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
안중근 의사가 남긴 말이다.
일제 치하에서 우리 민족들이 핍박을 당하던 시대에
안중근 의사 목구멍을 타고 오르는 불을
어찌 감당할 수 있었으랴.
100년 전 안중근 의사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생각을 잊기 위해
책을 읽으며 마음을 마음을 달랬을 것이다.
이 말을 후세는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라 칭한다.
의미심장하고 비장한 결의가
들어 있지만
독서의 중요성이라는 측면에서는
너무나 터프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그 속엔 민족들의 고통에 대한 한과 피와
분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됨됨이는 책을 통해서 그 사람을 만들어 간다.
한권의 책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저자의 인격과 지식 그리고
행동의 산물까지도 녹아져 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저자와 같은 모습이
그 인격으로 녹아져간다.
특히 많은 독서로 인격을 다듬어갔던
안중근 의사의 붓글씨와 그의 손 낙관은
그의 삶과 지조, 그리고 그의 인품이
그대로 모두 녹아져 있다.
차가운 바닥에 앉아
책을 읽으며 온 몸을 불사를 수 밖에 없었던
그 때의 그 심경을 우리는 헤아려야 한다.
우리는 그 처절했던 역사의 교훈을 절대 잊지말자!
우리 후손이 그의 마음을 마음 깊은 곳에 안고 살아야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나라를 위한 길이기 아닌가?
나라없이 살아가는 사람의 처절함을 모르는
이 시대의 우리들...
오늘 하루만이라도 가슴에 손을 얹자!
(대한민국이 있기에 우리는 어디를 가나
든든함을 가지고 떳떳이 삽니다.
- 나라위해 생명을 바친 이가 있기에 우리가 있습니다. -)
'10大 오해' 소개
(키작은 나폴레옹? 사실은 170㎝… 낙제생 아인슈타인? 성적 뛰어나)
'천재 물리학자 아인슈타인도 학교에선 지진아였다'며 위안을 삼는 학생이 있다면 생각을 고쳐먹는 게 좋겠다.
또 야심만만한 단신(短身)의 사내를 나폴레옹에 비유해 오던 습관도 이젠 버려야 할 것 같다.
모두 역사적 사실들이 잘못 전해지면서 오해를 낳은 경우다.
영국 일간지 타임스가 최근 인터넷판에 '학교에서 배우는 10대 오해'를 소개했다.
알려진 것과 달리 아인슈타인은 학창 시절 성적이 아주 좋았다. 특히 과학과 수학이 뛰어났다.
오해를 낳은 이유는 독일 성적표를 미국인이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나폴레옹은 단신(157㎝)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약 170㎝였다.
많은 이들은 백열등의 발명자로 에디슨을 꼽지만 에디슨의 발명품 목록엔 백열등이 없다.
영국인 과학자인 조셉 스완(Swan)이 발명해 특허까지 낸 것을 그가 개량했을 뿐이다.
나그네쥐(lemming)들은 벼랑 아래 바닷속으로 줄줄이 몸을 던지는 '집단 자살'로 유명하다.
BBC 다큐멘터리는 이를 두고 개체 수는 많고 먹을 게 부족한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설명했었다.
하지만 이는 집단 이주를 집단 자살로 오해한 것이다. 나그네쥐들은 수영도 할 줄 안다.
진화론자들은 흔히 '인간은 유인원에서 진화했다'고 하지만 정작 진화론 창시자 다윈은 이 말을 한 적이 없다.
그는 "우리와 유인원, 그리고 침팬지는 아주 오래전 언젠가 공통의 조상을 가졌다"고 했을 뿐이다.
영화나 만화에 나오는 북유럽 바이킹족은 흔히 뿔이 달린 투구를 쓰고 있다.
하지만 조르빅 바이킹 센터의 설명은 이들은 누가 죽으면 그가 쓰던 투구와 뿔로 만든 술잔을 함께 묻었고,
훗날 이를 출토한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이 투구에 뿔이 있었다고 추정했다.
신대륙 탐험가인 콜럼버스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었다고 전해오지만 의심스럽다.
그는 자기 배가 지구 끝 가장자리에 이르러 아래로 떨어질 거라고 걱정한 것 같지는 않다.
학교 교사들은 미각을 설명할 때 칠판에 혀를 그려놓고 짠맛, 단맛, 신맛 등을 느끼는 부위를 구분해 표시한다.
하지만 혀에 난 돌기들은 민감도에 차이가 있을 뿐 맛을 느끼는 부위가 두부 자르듯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이밖에 '쥐는 치즈를 좋아한다' '물은 남·북반구에서 각각 다르게 흘러내린다'는 믿음도 10대 오해로 꼽혔다.
"도요타 왜 이렇게 싼가 했더니"
"도요타의 파격적인 가격이 한국에서 엄청난 화제이다."
"당연하다. 도요타는 한국에서 이익을 내려는게 아니다. 현대차와의 자존심 싸움이 핵심이다."
지난 23일 일본 도쿄모터쇼 현장에서 만난 도요타 관계자의 말이다.
도요타의 한국 시장 진출 의도가 드러난 무서운 한마디다.
지난 20일 후노 유키토시(布野幸利) 도요타 본사 글로벌영업본부 부사장은
도요타의 한국 상륙과 관련 "많이 팔아 이익을 남기거나 한국 브랜드와 경쟁할 생각은 없고
서비스와 사회공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익도 남기지 않으려는 시장에 적자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도요타가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왜 한국에 진출하는지 당시까지만 해도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었다.
이에 대해 일본 도요타의 관계자는 "현재 글로벌 톱5 업체들 가운데 가장 의식되는 경쟁자는 현대차"라면서
"하지만 현대차는 일본에서 철저히 실패한 반면, 도요타는 한국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국제시장에서
현대차를 견제하겠다는 전략"이라고 말했다.
자동차 업계에서 자국 내수시장은 말 그대로 기초체력이다.
기술력 떨어지는 중국 신흥 자동차 업체들이 광활한 내수시장 덕분에 국제 무대에서 강자로 평가받는 이유다.
도요타는 미국 등 글로벌 시장에서 무섭게 치고 올라오는 현대차를 공략하기 위해
심장부인 한국 시장 공략을 택한 것이다.
도요타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기 위해 도쿄 시내 스이도바시(水道橋) 인근에 위치한 도요타 도쿄 본사를 찾았다. 한국 시장 담당 전문가가 기자를 맞았다.
그는 현대차를 비롯 혼다와 닛산의 한국 시장 전략까지 이미 면밀히 파악하고 있었다.
