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이 부산상고 졸업앨범 사진, 오른쪽이 대통령 취임선서 장면이다
두산백과의 노무현에 대한 연혁을 중심으로 하고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킨 주요발언들을 추려서 노무현의 일대기를 연표 형태로 아래에 간략히 작성해보았다. 아래의 연표를 통하여 편견을 접고 객관적으로 노무현의 성장과정과 행적과 당 시대를 회상하여 보자.
1946년 9월 1일(음력 8월 6일)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30번지 봉하마을에서 노판석과 이순례 사이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나다. 본관은 광주(光州).
1953년 진영 대창초등학교에 입학하여 1959년 졸업하다.
1959년 진영중학교에 입학하여 1963년 졸업하다.
1963년 부산상업고등학교에 입학하여 1966년 졸업하다.(제53회)
1966년 삼해어망에 입사하여 잠시 다니다가 그만두고 건설현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사법시험을 준비하다.
1968년 육군에 입대하여 1971년 만기제대한 뒤 그만두었던 사법시험을 다시 준비하다.
1973년 1월 동향인 권양숙과 결혼하다.
1975년 네번째 도전 끝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8개월 가량 재직 후 1978년 5월 사직하고 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다.
1981년 제5공화국 정권의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조작 사건인 부림사건(釜林事件)의 변론을 맡은 것을 계기로 학생·노동자 등의 인권사건을 변호하는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다.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에서 5·18 민주화 운동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 독재 정권을 비호한 미국의 책임을 묻기 위한 변호 활동에 앞장서다. 같은 해 법조계의 새내기인 문재인과 함께 ‘노무현·문재인합동법률사무소’를 동업으로 개업하다.
1985년 부산 최초의 대중정치 조직으로 설립된 부산민주시민협의회의 상임위원과 부산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의 인권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변호사 사무실에 부산노동법률상담소를 부설하고 노동 인권 문제에 대한 변호 활동을 본격화하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의 죽음으로 시작된 6월 민주항쟁의 최선봉에 서서 2월 7일 박종철 추도 집회에서 추도사를 한 것을 시작으로 5월 발족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의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맹활약을 펼치다가 동료 변호사인 김광일, 문재인과 함께 부산지방경찰청 대공분실에 연행됨으로써 오히려 노무현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다.
1987년 대우조선에 다니던 이석규가 거리 시위 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자 사인 규명에 나섰다가 노동법의 '제3자 개입 금지'를 위반한 혐의로 구속되어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다.
1988년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제안으로 정치에 입문하였고, 부산 동구에서 제13대 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다.
1988년 10월 제5공화국비리조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정주영 류찬우 등을 매섭게 다그치고 전두환에게 명패를 던지는 등으로 논란도 불러일으켰으나 일약 청문회 스타로 떠오르다.
1990년 통일민주당·민주정의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에 대하여 '부도덕한 야합'이라 비난하며 정치적 후원자였던 김영삼과 결별하고 민주당 창당에 동참하다.
1991년 통합민주당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1992년 3월 24일 제14대 국회의원 선거[부산광역시 동구], 1995년 부산광역시장 선거,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연거푸 고배를 마시다.
1993년 통합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이 되었고, 지방자치실무연구소를 열다.
1997년 비슷한 처지에 있던 이들과 함께 서울 역삼동에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식당을 개업하여 운영하다.
1997년 11월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이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부총재 및 수도권 특별유세단 단장을 역임하며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을 돕다.
1998년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다.
2000년 3월 당선 가능성이 높은 종로 지역구를 포기한 채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우며 부산 북·강서을 지역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하다. 그러나 노무현의 낙선은 당선보다 더 큰 감동을 주었고, 대의와 원칙을 위해 불이익을 무릅쓴 그에게는 ‘바보 노무현’, ‘아름다운 바보’라는 애칭이 주어져 이러한 정서를 기반으로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인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노사모)이 결성되다.
2000년 8월부터 2001년 4월까지 김대중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내다.
2002년 5월 28일 "남북대화 하나만 성공시키면 다 깽판쳐도 괜찮다"는 비속어 사용으로 또 논란을 불러일으키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과 최고위원을 거쳐 2002년 초 국민경선제를 통하여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어 2002년 11월 18일에는 국민통합21의 대통령 후보인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에 합의한 뒤 국민 여론조사를 거쳐 단일 후보가 되다.
2002년 12월 19일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낡은 정치 청산, 새로운 대한민국 건설, 행정수도의 충청권 이전' 등을 기치로 내걸고 선거운동을 펼쳐 유효투표 총수 2476만 141표 가운데 1201만 4277표(48.91%)를 얻어 1144만 3297표(46.59%)를 얻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다.
2003년 2월 25일 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하다.
