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사상에서 가져온 장신대 김호경 교수님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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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세(大勢)를 거스르는 사람들
사람 사는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조금은 대책 없는 이 질문에 정답은 없다. 사람 사는 세상에 필요한 것이 얼마나 많은가! 어쨌든 그 많은 것들 중, ‘가장’이라는 수식어가 붙어도 민망하지 않은 것은 ‘정의’이다. 정의는 사회에 필요한 유일한 요소는 아니지만 중요한 요소라는 데에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소위 사회계약론을 주장했던 사람들도 아마도 밑바탕에는 정의에 대한 이러한 갈망이 있지 않았나 싶다. 그들에 의하면, 자연 상태의 인간은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한다. 이 때문에 홉스가 말하는 이른바 ‘만인의 만인을 위한 투쟁’이 발생한다. 이러한 사회에 평화가 있을 리 만무하다. 이 사회에 평화가 없는 이유는, 이러한 투쟁에는 정의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이익만이 최고라는 유일한 목적인 곳에 정의는 없다. 정의는 함께 살기 위해서 지켜야 하는 ‘올바른 도리’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어로 평화는 ‘에이레네’라고 한다. 에이레네의 근본적인 의미는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줌’이다. 평화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필요가 채워진 상태이다. 이 평화의 상태가 바로 정의의 상태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필요가 ‘바른’ 방식으로 채워지는 것, 그것이 정의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불의하다면, 누군가의 필요가 바르지 않은 방식으로 채워질 뿐 아니라, 누군가의 필요는 채워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평화를 구가하지만 다른 어떤 사람이 평화롭지 못하다면, 그것은 불의다. 모든 사람이 같은 평화를 누리는 것, 누릴 수 있는 평화의 잣대가 같은 것, 그것을 정의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는 일종의 유토피아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떤 사회도 이러한 꿈에 다가가지는 못했다. 세상은 늘 불의했고 정의는 늘 갈망이었다. 이때, 영화는 이 갈망을 풀어내는 솜씨 좋은 다이달로스(Daidalos)다. 영화의 서사 속에서 우리가 그리던 정의가 때로는 잔인하게, 때로는 따뜻하게 그려지기 때문이다. 현실의 참담함은, 영화 속에서 실현되는 정의를 통해서 우리가 살고 싶은, 혹은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사회의 모습으로 변화된다.
<타임 투 킬>은 흑인에 대한 백인의 편견을 폭로하는 영화이다. 자신의 딸이 성폭행으로 살해당하자 흑인 아버지 칼(사무엘 잭스분)은 기관총으로 피의자들을 죽인다. 영화는, 신출내기 변호사 제이크(매튜 매커너히 분)가 칼을 변호하는 과정을 통해서, 백인이라는 잣대의 불의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백인우월주의자들의 반대와 흑인에 대한 편견에 맞서 싸우는 일은 영화 속에서든 현실에서든 험난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배심원들 앞에서 제이크가 하는 마지막 변론은 정의로 가는 길에 언제나 잊지 말아야 할 명문으로 뇌리에 박힌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는 배심원들로 하여금 상상하게 한다. “어느 소녀가 길을 지나다 두 명의 건달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무참히 살해되고 버려졌다. 이 끔찍한 일을 당한 사람은 백인 소녀이며 당신의 딸이다. 건달에 대한 법정의 판결은 정당하지 못했다. 그러자 그녀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총을 난사했다. 당신이라면 어떠했겠는가? 당신은 이 아버지에게 죄를 물을 수 있는가?” 제이크가 상상하게 한 내용은 칼의 끔찍한 현실이었다. 단지 칼의 현실은 그 소녀가 백인이 아니라 흑인 딸이라는 것뿐이었다. 상상의 힘은 언제나 대단하다. 그 소녀가 흑인에서 백인으로 바뀌었을 뿐인데, 칼의 문제일 때는 냉담했던 배심원들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몹쓸 놈들을 그렇게 죽이는 것은 정당하다고 입을 모은다.