본사 관계자는 "한국은 역사적 관계를 고려해 상당히 민감하고 조심스런 전략을 짜야 하는 시장"이라며
"예를 들어 '마크X' 같은 일본적 색채가 진한 차보다는 글로벌 이미지가 강한 캠리를 중심으로
'가격'에 보다 초점을 맞춰 전략을 짜고 있다"고 말했다.
도요타는 진심으로 한국 시장에서 큰 이익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은 현대차가 80%의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는 시장에서 파란을 일으켜
세계시장에서 더 큰 이익을 노리고 있었다.
도요타의 시장 판세를 분석하는 넓은 시각과 의욕이 무섭게 느껴지는 이유다.
"20억 줘버리고 라면 먹고 山에 산다 "
경북 봉화에 있는 도립공원 청량산은 이름난 명산이다.
산세는 그리 크지 않으나 금탑봉을 가운데 두고 축융봉·경일봉·보살봉·장인봉 등이 에워싸
마치 낙동강변에 핀 한 송이 연꽃인 양 수려하기가 그만이다.
퇴적암으로 이뤄진 바위봉우리와 그 위에 아슬아슬하게 얹혀있는 나무와 숲 사이로
언뜻 낭떠러지를 이루는 기암절벽이 가히 장관이다.
헌데 청량산은 빼어난 경관만큼이나 기가 센 산이다.
그래서 기가 쇠진해진 이들이 단박에 기를 충전하는 데는 그만이지만, 그곳에서 줄창 살기는 어렵다.
드센 기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도립공원 입구에서 가파른 길을 따라 20여 분 오르다 보면
청량사(淸凉寺)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대실(64) 씨가 살고 있다.
퇴계 선생의 청량산 산유(山遊)를 기리기 위해 후학들이 세운 청량정사(淸凉精舍) 바로 옆에
‘산꾼의 집’이라는 옥호로 벌써 18년째다. 부리부리한 눈에서 뿜어내는 강렬한 눈빛 하며 걸지고도
우람한 목소리는 그가 이곳 청량산에서 살 자격(?)이 있음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평범한 사람이 기가 센 산에서 살지 못하듯, 기가 센 사람은 아랫동네에서 배기지 못한다.
주체할 수 없는 기를 무언가가 눌러주지 않으면 돌아버리기 때문이다. 이씨와 청량산은 궁합이 맞는 셈이다.
속세에 있을 때 그의 명함은 다양했다. 영화배우·영화제작자·사진작가·사업가 등. 하지만
요즘 그는 자신을 ‘산허렁뱅이’라고 부른다.
산에서 헐렁헐렁 산다는 뜻이다. 한 시인이 그를 두고
“구름처럼 살며 바람처럼 떠도는/ 주인 같은 나그네 나그네 같은 주인”이라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는 “세상은 나를 보고 웃지만, 나는 그런 세상을 보고 웃노라”며 큰소리친다.
자신이 정상(正常)이라는 외침이다.
하기야 그의 기질로 보아 ‘뜬 생활’을 하다 이곳에 와 정상을 되찾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산꾼의 집’을 둘러보면 그의 생활과 철학이 한눈에 잡힌다.
현관문에 “오고 가고 아픈 다리 약차 한잔 그냥 들고 쉬었다가 가시구려”라고 써놓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차를 무료로 대접한다.
당귀·산수유·진피·대추·박하·오가피·황기·계피·감초 등 아홉 가지 약재로 끓인 ‘구정차(九情茶)’다.
평일에는 하루 1000잔, 주말이나 공휴일에는 2000~3000잔 소비되고
요즘 같은 단풍철에는 무려 하루 2만 잔 이상 필요해 아예 한 드럼씩 끓여댄다.
재료비만 줄잡아 연간 1000만원이나 들지만 개의치 않는다. 묘하게도 쓰는 만큼 채워지기 때문이다.
“산에 살지만 은둔한 것은 아니에요. 도자기도 굽고, 달마 그림도 그리고,
축제 행사에 불려가 소리하고 꽹과리도 칩니다. 이따금 강연도 하고요.
돈 벌자고 하는 일이 아니지만 돈이 생겨요. 그걸 푸는 거죠. 남지도 모자라지도 않을 정도예요.”
모든 것을 버리게 한 산, 모든 것을 갖게 한 산
이대실 씨의 모든 지혜와 철학은 산에서 비롯됐다. 이씨는 환갑을 넘겼음에도 아직까지 암벽·빙벽타기를 즐긴다.
입산하기 전 운영하던 수십억원짜리 웨딩 사업이 여전히 굴러가고 장남도 서울에서 잘나가는 사업가이지만
한사코 도움받기를 거부한다. 모든 것을 자급자족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의 생활은 빈한하다. 끼니도 된장국에 김치 한 조각이다.
하지만 그는 빈한함을 즐긴다. 그에게는 삼양라면에 달걀을 넣으면
‘삼계탕’이 되고 멸치 몇 마리로 ‘굴비찌개’를 맛본다.
부엌에는 아예 도자기로 만든 굴비가 매달려 있다. 이 모든 여유와 지혜를 그는 산에서 배웠다.
그는 속세에 있을 때도 늘 산꾼이었다. 국내 웬만한 산은 몇 번씩 섭렵했고, 백두산은 여섯 번,
히말라야는 열 번, 일본의 북알프스와 남알프스, 말레이시아의 케나발루, 대만의 옥산 등을 다녀왔다.
지리산 종주는 스무 번이나 하고, 백두대간 종주도 했다. 지금도 암벽·빙벽 타기를 즐기고,
특히 지리산 사계는 놓치지 않는다. 대한산악연맹 대구경북연맹 간부(홍보이사)로 활동하고
경북북부지역 영양·안동·청송·봉화·영주산악연맹을 창설하기도 했다.
눈 내리는 날 청량산에서 논스톱으로 80m 점핑하는 거실 사진이 그의 실력을 가늠케 해준다.
이씨가 이곳에 들어온 이래 구조한 사람만 100명이 넘는다.
산에 관한 한 그는 프로다. 하지만 그는 “아직 멀었다”고 말한다.
기술은 되는지 몰라도 정신은 모자라는 부분이 많다는 말이다.
“산은 절대겸손을 가르치는데 저는 아직 그렇지 못합니다. 어느 구석엔가 교만이 남아있습니다.
나를 버리지 못하는 거죠. 그래서 산의 도움을 받아 비우는 것을 배우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겁니다.”
이씨는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운동이면 운동, 연기면 연기, 예술이면 예술-.
수준이야 차치하고 걸치지 않은 분야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다양하다.
한마디로 말하면 멀티플레이어다. 그래서일까? 그의 과거는 파란만장하다.
