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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쌍샘자연(自然)교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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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 Ⅰ (주보 글) 스크랩 이태석 신부 (울지마 톤즈) 한국의 슈바이처
백두에서한라까지 추천 0 조회 109 10.04.13 10:18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2010-04-11일: TV속에 비춰지는 아프리카 수단의 슈바이쳐 이태석 신부님.

헌신적으로 봉사했던 아프리카 수단의 작은마을 톤즈의 사랑이야기.

 

TV를 보면서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같은 동 연배를 살았던, 그래서 더욱 가슴 가득 애절하게 다가오는 사랑과 봉사이야기.

부디 천국의 주님 품안에서 영면하시기를......

 

 

 

 

빈 손

                 

책을 펼치자 아프리카의 광활한 평원이 나타났다. 타는 듯한 햇볕 아래 드문드문 기린 목을 하고 선 나무 사이로 사막의 건조한 바람이 지나간다. 고독이 오히려 사치처럼 보이는 빈 공간에서 한 사제가 흑인 소년의 고백성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무릎을 맞대고 앉았으니 흰색 제의는 땅에 늘어뜨린 채다.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표정에는 흑백의 피부색보다 더 선명한 간절함이 묻어난다. 성자의 기운이 저런 것일까.

 

어제 바오로서원에서 아프리카로 선교사목을 떠난 살레시오회 이태석 신부의 책을 샀다. 두 장 넘기고는 창밖을 바라보고 석장을 읽고는 눈을 껌벅이며 멍하니 쉬어가느라 쉬이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어머니의 아들, 음악을 사랑하는 의사요 사제였던 그는 왜 지구 반대편을 돌아 저기 검은 대륙에 앉아있는 것일까. 한 잔의 마실 물이 아쉬운 척박한 오지로 그를 불러들인 것은 누구였을까.

 

사제가 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칠 년 동안의 신학 과정과 삼 년의 군 생활을 지나면 십 년 세월이 소요된다. 한 인간의 젊음과 열정을 깡그리 바쳐 독신으로 살고자 서약하는 사제가 태어나기까지는 숱한 어려움과 번민의 시간이 함께한다. 그러나 그 선택은 강요나 권유가 아니라 순수한 자신의 의지에서만이 가능하다.

의사가 되기 또한 만만치 않은 일이다. 인간의 영혼과 육신을 함께 치유하는 모든 과정을 거쳤을 때 그가 택한 땅은 일체의 문명이 배제된 아프리카였다.

 

일찍이 홀로 되어 덜렁 남겨진 10남매를 힘겹게 키워낸 그의 어머니는 이제 아들이 사제가 되었다고, 의사로 키웠다고 한시름 놓는가 했는데 그 장한 아들이 어느 날 훌쩍 낯설고도 아득한 곳으로 떠나버렸다. 어떤 부르심에 대한 응답과 아들의 순수한 열정 앞에서 그 어머닌들 어찌해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가 경비행기를 타고 남부 수단의 톤즈마을에 도착한 것은 8년 전이었다. 모든 것이 거꾸로 돌아가는 세상, 전기 전화는 물론 텔레비전도 슈퍼마켓도 없는 동네였다. 섭씨 사오십 도를 오르내리는 곳에서 타는 갈증을 달래는 것은 더운 물 한 컵, 그나마 마실 물이 있으니 다행으로 생각해야했다. ‘없는 것이 없는’ 한국과는 달리 ‘있는 것이 없는’ 황무지 같은 땅에서 쫄리(john lee)신부의 사목생활이 시작된다.

 

그에게 먼저 온 것은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할지 모르는 막막함이었다. 수년 간 계속된 내전의 상흔으로 거리마다 널린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우선 병원을 짓는 일이 시급했다. 그러나 톤즈에서는 모래 말고는 아무런 건축자재도 구할 수가 없었다. 나사못 하나를 구하려 해도 수천 킬로가 떨어진 인근 나이로비에서 비행기와 자동차로 실어 와야 했지만 오래지않아 환자를 돌볼 수 있는 진료소를 마련했다. 열 두 칸 방이 있는 작은 보건소 수준의 병원이었지만 그에겐 상처받은 땅에서 일궈낸 첫 번째 기적의 씨앗이었다.

