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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가타 자오온천5 - 자오온천에서 온천욕을 하고 거리 구경후 야마가타로!
2022년 11월 5일 야마가타역 광장 1번 정류소에서 자오온천행 버스를 타니 들판을
달리다가 산으로 올라가는데 경사가 완만하니 산자락에는 많은 집들이
들어서 있고.... 40분 후에 버스가 멈추니 자오온천 (藏王溫泉) 관광 안내소가 보입니다.
시내지도 를 받아 15분 가량을 언덕길을 구불구불 돌아 올라가 료칸 旅館 르 베르트 자오 Le Vert Zao
호텔에 도착해 온천욕을 하고는 나와 걸어서 “上湯共同浴場(상탕공동욕장)” 과 스카와온천
신사를 구경하고는 다시 하탕에서 수탕 떼유 를 체험하고는 골목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1박 했습니다.
11월 6일 새벽에 일어나 다시 온천탕으로 내려가서 몸을 담그니 어제 부터 치면 3번 온천욕 을 하는 것인데,
입욕 시간은 15분 정도가 적당하며 고온탕이나 자극적인 성분이 들어있는 탕에서는 입욕 시간을
줄이도록 하고 탕에서 나온 후에는 강한 산성이나 유황 온천의 경우 맑은 물로 몸을 씻어내는 것이 좋답니다.
자오온천의 온천수는 잿빛 감도는 우유색 으로 젖은 나무 냄새와 유황 냄새 가 서로
뒤섞여 강렬한 향기를 내뿜는데..... 온천수가 강산성 유황 성분을 띄기
때문에 오랫동안 몸을 담고 있을 시 소독액 을 칠한 것 처럼 따끔거릴 수도 있습니다.
호텔에서 주는 아침 을 먹고는 체크아웃을 하고 배낭을 메고 내려오는데 마침 가을이라 붉은 단풍에
마음이 두근거리는데... 문득 동아일보에 실린 일제 강점시 시대에 가수 조영출 얘기가 떠오릅니다.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을려고 왔던가/ 비린내 나는 부둣가에 이슬 맺힌 백일홍/ 그대와
둘이서 꽃씨를 심던 그날도/ 지금은 어디로 갔나 찬비만 내린다.” (‘선창’·1941)
‘선창’ 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면서, 데뷔 2년차 신인 가수 고운봉 은 일약 조선 최고의 인기
가수 반열에 올랐으니 노래는 대한민국에서 80년 이상 수많은 가수가 무대에 올렸고,
노래방 애창곡 순위에서도 빠지는 법이 없었지만 1997년 조영출의 유족들이 소송
으로 저작권을 회복하기 까지, 이 노래의 작사가는 고운봉의 형 고명기로 등록돼 있었습니다.
1913년 충남 아산 탕정에서 태어난 조영출은 와세다대 불문과 출신 엘리트 시인이자 극작가 였으니,
1934년 ‘서울노래’ 를 작사한 이래 조명암, 금운탄, 이가실, 김다인 같은 예명으로 ‘세상은
요지경’(1939), ‘꿈꾸는 백마강’(1940), ‘목포는 항구다’ (1942) 등 히트곡 수십 편을 작사했으니
1948년 월북할 때 까지 작사한 550여편 중 조명암 이라는 예명으로 발표한 작품만 424곡 입니다.
일본인 조선 가요 애호가 사이토 초지는 매달 발매되던 오케레코드 신곡 음반 을 수집했는데....
레코드 라벨에는 십중팔구 ‘조명암 작사’ 라고 인쇄돼 있었으니 그는 조명암이 어쩌면
개인이 아니라 복수의 작사가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이름 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명암 은 한 사람이었고, 놀랍게도 그가 다른 예명으로 발표한 작품이 130여 곡 더 있었
는데, 조영출 다음으로 다작(多作) 작사가였던 박영호는 ‘짝사랑’ (“아 으악새 슬피우니
가을인가요”· 1937), ‘오빠는 풍각쟁이’(1938), ‘번지 없는 주막’ (1940) 등 120여 편을
발표 했으니..... 그럼 조영출과 박영호는 일제강점기 대중가요의 3분의 2를 작사 한 것 입니다?
해방 후 조영출은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 조선연극동맹 등을 조직하고 좌익 문예 운동을 주도했는데,
일찍이 김일성을 흠모한 조영출은 김일성의 항일 투쟁을 다룬 희곡 ‘독립군’ 을 창작해
1946년 3·1절 기념 공연으로 동양극장에 올렸으니‘독립군’ 은 김일성을 극화한 첫번째 작품으로 기록됩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전인 1948년 8월, 조영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한 최고인민회의에 참가하는 남조선 대표 일원으로 선출돼 월북
했으니.... ‘김일성 장군’ 의 품에 안긴 ‘환희’ 와 ‘감격’ 을 그는 이렇게 시로 옮겼습니다.