경북 봉화에서 유기 공장을 하던 아버지 덕에 어린 시절을 남부럽지 않게 보낸 이씨는
고향에서 초·중학교를 마친 뒤 대구로 유학하면서 방랑을 시작했다.
가업을 위해 엔지니어가 되기를 바라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대구공고 기계과에 들어갔지만
입학하자마자 산에 미쳐 한 학기도 지나지 않아 중퇴했다.
그에게 산은 어릴 적부터 각별한 존재였다. 검도의 달인(8단)이었던 아버지가 장남을 굳건히 키우려는 욕심에
아침마다 냉수마찰을 시킨 뒤 검도를 가르쳤다.
하지만 어린 그에게는 지옥훈련이나 마찬가지여서 틈만 나면 마을 뒷산으로 도망쳤다.
마을에서 200m 남짓한 높이의 산이었지만 힘든 줄도 몰랐다.
거기에 가면 편했다. 그래서 거의 매일 올랐다. 산은 그렇게 그의 유전자에 각인이 됐다.
사고 치고 끌려가 서둘러 올린 결혼식
그러던 그가 유학이랍시고 대구에서 외톨이 생활을 하게 되니 외로움을 탈 때마다 산을 그리워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길거리에서 배낭을 멘 사람만 봐도 미칠 것만 같았다.
당시 대구에는 이효상 전 국회의장이 H대 교수로 있으면서 대한산악연맹의 모체인
대구·경북산악연맹을 만들어 전국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산악인들의 활동이 왕성하던 곳이었다.
산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치던 이씨는 마침내 배낭을 메고 가는 ‘형들(이효상 팀)’을 무작정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학교수업은 거의 제쳤다. 산악회를 따라다닌 지 1년쯤 되자 혼자 뛰기 시작했다. 형들한테 요령 익힌 뒤여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은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일정에 얽매이는 것이 싫어서였다.
떠나는 날은 있어도 돌아오는 날은 자신도 모를 지경이었으니까. 팔공산 등 대구 인근 산으로부터 시작해 점차 전국을 싸돌아 다녔다. 고교 3년을 그렇게 보냈다. 그 바람에 학교를 여섯 번이나 옮겨야 했다.
“아버지께서도 제가 산에 미쳐 돌아다니는 것을 아셨지만 나무라지는 않으셨어요.
다만 ‘네가 가는 길이 맞다고 여기면 가라. 대신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잘 생각해 물을 때
답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문하셨습니다. ‘혼구녕’ 대신 하신 그 말씀이 얼마나 준엄하게 들리던지….
제가 지금껏 인생이라는 방랑을 하면서도 나름대로 기둥을 삼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어렵사리 고교를 마친 그는 상경해 충무로2가에 있던 H배우전문학원에 들어갔다.
타고난 역마살과 함께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딴따라 끼’가 발현하는 순간이었다.
어려서부터 그의 꿈은 영화배우였다. 1년 동안 배우수업을 받은 뒤 이듬해인 1966년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 야간부에 입학했다.
하지만 ‘튀는 데는 선수’인 그답게 4개월 만에 때려치웠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이미 <상하이 박> <아편전쟁> <청춘교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등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해본 데다
영화판 돌아가는 것을 안다는 생각에 아버지 몰래 과수원을 팔아 영화 <비 나리는 오후 3시>를 만들었다.
자신이 감독도 맡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사기꾼들의 꾐에 말려든 것이었다.
그러니 제대로 된 작품일 리 없었다. 필름을 들고 개봉관을 찾았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아는 형이 기도를 보고 있던 대구의 한 극장을 찾아갔다.
그곳은 ‘공장빼이극장’으로 통하던 하류 극장이었다.
우격다짐으로 걸었지만 사흘 만에 간판을 내려야 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하늘이 노래졌다.
학교도 때려치우고 당시 1억원쯤 하던 과수원만 날렸으니…. 하는 수 없이 다시 상경했다.
하지만 수중에는 땡전 한푼 없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청계천변에 있던 ‘날방’. 변소도, 부엌도 없는
날림인 데다 날마다 방값을 치러 이름붙은 극빈자들의 보금자리(?)였다.
일터는 새벽마다 아현동 굴레방다리 밑에 서던 야채도매시장. 거기서 하루 밀 두 되를 받고 리어카를 끌었다.
방값으로 한 되를 쓰고 나머지 한 되로 입에 풀칠을 했다.
너무 힘들어 마약을 할까 생각해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조직’에서 유혹도 있었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어 꾹 참았다.
“그렇게 석 달을 보내니 한계가 왔습니다. 어느 날 문득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 있어봐야 비전이 없었기 때문이죠. 마침 스님이 된 선배가 설악산에 있었어요.
그리로 갈 작정으로 기타 등 악기와 옷가지를 모두 후배에게 줘버렸습니다.
그런데 떠나기로 한 날 새벽에 사단이 생겼어요. 아버지께서 밤 열차로 올라오셔서 들이닥친 것입니다.”
빈털터리 몸으로 수십억 재산을 일구고
아버지는 다짜고짜 고향으로 내려가자고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일단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 나중에 눈치를 보아 튈 요량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운명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꿈에도 생각지도 않았던 결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어른들끼리 정해놓고 벌이는 게임이었지만 장남인데다 사고를 친 끝이어서 거역할 수 없었다.
색시를 보지도 못한 터여서 사진사인 것처럼 꾸며 처가로 찾아갔다.
처가는 안동 도산에서도 시오리나 더 들어가는 산골에 있었다. 가는 내내 속을 조렸다.
색시가 마음에 안 들면? 하지만 가족사진을 찍어주며 색시를 확인한 순간 안도할 수 있었다.
처가를 다녀온 지 한 달도 안 돼 결혼식을 올렸다.
설상가상으로 때마침 유행하기 시작한 ‘스뎅그릇’ 바람에 유기 공장도 망해 집안이 어려워졌다.
이제는 튀려고 해도 튈 수가 없었다. 막 돌이 지난 아이를 두고 입대해 월남에도 다녀왔다.
“남들은 ‘빽’을 써서 안 가려는 월남을 저는 외려 담배를 두 상자나 사주고 지원했어요.
집안이 너무 어려워 전투수당이라도 벌고 혹여 총맞아 죽더라도
보상금으로 아버지가 재기하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죠.”
하지만 막상 제대하고 나니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고심 끝에 사진을 업으로 삼기로 했다.
사진 일은 아버지가 잘나가던 시절 카메라를 사줘 중학 시절부터 익혀온 분야.
하지만 직업으로 삼기에는 턱없는 실력이어서 대구로 가 1년 동안 사진학원을 다녀야 했다.
