취해야 한다.
3) 그 아들 예수의 피
‘예수’라는 이름은 구속하는 피를 흘리는데 필요한 주님의 인성을 나타내고, ‘그 아들’이라는 칭호는 구속하는 피의 영원한 효능을 위해 필요한 주님의 영원한 신성을 나타낸다. 주님의 인성은 우리를 위해 죽으심의 자격, 즉 구속자와 대속자의 자격을 말하고, 주님의 신성은 영원한 능력과 구속자와 대속자의 자격을 보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아들 예수의 피는 하나님이 타락한 창조물을 구속하기 위하여 흘리신 진정한 사람의 피요, 영원한 효능이 있는 신성한 보증을 지닌 피라는 것을 가리키는데, 그 효능은 공간적으로 온 땅에 미치며 시간적으로 영원히 지속된다. 그래서 영원한 구속이다(히 9:12).
4) 깨끗하게 하다
‘깨끗하게 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동사의 시제는 현재이며, 계속적인 행동을 나타낸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가 항상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우리를 깨끗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깨끗하게 하는 것은 우리의 양심 안에서 주님의 피가 즉각적으로 깨끗하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주님의 구속하는 피는 하나님 앞에서 한 번만에 영원히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했다(히 9:12, 14). 이 깨끗하게 하는 효능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지속되기 때문에 다시 깨끗하게 반목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과의 교통 가운데서 신성한 빛으로 비춤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반복하여 양심 안에서 주님의 피로 항상 깨끗하게 되는 것을 즉각적으로 적용해야 한다. 즉각적으로 깨끗하게 하는 것은 암송아지의 재를 탄 물로 부정을 씻어내어 정결하게 하는 것으로 예표된다(민 19:2-10).
(2)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의로우심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요일 1:10)에 대하여 신실하시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요일 1:7)에 대하여 의로우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의 말씀(엡 1:13)인데,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겠다고 말씀하신 것(행 10:43)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를 이루셨으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실 수 있다(마 26:28)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심판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씻는데 효능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죄들을 자백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실 수 밖에 없다.
만일 우리가 죄들을 자백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에 대해 신실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하여 의로우셔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은 구속에 근거하여 우리를 용서하신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은 신실하지도 않으시고 의롭지도 않으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용서받고 깨끗하게 되려면 우리의 자백이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용서받고 깨끗하게 하시는 것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교통을 회복하기 위한 것인데, 그것은 조건적인 것으로서 우리의 자백에 달려 있다.
(3) 변호자(대언자)
우리는 거듭나도 여전히 우리 육신에 죄가 거함으로 죄를 지을 수 있다. 믿는 이들이 신성한 생명을 소유하고 있을 지라도 신성한 생명으로 말미암아 살지 않고 신성한 생명의 교통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다. 죄를 인해 우리는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죄를 짓는다면 우리에게는 우리의 변호자(대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변호자(대언자)라는 헬라어 단어는 ‘parakletos’로서 그 단어는 다른 사람 편에 서서 돕도록 요청받은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조력자이다. 이 말은 또한 법적인 도움을 제공하는 사람이나 다른 사람을 위하여 중재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영적인 필요를 공급하는 후원자(patron)나 보호자나 변호자나 법률 고문이나 중재자나 대언자이다. 이 말은 위안과 위로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위로자나 위안자이기도 하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단어가 우리 안에 계신 보혜사(요 14:16, 26, 15:26, 16:7), 곧 우리의 사건이나 우리의 일들을 돌보아 주시는 분이신 실재(진리)의 영을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우리의 변호자(대언자)인신 주 예수님을 가리킨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주 예수님은 그분 자신께서 성취하신 화해에 근거하시어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롬 8:34, 히 7:25)하시고 변호(대언)하심으로써 우리의 죄지은 일을 돌보아 주신다.
