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본 국적을 갖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일본인이 아니다. 일본인들은 나를 그들과 같은 민족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장애를 갖고 태어났다.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은 나에게 불편함을 주었다. 장애란 몸이 아픈 게 아니다. 몸이 불편할 뿐이다. 내가 가진 장애는 일반적인 장애와 마찬가지로 내 몸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나를 불편하게 만든 장애는 불편함에서 끝나지 않는다. 내가 가진 장애는 불편함을 넘어 나를 아프게 만든다. 나는 장애 때문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다. 아직도 내 가슴 깊은 곳에는 지울 수 없는 상처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상처는 흉터가 되어 나를 영원히 따라다닐 것이다. 차별, 멸시, 배척, 편견, 따돌림….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그늘로 숨어들어갔던 어린 시절의 아픈 상처를 떠올리게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넘어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국적과 상관없다. 난 사람이고 또 축구선수이기 때문이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이니치'라는 꼬리표가 붙은 이충성은 오직 축구를 위해 일본 귀화를 결심했다. 일본에서 태어난 한국인 내 이름은 이충성(李忠成). 충직히 뜻을 이루라는 의미로 아버지께서 지어주셨다. ‘국가에 대해 진정에서 우러나오는 정성’이라는 뜻을 가진 충성(忠誠)과 한글 표기가 같다. 그러나 나는 국가라는 것을 가져본 적이 없다. 일본에서 나는 ‘조센징’이라고 놀림을 받는 아이였을 뿐이다. 그러나 한국에 가면 ‘쪽발이’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나는 한국과 일본, 어느 나라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재일교포 4세라는 꼬리표는 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나를 따라다녔다. 어릴 때부터 내 꿈은 축구선수였다. 조선학교에서 수비수로 명성을 떨친 아버지보다 더 뛰어난 축구선수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축구를 하겠다고 말하자 극구 반대하셨다. 오히려 축구가 아닌 골프를 권유하셨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축구든 골프든 공을 가지고 하는 스포츠종목인데 뭐가 다르다는 건지 몰랐다. 나는 아버지에게 혹시 내가 축구선수로 성공하기 힘들기 때문인지 물었다. 그때 아버지는 “지금은 네가 어리니까 잘 모르겠지만,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차차 알아가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다행히 아버지는 내 뜻을 존중해주셨다. 나는 축구선수로 성공하겠다고 굳게 약속한 뒤 아버지로부터 축구를 해도 좋다는 승낙을 받아냈다. 총련계 학교인 도쿄조선제9초급학교를 졸업한 나는 체계적인 축구교육을 받기 위해 일본의 정식 교육을 받는 야나기사와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총련계 학생이 일본학교로 진학하는 것은 어려웠다. 서류상의 문제뿐 아니라 주위로부터 따가운 시선이 불가피했다. 특히 초등학교 때부터 나와 어울리던 친구들은 일본학교로 진학한 나를 ‘민족의 반역자’라고 손가락질하며 따돌렸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어린 시절의 친구들은 모두 내 곁을 떠났다. 하지만 진짜 어려움은 따로 있었다. 아버지가 왜 축구를 반대하셨는지에 대해서도 이때 깨달았다. 아버지가 반대한 건 축구라는 스포츠가 아니었다. 축구는 팀 스포츠다. 나 혼자서 할 수 없는 운동이다. 그렇기에 동료들은 나를 그들과 같은 일본인으로 인정해주지 않았다. 나에게는 패스조차 하지 않았다. 모두가 나를 경계했다. 축구장에서 내 적은 상대팀 11명에 그치지 않았다. 나는 상대팀 11명뿐 아니라 나와 같은 유니폼을 입은 10명까지 상대해야 했다. 축구장에서는 모두가 적이었다. 오기가 생긴 나는 죽도록 뛰었다. 일본에서 나에 대한 평가는 ‘힘차고 강직하며 날카롭다’이다. 내가 만약 일본인으로 태어났다면 나카무라 슌스케(요코하마 마리노스)처럼 부드럽게 플레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부드러울 수 없었다. 축구장은 차별에 몸부림을 친 내 가슴 속의 응어리를 풀어내는 유일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자랑스러운 한국인을 꿈꾸다 나는 축구실력만큼은 자신 있었다. 