고향에 돌아와서도 2년이나 사진관 조수를 한 뒤
우여곡절 끝에 영양에 사진관을 차린 것은 그의 나이 서른한 살 때.
하지만 처음부터 고전을 면치 못했다.
밑천이 달려 일제강점기 때 지은 목조건물 2층에 세를 얻어 차린 탓에 주고객 중 하나인
여학생들이 꺼리는 데다 세 곳이나 되는 기존 업소의 따돌림으로 하고많은 날 파리만 날렸다.
“6개월 만에 한 건 올린 것이 회갑사진 출장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뻤던지 돼지고기 한 근을 사 들고 집에 갔는데 그동안 주렸던 자식들이 허겁지겁 먹어대는 것을 보고는 목이 메어 구경만 했던 기억이 지금도 선합니다.”
전략을 바꿨다. 마을마다 제일 끝자락에는 화전민 등 가난한 사람들이 살게 마련인데, 이들을 친구로 삼았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터에 찾아주는 것만도 고마워 소주 한 병에도 그들은 감격해 했다.
시골의 특성상 아무리 가난할지라도 그들도 마을의 대소사는 두루 꿰고 있어 결혼이며 회갑은 물론
돌잔치에 대한 정보까지 알려주었다.
“다른 사진관에 비해 초짜였지만 미리 알고 집까지 찾아가 사정하는데 어쩌겠습니까?
다른 사진관과 특별한 사이가 아닌 이상 열이면 여덟, 아홉은 일을 맡깁디다.”
하루에도 몇 탕씩 뛰어다니느라 네 시간밖에 자지 못하는 날이 비일비재했다.
독하게 2년쯤 돌아치니 어느덧 영양에서 가장 잘나가는 사진관이 되어있었다.
그러자 그동안 따돌림하던 다른 사진관들이 “같이 살자”며 손을 내밀었다.
그 바람에 그들이 독식하던 각급 학교의 앨범 일도 나눠 맡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일취월장의 기세였다.
하지만 사진 일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2층짜리 건물로 옮겨 1층에는 사진관과 미장원을, 2층에는 예식장을 차렸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기존의 예식장 두 곳에서 방해공작을 해왔다.
그래서 이번에는 서비스로 승부를 걸기로 했다. 9인승 버스를 사 하객을 실어 날랐다.
지금이야 흔한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 발상이었다. 더구나 교통이 불편한 시골에서는 그만큼 더 먹혔다.
1년쯤 지나 건물 뒤에 있던 창고를 개조해 식당까지 열었다.
결혼과 관련해 빼먹을 수 있는 것은 다 차린 셈이었다. 요즘 말로 토털서비스를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항상 잘나가면 시샘이 따르는 법. 그렇게 한 10년 했을까?
어느 날 갑자기 건물 주인이 세를 2배로 올리는 것 아닌가?
당해본 사람만 안다는 세입자의 설움-. 그래서 직접 건물을 짓기로 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버스터미널 뒤에 있는 150평짜리 논을 사 3층 건물을 올렸다.
최신식 예식장과 식당·사진관·미용실을 두루 갖춘 영양 최초의 웨딩 전용 건물이었다.
시설로 치면 대처인 안동 예식장들도 울고 갈 정도였다. 여기에 예식비는 받지 않기로 하고
‘무료예식장’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1977년의 일이었다.
“장삿속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동안 주민들한테 신세진 것을 조금이나마 갚겠다는 생각에서
예식비를 받지 않기로 한 것인데….”
대박이었다. 영양군 내 결혼식이란 결혼식은 다 쓸었다. 봉화 등 인근에서도 찾아왔다.
그렇게 10여 년을 보내면서 폼도 잡고 시골치고는 제법 큰돈을 벌었다.
하지만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 곳에 진득하게 머무르지 못하는 그놈의 병이 다시 그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팔자에 든 역마살로 치면 사실 그동안 참고 살아온 것만 해도 대견한 일이었다. 산이 그리웠다.
사업을 하면서도 골치 아픈 일이 있을 때마다 산을 찾기는 했지만 그것은 간식거리도 안 되었다.
산집생활 3년 만에 찾아온 극심한 외로움
“제가 저를 잘 알기에 결혼하면서 아내와 약속한 것이 있었습니다.
제가 가족한테 주고픈 것의 60%를 주었다고 생각하고
가족은 가장한테 받을 것 중 40%가 충족됐다고 판단할 때 산으로 가겠다고요.
아내가 ‘안 보내주면 어쩔 것이냐’고 해서 ‘그러면 결혼 못 한다’고 했더니
‘가족을 위해 쎄가 빠지도록 벌어 놓으라’고 합디다. 그래서 죽자 사자 뛴 겁니다.
그래서 웬만큼 이뤄졌다 싶으니 그동안 가슴에 숨겨왔던 카드를 꺼낼 때가 된 것이라고 생각한 겁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거칠 것이 없었다.
산에 다니며 몸에 밴 것이지만 일단 결정하면 과감하게 밀고 나가는 것이 그 아닌가?
즉시 배낭을 메고 청량산을 찾았다. 청량산은 그가 오래 전 점찍어둔 곳이었다.
중 2때 춘원 이광수의 소설 <원효대사>를 읽고 원효대사를 흠모해 그의 족적을 찾아 다니던 중
청량산에 있는 청량사가 원효에 의해 창건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여름방학의 끝무렵 청량사를 찾아 산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그는 “마치 금강산 사진첩을 보는 것 같은 감동”을 받았다.
정작 목적지인 청량사는 거의 폐사(廢寺) 직전 상태로 늙은 비구니 한 명이 지키고 있었지만,
워낙 주위 풍광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해 겨울방학이 되자마자 다시 찾아 불목하니 노릇을 하며 지냈다.
개학을 앞두고 비구니 스님에게 하직인사를 하면서 “중이 되겠다”고 했다가
“에라, 이 썩을 놈아. 세상에 내려가 잡일이나 하라”는 호통을 맞아야 했다.
산길을 내려오면서 소년은 다짐을 했다.
“×발, 언젠가 내가 여기 와서 살지 않나 보자!”
그로부터 30년-.
소년은 어느새 불혹(不惑)을 훌쩍 넘겼건만 그날의 다짐을 잊지 않고 다시 청량산을 찾은 것이었다.
청량사 옆에는 청량정사가 있었다. 다 쓰러져가던 절은 말끔히 단장됐건만 정사는 폐가 직전 그대로였다.
정사에 달린 관리사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청량산에서 살고자 하는 제게는 더 없는 명당이었습니다.
바로 뒤쪽에는 해동명필 김생이 글씨공부를 했다는 동굴이, 왼쪽 산중턱에는
최고운 관련 유적이 있는 자리이니까요.
