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미 없는 물고기들의 질문
--이희은의 {밤의 수족관}의 시세계
박성준(시인, 문학평론가)
기묘한 몸
기묘한 집에 살고 있는 여자를 만났다. 불을 켜도 늘 ‘밤’인 것만 같은 방 안에서, 온몸을 움츠리고 있는 여자였다. 자신의 시간을 태곳적으로 되돌려 스스로 ‘퇴행’을 감내하고 있던 그녀는 “시력이 한 음씩 내려가기 시작”(「단조가 번지는 방 안」)하는 이상 징후를 느끼자, 돌연 그 사라지는 감각들을 하나둘씩 헤아리다가 멀쩡한 현시(顯示)로 지금―여기를 견딜 수 없다는 듯, 혹은 치명적인 듯 “목마른 허기로 배가 불러”(「건조 소녀」)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헛배부름에도 목적이 있었을까. 꿈이 있었을까.
“나는 나를 잃어버”(「위험한 휴전)리기로 작정을 하고 난 날마다, 어김없이 “손잡이가 없는 난간처럼 아찔하게 밤이 깊어가고/ 뼈도 없는 밤”(「장미가 취했다」)은 그녀의 결손만큼, 부풀어 오르는 일이 잦았나 보다. 왜 그녀는 ‘밤’, ‘그늘’, ‘그림자’ 따위 등 하강하는 것들과 유독 친연성을 띠고 있었는지, “구겨진 비닐봉지도 날개가 돋아나/ 담아두었던 울음을 뱉어(「창백」)낼 것만 같은 옥상에서는 오늘 하루치의 빨래가 마르고, 그 빨래를 쥐고 축 늘어진 몸 없는 옷가지들은 몸의 형체만 기억한 채, “바람과 달빛이 올 사이 끼워둔 나의 축축한 이야기를 다 읽어”(「한밤중 빨래를 널면」) 줄 것만 같은 포즈로 또 쓸쓸한 삶의 기후를 쓰고 있으니, 그녀와 관계 맺고, 곁에 있는 이 공간은 얼마나 그녀에게 가혹했던 것인가. 가령 “샤워기에서 뜨거운 모래가 쏟아”(「사막을 짓는 여자」)져 나와서 씻으면 씻을수록 온 집안이 모래로 넘쳐나고, 저 스스로도 사막의 일부가 되어 바스러지고 있는 몸으로, 그녀마저도 이 기묘한 집의 “기울어진 그늘”(「손금」)이 될 때, 우리를 한번쯤 생각해보았을까. 제 몸을 ‘해체’해서 자기 존재를 정립하려는 한 시인의 강한 의지를 말이다.
‘퇴행’과 ‘해체’를 통한 어둠에 가 닿음, 그렇다. 이제부터 말하고자하는 이 ‘집’은 이희은의 첫 ‘시집’에 관한 이야기다.
물(음)의 세계
이희은 시인에게 세상을 겪는 일, 세상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일이란 “악몽은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고/ 방 안을 헤엄치기 시작했다”(「질문」)와 같은 구절처럼 가혹한 일인 듯하다. 그러니 이 시집의 시적 화자는 모두 나 바깥에 위치해있던 모든 당신들에게서 해명되지 않은 폭력을 감내하고 있는 인상으로 기능한다. “사물의 문을 열고자 했으나 늘 캄캄했다”(「시인의 말」)고 고백하기도 했거니와, 가령 “소화불량이 걸린 자리”처럼 “말이 되지 못한 말이 목구멍에 걸린다”(「굳어진 말」)거나 “당신은 툭, 내뱉은 나의 말을/ 부수려 한다”(「위험한 휴전」)는 세계와의 소통에 고역을 겪고 있는 사태들이 그렇게 읽힌다. 여기서 시인은 타자로 나아가는 ‘말의 고역’을 인내함에 앞서, 자신의 존재를 해명하는 몇 가지 방식을 선행한다. 이 과정에서 누차 반복되는 기표는 ‘어머니’, ‘할머니’와 같은 선형적 여성 주체의 복원과 관계된다. 물론 이러한 주체에 가 닿는 방식에 있어서도 존재의 근원을 상징하는 ‘바다’, ‘물고기’와 같은 기표를 반복적으로 차용한다. 다음 시편들을 경유해서 살펴보자.
우리는 서로의 팔뚝에
꼬리 없는 고양이를 새겨놓고
밤마다 골목에서 비틀거렸다
엄마가 들려주던 태몽이 생각나지 않을 때면
담장에 걸터앉아 탄생설화를 짓기도 했다
불빛처럼 가벼운 그 이야기를
농담처럼 귀에 넣고
우리는 기어이 손을 놓았다
키가 다 자란 누나는
마당 한편에 울음을 묻어놓고
훌쩍 보육원 담을 넘었다
저녁이 저 혼자
보름달을 베어 먹고 있었다
― 「고양이 문신」 전문
머리카락 사이사이 몸 비비던 것들
헝클어진 시간이 호흡을 막아요
양수 안에서 웅크리고 몸의 길을 잡던
열 개의 시계가 천천히 사라져요
손가락 끝 소용돌이에서 흘러나온 것
깊이 배어 있던 활자들 흩어져 나와요
삼십 개의 계단 아래 숨어 있던 첫사랑처럼
잠깐 물거품으로 멈췄다가요
하루를 숨겨왔던 얼굴, 부욱-북 문지르면
모공 속 진물이 미끄러져 나와요
충혈된 무늬들은 목구멍을 자꾸 맴돌아요
어둠을 몰고 온 구두인 듯 발목을 휘감던
발자국들 어지러워요
혈관이 뚫렸다 막혔다 두근거려요
…… (중략) ……
먹구름이 들창을 열고 몰려와
욕실 가득 차오르네요
배꼽을 열고 저 거품을 다 빨아들이고 싶어요
― 「구름과 거품」 부분
인용한 두 편의 시에서 시적 화자는 ‘퇴행’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과정을 기술한다. 우선 「고양이 문신」에서는 “우리”라는 복수의 화자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서로의 팔뚝에/ 꼬리 없는 고양이를 새겨놓고/ 밤마다 골목에서 비틀거렸다”는 고아들이다. 밤이면 어슬렁거리는 길고양이들처럼 제가 머물러야하는 곳과 태어났던 곳을 망각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엄마가 들려주던 태몽”에 대한 기억도 변변치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자신이 탄생했던 내력들까지도 하찮거나 무의미한 의미로 취급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길고양이’―‘고아’―‘집 없음의 존재’와 같은 상징 체계를 그대로 감내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탄생설화를 짓”는 일에 전 생애를 바칠 만도하다. 나의 내력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것은 내 존재의 근원지의 명명을 통해서 앞으로 내가 나아가야 할 미래의 길을 전망하는 일이자, 내가 현재를 견디는 에너지로 작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허락된 기억이란 “불빛처럼 가벼운 그 이야기”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마당 한편에 울음을 묻어놓고/ 훌쩍 보육원 담을 넘었다”는 현실의 아픈 이야기들뿐이다. 다시 말해 이들의 어떤 사연도 ‘설화’의 층위에서 논해볼 수 없는 것이고, 아픔을 숨기기 위한 “농담” 같은 것이 될 처지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당도한 밤은 “저녁이 저 혼자/ 보름달을 베어 먹고 있”는 빛 한 점 없는 그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그믐이 단지 어둠이 빛을 삼킨 밤의 상태가 아니라 명확히 지구 주위를 공전하며 빛을 발아하고 있는 꽉 찬 달의 ‘실재’가 단지 가려진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다. 즉 내가 비록 고아거나 길고양이의 처지로 비유될 수밖에 없는 상태더라도 나 또한 ‘모르는 엄마’에게 소중한 탄생설화를 들을 수 있었던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고 견지해야한다는 의지에 의지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 시적 화자는 “잠 속에서 또 잠이 들었어요 …… 어느 날 문득, / 당신 눈 속에서 조용히 헤엄치는/ 나를 볼 수 있을 거예요” (「바다를 준비하세요」)라는 구문처럼 ‘없는 어머니’의 ‘눈 속'을 헤엄치고 있는 자아를 꿈꿀 법하다.