 

학교가 없어 하루 종일 빈둥거리며 거리를 헤매는 젊은이들을 위한 교육사업 또한 중요한 일이었다. 원주민들을 가난과 무지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교육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학교 건물에 다시 벽을 쌓고 지붕을 얹고 창문을 다니 비가와도 쓸 수 있는 깔끔한 교실이 되었다. 문제는 교사를 구할 수가 없음이었다. 그는 직접 고등학교 수학을 가르치기로 했다. 첫 수업이 있던 날, 그도 모르게 형언할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이 볼을 적시고 있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 성당에서 풍금을 치던 소년을 바라보고 계시던 예수님은 먼 훗날 그가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오리라는 것을 미리 예견하고 있었을까.

 

톤즈마을의 딩카족은 나이도 생일도 모르고 산다. 거기엔 생년월일을 신고할 기관이 없기 때문이다. 여성들의 성에 대한 무지 또한 대단하다. 폐경에 대한 지식이 없으니 ‘임신한 지 이삼 년이 지났는데 배도 불러오지 않고 아기도 나오질 않는다.’ 고 불평을 하며 병원을 찾는 아낙들이 종종 있다고 한다. 부끄러움 또한 모르니 팬티라는 게 있을 리 없고 진료실에서 아픈 곳을 물으면 독신사제에게 아무 거리낌 없이 옷을 훌렁 벗어젖히고 보여준다. 당혹해진 그는 오히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기 이전의 순수를 느껴보기도 한다.

 

그러나 진료실로 들어오는 환자의 걸음걸이와 눈동자만 봐도 어떤 종류의 말라리아에 걸렸는지 알아챌 정도가 되기까지는 본인 스스로 수차례 말라리아로 고통을 겪어야했다. 마치 나환우들을 돌보기 위해 몰로카이 섬으로 들어간 다미안신부가 마침내는 발등에 떨어진 끓는 물에도 아무런 감각이 없게 된 일과 같은 일이었다. 병원 어디에도 십자고상이나 성모상도 없었건만 진료한 환자들을 주일미사에서 마주치는 일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함께 아파하고 먼저 안아주는 시간이 쌓이면서 매년 수백 명이 세례를 받는 선교적인 성과를 가져오게도 된다.

 

수단의 정말 아름다운 것 두 가지는 금방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과 투명하고 순수한 그곳 아이들의 눈망울이었다. 브라스밴드를 결성한 이야기는 영화 <미션>을 연상케 한다. 남미 원주민처럼 그곳의 청소년들도 탁월한 음감(音感)을 가지고 있어 배운 지 일주일 만에 양손으로 오르간을 연주하는 아이까지 나왔다. 이들의 뛰어난 소질을 발견한 그는 한국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플루트, 트럼펫 등을 구입해 35인조 브라스밴드를 만들었다. 수단의 명물이 된 밴드는 이제 대통령이 참석하는 행사에 초대될 정도로 발전하게 됐다.

움막집 앞에서 각종 악기를 손에든 채 하얀 이를 드러내고 올망졸망 웃고 있는 밴드부사진 속에서 얼굴이 검지 않은 이라곤 맨 오른쪽의 이 신부 혼자뿐이다.

 

그는 결코 성자가 되려한 적이 없었다. 의술로, 음악으로, 영혼을 쓰다듬는 사제로서 불모의 땅에 희망을 심어준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단지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베풀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아프리카원주민들과 함께 평생을 헌신한 슈바이처박사, 그리고 자식을 위해 헌신적인 모범을 보여준 어머님의 고귀한 삶이 그를 거기 있게 한 스승들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향기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남을 의식하든 하지 않든 우리 의지와는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의 향기가 서로 얽혀서 서로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을 것이다. 개개인의 삶 안에서 우리는 각자 어떤 향기를 만들어야한다.

후각만 자극하는 향기가 아닌 삶의 원소적인 배열에 변화를 일으키게 하는 자석 같은 향기 말이다.

