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니
시편 23:1-6
6월 마지막 날입니다. 새해를 시작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절반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지난 반년도 그랬지만, 남은 반년에도 좋으신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빕니다.
지난 주간, 유튜브에서 유럽을 여행하는 영상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유럽이 지난 2천 년간 그들을 지배해 왔던 기독교가 쇠퇴하고 세속화되었다고 말합니다. 또 수많은 이주민들로 인해 사회적, 문화적, 종교적 갈등이 심화된 사회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영상을 보며 느낀 것은 적어도 우리 사회보다는 안정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의 표정이나 몸짓만 보아도 그런 사실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가 너무 거칠어졌구나’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울리히 벡이라는 독일의 사회학자는 현대세계를 불안과 위험과 재난과 불확실성이 증대되는 ‘위험사회’라고 규정했습니다. 삶의 편의를 위한 도구들은 발전하고 있지만,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존중과 이해는 점점 희박해져 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질서에 사로잡힌 정치인들은 무한경쟁의 살벌한 전쟁터로 사람들을 몰아댑니다. 약자들을 보살피고, 그들의 살 권리를 보장해주어야 할 정부는 오히려 공공성의 영역을 축소하는 쪽으로 정책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과 몸짓과 말투는 우리 사회가 지금 정확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나타내는 표지입니다.
어느 것 하나 분명한 것이 없는 세상, 우리는 마치 끈 떨어진 연처럼 세상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시편 23편을 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 시는 성서를 읽은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고, 또 좋아하는 시입니다. 이 시가 사랑받는 이유는 구조적 단순함과 표현의 적확성에 기인하는 것 같습니다. 복잡하지 않아 기억하기도 어렵지 않습니다.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이렇게도 심오한 확신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인은 ‘목자’라는 은유로 하나님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길을 잃었던 어린 양을 찾아 목에 메고 돌아오는 목자의 이미지에서 많은 감동을 받습니다. 목자로서의 하나님, 이 은유는 이 시인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역사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목자로 고백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이 그의 아들 요셉을 축복하는 내용 가운데 하나님을 “목자이신 이스라엘의 반석”(창49:24)이라고 표현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목자의 이미지가 함축하고 있는 것은 보호와 인도입니다. 거친 짐승들로부터 양들을 지켜주고,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는 목자의 이미지야말로 사람들이 즐겨 하나님에게 입히기를 원했던 이미지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집합적 고백의 대상이었던 목자로서의 하나님 앞에 ‘나의’라는 1인칭 소유격 명사를 덧붙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덴마크의 실존주의 철학자 키엘케골은 인간을 가리켜 ‘신 앞에 선 단독자’라고 말했습니다. 옳습니다. 어느 누구도 나 대신 하나님을 믿어줄 수 없고, 생의 기로 앞에서 나를 대신하여 내 길을 선택해 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두렵고 떨림 가운데서 선택해야 할 나의 몫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에 대한 나의 체험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나’의 체험은 늘 공동체의 자산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가 우리에게 은사에 대해 가르쳐주면서 사람들이 각자 받는 은사가 다 다르지만,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까닭은 공동체를 세우기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 개인의 체험이 개인 속에 머물 때 그것은 감상이 되기 쉽지만, 그것이 다른 이들의 공감을 자아낼 때 그것은 공동체의 자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우리 목자’라는 고백도 필요하지만 그런 고백의 바탕은 ‘주님은 나의 목자’라는 실존적 확신이어야 합니다.
시인이 주님을 가리켜 ‘나의 목자’라고 칭하는 까닭은 언제나 부족함 없이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내밀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마음에 걸리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부족함 없다’는 말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결핍의 감정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돈은 언제나 부족하고, 건강도 여의치 않고, 시간도 넉넉지 않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삶은 적어도 현실 세계에서는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삶의 순간순간 우리는 결핍 앞에 주춤거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시인의 고백은 그저 시적인 수사에 불과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기치 않은 순간, 예기치 않은 방법으로 우리에게 제공된 도움을 경험한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하나님의 손 내미심인지도 모릅니다. 모세는 요단강 동쪽 광야에서 지나온 날을 돌아보며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시고, 이 넓은 광야를 지나는 길에서, 당신들을 보살펴 주셨으며, 지난 사십 년 동안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과 함께 계셨으므로, 당신들에게는 부족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신2:7)
왜 부족한 것이 없었겠습니까? 광야에서의 삶이란 얼마나 눈물겨운 것이었습니까? 그런데도 모세는 부족한 것이 없었다고 말합니다. 욕망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면 우리 인생은 늘 결핍투성이입니다. 인간의 욕망을 채워줄 수 있는 재화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하지만 감사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부족한 것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먹을 것이 있고, 마실 것이 있고, 정을 나눌 사람들이 있고, 가야 할 생의 목표가 분명하다면, 비록 넉넉지는 않다 해도 불퉁거리며 살 이유는 없습니다. 물론 그런 기본적인 것조차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세상에 너무 많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루에 2달러 미만의 돈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구상에는 아직 많이 있습니다. 지구상의 인구 절반이 굶주리고 있고, 그 가운데 8억 명이 절대 기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너무나 많은 것을 누리며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은 더욱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항상 부족한 것만 바라보며 사는 사람은 평생 불평의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값없이 채워진 은혜에 감사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인생은 축제가 되는 것입니다.