「구름과 거품」에서도 그렇다. “머리카락 사이사이 몸 비비던 것들”이란 무엇인가. “양수 안에서 웅크리고 몸의 길을 잡던” 탯줄과 태아 사이의 당김이 팽팽해지고 헝클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그 열 달(“열 개의 시간”) 동안, 아이는 어머니의 몸에서 바깥 세계 배운다. 마치 ‘물고기’처럼 양수 속을 바다인 듯 착각하면서 시간을 지워 몸을 채우고, 새 생명이 되기를 준비한다. 그러나 여기서 시적 화자의 태도가 수상하다. 양수 속을 헤엄치는 태아의 시간이 그리 따뜻하지만은 않을 것으로 인식한다는 데에서 문제적이다. “하루를 숨겨왔던 얼굴, 부욱-북 문지르면/ 모공 속 진물이 미끄러져 나와요/ 충혈된 무늬들은 목구멍을 자꾸 맴돌아요”라는 구절에서도 미루어 볼 수 있듯, 시적 화자는 양수 속에서 자라는 시간을 통증의 시간으로 느낀다. 즉 ‘성장’이 ‘통증’이 될 수밖에 없는 사태에 놓여 있는 자아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태아였던 내가 태동을 만드는 일 또한 “어둠을 몰고 온 구두”와 같은 폭력적/ 사회적 주체가 가 하는 발길질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은 폭력임과 동시에 상징 질서 체계에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회화에 가깝다. 세계를 “혈관이 뚫렸다 막혔다”를 반복하는 것으로 인지한 채, 자라는 그 과정이 고통스러우면서도 화자는 그저 “두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러한 사태는 ‘구름’이나 ‘거품’의 질감이다. 구름이나 거품처럼 실체가 명확히 있는 것이 아니라 부풀려진 것. 다시 말해 무거워지면 비가 내릴 수밖에 없는 존재의 허상이거나 숨이 죽어버리면 형체가 사라지는 거품의 생리처럼, 생명 또한 시적 화자에게는 부풀려진 사건에 지나지 않는 고역의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구름’의 부피가 비대해져 ‘비’가 된다면, 태어날 아이의 운명은 “남몰래 살갗이 된 사람/ 여백의 낙서는 붉은 통증으로 번지고/ 녹물 같은 목소리”(「비가 읽는 책」)를 가질 사회(상질 질서)에 편입될 자아로 전락해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저 유령처럼, 말이다. 이쯤 되면, 이희은의 퇴행과 자기 근원적 존재 물음에 관해 더 명징하게 해부해야만 이 시집의 시적 화자의 의도를 좀 더 명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태초의 ‘물고기’가 유영하는 운동성을 가시화하는 시편을 더 살펴보자.
냇물은 마른기침하며 흘러가고 있었지
가장자리부터 물살의 골이 깊어지면
할머니는 풀물 든 발을 젖은 바닥에 내려놓았어
물고기 떼 몰려와 입술을 댈 땐
갈라진 발톱이 조금씩 허물어졌어
발목에선 묵은 나이테가 풀어져 나오고
잎맥처럼 가느다란 핏줄도 서서히 지워졌어
몸의 등고선이 무너지고 있었던 거야
할머니는 사라지는 발이 간지러운 듯
얼굴을 아주 잘게 접었어
가끔 물에 뜨는 등고선을 걷어내어
표정을 씻으면 눈빛도 한 겹 얇아졌지
폐곡선을 그리는 등뼈 위에
무거운 햇살이 내려와 앉았어
물살이 핥아 먹은 발을
헐렁한 고무신에 담아 집으로 돌아갈 때
물의 발자국만 할머니를 뒤따랐어
― 「헐렁한 등고선」 전문
붉은 물고기들 지느러미 흔들며 벽 속을 떠돌고, 웅크린 주택의 창문 불빛도 꽃잎처럼 떨어진다, 단풍나무 마른 이파리 몇 개 축축한 바람이 슬몃슬몃 핥으며 지나가면, 집 나간 엄마의 얼굴에는 이끼가 자라나고, 길고양이 한 마리 다리 절뚝이며 구름을 밟고 다닌다 하늘 한쪽엔 해먹 같은 초승달 떠 있지만, 눈코 없는 졸라맨은 민들레 대궁을 꺾어 들고 씨앗처럼 날아갈 준비를 한다, 알코올 클리닉에 다녀온 아빠는 벽 속에서도 아직 비틀비틀, 해님 그리려는 순간 분필이 뚝, 부러진다, 그림들은 점점 시들어 짙어진 어둠과 함께 아이의 눈 속으로 빨려들고, 아이의 눈동자가 파문을 일으킨다, 바닥에 뒹구는 분필로는 이제 별 하나 그려 넣을 수 없다
― 「골목을 그리는 아이」 전문
화자의 근원적 표상이라 할 수 있는 ‘할머니’이란 몸의 성질을 “헐렁한” 기표로 수사하고 있는, 인용시 「헐렁한 등고선」은 훼손된 태초에 몸의 공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먼저 “가장자리부터 물살의 골이 깊어”지는 냇물에 “갈라진 발톱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몸을 누이고, “발목에선 묵은 나이테가 풀어져 나오”는 것처럼 나무의 형상을 한 할머니가 제 뿌리를 물살에 닳고 닳아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잎맥처럼 가느다란 핏줄도 서서히 지워”질 수밖에 없는 ‘할미 나무’의 위치는 제 살이 지워지면서도 “사라지는 발”(뿌리)의 고통을 ‘간지러움’이란 가벼운 감각으로 느끼며, 냇가를 지키는 수호신처럼 그저 모든 대지를 끌어안고 버티는 형상으로 제시된다.
이때 시적 화자가 ‘할미 나무’의 등고선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 자신이 그 냇가를 유영하는 ‘물고기’의 모습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핏줄도 서서히 지워졌어”라고 언급하기도 했거니와, “가끔 물에 뜨는 등고선을 걷어내”고 있다고도 했다. 물론 이런 작용을 행하는 주체는 ‘할머니’(나무)로도 ‘물고기’로도 대변되는 시적 화자의 주체도 아니다. 자연의 생리 그 자체일 수 있다. 그러니 세계를 관장하고 있는 자연 앞에서 ‘할머니’는 제 몸의 근원(뿌리)을 지우고 있으나 그것은 단순히 자신을 소멸하는 행위가 아니다. ‘할미 나무’의 행위는 자신을 소멸시키고, 물(냇물)을 마르도록 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희생’을 통해 냇가의 생태계를 건립하고 있는 ‘자연 섭리’와 그 면면들을 수사하는 맥락으로 읽히기 충만한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할머니의 행위를 세계의 균형을 맞추는 행위의 차원까지 수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그곳에서 ‘물고기의 삶’은 ‘할미 나무’의 자장 아래서 성장할 수밖에 없다. “물살이 핥아 먹은 발” 즉 ‘생명의 뿌리’는 물(생명)과 관류하며 이곳의 생태계를 유지하는 기표로 기능한다. 그러므로 나 또한 그러한 할머니의 존재감에서 시발되어, ‘나무’의 상승적 기표만큼 ‘물고기’의 하강적 기표로 이 세계에 가라앉아 있는 것이다. 때문에 “물의 발자국만 할머니를 뒤따”랐다는 화자의 선언은 ‘물의 세계’에서 ‘할머니’―‘어머니’―‘물고기’―‘나’에 이르기까지 자기 존재를 인지하는 근원적 표상이라 할 수 있겠다. 할머니의 생태를 ‘등고선’이라는 기표, 즉 높낮이의 기표로 가늠해보겠다는 의지가 투영된 화자의 의지적 결과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태계의 긴장감이 헐렁하다니! 이는 또 무슨 의미일까.
「골목을 그리는 아이」을 경유해서 살펴보자. 우선 이 시에서 ‘아이’는 ‘집’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골목”을 그리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자. 아이는 “붉은 물고기들 지느러미 흔들며 벽 속을 떠돌고, 웅크린 주택의 창문 불빛도 꽃잎처럼 떨어”지는 현상이 반복되는 집 밖에서, 골목을 관찰하고 있다. 오래 전에 집을 나갔는지, “얼굴에 이끼가 자라”고 있다는 엄마는 아이 곁에 없다. 아빠 또한 “알코올 클리닉에 다녀온” 존재로 일상생활이 위태로운 상황이다. 그러니 아이의 눈동자에 들어온 세계란 기댈 수 있는 부모가 없는 “파문”의 세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이디푸스든 엘렉트라든 아이에게는 ‘원형 공감’과 ‘상징 질서’가 수용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이다. 때문에 「헐렁한 등고선」에서 나무로 표상되는 할머니의 ‘뿌리지 우기’의 희생 또한 아이에게는 강하게 작용되는 모성적·근원적 끈으로 작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헐렁한’ 끈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헐렁한 끈을 팽팽하게 긴장하도록 만들어야할 욕망이 이희은의 시에서는 누차 반복된다.
