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무속과 무형문화재
홍 태 한 (경희대학교)
1. 머리말
2. 무형문화재 정책과 무속의 보존 및 진흥
3. 무형문화재 정책과 무속의 획일화, 그리고 세속화
4. 무속 발전을 고려한 무형문화재 정책의 방향 제언
5. 맺음말
한국무속과 무형문화재
한국무속과 무형문화재
홍 태 한 (경희대학교)
1. 머 리 말
우리 무속은 지금 중요한 기로에 서있다. 편리와 속도를 추구하는 사회의 흐름에 맞물려 정통적인 굿은 점차 사리지고 있고, 이전의 굿에 비해 격식이 많이 약화되고 기예가 그렇게 높지 않은 무당들의 굿이 많아진다. 마을 공동체 구심점의 역할을 하던 마을굿은 사라지던지 아니면 1회적인 행사로 바뀌고 있다. 굿은 아직 많이 열리고 있지만, 서로 나누어 먹고, 보듬어 주고, 액과 화를 막고 선과 복을 불러주는 것이 아니라 경제성이 가장 중요한 논리로 작용하는 행사가 되었다.
이러한 무속의 변화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정통의 굿을 보존하고 그것이 가장 우수한 굿임을 자각하여 충실히 기록하고 널리 알릴 수 있는 방안을 찾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민속이란 고정된 것이 아니어서 변하는 것이니 변화상을 그대로 수용할 뿐 아니라, 비록 굿이 형식화되었지만 굿이 가지고 있는 종교성만큼은 기본적으로 유지되고 있음으로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굿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함께 원형을 탐구하는 연구 성과도 꾸준하고 재가집에 관심을 가지면서 현재적인 양상이 어떻게 흐를 것인가를 탐구하는 연구도 꾸준하다.
그러나 무속에서는 이러한 무형문화재 정책이 온전하게 제 역할을 수행했는가는 의문이다. 앞에 제시한 긍정적인 평가가 무속에도 여전히 유효하겠지만, 다른 무형문화와 달리 무속은 아직도 향유층이 많을 뿐 아니라 전승담당층도 다수 존재하고, 고정적인 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어 이 문제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이 글은 이런 목적에서 써진 것으로 무형문화재 정책이 무속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는 것을 주 목적으로 한다.
특히 무속이 전승되는 일반적인 과정을 많이 어긋나게 했다 하여 무형문화재정책의 큰 문제점을 지적한 것은 앞으로 무속의 무형문화재 정책이 어떻게 나가야 할지를 제시했다는 의의가 있다. 하지만 아직도 무속의 특성을 고려한 무형문화재 정책은 수립되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논의에 앞서 현재 지정된 무형문화재 중 무속의 사례를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현재 무형문화재는 중앙 정부에 의해 지정된 사례와 각 시도별로 지정된 사례가 있는데 여기서는 이를 모두 제시한다.
중 앙 문 화 재
명 칭
지 정 일 자
지 역
9호 은산별 신제
1966년 2월 15일
충남
13호 강릉단오제
1967년 1월 16일
강원
70호 양주소놀이이굿
1980년 11월 17일
경기
71호 제주칠머리당굿
1980년 11월 17일
제주
72호 진도씻김굿
1980년 11월 17일
전남
82-가호 동해안별신굿
1985년 2월 1일
경남북강원
82-나호 서해안배연신굿 및 대동굿
1985년 2월 1일
인천(황해)
82-다호 위도 띠배놀이
1985년 2월 1일
전북
82-라호 남해안별신굿
1987년 7월 1일
경남
90호 평산소놀음굿
1988년 8월 1일
인천(황해)
98호 경기도당굿
1990년 10월 10일
경기
104호 서울새남굿
1996년 5월 1일
서울
지 방 문 화 재
20호 남이장군사당제
1999년 7월 1일
서울
8호 강화 외포리 고창굿
1997년 7월 14일
인천
2호 안택굿 미친굿
1994년 6월 7일
대전
2호 설경
2000년 2월 18일
대전
12호 황도봉기풍어제
1991년 7월 9일
충남
24호 태안설위설경
1998년 7월 25일
충남
35호 안섬풍어제
2001년 6월 30일
충남
3호 영해별신굿놀이
1980년 12월 30일
경북
7호 가야진 용신제
1997년 11월 30일
경남
2호 영감놀이
1971년 8월 26일
제주
5호 송당리 마을제
1986년 4월 10일
제주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12종, 지방자치단체 지정 무형문화재 11종으로 모두 23종이 지정되어 있다. 성격으로 보면 개인굿보다는 마을굿의 숫자가 훨씬 많아 공동체의 붕괴로 소멸될 마을굿이 이렇게나마 존속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렇게 지정됨으로 인해 23종의 무속 행사가 보존되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다. 지정됨으로 인해 보유자 및 전수조교, 이수자 등의 여러 명이 보존에 참여하게 되었고 보존회관이 건립되고, 보존회가 설립되어 전승 및 보존에 힘쓰게 되었다. 무형문화의 속성을 고려하면 앞으로 지정될 굿은 더 늘어날 것으로 판단된다.
