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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이 성경을 뒷받침하는가?
모든 분야에서 증거는 다가오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사람들에게 정확하게 전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남겨놓으신 책은 예언과 계시이며 그에 따른 역사적 증거까지 존재한다.
증언은 두세 명의 증인의 입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원칙이다. 두세 명의 증인이라는 성경적 원칙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진실성과 정확성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를 수집하고 증거를 통해서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모든 분야에서 증거는 인류에게 다가오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정확하게 전달하셨고, 그의 책은 예언과 계시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진리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그의 말씀이 기록된 책이기에 세상의 어떤 책보다 독특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서라면 비슷한 원리가 고고학의 현대 과학에서 증명된다. 우리는 영원하신 주님의 말씀은 하늘에 온전히 이루었다고 듣는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세대를 초월하며 오래도록 지속되었다는 것에서 증명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모든 것은 인간을 향한 그의 특별한 계시와 계획이었다.
영감을 받은 옛사람들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기록했고, 자신이 살았던 시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하며 살았다. 또한 현재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이들에게 적용되며 그의 뜻을 이루어 주셨다. 성경은 언어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기적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것은 성령의 계시 외에는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깊이 드러내는 하나님의 방법인 것이다.
창세기 1장-11장에 관한 주요 증거
창세기 1장-11장은 창조주 하나님, 친구, 계시자, 심판자, 구원자, 복원자, 그리고 지지자와 같은 아브라함과 위대한 교리에 대한 소개의 말씀이다. 이것은 기독교의 바탕이며 성경의 씨앗이며 줄거리이다. 또한, 이것은 실제 역사이며 인류의 시작과 역사의 시작인 것이다.
인간의 창조는 기존의 물질로부터 창조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창조는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을 일컫는다. 그리고 창조에 대한 모든 것은 성경 외에는 없다. 성경은 또한 이러한 창조의 사실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책이다. 그러므로 우월할 수밖에 없다.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바빌로니아 홍수 이야기가 포함되어 있지만 그것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 모든 근원과 원인과 결과까지 기록되었다.
바빌로니아 창조판 중 하나인 에누마 엘리시, 길가메시 서사시의 일부
창세기 11장 ~ 36장에 관한 주요 증거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는 레너드 울리 경에 의해 발굴되었고, 그들의 문화는 놀라울 정도였다고 증거한다.
성경에 묘사된 이스라엘 족장들의 역사를 보면 모두 고고학적 증거가 발견되고 있다. 그러므로 고고학적 발견과 증거는 성경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14장에 네 명의 왕에 맞서 싸운 다섯 명의 왕에 대한 기록은 당시의 알려진 말과 이름이 맞아 떨어진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창세기 23장에서 아브라함이 히타이트인과 협상한 것은 정확한 사실이었다. 성경은 초기 사람들을 "해티의 아들들" 또는 "히타이트인"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것은 역사학적으로 사실이었다.
창세기 14장 히타이트어로 가신을 뜻하는 단어는 "사람의 집에서 훈련받은 하인“이라는 뜻이다. 이 용어는 이곳 성경에서만 사용되고 있다.
창세기 37장 - 50장에 관한 주요 증거
아브라함의 증손자이자 야곱의 아들인 요셉의 역사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의 형제들은 그를 팔고 결국 이집트의 신하까지 팔려갔다. 요셉은 이집트에서 성공하게 되고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인들이 정착하는 것을 돕는다.
창세기 39장 이집트 호칭으로 알려진 경비대장은 "감시자", "집사의 우두머리", "제빵사의 우두머리", "파라오의 아버지" 라고 불렸다.
신권 이탈에 관한 주요 증거
기원전 1900년 경의 에슈누나 법전
이것들은 모세가 쓴 오순절의 다른 네 권의 책이며, 아마도 때때로 대제사장 아론과 군사 지도자 여호수아와 상의했을 것이다.
모세의 법은 파라오의 궁정에서 자란 사람에 의해 쓰여졌고, 그것은 바빌로니아 왕 함무라비와 현대 바그다드 근처에서 발견된 에슈누나 법전 같은 다른 법전들보다 훨씬 우수했다.
기원전 1900년 경의 에슈누나 법전
솔로몬과 다윗에 관한 주요 증거
사울이 죽었을 때 다윗의 찬가는 그의 시대 문체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다. 우가리트 도서관의 발견 이후, 비평가들의 주장처럼 다윗의 시편은 800년 후의 맥카비 시대가 아니라 그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유명한 학자인 윌리엄 폭스웰 올브라이트는 "다윗의 시편이 맥카비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썼다.