그래서 퇴계 문중을 찾아가 관리사 건물에서 살겠다고 애원해 간신히 허락받았습니다.”
천하를 얻은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틈틈이 찾아와 청소하고 손을 보았다.
쓰레기만 80㎏짜리 쌀 포대로 48포대를 치웠지만 힘든 줄 몰랐다.
1991년 한 해를 그렇게 보내자 그런대로 말끔해졌다. 하지만 가족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아내조차 이듬해 봄 가출을 결행하기 며칠 전 현장을 찾아 도배를 거들어줄 때 처음 알았을 정도였다.
가장이 가출하는 것을 알면 집안이 흔들릴 것을 염려해 산행을 가장해 일체 숨긴 채 준비했기 때문이었다.
집을 떠나기에 앞서 그는 아내와 함께 동남아 여행을 했다.
자식들한테는 도배를 마친 다음날 선언하듯 털어놨다. 큰아들한테는 예식장을, 작은아들한테는 사진관을,
며느리한테는 웨딩숍과 미장원, 막내딸에게는 어린이 놀이방을 각각 맡겼다.
아내에게는 뷔페 식당을 주었다. 당시 시세로 줄잡아 20억여 원어치 재산이었다.
나름대로 원칙을 세워 세상을 살아가는 데 의지할 수 있는 지팡이를 물려준 것이었다.
막 대학에 들어간 막내아들이 걸렸지만 큰아들이 보살피도록 당부 겸 다짐을 받았다.
가족들은 그가 사업을 하면서도 하도 산으로 나돈 데다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인지
그다지 당황해 하지 않았다.
큰아들이 다달이 돈을 보내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이유는 단 한 가지, 돈을 위해 산으로 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씨는 그 길로 달랑 현금 2만5000원에 쌀 한 말, 된장 한 사발만 싸 들고 ‘청량산 집’에 살림을 차렸다.
“제가 손재주가 좀 있어 그걸로 이 한 몸뚱어리 먹여 살릴 자신은 있었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요.”
호기롭게 산 살림을 차렸지만 막상 살려니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전기가 없어 절에서 초를 얻어다 불을 켜고 나무를 해다 밥을 지어 먹었다.
하지만 20여 년 동안 꿈꾸던 일이어서 불편이 오히려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바람만 불어도 절로 어깨가 들썩이고, 구름이 떠가면 노래가 나왔다.
산을 쏘다니다, 아니면 오며 가며 들르는 등산객을 만나면 더욱 신이 났다.
그래서 차를 대접하기 시작했다.
숱한 산행을 해본 그이기에 등산길에 마시는 한잔의 차가 어떤 것인지 잘 알았다.
처음에는 하루 10여 잔이면 되던 것이 금세 소문을 타 하루 100잔을 넘기더니
한 달쯤 지나서는 평균 하루 1000잔 정도로 늘어났다.
그렇게 들떠 그 해를 보냈다.
하지만 이듬해 자신의 생활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3년째로 접어들면서부터는 그리움과 외로움이 덮쳐 왔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였다. 만만한 것이 술이었다. 매일 소주를 두 되씩 마셔댔다.
“물 한 잔에 맥주잔으로 한 잔씩 마셨는데 그것도 한꺼번에 마시는 것이 아니라 30~40분마다 한 잔씩 했어요.
곡기라고는 전혀 없이 그러다 보니 매일 술에 절어 지냈습니다.
자다가도 눈을 뜨면 담배보다 술에 손이 먼저 갔으니까요.
남들과 이야기하다가도 금세 술을 찾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6개월쯤 지난 어느 날 문득 더럽게 변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이 짓 하려고 산에 들어왔나?
이까짓 벽도 넘지 못하면서 무엇을 하겠다는 말인가? 이 개망나니야! 에잇,
술 뚝-. ‘술이 목구멍을 내려갈 때까지는 그리움이었다 가슴에 닿을 때는 눈물이었다.’
일기에 적힌 대로 술을 끊던 날의 심정은 이렇듯 비장했다.
이씨는 그날 이후 술이라고는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는다. 심지어 막내딸이 시집갈 때
사돈이 그를 위해 특별히 마련해온 100년 묵은 이탈리아산 와인조차 ‘쨍’만 했을 정도다.
술에서 헤어나니 산이 다시 보이고 흙 냄새가 새로웠다.
촉감도 예전과 사뭇 달랐다.
불현듯 흙과 더 친해지고 싶고 손맛도 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궁리 끝에 찾아낸 흙일이 바로 도예였다.
“이곳 저곳 알아보다 대구의 한 백화점에서 하는 도예주부교실을 찾아간 것이 처음입니다.
저보다 열한 살 아래인 강석순 선생님이 가르치셨는데 대구 경북에서는 알아주는 분입니다.
수업이 매주 월·화 이틀씩이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이 번거로워 지하도에서 자고는 했습니다.
수강생이 전부 젊은 주부이고 남자라고는 저밖에 없었죠.
기초를 익히고 난 뒤 물레질은 경주 석천요의 심종승 선생한테 배웠습니다.
12월 중순부터 3월 말까지 내리 2년을 배웠습니다.
심 선생은 제 아들의 친구이자 까마득한 산 후배였지만 정말 열심히 배웠습니다.
흙을 퍼 나르는 것은 기본이고 잘 보이려고 선생의 갓난애를 보행기에 태우고 다니기도 했죠.
1999년에는 현대도예를 공부하기 위해 1년 동안 일본 나고야(名古屋)에 있는 한일도예대학에서 연수하고
귀국 후 다시 유럽으로 가 르네상스식 도예문화를 살펴봤습니다.
2001년 11월 명지대 대학원에서 한 달간 이론 공부도 했고요.
그래서 겨우 ‘기역’ ‘니은’을 터득해 지금껏 작업이랍시고 하고 있습니다.”
특히 전시회 때마다 달마 그리기 퍼포먼스를 펼쳐 그의 이름을 해외에 널리 각인시켜왔다는 평가다.
세상에서는 이씨를 두고 ‘자유인’이라고 한다. 명성도 높다. 그 바람에 가끔 인생 강의를 요청받기도 한다.
하지만 그는 그런 평가에 손사래를 친다.
15년 쉼표 찍고 다시 떠나는 발길
“나더러 그물에도 안 걸리는 바람 같이 사네, 향기 있게 사네 그러지만 천만의 말씀입니다.
술 이야기도 했습니다만, 저도 오욕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다 냉각시키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이룰 수 없기에 남들이 모르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청산가리보다 더한 독주를 마셔가며 단련했기에 오늘의 제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저는 자유인이 아니라 ‘독한 놈’입니다.”
