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화 체육복을 읽는 아침 9. 손이 졸라 고우시네요 240516
임용시험을 준비할 때 배운 교육학 지식들과 현장에서 만나는 순간이 있다. 교육사회학이라는 단원을 공부하면서는 윌리스라는 영국 아저씨가 ‘저항이론’이라는 걸 주장했다고 배웠다. 노동자 계급의 아이들은 겉으로 굉장히 거칠어 보이고 반항적인 일탈을 하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사실은 학교에서 주입하고자 하는 문화를 거부하고 자신들과 부모의 고유한 문화라고 생각하는 노동계급의 문화를 고수하고 있다고 분석하는 이론이다. 쉽게 말하면 싸가지 없고 험해 보이는 말이나 행동이 사실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자 하는 행위라고나 할까. 이게 남성우월주의로, 혹은 정신노동에 비해 육체노동이 더 가치 있고 우위에 있다는 생각으로 빠지기 쉽다는 단점도 분명하지만 이른바 문제아들이 주류 문화에서 배척되는 대상으로만 여겨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를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이른바 상대적 자율성을 가진 존재로 평가하는 그 방식이 신선했다.
그 아이들은 교사들을 상대적으로 정신노동에 종사하니까 약한 샌님처럼 보여서 반항하고 학교 체제에 순응하는 아이들을 바보같이 취급한다. 일용직 건설 노동에 종사하거나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강도 높은 육체노동을 하는 이들을 아버지로 둔 아이들이 왜 학교에서 부모뻘 선생님들의 멱살을 잡고 자기보다 약한 아이들을 죄의식 없이 괴롭히는지 다소나마 이해할 수 있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교사가 그 아이들의 행동에 똑같이 분노로 대응하는 게 아니라 그 아이의 사회적, 계층적 배경에 대해 짐작해 보려는 자세를 갖게 해 준다. 만약 내가 멱살을 잡히거나 쌍욕을 들어먹었을 때
“이 자식이 미쳤나? 어디 선생님한테?”
라고 말하기보다는
‘아. 이 친구는 이렇게 거칠게 대응하는 게 남자답고 바람직하다고 여기는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교사의 마음에 일단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얘기지만.
자식보다도 어린 아이들에게 멱살을 잡히고 쌍욕을 들은 정신적 피로감에 교단을 떠나시는 선배들을 보면서, 교직 생활 2년 차의 내 마음에도 여유에게 내어줄 자리란 없었다. 대신 투기(鬪技)를 통해 신체를 단련해서 이 험한 학생들을 카리스마 있게 제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임용시험에 합격하자마자 배우기 시작한 유도는 당시에 얹혀살던 친구에게 그날 배운 암바를 가르쳐주겠다고 까불다가 오른 손목 인대가 나갔기 때문에 패스하고. 생각해 보면 시멘트로 된 학교 복도에 학생을 메다꽂았다가 어디 한 군데 깨지기라도 하는 날엔 전국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테니 큰일 날 일이었다. 다음으로 생각한 게 복싱이었다. 권투(拳鬪), 주먹으로 싸운다는 이 솔직담백한 단어가 왠지 진실하게 학생들을 대해야 하는 교사의 자세를 가다듬기에 참 적절해 보였다. 중학생 때 보던 복싱 만화 <더 파이팅>의 주인공 일보가 복싱을 배우면서 몸도 마음도 건강해지고 챔피언의 자리에까지 도전하는 그 감동의 도가니탕도 함께 떠올랐다. 그렇다고 복싱을 배워서 원투 스트레이트로 애들을 두들겨 팰 수는 없다. 위빙과 더킹. 허리와 어깨를 흔들면서 유려하게 상대의 공격을 피하는 그 기술을 익히면 된다! 물고기처럼 상대의 멱살잡이를 피하는 동안 구경꾼들의 환호성이 나오고 분위기를 타면 그 싸움은 나의 승리다. 하지만 하루에 천 개씩 줄을 넘어대며 가해지는 육중한 중력의 무게에 무릎이 파업을 선언하는 통에 역시 복싱도 포기. 결국 그들을 제압할 수 있는 무기로 나에게 남은 건 걸쭉한 고향 부산 사투리를 기반으로 구사하는 아가리 파이팅밖에 없었다.
