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 / 최휘웅
모로 보던 외눈과 탐욕의 입술. 왼쪽이거나 오른쪽 한쪽으로만 기울던 맹목의 귀.
검은 초상화를 들고 검은 문장을 만들기 위하여 검은 문을 열고 검은 복도를 지나 검은 승강기에 몸을 싣는다 드디어 검은 계율의 새장에 갇혔다
지구의 검은 내부가 보이고 거기에는 캄캄한 비둘기가 있다 수도꼭지에서는 슬픔이 쏟아졌다 처절한 웃음이 하수구로 흘러가고 투명한 유리의 아픔이 자란다 땅을 치는 두더지 뭉크의 비명 이미 지나간 시간은 신기루였고 지하 문명의 거대한 우상 시멘트벽은 날카롭게 수직으로 선다
가난한 지게들이 줄을 서 있다 먹이를 아직 줍지 못한 아낙들은 발톱을 드러낸 고양이 눈빛이다 긁히고 긁힌 삶의 주름들 자코메티의 초상들
나는 검은 옷을 입고 종교의 벼랑 위에 섰다 이승의 끝에서 죽음의 강을 건너기 위하여 오 할렐루야를 부른다
가장 높은 나락으로 승천했다는 골 깊은 깨달음이 지나간다
몽상 속의 혀 / 최휘웅
철제 의수가 코스모스를 꺾었다 가을의 상처 깊은 곳에 발을 디민다 가을의 동공에는 수많은 물상들이 아픔을 쏟아내는 무한대의 공간이 있다
밤이 폭발하자 십자가 밑에 시궁창이 납작 엎드린다
노을이 하얘졌다
삼각형의 꼭짓점에 앉은 네모처럼 불안하게 비상하던 새가 오답으로 가득한 혀를 내밀었다
캄캄한 대낮
캄캄한 창살을 벗어나기 위하여
말에 검은 날개를 달기 시작한다
거짓말은 빨갛다 빨강은 검정과 동의어 그러고 보니 색의 미궁은 우리들을 헤매게 한다
혀가 몽상의 기억을 깨운다
그녀의 입술이 나락 끝에 있다
갑자기 나의 시선은 원근법을 상실한다 그러자 그녀와의 거리가 없어진다 우리의 관계는 한순간에 증발한다 그러자 생과 사는 꽃병으로부터 해방된다
아무리 비를 맞아도 젖지 않는 눈으로 말 하는 죽은 자가 목을 타고 올라온다 아늑한 거실에서 음습한 곰팡내가, 죽은 활자들이 지옥의 문을 열고 나온다 연기처럼...나는 우주의 시작이요 끝이다 면벽한 나는 말의 벼랑 끝에 서 있다 지금
아뇩다라 삼막삼보리
사과를 절개하면 달콤한 입술이 나온다 철없는 장미가 가득한 세상이 열린다 악몽이 잠자는 공주를 불러온다
뺑소니차가 검문을 통과했다
콧노래가 가능과 불가능 사이를 횡단하고
차창 밖으로 달리는 손
스스로 신의 자식이 된 자들은 검은 계율과 우박처럼 쏟아지는 신의 통한을 안고 지중해를 건너 아시아에 도착했다. 시간이 덤으로 따라온다 시간의 변주를 음미하며 첼로의 어두운 내면으로 흐느끼듯 흘러들어 간 너의 모서리에 가슴이 찔렸다 보이지 않는 피가 튀고 창백한 유리가 뒹군다 수면 위로 떠오른 증거들이 비밀의 문 앞에서 서성이고 지구를 탈출하기 위한 수학공식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회색 사나이.... 우주선.... 깨진 액정화면에 그녀의 혀가 나타났다
해 뜨면 그녀는 잠이 든다
날기의 종착점은 둥지인데
둥지가 기다리는 것은 저녁이다
저녁은 명치끝에 남은 아픔이고
꽃은 멍이며
삶은 흩어진 퍼즐조각인데
우리들은 밤마다 폭죽을 터트린다
너와 나 사이의 둑 터진 심연. 재고가 바닥을 드러낸 무심을 향하여 허허한 밤에 혀의 스위치를 켠다 찬란한 신음... 아득한 등대가 동녘 하늘 새벽 창에 희망을 새긴다 이승의 끝에 와서 비로소 그때 그 하룻밤 그 새벽이 다시 오지 않는 영원한 시간이었음을 깨닫는다
그때 나는 종말론에 젖어 있었다
아뇩다라 삼막삼보리
의식에서 명멸하는 시간 / 최휘웅
세상의 모든 관계가 증발한다
꽃병에 갇혀 산 생애도 무너진다
너는 죽은 눈으로 말하기 시작하고
산 자의 의식을 칼로 벤다
밤의 등에 기대어 달의 뺨을 만지다가
파도 소리 끊어진
피아노 건반 위로 불시착한다
빈 박수 소리
지구를 떠나기 위해 암기한 천체 공식이 무너진다
산다는 것은 죽음의 숨구멍으로 들어가는 일
나무들의 아우성을 보며 풀들이 자란다
내 귀에는 바람이 서식하고 있다
모래바람이 사막을 지나 까마득한 시간을 넘는다
천공을 헤매다 돌아온 하루
적멸의 진공 속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지우고 또 지우다 저문 저녁
지하철은 어디로 가나?
