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이사 7,10-14
그 무렵 10 주님께서 아하즈에게 이르셨다. 11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 저 저승 깊은 곳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아무것이나 청하여라.” 12 아하즈가 대답하였다.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 13 그러자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은 사람들을 성가시게 하는 것으로는 부족하여 나의 하느님까지 성가시게 하려 합니까? 14 그러므로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복음 루카 1,26-38
26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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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군대의 사병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불러주는 곳이면 무조건 간다는 원칙 아래 강의 요청에 승낙했고 강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강의 시작과 동시에 들은 생각은 “괜히 왔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전쟁터에서 부상을 입고 혼자 낙오자가 되어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씩씩한 군인의 모습은 전혀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제 강의를 열중해서 듣는 척이라도 하는 이들은 각 잡고 앞에 앉아있는 이등병들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들도 꾸벅꾸벅 졸고 있고, 고참들은 아예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었습니다.
저 역시 군대 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이런 정신교육이 얼마나 싫은 시간이란 것을 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저를 향한 계속된 관심 없음에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씩씩해야 하는 군인들이 왜 그렇게 약한 모습을 보였을까요? 저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조금이라도 믿음이 있었다면, 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졌더라면 그런 태도를 보일 수가 없었겠지요.
주님의 말을 우리는 얼마나 듣고 있을까요? 우리의 주님께 대한 관심과 믿음은 어느 정도일까요? 그냥 억지로 주님의 이름만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또 하나의 실망을 안기고 있는 우리는 아닐까 싶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예수님 잉태소식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 잉태소식을 들을 때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을 잘 알고 있었을까요? 몰랐을까요? 만약 하느님을 모르는 상태에서 천사를 만났다면, 깜짝 놀라면서 “귀신이야~~~”하면서 도망가셨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 도망가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면서 겸손한 자세로 소명을 받아들이십니다. 하느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가능했던 이유는 평소에 이미 하느님과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래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잘 듣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모님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우리의 주님께 대한 믿음을 다시금 점검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주님을 외면하면서 실망시키는 모습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 뜻을 잘 실천하면서 큰 기쁨을 드릴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다시 오심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를 보다 더 거룩한 시기가 될 수 있도록 주님께 가까이 가는 노력을 기울여보면 어떨까요?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adaking.speedgabia.com%2Fehomp%2Fimg%2FFile0006.jpg) 상대를 바꿀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상대가 나와 닮아갈 수 있도록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bbadaking.speedgabia.com%2Fimg%2F20181220_01.jpg)
군인들 앞에서 강의하는 것이 제일 힘듭니다.
세상을 바꾸는 방법 “내가 그 사람을 잃은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나를 잃은 것이다. 이토록 좋은 나를 그 사람은 잃은 것이다. 그 사람이 손해를 본 것이다.”
남자 친구로부터 이별의 통보를 받은 것을 안 친한 친구가 괜찮다는 말에, 위와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사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의 존재는 이런 마음을 갖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이렇게 믿고 말할 수 있다면 이별의 아픔을 금방 극복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위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 주어와 목적어를 바꿔서 생각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 사람이 나를 잃은 게 아니라 내가 그를 잃은 것이다. 이토록 좋은 그를 나는 잃은 것이다. 내가 손해를 본 것이다.”
어떨까요? 이별의 아픔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주어와 목적어만 바꾸면 전혀 다른 마음을 가질 수 있으며,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 때, 그래서 부정적인 마음이 나를 휘감고 있을 때 주어와 목적어를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자존감이 상할 때 역시 주어와 목적어를 바꿔 보십시오.
세상이 바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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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의 마음을 담아봅시다.
