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모노세키 여행1 - 가라토시장 생선회를 방파제에서 먹고는 선교사 기념비를 보다!
우리 3대 7명 일행은 2023년 2월 25일 벳푸 에서 렌터카를 타고는 오른쪽에 태평양 바다를
끼고 북쪽으로 달려서 시모노세키 로 향하니 우리 차는 규슈와 혼슈를 연결하는
다리로 간몬 해협 을 건너는데.... 기차는 다리가 아니라 해저 터널 을 통과하는 모양입니다?
시모노세키에 도착해 오늘 밤에 부관 페리를 타고 부산으로 가야 하니 터미널로 가서
짐 부터 터미널에 보관 하고는 렌터카를 반납 해야 하는데.... 딸과 사위는 차량
을 반납하러 규슈 고쿠라로 가고 마눌과 손주, 손녀 5명은 시모노세키를 구경 합니다.
우리 부부와 손주등 다섯명은 올라가다가 가라토시장 唐戶市場 건너편 언덕에 위치한 가메야마
(龜山) 포대 와 가메야마 하치만구 (龜山八幡宮) 신사를 구경하고는 내려와 방파제 로 갑니다.
여기 방파제에는 많은 사람들이 둘러 앉아서 시장에서 사온 생선회를 먹거나 또는
바다를 구경하면서 거닐고 있는데 저 앞쪽으로 양식하는 곳이 많이 보이니,
예전에 여기 가라토 시장 에 한번 들른적이 있는지라..... 오늘은 두 번째 인가 합니다?
그라고는 우리도 가라토 시장 으로 들어가니 여긴 저녁거리를 사러 나온
현지 주민도 있겠지만 행색으로 보건대 관광객들이 거의 대부분
이 아닌가 싶으니.... 오사카 에서 보았던 구로몬 시장 이 생각이 납니다.
가라토시장 은 살아있는 신선한 생선 외에 스시(초밥 )가 많이 보이고 포장된 가공식품 도 많이 보이지만 사실
복어 튀김 이 굉장히 유명한 곳이니 시장에 들어가면 입구에 엄청 큰 모형 복어 가 관광객들을 맞이 합니다.
가라토시장을 구경하는 묘미는 복어와 오징어에 고등어 그리고 조개류와 새우등 여러 가지 해산물 이 가득하고
볼거리도 아주 다양하지만.... 한가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사진을 찍기는 커녕 발을 움직이기도 어렵습니다.
생선 초밥 스시며 새우 오도리 튀김과 게 등속을 "떨이" 라도 하는양 싸게 팔고 있어 사람들이 이처럼 몰린것
인가 보네요? 그러니까 새벽에 어시장을 열었을 것이니..... 그럼 정오 무렵인 지금이 떨이 시간 일러나?
초밥은 연어, 연어 뱃살, 광어, 새우, 소고기, 생강..... 이렇게 아주 다양한데 줄이 비교적
짧은 가게는 가격이 비싼 곳 이며, 반면에 엄청 긴 줄은 싸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줄이 짧고도 싼 곳은... 마치 싸면서도 가벼운 안경테가 없는 것 처럼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특히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곳은 복어나 다른 생선들을 끓여서 만든 죽이랄까 아니, 국물 을 파는
곳인데 좀체 줄이 줄어들지 않아 앞으로 나가서 보니... 이런? 국이 끓기를 기다리고 있네요? 한 10분
이상을 기다려도 판매를 시작하지 않아 포기할까 고민하는데.... 일본인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기다립니다?
일본인들에게 졸갑증에 포기하는 한국인 이란 소리를 듣기 싫어 나도 끝까지 버티며 기다리는데, 옆에는
튀김을 파는 가게들도 많고..... 새우 오도리를 바로 튀긴 것도 있고 아주 다양한데 참치회를
비롯해 몇가지 생선회와 초밥이며 고로케 튀김과 캔맥주에다가 드디어 "국물" 을 사서 밖으로 나옵니다.
방파제 에는 여행자며 나들이객 그리고 데이트족이 서로 퍼질러 앉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노라니
마치 "소풍" 나온 기분 이네요? 남들이 하는 것처럼 앉아서 손주등 5명이 막 먹기 시작했는데....
이런? 감자기 비가 내리니 놀라서 시장 안으로 쫃겨 들어왔다가 곧 그치기에 나가서 마저 먹습니다.
얼떨결에 푼돈으로 점심 을 떼우고는 다시 일어서 시내쪽으로 걷노라니 대형 복어
모형 이 설치되어 있는데..... 복어는 시모노세키 특산품 이라고
들은 기억이 나는데, 시모노세키항이 복어 잡이 일본 1위(80%?) 라고 했던가요?