2003년 3월 9일 정부중앙청사에서 평검사 10명과 함께 검찰 개혁의 당위성에 대한 TV 생방송 공개토론을 벌이다. 이 자리에서 김영종검사가 대통령의 과거 청탁사실을 들추며 공격을 해오자 "이쯤 가면 막하자는 거지요?"라는 발언이 나오다.
2003년 4월 일부세력의 맹렬한 반대여론을 뚫고 이라크 파병안을 국회 통과시키다.
2003년 5월 21일 NEIS 사태, 화물연대 파업사태, 야당의 근거없는 폭로와 정부가 제출한 인사안, 법안이 줄줄이 거부되면서 대통령은5.18 행사 추진위 간부들과 만난 자리에서 "전부 힘으로 하려고 하니 대통령이 다 양보할 수도 없고 이러다 대통령직 못해먹겠다는 생각이, 위기감이 든다" 라고 하였고 이를 언론들이 받아 "대통령 못해먹겠다"는 발언으로 부각시켜 파장을 일으키다.
2003년 7월 9일 "존경하는 중국 지도자는 모택동과 등소평이다"는 발언을 하여 큰 논란을 일으키다.
2003년 12월 14일 "우리가 쓴 불법자금 규모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을 넘으면 대통령직을 사퇴 하고 정계를 은퇴하겠다"고 선언하다.
2004년 초 대통령의 선거중립의무 위반과 측근 비리 등에 대한 야당의 사과 요구를 거절하자 야당인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탄핵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하다.
2004년 3월 12일 국회의장은 경호권을 발동하여 소수 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반대를 저지한 채 국회 본회의에 탄핵소추안을 기습상정하였고, 다수를 점한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투표하여 찬성 193, 반대 2로 탄핵소추안을 가결시킴으로써 국무총리 고건이 직무를 대행하다.
2004년 4월 15일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과반인 152석을 차지하다.
2004년 5월 14일 헌법재판소가 탄핵소추안에 대하여 기각 결정을 내림으로써 두 달 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하다.
2004년 9월 5일 독재시대의 낡은 유물인 국가보안법을 폐지하자고 주장하여 큰 파장을 일으키다.
2004년 10월 21일 "신행정수도 이전에 관한 특별법"이 헌법재판소에서 위헌판정이 내려지다.
2004년 11월 7일 부산상고 제53회 동기들이 부부동반으로 167명이 청와대를 방문하여 녹지원에서 만나 야외식사를 하며 노대통령과 환담을 나누다.
2005년 7월 17일 "하늘이 두쪽 나더라도 부동산만은 직접 챙기겠다"는 발언을 할 정도로 부동산 투기열풍이 불다.
2005년 11월 부산 해운대 누리마루 APEC하우스에서 제13차 APEC 정상회의 개최하다.
2006년 7월 5일 "대포동 미사일이 미국에 가기에는 너무 초라한 것"이라고 과소평가하다.
2006년 9월 13일 "북한 미사일 발사는 무력 위협이 아니다, 핵실험도 징후나 단서도 없다, 북한이 미사일을 발사해도 인공위성일 지 모른다, 핵실험을 해도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다, (핵실험임이 판명난 후에도) 성공여부를 알 수 없다"는 발언으로 파장을 일으키다.
2006년 12월 21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회에 참석하여 전시작전권 반환문제와 관련하여 "미국한테 매달려서 바지가랑이 매달려서 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 형님 형님,형님 백만 믿겠다,이게 자주국가의 국민들의 안보의식일 수가 있겠습니까?" 라며 전직 국방장관들에 대하여 격한 감정을 표출하며 질타하다. 또 국방개혁을 강조하는 중에 "장가 빨리 보내는 정책을 개발하고 있다"고 하면서 "우리 아이들 요새 아기도 많이 안 낳는데 군대에 가서 몇 년씩 썩히지 말고 그 동안에 열심히 활동하고 장가를 일찍 보내야 아이를 일찍 낳을 것 아니냐"고 하다.(그러나 필자는 국군통수권자인 일국의 대통령이 공식석상에서 국민을 상대로 군대에 가는 게 썩는 거라는 발언을 했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
2006년 12월 27일 "부동산 말고는 꿀릴 것 없다."는 발언을 하여 부동산정책의 실패를 자인하다.
2007년 2월 16일 "북한이 달라는 대로 줘도 남는 장사"라며 남북관계의 기조를 계속 이어나갈 것임을 천명하다.
2007년 6월22일 해군기지 건설지역을 강정마을 지역해안으로 결정하며 노대통령은 “평화의 땅에도 비무장은 없다”며 제주해군기지는 국가안보를 위한 일이라는 명확한 입장을 밝히다.(제주해군기지는 이후 숱한 반대를 뚫고 2010년 1월 착공, 2016년 2월 준공)
2007년 6월 30일 좌파진영의 강력한 반대를 뚫고 1년 5개월 간의 협상 끝에 미국 워싱턴에서 한국 측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미국 측 수전 슈워브(Susan Schwab) 미국무역대표부 대표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정문에 서명하다.