시적 화자가 세계의 균열된 순간은 “파문”이라고 표현한 것이나, 혹은 붉은 벽돌집의 외형을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의 형상으로 묘사한 부분을 상기해보자. 화자는 균열된 세계의 편린들을 ‘물의 세계’로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파문”이라 언술했을 것이고, 화자의 내면 깊이 가라앉은 사연들을 봉인하는 붉은 벽돌집도 ‘물의 공간’으로 그려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조직된 세계는 ‘물의 세계’이자, 자기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는 ‘물음의 세계’이다.
질문하는 물고기, ―되기
그렇다면 이희은 시의 존재상은 왜 ‘물’의 종속이자 ‘물음’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 앞서 ‘물’과 친연성에 관해서는 훼손된 뿌리/근본 감각을 복원하려는 시적 의지에서부터 기인한다고도 했거니와, ‘상상계’를 겪지 못하고, ‘상징계’에 이른 시적 화자의 결손된 자아감에 대해 시인의 욕망이 끊임없이 투사된다고도 했었다. 이러한 시인의 욕망이 자기 물음의 방식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것은 이희은의 시 세계가 단순히 ‘동일성’의 맥락에서 그 의미가 증폭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규정’과 그에 따른 ‘차이’로 인한 ‘변화’와 ‘생성’의 맥락으로 증산된다고 볼 수 있겠다. 가령 들뢰즈 철학에서 존재 양태의 핵심은 ‘잠재성’과 ‘―되기’를 통한 변이와 차이, 반복에 따른 생성에 무한함에 있다. 즉 세계의 본질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변화와 운동성을 통해 생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기관 없는 신체’라는 개념 또한 기관이 마련되지 않은 ‘태아’의 상태로 몸을 되돌리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화되거나 사건화 될 ‘가능성’의 집합체들을 말하는 것이다.
앞서 「골목을 그리는 아이」에서도, 골목을 그리고 있는 행위 주체인 아이에 의해 조직된 세계는 이미 아이 화자에 의해 판명이 끝난 세계가 아니라 아이의 시선(“아이의 눈 속”)에 따라 그려지고 있는 과정 중에 놓여 있는 잠재적 사건들이다. “해먹 같은 초승달” “눈코 없는 졸라맨”의 외적 형상이 이미 잠재화 되어 있는 ‘기관 없는 신체’의 표상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길고양이 한 마리 다리 절뚝이며 구름을 밟고 다닌다”거나 “민들레 대궁을 꺾어 들고 씨앗처럼 날아갈 준비를 한다”와 같은 존재의 결손된 상태 또한 존재의 결핍이자 동시에 어떤 것으로든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 기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 생애를 다음과 같이 형상화시켜볼 수도 있었던 것이다.
포근한 고치가 필요했던 여자는 장롱 서랍에 들어가 스스로 갇혔다 가늘고 긴 바람이 모서리로 함께 들어왔다 어둠을 더듬거리며 털실 한 가닥 찾아내 손가락에 감았다 실이 점점 감겨갈수록 배가 움푹 꺼지고 늑골이 선명해졌다 공중을 긋는 빗소리와 바람의 올을 섞어 쉬지 않고 얽어나갔다 그리움의 무늬를 완성하기 전까지는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가슴을 짜 올라갈 땐 너무 일찍 잃어버렸던 젖 냄새가 비릿하게 풍겨 나왔다 따뜻한 입술을 만드는 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둥근 목소리가 바늘 위로 굴러다녔다 한 가닥씩 떨어지는 머리카락으로 마지막 눈동자를 떠가다가 나비가 되기 직전 그만, 바늘을 놓쳐버렸다 바닥에 쌓였던 먼지들이 날아올랐다가 고요히 내려앉았다
어느 맑은 날 우연히 열어본 서랍 속엔
짜다만 빨간 스웨터의 엄마가 올이 풀린 날개로 누워 있었다
― 「짜다만 나비」 전문
우선 인용한 시를 뒤에서부터 읽어보자. “짜다만 빨간 스웨터의 엄마가 올이 풀린 날개로 누워 있었다”는 이야기는 “장롱 서랍에 들어가 스스로 갇”힌 여자의 일생을 비유하는, 언뜻 결론적 정황으로 보인다. 물론 이희은은 이와 같은 ‘봉인’과 ‘어둠’의 속성을 가진 상징 기표들은 「별빛 화병」에는 “상자 속 어둠에 오래도록 갇혀”있는 시간을 청각적으로 풀어내면서 “나는 향기 잃은 그 소리를 쓰다듬으며” “흉터 더욱 깊어지는 소리/ 꽃잎 떨어지는 소리/ 먼지들 몰래 뒤척이는 소리” 등으로 계열화시키기도 하고, 「서랍 무덤」에서는 “아무에게도 손 내밀지 못했던 글자들/ 이제야 내게 왔다”며 어머니의 “일기 속, 내 이름을” 부르며, 자신이 이어 쓰는 일기의 주체가 된 것에 관한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기도 했었다.
그러나 ‘엄마의 일생’과 “고치”에서 나비가 되어가는 과정을 언술하는 그 은유 체계를 가만히 꿰뚫어 보면, 이 시의 상징체계는 나비가 되려고 하는 잠재적 자아의 수난의 일대기를 생생하게 그린 가편이라 할 수 있다. “가늘고 긴 바람이 모서리로 함께 들어왔”다가 “어둠을 더듬거리”고 “털실”로 제 삶에 내재된 어둠을 직조해낼 때마다 “배가 움푹 꺼지고 늑골이 선명해졌다”는 ‘고치―되기’의 과정은 “여자”가 “어머니”로 재탄생하는 인고의 모습을 일 것이다. 여기서 “너무 일찍 잃어버렸던 젖 냄새”나 “그리움의 무늬를 완성하기 전까지는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는 여자의 사연은 ‘모성’으로 가 닿지 못한 자기 존재에 대한 연민이자, 수동적 사태에 누차 내몰릴 수밖에 없었던 ‘서랍 속 같은 삶’에 대한 고백이다. 어떤 억압이 명징하게 있었다고 언술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 세월이 ‘나비’로 비상하지 못했다는 결과를 통해 유추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치 속에서 벌레가 날개를 짜는 정황과 스웨터를 짜면서 제 몸에 맞는 옷을 만드는 정황, 여자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되는 모성적 자아로 변이하는 정황 등이 서로 교차하면서, 변화 가능성에 놓여 있는 잠재적 자아를 가시화하는 동시에 새로이 생성될 몸의 기록에 대해 전망한다. 물론 그것이 여성의 완성이 모성성이라는 재래적 정언 논리로 치우쳐 맥락화 된 부분이 없지는 않으나, 모성의 붕괴를 시집 전체에서 형상화 한 이희은의 시적 전략을 상기해보면 이 또한 “짜다만”이라는 수사처럼 미완성/ 미규정성의 세계를 전망하려 했다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엄마의 바다가 닫히면서/ 나의 물결은 시작”(「월식」)되었다는 구절처럼, 붕괴된 모성에서부터 기인한 생성의 전략인 셈이다.
아울러 이 시집 전편에 걸쳐 ‘―되기’의 생성 전략이 반복되고 있는 경향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사막 짓는 여자」에서 “발뒤꿈치가 사르륵사르륵 부서지”면서 제 자신도 사막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든가, “나는 가방을 걸어두었던 못이 되어/ 고개를 숙이듯 구부러지”겠다는 「애도」에서의 온몸을 바친 감흥방식이라든가, 「한 방울 사람」에서 “녹지 않는 눈”의 존재를 상기시키며, “나는 눈사람이 되”었다고 변환하는 방식 등이 그렇다. 제 몸의 성질을 변환키면서 시적 화자는 세계에 균열이 든 자리에 새로운 통점을 마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체온이 자국을 남길 때까지” “다시 또 얼음이 되”겠다는 「다시 클리닉」의 언술이나, 「문밖에서 뒤돌아보네」에서는 “벽지 속에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는 노인이 “빛이 된지 한참”이라는 표현, 「그늘도 마른」에서는 “마른 꽃이 되었”다는 할머니를 치맛자락 속 그늘을 “귓속”에 들이겠다는 순한 정서감 또한, 모두 시적 화자의 자기 해체를 통한 ‘( )―되기’ 생성 전략들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인은 이러한 변이를 통해 존재의 이면을 복권하는 “문장을 지우는 문장을 만들어/ 거기 감추어 둔 신호”(「얼룩의 얼굴」)를 발견하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그 길을 안내하는 주체는 종국에는 “물고기들의 눈빛”(「얼룩의 얼굴」)이다.