“아아, 감사하여라/ 쏘베트 인민의 은혜여/ 아아, 행복하여라/ 이 땅에 솟은 자유의 태양이여 (…)
나의 조국은 이제/ 그 이름 자랑스러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조선으로’1948)
김일성은 조영출이 월북해 처음 무대에 올린 가극 ‘꽃신’ (1949)을 관람하고 “작품이 아주 좋다.
앞으로 우리의 가극을 이렇듯 민족적 정취 가 풍기도록 발전시키는 것이 좋겠다” 고 치하합니다.
1946년 박영호가 월북한데 이어 조영출 마저 월북하자, 대한민국 가요계는 공연 레퍼토리의 3분
의 2가 금지곡 으로 지정될 위기에 처하는 대혼란 에 빠졌으니..... 음악인들은 저 두 사람
이 작사한 노래를 가사의 일부를 개사 하고, 작사가를 ‘바꿔치기’ 하는 등 궁여지책으로
일부 작품의 금지곡 지정을 막았습니다. 우리 노래 3분지 2가 금지 되려던 위급한 순간이라....
6·25 남침을 앞두고 조영출은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에 대한 치솟는 증오심” 을 담아 전시 가요 ‘조국
보위의 노래’ 를 작사했으니, “정의의 총칼로써 원쑤를 무찔러/ 공화국은 영원히 부강하게 살리라/
나가자 인민군대 용감한 전사들아/ 인민의 조국을 지키자 목숨으로 지키자” 남한 구석
구석 인민군의 총구가 향하는 곳마다 이 노래가 함께했고, 지금도 대표적인 인민군 군가로 애창 됩니다.
1950년 6월, 서울이 인민군 손에 떨어지자, 조영출은 ‘인민군 종군 작가’ 로 2년 만에 서울을 다시 찾았으니
‘울며 헤진 부산항’(1940), ‘서귀포 칠십리’(1943), ‘고향초’ (“남쪽 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날으면”
·1948) 등 히트작 수십 곡을 함께 만든 작곡가 박시춘 을 만났을 때는 두 손을 마주 잡고
눈물을 글썽였으니 두 사람은 7~8년 전 다수의 ‘군국 가요(친일 가요)’ 를 함께 만든 흑역사도 공유했습니다.
조선인이 창작한 군국가요 62곡 중 조영출이 작사한 작품이 40편 이었으니 그중 박시춘과 함께 만든 작품이
‘아들의 혈서’(1942), ‘결사대의 아내’(1943), ‘혈서지원’(1943) 등 12편이었는데, “무명지 깨물어서 붉은
피를 흘려서/ 일장기 그려놓고 성수만세(聖壽萬歲) 부르고 (…) 나라님의 병정 되기 소원입니다.”(‘혈서지원’)
박시춘은 조영출에게 월북 이후 그의 작품이 금지곡 으로 지정되었고, 일부 작품은 작사가를 바꾸고,
가사 일부를 변경해 불리기도 한다고 알려주었으니 조영출이 일제 말기 조선인의 처지를
영국의 식민지 노예로 신음하던 인도 인민의 심정에 빗대 작사했던 ‘인도의 달밤’ 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아 인도의 달이여/ 마드라스 교회 종소리 울리다/ 지나가는 나그네야 걸음을 멈추어라.”(’인도의 달밤’) 작사
가 유호의 데뷔작으로 발표된 ‘신라의 달밤’(1949) 은 신인 가수 현인이 불러 공전의 히트 를 기록했습니다.
전후에도 조영출은 김일성과 북한 체제를 찬양 하는 작품을 열정적으로 창작했으니 “만고
의 영웅이신 / 절세의 혁명가이신/ 아아 김일성 원수이시여/ 당신은 우리 인민들 속에/
광명으로 오셨습니다/ 행복으로 오셨습니다” (‘수령이시어 만수무강 하시라!’ ·1968)
김일성은 그를 만날 때마다 ‘조령출’ 이라고 친근하게 이름을 불러주고, “낙관적으로 살고,
운동을 많이 하라” 며 건강 까지 챙겨주었으니 1993년 사망할 때까지, 조영출은
교육문화성 부상, 조선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 등 북한 예술 분야 최고위직을
두루 지냈으며 ‘김일성상 계관인’ 칭호와 ‘국기훈장 제1급’ 등 최고의 예우를 받았습니다.