주님은 어떻게 그런 변호자(대언자)자 되실 수 있나? 그것은 다름 아닌 그분만이 유일한 의인이시기 때문이다. 십자가 위에서 주님의 의로운 행동(롬 5:18)은 우리와 모든 죄인을 위하여 의로우신 하나님의 의로운 요구를 이루셨다. 그러므로 오직 주님만이 우리의 변호자(대언자)자 되실 수 있으시다. 즉 주님만이 우리가 범죄한 상태에 잇을 때에 우리를 돌보아 주시고, 또한 우리를 의로운 상태로 회복시키시어 우리와 의로우신 아버지의 관계가 진정되도록 하실 수 있으시다.
2장 1절은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우리에게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변호자(대언자)께서 계시니”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 있다. 여기에서 아버지라는 칭호는 우리의 변호자(대언자)이신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처리하시는 일이 가정의 일, 곧 자녀들과 아버지 사이의 문제라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는 거듭남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들로 태어낫다. 우리가 거듭난 후 죄를 짓는다면 이것은 자녀들이 아버지께 죄를 짓는 문제이다. 우리의 변호자(대언자)는 우리의 화해 제물로서 죄문제를 처리하시고, 우리와 아버지 사이의 중단된 교통을 회복시키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가정의 식구들이다. 우리에게 있어서의 법정은 영적인 가정이다. 그 법정의 소송 사건은 가정 문제이다. 그 법정에서 우리의 변호자(대언자)는 의로우신 우리의 맏 형님이시 주 예수님이시고 재판관은 아버지 하나님이시고 죄인은 영적인 가정에서 때때로 죄를 잘못을 저지르는 그릇된 우리들이고, 우리의 죄는 아버지의 집 안에서 우리가 버릇없이 행하거나 실수하거나 규율을 어기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정의 자녀인 우리가 아버지께 죄를 지을 때 우리는 회개하고 자백해야 한다. 그 때 어머니의 역할을 하시는 주님이 우리의 변호자(대언자)가 되시어 화해를 유도하실 것이다. 그러면 아버지는 용서하실 것이다.
(4) 우리의 화해이신 그리스도
요한일서 2장 2절에서 주님은 우리의 죄를 위한 화해 제물이시라고 말하고 있다. 이 헬라어 단어 ‘힐라스모스(hilasmos)’는 ‘화해시키는 것’, 즉 화해 제물을 의미한다(요일 2:2, 4:10). 이것은 단지 행동만이 아니라 화해시키는 것, 즉 사실상의 화해 제물로서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실지로 사용된 것이다.
주님은 화해 제물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다(갈 2:20, 엡 5:2, 25). 예수 그리스도의 피뿐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직접 화해 제물이 되셨다. 예수 그리는 우리 죄들에 대한 화해, 곧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화해를 위한 희생 제물이시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들을 위한 희생 제물로서 그분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셨다. 이것은 우리의 구속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 시키기 위한 것이다(히 9:28).
(5) 결론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의로우심과 대언자(변호자)와 우리의 화해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교통이 회복됨을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요한일서 2장 1절과 2절은 우리와 하나님의 교통을 끊어지게 하는 우리의 죄들에 대한 우리의 자백과 하나님의 용서를 언급하는 요한일서 1장 5절부터 10절까지에 있는 말씀의 결론이다. 그 결론은 바로 화해이다. 교통의 회복은 전적으로 화해에 근거한다. 사실상 화해는 회복된 교통이다. 화해를 근거로 우리는 하나님과 친교할 수 있으며 그분은 우리와 친교하실 수 있다. 그럴 때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는 상호 누림을 위한 왕복 교통이 있게 된다. 이것이 신성한 교통을 유지하기 위한 첫째 조건이다.
2. 하나님과 형제들을 사랑함
신성한 교통을 유지하기 위한 둘째 조건은 하나님과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요한일서 2장 3절부터 11절까지에 그것이 나와 있다.