똑같은 상황에서 백인과 흑인의 차이가 정의와 불의를 만들어내는 이 상상과 이 현실의 괴리라니! 영화는 백인과 흑인이라는 이중적 잣대가 얼마나 불의한지를 고발한다. 이러한 이중적 잣대의 교묘함은 <필라델피아>라는 영화에서도 여전하다. <필라델피아>의 주인공인 앤드류(톰 행크스 분)는 능력 있는 변호사이지만 동성애자이며 에이즈 환자이다. 이를 알게 된 회사는 매우 교묘한 방법을 써서 그를 해고하지만, 그는 변호사 조(덴젤 워싱턴 분)의 도움으로 회사의 불의한 조치가 위법임을 폭로한다. <필라델피아>에서 회사의 불의가 폭로되는 과정은, <타임 투 킬>의 현실만큼 어렵다. 더욱이 에이즈에 붙어있는 부도덕한 이미지를 벗겨내기가 쉽지 않다. 이를 위한 묘수 중 하나로, 영화는 앤드류와 같이 동성애로 에이즈를 얻은 환자와 수혈로 에이즈를 얻은 환자를 대비시킨다. 수혈로 에이즈 환자가 된 여자는 증인으로 나와서 말한다. “사람들은 전자에게는 비난을, 후자에게는 동정을 퍼붓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냥 다 같은 에이즈 환자일 뿐이다. 다 같이 고통당하고, 다 같이 죽음을 기다리는… 다 같은 생명일 뿐이다.” 앤드류를 비난하는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연민 가득한 눈길을 보내는 여자의 모습은 톰 행크스나 덴젤 워싱톤의 대단한 연기를 뚫고 오래토록 기억에 남는다. 사람을 저렇게 바라보는 것이로구나.
영화는 동성애에 대한 입장을 표명하고자 하지 않는다. 단지 묻는다. 어떠한 이유 때문에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 정당한가? 그러므로 <필라델피아>의 이야기는 <타임 투 킬>의 이야기와 같다. 평화가 다른 이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이라면, 흑인이든 에이즈 환자든 그들의 필요도 채워져야 한다. 그러한 평화가 정의다. 누군가가 당연히 누리는 것을 누군가는 누리지 못하는 사회, 그 당연한 것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해야 하는 사회, 그런 사회에서 사는 것은 지치는 일이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는 포기해야 하고, 그 포기는 불의의 전조가 된다. 그러나 누군가는 어떤 사람이 포기한 것에 힘을 불어넣기도 하고 누군가는 어떤 사람이 감추어놓은 것을 폭로하기도 하면서, 정의에 대한 희망이 이어진다. 누군가는 고난을 감수하고 이런 일들을 한다. 그들이 고마운 세상을 만드는 장본인들이다. 같은 맥락에서 <어 퓨 굿 맨>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심각한 군대 문제를 다룬다. 영화는 쿠바 관타나모의 미군 해병대 기지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군대부적응자였던 산티아고 일병은 상급부대에 자신이 속한 부대의 불합리한 관행을 고발하며 전출을 요구하는 편지를 쓰고 이 때문에 동료들에게 가혹행위를 당한다. 그리고 사망한다.
이들의 가혹행위는 우리식으로 하자면 ‘얼차려’에 해당하는 ‘코드 레드’(Code Red)때문이었다. 그러나 부대 내에서 이 사건은 단순한 살인 사건으로 은폐된다. 법무팀에 소속되어있던 캐피 중위(톰 크루즈 분)는 이 은밀하고 복잡한 관계를 파헤치며 결국은 해당 상관들을 기소했고, 가담했던 병사들은 살인혐의에서는 벗어났지만 불명예제대를 하게 되었다. 물론 대령이나 소대장이 살인을 지시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명령을 실행한 병사들도 성실한 사람들이며, 평소에 피해자를 도왔던 사람들이었다. 피해자의 직접적인 사인은 그가 평소에 갖고 있던 심장병력적 증상으로 인한 질식사였다.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고, 죽음은 어쩌면 산티아고의 신체적인 허약함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인가! 한편 <어 퓨 굿 맨>은 군대에서 발동된 ‘코드 레드’의 불의와 맹목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는 조직 속 인간의 무력함을 보여준다면, <변호인>은 피부색이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성적 정체성조차도 다르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서, 군대라는 특수 조직도 아닌 상황에서, ‘국민’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 부재한 평화를 보여준다. 뜻하지 않은 사건에 휘말린 건전한 대학생 진우(임시완 분)는 공권력의 희생양이 되어서 고문을 당할 뿐 아니라 어떤 법적인 보호도 받을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영화는 속물로 알려진 송우석이라는 변호사(송강호 분)가 진우를 변호하며 불의한 사회와 벌이는 사투를 그린다. <변호인>은 군대에서 행해지는 ‘코드 레드’가 인간 사회 전반으로 확장된 듯한 느낌을 받게 한다.