오늘의 묵상주님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합니다. 제1독서에서 선포된 이사야의 메시아 예언이 성취됩니다. 기원전 8세기, 주변의 위협 세력들, 곧 아람에 있는 다마스쿠스의 임금들과 사마리아에 있는 에프라임의 임금들에게서 벗어나고자 아시리아와 계약을 맺으려고 하는 유다의 임금 아하즈에게 하느님께서 ‘임마누엘의 표징’을 보여 주십니다. 모두 하느님을 믿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그에게 주어진 표징은 젊은 여인에게서 태어날 아이입니다. 나탄 예언자를 통하여 다윗에게 하였던 신적 약속에 따르면 다윗 왕실을 굳건하게 해 줄 이 아이는 젊은데 아이가 없는 아하즈 임금의 아내의 아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마태오는 천사가 요셉에게 전한 말에서 이사야의 예언과 예수님의 어머니 동정 마리아를 직접 연계시킵니다.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 1,22-23). 이런 언급을 통하여 교회 전통은 이사야 본문을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관점에서 이해하였습니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하여 아이를 낳을 터이고 그 이름은 예수이며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라고 알려 줍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주님 탄생 예고와 마리아의 대답 “예.”를 설명하면서, 하와와 마리아, 죄와 구원, 불순종과 순종, 죄와 속량을 통한 자유의 관계를 비교해서 강조합니다(교회 헌장 56항). 마리아의 대답 “예.”는 그녀의 근본적인 선택, 주님과 맺은 전적이고 개인적인 약속이었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말씀에 동의하여 예수님의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사제서품을 받기 전에 3가지 서약을 합니다. 교구장님 앞에서 서약하고, 자필로 서명을 합니다. 독신 서약, 신앙고백, 순명 서약입니다. 독신 서약은 온 마음과 정성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온 마음과 정성으로 맡겨진 사목에 충실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단순히 혼자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혼자 살지만,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지 않다면,혼자 살지만 자기 뜻대로 산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독신은 아닙니다. 신앙고백은 교회의 전승과 교회의 가르침을 믿는 것이며,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사제는 교회의 문헌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사제는 성서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사제의 강론은 시대의 징표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희망의 불을 밝혀야 합니다. 순명 서약은 단순히 교구장의 명을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인사이동으로 정해진 사목의 현장으로 가는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순명입니다. 진정한 순명은 주님께서 맡겨 주시는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낳으셨고, 요셉과 혼인을 하였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독신을 삶을 사셨습니다. 평생 하느님의 뜻을 마음에 담고 사셨기 때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마리아의 노래를 통해서 시대의 징표를 정확하게 아셨습니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높이시는 하느님의 뜻을 아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들었던 것처럼 참된 순명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야구 경기는 투수와 포수가 공을 던지고 받는 경기입니다. 그러기에 투수와 포수는 서로 호흡이 잘 맞아야 합니다. 포수는 투수가 던지는 방향을 정확하게 알아야 하고, 투수는 포수가 잘 받을 수 있도록 미리 던질 곳을 약속합니다. 던지는 공의 유형도 직구인지, 변화구인지 사전에 약속합니다. 이것이 투수와 포수가 함께 공유하는 사인입니다. 사인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유능한 포수도 공을 잘 받을 수 없습니다. 사인이 맞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투수도 정확한 곳으로 공을 던질 수 없습니다. 야구선수들은 훈련을 통해서 서로 사인을 숙지합니다. 그래야만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함께 더불어 살아가면서 상식과 양식이라는 사인을 공유해야 합니다. 관용과 인내라는 사인을 나누어야 합니다. 용서와 사랑이라는 사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징표를 보여 주시는 하느님과 그 징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내가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하느님께서는 내 가족들을 통해서, 내가 만나는 이웃을 통해서, 흘러가는 구름과 부는 바람을 통해서 표징을 보여 주실 것입니다. 이제 곧 성탄입니다. 나의 믿음의 눈에 이물질이 묻어 있으면 성탄의 기쁨을 느낄 수 없을 것입니다. 내 사랑의 눈에 먼지가 잔뜩 묻어 있으면 주님 성탄의 의미를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내 희망의 눈에 고통의 비가 내리면 주님의 성탄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해마다 계절이 오고 가듯이, 매일 태양이 뜨고 지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순환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눈을 뜨고 있어도 내 마음에 욕망의 먼지가 묻어 있다면, 내 마음에 분노의 이물질이 쌓여 있다면, 내 마음에 열등감의 비가 내린다면 우리는 늘 새롭게 다가오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대림 시기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성찰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야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을 제대로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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