2. 무형문화재 정책과 무속의 보존 및 진흥
이러한 무형문화재 정책이 시행됨으로 인해 무속이 보존되게 된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특히 개인굿보다 마을굿이 전승 환경을 가지게 된 것은 매우 타당하다. 급격한 사회변동으로 마을공동체가 흔들리고 이에 따라 전승기반이 약화됨으로 인해 마을굿이 많이 사라졌다. 이에 따라 마을굿의 전승기반 보존이 무엇보다도 필요하게 되는데 무형문화재 정책은 이러한 전승기반을 보존시켜 준 데에 의의가 있다.
마을굿의 전승기반이 흔들렸지만 무형문화재로 지정됨에 따라 전승이 다시금 원활하게 이어진 사례를 위도띠배굿의 경우에서 본다. 부안군 위도면 대리에 전승되는 띠배굿은 사제무와 악사, 그리고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주관하는 마을 축제였다. 원당에서 사제무 주관 아래에 굿을 올린 후 선창에 내려와 용왕굿을 진행하고 띠배를 먼 바다에 보내는 이 의식은 띠배라는 존재로 인해 가치가 남다르다. 그리고 이러한 띠배굿에는 조기잡이라는 경제적인 기반이 있다.
황도봉기풍어제의 경우도 동일한 양상이 확인된다. 사제무가 단절됨으로 인해 마을 사람들의 혼란이 발생했을 때, 이미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김금화 만신이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됨에 따라 원만하게 황도봉기풍어제를 담당하는 주무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지금은 연육교로 육지화된 황도가 봉기풍어제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것도 김금화라는 걸출한 무당을 낳은 무형문화재 정책의 덕이라 할만하다.
이렇게 중단된 남이장군당굿은 1982년 김태곤 선생이 향토축제심포지엄에서 남이장군 당제를 조사 보고함으로써 다시 관심을 모으게 되고, 마침내 1983년 11월 30일부터 12월2일까지 서울특별시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후원으로 재현되면서 다시 중요한 마을굿으로 모셔지게 된다. 이것은 무형문화, 특히 굿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기독교 신자들이 강릉단오제와 같은 행사에 와서 찬송가를 불러 행사를 방해하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러나 남이장군당굿에는 그런 모습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남이장군당굿을 축제로 바꿈으로 인해 무속이라는 것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면서 성공적으로 현대화시켰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무형문화재 정책이 무속에 끼친 가장 중요한 공로는 굿을 우리의 문화로,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했다는 것이다. “인간문화재와 관계를 맺고 이수자가 되니까 좋은 점이 하나 있다. 자식의 혼사 문제로 사돈될 분들을 만났는데 무속인이라 하지 않고, 인간문화재라 하니까 상당히 좋게 대해주어 무난히 혼사를 마칠 수 있었다.”라는 어느 무속인의 말에서 무속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꾼 한 측면을 본다.
다른 여러 무형문화와 비교할 때 무속은 상당한 변별성을 가진다. 첫째로는 무속의 향유층과 전승담당층이 아직도 많다는 것이다. 망건, 죽염 등과 비교하면 우리 사회는 아직도 무속에 대한 수요가 많다. 서울굿만 하더라도 굿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4-5만여 명을 헤아린다. 서울의 굿당이 100여 곳이 넘고 각각의 굿당에 굿방이 평균적으로 3개가 있다고 가정하고, 각 굿방이 일년에 100외번의 굿이 진행된다고 하면 서울에서만 일년에 3만 번 이상의 굿이 실연된다.
