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4-11일: TV속에 비춰지는 아프리카 수단의 슈바이쳐 이태석 신부님. 헌신적으로 봉사했던 아프리카 수단의 작은마을 톤즈의 사랑이야기.
TV를 보면서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같은 동 연배를 살았던, 그래서 더욱 가슴 가득 애절하게 다가오는 사랑과 봉사이야기. 부디 천국의 주님 품안에서 영면하시기를......
빈 손
책을 펼치자 아프리카의 광활한 평원이 나타났다. 타는 듯한 햇볕 아래 드문드문 기린 목을 하고 선 나무 사이로 사막의 건조한 바람이 지나간다. 고독이 오히려 사치처럼 보이는 빈 공간에서 한 사제가 흑인 소년의 고백성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무릎을 맞대고 앉았으니 흰색 제의는 땅에 늘어뜨린 채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표정에는 흑백의 피부색보다 더 선명한 간절함이 묻어난다. 성자의 기운이 저런 것일까.
어제 바오로서원에서 아프리카로 선교사목을 떠난 살레시오회 이태석 신부의 책을 샀다. 두 장 넘기고는 창밖을 바라보고 석장을 읽고는 눈을 껌벅이며 멍하니 쉬어가느라 쉬이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어머니의 아들, 음악을 사랑하는 의사요 사제였던 그는 왜 지구 반대편을 돌아 저기 검은 대륙에 앉아있는 것일까. 한 잔의 마실 물이 아쉬운 척박한 오지로 그를 불러들인 것은 누구였을까.
사제가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칠 년 동안의 신학 과정과 삼 년의 군 생활을 지나면 십 년 세월이 소요된다. 한 인간의 젊음과 열정을 깡그리 바쳐 독신으로 살고자 서약하는 사제가 태어나기까지는 숱한 어려움과 번민의 시간이 함께한다. 그러나 그 선택은 강요나 권유가 아니라 순수한 자신의 의지에서만이 가능하다. 의사가 되기 또한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함께 치유하는 모든 과정을 거쳤을 때 그가 택한 땅은 일체의 문명이 배제된 아프리카였다.
일찍이 홀로 되어 덜렁 남겨진 10남매를 힘겹게 키워낸 그의 어머니는 이제 아들이 사제가 되었다고, 의사로 키웠다고 한시름 놓는가 했는데 그 장한 아들이 어느 날 훌쩍 낯설고도 아득한 곳으로 떠나버렸다. 어떤 부르심에 대한 응답과 아들의 순수한 열정 앞에서 그 어머닌들 어찌해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경비행기를 타고 남부 수단의 톤즈마을에 도착한 것은 8년 전이었다.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 전기 전화는 물론 텔레비전도 슈퍼마켓도 없는 동네였다. 섭씨 사오십 도를 오르내리는 곳에서 타는 갈증을 달래는 것은 더운 물 한 컵, 그나마 마실 물이 있으니 다행으로 생각해야했다. ‘없는 것이 없는’ 한국과는 달리 ‘있는 것이 없는’ 황무지 같은 땅에서 쫄리(john lee)신부의 사목생활이 시작된다.
그에게 먼저 온 것은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이었다. 수년 간 계속된 내전의 상흔으로 거리마다 널린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우선 병원을 짓는 일이 시급했다. 그러나 톤즈에서는 모래 말고는 아무런 건축자재도 구할 수가 없었다. 나사못 하나를 구하려 해도 수천 킬로가 떨어진 인근 나이로비에서 비행기와 자동차로 실어 와야 했지만 오래지않아 환자를 돌볼 수 있는 진료소를 마련했다. 열 두 칸 방이 있는 작은 보건소 수준의 병원이었지만 그에겐 상처받은 땅에서 일궈낸 첫 번째 기적의 씨앗이었다.
학교가 없어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거리를 헤매는 젊은이들을 위한 교육사업 또한 중요한 일이었다. 원주민들을 가난과 무지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교육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학교 건물에 다시 벽을 쌓고 지붕을 얹고 창문을 다니 비가와도 쓸 수 있는 깔끔한 교실이 되었다. 문제는 교사를 구할 수가 없음이었다. 그는 직접 고등학교 수학을 가르치기로 했다. 첫 수업이 있던 날, 그도 모르게 형언할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이 볼을 적시고 있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성당에서 풍금을 치던 소년을 바라보고 계시던 예수님은 먼 훗날 그가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오리라는 것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을까.
톤즈마을의 딩카족은 나이도 생일도 모르고 산다. 거기엔 생년월일을 신고할 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성에 대한 무지 또한 대단하다. 폐경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임신한 지 이삼 년이 지났는데 배도 불러오지 않고 아기도 나오질 않는다.’ 고 불평을 하며 병원을 찾는 아낙들이 종종 있다고 한다. 부끄러움 또한 모르니 팬티라는 게 있을 리 없고 진료실에서 아픈 곳을 물으면 독신사제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옷을 훌렁 벗어젖히고 보여준다. 당혹해진 그는 오히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순수를 느껴보기도 한다.
그러나 진료실로 들어오는 환자의 걸음걸이와 눈동자만 봐도 어떤 종류의 말라리아에 걸렸는지 알아챌 정도가 되기까지는 본인 스스로 수차례 말라리아로 고통을 겪어야했다. 마치 나환우들을 돌보기 위해 몰로카이 섬으로 들어간 다미안신부가 마침내는 발등에 떨어진 끓는 물에도 아무런 감각이 없게 된 일과 같은 일이었다. 병원 어디에도 십자고상이나 성모상도 없었건만 진료한 환자들을 주일미사에서 마주치는 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함께 아파하고 먼저 안아주는 시간이 쌓이면서 매년 수백 명이 세례를 받는 선교적인 성과를 가져오게도 된다.
