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9년 다해 1월21일 월. [(홍)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히브리서 5,1-10
복음 마르코 2,18-22
◈ [서울] 성녀 아녜스 기념일
성소국에 있을 때는 1월이 무척 바빴습니다. 가장 중요한 행사인
서품식을 준비하기 때문입니다. 초청장을 만들고, 봉사자들
예행연습하고, 공문 보내고, 서품식 당일에 필요한 물품을 정리하고,
주차증 만들고, 제단 꽃꽂이 확인하고, 안내 책자 만들고, 서품식 제대
확인하고, 서품자들 예행연습하고, 독신서약 미사, 피정 등을
준비합니다. 새 사제들이 벅찬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안수를 받는
것을 보면 저 역시 같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교구장님의 배려로 안식년을 지내고 있는 요즘은 감사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동창신부가 있는 미국 댈러스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안식년에 많이 하는 것이 있는데 여행입니다.
여행을 하려면 꼭 필요한 것이 4가지 있습니다. 어떤 것이 있을까요?
첫째는 건강입니다. 몸과 마음이 건강해야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내면에 걱정과 불안이 가득하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볼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는 기름이 있어야 운전할 수 있고, 스마트 폰도
충전이 되어야 기능을 할 수 있습니다. 건강이 허락하지 않으면
즐거운 여행은 어렵습니다.
둘째는 시간입니다. 시간을 물리적인 시간이 있고, 의미의 시간이
있고, 가치의 시간이 있습니다. 여행에 의미와 가치를 둘 수 있으면
기꺼이 시간을 투자할 수 있습니다. 늘 시간에 쫓기는 사람이 있고,
언제나 여유 있게 시간을 만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삶을 충실하게,
치열하게 사는 사람이 원하는 시간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셋째는 친구입니다. 사람인 인(人)은 서로 기대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
했습니다. 멀리 친구를 찾아가서 차 한 잔 마시는 것이 군자의
복이라고 했습니다. 함께 여행을 갈 수 있는 친구와 동료가 있다는
것은 복입니다. 복은 베풀면 돌아오기 마련입니다. 짧은 시간이든,
긴 시간이든 함께 여행 할 친구가 있다는 것은 많이 베풀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넷째는 여유입니다. 요즘 젊은 분들은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는 대출을
받아서라도 한다고 합니다. 여행을 통해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여행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면 기꺼이 투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재정적인 여유가 많다고 해서 여행을 쉽게 가는 것도 아니고,
여유가 없다고 해서 여행을 못가는 것도 아닙니다.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는지가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하는 대사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사제는 4가지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4가지 일에 충실하다면
우리들 또한 대사제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제사입니다. 제사는 우리가 가진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입니다. 아벨은 기쁜 마음으로 하느님께 제물을 드렸습니다.
동방박사는 황금, 유향, 몰약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내가 가진 재물,
능력, 시간, 마음을 하느님께 봉헌한다면 우리들 또한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가장 완벽한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희생입니다.
둘째는 기도입니다. 기도에는 차원이 없습니다.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과 마음을 열고 대화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의기도,
성모송, 영광송도 아름다운 기도입니다. 묵주기도는 우리 교회의
보물과 같은 기도입니다. 성서를 읽고 묵상하는 것도 훌륭한
기도입니다. 매일 거름을 주고, 물을 주는 화초가 잘 자라듯이, 매일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셋째는 탄원입니다. 갈망이 있는 사람과 갈망이 없는 사람은 삶의
결과가 달라집니다. 많은 나병환자가 있었지만 갈망이 있었던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치유되었습니다. 많은 소경이 있었지만 주님을
만나서 청원을 드렸던 소경이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우는 아이에게
젖을 준다고 합니다. 우리가 갈망을 가지고, 하느님께 청하면
하느님께서는 들어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순종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요셉 성인은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하였지만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듣고 성모님을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고난의 잔을 피하고 싶으셨지만
하느님의 뜻에 따라서 십자가의 길을 가셨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순종은 구원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2019년 새해에는
그리스도의 깃발아래 멜키세댁을 따르는 대사제의 길을 가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모든 율법에 우선하는 법,
주님 현존에 대한 믿음
2019년 다해 1월21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모든 율법에 우선하는 법, 주님 현존에 대한 믿음>
복음: 마르코 2,18-22
‘난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1998)란 제목의 영화가 있
습니다. 내용보다는 제목 때문에 인기를 끌었던 영화입니다. 청년 네
명이 여름에 놀러가다가 차로 사람을 치여 잘못을 감추기 위해 그를
바다 속으로 던져버립니다. 아무도 보지 못했을 것이라 여겼지만
누군가가 그 사실을 알고 그들에게 보복을 하는 내용입니다.