둘째로는 무속은 엄격한 사승관계 속에 전승된다. 그리고 한두 해에 가르침이 끝나는 것도 아니다. 망건이나 죽염 같은 것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물이 있어 스승과 제자의 비교가 가능하고, 제자는 자신이 부족한 점을 채워나갈 수 있다. 하지만 무속은 가시적인 성과물이 없다. 일회적으로 끝나는 굿을 놓고 배움의 정도를 측정하고 판단한다.
이것은 스승의 역할과 영향력이 다른 무형문화재보다 강화될 수밖에 없다. 굿판의 분위기, 재가집의 위상, 굿의 성격에 따라 다양하게 진행되어야 할 무속이 스승이 보는 잣대에 맞춰지게 되어 다양성이 사라질 수 있다. 무형문화재를 지정하면서 개인이 아닌 단체를 지정하자는 주장은 그래서 무속의 경우는 설득력이 높다.
그리고 이 말은 일견 타당하다. 하나의 굿이 진행되는 굿판에서만큼은 굿을 주재하는 무당이 최고의 권능을 가진다. 전통적인 틀에 벗어났다고 해서 그 무당을 비난할 수 없다. 재가집에서 그 굿을 통해 바라는 바를 이루어간다면 그 굿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다.
넷째 굿은 무당 개인의 힘으로만 진행되는 행위가 아니다. 굿은 재가집과 무당의 양축이 신이라는 절대적인 존재를 놓고 치르는 하나의 계약 행위이다. 마을굿의 경우에도 마을 사람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다. 서울의 당굿에서 당주를 물려받은 무당이 자신이 관장하는 마을굿을 다른 무당에게 넘겼지만, 마을사람들이 반발하여 다시 그 마을굿을 찾아온 사례도 있다.
현재 대체적으로 진행되는 남이장군대제의 행사 순서를 본다. 대제행사는 걸립, 꽃등행렬, 당제, 장군출진, 당굿, 사례제 및 대동잔치의 순으로 진행된다. 걸립은 당제와 당굿에 소요되는 제물을 마련하기 위하여 걸립패를 앞세우고 당의 깃발과 함께 풍물패가 동네 가가호호를 다니면서 기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걸립은 과거에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걸립이 자발적인 주민 주도의 행사라기보다는 행사를 위한 행사로 존재한다는 데에 있다. 2002년 당굿의 경우 걸립에 대한 주민들의 참여가 훨씬 낮았다. 갈수록 걸립에 추렴을 하고 당굿에 대한 믿음을 드러내는 주민들의 숫자가 감소하고 있는 것이다. 꽃등 행렬은 이웃한 신창동 부군당에 가서 여신을 초청해 오는 의식을 현대적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강릉단오제에 대관령 산신을 맞아 강릉 여서낭에 합사하는 의식이 있는 것을 보면 이는 민간에 내려오는 자연적인 의례의 하나로 여겨진다. 그러나 지금 행해지는 것은 말 그대로 꽃등행렬로 일종의 전야제 행사인 느낌이 짙다. 행렬의 선두에 장군 등을 비롯한 행렬 등 100여개가 서는 것도 행사를 위한 행사라는 느낌을 강하게 가지게 한다.
이러한 특성을 가진 무속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됨에 따라 몇 가지 부작용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무형문화재로 몇 몇 굿이 지정됨으로 인해 발생하는 가장 큰 문제는 굿의 다양성이 사라지고 획일화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서울 새남굿의 경우를 본다. 서울 새남굿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망자천도제의이고 화려한 복색과 복잡한 제차로 한국 문화의 백미라 할만하다. 그런데 이 새남굿이 서울지역에서 행해지는 진오기굿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진오기굿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진진오기 묵은진오기 등이 그것인데 대체적으로 이것은 다음과 같이 구분된다.