시인은 목자이신 주님께서 자신을 불러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시인은 또한 주님께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인도하신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살아갈 방편을 얻는 일에 무관심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생존의 문제에 짓눌려 사람다운 삶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지켜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관심이 많으십니다. 하나님은 추상적 원리로 우리에게 존재하는 분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오셔서 우리의 삶의 문제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이 사실 하나를 분명히 인식할 때 우리는 넘어진 자리를 딛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분이 아니라, 일어날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문제를 직접 해결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우리 속에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병자들을 고쳐주시면서 ‘내가 고쳤다’고 말하지 않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보이진 않아도 주님은 지팡이를 들고 우리를 위험으로부터 지켜주시고, 막대기로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십니다. 호세아는 어긋난 길로 가려는 그의 백성을 가시나무로 길을 막고 담을 둘러쳐서 막으시는 주님의 사랑(호2:6)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었습니다. 때때로 가시나무가 내 앞길을 가로막을 때 우리는 너무나 힘겨움을 느낍니다. 내 앞에 담장이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마다 낙심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법일 때가 많음을 호세아는 우리에게 일깨워준 것입니다.
이 시의 핵심어를 하나 말한다면 무엇이 될까요?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이 말이 아닐까요? 18세기의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생애와 사상을 요약해 놓은 『칸트 평전』을 읽다가 아주 인상적인 글을 발견했습니다.
“나는 일생 동안 참 훌륭하고 좋은 책을 많이 읽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속에서 시편 23편에 나오는 네 단어보다 내 마음을 더 고요하고 기쁘게 해준 말을 발견한 적이 없다. 그것은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DU BIST BEI MIR)라는 말이다.”
칸트는 현대철학의 초석을 놓은 사람입니다. 관념의 세계에 머물러 있던 철학을 경험의 세계로 끌어내린 것입니다. 그런 그가 한 고백,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이 한마디야말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의 가슴을 고요하게 하고, 기쁘게 하는 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고백의 의미를 되새김하다가 문득 그의 이름 ‘임마누엘’이 바로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일컫는 말임을 자각했습니다. 그의 이름이 그의 운명이었던 것일까요?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이 한마디야말로 그의 인생의 말이었던 셈입니다.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은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고 고백합니다. 그에게도 난감한 현실은 있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도 없고, 견딜 수도 없는 일도 일어납니다. 자기 힘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시인은 바로 그 순간에도 자기 곁에 계시면서 그가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우시는 주님의 존재를 확신합니다. 이 확신이 있는 한 사람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저는 장애를 갖고 태어난 자녀를 둔 부모들을 몇 분 압니다. 그들은 대부분 그 낯선 현실 앞에서 한동안 어쩔 줄 몰라 합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는 자녀들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통해 자기 삶이 오히려 치유되고 온전해졌음을 고백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인생은 신비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불행을 예비하신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그들이 어쩔 줄 몰라 할 때도 그들 곁에 계셨던 것입니다. 고통이 없어서가 아니라 고통 가운데서도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이 계심을 믿을 때 우리의 인생은 든든하게 될 것입니다.
함께 하시는 주님에 대한 확신은 시인으로 하여금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해방되도록 해줍니다. 그래서 그는 인생에 대해 낙관적입니다. 세상에서 어려움 없기를 기대할 수는 없지만, 주님의 뜻을 따라 걷는 이에게 주님은 마치 보란 듯이 잔칫상을 차려 주시며, 그 머리에 기름을 흠뻑 부으시어, 귀한 손님으로 맞아주신다는 확신을 오늘 시인은 아름답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주님께서 이미 차려놓으신 잔칫상이 있습니다. 보이십니까? 누리고 계십니까? 사람들은 잔칫상을 앞에 두고도 다른 곳에 마음이 팔려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고독하고 외롭기 짝이 없습니다. 이미 우리 삶이 기적이고 은총인데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우울증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보다 긍정적인 자기 정체성이 필요한 때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귀한 존재로 여겨준다는 사실보다 더 가슴 벅찬 일은 없습니다. 시인은 죽음의 그늘 골짜기를 거닐 때도 있었지만, 그때도 자기 앞에 잔칫상을 차려 주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믿었기에 그는 미래에 대해 낙관적일 수 있었습니다.