타나시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8세에는 FC도쿄 유소년팀에 입단했다. 내가 거친 요코가와FC U-15팀과 FC도쿄 U-18팀은 특별한 축구 명문학교가 없는 도쿄에서는 상당한 엘리트코스에 해당된다. 그러나 프로세계의 벽은 높았다. FC도쿄에서는 경기 출장기회를 잡지 못했다. 사정은 나보다 먼저 터를 잡고 있던 오장은(울산 현대)도 마찬가지였다. 동갑내기인 나와 오장은은 금세 친해졌다. 우리에게는 ‘한국’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말을 잘하지는 못하지만 한국 문화는 익숙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붙어 다녔다. 훈련과정에서도 같은 조를 이루며 호흡을 맞췄다. 여가 시간에는 함께 탁구를 치거나 도쿄에 있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불고기집에서 식사를 하곤 했다. 하지만 내 꼬인 인생은 프로선수가 된 후에도 계속됐다. 일본축구협회(JFA) 소속 클럽은 외국인선수를 세 명까지 보유할 수 있다. 외국인선수의 경기 출장도 세 명으로 제한된다. 20세 이하의 외국인선수는 연봉이 크게 제한받는 C급 계약을 추가로 맺을 수 있는데, C급 계약을 맺은 외국인선수들은 팀당 두 명까지 추가로 등록할 수 있다. 단, 경기 출장은 외국인선수의 계약 등급과 관계없이 팀당 세 명으로 제한되어 있다. 다행히 나와 같은 재일교포들은 일본 내 학교에서 정식 교육을 받았다면 일본선수들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 총련과 민단계 학교도 일본의 정식 교육기관으로 인정받는다. 따라서 일본축구협회의 특별 규정은 사실상 재일교포 구제책에 가깝다. 그렇지만 나는 FC도쿄에서는 자리를 잡지 못했다. 내 핏줄이 아닌, 포지션이 문제였다. FC도쿄에는 외국인선수들인 루카스와 켈리가 확고부동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출장 기회를 잡지 못한 나는 팀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가시와 레이솔로부터 이적 제의가 들어왔다. J2 리그(2부 리그) 강등을 눈앞에 둔 가시와 레이솔은 내가 경기에 뛸 수 있는 팀이었다. 그들의 제안도 상당히 좋았다. 그러나 내가 가시와 레이솔을 선택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가시와 레이솔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홍명보 선수가 몸담았던 팀이다. 나는 홍명보 선수가 스페인과의 2002년 한일월드컵 8강전에서 승부차기를 성공시키는 순간, 홍명보 선수처럼 두 팔을 들어 올리며 기뻐했다.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정말 자랑스러웠다. 나는 가시와 레이솔의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계약 조건에 많은 것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단, 한 가지 조건만은 꼭 해결해 줄 것을 부탁했다. 홍명보 선수가 가시와 레이솔에서 달고 뛰었던 등번호 20번을 제공해 달라는 것이 유일한 요구사항이었다. 내 이름과 등번호 20번이 새겨진 가시와 레이솔의 유니폼을 받은 순간, 나는 이 번호에 어울리는 활약을 펼치겠다고 다짐했다. 가시와 레이솔은 2005년 J1 리그에서 16위를 기록하며 J2 리그로 강등됐다. 내게는 오히려 기회였다. J2 리그 강등으로 주축선수들이 모두 빠져나간 틈을 이용해 나는 가시와 레이솔의 주전 공격수 자리를 차지했다. 2006년에는 J2 리그에서 8골(31경기)을 터트려 가시와 레이솔의 J1 리그 승격을 이끌었고, 이듬해에는 10골(30경기)을 넣어 J1 리그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나는 가시와 레이솔이 너무 좋았다. 징계로 경기에 출전하지 못할 때는 서포터스와 함께 응원까지 했다. 안타깝게도 가시와 레이솔과의 동거는 4년 만에 끝났다. 가시와 레이솔의 주전 경쟁에서 밀린 나는 산프레체 히로시마에 새둥지를 틀었다. 산프레체 히로시마 입단을 앞둔 내 요구 조건은 가시와 레이솔 입단식과 마찬가지로 간단했다. 등번호 9번 유니폼. 한국인 최초로 J리그에 진출했던 노정윤 선수의 등번호이다. 나는 산프레체 히로시마 입단식에서 “책임감이 따르는 번호이다. 가시와 레이솔에서는 홍명보 선수의 등번호를, 히로시마에서는 노정윤 선수의 등번호를 달게 됐다. 위대한 선수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는 활약을 펼치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산프레체 히로시마에 입단할 때 내 위치는 달라져 있었다. 4년 동안 실력이 크게 늘었다거나, 포지션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내 신분에 관한 문제였다. 나는 더 이상 한국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충성의 날카롭고 활기찬 플레이의 이면에는 어린 시절부터 받아온 차별, 멸시, 비아냥을 이겨내겠다는 집념이 숨어 있다. ⓒ스포츠온=표명중 기자 내가 알고 있던 한국은 가짜였다 2007년 2월. 