이렇게 본다면 새남굿은 서울지역에 전승되는 진오기굿의 하나의 사례이다. 이런 사례가 지정됨으로 인해 새남굿과 다른 격식이나 무가 사설, 음악을 가진 진오기굿은 사라질 수 있다.
서울 진오기굿는 서로 다른 계통이 있음이 밝혀지고 있다 홍태한, 「서울 진오기굿의 계통」, 『한국민속학29』, 민속학회, 2001. . 서사무가 바리공주의 경우를 보아도 서로 다른 유파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것은 많은 무속인들이 하는 말이다.
그러나 새남굿이 지정됨으로 인해 모든 무당들이 새남굿 주변으로 몰려들고 이에 따라 계통이 다른 진오기굿들은 소멸하기 시작한다. 서울과 경기도를 다녀보게 되면 중요무형문화재 서울새남굿 이수자라는 간판을 건 무당들이 다수 있다. 이들은 새남굿과의 관련성은 그렇게 직접적이지 않다. 새남굿이 문화재로 지정된 후에 그 단체에 가서 새남굿과 관련을 맺은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굿을 실연하는 것이 아니라 서울 새남굿에서 알고 배운 내용들을 그대로 무속에 집어넣는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다양하게 존재했던 진오기굿은 사라지고 하나의 새남굿만 살아남게 되었다.
마을굿도 문제 양상은 다르지만 문화재로 지정된 무당의 영향력이 커진다. 남이장군당굿의 당주무당은 서울과 경기도의 인근 마을굿에까지 청송을 다닌다. 문화재로 지정된 마을굿이 중요한 행사로 인정받음에 따라 인근의 마을굿은 존재위상이 흔들린다 소래연신굿은 안음전 무당이 주재하는 인천의 중요한 마을굿이다. 소래연신굿에 대한 인식이나 조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무당 혼자 힘으로 마을굿이 억지로 꾸려가는 느낌이다.
김금화 만신이 황도봉기풍어제를 주관하는 것은 마을굿의 지속이라는 점에서는 매우 환영받을 일이지만 지역적 연고를 떠올리면 마을굿이 원래의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는 의미도 된다. 서울의 남이장군당굿도 당주무당의 변화에 따라 굿거리에 변화가 있었으나 변화상이 지정의 과정에 고려되지는 않았다 1983년 당시의 남이장군당굿의 제차는 다음과 같다. 1. 가망청배 2. 부군 3. 신장 4. 호구 5. 말명 6. 조상 7. 상산 8. 별상 9. 대감 10. 창부 11. 제석 12. 군웅 13. 황제풀이 14. 뒷전. 김태곤 외 ,「학술조사-남이장군당제」,ꡔ전통문화137ꡕ, 전통문화사, 1984.1. 참조.
그런데 현재 진행되는 남이장군당굿의 제차는 다음과 같다. 1. 주당물림2. 부정청배 3. 가망청배 4. 장군신장5. 대감 6. 불사(신장, 대감, 호구) 7. 말명 8. 조상 9. 상산 10. 별상 11. 신장 12. 제석 13. 성주 14. 창부 15. 황제풀이 16. 군웅 17. 뒷전. 2002-2003년 남이장군당굿 현지 조사.
고창굿을 지방의 축제로 만들려는 군 행정당국의 의지로 인해 강화도에 있는 여러 무형문화재가 초청되어 공연을 진행함으로써 굿판의 본래 분위기가 깨어지고 하나의 행사에 그쳐버렸다. 신성의 공간인 마을 당산에는 포장도로가 열리고, 차가 산정의 당 앞에까지 쉽게 올라간다. 신비롭던 마을굿의 공간이 공연장으로 바뀌었다 강화 외포리 고창굿을 인천무형문화재로 지정 조사한 하효길 선생이 이러한 변화에 심각한 우려를 표시했지만 공무원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다.