내용보다는 내가 은밀히 지은 죄를 다른 누구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공포로 다가오는 영화입니다. 만약 우리도 샤워를 하고 있을
때 유리창에 “나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라고 써져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얼마나 놀라게 될까요? 우리의 모든 죄는 아무도
보고 있지 않다는 믿음에서 시작됩니다.
영화 ‘트루먼 쇼’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영화의 주인공이 태어날
때부터 TV를 통해 지켜보고 있다는 설정을 했습니다. 이 사실을
주인공만 모르는 것입니다. 주인공이 이것을 알았을 때는 이전과
같은 삶은 살 수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유로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누군가의 시선에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영화 ‘블랙 스완’에서 주인공이 혼자 부끄러운 행위를 하고
있는 꿈을 꾸다가 눈을 떠보니 무서운 엄마가 지켜보고 있어서 깜짝
놀라는 장면이 나옵니다. 물론 그것도 꿈이었습니다. 그러자 조금은
안심을 합니다.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는 이런 공포를 하나씩
쌓아가는 것입니다.
‘누군가 알면 어떡하지?’
다 압니다. 하늘이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압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시선에 종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하느님의 시선이 아닌 뱀의 시선에
지배받고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하와는 뱀에게 보이기 위해 선악과를
따먹은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하느님께서
지켜보고 계셨음을 알고 그분의 시선을 의식했다면 그런 행위를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 죄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시선을 의식하기 시작하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죄를 이기는 힘은 죄를 짓지 말아야한다는 지식이 아닙니다. 그런
율법보다 더 위의 법이 그 율법을 주신 분께서 함께 하신다는
‘현존의식(現存意識)’입니다. 율법보다 하느님 현존이 우선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찾아옵니다.
자신들은 단식을 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은 좋은 것입니다. 좋은 법입니다. 그러나 법이 현존보다 앞설
수는 없습니다. 그 법을 정해주신 분이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법조항을 모조리 알고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법관만큼 법을 아는
사람이 없겠지만, 법관이라고 해서 가장 법을 잘 지키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지켜야 할 규정들은 이미 우리 안에 있고 그 법을 정하신 분이
함께 계심만 안다면 내가 하는 행위로 타인을 심판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법을 가장 완전하게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주님께서
항상 보고 계심을 잊지 않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언제 우리가 주님의 현존을 잊게 될까요? 주님의 현존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 ‘기도’입니다. 성당에 앉아있어도
딴 생각을 하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존재를 믿고 나와
함께 계심을 알고 그분에게 나의 시선을 보내고 그분의 시선을 느끼고
말 한마디를 건넬 때 죄를 지을 수 없는 상태가 됩니다. 이때 우리는
그분의 시선에 빨려 들어가 그분이 계신 하늘에 살게 됩니다.
기도는 나 자신을 하늘로 높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와처럼 땅을
기어 다니는 뱀과 대화하게 될 때면 하느님의 시선을 잊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더 하늘과 멀어지게 됩니다. 뱀과 대화하는 것을
‘생각’이라 합니다. 과거의 것을 많이 생각하면 우울증이 걸리고
미래의 것을 많이 생각하면 불안증에 걸립니다. 생각을 할 때 누구나
자아의 지배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생각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늘을 보고 하느님과 대화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의 현존보다 큰 법은 없습니다. 모든 행동이 누군가 지켜보고
있기에 하는 것입니다. 혼자 있을 때 자아라고 하는 내 악한 본성에게
인정받기 위해 행동하지 않고 주님의 현존을 믿으면 자아의
종살이에서 벗어납니다. 자아의 시선에 사로잡혀 살면서 주님의 법을
따르겠다고 하는 것은 헌 옷에 새 천 조각을 대는 격이고, 헌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는 격입니다. 우리의 새로운 법은 이제 율법 자체가
아니라 주님의 현존에 대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원]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월21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복음: 마르 2,18-22: 신랑을 빼앗길 날 단식하리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단식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18절) 하고 물었을 때 예수께서는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19-20절)라고
말씀하셨다.