 

한 사제의 거룩한 삶을 통해 역동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느껴볼 때, 먼 나라에서 일어난 일들은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로 다가오게 된다. 육신이란 바람에 흘러가는 누더기에 불과한 것, 영혼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으리니 끝나는 일도 결코 없으리. 영혼의 주인에게 돌아갈 때 이 빈손에 무엇을 들고 갈 것인가. 삶의 진정한 가치를 추구하는 젊은 사제의 모습이 진정 아름답기만 하다.

 

 

<죤리 신부님의 브라스 밴드>

 

       (2010년 1월14일 충격적인 보도에 접했습니다.

       수단의 톤즈마을에서 의사요, 사제로서 성자의 삶을 살아오셨던 이태석신부님께서 선종하셨다는 소식이

       었습니다.  영원하신 주님의 품에 안기신 신부님의 영혼이 평안한 안식에 들기를 기도하면서 아픈마음으

       로  이전에 썼던 졸고 한 편을 신부님의 영전에 바칩니다.-운향-)

 

<옮긴글>

 

 

지난 2001년부터 8년여 동안

아프리카의 오지 수단에서

사랑의 인술과 교육활동을 펼쳐오다

지난 14일 선종한 이태석 요한 신부가

지난 주말 영면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의 육신은 갔지만,

그의 숭고한 사랑과 헌신은 고스란히 남아서

우리에게 희망이란 선물을 안겨줬습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이태석 요한을

아프리카의 오지...수단의 톤즈마을로 부르셨고,

요한은 그곳에서

사제로, 의사로, 교사로, 구호활동가로

사랑의 삶을 구체적으로 살았습니다.

( 이태석 신부  2001-2009년 : 수단에서 헌신적 의료 ? 교육 봉사 )

 

이제 그 요한이 당신 곁으로 돌아갔습니다.

( 故 이태석 신부 장례미사 / 16일, 서울 신월동 살레시오회관구관 ) 

 

아프리카의 슈바이처를 그리도 빨리 데려가신

주님의 뜻을 우리가 알 순 없으나,

그가 당신의 가르침대로

온전히 자신을 내어주는 삶을 살았음을 알고 있습니다.

 

더 나누지 못해서, 더 내어주지 못해서

그는 항상 아파했습니다.

 

그래서 ... 섭씨 45도의 오지에서 만난 이들...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지만

착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그들에게서

이신부는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인제대의대 졸업후 광주가톨릭대 입학

2001년 사제 수품 직후 아프리카 봉사 시작 )

 

수단의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희망을 나누는 일..

그것은 그에게 벅찬 소명인 동시에

가눌 수 없는 기쁨이었고,

하느님과 세상을 이어주는 성직이었습니다.  

 

큰 사랑은 다시 더 큰 사랑을 불어옵니다.

 

그의 육신은 갔지만, 그의 사랑은 불같이 살아서

거대한 나눔과 연대의 시작을 증언할 것입니다.

 

< 백광현 신부 ( 살레시오회 : 故 이태영 신부와 동기 사제 ) >

 

 

고 이태석 신부.... 아프리카의 성자

그의 떠남은 우리에게 또 다른 출발입니다.

 

하여, 남겨진 이들은 그가 한없이 고맙고 그립니다.

 

< 이미영 나탈리아 : 서울대교구 대방동성당 >

 

 

사랑은 세상을 치유하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리기에 우리는 고 이태석 신부 ... 그의 이름을 희망으로 기억합니다.

 

( * 전남 당양 천주교 공동묘역 ‘살레시오 성직자 묘역’에서 영명 )

 

 
 
   제7회 인제인성대상 특별상을 수상한 이태석 신부는 본교 의대 3회 졸업생이다.
   의과대 81학번으로 인턴과정을 수료 후, 신부가 되어 저 멀리 내전과 기아로 고통 받는 수단에서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 이태석 신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신부로, 인술로 세상을 구하는 의사로서 어려운 이웃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있지만, 그는 그냥 그 자리에 자신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의사라는 전도유망한 길을 걷다 서른 일곱에 신부가 되고, 어머니의 눈물마저도 뒤로 한 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곳 중 하나인 수단으로 가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 이태석 신부.
   인제인성대상을 수상하기 위해 귀국한 그를 만나 수상소감과 함께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 길을 걷게 했는지 들어보았다.
 