평소 그는 욕심을 비우기 위해 쉼 없이 자신을 다그친다.
그래도 부족하다 싶어 연말이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불도 없이 100일을 보내거나 만행을 다녀오고는 한다.
1년을 돌이켜 반성하고 자신을 채찍질하기 위한 것이다. 이씨는 조만간 ‘산꾼의 집’을 떠날 작정이다.
15년 전 도자기 가마에 첫 불을 지피면서 ‘또 가야 할 길이 있기에 동가숙 서가식 떠돌던 내 영혼
잠시 여기 쉼표를 찍는다’고 써놓은 대로다. 한 꺼풀을 벗으려면 변화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이미 사람 타지 않을 만한 장소까지 물색해 두었다. 또 방랑벽이 도진 것일까?
“완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완성을 위해 노력할 뿐이죠. 그런 면에서 보면 방랑이 맞습니다.
마침표는 아니지만 더 늙기 전에 지금껏 해온 공부를 가다듬으며 내 자신과 놀 생각입니다.”
이씨는 벌써 죽음도 준비해뒀다. 자신이 어디서 죽든 화장해 청량산 자소봉 위에 흩날려주고 동시에
‘야, 임마. 한판 잘 놀다 가네’라고 새긴 문패만 한 오석(烏石)을 박살내줄 것을 조건으로
4년 전 상조(喪助)를 들어 놨다.
“깨버릴 것을 왜 비싸게 돈을 들여 만드느냐고요?
제 영혼이 그 글귀를 보고 껄껄대며 떠나갈 수 있을 테니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습니까?”
"아파트 1층에 대한 오해와 진실"
아파트와 관련해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로 과거에는 1층은 '비추'라는 내용이 대세였습니다.
예를 들면 "1년간 1층을 살아보면서 무조건 이사하고 싶은 맘뿐입니다. 춥고 어둡고, 프라이버시 좋지 않아서요."
그런데 근래 들어서는 1층도 1층 나름이며, 1층에 사는 것이 오히려 좋은 점도 있다는 인식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인터넷의 부동산 관련 게시판에서 일반인들이 1층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애들 낳으면서 18층에 2년, 16층에 1년 살았는데 밑에 층에서 태클 건 적 한번도 없지만 맨날 애들 뛰지 말라고
소리소리 지르고. 두세돌 지난 두 녀석들이 블럭이며 세발자전거 탈 때마다 맘 졸이고.
애들이 어질러놔도 청소기 돌리려면 신경 쓰이고. 이제는 저녁에 청소기 싹 돌리고 잡니다.
애들이랑 하루에도 몇번씩 잡기놀이하구여. 애들 침대에서 뛰기 놀이 하구여. 타지 못하게 감춰놨던 붕붕카며 자전거 몽땅 다 꺼내줬습니다.
집 앞에 조그만 정원 있고요. 담장 앞으론 오솔길 있는데 거의 사람이 안다녀서 블라인드 안치고 삽니다."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선택의 여지없이 저층에 사네요. 고층에서는 피곤을 쉽게 느끼기도 하고요.
친구집 22층 갔다가 확장한 거실에서 밖을 내다보고 어질어질해서 커튼 쳐놓고 앉아 있었답니다."
"1층 사는데요, 엘리베이터 고장나서 며칠째 수리 중인 거 보고 정말 허걱했습니다.
아길 어린이집에 맡겨야 하는데 고층에 살면 어떻게 했을까. 24층 아파트 살았었는데 엘리베이터
기다리면서 5분도 넘게 시간 보낸 적도 있었어요. 맞벌이부부 출근에 5분이 얼마나 큰데요. 지금 대만족이에요.
우리집은 1층이 2층 높이라 베란다도 안보이구 평수가 커서 중문도 있고 침실은 안쪽이라서 소음도 안 들려요."
"시부모님과 같이 사는데 엘리베이터 타는 거 싫어하셔서 애들 클 때까지는 1층만 찾아 다녔습니다."
"친구가 1층에 살아서 자주 가는데 전 좋더라고요. 나름 땅의 기운도 느껴지고 나무도 울창한 것이.
새 아파트에 햇빛 잘 드는 1층이면 메리트가 더 큰 것 같아요."
위와 같은 이야기를 통해서도 1층이라고 무조건 안 좋은 것이 아니며, 1층이기에 얻을 수 있는 장점이
더 큰 아파트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인기지역에서 고가의 대단지 아파트라고해서
무조건 다 좋은 것이 아니라 막상 가서 보면 가격 대비해서 주거 질이 크게 떨어지는 집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즉 무조건 명목상 어떤 집은 어떻다라고 간주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물건마다 직접 보고 느끼면서 판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1층 아파트 중에서도 집에 따라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음을
과거의 고정관념 대비하여 정리해보겠습니다.
◆바깥에서 집안이 들여다보여서 문을 제대로 못 열어놓는다
거실 바로 앞으로 사람들 드나드는 입구가 있는 아파트는 때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건물 입구가 집 뒤쪽에 있으면서 지내기 괜찮은 1층도 많습니다.
거실과 안방이 있는 남쪽에는 입구와 주차장이 없고 정원만 있으면 일년 내내 내집 마당의 정원처럼 바라보며
살 수 있어서 오히려 좋습니다. 한편 선진화된 사고방식일수록 밖에서 보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적습니다.
찻집만 해도 옛날에는 밖에서 안이 들여다보이지 않게 해놓았는데 요즘은
오히려 밖에서 잘 보이도록 해 놓습니다. 선진국에서 선호하는 주거형태인 단독주택에서는
아예 담장이 없어서 들여다보이는 형태의 집들도 많습니다.
고층 아파트라도 마주 보이는 아파트 건물이 가까이 있는 집은 커튼이 쳐있지 않으면 밤에 창을 통하여 집안이
잘 들여다보입니다. 속옷만 입고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보입니다. 1층에서는 오히려 집 앞에 나무가 있으면
약간의 가리개 역할을 해주기도 합니다. 한편 요즘 짓는 아파트 중에는 필로티 형태로 지어서
가장 낮은 층의 집이 실질적으로는 2, 3층 높이가 되도록 짓는 아파트도 많습니다.
◆사람들 떠드는 소리가 문밖으로부터 잘 들려서 불편하다
부동산 게시판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가까운 지인들 중에도 1층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이 많아
직접 느낀 바로는 경우마다 다릅니다. 현관 밖에 사람 드나드는 소리나 떠드는 소리로 인해
불편함 느낄 정도는 생각만큼 많지는 않았습니다. 현관에 중간문을 해놓을 수도 있어서
현관 밖의 소리가 집안으로 들리는 것이 더욱 차단될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대로변, 고속도로변, 전철이 지상으로 지나는 지역의 아파트는 창을 통해
하루 종일 기계소음이 들려오고 특히 조용한 밤에 더 잘 들려와서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는 사실에는
무심한 경우가 많습니다. 고층이라서 조망권은 좋지만 대로에 접해 있기 때문에 차소리가
심하게 들려올 뿐만 아니라 먼지 및 공해가 심한 집들도 많습니다.
