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고두현
늘 뒤따라오던 길이 나를 앞질러 가기 시작한다.
지나온 길은 직선 아니면 곡선
주저앉아 목 놓고 눈 감아도
이 길 아니면 저 길, 그랬던 길이
어느 날부터 여러 갈래 여러 각도로
내 앞을 질러간다.
아침엔 꿈틀대는 리본처럼 푸르게
저녁엔 칭칭대는 붕대처럼 하얗게
들판 지나 사막 지나 두 팔 벌리고
골짜기와 암벽 지나 성긴 돌 틈까지
물가에 비친 나뭇가지 따라 흔들리다가
바다 바깥 먼 항로를 마구 내달리다가
어느 날 낯빛을 바꾸면서 이 길이 맞느냐고
남 얘기하듯, 천연덕스레 내 얼굴을 바라보며
갈래갈래 절레절레
오래된 습관처럼 뒤따라오던 길이 갑자기
앞질러 가기 시작하다 잊은 듯
돌아서서 나에게 길을 묻는 낯선 풍경.
남으로 띄우는 편지/ 고두현
봄볕 푸르거니
겨우내 엎드렸던 볏짚
풀어놓고 언 잠 자던 지붕 밑
손 따숩게 들춰보아라.
거기 꽃 소식 벌써 듣는데
아직 설레는 가슴 남았거든
이 바람 끝으로
옷 섶 안 켠 열어두는 것
잊지 않으마
내 살아 잃어버린 중에서
가장 오래도록
빛나는 너
망덕포구에 그가 산다
- 윤동주 유고 지킨 정병욱의 전언 -
고두현
섬진강 물굽이가 남해로 몸을 트는
망덕포구 나루터에 어릴 적 내 집이 있네.
강물이 몸을 한껏 구부렸다 펼 때마다
마루 아래 웅웅대며 입 벌리는 질항아리
그 속에 그가 사네.
강폭을 거슬러 올라 서울 가던 그해
압록강 먼저 건너 손잡아준 북간도 친구
함께 헤던 별무리처럼 그가 지금 살고 있네.
시집 원고 건네주며 밤새워 뒤척이다
참회록 몰래 쓰고 바다 건너 떠난 그를
학병에 징집되어 뒤따라가던 그날 저녁
어머니 이 원고를 목숨처럼 간직해 주오
우리 둘 다 돌아오지 못하거든
조국이 독립할 때 세상에 알려주오
그는 죽고 나는 살아
캄캄한 바닷길을 미친 듯이 달려온 날
어머니 마룻장 뜯고 항아리에서 꺼낸 유고
순사들 구두 소리 공출미 찾는 소리
철컥대는 칼자루 밑에 숨죽이고 견딘 별빛
행여나 습기 찰까 물안개에 몸 눅을까
볏짚 더미로 살과 뼈를 말리던 밤이
만조의 물비늘 위로 달빛보다 희디희네.
후쿠오카 창살 벽에 하얗게 기대서서
간조의 뻘에 갇혀 오가지 못하던 그
오사카 방공포대서 살아남은 나를 두고
남의 땅 육첩방에 숨어 쓴 모국어가
밤마다 우웅우웅 소리 내며 몸을 트네.
하루 두 번 물때 맞춰 아직도 잘 있는지
마룻장 다시 뜯고 항아리에 제 입을 맞추는
그가 거기 살고 있네.
성장의 비밀 '탈바꿈' / 고두현
나이 들어도 새로운 근육 형성
힘·번식력 세지고 수명도 길어져
곤충 역시 탈피 반복하며 성장
스스로 알 깨고 나오는 게 중요
고야, 80세에 새 석판화 기법 실험
죽기 전 '지금도 나는 배운다' 그려
빗살무늬의 추억/고두현
청동 바람이
종을 때리고 지나간다.
화들짝 놀란 새가
가슴을 친다.
좌로 한 뼘쯤
기운는 하늘
별똥별이
내 몸속으로
빗금을 치며 지나간다.
[ 고두현 시인의 약력 ]
*1963년생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등단
*한국경제신문사 문화부 차장
*제10회시와시학상 수상
*시집 :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
*시선집 『남해, 바다를 걷다』 등이 있다.
*수상 :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김달진 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