1
바닥까지 가라앉은 제 모습을
건져 올리던 사내
마르지 않는 물의 숨결을 받아먹고
돌이 되었다
2
돌의 가슴에 맥박 하나 박혔다
개울이 수만 개, 물의 화살을 쏘아 보내는 동안에도
심장은 탈색되지 않았다
돌을 잡으려는 순간
깊은 잠 속 누웠던 물고기 한 마리
파다닥, 꼬리지느러미 흔들며 문을 닫았다
― 「물속의 돌」 전문
악몽은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고
방 안을 헤엄치기 시작했다
시간이 반쯤 남은 수족관
벽시계는 아주 천천히
아가미를 벌렸다가 닫았다
굴절된 별빛의 방향을 따라
가시 뼈 사이사이 통증이 물풀처럼 흔들렸다
나는 매번 거품 같은 질문을 했고
시계는 물결처럼 매번 같은 대답을 했다
바람 빠진 부레로 물살을 넘나드는 동안
새벽은 몸속의 가시를 뽑아내며
비린내만 남긴 채 허물어졌다
― 「질문」 전문
「물속의 돌」에서 “마르지 않는 물의 숨결을 받아먹고/ 돌”이 되었다는 사내의 사연은 사내의 몸이 흐르는 물살 곁에서 “돌”에서 “물고기”로 다시금 탈바꿈되는 ‘生―死―生’의 윤회의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묘파되고 있다. 여기서 행위 주체인 화자가 “바닥까지 가라앉은 제 모습을/ 건져 올리던 사내”라는 것에 주목해보자. 사내는 단지 개울 속에서 돌을 들었을 뿐인데, 그 돌 속에서 존재의 시원(始原)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몸의 근원인 물고기의 움직임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내면 깊숙이 의식을 더 몰고 나갈 때, 시적 화자는 비로소 ‘물의 문’을 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런 현상은 잠시 잠깐, 그 찰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서 ‘물의 세계’가 퇴적되어 있는 돌의 외부는 순간, “꼬리지느러미 흔들며 문을 닫”고 말았다.
이러한 현상은 시적 화자가 자신 존재를 찾아 헤매면 헤맬수록 그 근원에 닿지 못하고 수차례 비껴나갈 수밖에 없는 미끄러운 현실의 상태를 허무감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손으로 잡으려고 하면 이내 빠져나가고 마는 미끄러운 물고기 비늘처럼 말이다. 그리고 다른 시편들 속에서도 “배꼽이 부글거렸으나/ 몸 비울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 끝없이 구부러진 골목을 헤매고 다니다/ 몸의 모든 구멍을 닫고/ 집으로 돌아왔다”(「손바닥을 읽다」)거나 “몸의 굴곡 풀지 않는다”(「늙지 않는 여자」)는 언술들로 미루어 보아, 이러한 ‘미끄러지는 감각’의 시작은 제 몸에 가시를 들이고 살았다는 가혹한 통증 때문이다.
이 시집의 표제작인 「밤의 수족관」과 유사 계열에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인용한 시 「질문」은 「밤의 수족관」의 말미에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자신의 별자리를 찾아 떠나갔다”는 물고기의 고행길에 바로 직전 상황을 형상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 “악몽은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고/ 방 안을 헤엄치기 시작”하면 시적 화자가 머무는 방이라는 공간은 일순간 수족관을 변하고, 제 몸조차 물고기로 변태한다. 화자는 자신의 삶에서 끝내 깨달을 수 없는 통증 때문에 “아가미를 벌렸다가 닫았다”가 “가시 뼈 사이사이 통증이 물풀처럼” 흔들기도 하지만, 그러한 몸부림이 “매번 거품 같은 질문”이 될 뿐 정작 수족관 물의 깊이는 가늠하지도 못하는 형국이다. 그리고 “시계는 물결처럼 매번 같은 대답”으로 미끄러지며 화자는 늙어가고 있다. 즉 시간의 퇴적은 시적 화자에게 ‘늙는 상태’나 ‘죽음’에 가까운 몽환을 겪게 했을 뿐 자아가 가진 균열에 대해서는 명확한 해답을 내려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는 제 몸에 가시를 들이고 있는 것과 반대로 겉으로 미끄럽고, 부드러운 물결 속에서 그저 ‘물고기가 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이희은의 시적 태도를 우리가 애써 처연하게 느끼는 지점이 유발되는데, 그것은 바로 ‘질문 하는 물고기’를 자처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린내만 남긴 채 허물어”질 몸이라도 그 몸속에 내재된 “가시를 뽑아내며” 자기 분열과 해체의 이유를 끝까지 탐구하겠다는 의지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체를 통해서라도 뒤틀린 존재 상태를 개선해보겠다는, 죽음을 담보한 치유의 행위를 우리는 무엇이라 호명해야겠는가. “엉킨 장미의 넝쿨을 뒤적이며/ 나는 또 길을 잃는다” (「기시감」)는 개인적 차원에서의 삶의 방황일까. “나의 호흡은 여전히 먹구름을 통과하는 중”(「진맥」)이라는 지속되는 고통의 현현일까. 그도 아니라면 “낯선 도시, 길고도 긴 시간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기다림을 함께 기다렸다// 영영 돌아오지 못하기라도 하듯” (「건너편의 오후」) 그렇게, 한 번 놓치고 나면 영영 다시는 복원되지 못하는 상처들에 대한 대면과 그 서글픔일까. 아마도 이 시집의 화자에게 가장 중요한 시적 의지는 방황하는 자신의 생리 속에서도 “궤도의 중심점을 찾는 일”(「접시 돌리기」)일 것이다.
기묘한 문
이 시집의 여는 시라고 할 수 있는 첫 시 「손금」을 읽어보자. 마지막 문을 나서면서, 이제 다시 첫 문을 두드려보자는 것이다.
지도에 없는 골목으로 나를 버리러 갔습니다
꽃잎의 주름을 세어보다가, 고양이 눈 속을 엿보다가, 벽화처럼 머리 기댄 나무들 미처 마르지 않은 비밀에 손끝을 적시다가
문득 금 간 유리창에 비친 나를 보았습니다 뺨에 깊게 그어진 상처가 있었습니다
담장 낙서를 떼어먹다가, 기울어진 그늘을 쓰다듬다가, 깨진 화분에서 쏟아지는 이야기들 바닥에 길게 늘이다가
모퉁이를 지나 무화과나무 옆에 섰습니다 이파리 한 장 꺾어 당신의 목소리를 찾다가
보도블록이 끊긴 곳, 웅덩이의 어둠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나를 버리지 못한 채 손바닥 안 골목, 잔주름 위에서 어제를 움켜쥐고 있는
― 「손금」 전문
“손금”이란 무엇인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상법’이라 하여 손금을 읽는 법을 ‘관상’과 함께 개인의 운명을 점치는 방법으로 통용되어왔다. 그런데 “지도에 없는 골목으로 나를 버리러” 간다는 시적 화자는 자신이 쥐고 태어난 운명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밀에 손끝을 적시”는 것처럼 자신을 둘러싼 여러 비밀들을 해제하고 억누르는 것들을 해방시키겠다는 의지인 셈이다. 그 가운데 “문득 금 간 유리창에 비친 나”를 만나 그 상처가 “뺨에 깊게 그어진 상처”로 옮아와 붙는다고 하더라도, “깨진 화분에서 쏟아지는 이야기들”을, 그러한 자신의 이야기들을 모두 쓰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비록 시적 화자는 현재에는 “나를 버리지 못한 채 손바닥 안 골목, 잔주름 위에서 어제를 움켜쥐고 있”지만, 시인은 두렵지 않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모든 운명들을 거역하기 위해 이 (시)집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낙서를 떼어먹다가, 기울어진 그늘을 쓰다듬다가” 혹여 모르는 나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불행해지는 일은 없다. “지난 밤, 잠 속으로 당신이 흘리고 간 문장”(「그림자를 심다」)을 주어다가 이 집을 튼튼하게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시인의 말」의 주술구조를 이제 바꿔서 읽어야겠다. “사물의 문을 열고자 했으나 늘 캄캄했다”가 아니라, ‘캄캄했으나 늘 사물의 문을 열고자 했다.’고. 그렇게 이희은에게 희망과 위안을 담는다.