◆1층은 어둡다
가까이 마주 보이는 건물이 고층이면 그림자가 많이 드리워져 그렇습니다.
그러나 1층이라도 남향이면서 마주 보이는 건물이 충분히 떨어져 있으면 해가 잘 듭니다.
고층이라도 바로 앞과 옆쪽에 다른 고층건물이 있으면 그림자 드리우는 시간이 깁니다.
동향이나 서향 아파트의 높은 층보다 남향인 1층이 해 드는 시간이 더 많은 집도 있듯이,
일조시간이 어느 정도인지는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고 직접 확인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
인기가 높은 고가의 아파트이지만 재건축으로 용적률이 높아진 대단지라서 단지 안의 빼곡한 건물로 인하여
그림자가 많이 드리워져 다소 어두운 단지도 있습니다. 이러한 단지에서는 비교적 높은 층에서도
앞동과 옆동의 그림자로 인해 해 드는 시간이 길지 않은 집들도 있습니다.
◆잘 팔리지 않는다
1층이라면 우선 거부감부터 가지는 사람들이 일부 있어서 팔리는데 평균적으로는 시간이 더 걸립니다.
다만 단기투기 목적이 아닌 이상, 살다가 이사계획이 생기면 시간여유를 가지고 집을 내놓으면 됩니다.
또한 어차피 아파트 자체가 언제나 빠르게 환금성이 얻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인기 좋은 고가 아파트라도 높은 가격에 구입할 수 있는 능력의 사람이 적다보니
물건 내놓은 지 오랜 시간이 흘러도 보러오는 사람이 없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듯이 1층이라도 주거의 질이 좋은 집으로서 가격이 저렴한 편이라면 일단 사람들이 와서 보고, 직접 보니까 괜찮고 값은 싸니까 더 잘 팔리기도 합니다. 한편 싸게 산만큼 싸게 파는 것이라면 금전적으로
불이익 보는 것도 없으며, 싸게 사는 만큼 대출을 더 적게 받아서 이자의 절약으로 인한 이익이 얻어집니다.
금전적인 사소한 이점으로서 1층은 관리비에 엘리베이터 사용료를 일반적으로 내지 않습니다.
◆추위와 더위에 대하여
오래 전에는 중앙난방식 아파트에서 난방을 하는 물과 온수가 위에서부터 내려오면서 1층이 가장 추웠습니다.
그리고 바닥으로부터의 열손실도 추위에 좀 더 불리합니다.
그러나 요즘은 대부분이 개별난방으로 전환되었으며, 열손실 면에서는 꼭대기 층이나 측면에 위치한 아파트는
천장이나 벽을 통한 열손실이 더 생겨나는 점도 함께 보아야합니다.
1층의 바닥으로부터의 열손실은 바닥난방을 통해 조절이 쉽지만 천장을 통한 열손실은 더욱 불리합니다.
열손실 면에서는 위, 아래, 옆이 모두 다른 집으로 둘러싸인 집이 가장 유리합니다.
아무튼 근래에 단열을 잘하며 짓는 아파트는 열손실 관련해서는 일반적으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한편 1층 집앞에 나무와 잔디가 있으면 여름에 복사열이 적고 나무 그림자로 인해 더위가 줄어듭니다.
◆1층은 도둑이 잘 든다
경비가 부실하고 외진 곳에 있는 건물의 아파트는 1층 창을 통해 도둑이 들어올 수 있어서 그렇습니다.
반면에 아파트에 따라서 1층이 오히려 도둑이 잘 안 드는 아파트도 많습니다.
그 이유는 1층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라서 들킬 염려가 크고 경비원의 시야에 들어오기 쉬어서
도둑이 기피해서 그렇다는 분석입니다. 저의 가까운 친척집은 아예 현관 바로 옆이 경비실이라서
개인 경비를 공짜로 두고 사는 셈입니다.
강력범이 제일 잘 드는 집은 사람들 시야에서 가장 벗어나 있는 최상위층이라는 전문가 이야기도 있습니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숨어 있다가 잠입하기도 합니다. 아래에서 서술하겠지만 안전에 관련된
다른 개념들까지 다 합하여 평가한다면 안전성 면에서는 1층이 가장 안전한 편입니다.
1층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을 추가로 정리하겠습니다.
◆집에 드나드는데 시간이 절약된다
고층에서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왔다가 올라가는데 수분 이상 걸리는 것과 비교됩니다.
특히 아침에 아이들 등교나 출근 시간에 허둥지둥 바쁘게 나갈 때에는 집에서 곧바로 밖으로 나가니까
무척 편리합니다. 일상적으로 자주 처리해야 하는 음식물 쓰레기, 분리수거 등에서도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기 때문에 편리합니다.
◆아래층에 영향 주는 층간소음에 신경 쓸 일 없다
아파트 주거양식의 단점 중 하나는 층간소음입니다. 층간소음 때문에 위아래 집이 극심한 스트레스를
서로 주고받는 사례들이 많습니다. 꼭대기층은 위층으로부터 층간소음 들려서 신경 거슬리고
스트레스 받는 것이 없어서 좋은 반면, 1층은 아래층에 층간소음 들리지 않도록 자제하는데 따르는
스트레스가 없어서 좋습니다. 특히 어린 아이 있는 집은 아이가 바닥 울리지 않으면서
놀도록 하는 것에 한계가 있어서 1층이면 마음이 편합니다. 또한 어른이라도 집안에서 운동을 하거나
어떤 일을 하면서 바닥을 울리게 하는 경우들이 있으면 아랫집 신경 쓸 일 없어서 좋습니다.
◆노인이나 장애인이 있는 집은 절대적으로 1층이 유리하다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나 그러한 노인과 함께 사는 사람들은 피부에 와 닿게 느끼는 사항입니다.
움직일 때에 아무래도 힘들어하는 노인들이나 장애인은 1층에서 사는 것이 절대적으로 좋습니다.
◆심리적인 고립감이 적다
바깥에 드나드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고층일수록 심리적인 고립감이 커지며 집안에서 항상
멀리 내려다보이는 것으로 인해 허무감이 들기 쉽다고 합니다. 이에 반해 거실과 안방 앞으로
나무와 정원이 보이고 바깥에 쉽게 드나들 수 있는 1층이라면 정서적인 면에서 유리합니다.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음으로써 안전하다
엘리베이터 고장 시 여러 층을 계단으로 오르고 내리는 불편한 점도 없을뿐더러,
엘리베이터 안에서의 범죄 위험도 없습니다. 한 보도를 실어봅니다.