2007년 10월 4일 임기를 4개월여 남긴 상황에서 보수세력의 반대와 우려 속에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분단 후 처음으로 걸어서 판문점을 통과하여 평양을 방문, 김정일과 남북 정상회담을 열고 남북관계 발전 및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10·4선언)을 발표하다.
2008년 2월 24일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고향인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의 봉하마을로 귀향하여 오리농사, 마을청소에 참여하는 등 평범한 전원생활을 하는 한편,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사람들과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다.
2009년 4월 30일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으로는 세번째로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다. 퇴임할 때 대통령 재임시의 기록물 복사본을 가지고 귀향한 것과 관련하여 '국가기록물 무단유출'에 대한 수사를 시작으로 측근과 친형, 부인·아들·딸 등이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으로 검찰의 수사를 받다.
2009년 5월 23일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이 아니겠는가,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 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는 내용의 유서를 컴퓨터 화면에 남기고 사저 뒷산의 부엉이바위에서 투신 자살하다.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서울 동창회관에 마련된 분향소에 우리 동기 회원들이 다음과 같이 상주로 분향소를 교대로 지키다.
5/25(월) 오후 4시~오후10시 유 영
5/26(화) 오전 10시~오후 4시 양은석, 김병호; 오후 4시~10시 이채근, 허남부
5/27(수) 오전 10시~오후 4시 김기택, 김재삼; 오후 4시~10시 김덕호, 최진호, 송경섭
5/28(목) 오전 10시~오후 4시 김정택, 김종석; 오후 4시~10시 김종구, 유근준
2009년 5월 29일 국민장이 엄수되고 49재를 지낸 7월 10일 유골이 봉화산 부엉이바위 등산로 입구의 봉하마을 묘역에 안장되기까지 수많은 추모 인파가 봉하마을과 전국 각지에 마련된 분향소를 찾아 분향하고 서울 광장에서 열린 노제에 참석하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다.
친구여, 이제는 편히 쉬시는가?
위의 연표를 통하여 노무현과 함께 우리 모두가 역동적인 시대를 살아왔음을 생생히 느낄 수 있으리라.
사실 필자는 우리 친구 노무현의 재임 중 그가 추진한 정책과 노선에 대하여 많은 분야에서 의견을 달리하였다.
또한 그의 잦은 말실수로 불필요한 분란이 야기될 때마다 실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도 없었다.
위의 연표는 객관적 견지에서의 역사적 사실과 기억에 남는 그의 주요발언을 찾아 작성해본 것이다.
12년 전 우리 친구들을 청와대에 초청하여 소탈한 모습으로 반가이 맞아준 그를 사진 속에서 바라보며
그의 공과에 대한 평가와 호불호는 각자의 몫에 맡기면서 2004년 11월 7일의 연재를 모두 마치고자 한다.
친구여, 저 세상에서는 이제 편히 쉬시게나.
[추가] 위의 연표로는 노무현의 업적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은 것 같아 그의 재임중 주요업적을 아래에 발췌하여 추가한다.
- 깨끗한 정치를 추구하고 돈 안드는 선거법 개정을 통하여 정치개혁을 이루었다.
- 최초로 당수를 겸임하지 않으면서 대통령이 되어 국회를 자유롭게 독립시켰다.
- 정치공작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정보기관장 독대보고를 없앴다.
- 검찰의 독립을 강화시켜주었으나 너무 날뛰도록 한 잘못도 있다.
- 지역감정 해소에 최선을 다했다.
- 한미 FTA를 통해 교역을 확대했다.
- APEC 정상회의를 성공적으로 치뤄냈다.
- 대북송금특검을 승인했다.
- 인사청문회를 장관급까지 확대했다.
- 기초노령연금과 요양보호제도를 도입하였다.
- 대통령 가족 몇명만 쓰던 30만평의 청남대를 수천만 국민들에게 돌려주었다.
- 위험을 무릅쓰고 자이툰부대를 방문했다.
- 고졸출신도 서울대법대 출신을 이길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다.
- 본인과 자식 모두 특혜 없이 전방에서 현역 사병으로 병역의무를 마친 현재까지도 유일무이한 떳떳한 대통령이다.
- 권위주의 정부 이후 가장 높은 국민소득 증가를 이루었다.
◆ 1인당 GDP 증가액(통계청 자료): 김영삼 정부 107달러, 김대중 정부 4493달러, 노무현 정부 9532달러, 이명박 정부 857달러
#청와대방문
첫댓글 연표상으로는 노무현의 업적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은 것 같아 주요업적을 발췌하여 마지막에 추가하였습니다
"대통령 못해먹겠다" 발언부분의 배경 대화도 추가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