하조르, 메기도, 게저와 같은 솔로몬 도시들이 발굴되었다. 솔로몬은 심지어 몇몇 중복된 건물에 비슷한 청사진을 사용하기도 했다.
솔로몬의 도시 입구
아시리아에 관한 주요 증거
앗시리아의 왕 사르곤, 이사야 20장 1절에서 언급 되었다.
센헤립 경로 : 클리포드 윌슨 박사가 센헤립의 궁전과 그의 아들들이 그를 죽인 사원 사이에 파놓은 길의 일부를 발견했다.
솔로몬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공포의 통치'의 시기였다.
아시리아 왕 목록에 사르곤이라는 이름을 가진 왕이 없었기 때문에 비평가들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현재 사르곤의 궁전은 코르사바드에서 복원되었으며, 벽 비문과 블레셋의 도시 아스도드와의 전투를 지지하는 도서관 기록도 포함되어 있다.
타탄과 같은 아시리아식 호칭은 성경 작가들에 의해 무심코 자신 있게 사용되고 있다.
랍마그, 랍쉐이크, 티파루와 같은 다른 아시리아인들의 칭호들도 성경 작가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아시리아인들이 기원전 605년 카르케미시 전투 이후 역사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이러한 "구식" 단어들의 유지는 기록의 목격자 본성에 대한 강력한 지침이다. 역사적 사실을 쓴 사람도 예언을 썼기 때문에 예언의 진위여부를 알 수 있다.
산헤립의 죽음은 산헤립의 아들 에살하돈의 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것은 나중에 에살하돈의 아들 아슈르바니팔에 의해 추가되었다.
니느웨에 대한 다양한 세부사항과 요나의 설명은 성경의 역사성을 가리킨다. 니네베의 상징은 뱃속에 물고기가 있는 임산부였다.
요나 시대의 왕이었을지도 모르는 아닷-니라리 3세는 아마도 예언자 요나의 메시지를 따라 주목할 만한 개혁을 도입했다.
아다드-니라리의 궁전은 사실상 "네비 유니스" (예언자 요나)로 알려진 후기 건축물과 나란히 있었다. 그 건물은 요나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고, 그럴 가능성은 낮다.
앗시리아의 왕 사르곤
산헤립의 궁전 유물 일부
바빌로니아와 느부갓네살에 관한 주요 증거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약탈하고 유다를 포로로 잡아갔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이 바빌론의 찬란함을 책임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약 100년 전 바빌론을 발굴한 독일인 콜드웨이 교수가 확인하기 전까지 현대 역사학자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바빌로니아 연대기를 통해 느부카드네살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날짜가 기원전 597년 3월 15일/16일 밤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그의 아버지 나보니두스가 약 10년 동안 바빌론을 떠나 있었기 때문에 벨샤자르가 바빌론의 왕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는 그 기간 동안 그의 아들 벨사살을 공동 섭정관으로 임명했다.
바빌론에 대한 예언은 문자 그대로 실현되었다. 느부갓네살은 바빌론의 성벽이 그의 이름을 영원히 기념할 것이라고 썼지만, 예레미야는 "바빌론의 넓은 성벽은 완전히 무너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런 왕은 없었다는 비판도 있지만 그의 궁전과 서재는 공개되었다.
키루스(고레스)와 메데와 페르시아에 관한 주요 증거
메데와 페르시아는 바빌로니아인들의 뒤를 이었다.
사이러스는 메데스와 페르시아의 왕이 되었다. 키루스의 이름이 성경에 예언적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을 성경은 증언한다. 그는 포로가 된 사람들이 그들의 나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용하는 유명한 키루스 칙령을 발표했다.
하나님은 그들의 백성의 역사 속에 계셨고 심지어 그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방인 왕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 나라가 바로 바벨론이었다.
키루스 대왕에 대한 예언이 이사야에 실려 있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관한 주요 증거
이들이 있었던 시기는 바빌론에서 추방된 후 다시 귀향해 정착한 정착한 시기다.
성경에 따르면 산발랏은 사마리아의 총독이었다. 그러나 많은 작가들은 산발랏이 느헤미야보다 훨씬 늦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에즈라와 네헤미아는 실제 역사적 상황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남겼다.
느헤미야의 시대는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가 아니라 기원전 465년부터 423년까지 통치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와 함께였다. 이것은 구약성서의 연대가 현대 연구에 의해 종종 확립되는 것을 보여준다.