어미 없는 물고기들의 질문
박성준(시인, 문학평론가)
기묘한 몸
기묘한 집에 살고 있는 여자를 만났다. 불을 켜도 늘 ‘밤’인 것만 같은 방 안에서, 온몸을 움츠리고 있는 여자였다. 자신의 시간을 태곳적으로 되돌려 스스로 ‘퇴행’을 감내하고 있던 그녀는 “시력이 한 음씩 내려가기 시작”(「단조가 번지는 방 안」)하는 이상 징후를 느끼자, 돌연 그 사라지는 감각들을 하나둘씩 헤아리다가 멀쩡한 현시(顯示)로 지금―여기를 견딜 수 없다는 듯, 혹은 치명적인 듯 “목마른 허기로 배가 불러”(「건조 소녀」)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헛배부름에도 목적이 있었을까. 꿈이 있었을까.
“나는 나를 잃어버”(「위험한 휴전)리기로 작정을 하고 난 날마다, 어김없이 “손잡이가 없는 난간처럼 아찔하게 밤이 깊어가고/ 뼈도 없는 밤”(「장미가 취했다」)은 그녀의 결손만큼, 부풀어 오르는 일이 잦았나 보다. 왜 그녀는 ‘밤’, ‘그늘’, ‘그림자’ 따위 등 하강하는 것들과 유독 친연성을 띠고 있었는지, “구겨진 비닐봉지도 날개가 돋아나/ 담아두었던 울음을 뱉어(「창백」)낼 것만 같은 옥상에서는 오늘 하루치의 빨래가 마르고, 그 빨래를 쥐고 축 늘어진 몸 없는 옷가지들은 몸의 형체만 기억한 채, “바람과 달빛이 올 사이 끼워둔 나의 축축한 이야기를 다 읽어”(「한밤중 빨래를 널면」) 줄 것만 같은 포즈로 또 쓸쓸한 삶의 기후를 쓰고 있으니, 그녀와 관계 맺고, 곁에 있는 이 공간은 얼마나 그녀에게 가혹했던 것인가. 가령 “샤워기에서 뜨거운 모래가 쏟아”(「사막을 짓는 여자」)져 나와서 씻으면 씻을수록 온 집안이 모래로 넘쳐나고, 저 스스로도 사막의 일부가 되어 바스러지고 있는 몸으로, 그녀마저도 이 기묘한 집의 “기울어진 그늘”(「손금」)이 될 때, 우리를 한번쯤 생각해보았을까. 제 몸을 ‘해체’해서 자기 존재를 정립하려는 한 시인의 강한 의지를 말이다.
‘퇴행’과 ‘해체’를 통한 어둠에 가 닿음, 그렇다. 이제부터 말하고자하는 이 ‘집’은 이희은의 첫 ‘시집’에 관한 이야기다.
물(음)의 세계
이희은 시인에게 세상을 겪는 일, 세상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일이란 “악몽은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고/ 방 안을 헤엄치기 시작했다”(「질문」)와 같은 구절처럼 가혹한 일인 듯하다. 그러니 이 시집의 시적 화자는 모두 나 바깥에 위치해있던 모든 당신들에게서 해명되지 않은 폭력을 감내하고 있는 인상으로 기능한다. “사물의 문을 열고자 했으나 늘 캄캄했다”(「시인의 말」)고 고백하기도 했거니와, 가령 “소화불량이 걸린 자리”처럼 “말이 되지 못한 말이 목구멍에 걸린다”(「굳어진 말」)거나 “당신은 툭, 내뱉은 나의 말을/ 부수려 한다”(「위험한 휴전」)는 세계와의 소통에 고역을 겪고 있는 사태들이 그렇게 읽힌다. 여기서 시인은 타자로 나아가는 ‘말의 고역’을 인내함에 앞서, 자신의 존재를 해명하는 몇 가지 방식을 선행한다. 이 과정에서 누차 반복되는 기표는 ‘어머니’, ‘할머니’와 같은 선형적 여성 주체의 복원과 관계된다. 물론 이러한 주체에 가 닿는 방식에 있어서도 존재의 근원을 상징하는 ‘바다’, ‘물고기’와 같은 기표를 반복적으로 차용한다. 다음 시편들을 경유해서 살펴보자.
우리는 서로의 팔뚝에
꼬리 없는 고양이를 새겨놓고
밤마다 골목에서 비틀거렸다
엄마가 들려주던 태몽이 생각나지 않을 때면
담장에 걸터앉아 탄생설화를 짓기도 했다
불빛처럼 가벼운 그 이야기를
농담처럼 귀에 넣고
우리는 기어이 손을 놓았다
키가 다 자란 누나는
마당 한편에 울음을 묻어놓고
훌쩍 보육원 담을 넘었다
저녁이 저 혼자
보름달을 베어 먹고 있었다
― 「고양이 문신」 전문
머리카락 사이사이 몸 비비던 것들
헝클어진 시간이 호흡을 막아요
양수 안에서 웅크리고 몸의 길을 잡던
열 개의 시계가 천천히 사라져요
손가락 끝 소용돌이에서 흘러나온 것
깊이 배어 있던 활자들 흩어져 나와요
삼십 개의 계단 아래 숨어 있던 첫사랑처럼
잠깐 물거품으로 멈췄다가요
하루를 숨겨왔던 얼굴, 부욱-북 문지르면
모공 속 진물이 미끄러져 나와요
충혈된 무늬들은 목구멍을 자꾸 맴돌아요
어둠을 몰고 온 구두인 듯 발목을 휘감던
발자국들 어지러워요
혈관이 뚫렸다 막혔다 두근거려요
…… (중략) ……
먹구름이 들창을 열고 몰려와
욕실 가득 차오르네요
배꼽을 열고 저 거품을 다 빨아들이고 싶어요
― 「구름과 거품」 부분
인용한 두 편의 시에서 시적 화자는 ‘퇴행’을 온몸으로 겪고 있는 과정을 기술한다. 우선 「고양이 문신」에서는 “우리”라는 복수의 화자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우리”는 “서로의 팔뚝에/ 꼬리 없는 고양이를 새겨놓고/ 밤마다 골목에서 비틀거렸다”는 고아들이다. 밤이면 어슬렁거리는 길고양이들처럼 제가 머물러야하는 곳과 태어났던 곳을 망각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은 “엄마가 들려주던 태몽”에 대한 기억도 변변치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자신이 탄생했던 내력들까지도 하찮거나 무의미한 의미로 취급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길고양이’―‘고아’―‘집 없음의 존재’와 같은 상징 체계를 그대로 감내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탄생설화를 짓”는 일에 전 생애를 바칠 만도하다. 나의 내력을 명확히 알고 있다는 것은 내 존재의 근원지의 명명을 통해서 앞으로 내가 나아가야 할 미래의 길을 전망하는 일이자, 내가 현재를 견디는 에너지로 작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허락된 기억이란 “불빛처럼 가벼운 그 이야기”라고 밖에 할 수 없는 “마당 한편에 울음을 묻어놓고/ 훌쩍 보육원 담을 넘었다”는 현실의 아픈 이야기들뿐이다. 다시 말해 이들의 어떤 사연도 ‘설화’의 층위에서 논해볼 수 없는 것이고, 아픔을 숨기기 위한 “농담” 같은 것이 될 처지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당도한 밤은 “저녁이 저 혼자/ 보름달을 베어 먹고 있”는 빛 한 점 없는 그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그믐이 단지 어둠이 빛을 삼킨 밤의 상태가 아니라 명확히 지구 주위를 공전하며 빛을 발아하고 있는 꽉 찬 달의 ‘실재’가 단지 가려진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다. 즉 내가 비록 고아거나 길고양이의 처지로 비유될 수밖에 없는 상태더라도 나 또한 ‘모르는 엄마’에게 소중한 탄생설화를 들을 수 있었던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 않고 견지해야한다는 의지에 의지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니 시적 화자는 “잠 속에서 또 잠이 들었어요 …… 어느 날 문득, / 당신 눈 속에서 조용히 헤엄치는/ 나를 볼 수 있을 거예요” (「바다를 준비하세요」)라는 구문처럼 ‘없는 어머니’의 ‘눈 속'을 헤엄치고 있는 자아를 꿈꿀 법하다.