내 인생에서 큰 전환점이 찾아왔다. 나는 한국 국적을 버리고 일본 국적을 선택했다. 국적을 변경하면 평생 되찾을 수 없다. 그래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한국 축구대표팀에서는 뛸 수 없었다. 그들과 나 사이에는 가까이 할 수 없는 큰 장벽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4년의 어느 날. 나는 오장은의 추천을 받아 한국에서 테스트를 받았다. 박성화 감독과 홍명보 코치가 이끄는 한국 청소년대표팀은 2005년 FIFA U-20 월드컵을 앞두고 전력 보강에 열심이었다. 재일교포였던 나는 1주일 동안 파주NFC에서 합숙하며 청소년대표팀과 두 차례 연습경기를 치렀다. 그러나 기대 이하의 플레이를 펼쳤는지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당시 한국 청소년대표팀에는 박주영, 신영록, 김승용, 심우연, 이승현, 이근호 등 뛰어난 공격수들이 많았다. 어쩌면 내가 뛸 자리는 애초부터 없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제대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난 그들과 같은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달랐다. 한국은 내가 알고 있는 한국과 달랐다. 언어의 문제도 있었지만 문화의 차이는 손에 닿을 수 없는 거대한 장벽이었다. 한국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 속에는 ‘재일교포는 선진국 일본에서 고생도 모르고 아무 부족한 것 없이 편하게 살고 있는 한국인’이란 공통인식이 있는지, 간혹 그 왜곡된 인식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괜한 견제심을 나타내는 사람이 있다. 한국이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재일교포의 한계를 분명히 느꼈다.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 북한 축구대표팀에서 뛴 삼촌(김종성, 도쿄조고 감독)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삼촌은 처음 북한대표팀에 합숙할 때만 하더라도 특별대우를 받았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일본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삼촌은 코치로부터 구타를 당하지 않았고, 외출에도 큰 제약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삼촌의 특별대우는 동료들에게 눈엣가시와 같았다. 삼촌의 실수를 야단치는 코치의 호통에 동료들은 오히려 기뻐했다. 그들에게 삼촌은 동료가 아닌 이방인이었다. 그때부터 삼촌은 북한대표팀에 차출되는 것이 두려워졌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한국선수들과 동료 의식을 공유할 수 없었다. 이때 나는 한국대표팀에서 뛰겠다는 생각을 마음속에서 버렸다. 나는 내 자신이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덕분에 나는 축구를 향한 의욕을 다시 불태울 수 있었다. 테스트에서 떨어진 게 내 실력이 아닌 다른 이유였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이대로 잊힌다는 것, 사나이로서 결코 참을 수 없었다. 이충성은 일본 국적을 택했지만, 한국 이름 '충성'만큼은 버리지 않았다. 그의 J리그 등록명은 'LEE CHUNSON'이다. 내 몸에는 한국인의 피가 흐른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일본축구협회로부터 귀화를 권유받았다. 일본 올림픽대표팀은 도하아시안게임에서 북한에 1-2로 패하며 조별 예선에서 탈락하는 등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히라야마 소타 외에는 이렇다 할 공격수가 없어 공격력 보완이 시급했다. 소리마치 야스히루 감독은 공격력 보강을 위해 나에게 일본 귀화를 권유했다. 나 역시 일본 국적을 선택하고 싶었다. 재일교포 4세인 나에게 일본은 한국보다 더 가까운 나라였다. J리그의 외국인선수 제한 규정,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과 무관심도 귀화 결정에 한 몫을 했다. 최근 10년간 12만 명이 귀화를 신청하는 등 재일교포들의 일본 귀화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문화와 언어 등에서 일본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재일교포 3, 4세들의 귀화 움직임은 특히 많다. 귀화를 선택한 내 결정도 이와 같은 움직임의 연장선이었다. 나는 결국 ‘축구선수 이충성’을 인정해주는 소리마치 감독을 믿고 일본 귀화를 결심했다. 