(1) 하나님을 앎
2장 3절의 ‘안다’는 단어를 직역하면 ‘알아 왔다’이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기 시작했고 또 지금까지 계속 알고 있다는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가리키며 또한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한 교통을 갖는 것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되면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교리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형제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계속적이고도 체험적으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잠시 아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또한 영 단번에 하나님을 알 수도 없다. 우리는 신성한 생명 안에서 계속 삶으로써 체험적으로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삶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삶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 생활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사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는(live) 한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내가 메시지를 전할 때나 성경 공부를 할 때 내 갈망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가끔 어떤 말이 내 입에서 나오려고 할 때 나는 그 말을 삼켜야 할 필요를 느끼는데, 이는 내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말하고 있기 때문이며, 하나님이 내가 말하려는 것을 조절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내 자신 안에서 말하기를 원치 않고 하나님 안에서 말하기를 원한다. 나는 내가 말할 때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거나 전할 때 얼마나 하나님을 알게 되는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거나 전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체험하는 황금 같은 기회이다.
만일 우리가 신성한 사랑을 체험하고 누리며 그 사랑으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기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체험적으로 알 필요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되기 위한 기본적인 요구이다.
(2) 주님의 계명들을 지킴
2장 3절에 있는 주님의 계명들은 요한복음 13장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이다.
만일 우리가 체험적으로 계속해서 하나님을 안다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주님의 계명들을 지킬 것이다. 하나님을 알 때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지킨다.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받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이 다만 명령이나 지시가 아니다.
주님의 계명들은 새 계명이므로 그것은 옛 계명과 다르다. 옛 계명은 모세가 우리에게 준 “~하라, ~하지 마라”는 명령을 강조한다. 그러나 주님의 계명들은 새 계명이고 그것을 2장 6절에서는 ‘말씀’이라고 하였다. 말씀은 우리에게 공급이 되는 영과 생명이다. 그래서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라고 주님은 말하고 있다. 주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의 영 안에서 생명을 공급한다. 이것은 우리의 체험으로 증명될 수 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받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때마다 즉시 우리 안에는 생명 공급이 있다. 주님의 말씀은 모세의 율법과 다르다. 모세의 율법은 명령과 요구가 있는 지시이지만 어떤 공급도 없다. 그러나 신약에서 주님이 명령하시는 것마다 공급하시는 말씀이다. 주님의 생명 공급이 주님의 명령을 떠받치고 있다. 주님의 명령은 단지 우리에게 어떤 것을 하라고 요구하는 지시가 아니다. 무엇을 명령하든지 그것은 항상 공급하는 말씀이다. 심지어 주님의 말씀은 생명이요 그 영이신 주님 자신을 우리에게 공급한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체험하고 누릴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지킴으로써 우리는 주님의 공급을 누린다.
(3) 하나님의 사랑(agape)
2장 5절의 하나님의 사랑(agape)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가리키는데 이것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생겨난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켜 주님의 공급을 받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케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의 공급을 받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누림이 되며 이 누림이 하나님과 형제들을 향한 사랑을 낳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왔다. 이제 그 사랑으로 우리는 다시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다, 이것은 신성한 사랑을 누림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사랑이 되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2장 5절에 따르면 하나님의 사랑, 주님의 말씀, 하나님 자신은 서로 관련이 있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지킨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온전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신성한 생명의 문제인데 이 신성한 생명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의 내적인 본질이고, 주님의 말씀은 이 신성한 본질을 우리에게 공급하며, 우리는 이 신성한 본질로 형제들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신성한 말씀을 지킬 때 우리가 사는 신성한 생명을 통해 신성한 사랑이 온전하게 된다.
(4) 하나님의 사랑(agape)이 온전하게 됨
‘온전한’이란 헬라어 단어는 ‘teleioo’이다. 이 단어는 완전하게하다(complete), 성취하다(accomplish), 끝내다(finish)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사랑 그 자체는 온전하고 완전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온전하지도 않고 완전하지도 않고 절대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온전하고 완전하고 절대적으로 나타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우리를 위해 보내시어 그 아들이 우리의 화해 제물과 생명이 되게 하셨을 때 이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다(요일 4:9-10). 우리는 이 사랑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랑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누리고 체험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산출된다. 우리 안에 산출되는 하나님의 사랑은 자라고 증가되어 온전하고 완전하게 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산출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누림이 되고 체험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체험하고 누림을 통하여 산출된 우리의 사랑이 된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이 된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난 것 같이 이 사랑으로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온전하고 완전하게 우리를 통하여 나타나지 않는다. 이 사랑은 우리 서로가 습관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사랑함으로써 우리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표현되어 나타날 때에 온전하고 완전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생활은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어 온전하고 완전하게 한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생활할 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 안에서 나타나시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다(요일 4:12). 그러면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안다(요일 2:5).