「구름과 거품」에서도 그렇다. “머리카락 사이사이 몸 비비던 것들”이란 무엇인가. “양수 안에서 웅크리고 몸의 길을 잡던” 탯줄과 태아 사이의 당김이 팽팽해지고 헝클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그 열 달(“열 개의 시간”) 동안, 아이는 어머니의 몸에서 바깥 세계 배운다. 마치 ‘물고기’처럼 양수 속을 바다인 듯 착각하면서 시간을 지워 몸을 채우고, 새 생명이 되기를 준비한다. 그러나 여기서 시적 화자의 태도가 수상하다. 양수 속을 헤엄치는 태아의 시간이 그리 따뜻하지만은 않을 것으로 인식한다는 데에서 문제적이다. “하루를 숨겨왔던 얼굴, 부욱-북 문지르면/ 모공 속 진물이 미끄러져 나와요/ 충혈된 무늬들은 목구멍을 자꾸 맴돌아요”라는 구절에서도 미루어 볼 수 있듯, 시적 화자는 양수 속에서 자라는 시간을 통증의 시간으로 느낀다. 즉 ‘성장’이 ‘통증’이 될 수밖에 없는 사태에 놓여 있는 자아였다는 것이다. 그러니 태아였던 내가 태동을 만드는 일 또한 “어둠을 몰고 온 구두”와 같은 폭력적/ 사회적 주체가 가 하는 발길질로 표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은 폭력임과 동시에 상징 질서 체계에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사회화에 가깝다. 세계를 “혈관이 뚫렸다 막혔다”를 반복하는 것으로 인지한 채, 자라는 그 과정이 고통스러우면서도 화자는 그저 “두근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이러한 사태는 ‘구름’이나 ‘거품’의 질감이다. 구름이나 거품처럼 실체가 명확히 있는 것이 아니라 부풀려진 것. 다시 말해 무거워지면 비가 내릴 수밖에 없는 존재의 허상이거나 숨이 죽어버리면 형체가 사라지는 거품의 생리처럼, 생명 또한 시적 화자에게는 부풀려진 사건에 지나지 않는 고역의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구름’의 부피가 비대해져 ‘비’가 된다면, 태어날 아이의 운명은 “남몰래 살갗이 된 사람/ 여백의 낙서는 붉은 통증으로 번지고/ 녹물 같은 목소리”(「비가 읽는 책」)를 가질 사회(상질 질서)에 편입될 자아로 전락해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저 유령처럼, 말이다. 이쯤 되면, 이희은의 퇴행과 자기 근원적 존재 물음에 관해 더 명징하게 해부해야만 이 시집의 시적 화자의 의도를 좀 더 명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태초의 ‘물고기’가 유영하는 운동성을 가시화하는 시편을 더 살펴보자.
냇물은 마른기침하며 흘러가고 있었지
가장자리부터 물살의 골이 깊어지면
할머니는 풀물 든 발을 젖은 바닥에 내려놓았어
물고기 떼 몰려와 입술을 댈 땐
갈라진 발톱이 조금씩 허물어졌어
발목에선 묵은 나이테가 풀어져 나오고
잎맥처럼 가느다란 핏줄도 서서히 지워졌어
몸의 등고선이 무너지고 있었던 거야
할머니는 사라지는 발이 간지러운 듯
얼굴을 아주 잘게 접었어
가끔 물에 뜨는 등고선을 걷어내어
표정을 씻으면 눈빛도 한 겹 얇아졌지
폐곡선을 그리는 등뼈 위에
무거운 햇살이 내려와 앉았어
물살이 핥아 먹은 발을
헐렁한 고무신에 담아 집으로 돌아갈 때
물의 발자국만 할머니를 뒤따랐어
― 「헐렁한 등고선」 전문
붉은 물고기들 지느러미 흔들며 벽 속을 떠돌고, 웅크린 주택의 창문 불빛도 꽃잎처럼 떨어진다, 단풍나무 마른 이파리 몇 개 축축한 바람이 슬몃슬몃 핥으며 지나가면, 집 나간 엄마의 얼굴에는 이끼가 자라나고, 길고양이 한 마리 다리 절뚝이며 구름을 밟고 다닌다 하늘 한쪽엔 해먹 같은 초승달 떠 있지만, 눈코 없는 졸라맨은 민들레 대궁을 꺾어 들고 씨앗처럼 날아갈 준비를 한다, 알코올 클리닉에 다녀온 아빠는 벽 속에서도 아직 비틀비틀, 해님 그리려는 순간 분필이 뚝, 부러진다, 그림들은 점점 시들어 짙어진 어둠과 함께 아이의 눈 속으로 빨려들고, 아이의 눈동자가 파문을 일으킨다, 바닥에 뒹구는 분필로는 이제 별 하나 그려 넣을 수 없다
― 「골목을 그리는 아이」 전문
화자의 근원적 표상이라 할 수 있는 ‘할머니’이란 몸의 성질을 “헐렁한” 기표로 수사하고 있는, 인용시 「헐렁한 등고선」은 훼손된 태초에 몸의 공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먼저 “가장자리부터 물살의 골이 깊어”지는 냇물에 “갈라진 발톱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몸을 누이고, “발목에선 묵은 나이테가 풀어져 나오”는 것처럼 나무의 형상을 한 할머니가 제 뿌리를 물살에 닳고 닳아가는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잎맥처럼 가느다란 핏줄도 서서히 지워”질 수밖에 없는 ‘할미 나무’의 위치는 제 살이 지워지면서도 “사라지는 발”(뿌리)의 고통을 ‘간지러움’이란 가벼운 감각으로 느끼며, 냇가를 지키는 수호신처럼 그저 모든 대지를 끌어안고 버티는 형상으로 제시된다.
이때 시적 화자가 ‘할미 나무’의 등고선에 집착하는 이유는 그 자신이 그 냇가를 유영하는 ‘물고기’의 모습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핏줄도 서서히 지워졌어”라고 언급하기도 했거니와, “가끔 물에 뜨는 등고선을 걷어내”고 있다고도 했다. 물론 이런 작용을 행하는 주체는 ‘할머니’(나무)로도 ‘물고기’로도 대변되는 시적 화자의 주체도 아니다. 자연의 생리 그 자체일 수 있다. 그러니 세계를 관장하고 있는 자연 앞에서 ‘할머니’는 제 몸의 근원(뿌리)을 지우고 있으나 그것은 단순히 자신을 소멸하는 행위가 아니다. ‘할미 나무’의 행위는 자신을 소멸시키고, 물(냇물)을 마르도록 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신의 ‘희생’을 통해 냇가의 생태계를 건립하고 있는 ‘자연 섭리’와 그 면면들을 수사하는 맥락으로 읽히기 충만한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할머니의 행위를 세계의 균형을 맞추는 행위의 차원까지 수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 그곳에서 ‘물고기의 삶’은 ‘할미 나무’의 자장 아래서 성장할 수밖에 없다. “물살이 핥아 먹은 발” 즉 ‘생명의 뿌리’는 물(생명)과 관류하며 이곳의 생태계를 유지하는 기표로 기능한다. 그러므로 나 또한 그러한 할머니의 존재감에서 시발되어, ‘나무’의 상승적 기표만큼 ‘물고기’의 하강적 기표로 이 세계에 가라앉아 있는 것이다. 때문에 “물의 발자국만 할머니를 뒤따”랐다는 화자의 선언은 ‘물의 세계’에서 ‘할머니’―‘어머니’―‘물고기’―‘나’에 이르기까지 자기 존재를 인지하는 근원적 표상이라 할 수 있겠다. 할머니의 생태를 ‘등고선’이라는 기표, 즉 높낮이의 기표로 가늠해보겠다는 의지가 투영된 화자의 의지적 결과이다. 그러나 그러한 생태계의 긴장감이 헐렁하다니! 이는 또 무슨 의미일까.
「골목을 그리는 아이」을 경유해서 살펴보자. 우선 이 시에서 ‘아이’는 ‘집’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골목”을 그리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자. 아이는 “붉은 물고기들 지느러미 흔들며 벽 속을 떠돌고, 웅크린 주택의 창문 불빛도 꽃잎처럼 떨어”지는 현상이 반복되는 집 밖에서, 골목을 관찰하고 있다. 오래 전에 집을 나갔는지, “얼굴에 이끼가 자라”고 있다는 엄마는 아이 곁에 없다. 아빠 또한 “알코올 클리닉에 다녀온” 존재로 일상생활이 위태로운 상황이다. 그러니 아이의 눈동자에 들어온 세계란 기댈 수 있는 부모가 없는 “파문”의 세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오이디푸스든 엘렉트라든 아이에게는 ‘원형 공감’과 ‘상징 질서’가 수용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이다. 때문에 「헐렁한 등고선」에서 나무로 표상되는 할머니의 ‘뿌리지 우기’의 희생 또한 아이에게는 강하게 작용되는 모성적·근원적 끈으로 작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헐렁한’ 끈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헐렁한 끈을 팽팽하게 긴장하도록 만들어야할 욕망이 이희은의 시에서는 누차 반복된다.