‘코드 레드’는 다양한 의미를 갖는데, 병원에서의 경고 단계, 컴퓨터 바이러스, 혹은 폭력을 사용하거나 괴롭히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강요 등을 뜻한다. 그것은 비정상적인 상태를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영화에서처럼, 규범을 어긴 병사들을 몰래 괴롭히는 군내부의 불문율로 사용됨으로써, 한편으로 정상을 유지시키는 비정적 방법을 이르기도 한다. <변호인>이 마주한 사회 속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군대 밖에 만나는 불법적인 ‘코드 레드’의 압박 말이다. 그러나 속 터지는 현실은 어떠한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집단을 통합시키는 정당한 수단으로 여긴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어긴 사람에게는 불법적인 폭력이 가해지고, 개인의 힘으로 그것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은 상황들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고맙게도 수많은 영화들은 약자를 보호하지 않은 조직과 그 조직에 기생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유죄를 선고한다. 약자의 평화가 보장되지 않은 채, ‘코드 레드’로 유지된 평화는 불법이라고 말한다. 정의는 작은 자의 평화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 혹은 하나님의 지배를 의미한다. 예수는 세상의 통치에 대해서 하나님이 통치하는 새로운 세상을 이야기한다. 하나님 나라의 새로움이란, 하나님 나라에는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평화가 있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다른가? 세상의 평화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지 못하는 반면, 하나님 나라의 평화는 그렇지 않다. 모든 사람이 평화를 누리지 못한다면, 모든 사람이 정의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곳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누리는 평화를 통해서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모든 사람의 평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마태복음은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이 문제를 풀어낸다. 예수는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을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말한다. 당시에 어린아이는 가치 없고 보잘 것 없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하라는 예수의 말씀은,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 가운데서 하나라도 걸려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마 18:6)라는 말씀으로 이어진다. 이유는 분명하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기”(18:10) 때문이다. 이러한 문맥 속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잃어버린 양의 비유가 나온다. 잃어버린 양을 찾는 비유는 누가복음 15장과 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데, 두 비유는 문맥도 다르고 세부적인 내용에서도 차이가 있다. 누가복음에서의 강조점은 잃어버린 양을 찾은 기쁨에 있지만, 마태복음에서의 강조점은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적을 드러낸다. 목적은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18:14)라는 구절에서 명백해진다. 누군가를 잃어버리는 것, 그것은 아버지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잃어버린다면, 그를 잃어버리게 한 자, 그를 실족시킨 자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잃어버린 ‘그’는 하나님 나라에서 평화를 누려야 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를 잃어버리게 한 자는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실현하지 못한 자이다.