느헤미야 성벽 복원 부분
사해에 관한 주요 증거
사해문서 - 사해 근처의 동굴에 묻힌 지 약 2000년이 지난 후, 이 두루마리들은 AD 1947년에 다시 빛을 보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메시아를 찾고 있었다. 즉, 왕과 같은 다윗, 이스라엘 백성의 대제사장, 멜키제덱의 명령을 따른 대제사장, 모세와 같은 예언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스더를 제외한 모든 구약성서의 조각들이 히브리어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두루마리들은 대부분의 구약성서 사본들을 제공했는데, 이는 현존하는 히브리어 사본들보다 약 1,000년 앞선 것이다.
이사야의 사해 두루마리에도 두루마리 여백에 X자처럼 보이는 히브리 문자 '타우'의 옛 형태가 보인다. 사해 문서(이사야의 거의 완전한 사본)는 모두 약 2000년 동안 인간의 눈에서 완전히 숨겨져 있었다.
사해 두루마리 발견은 성서 고고학과 성경의 관련성에 관한 가장 놀라운 사실들 중 하나일 것이다.
사해와 함께 회수된 이사야의 주요 문서 일부
예수에 관한 주요 증거
여론조사 명세서. 투표세 등록에 관한 비문의 일부, 예수의 말과 행동을 둘러싼 사건들은 고고학적 발견으로 증명되었다.
주님 탄생 당시의 인구 조사에 관한 문제는 중요한 파피루스 문서의 발견으로 해결되었다. 이 문서들은 이집트에서 방부처리 되어 발견되었다. 이 문서들은 신약시대 직전, 기간 중, 직후에 쓰여진 유대교 사제들의 글이었다.
발굴자 그란펠과 헌트는 그들의 증거가 퀴리니우스 시대에 일어난 최초의 인구 조사(인적세)임을 보여준다고 보고했다.
투표세 등록에 대한 비문의 일부
신약성서, 초대교회에 관한 주요 증거
신약성서의 문서들은 정확한 역사적 문서들로 검증되었다.
소아시아에서 윌리엄 램지 경과 그의 후계자들의 발견은 역사학자 루크와 다른 신약성서 작가들의 진실성을 재정립시켰다.
비평가들로부터 가장 공격을 받은 세 개의 성경 글은 모세의 오순절, 에즈라/느헤미아, 누가였다. 이 모든 것들이 신뢰할 수 있는 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정확하고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 현저하게 확인되었다.
많은 증거들은 신약성서 문서들(파피루스)과 세속적인 로마 작가들과 초기 교회 지도자들의 풍부한 증거들 사이의 연속성을 보여준다.
고고학이 성경을 증명하는가?
성경에서 다룬 과거 시대를 발굴하기 위해 굴착기를 파헤쳐도 성경의 직접적인 역사가 발굴될지는 결코 장담할 수 없다. 성경과 역사와의 연결, 즉 고고학적 발견은 성경을 증명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말씀을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고고학자들은 성경을 연구하나 그들이 전적으로 성경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학구적인 고고학자들이 기독교 신자이지만, 그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엄밀히 말해 ‘고고학은 성경을 증명한다’라는 말은 사용해서는 안된다. 이런 말은 고고학을 성경보다 우선시하는 말이 될 수 있다.
확실한 고고학 결과가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면 어떻게 될까?
고고학은 특정 성경 사건을 지지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성경을 증명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고고학이 주요 토대가 아닌 지지대이기 때문에 이러한 발언은 유보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증거가 사라진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성경에 있는 수천 개의 사실들은 입증할 수 없다. 그러나 확인이 가능하고 밝혀진 성경은 모든 문헌에서 독특한 방식으로 세심하게 조사를 해야 한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계속해서 정당성을 입증해 왔다. 모세가 기록한 기록물은 역사의 한 장면이 되었고, 여호수아 치하의 가나안 정복 기록은 목격자의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다윗의 시편은 분명히 그의 시대의 산물이었고, 솔로몬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전설"로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 솔로몬은 문학의 거인이었고, 상업계의 거물이었으며, 하나님 밑에서 강력한 통치자였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황금기를 주었다.
앗시리아 시대는 지난 150년 동안 궁궐이 잇따라 발굴되면서 성경 기록들을 극적으로 확인시켜주었다. 이러한 발굴은 구약성서의 왕, 예언자, 사람들, 사건들의 배경에 대한 이해를 끊임없이 더해 주었다.