수단의 정말 아름다운 것 두 가지는 금방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과 투명하고 순수한 그곳 아이들의 눈망울이었다. 브라스밴드를 결성한 이야기는 영화 <미션>을 연상케 한다. 남미 원주민처럼 그곳의 청소년들도 탁월한 음감(音感)을 가지고 있어 배운 지 일주일 만에 양손으로 오르간을 연주하는 아이까지 나왔다. 이들의 뛰어난 소질을 발견한 그는 한국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플루트, 트럼펫 등을 구입해 35인조 브라스밴드를 만들었다. 수단의 명물이 된 밴드는 이제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에 초대될 정도로 발전하게 됐다. 움막집 앞에서 각종 악기를 손에든 채 하얀 이를 드러내고 올망졸망 웃고 있는 밴드부사진 속에서 얼굴이 검지 않은 이라곤 맨 오른쪽의 이 신부 혼자뿐이다.
그는 결코 성자가 되려한 적이 없었다. 의술로, 음악으로, 영혼을 쓰다듬는 사제로서 불모의 땅에 희망을 심어준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단지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베풀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아프리카원주민들과 함께 평생을 헌신한 슈바이처박사, 그리고 자식을 위해 헌신적인 모범을 보여준 어머님의 고귀한 삶이 그를 거기 있게 한 스승들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향기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남을 의식하든 하지 않든 우리 의지와는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의 향기가 서로 얽혀서 서로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을 것이다. 개개인의 삶 안에서 우리는 각자 어떤 향기를 만들어야한다. 후각만 자극하는 향기가 아닌 삶의 원소적인 배열에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자석 같은 향기 말이다.
한 사제의 거룩한 삶을 통해 역동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느껴볼 때, 먼 나라에서 일어난 일들은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로 다가오게 된다. 육신이란 바람에 흘러가는 누더기에 불과한 것, 영혼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으리니 끝나는 일도 결코 없으리. 영혼의 주인에게 돌아갈 때 이 빈손에 무엇을 들고 갈 것인가. 삶의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젊은 사제의 모습이 진정 아름답기만 하다.
<죤리 신부님의 브라스 밴드>
(2010년 1월14일 충격적인 보도에 접했습니다. 수단의 톤즈마을에서 의사요, 사제로서 성자의 삶을 살아오셨던 이태석신부님께서 선종하셨다는 소식이 었습니다. 영원하신 주님의 품에 안기신 신부님의 영혼이 평안한 안식에 들기를 기도하면서 아픈마음으 로 이전에 썼던 졸고 한 편을 신부님의 영전에 바칩니다.-운향-)
<옮긴글>
지난 2001년부터 8년여 동안 아프리카의 오지 수단에서 사랑의 인술과 교육활동을 펼쳐오다 지난 14일 선종한 이태석 요한 신부가 지난 주말 영면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의 육신은 갔지만, 그의 숭고한 사랑과 헌신은 고스란히 남아서 우리에게 희망이란 선물을 안겨줬습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이태석 요한을 아프리카의 오지...수단의 톤즈마을로 부르셨고, 요한은 그곳에서 사제로, 의사로, 교사로, 구호활동가로 사랑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았습니다. ( 이태석 신부 2001-2009년 : 수단에서 헌신적 의료 ? 교육 봉사 ) 이제 그 요한이 당신 곁으로 돌아갔습니다. ( 故 이태석 신부 장례미사 / 16일, 서울 신월동 살레시오회관구관 ) 아프리카의 슈바이처를 그리도 빨리 데려가신 주님의 뜻을 우리가 알 순 없으나, 그가 당신의 가르침대로 온전히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살았음을 알고 있습니다. 더 나누지 못해서, 더 내어주지 못해서 그는 항상 아파했습니다. 그래서 ... 섭씨 45도의 오지에서 만난 이들...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지만 착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들에게서 이신부는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인제대의대 졸업후 광주가톨릭대 입학 2001년 사제 수품 직후 아프리카 봉사 시작 ) 수단의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희망을 나누는 일.. 그것은 그에게 벅찬 소명인 동시에 가눌 수 없는 기쁨이었고, 하느님과 세상을 이어주는 성직이었습니다. 큰 사랑은 다시 더 큰 사랑을 불어옵니다. 그의 육신은 갔지만, 그의 사랑은 불같이 살아서 거대한 나눔과 연대의 시작을 증언할 것입니다. < 백광현 신부 ( 살레시오회 : 故 이태영 신부와 동기 사제 ) >
고 이태석 신부.... 아프리카의 성자 그의 떠남은 우리에게 또 다른 출발입니다. 하여, 남겨진 이들은 그가 한없이 고맙고 그립니다. < 이미영 나탈리아 : 서울대교구 대방동성당 >
사랑은 세상을 치유하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리기에 우리는 고 이태석 신부 ... 그의 이름을 희망으로 기억합니다. ( * 전남 당양 천주교 공동묘역 ‘살레시오 성직자 묘역’에서 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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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삼도리 세상사는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삼도리
첫댓글 이제 그의 모교인 인제대학교에서 이태석 신부가 있던 수단 톤즈 마을로 가려는 자원자가 있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하나님이 왜 그리 일찍 이태석 신부를 데려갔느냐고 물을수 있지만
이태석 신부는 씨앗이었던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퍼뜨리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