우리가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주님과 하나라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이신 주님과 하나이므로,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 우리의 것이 된다. 이 본질은 주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공급되어 우리가 사랑으로 행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신성한 생명의 교통을 누리고 또 신성한 빛 안에 거할 수 있도록 한다(요일 2:10).
(5) 옛 계명이면서 또 새 계명인 형제 사랑
2장 8절에서 형제 사랑은 옛 계명이면서 또 새 계명이라고 말한다. 형제 사랑이 옛 계명인 이유는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그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며, 새 계명인 이유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할 때에 이 계명은 새로운 서광으로 비치고, 그 후에도 새로운 빛과 신선한 능력으로 계속해서 비추어 주기 때문이다. 형제 사랑의 계명은 빛나는 말씀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 안에서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히 4:12) 우리 안에서 빛을 비추어 준다. 그래서 우리를 날로 날로 새롭고 신선하게 만든다(고후 4:16).
(6) 참된 것 참 빛
2장 8절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것은 저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췸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이 구절의 ‘그것은’ 이 단어가 헬라어에서 중성이므로 여성 명사인 계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사랑하라는 옛 계명이 새 계명이 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옛 계명이 새 계명이 되었다는 것은 주님께 참된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믿는 이들에게 계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그들이 매일 행할 때에 그 계명을 계속 새롭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는 이들에게도 참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번 만에 영원히 그 계명을 받았을 뿐 아니라 그 계명으로 말미암아 반복해서 빛 비춤을 받고 신선해지기 때문이다.
하늘에 속한 빛은 생명 안에 있고 생명은 말씀 안에 있다(요 1;1-4). 생명의 말씀은 빛 비춤을 주어 새로움과 신선함을 공급함으로 옛 것을 새 것으로 만든다. 이것은 아침이 오면 빛이 비추임으로 새 날이 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사람의 말은 죽은 말이다. 그래서 잠시 신선함과 새로움을 주는 것 같지만 금방 시큰둥해지거나 고리타분해지는 것과 차이가 있다. (7) 참 빛
참 빛은 주님의 계명의 빛이다. 이 빛이 비치기 때문에 형제 사랑에 관한 계명의 서광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옛 계명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전반에 걸쳐 항상 새롭고 신선하게 된다.
빛은 하나님의 본질의 표현이며 진리의 근원이다. 신성한 사랑은 신선한 빛과 관계가 있다. 신성한 사랑은 사탄에 속한 미움과 반대가 되는데, 그 미움은 사탄에 속한 어둠과 관계가 있다. 주님 안에 있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어둠 안에 있다는 표시이다(요일 2:11). 마찬가지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빛 안에 거한다는 표시이다(요일 2:10). 사랑은 우리를 빛 안에 거하게 하고, 빛은 우리에게 형제들을 사랑하게 한다.
빛 안에 거하는 것은 주님 안에 거하는 것(요일 2:16)에 달려 있고, 주님 안에 거할 때 형제들을 향한 사랑이 나온다.
(8) 결론
만일 우리가 신성한 교통의 둘째조건-하나님과 형제들을 사랑함-을 만족시키기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분을 안다면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지킬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지킨다며 우리는 그분의 생명 공급을 받을 것이다. 사랑에 대한 우리의 체험과 누림은 하나님과 형제들을 향한 사랑을 낳을 것이다. 이것이 신성한 교통을 유지하기 위한 둘째 조건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3. 결론
신성한 교통의 두 조건들은 부정적인 면에서의 죄와 긍정적인 면에서의 사랑을 포함한다. 부정적인 면에서 우리는 죄를 처리할 필요가 있다. 긍적적인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형제들을 향한 사랑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죄는 처리되어야 하고 사랑은 온전케 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죄를 처리하고 하나님과 형제들을 향한 사랑을 실행한다면 우리는 신성한 생명의 교통 안에 우리 자신을 보전하는 두 조건들을 만족시키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