이스라엘 족속의 베벨론 유배는 이미 역사적인 사실이 되었고 키루스 칙령으로 이스라엘이 돌아와 그들의 신념에 따라 예배를 드릴 수 있었던 것도 역사적인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신약성서 문서들은 사실적이고 목격자들의 기록으로 일관되게 입증되어 왔다. 왕, 통치자, 관리들의 이름은 명백하게 역사와 같고, 호칭은 무심코 사용되었지만 매우 정확했고, 지리적으로 국가의 경계도 명확하며 그들의 풍습까지도 올바르게 언급되었다.
성경 기록과 관련된 고고학
우리는 고고학적 발견으로 인해 성경의 본질적인 교리에 대한 이해가 결코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구약성경은 현대의 기록이 아닌 고서이며, 그 문체는 서양이 아니라 동양이라는 것도 알았다.
때때로 성경은 떠오르는 태양을 언급할 때처럼 "현상의 언어"를 사용한다. 과학적으로 말하자면, 지구는 "떠오르는 것"이다. 하지만, 비록 성경이 과학 교과서는 아니지만, 성경이 과학에 대해 언급하는 부분은 놀랍도록 정확하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고고학의 새로운 과학이 성경의 기록에 닿을수록 우리는 그것이 독특한 기록이라는 것을 더욱 확신하게 된다. 많은 점에서 그것은 사람들이 남긴 다른 글보다 훨씬 우수하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고 있다.
성경은 절대적인 신의 유산이지만 고고학은 그렇지 않다. 고고학이 성경을 증명할 수 있다면 고고학이 성경보다 더 위대할 텐데 그렇지 않다. 성경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위와 함께 나온다. 그것은 그분의 말씀이며, 그분은 다른 어떤 것보다도 위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은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자신감을 회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성경은 말씀을 통해 사람들을 변화시켰고, 관습, 문화, 배경 등의 역사를 알아가는데도 도움을 주었다.
성경의 고고학적 가치
고고학은 많은 학자들이 성경을 훨씬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것은 많은 점에서 이스라엘과 근동국가의 역사와 문화를 파헤쳤으며 그 정확성이 연구자들을 놀라게 했다.
고고학은 성경의 역사를 확인시켜주며 종종 성경의 인물과 사건들이 정확하게 언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 예로 사르곤에 대해 비평가들은 한때 그런 왕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의 궁전은 호르사바드에서 발견되었고 이사야가 언급한 바로 그 전투에 대한 묘사가 있었다. 또 다른 예는 아시리아 왕 산헤립의 죽음이다. 그의 죽음은 이사야가 산헤립의 뒤를 이었다고 말한 에사르하드돈의 기록에도 기록되어 있다.
고고학에서는 배경이 진짜임을 나타내는 국지적인 색채를 부여한다.
법과 관습, 신과 종교적 관습은 성경에 언급된 시대와 장소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라헬이 아버지의 흙신을 훔치는 것은 풍습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고학은 추가적인 사실을 제공한다.
고고학적 사실은 성경 학생이 다른 방법보다 시대와 상황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돕는다. 성경 작가들은 우리에게 센나헤립과 에사르하돈과 같은 아시리아 왕들의 이름을 알려주고, 우리는 이제 그들의 궁전과 도서관에서 발견된 기록에서 이들 통치자들에 대해 더 많이 알아볼 수 있다.
고고학은 성경 번역에서 엄청난 가치가 있음이 증명되었다.
단어와 구문의 의미는 다른 맥락에서 그 뜻을 알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세 개의 아시리아 군대 직함을 올바르게 기록했다. 그 용어들은 타탄(총사령관), 랍샤케(왕자의 우두머리), 랍사리스(내시 우두머리)이다. 이 단어들의 의미는 1611년 킹 제임스 성경의 제작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어떤 형태의 접촉 없이는 적의 호칭을 알지 못한다.
고고학은 많은 성경 예언의 정확성을 입증해 왔다.
이사야의 니네베, 바빌론, 티레에 대한 예언은 성경의 초기 창조 기록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예일뿐이다. 이사야와 다른 사람들이 다가올 메시아를 정확하게 지적한 것도 매우 중요하다. 많은 점에서 그들의 역사가 정당성을 띠었고 예수에 대한 그들의 예언도 실현되었다.
고고학은 "결국 성경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창조, 에덴, 홍수, 장수, 그리고 민족의 분산에 대한 초기 기록은 결국 단순한 전설이 아니다.
성경의 기록은 엄청나게 우수하고 정확하기에 믿을 수 있는 책이다. 믿을만한 책이 아닌 것이다. 특히 창세기나 초기의 기록된 역사도 이제 더 이상 신화나 전설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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