“나는 수단에서 매일 희망을 만납니다”
 
나는 수단에 살고 있을 뿐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매일 일상에서 하고 있는 평범한 일들을 나 역시 수단에서 하고 있을 뿐입니다. 결핵에 걸린 아이들에게 약을 주고, 전염병이 돌면 주사를 주고, 또 남는 시간에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내가 할 수 있는 평범한 일들이 제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 
 
나는 그 곳에서 매일 작은 희망과 만납니다. 조금의 약과 주사로 뼈가 앙상한 아이의 볼과 덩이에 살이 오르고, 죽어가던 아이가 살아나는 기적 같은 일들을 봅니다. 
태양열을 이용하여 냉장고를 가동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주사약을 보관할 수 있어 올해는 홍역이 한건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41명의 아이들로 구성된 브라스밴드가 악기를 만진지 겨우 2주 만 에 멋진 곡을 연주하는 기적들을 보면서 내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아이들을 다 심어놓으셨고, 나는 그저 이 자리에 같이 있는 것뿐이구나 생각합니다.
 
“인제인성대상은 인제인의 인류애의 표시”
오늘 주신 이 상의 주인공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이 상은 개인에게 주는 상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오지 수단에서 병으로, 또 굶주림으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주는 인제인들의 인류애의 표시이고, 전쟁으로 지친 이들에게 보내주는 인제인들의 따뜻한 손길과 포옹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상을 나의 어머니께 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허락한다면 이 상을 나의 어머니에게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10남매의 9번째 아이입니다.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지고 어머님 혼자서 바느질로 10남매를 키우셨습니다. 의대를 다니는 6년 동안 장학금 한번 받지 못한 아들의 학비를 대느라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고, 또 의사 아들을 통해 영광을 보고 싶으셨을 텐데 한번도 저를 원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를 통해 어머니에게 감사하다는 말씀과, 또 이 상이 어머니에게 큰 보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 오늘 이 자리가 무척 고맙고 행복합니다.
 
신부의 꿈, 그리고 아프리카 선교
어릴 때 성당 근처에 살았고, 또 어릴 때부터 신자였고, 신부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의대에 진학하고 인턴을 마칠 때까지 잠시 그 꿈을 잊고 있었는데, 시간에 여유가 생기자 어릴 때 꿈이 생각이 났습니다.
제 위의 형님이 신부가 될 때 어머님이 무척 서운해 하시는 걸 보고 참았는데, 1991년 군의관으로 제대한 후에도 생각이 바뀌지 않아 샬레시오 수도원에 입회했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에게 해주는 것이 내게 해주는 것과 다름없다’고 하셨습니다. 줄곧 이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누굴까 생각했고, 로마 샬레시오대학에서 공부하던 1999년 여름, 마음속으로 아프리카 선교의 결심을 굳히고 케냐로 떠났습니다. 그곳에서, 수단 톤즈에서 20년 가까이 선교를 하던 제임스라는 인도 신부님을 만나 이집트, 에티오피아, 케냐, 우간다에 빙 둘러싸인 수단이라는 곳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2001년 귀국하여 사제서품을 받고 남수단 룸백 교구의 톤즈에서 선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나에게는 이곳이 천국입니다”
새벽 5시 45분 일어나 미사를 드리고, 오전 중에 200~250명 정도 진료를 합니다. 낮에는 쉬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몸에 무리가 오고, 당장 말라리아에 걸리거든요. 저녁에는 학교를 마친 동네 아이들이 찾아옵니다. 기타와 피리, 오르간을 가르치고 제가 작곡한 노래와 율동을 가르치는 데, 아이들이 그렇게 신나고 재미있어 할 수가 없어요. 얼마 전에는 한국의 후원회 도움으로 악기와 연주복 등을 후원받아 연주회도 가졌습니다.
   
수요일에는 이동진료를 나갑니다. 톤즈에는 진료소가 ‘국경없는 의사회’가 하는 곳과 이곳 두 군데 뿐이거든요. 거리상으로는 몇㎞ 안되는 가까운 이웃마을이라도, 도로가 없고 길이 험해서 꽤 오래 걸려요. 부족한 의료인력의 확보를 위하여 마을별로 1명씩 선발, 의료요원교육을 실시하여 1차 의료활동을 할 수 있도록 기초적인 의술교육도 실시하고 있는데 이들과 3인1조를 이루어 아이스박스를 싣고 가서 예방접종도 하고 진료도 합니다.
 