설교를 위해 시편 23편을 읽고 또 읽으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습니다. 늘 드리는 말씀이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저의 됨됨이나 제가 한 일보다 훨씬 더 후하게 셈 쳐주셨다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합니다. 뿐만 아니라 짧지 않은 인생 살아오며 만났던 많은 분들이 부족한 저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주셨고, 지극한 정성으로 환대해 주셨고, 언제나 과분한 사랑으로 대해주신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랑받음의 의미가 무엇일까 생각해봤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이런 깨달음을 통해 저를 이전보다 더 깊은 환대의 삶으로 초청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로 내 삶이 누군가를 환대하는 삶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사실을 설교를 준비하며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팝의 황제라 불리던 마이클 잭슨(Michael Jackson)의 노래를 저는 거의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 노래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만드는 무대가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말은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런데 말년의 그의 얼굴을 보며 놀랐던 기억이 있습니다. 흑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계속되는 성형으로 피부는 희게 변하고 납작하던 코가 뾰족해졌지만, 그의 얼굴은 이상하게 변했던 것입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지에 실린 그에 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기자는 그를 가리켜 ‘인종적 패러독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얼굴은 날이 갈수록 코카서스 사람처럼 변해가더니 급기야는 그의 얼굴이 그의 가면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세계적인 슈퍼스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전자 속에 깊이 각인된 흑인으로서의 열등감을 극복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들은 ‘너는 추하다’는 말이 어쩌면 그의 일생을 그렇게 만든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불행했습니다. 자기를 마음으로 인정할 수도, 자기와의 불화를 극복할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를 귀한 손님으로 여겨주시는 주님을 마음 깊이 경험한 사람은 자기 생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비록 내가 가난하다 해도, 비록 내가 병약하다 해도, 내가 남들보다 배우지 못했다 해도, 내가 비록 세상 사람들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하는 것 하나도 가지지 못했다 할지라도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내 앞에 잔칫상을 베풀어주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긍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내 생을 경축하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데 두려워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이 사실 하나 깨닫지 못해 우리는 지옥의 주민으로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랑을 받은 우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도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삶의 희망조차 빼앗겨, 겨울 공화국에서 살아가는 것 같은 우리 이웃들에게 우리는 봄소식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내미시는 손길이 되어 다가서야 합니다. 프랑스 시인 이브 본느프와(Yves Bonnefoy)의 시 <진정한 장소>를 들어보십시오.
가까이 다가오는 이에게 자리를 내줄 것
그는 춥고 집이 없는 자이기에.
외딴집의 불 켜진 문지방에
호롱불 타는 소리에 이끌린 자이기에.
불안과 피로에 그가 지쳐 있다면
그를 위해 회복의 말을 다시 해주기를.
단지 침묵하던 이 마음에 무엇이 필요하리.
성호와 기도의 말이 아니라면
밤중에 느닷없이 만난 작은 불빛 같은 것이 아니라면
가난한 집의 조촐한 식탁을 넘겨보기가 아니라면.
어두운 밤에 느닷없이 만난 작은 불빛은 길을 잃은 이들에게는 기적입니다. 우리에게 주님께서 그러셨듯이, 또 주님이 보내신 이들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또한 누군가에게 작은 불빛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 이 네 단어가 칸트에게 그러했듯이, 위험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가슴에도 깊은 울림으로 다가오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이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 위에 늘 함께하셔서 정말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생으로 증언하며 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첫댓글 언제나 결핍의 감정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는 시시때때로 부족함 없이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늘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생존의 문제로 삶이 더 팍팍하게 느껴지고 미래를 위한 세상적인 준비는 힘겹습니다. 우리를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시고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으로 행복한 시인의 고백을 저도 하고 싶습니다.
비록 지금 많은 문제로 힘들고 바닥에 넘어진 상태라고 여겨지더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해결할 힘을 이미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믿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넘어진 우리를 일으켜 주시는 분이 아니라, 일어날 힘을 주시는 분이시며 우리의 문제를 직접 해결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에게 힘주시는 하나님을 믿으므로 오늘도 평안하고 행복하기를, 주신 은총을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삶이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