서해안 배연신굿과 대동굿도 이제는 하나의 행사에 불과하다. 마을굿을 담당할 주체로서의 동민이나 어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마을굿 본래의 성격은 사라졌다.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위도 띠배굿에는 당주무당이 부재함으로 인해 행사 자체에 어려움이 있게 되었다. 2002년에 조사한 위도 띠배굿에서는 무당이 학자가 채록해놓은 무가 사설을 그대로 외워 굿을 진행했다. 사정을 모르는 학자나 사진작가들은 그것을 띠배굿의 원형이라고 착각하여 녹음과 촬영에 분주했고, 이것이 기록되어 영상화된다면 마을굿에 대한 인식이 잘못 고정될 수 있다 2002년에 위도띠뱃굿을 주재한 무당은 서울 천호동에 거주하는 강신무였다. 자꾸 공수를 주는 과정에 뛰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 마을 사람들의 많은 만류가 있었다.
이것은 마을굿의 박제화라 할 수 있다. 굿에 대한 관념은 사라지고 굿을 하나의 행사로 바라보는 인식이 많아짐으로 인해 마을굿은 아무도 믿지 않는, 그러면서도 행사 중심의 굿이 되었다.
보유자로 지정된 무당의 경우 한 번 지정되면 종신으로 보유자가 될 수 있어 문제가 있다. 굿은 전신의 움직임을 요한다. 그러나 기동이 불편하여 굿을 주재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보유자는 죽을 때까지 보유자로 행세한다. 그러다보니 굿판에 참가하는 무당들은 기예 연마에 힘쓰기보다는 현 보유자의 눈에 들어 전수조교가 되려고 한다.
그래야 보유자 사후에 뒤를 이어 보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 굿판에서 금전과 관련된 좋지 않은 소문이 무성한 것은 소문으로만 끝나기를 바랄 정도로 현 문화재 굿판의 문제가 심각하다는 뜻이다. 이에 따라 보유자 제도에 대한 새로운 점검이 필요하게 되었다.
또한 일단 한 번 지정된 굿도 사후관리가 미약하여 문제가 생긴다. 제대로 격식에 맞게 굿을 진행하는지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나 현재 사후 점검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2004년 6월 6일 화도진 공원에서 거행된 평산소놀음굿의 경우에는 보유자가 소놀음굿 자체에는 나오지 않고 이수자들이 중심이 되어 굿을 했다.
문화재로 지정되는 순간에 형식은 고정되고 그 형식에 맞추다보니 현실에 맞지 않고 어색한 부분들이 등장한다. 현실에 맞게 바꾸려고 해도 문화재로 지정되는 순간부터 쉽지 않다. 문화재로 지정하면서부터 굿의 성격과 원형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있어야 하나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여기에 사람들의 경제적인 이득을 추구하는 욕구와 맞물려 문화재라는 것이 문화재병을 낳게 하는 근원이 되고 말았다.
4. 무속 발전을 고려한 무형문화재 정책의 방향 제언
무속은 살아 있는 민속이어서 모습이 시대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다. 현대처럼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무속의 변화상도 가속이 붙었다. 굿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속에서 굿의 원형을 보존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그런 점에서 무형문화재 제도는 그 필요성이 인정된다.
그러나 앞에 제기한 여러 가지 부정적인 측면들을 극복할 수 있는 쪽으로 보완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무속과 관련하여 바람직한 무형문화재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기로 한다.
첫째 굿을 지정할 때 개인을 지정보유자로 지정하는 것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굿은 무당과 악사, 재가집(또는 마을 사람)의 관계 속에 이루어진다. 따라서 무당을 중심으로 무형문화재를 지정하는 것은 편중될 가능성이 있을 뿐 아니라 경제적인 면과 관련하여 여러 가지 잡음이 끼어들 여지가 있다.
다음으로 지정된 무형문화재가 해제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아야 한다. 한 번 문화재가 되면 종신으로 할 수 있다는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노령화되거나 병이 들어 기능을 온전하게 발휘하지 못하는 보유자라면 과감하게 교체할 필요도 있다. 여기에 명예보유자 제도를 활성화할 필요성도 제기된다. 모든 직종에 정년이 존재하고 있다면 문화재 제도에도 정년의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굿판에서 30여년 이상을 종사하면 기예의 차이는 별로 없다. 굿판의 돌아가는 사정이나 굿속을 속속들이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굿판을 나름대로 운용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전수조교로 종사해온 기능자라면 얼마든지 보유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문화재 정책을 담당하는 행정기관의 관리 감독도 강화되어야 한다. 한 번 지정해놓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해마다 정기적으로 개최되는 발표회를 좀 더 엄정하게 할 뿐 아니라 보유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범주를 정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정해진 범주만큼 연행을 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보유자를 다시 지정할 필요성도 제기해야 한다.