식사를 거르는 것만 단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참된 단식은
우리의 악습을 멀리하고 끊는 것이다. 죽음이란 것은 밥이나 음식에
굶주려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 굶주린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진짜 죽음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서
일어난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 루카 4,4)고 하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19절) 이스라엘 성조들에게 구세주가 처음 약속된 때부터
성도들은 눈물과 비탄으로 그분을 기다렸다.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뒤로도 신자들은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분이
사람들 가운데 사시는 동안에는 슬퍼할 수 없었다. 그들이 영으로
사랑했던 분이 육으로도 곁에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신랑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며 우리는 단식을 하는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21절) 헌 옷과 헌
가죽부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자녀가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계속 세속의 것,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되는
길을 고집하며 헛된 것에 마음을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란 말을 들으면 자기와는 맞지 않기 때문에
놀라 화내며 선포된 말씀을 멀리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22절) 포도주는 내적으로
새롭게 해 주고, 옷은 외적으로 감싸준다. 둘 다 영성과 관련된
말이다. 옷은 세상을 비추기 위하여 실천하는 선행을 가리키고, 새
포도주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열정을 뜻한다. 이 두 가지로 우리는
하느님 앞에 내적인 영적 쇄신을 이루게 된다.
또 새것(새 천 조각, 새 포도주)과 낡은 것(낡은 옷, 낡은 가죽부대)은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
는 혁신적이고도 위력적이어서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에 맞갖은
‘회개’를 통하여 새로운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항상 기쁘고 주님으로 충만한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이러한 사랑의 삶을 살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자.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수도회] 단식 대신 찬양을, 눈물 대신 환호를!
2019년 다해 1월21일 성녀 아네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단식 대신 찬양을, 눈물 대신 환호를!
지난해 늦가을 저희 살레시오회 총장이신 앙헬 페르난데스 아르티매
신부님께서 격려차 우리나라를 방문하셨습니다. 일주일 간의 짧은
체류기간이었지만, 돈보스코의 11대 후계자로서, 형제중의 형제,
형제들의 아버지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셨습니다. 성품도 얼마나
따뜻하고 매력적이던지, 발길 닿는 곳 마다 사람들은 환호하고
박수치고, 참으로 행복한 축제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총장 신부님을 맞이하기 위해 저희는 1년 전 부터 ‘인생은 숙제가
아니라 축제입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준비위원회를 구성했고, 로드맵을 짜고, 세부적인 계획안을 마련했고,
시뮬레이션까지 가동했습니다.
드디어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고, 마침내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총장
신부님께서 입국하셨습니다. 워낙 철저히 준비했기에, 그 이후는 그저
주인공이신 총장 신부님과 함께 잘 준비된 축제를 만끽하면
되었습니다.
이 땅 위에서 펼쳐진 영원한 생명의 잔치의 주인공이신 예수님 역시
축제의 주인공이셨습니다. 하느님의 육화강생 그리고
인류구원사업이라는 대축제의 주역이신 예수님께서 베틀레헴
공항으로 입국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화강생으로 이제 우리에게 남은 일은 다른 것이 아니라
그분과 함께 축제를 즐기는 일입니다. 오랜 기간 가동해왔던 준비
위원회도 당연히 해산되어야 합니다. 그분 옆자리에 앉고,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고, 그분과 단둘이 셀카도 찍고, 만찬장으로 들어가
차려진 음식도 맛있게 먹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매일이 축제가 되었습니다. 그분의 오심을
알리는 화려한 불꽃놀이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축제를 알리는
팡파레도 울려퍼지고 있습니다. 이제 축제의 마당으로 들어가 함께
어울려 기쁜 마음으로 축제를 즐길 때인 것입니다.
이런 순간 울적한 얼굴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활짝 웃어야겠습니다.
칙칙한 옷도 삼가해야겠습니다. 축제에 어울리는 멋진 옷으로 갈아
입어야겠습니다. 당연히 단식이며 고행도 중단해야겠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사셨던 때는 슬픔의 때가 아니라 기쁨의
때였습니다.하느님께서 육체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머무르시는 동안
슬퍼하는 것은 그 소중한 순간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나지안즈의 그레고리오)
축제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서도 이런 배경을 염두에 두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마르코 복음 2장 19절)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들 가운데 24시간 현존하십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기뻐해야 마땅합니다. 단식 대신 찬양해야겠습니다. 눈물대신
환호를 터트려야겠습니다.