오늘 가족들은 물론이고 노인들 까지 소풍이라도 나온 듯 해변가에 앉아 시장에서 산 회를 들며
담소하는 모습을 보노라니 문득 동아일보 홍석호 기자거 한국은행 총재 이창용 씨의 발언
을 동아일보에 기고한 “日은 부자 노인, 韓은 돈없는 노인 될 가능성” 이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한은총재 ‘상의 제주포럼’ 강연, 고령화 따른 ‘한일 경제상황’ 비교, “한국 젊은세대
역동성 이 강점, 새 산업 전환 구조 조정 이뤄내야” 라는 부제를 달았습니다.
“한국이 일본의 소득은 따라 잡았지만 자산 측면에서는 아닙니다. 일본은 잘사는 노인, 한국은 돈 없는
노인 이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14일 제주 서귀포시에서 대한상공회의소가 개최한 ‘제46회
제주포럼’ 에 강연자로 나선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한국과 일본 경제 상황을 비교하며 이같이 말했다.
이 총재는 “고령화 사회 라는 점에서 한국이 일본의 경제 상황을 그대로 따라갈 가능성이 크다” 며
“한국의 약점은 출산율이 더 낮아 고령화 속도 가 빠르고, 일본은 1970∼ 1990년대 큰 폭의
경상수지 흑자 를 바탕으로 해외 투자를 많이해 재산이 풍부한 잘사는 노인 이 많다” 라고 진단했다.
이 총재는 최근 주가가 최고가를 경신하는등 일본 경제가 좋은 배경 에 대해 “여러 이유가 있지만
20년동안 개혁을 하며 고령화 속도를 조절 했으며 부족한 노동력을 외국인·여성 으로 대체
했다” 며 “꼭 일본과 같은 길을 갈 필요는 없지만(나쁜 점은) 반면교사 로 삼아야 한다” 라고 말했다.
반대로 한국이 가진 장점으로는 ‘젊은 세대의 역동성’ 을 꼽았다. 이 총재는 “한국의
젊은층이 훨씬 역동적이고 K팝 같은 것이 발전 하고 있다” 며 “장점을 갖고
노력해 일본처럼 20년 고생하지 않고 빨리 (경제가) 회복 됐으면 좋겠다” 고 말했다.
강연 내내 구조 조정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그는 “전기차가 뜨면 기존 내연기관 부품을 만드는 중소기업,
정비공 등에 대한 구조조정 이 이뤄질 것” 이라며 “반대로 전기차용 타이어나 디지털 변화 등
새로운 산업이 성장할 것” 이라고 말했다. 이어 “해고된 기간 정부 사회안전망으로 생활이 보장된 상태
에서 새 산업으로 인력과 자본이 이동 해야 하는데 한국이 가진 구조가 유리하진 않은 것 같다” 고 지적했다.
이 한국은행 총재는 물가, 미국과의 금리 차에다가 가계부채 문제 등
세가지 이유에서 당분간 금리 인하가 어렵다고 재차 선을 그었다.
시장을 벗어나 항구 로 가니 입구 광장에 비석 이 하나 섰는데
사진 밑에 기호 가 있으니 “ Α-Ω 알파에서 오메가“ 라....
비석 밑에 이름을 읽어보니 “聖 フランシスコ サビエル 下関上陸記念碑” 라!!!
예수회 소속 신부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는 인도 고아에 파견되어
전도를 하다가 말레이시아 말래카의 저팬타운에 사는 일본인 안지로 를 만납니다.
프란시스코 사비에르는 일본 사무라이 안지로에게 전도를 하고 인도 고아 에 보내
신학교에서 신부 수업 을 받도록 한후 일본 포교에 대한 가능성 을 확인하고
중국 배를 타고는 안지로의 고향 규슈 가고시마 에 도착한 것이 1549년 8월 입니다.
가고시마에서 안지로의 친척들에게 포교 를 하여 상당수의 예수교인을 확보 한후
수도인 교토 로 가기 위해 구마모토, 히라도, 후쿠오카를 거쳐 야마구치 로
가는데.... 그때 후쿠오카에서 배를 타고 이곳 시모노세키에 상륙 했던 모양이네요?
당시 여기 나가토(長門, 시모노세키) 등 6국 은 야마구치의 오우치(大內) 씨 영지 였습니다.
예수회 선교사 프란시스코 사비에르 는 백제 성왕의 셋째 아들인
임성태자 의 31세손 오우치 요시타카 로 부터 예수교 전도에 대한 편의 를 제공받게 됩니다.
몇달 머물면서 길거리에서 포교 를 한 결과 무려 500여인에게 세례 를 줍니다! 그러고는 1551년에
중국에는 입국금지 로 결국 들어가지 못하고 다시 임지인 인도 고아 로 되돌아 갑니다. 그는
일본인의 사상인 유교 에 대해 알면서.... 그 원천인 중국인을 선교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 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이 일본에 전해진건 1549년 이니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제1 선봉 고니시
유키나가는 십자가를 앞세우고 조선을 침략 했으며 제2진 가토 기요마사는 불교도이지만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는 역시 크리스천이니 일본의 수많은 다이묘와 무장들이 기독교도
였으니 진해 웅천 왜성에서는 일요일이면 세스페데스 신부 집전아래 하느님께 미사 를 봉헌했습니다.