캄캄한 불빛 어디 쯤에 정차했다가
또 다른 캄캄한 행성으로 달린다.
다 뱉지 못해 달려야 하는 고단한 여정
찢어진 유리의 아픈 투명함
홍수에 떠내려가는 통나무처럼
시간의 강물에서 멱을 감는다
초상화
인생의 주름이 들어서고
할레루야
바탕화면에서 가로와 세로가 만난다
만난 꼭짓점에서 날기를 시도한다
승천을 꿈꾸는 밤
바다가 찾아왔다
손 흔들 준비가 되었다
우리는 추락하는 해를 바라보았다
세상을 향하여 목을 찢었다
의심하는 눈
거친 혀가 난무하는 이곳은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이다
녹색이 지워질 무렵
가지를 옮겨 다니는 새들의 방울 소리
귀밑으로 흐르고
바다는 발톱을 숨기고 숨을 고르고 있다
해변엔 갈매기들의 꺼진 눈들
두려움이 무릎까지 기어오른다
고요히 정박한 섬들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
짜릿하다
시간의 변주
소리의 어두운 내면
흐느끼듯 흘러들어
소리의 음습한 입자들에 취해
충분조건을 뛰어넘는 무한대의 꿈을 향한다
창백한 유리
나로부터 멀어져 가는
일생을 가린
그늘
사라져 버린 기적을 쫒다가
심장을 밟고 지나간
육중한 무게에 눌려 돌아온다
항상 스쳐 지나가는
환상의 물결
너는 늘 높은 절벽이었다
디딤돌과 걸림돌 / 최휘웅
나는 디딤돌이고
너는 걸림돌이다
너는 늘 내 길을 막아서고
나는 네 발밑에 등을 내민다
나는 밤마다 울며 몸부림치고
너는 편안한 잠속에 빠져 있다
잠속에서 나는 악몽에 시달리는데
너는 마냥 천사 같은 얼굴이다
나는 이 역할을 바꾸고 싶다
물살 센 강을 건널 때마다
네가 또는 내가
걸림돌인지 디딤돌인지 헷갈렸다
운명은 바뀌지 않는다
걸림돌이든 디딤돌이든 다 돌일 뿐인데
그 한 뼘의 차이 때문에
우리들의 운명 놀이는 늘 평행선이다
어긋난 드라이브 / 최휘웅
헤드라이트가 젖은 채, 차들은 어디론가 가고 있고 길은 막혀 있다.
강 저쪽으로부터 안개가 밀려오는데, 안개 너머에 숨어 있는 해를 찾아 질주하다 보면 해는 더 멀어진다.
살자와 자살은 동의어이다. 어순이 바뀌어도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죽고 싶 곧 살고 싶다이고, 살고 싶어 외치는 건 곧 죽음 앞에 있다는 것.
상황은 변한다. 바이든이 날리면이 되고, 또 시간이 지나면 없었던 말이 된다.
그렇게 변한다. 기억은 불확실성의 가역반응을 일으키고,
점점 어두워지는 창밖. 사물들도 사라진다
어둠 한복판에서 터질 것 같은 눈빛. 터질 것 같은 산. 생은 유한하고 죽음은 영원하다. 삶은 끝을 향하고 있다.
궤도를 이탈한 아리랑호에서 신호가 왔다. 정보망에 겨울의 마른 칼끝이 잡혔다. 너와 나 사이에 얼음이 깔리고 눈보라가 날렸다.
얼어붙은 콘텐츠 덕분에 거래는 공중분해 되기 직전이다. 채널이 열리지 않아 폰의 목이 잠긴다.
미디어. 꿈. 전략. 하드코어. 하드웨어. 나는 진화를 꿈꾼다. 그러나 지금 퇴화 중이다.
풍경을 잠식해 들어가다 보면 고즈넉한 산의 표정이 있고 풍경이 망막에서 사라진다.
[ 최휘웅 시인의 약력 ]
최휘웅 시인
1944년 충남 예산 출생
1982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카인의 의심』, 『하연 얼음도시』 ,『지하에 갇힌 앵무새의 혀』 『꿈의 방정식』 등
평론집 『억압 꿈 해방 자유 상상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