오늘 우리 공동체 분위기도 어둡거나 칙칙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더
밝아지고 화사해져야 되겠습니다. 우리의 스승이요 아버지, 구원자요
연인이신 주님께서 우리 공동체 한 가운데 늘 현존해계시는데,
우울하거나 냉랭해서야 되겠습니까?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 [수도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 22)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월21일 월.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 22)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통해 가장 중요한 것이 무언지를 알게됩니다.
예수님을 통해 새로운 세상을 보게됩니다.
그때 그때마다 우리에게 사랑의 힘을 주십니다.
사랑의 힘이 사랑의 마음이 사람을 만들어갑니다.
삶을 깨우는 것은 언제나 진실된 사랑이었습니다.
이 기념일에 사랑으로 빚은 아름다운 꽃이
우리 마음에 다시 피어납니다.
혼돈의 시대에 성녀 아녜스는 가장 뜨거운 사랑을
가장 중요한 사랑을 온 삶으로 실천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가장 먼저 하느님을 향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그 사랑이 영원한 사랑의 시작입니다.
영원한 사랑 안에 성녀 아녜스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사랑인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마음에 담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언제나 짧고 간결합니다.
성녀 아녜스는 짧은 삶으로 영원한 사랑이 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향합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기타] 1월21일 (월) - 너는 내 것이라
오늘은 "너는 내 것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이사야 43장 1절 말씀에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북경에서 남서쪽에 위치한 타이항산에 항일투쟁을 하다
전사한 윤세준 독립운동가는 천재적 연설가이자 선동가였습니다.
윤세준은 그곳 주민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인물이었습니다.
배고픔에 시달렸지만 그들은 주민들에게 위협을 주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죽은 후에 윤세주를 기리는
기념비를 만들고 그를 위한 묘비를 지금까지 잘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대한민국 국민은 윤세주를 모릅니다. 어디에서 태어나서
무슨 일을 했는지 조차 전혀 모르지요. 물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역사적 상황에 놓였겠지만 어쨌든 모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참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 안에서 자라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고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우리들의
모습, 안타까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모를 수가 있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은 몰라도
된다 하지만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아침저녁으로 부르는 우리조차
참 하나님을 모른다면 하나님 본인 스스로는 얼마나 기가 차겠습니까?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 [청주] 새 포도주의 신선함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1월21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마르 2,18-22)
새 포도주의 신선함
그동안 익숙해 있던 생활의 패턴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나름대로 지켜온 전통과 고정관념이 나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정된 의식의 전환을 통해서 새로움이 주어집니다. 과거에
매여 있으면 열린 미래를 볼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했는데....
어떤 못된 습관을 관행이라고 합리화시키는 고집을 피워서는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우리 자신이 변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고(로마12,2) 거기에 나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열어주셨고 이 구원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구태의연한 옛 사고방식대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구원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갇혀 있는 만큼 새로운 것을 볼 수 없게
됩니다.
단식을 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의 결론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르2,22)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의식을 전환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은 단순히 율법의 규정에 따라 단식을 할 때가
아닙니다. 단식을 하는 이유는 죄를 벗는 속죄의 행위나 회개의
표시로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애덕을 실천하는 행위로
하는 것이지 단순히 식사를 절제하거나 육식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몸매 관리나 건강을 위해서 단식을 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금요일 고기를 먹지 않는 금육재를 잘 지킵니다. 그러나
단식을 해서 이웃에게 어떤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는가? 생각해보면
그 단식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마태9,13)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올바른 단식에 대해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6,17-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보이기 위한 단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당하신 주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단식이어야 합니다. 단순히 굶는 것을 단식이라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기를 소망하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의 사랑에로, 그리고 이웃사랑에로 초대하십니다.
구체적 이웃사랑 실천이 없는 단식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을 가진 단식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의미 있는
단식, 알맹이 있는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합니다.
몇 해 전 로마를 비롯한 남유럽에 혹한이 닥쳤을 때 로마의 성
갈리스도 성당을 노숙자 숙소를 사용하였습니다. 약30명의
노숙자들이 성당에서 따뜻하게 잠을 청할 수 있게 조치하고
자선단체가 제공하는 음식도 먹을 수 있게 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황청 소유의 승용차와 승합차를 이용하여 노숙자들이
추위를 피할 수 있게 배려하라고 지시하셨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성당은 단순히 기도하는 장소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랑이 살아있어야
하는 곳입니다. 율법의 엄정함과 철두철미한 준수가 오래된
포도주라면 그것을 넘어 사랑이 숨 쉬게 하는 것이 새 포도주가
지향하는 바입니다. 새 포도주의 신선함을 만끽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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