"엘리베이터 타기가 무섭다. 31일밤 용의자가 검거된 A양 납치미수사건은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벌어졌다. CCTV가 달려 있는데도 용의자는 어린 여학생을 때리고 흉기를 들이밀며 머리채를 잡아끌어내는
충격적인 폭력을 행사했다. 이뿐 아니다. 최근 일산과 강남 일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도
어린이와 여성을 상대로 한 납치 시도와 성추행 사건이 잇따르며 밀폐된 엘리베이터에 대해
두려움을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 갈수록 고층화되고 있는 아파트와 빌딩 등에서
필수 설비장치가 된 엘리베이터는 지하주차장과 함께 범죄의 온상이 돼 시민들을 떨게 하고 있다.
밀폐된 공간에서 범죄가 일어날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엘리베이터 안에 CCTV를 설치하지만 사건 후
범인의 용모와 범행 등을 확인하는데 도움을 줄 뿐 범행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투신자살의 위험이 없다
신문에 일일이 전부 다 보도되지 않아서 그렇지 아파트 고층에서 투신자살하는 사례들이 있습니다.
미리부터 계획을 세워서 뛰어내리는 경우도 있지만 순간의 충동심이 영향을 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고층이기에 곧바로 뛰어내리는 행동으로 옮겨지기 쉬운 것입니다. 1층은 당연히 그런 상황은 없습니다.
◆추락사고 위험이 없다
몇년간 아파트 추락사고 사례들을 TV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추락은 아이들에게 가장 많이 일어나며 때로는
주부도 창을 닦거나 빨래 관련한 일하다 추락한 사례도 있었습니다.
1층에 살면 여러 측면에서 안전성이 높은 것입니다.
◆나무 있는 정원으로 인한 정서적인 이점
다양한 주거 형태 중 서양에서는 단독주택이나 타운하우스를 선호하는 곳이 많은 반면,
한국에서 아파트가 매우 높은 인기를 얻는 이유는 편리성 때문입니다.
아파트의 1층이면서 창문 앞이 나무 있는 정원이면 단독주택이나 전원형 타운하우스가 가지는 장점을
얻는 셈입니다. 아파트에서 좁은 베란다에 화분 놓는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습니다.
즉 아파트의 편리성과 단독주택/타운하우스가 가지는 정서적인 이점을 동시에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아파트에 따라서는 1층 앞의 정원이 아예 단독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어있는 집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1층 아파트라서 불편하고 단점이 많은 집들도 있지만 집에 따라서는
실 주거생활에 오히려 장점이 더 많이 작용하는 1층도 있습니다.
지은 지 오래된 아파트일수록 일반적으로 단점이 더 큰 편입니다.
그러나 점차 1층에 대해서 신경을 쓰면서 아파트 설계를 하고 단지를 조성하는 경향이 늘어나 있어서
1층에서 더욱 편리한 삶과 더 양호한 주거의 질이 얻어지는 경우도 있으므로 개별적으로 직접 집을 살펴보고
판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나이별로 본 아줌마.."
남편의 생일날이 되었다.
20대 : 남편을 위한 선물과 갖가지 이벤트를 준비한다.
30대 : 고급 레스토랑에 외식을 나간다.
40대 : 하루 종일 미역국만 멕인다.
남편이 외박을 했다.
20 대 : 너죽고 나살자고 달려든다.
30대 : 일때문에 야근을 했겠지 ...하며 이해하려 든다.
40대 : 외박했는지도 모른다.
폰팅하자는 전화를 받았다.
20대 : 야..이 새꺄..당장 끊어. 안그럼. 너 꽉 쌔려버린다. 입술로^^
30대 : 나 그런 데 관심 없으니까 그냥 끊겠어요.
40대 : 뭔팅?
시장에 가서 물건값을 깍았다.
20대 : 아잉~~ 아저씨이~~( 옆구리 콕콕!) 좀 깎아주세용~~~
30대 : 아저씨 앞으로 자주 올테니까 깎아 주실 거죠?
40대 : '우쒸 그냥 만원에 줘요'......하고 가져가 버린다.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외화 비디 오를 보고 있었다.
20대 : 자막을 보지 않아도 대사를 알아들 을 때가 종종 있다.
30대 : 자막을 놓치지 않고 보면 영화 내용을 완벽히 이해한다.
40대 : 잠만 잔다.
모처럼 만에 남편과 외식을 했다.
20대 : 그냥 들어갈 수 있냐며, 호프집으로 2차간다.
30대 : 주부가요열창 보며 연마한 노래실력을 노래방에서 과시한다.
40대 : 연속극 할 시간이라며 빨리 집에 가자고 한다.
남편이 손찌검을 했다.
20 대 : 울며불며 그런 사람인 줄 몰랐다고 친정으로 짐챙겨간다.
30대 : 더 이상 못 참겠다고 이혼하자 고 한다.
40대 : 부지깽이 들고 덤빈다.
연말 연기 대상에 깊게 파인 드레스를 입고 나온 연예인을 봤다.
20대 : 우와...이쁘다.....꼭 ... 결혼 전의 나같다.
30대 : 좀...야하다....근데....옷이 예쁜 걸..
40대 : 미친 것, 아예 홀라당 벗고 나와라, 벗고 나와!!!!
부부 싸움에 관한 견해
20대 : 그 이와 나 사이에 부부 싸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30대 : 가끔 그러는 것이 사랑이 더 깊어진다.
40대 : 부부싸움은 칼로 살베기다!!
임신을 했다.
20대 : 남편 이 좋아서 들쳐업고 동네한바퀴를 돈다.
30대 : 애 하나 더 생겨서 시들했던 부부관계가 회복된다.
40대 : 왜 실수했냐고 남편을 후라이팬으로 들들 볶는다.
외판원이 집에 방문을 했다.
20 대 : 처음 당하는 일이라 , 물건 소개를 상세히 받고 구입해 버린다.
30대 : 필요없다면서, 죄송하다 고 말한다.
40대 : 가!!!!!!!!!!
지하철에서 앉으려고 하는데 누가 먼저 앉아버렸다.
20대 : 그냥 다른 데로 가버린다.
30대 : 겸연쩍어 하며 서 있는다.
40대 : 그 사람이 내릴 때까지 째려보고 있는다.
첫댓글 책 한권이구만,, 너무 길어 친구. 배부르네.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