시적 화자가 세계의 균열된 순간은 “파문”이라고 표현한 것이나, 혹은 붉은 벽돌집의 외형을 물속을 유영하는 물고기의 형상으로 묘사한 부분을 상기해보자. 화자는 균열된 세계의 편린들을 ‘물의 세계’로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파문”이라 언술했을 것이고, 화자의 내면 깊이 가라앉은 사연들을 봉인하는 붉은 벽돌집도 ‘물의 공간’으로 그려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조직된 세계는 ‘물의 세계’이자, 자기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는 ‘물음의 세계’이다.
질문하는 물고기, ―되기
그렇다면 이희은 시의 존재상은 왜 ‘물’의 종속이자 ‘물음’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 앞서 ‘물’과 친연성에 관해서는 훼손된 뿌리/근본 감각을 복원하려는 시적 의지에서부터 기인한다고도 했거니와, ‘상상계’를 겪지 못하고, ‘상징계’에 이른 시적 화자의 결손된 자아감에 대해 시인의 욕망이 끊임없이 투사된다고도 했었다. 이러한 시인의 욕망이 자기 물음의 방식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것은 이희은의 시 세계가 단순히 ‘동일성’의 맥락에서 그 의미가 증폭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규정’과 그에 따른 ‘차이’로 인한 ‘변화’와 ‘생성’의 맥락으로 증산된다고 볼 수 있겠다. 가령 들뢰즈 철학에서 존재 양태의 핵심은 ‘잠재성’과 ‘―되기’를 통한 변이와 차이, 반복에 따른 생성에 무한함에 있다. 즉 세계의 본질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변화와 운동성을 통해 생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기관 없는 신체’라는 개념 또한 기관이 마련되지 않은 ‘태아’의 상태로 몸을 되돌리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잠재화되거나 사건화 될 ‘가능성’의 집합체들을 말하는 것이다.
앞서 「골목을 그리는 아이」에서도, 골목을 그리고 있는 행위 주체인 아이에 의해 조직된 세계는 이미 아이 화자에 의해 판명이 끝난 세계가 아니라 아이의 시선(“아이의 눈 속”)에 따라 그려지고 있는 과정 중에 놓여 있는 잠재적 사건들이다. “해먹 같은 초승달” “눈코 없는 졸라맨”의 외적 형상이 이미 잠재화 되어 있는 ‘기관 없는 신체’의 표상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길고양이 한 마리 다리 절뚝이며 구름을 밟고 다닌다”거나 “민들레 대궁을 꺾어 들고 씨앗처럼 날아갈 준비를 한다”와 같은 존재의 결손된 상태 또한 존재의 결핍이자 동시에 어떤 것으로든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 기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 생애를 다음과 같이 형상화시켜볼 수도 있었던 것이다.
포근한 고치가 필요했던 여자는 장롱 서랍에 들어가 스스로 갇혔다 가늘고 긴 바람이 모서리로 함께 들어왔다 어둠을 더듬거리며 털실 한 가닥 찾아내 손가락에 감았다 실이 점점 감겨갈수록 배가 움푹 꺼지고 늑골이 선명해졌다 공중을 긋는 빗소리와 바람의 올을 섞어 쉬지 않고 얽어나갔다 그리움의 무늬를 완성하기 전까지는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 가슴을 짜 올라갈 땐 너무 일찍 잃어버렸던 젖 냄새가 비릿하게 풍겨 나왔다 따뜻한 입술을 만드는 동안 들어보지 못했던 둥근 목소리가 바늘 위로 굴러다녔다 한 가닥씩 떨어지는 머리카락으로 마지막 눈동자를 떠가다가 나비가 되기 직전 그만, 바늘을 놓쳐버렸다 바닥에 쌓였던 먼지들이 날아올랐다가 고요히 내려앉았다
어느 맑은 날 우연히 열어본 서랍 속엔
짜다만 빨간 스웨터의 엄마가 올이 풀린 날개로 누워 있었다
― 「짜다만 나비」 전문
우선 인용한 시를 뒤에서부터 읽어보자. “짜다만 빨간 스웨터의 엄마가 올이 풀린 날개로 누워 있었다”는 이야기는 “장롱 서랍에 들어가 스스로 갇”힌 여자의 일생을 비유하는, 언뜻 결론적 정황으로 보인다. 물론 이희은은 이와 같은 ‘봉인’과 ‘어둠’의 속성을 가진 상징 기표들은 「별빛 화병」에는 “상자 속 어둠에 오래도록 갇혀”있는 시간을 청각적으로 풀어내면서 “나는 향기 잃은 그 소리를 쓰다듬으며” “흉터 더욱 깊어지는 소리/ 꽃잎 떨어지는 소리/ 먼지들 몰래 뒤척이는 소리” 등으로 계열화시키기도 하고, 「서랍 무덤」에서는 “아무에게도 손 내밀지 못했던 글자들/ 이제야 내게 왔다”며 어머니의 “일기 속, 내 이름을” 부르며, 자신이 이어 쓰는 일기의 주체가 된 것에 관한 알리바이를 만들어 놓기도 했었다.
그러나 ‘엄마의 일생’과 “고치”에서 나비가 되어가는 과정을 언술하는 그 은유 체계를 가만히 꿰뚫어 보면, 이 시의 상징체계는 나비가 되려고 하는 잠재적 자아의 수난의 일대기를 생생하게 그린 가편이라 할 수 있다. “가늘고 긴 바람이 모서리로 함께 들어왔”다가 “어둠을 더듬거리”고 “털실”로 제 삶에 내재된 어둠을 직조해낼 때마다 “배가 움푹 꺼지고 늑골이 선명해졌다”는 ‘고치―되기’의 과정은 “여자”가 “어머니”로 재탄생하는 인고의 모습을 일 것이다. 여기서 “너무 일찍 잃어버렸던 젖 냄새”나 “그리움의 무늬를 완성하기 전까지는 밖으로 나갈 수 없었”다는 여자의 사연은 ‘모성’으로 가 닿지 못한 자기 존재에 대한 연민이자, 수동적 사태에 누차 내몰릴 수밖에 없었던 ‘서랍 속 같은 삶’에 대한 고백이다. 어떤 억압이 명징하게 있었다고 언술하고 있지는 않으나 그 세월이 ‘나비’로 비상하지 못했다는 결과를 통해 유추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고치 속에서 벌레가 날개를 짜는 정황과 스웨터를 짜면서 제 몸에 맞는 옷을 만드는 정황, 여자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되는 모성적 자아로 변이하는 정황 등이 서로 교차하면서, 변화 가능성에 놓여 있는 잠재적 자아를 가시화하는 동시에 새로이 생성될 몸의 기록에 대해 전망한다. 물론 그것이 여성의 완성이 모성성이라는 재래적 정언 논리로 치우쳐 맥락화 된 부분이 없지는 않으나, 모성의 붕괴를 시집 전체에서 형상화 한 이희은의 시적 전략을 상기해보면 이 또한 “짜다만”이라는 수사처럼 미완성/ 미규정성의 세계를 전망하려 했다고 판단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엄마의 바다가 닫히면서/ 나의 물결은 시작”(「월식」)되었다는 구절처럼, 붕괴된 모성에서부터 기인한 생성의 전략인 셈이다.
아울러 이 시집 전편에 걸쳐 ‘―되기’의 생성 전략이 반복되고 있는 경향 또한 간과할 수 없다. 「사막 짓는 여자」에서 “발뒤꿈치가 사르륵사르륵 부서지”면서 제 자신도 사막이 되어가는 과정이라든가, “나는 가방을 걸어두었던 못이 되어/ 고개를 숙이듯 구부러지”겠다는 「애도」에서의 온몸을 바친 감흥방식이라든가, 「한 방울 사람」에서 “녹지 않는 눈”의 존재를 상기시키며, “나는 눈사람이 되”었다고 변환하는 방식 등이 그렇다. 제 몸의 성질을 변환키면서 시적 화자는 세계에 균열이 든 자리에 새로운 통점을 마련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체온이 자국을 남길 때까지” “다시 또 얼음이 되”겠다는 「다시 클리닉」의 언술이나, 「문밖에서 뒤돌아보네」에서는 “벽지 속에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는 노인이 “빛이 된지 한참”이라는 표현, 「그늘도 마른」에서는 “마른 꽃이 되었”다는 할머니를 치맛자락 속 그늘을 “귓속”에 들이겠다는 순한 정서감 또한, 모두 시적 화자의 자기 해체를 통한 ‘( )―되기’ 생성 전략들임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인은 이러한 변이를 통해 존재의 이면을 복권하는 “문장을 지우는 문장을 만들어/ 거기 감추어 둔 신호”(「얼룩의 얼굴」)를 발견하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그 길을 안내하는 주체는 종국에는 “물고기들의 눈빛”(「얼룩의 얼굴」)이다.