남한에서 조영출은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 반민족 행위 705인
명단에 올랐지만 북한에서 조영출은 단 한번도 자신의 친일 이력을 반성하거나 사과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그의 친일 이력을 파헤치거나 문제 삼지 않았으니 ‘위대한 수령 ’과
‘경애하는 지도자’ 가 아끼는 작가의 흠결을 들춰내는 것은 ‘공화국’ 에 대한 반역(?) 이었습니다.
1992년에 대한민국 문공부는 조명암의 작품 61편을 해금 해서는 음반 제작과 판매를 허용
했으니.... 1994년 방송심의위원회는 밥 딜런의 ‘블로잉 인 더 윈드’,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 조명암을 비롯한 월북 작가 작품 64편 을 포함한 방송 금지곡 847곡을 해제 했습니다.
강원도 고성 건봉사에 ‘조영출 시와 노래비’ (‘고향초’), 충남 예산 덕산온천에 ‘고운봉 노래비 ’
(‘선창’), 목포 유달산에 ‘목포는 항구다 노래비’, 제주도 외돌개 해안에 ‘서귀포
칠십리 노래비’ 등 대한민국 곳곳에는 작사가 조영출의 ‘예술혼’ 을 기리는 노래비가 서 있습니다.
조영출은 친일파에서 공산주의 신봉자 로 변신한 것인데.... 하기사 일송정~ 선구자의 작사자와 작곡가 가 모두
친일파 이고 "애국가의 작사자와 작곡가도 모두 친일파" 인데.... 이런 얘기가 별스러운 것도 아닌가 합니다.
우리 부부는 몇년 전에 심양에서 기차로 집안에 가서는 광개토대왕비를 보고 백하로 이동해
백두산에 오른후 내려와서는 이도백하에서 버스로 연길을 거쳐 용정에 들러
일송정 에 올랐었는데.... 독립을 염원하는 상징인 “선구자” 노 래는 우리가 아는 것
처럼 이름 모를 독립군이 작사 한 것을 조두남 작곡으로 일제시대 부터 불리운 것은 아닙니다?
윤해영이 작사하고 조두남이 작곡 한 유랑민의 설움을 담은 노래가 “용정의 노래” 인데, 이 노래는 1944년
봄 만주 영안 의 신곡 공연장에서 발표되었으니.... 윤해영은 친일 단체인 "영안협화회 회원" 입니다.
조두남 또한 같은 해에 '간첩은 날뛴다’ 와 ‘징병제 만세’ 또 ‘황국의 어머니’ 를 발표한 대표적인 친일파 인데,
해방 이후 '눈물젖은 보따리’ 나 ‘흘러온 신세’ 가 어처구니 없게도 ‘말 달리던 선구자’ 로 바뀐 것 입니다?
그러나 윤해영 등은 천성이 악한 것은 아니고 민족의 양심 은 있으니, 해방후에 ‘동북인민 행진곡’
등 민족의식을 고양한 노래도 작사 했으며 북한에 들어가서는 ‘분배받은 땅’ 등
노래를 지었으니 친일파 라기 보다는 시류에 따라 살았던 보통사람(소시민) 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몇년전에 스페인의 마요르카섬 을 찾아 애국가의 작곡가 안익태 선생의 댁 을 방문했었는데.... 안익태 선생은
평양 숭실중에서 3.1 만세 사건으로 퇴학된 후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쿄 구니다치 고등음악원 을 졸업
하고 미국 신시내티 음악원에 입학한 후에 1934년에 헝가리로 건너가 부다페스트 교향악단 지휘자 가 됩니다.
1936년에 선생은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 를 달고 참가한 베를린 올림픽 에 즈음해 남의 나라 이별의 노래
“올드랭사인” 곡으로 애국가를 부르는 현실을 마음 아프게 생각해서 애국가를 작곡해 조선
선수들과 불렀으며 임시정부에 곡을 보내니 윤치호가 작사한 가사와 합쳐진게 오늘날의 애국가 입니다.
안익태 선생 은 1940년 일본 정부의 기원 2600년 기념축전 사무국이 요청한 황기 2600년
기념봉축 음악 을 작곡 했고 같은해 12월 도쿄 가부기좌 (歌舞伎座) 에서 초연
되었는데.... 이 곡은 이후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도 연주 되었으니 이를 계기로
1941년에 안익태 선생은 부다페스트를 떠나 독일의 베를린 으로 주 활동 무대를 옮깁니다.
6.25 후 안익태 선생이 작곡한 “한국 환상곡” 은 1942년 일본의 괴뢰인 만주국 수립 10주년
을 기념해 작곡했던 "만주국의 자기 표절” 이며.... 일본 천황(일왕) 을 찬양 하는
“에텐라쿠” 를 작곡했고, 군국주의 “日獨會 일독회” 의 경제적 후원 을 받았으며
독일에서 생활할 때에는 주독 일본 영사관의 신세 를 졌다는 “친일파” 논란이 있습니다.