사실 구구절절이 유도니 복싱이니 말했지만, 투기를 통해 까부는 녀석들을 제압하겠다는 생각을 깔끔하게 버린 건 어느 날 풍운의 소문을 몰고 찾아온 전학생 한 명 때문이었다. 나도 덩치가 좀 있는 편이지만 고등학교 2학년인 주제에 팔뚝이 내 허벅지만 한 엄청난 체격과 중국집 오토바이쯤은 맨손으로 부순다는 완력, 그리고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운동에 쏟아부었는데도 불구하고 중학교 1학년 수준의 영어단어쯤은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는 뛰어난 지성(?)까지 두루 갖춘 녀석이 나타났던 것이다. 거기에 앞서 말했듯 불의의 부상으로 운동을 그만두게 된 데서 오는 갈 곳 모를 분노까지 장착했으니 그야말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동네 조기 축구팀의 안정환이라면 그 친구는 전성기의 리오넬 메시 같은 넘을 수 없는 차이를 처음 본 순간부터 느꼈달까. 전학을 와서도 선배나 복학생 형들에게 기가 눌리는 것도 없이 마치 자기가 처음부터 그들에게 존중의 자리를 내어준 것인 양 당당하게 행동하는 모습, 제 친구들과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다가도 가끔 올라오는 불뚝성을 보며 저 녀석이 갑자기 분노에 차 수업 시간에 의자를 집어 던지면 어느 쪽으로 피해야 마치 처음부터 그걸 알고 있었던 노련한 교사처럼 보일까 고민하기도 했다.
같이 수업한 지 2년째 되는 반이라 긴 글은 아니더라도 시조 몇 편 갖다가 읽히고 그걸 그림으로 그려보는 수업을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덩치가 산(山)만 한 남자 녀석들이 책상에 웅크리고선 유치원생들이 쓸 법한 스프링 색연필로 산이랑 강, 소, 갈매기, 술잔(본인들 것 말고 송강 정철 아저씨 거) 같은 것들을 그리고 있는 모습이 제법 귀여웠다. 그 풍운의 시한폭탄은 뭘 그리나 슬쩍 옆에 가 봤다. 한가로이 강변에서 낚시하는 양반 아저씨들의 시조 아래, 1,000마력은 되지 싶은 오토바이를 그려놓고, 조선을 활보하는 스스로를 상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그 상상 속 본인의 뒤에 태울 여자친구가 필요했던지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는 것이었다. 드디어 이 교실에서 주도권을 놓고 한바탕 활극이 벌어질 때가 온 것인가!
“와 쌤! 손 졸라 곱네요. 고생 한 번도 안 해 보셨구먼?”
부산광역시 중구 중앙동 바람 부는 부산항 근처에서 안전 장비도 없이 사다리를 타고 3층 창문에 붙은 스티커를 껌 칼로 긁어내던 스무 살의 내가, 부산진구 가야동 모 원룸 신축 현장에서 하루 종일 시멘트 쓸면서 쌓인 검은 가루를 삼십 분쯤 풀다가 역무원 아저씨에게 걸려 쫓겨나던 지하철 주례역 화장실이, 버스비 천 원을 아껴보려고 새벽 한 시에 학원 강의를 마치고 집까지 서너 시간씩 걸어가던 영도구 청학동의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스쳐 갔다. 걔네는 도대체 어디에 흔적을 남겼길래 내 손은 그다지도 고왔던 걸일까.
“그, 그치? 여자친구가 핸드크림을 좋은 것 사줬거든!”
좀 전에 생각했던 것들이 뒤섞여 아무 말이나 나왔다. 현재의 아내가 된 당시의 여자친구에게 받은 수많은 선물 중에 결혼 10년 차가 된 지금까지도 핸드크림은 목록에 없다. 덥석 잡은 손 말고 남은 손으로 내 손등을 쓰다듬는 손길과 함께 한마디가 더 날아들었다.
“와 역시 공무원이 최고야. 응? 안정적인 선생.”
핸드크림이 한두 달 봉급을 모아야 살 수 있는 고가품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아니면 안정적인 교사의 호봉 체계가 재직 기간 동안 끊임없이 핸드크림을 공급해 줌으로써 나의 고운 손을 유지할 수 있는 원천이라고 분석했던 것일까. 어찌 되었든, 이 말은 그 아이 개인의 경험이나 생각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계층과, 그 계층에서 앞서 살았던 어른들이 교사라는 직업인을 바라보는 집단적인 관점이 그 아이의 입을 통해 나온 것이라는 느낌을 그때의 나도 직관적으로 받았던 것만 같다. 윌리스 형님 덕분에 말이다. 그래, 사회학 연구란 것도 해 볼 만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여,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라는 질문으로 사회학 질적 연구를 시작해 보려는 찰나, 한 줄 뒤에 앉은 복학생의 말이 날아들었다.