“배움을 통한 아이들의 변화는 내게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한달에 한번 나환자들을 찾아가 진료도 하고, 나병으로 판명되는 경우 음식과 생필품을 나눠줘요. 어느 날 모녀가 우리를 찾아와 자신의 딸이 나병에 걸렸다고 했지요. 하지만 진료결과 딸은 다행히 단순 곰팡이질환이었고, 나는 너무 다행이다 싶어 기쁜 마음으로 “당신 딸은 나병이 아닙니다”라고 했더니 그 어머니가 너무 실망을 하는 겁니다. 음식 배급을 받을 줄 알았는데 받지 못해 실망한 것이지요. 너무 안타깝고 슬픈 기억이지요.
하지만 좋은 기억이 더 많아요. 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굉장히 폭력적이고 충동적이라 그들에게 신부나 수녀는 안중에 없지요. 싫은 소리를 하면 금방 변합니다. 그런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고 배움을 통해 서서히 변해가는 것을 보는 것은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자랑은 아니고 저에게 음악적인 재능이 좀 있어요. 하나님이 쓰라고 주신 것 같아 아이들을 모아놓고 저녁에 음악을 함께 연주하는데 그 실력들이 정말 대단해요. 한국에서 보내준 악기와 정식 연주복을 입고 발표회도 가졌지요. 톤즈는 가난한 곳이지만 이곳에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수천 수백 번도 더 했어요. 아이들은 개발을 하지 않은 자연상태로, 조금만 누군가 부채질을 하면 마른장작에 불 붓는 것처럼 금방 타오르는 존재입니다.
 
후배들에게 바란다.
환자의 기억 속에 남는 것은 의사의 기술적인 치료가 아니라 인간적인 따뜻한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의사로 환자를 치료하다보면 지불능력이 없는 가난한 이들도 많을 겁니다. 환자를 대할 때 한명의 환자로 상대하지 말고 인간과의 만남이라고 생각하면 서로 좋은 결과와 인연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요.
그리고 현재 톤즈에는 외과의사가 없습니다. 나는 인턴과정만 수료를 했기 때문에 수술을 할 수가 없어 안타까운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함께 봉사할 한국인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의지도 되고, 한국말도 할 수 있으니까 좋을 것 같아요.
 
   이태석 신부는 질병과 내전, 굶주림으로 얼룩진 아프리카의 최빈국 수단에서 선교활동 및 의료봉사 등 아름다운 사랑을 실천하는 성직자이자 의사이다.
   1987년 인제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안정된 의사의 길을 포기한 채, 자신의 꿈이었던 신부가 되기 위하여 다시 신학대학에 입학하여, 2000년 사제 서품을 받고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 지역에서 현재까지 선교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그곳에서 희망을 잃고 죽어가는 오지 주민들과 아이들에 대한 자선 의료봉사를 시작으로 전무했던 의료시설을 개선하기 위해 주민들과 직접 모래와 시멘트로 병원(진료소)을 지어 매일 200여명의 환자들을 진료하고 있다.
   수단어린이 돕기 후원회인「치박치박」을 결성하여 모금운동을 통한 아프리카 수단 오지 아이들과 주민들을 돕고 있으며, 후원회의 도움을 받아 최근에는 학교건물을 재건축하고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며 전쟁으로 희망을 잃어버린 아이들에게 희망을 찾아주는 등 교육활동에도 열성을 보이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신부로, 인술로 세상을 구하는 의사로서 어려운 이웃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있다.
취재 - 박창숙(인제대학교 백병원 홍보실) / 정리 - 박하영
사진 - 서종업, 전형우 / 그래픽편집 - 정종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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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0.04.13 10:26

    첫댓글 이제 그의 모교인 인제대학교에서 이태석 신부가 있던 수단 톤즈 마을로 가려는 자원자가 있다고 합니다
    어찌보면 하나님이 왜 그리 일찍 이태석 신부를 데려갔느냐고 물을수 있지만
    이태석 신부는 씨앗이었던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퍼뜨리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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