반면에 우리나라 조선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진건 김대건 신부로 보면 1845년 이고
이승훈 신부로 본다면 1784년 이니.... 그럼 조선은 일본 보다 235년
내지 296년 늦은 것인데, 하느님이 조선인 보다 일본인들을 더 사랑하셨기 때문일까요?
조선은 500년 역사에서 쇄국정책 으로 일관한 탓에 단 한척의 무역선 도 띄우지 못했으며
단 한명의 상인 도 스스로 자기 주도하에 외국 무역에 나서지 못했는데 비해 일본인
들은 해적질로 고려와 명나라를 약탈하던 시대가 지나면..... 상인으로 해외로 진출 합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훨씬 전 해외로 진출한 일본 상인들은 중국 닝보(영파) 에 자주 무역하러 들렀으며
동남아로 나아가 베트남의 호이안과 태국의 아유타야 및 말레이시아의 말래카 등지에 저팬타운
을 건설하고 무역을 했으니.... 1540년대에 예수교 신부 프란시스 자비에르가 인도 고아에서
말래이지아 말래카로 왔을 때 "일본인촌" 에 거주하던 안지로 등을 만나 전도를 할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인들은 500년 역사에서 단 한명의 상인도 해외로 나가지 못했으니 조선 상인들은 조정에 돈을 내고 신청
을 해서 중국에 가는 사신의 통제 를 받으며 걸어서 만주 벌판을 지나 베이징에 가서 조선 사신 숙소 마당 에
상품을 진열하면 중국 상인들이 조선 사신의 숙소로 찾아와 거래하는게 전부였으며 압록강을 건너가고
올 때 조정에 신고한 상품에 품목이나 수량이 틀리면 몰수당하고 곤장을 밎는등 조정의 통제하에 있었습니다.
조선 상인들이 500년간 단 한척의 무역선 을 띄우지 못한 것은 이처럼 조정에서 개인 행동을 엄격하게
금지한 탓도 있지만 그 이전에 조선의 효(孝) 의 나라 라.... 가장 큰 불효는 부모 보다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이고 두 번째 불효는 고향으 떠났다가 부모님 병수발과 임종 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유교 주자학의 영향으로 "신체발부는 수지부모" 이니 부상을 당해 부모님 걱정 을
끼치는 것을 3번째 불효로 생각했으니 그럼 조선인들은 외국으로 나가거나 멀리 타향
으로 가는건 극도로 싫어 했으니 고향에서 부모님 모시고 사는게 효도하는 것이라 여긴
때문으로 진취적 기상이나 모험심 은 전혀 찾아볼수 없는 우물안 개구리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와 쇄국정책의 결과는 1841년의 아편전쟁 이 전해질때 확연히 구분되니 일본은 나가사키 데지마에
거주하는 네델란드 상인들을 통해 싱가포르에서 발행되는 영자 신문 을 받아보고 또 중국과 동남아 상인
들을 접촉해 아편전쟁에 대한 내용을 상세하게 파악한후 나라를 지킬 방법을 강구해 해방(海防) 에 몰두합니다.
하지만 조선은 사신이 북경에 가서 청나라가 발행한 관보 를 얻어온게 고작이니 저 관보는 청나라 정부가
발행하는 것이라 당연히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적었으니 실상을 알수는 없는 것 이고... 북경을 다녀온
사신이 시내가 평소 처럼 평온 하다는 말에 임금 헌종과 대신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식으로 넘겨버렸으니.... 나라를 개혁하고 군사력을 확충하지 못한채 무사안일 에 빠져버립니다.
일본에서 성곡적으로 전도를 이룬 그리스도교의 중국 전도는 몇 년후 그의 후임 선교사 마테오 리치 가
왔으니 그는 방법을 달리했는데 맞춤 전도 로 유학자의 나라 중국에서는 선교사 부터 먼저 유학자 가
돼야 한다는 생각으로 중국어를 배운후 유학을 공부해 중국 사대부와 대신들에게 접근해 하느님
을 상제(上帝) 로 말하면서 유교 경전을 토론하는 등으로 신뢰를 받은 후에야 전도가 이루어지게 됩니다.
또 복어 동상 을 지나 간몬( 関門 관문) 연락선 이 뜨는 가라토 唐戶 선착장 에 이르니
사무라이와 여인 그림 옆에 간류지마 (嚴流島 엄류도) 라는 글귀가 보입니다?
그럼 저 검객 이 바로 사무라이의 나라 일본에서 존경심으로 "劍聖(검성)" 이라고 불리는
그 미야모토 무사시 ??? 옛날에 처음 시모노세키를 방문했을 때 북규슈의
모지코 門司港(문사항) 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가 본 기억이 되살아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