“이 또라이 새끼야 선생님이 니 친구냐? 저 쌤이 좀 빡세긴 해도 우리 말 제일 잘 들어주는 쌤이야.”
“에이 형, 알았어요. 죄송해요. 쌤.”
뭐가? 내 사회학 연구의 출발이 가로막힌 게? 아니면 형의 기분을 거슬리게 해서 형한테 죄송하다고?
“아냐. 죄송하긴. 나도 내 손이 눈에 띄게 그렇게 고운지 몰랐다. 그나저나 너 인마 이 강변 모래사장에서 오토바이 타면 바퀴 빠져.”
그렇게 자연스럽게 우리의 이야기는 이 오토바이가 얼마짜린지, 출력이 얼마나 대단하지, 얼마나 빨리 200km/h에 도달하는지에 대한 쪽으로 이어졌다. 서로가 스스로 발 딛고 있다고 생각하는 계층을 넘어서.
종종, 아니 대부분의 순간 선생님들은 교사라는 직업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태도에 빠져 있다. 그러나 내 손을 잡아 쓰다듬던 아이는 나라는 개인에게가 교사라는 집단 전체에 대한 자기 집단의 선입견을 표출한 것일 뿐이다. ‘교사=정신노동에 종사하는, 육체적 고생을 해 본 적 없는, 안정적인 직장 안에서 하나 마나 한 소리나 하는 사람’이라는 근거 없는 등식을 바탕으로 나온 이야기에 상처받을 필요가 없다.
그는 자신의 오토바이 탑승 경력과 앞으로 함께 할 기종의 세부 제원에 대한 설명까지 마쳤다. 평소보다 말을 많이 해 목이 마르다며 제 것 사는 김에 자신의 브리핑을 잘 들어 준 내게도 음료수를 하나 더 사드리겠다는 녀석을 따라 매점으로 함께 걸었다. 그가 내 손을 쓰다듬었듯 나 역시 자신의 진로처럼 끊어져 버렸던 그의 손목 인대를, 한때나마 희망을 갖게 해 주었을 우람한 삼두 근육을 어루만지며 앞으로의 길을 진지하게 물었고, 그는 노동자 계급의 아이가 아니라 자신이 잘 모르는 세계에 대한 조언을 구하는 아이로 돌아왔다. 나는 그에게 교사로서가 아니라 몇 살 더 많은 형으로서 대답했다.
“포카리 받고 햄버거 콜?”
첫댓글 정민 성님
과연 선생님은 직업 이라고 말 하여도 될까요 ?
글 읽는 동안 , 너무 어렵네요.
열심히 더 생각해 볼게요 !
늘 고마워요
머리가 커진 한창 사춘기의 반항심 가득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의 말못할 고민과 애환이 담긴 글이네요. 우리 학창때도 이런 반항아 제자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선생님이라면 감히 대들 생각을 못하고 선생님이 주먹질을 해도 대부분 맞기만 했던 기억이 남니다. '선생님'이란 단어에는 '스승' 처럼 그래도 존경하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봅니다. '교사' 그러면 직업을 지칭하는 의미가 더 있다고 보여지네요.
나도 1971년 첫 해 맡은 아이들 이름은 몇 명 생각이 납니다만, 시간이 갈수록 희미해 지더군요.
처음에는 사명감도 사실 약했습니다. 과목이 독일어라 고등학교에만 있었지요.
말년에는 부장을 2년 했고 마지막 해에는 독일어 시간이 줄어 다른 학교로 출장 수업을 하는 순회교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1년 일찍 명예퇴직을 하였답니다. 독일어 교사, 은근히 그냥 잘 했다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저자의 마음에 깊이 동감하는 바 입니다. 고맙습니다.
@김형두 고등학교 때보다는 중학교 때 선생님들이 더 학생들에게 깊이 간섭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중학교 선생님들이 더 젊어서 혈기가 왕성했겠지요. 매 시간 험악해지던 수업 시간도 있었지요.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퇴직 19년이 되었어요. 그동안 무엇을 했나 돌아보는 해입니다.
총 28편의 글이 있어요. 조금 더 올려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제가 학교에만 34년 있었지요.
지나고 보니 긴 세월이었지만 학교에 있을 때는
'처음에는 아이들이 그렇게 예쁜 줄 몰랐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더 예뻐지더군요'
제 이야기 아니 더 숭고한 이야기로만 느껴졌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