1
바닥까지 가라앉은 제 모습을
건져 올리던 사내
마르지 않는 물의 숨결을 받아먹고
돌이 되었다
2
돌의 가슴에 맥박 하나 박혔다
개울이 수만 개, 물의 화살을 쏘아 보내는 동안에도
심장은 탈색되지 않았다
돌을 잡으려는 순간
깊은 잠 속 누웠던 물고기 한 마리
파다닥, 꼬리지느러미 흔들며 문을 닫았다
― 「물속의 돌」 전문
악몽은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고
방 안을 헤엄치기 시작했다
시간이 반쯤 남은 수족관
벽시계는 아주 천천히
아가미를 벌렸다가 닫았다
굴절된 별빛의 방향을 따라
가시 뼈 사이사이 통증이 물풀처럼 흔들렸다
나는 매번 거품 같은 질문을 했고
시계는 물결처럼 매번 같은 대답을 했다
바람 빠진 부레로 물살을 넘나드는 동안
새벽은 몸속의 가시를 뽑아내며
비린내만 남긴 채 허물어졌다
― 「질문」 전문
「물속의 돌」에서 “마르지 않는 물의 숨결을 받아먹고/ 돌”이 되었다는 사내의 사연은 사내의 몸이 흐르는 물살 곁에서 “돌”에서 “물고기”로 다시금 탈바꿈되는 ‘生―死―生’의 윤회의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묘파되고 있다. 여기서 행위 주체인 화자가 “바닥까지 가라앉은 제 모습을/ 건져 올리던 사내”라는 것에 주목해보자. 사내는 단지 개울 속에서 돌을 들었을 뿐인데, 그 돌 속에서 존재의 시원(始原)이라 할 수 있는 자신의 몸의 근원인 물고기의 움직임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내면 깊숙이 의식을 더 몰고 나갈 때, 시적 화자는 비로소 ‘물의 문’을 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런 현상은 잠시 잠깐, 그 찰나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서 ‘물의 세계’가 퇴적되어 있는 돌의 외부는 순간, “꼬리지느러미 흔들며 문을 닫”고 말았다.
이러한 현상은 시적 화자가 자신 존재를 찾아 헤매면 헤맬수록 그 근원에 닿지 못하고 수차례 비껴나갈 수밖에 없는 미끄러운 현실의 상태를 허무감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손으로 잡으려고 하면 이내 빠져나가고 마는 미끄러운 물고기 비늘처럼 말이다. 그리고 다른 시편들 속에서도 “배꼽이 부글거렸으나/ 몸 비울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 끝없이 구부러진 골목을 헤매고 다니다/ 몸의 모든 구멍을 닫고/ 집으로 돌아왔다”(「손바닥을 읽다」)거나 “몸의 굴곡 풀지 않는다”(「늙지 않는 여자」)는 언술들로 미루어 보아, 이러한 ‘미끄러지는 감각’의 시작은 제 몸에 가시를 들이고 살았다는 가혹한 통증 때문이다.
이 시집의 표제작인 「밤의 수족관」과 유사 계열에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인용한 시 「질문」은 「밤의 수족관」의 말미에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자신의 별자리를 찾아 떠나갔다”는 물고기의 고행길에 바로 직전 상황을 형상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 “악몽은 옆구리에 지느러미를 달고/ 방 안을 헤엄치기 시작”하면 시적 화자가 머무는 방이라는 공간은 일순간 수족관을 변하고, 제 몸조차 물고기로 변태한다. 화자는 자신의 삶에서 끝내 깨달을 수 없는 통증 때문에 “아가미를 벌렸다가 닫았다”가 “가시 뼈 사이사이 통증이 물풀처럼” 흔들기도 하지만, 그러한 몸부림이 “매번 거품 같은 질문”이 될 뿐 정작 수족관 물의 깊이는 가늠하지도 못하는 형국이다. 그리고 “시계는 물결처럼 매번 같은 대답”으로 미끄러지며 화자는 늙어가고 있다. 즉 시간의 퇴적은 시적 화자에게 ‘늙는 상태’나 ‘죽음’에 가까운 몽환을 겪게 했을 뿐 자아가 가진 균열에 대해서는 명확한 해답을 내려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는 제 몸에 가시를 들이고 있는 것과 반대로 겉으로 미끄럽고, 부드러운 물결 속에서 그저 ‘물고기가 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이희은의 시적 태도를 우리가 애써 처연하게 느끼는 지점이 유발되는데, 그것은 바로 ‘질문 하는 물고기’를 자처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비린내만 남긴 채 허물어”질 몸이라도 그 몸속에 내재된 “가시를 뽑아내며” 자기 분열과 해체의 이유를 끝까지 탐구하겠다는 의지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체를 통해서라도 뒤틀린 존재 상태를 개선해보겠다는, 죽음을 담보한 치유의 행위를 우리는 무엇이라 호명해야겠는가. “엉킨 장미의 넝쿨을 뒤적이며/ 나는 또 길을 잃는다” (「기시감」)는 개인적 차원에서의 삶의 방황일까. “나의 호흡은 여전히 먹구름을 통과하는 중”(「진맥」)이라는 지속되는 고통의 현현일까. 그도 아니라면 “낯선 도시, 길고도 긴 시간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기다림을 함께 기다렸다// 영영 돌아오지 못하기라도 하듯” (「건너편의 오후」) 그렇게, 한 번 놓치고 나면 영영 다시는 복원되지 못하는 상처들에 대한 대면과 그 서글픔일까. 아마도 이 시집의 화자에게 가장 중요한 시적 의지는 방황하는 자신의 생리 속에서도 “궤도의 중심점을 찾는 일”(「접시 돌리기」)일 것이다.
기묘한 문
이 시집의 여는 시라고 할 수 있는 첫 시 「손금」을 읽어보자. 마지막 문을 나서면서, 이제 다시 첫 문을 두드려보자는 것이다.
지도에 없는 골목으로 나를 버리러 갔습니다
꽃잎의 주름을 세어보다가, 고양이 눈 속을 엿보다가, 벽화처럼 머리 기댄 나무들 미처 마르지 않은 비밀에 손끝을 적시다가
문득 금 간 유리창에 비친 나를 보았습니다 뺨에 깊게 그어진 상처가 있었습니다
담장 낙서를 떼어먹다가, 기울어진 그늘을 쓰다듬다가, 깨진 화분에서 쏟아지는 이야기들 바닥에 길게 늘이다가
모퉁이를 지나 무화과나무 옆에 섰습니다 이파리 한 장 꺾어 당신의 목소리를 찾다가
보도블록이 끊긴 곳, 웅덩이의 어둠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나를 버리지 못한 채 손바닥 안 골목, 잔주름 위에서 어제를 움켜쥐고 있는
― 「손금」 전문
“손금”이란 무엇인가.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상법’이라 하여 손금을 읽는 법을 ‘관상’과 함께 개인의 운명을 점치는 방법으로 통용되어왔다. 그런데 “지도에 없는 골목으로 나를 버리러” 간다는 시적 화자는 자신이 쥐고 태어난 운명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비밀에 손끝을 적시”는 것처럼 자신을 둘러싼 여러 비밀들을 해제하고 억누르는 것들을 해방시키겠다는 의지인 셈이다. 그 가운데 “문득 금 간 유리창에 비친 나”를 만나 그 상처가 “뺨에 깊게 그어진 상처”로 옮아와 붙는다고 하더라도, “깨진 화분에서 쏟아지는 이야기들”을, 그러한 자신의 이야기들을 모두 쓰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비록 시적 화자는 현재에는 “나를 버리지 못한 채 손바닥 안 골목, 잔주름 위에서 어제를 움켜쥐고 있”지만, 시인은 두렵지 않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따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모든 운명들을 거역하기 위해 이 (시)집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낙서를 떼어먹다가, 기울어진 그늘을 쓰다듬다가” 혹여 모르는 나를 만난다고 하더라도 불행해지는 일은 없다. “지난 밤, 잠 속으로 당신이 흘리고 간 문장”(「그림자를 심다」)을 주어다가 이 집을 튼튼하게 지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시집의 「시인의 말」의 주술구조를 이제 바꿔서 읽어야겠다. “사물의 문을 열고자 했으나 늘 캄캄했다”가 아니라, ‘캄캄했으나 늘 사물의 문을 열고자 했다.’고. 그렇게 이희은에게 희망과 위안을 담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