성서는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서 작은 자에게 초점을 맞춘다. 성서는, 하나님의 정의는 대세(大勢)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세의 유혹을 이겨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세상이 말하는 ‘코드 레드’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코드 레드’와 그것으로 유지되는 질서의 불의를 들추어내며 세상의 평화가 감추고 있는 폭력을 폭로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온갖 차이와 온갖 편견과 온갖 불의를 뚫고 하나님의 평화를 이루는 자들이다. 작은 자들이 자신의 권리와 생명을 보호할 수 없게 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들이 하나님의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이며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는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자신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조직의 하수인이 되는 사람도 없어야 한다. ‘어 퓨 굿 맨’은 미 해병대의 슬로건으로 소수정예를 뜻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미 해병대뿐 아니라 이 사회에서도 진정으로 필요한 소수정예의 정의로운 사람들인 듯하다. 그들은 작은 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며 또한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보기 드문 ‘어 퓨 굿 맨’이 하나님 나라에서는 넘쳐날 때, 세상과 다른 하나님의 평화가 드러날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어 퓨 굿 맨’의 절실함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아브라함이 고향집을 떠날 때, 같이 움직였던 사람은 그의 조카인 롯이다. 아브라함과 롯은 함께 출발했지만, 어느 지점에서 서로 다른 지역으로 갈라섰다. 롯이 차지했던 지역이 바로 소돔과 고모라이다. 롯이 처음 그곳을 택할 때, 소돔과 고모라는 빛나던 곳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그곳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은 곳이 되었다. 인간의 욕망과 죄로 가득 찬 도시가 된 것이다. 야웨는 이 도시를 멸망시키기로 작정하고 아브라함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아브라함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올랐던 것은 무엇일까? 도시가 멸망하다니! 그 도시에 있는 수많은 사람이 죽을 처지에 놓이다니! 아브라함은 그 도시를 멸망시키지 않을 방법을 꾀한다. 그 방법으로 아브라함이 찾은 것은 의로운 사람 몇을 담보로 그 불의한 도시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협상을 벌인다. 하나님과의 협상이란 얼마나 발칙한 상상인가!
하나님의 말 한 마디로 자신의 인생 항로를 바꾸었다는 사실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절대성을 모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 절대적인 하나님과 협상이라니… 협상이란 상대방의 의지나 결정을 바꾸어놓겠다는 것이 아닌가! 절대자에게는 순종만이 가능하다. 그와의 협상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불가능한 일을 아브라함은 감행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게 항변한다.
주님께서 의인을 기어이 악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성 안에 의인이 쉰 명이 있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주님께서는 그 성을 기어이 쓸어버리시렵니까? 의인 쉰 명을 보시고서도, 그 성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그처럼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게 하시는 것은, 주님께서 하실 일이 아닙니다. 의인을 악인과 똑같이 보시는 것도, 주님께서 하실 일이 아닌 줄 압니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분께서는 공정하게 판단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창 18:23-25)
의인의 수는 사십 오명, 삼십 명, 이십 명, 십 명으로 점점 줄어든다. 그러나 목숨을 건 아브라함의 협상에도 불구하고, 소돔에는 그들을 덮고 있던 ‘코드 레드’의 불의를 드러낼 열 명의 ‘어 퓨 굿 맨’이 없었다.
아마도 그 옛날 아브라함은 낯선 시대 속 ‘어 퓨 굿 맨’이었을 것이다. 야웨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없었던 시절,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던 시절, 하나님의 음성을 좇았던 것을 보면 말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 여정을 통해 아마도 깨달았을 것이다. 시대를 거스르는 자들을 통해서 그의 임재를 드러내는 하나님의 방법을 말이다. 세상을 거슬러 하나님을 따르는 외로운 시간을 지나면서, 그는 자신과 같은 외로운 사람들이 몇 명만 있으면 소돔이 멸망당하지 않으리라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으로 북적이는 소돔성에 설마 열 명의 의인이 없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종종 생각한다. 이처럼 악한 세대가 이렇게라도 유지되는 것은 이 세상 어딘가에 아브라함이 목숨 걸고 협상했던 그 열 명의 의인이 있는가 보다고 말이다. 대세를 거스르기보다는 대세를 따르기에 익숙한 우리들이 그래도 하나님의 정의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을 보면, 우리의 삶이 그런 사람들에게 빚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내가 그 ‘어 퓨 굿 맨’에 속하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다. 작은 자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며, 아브라함을 보며, 다시금 바울의 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인 듯하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
김호경 | 교수는 영화나 각종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성서의 의미를 확장시켜 보고자 노력한다. 그것이 성경과 삶을 연결시키는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재는 서울장신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