귀화 직후 합류한 일본 올림픽대표팀에서 9경기에 출전해 4골을 넣는 활약으로 주포 역할을 해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는 올림픽 메달을 상징하는 금, 은, 동의 색깔로 머리카락을 염색했다. 나는 귀화를 선택한 내 결정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과 한국 사회에 당당히 알리고 싶었다. 그래서 일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끌 수 있는 행동을 보였다. 올림픽은 분명 내 인생관을 바꿔놓았다. 올림픽이 아니었다면 나는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고, 귀화를 선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올림픽을 통해 재일교포로서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표본과도 같은 삶을 살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 차별을 받고 있다. 국적이라든가 민족을 근거로 차별하는 인간은 무지하고 나약한 인간이다. 가끔 내가 흑인이나 백인이었다면 좋겠다고 생각을 한다. 그러면 내게 다가올 놈은 다가오고 다가오지 않을 놈은 다가오지 않을 테니까. 내 핏줄은 국적을 바꾼다고 변하지 않는다. 민족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증조부와 증조모가 일본에 온 지 100년이 다 됐다. 한국 문화가 뿌리 깊은 가정에서 자란 내게 한국은 소중한 나라다. 돌잔치 사진에서 한복을 입은 내 모습은 선명하다. 하지만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 사회에서 자란 내가 일본에 머무르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에게 국적은 중요하지 않다. 나는 세상 어느 나라의 국적도 갖고 있지 않다. 2007년 2월, 내가 일본 국적을 취득하자 사방으로부터 ‘민족의 반역자’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다. 중학교에 입학할 때 또래 친구들에게 들었던 말과 같았다. 나는 민족의 반역자가 된 내가 속해 있는 민족을 보란 듯 반역할 심산은 없었다. 그러나 일본 국적을 취득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재일교포란 사실을 숨길 뜻 또한 없었다. 나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민족의 이름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그 이름을 숨긴다는 것은 자부심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이름을 변경하지 않았다. 내 일본명 ‘리 타다나리(り ただなり)’는 한국명 ‘이충성(李忠成)’을 일본식으로 그대로 읽은 것이다. J리그 정식 등록명은 ‘LEE CHUNSON’이다.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싶지는 않다. 나는 죽을 때까지 내 정체성은 지킬 것이다. 물론, 내 귀화 결정에 찬반 논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대다수가 부정적인 여론이다. 하지만 나는 재일교포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 재일교포 중 상당수가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숨기려고 한다.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스스로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긍정적으로 살아가자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일본 국적을 선택한 뒤에도 이충성이라는 내 이름을 버리지 않았다. 나는 한 번도 나라라는 것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내 핏줄과 정체성만큼은 죽을 때까지 간직하고 싶다. 나는 지금 한국인이 아니다. 일본인이다. 그러나 내 심장과 몸속에 들어가 있는 피는 완전한 한국인이다. 대한민국은 나를 버렸지만 나는 한국의 피를 가진 이충성으로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 |
첫댓글 맞습니다. 추천..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약한 나라가 아닌데 국민 스스로가 노예근성을 가지고 있어요 이건 조선시대부터 전해온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족은 고조선 대고구려 신라의 대를 이어야 합니다.
"조선시대로부터 입니다" 라고 한국인의 입에서 스스로 조선을 부정하고 왜곡하고 그래서 무의적으로 꿈에서라도 조선을 증오하도록 교육한 것이 일제 식민사관의 핵심이죠. 님의 뇌리에 박혀있는 "나쁜 조선"은 일제가 의도한 조선일 수 있다는 사실을 한번쯤 생각해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