애국가 작사자로 훗날 친일파 윤치호 를 얘기하면... 영어 “liberty” 는 동양에 개념 자체가 없어 불교 경전에서
찾아 “自由(자유)” 라는 조어(번역) 를 만든 일본의 선각자 후쿠자와 유기치 는 그가 저술한 “문명의
개략” 이 1875년에 조선에 입수되면서 문명개화론은 김옥균과 윤치호 등 조선의 청년들을 사로잡게 됩니다.
1881년 박정양을 대표로 홍영식등이 신사 유람단 으로 일본에 가는데, 이때 수행원 유길준 은 귀국
하지 않고 후쿠자와가 건립한 게이오의숙 에서 수학했으며.... 수행원 윤치호 도 2년간
더 머물며 다음해 4차 수신사 박영효와 김옥균, 서광범 이 오자 5명은 후쿠자와
유기치에게 사사 하는데... 2년뒤 갑신정변 실패후 박영효는 후쿠자와의 도움으로 친린의숙을 엽니다.
시사신보 사장 후쿠자와 는 귀국하는 박영효 에게 인쇄기와 잉크, 금속활자와 종이 에 인쇄공인
이노우에 를 붙여주니 다음해 1883년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 는 후쿠자와에게
사사한 유길준 이 발행하는데..... 1884년 갑신정변의 실제 설계자는 후쿠자와 니
김옥균등이 실패하고 망명하자 후쿠자와는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하녀를 첩 으로 주기도 합니다.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 는 17세 일본 도진샤, 21세 상해 중서서원, 24세부터 미국 에모리대에서 공부
하던 1907년에 애국가 가사 를 썼으며 귀국후 독립협회 회장, 대성학교 교장을 지내며 민족의
힘을 키웠고, 1912년 데라우치총독 암살미수 사건인 105인사건 주모자 로 3년간 복역한
독립운동가 였으나..... 만년에는 친일 강연에 중추원과 조선임전보국단으로 친일에 앞장 섭니다.
이런 논란은 음악가 홍난파 나 현제명 도 마찬가지인데 최남선, 이광수, 윤치호, 장지연,
박영효, 이용구, 서정주, 노천명, 모윤숙, 김동인, 주요한, 김동환, 김활란 이
그러하며.... 3.1 기미 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 중에서도 한용운과 손병희 등
10여인 을 빼고는 최린 등 상당수는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친일파로 변절" 하였습니다.
“국화 옆에서” 를 쓴 시인 서정주 의 가미카제 병사 송가 (松井俉長 頌歌) 입니다.
아아 레이터만은 어데런가./ 언덕도 산도/ 뵈이지 않는/ 구름만이 둥둥둥 떠서 다니는
몇 천 길의 바다런가. 귀 기울이면 들려오는/아득한 파도 소리… 우리의 젊은 아우와 아들
들이 그 속에서 잠자는 아득한 파도소리…… 마쓰이 히데오! / 그대는 우리의 오장 우리의 자랑.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를
노래한 노천명 의 황군을 찬송하는 詩 “軍神頌(군신송)” 입니다.
“이 아침에도 대일본특공대는 / 남방 거친 파도 위에 / 혜성 모양 장엄하게 떨어졌으리 /
싸움하는 나라 거리다운 / 네거리 지나며 / 12월 하늘을 우러러본다 / 어뢰를 안고
몸으로 / 적기(敵機)를 부순 용사들의 얼굴이 / 하늘가에 장미처럼 핀다 / 성좌처럼 솟는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새에 료칸에서 봉고차로 데려다 준.... 자오온천 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산을 내려가서 40여분만에 야마가타역 에 도착해서는 창구에서
기차표를 끊어 신칸센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달려서 우츠노미야역 에 내려
다시 재래선으로 갈아타고 닛코(일광) 로 갑니다. 나의홈페이지 : cafe.daum.net/baik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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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시류에 따라 살았던 보통 사람들 잘 보았습니다
그렇지요! 다들......
일제강점기에 국내에 살았던 사람들은
극히 일부는 저항을 했지만.....
일본의 패망을 예측한 사람은 없었던지라.....
일부는 적극전 친일을 나머지는 소극절 친일이지요!
이완용은 조선의 다른 신하들 처럼 친청파였는데
청일전쟁에서 패하자 친미파가 되었고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이 얻은
요동반도를 토해놓게하자 친러파로 변해
독립협회 회장으로 큰 돈을 희사해 독립문을 세웠지요
그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자
이완용은 이제 친일파로 변신합니다.
유명인사나 작가나 음악인에 종교인까지
그리고 보통사람들은 다 시류에 따라 살았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