산업사회 속에서 굿의 성격을 과거와 동일하게 바라볼 수 없다. 그렇다면 굿판이 가지고 있는 분위기와 흥겨움을 살릴 수 있는 쪽으로 굿의 분위기를 바꾸어 나갈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원형에 다소 어그러짐이 있겠지만 굿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은 유지될 수 있다.
기능보유자로 지정된 개인과 단체에 대한 일정한 연수교육도 필요하다. 그들이 기예만으로 문화재가 된 것이 아닌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담당하는 일원으로 보유자가 되었음을 인식시켜야 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사명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경제적으로 일정한 금액을 지정하기보다 문화의 최전선에 서있는 자긍심을 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서 굿의 속성을 고려할 때 무형문화재 제도를 다층화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전통주의 경우에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술과 함께 농수산부에서 명인으로 지정한 술이 함께 통용된다. 물론 전통주는 하나의 상품이어서 명인으로 지정됨으로 인해 다량판매의 길이 열릴 수 있어 굿과는 성격이 다르다 하겠다. 하지만 이로 인해 전통주를 빚는 많은 사람들이 자긍심을 가지게 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굿의 경우도 무형문화재 지정과는 별개로 명인 내지는 그에 준하는 어떤 칭호를 만들어 주는 것도 의미가 있다 여겨진다. 이로 인해 문화재 병이 걸린 무당들을 많이 치유할 수 있을 것이고 그만큼 다수의 굿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된다.
굿이 아직도 우리의 중요한 문화유산이면서 여러 지역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왕성하게 전승되고 있기 때문이다. 굿이라는 것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 중의 몇몇 굿을 지정하는 것은 시끄러움을 유발하는 것에 불과하다. 차선책으로 무형문화재 정책이 굿을 대상으로 시행될 수밖에 없다면 앞에 제기한 여러 의견을 감안하여 진행되기를 바란다.
이글에서 글쓴이는 무형문화재 정책이 무속에 미친 영향을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고찰한 후 정책이 나갈 방향을 제시했다. 개별적인 굿 사례를 들었는데 이것은 사례로 들은 개별굿에 대한 비난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개별굿에 나타나 있는 사례들을 바탕으로 무형문화재정책과 굿이 좀 더 발전하기를 바라는 고언일 뿐이다. 무형문화재 정책에 굿이 중요한 대상으로 인정되면서 무속의 사회적 인식이나 지위가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이러한 인식을 좀 더 고양시켜 무속과 문화정책의 발전에 무엇인가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무속을 대상으로 하는 무형문화재정책은 이제 새로운 전환을 필요로 한다고 여겨진다.
특정한 굿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됨에 따라 지정되지 않은 다수의 굿이 사라지는 획일화의 경향이 일어나게 되고 전승환경의 변화로 위기에 봉착한 마을굿이 관주도의 행사로 바뀌게 되었다. 보유자로 지정된 무당의 권능이 강화되어 굿판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가지게 되어 여러 가지 문제를 도출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종신으로 보유자가 됨으로 인해 연행할 수 없는 보유자도 등장하게 되었다.
굿의 성격을 원형을 보존해야 할 굿과, 사회적인 변화상을 받아들여야 할 굿으로 명확하게 구분한 후 각각의 성격에 따라 본존 정책을 세워야 한다. 이미 지정된 각 시도별 무형문화재도 충실한 조사보고서가 나와 원형이 확립되고 이를 바탕으로 시대 흐름을 반영하여 발전적인 변모가 가능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
첫댓글 연신내님 고맙습니다.
연신내님 설명 잘들었습니다.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우리것은 조은것셔ㅡ얼~ 감사ㅎㄴ다
상세한 설명감사드립니다. 모르는 부분도 알려주셔서. 항상배웁니다
몰랐던걸알았네요 참감사합니다 공부하고갑니다
무속의 미래상에 대해 이해하는데 도움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