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아는 비결秘訣 / 김종혁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나 인터넷 서핑을 하다 보면 전前 직장 관련 뉴스를 접하게 된다. 이번에는 인사이동 뉴스였다. 임원 승진자 중에 반가운 이름이 눈에 띄었다. 내가 전 직장에 근무할 당시 신참 대리였던 L이다. 나만 나이를 먹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언뜻 스쳤다. 그리고 될 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는 속담이 딱 들어맞는 게 신기했다.
‘이사승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김종혁 드림^^’ 리본에 축하 메시지를 담아서 작은 화분을 보냈다. 요즘 꽃 배달은 두세 시간이면 도착한다. 금방 고맙다는 전화가 왔고 얼굴 한번 보자는 카톡이 부지런히 오고 갔다. 근 이십 년 세월 속에 쌓인 회포를 풀기에는 점심보다 저녁이 적당했다.
L은 오십 대 초반의 중후한 임원이 되어 나타났다. 풋풋했던 청년이 아련한 과거의 커튼 속에서 깜짝 변신을 하고 튀어나온 듯했다. 서로 반가움과 놀라움이 교차하는 표정으로 나는 나의 과거를, 그는 그의 미래를 보고 있었다. 그는 관록이 붙은 금융인으로서 자신감이 넘쳤고 자랑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항상 웃는 낯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았다.
대기업 임원은 군대로 따지면 장성급이다. 우선 조직 내의 서열이 상위 1퍼센트다. 대졸 신입사원이라면 적어도 20년 이상 근무해야 한다. 임원이 되면 고액 연봉과 법인 카드는 물론이고 쾌적한 독립 사무실, 중형 세단, 골프회원권 등 품위유지에 필요한 것들이 제공된다. 운전를 좋아하는 L은 방금 출고된 새 차의 가죽시트 냄새를 맡았을 때 가슴이 뭉클했다고 한다. 그의 청춘을 녹여 쟁취한 일종의 트로피 같았던 것이다. 이런 특전들은 나중에 치열한 경쟁과 일 중독증을 유발하는 굴레가 되겠지만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단 법이다.
“선배님, 문학 활동하신다는 소식 들었습니다. 결재서류가 2페이지를 넘어가면 첫 페이지 내용을 기억 못 한다 하셨잖아요? 그런 분이 어떻게 글을 쓰십니까? 하하하”
그는 빙글빙글 웃으면서 나를 놀렸다. 나는 2페이지가 넘은 결재문서가 올라오면 내용은 보지도 않고 무조건 퇴짜를 놨다. 그때 내가 직원들에게 억지소리 한 걸 두고 놀린 말이다.
내가 맡았던 부서는 부도난 기업들의 부실채권을 추심했었다. 아이엠에프 금융위기 직후였는데 전국의 법정관리기업들을 한곳에 모아 관리했다. 굴지의 대그룹부터 구멍가게 수준의 업체까지 1,200개가 넘었다. 거의 날마다, 대기업 회장님을 비롯해서 별별 이해관계인들이 찾아왔다. 내 책상 위에 산더미처럼 쌓인 결재서류에는 해당 기업의 흥망성쇠의 역사를 필두로 시시콜콜한 요구사항들이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서류 속에 파묻혀 의사결정은커녕 우주 속을 헤매는 느낌이었다. 폭주하는 업무량 때문에 제명대로 못살지 싶었다. 효율적인 대처방안, 즉 단순화가 필요했다.
나는 우리 부서에서 생산하는 모든 문서는 글자 크기 12폰트, 글자체는 새굴림, 서류의 총량은 2페이지 이내로 작성해야 한다고 선언해버렸다. 앞에 내세운 이유는 업무 효율화였지만 실은 나의 생존전략이었다. 각 정부 부처의 대통령 보고문서는 1페이지 이내로 요약한다는 데서 얻은 힌트였다. 또 어느 종가집宗家宅에서는 제사상 크기를 절반으로 줄였더니 며느리들의 불평이 잠잠해지더라는 얘기도 참고했다. 2페이지로 요약하려면 많이 읽고 깊이 생각해야 가능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업무량이 줄어든 탓인지 원형탈모증이나 안면安眠장애를 앓고 있던 직원들이 완쾌됐다. L의 말에 의하면 2페이지 보고서는 지금도 그 부서의 전통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직장 후배들의 삶을 개선했다는 점에서 뿌듯했다.
나도 L에게 궁금한 사항을 물었다. 내가 알기로 그는 학연 지연이 없는, 소위 빽없는 사람이었다.
“L이사, 경쟁이 치열했을 텐데 임원승진 비결이 있나?”
“비결이랄 게 있겠습니까마는 선배님이 남겨주신 2페이지 보고서 전통과 브리핑 습관이 한몫한 것 같습니다”
옛 직장 상사에 대한 립서비스로 들렸지만 한편으로는 그럴 만도 했다.
나의 전 직장 상사 중에 P 대표라는 분이 계셨다. 브리핑할 때 ‘~인 것 같습니다’라고 보고하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게다가 P 대표는 가랑잎에 불붙는 성격이었다. 그는 “신문 기자들도 그렇게 애매하게 말하지 않아. 불확실한 정보로 무엇을 할 수 있겠나?”라고 질책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입니다”라고 말 습관을 바꾸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입이 마르고, 말을 더듬고, 손에 땀이 차기도 했다. 보고할 사안에 대해 좀 더 분명하게, 폭넓게 알아야 했다. 나도 우리 부서 직원들에게 P대표와 똑같은 책망을 했었다. 파쇼가 심하다, 웬 시집살이냐, 커뮤니케이션이 안 된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지만 모른 척했다.
회사생활은 보고에서 시작하여 보고로 끝난다는 말이 있다. L 이사는 자기 일에 대하여 늘 확실하게 브리핑 준비를 했다는 것이다.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모 언론사의 고위직 민원인이 P 대표를 찾아온 적이 있었는데 내가 자리에 없었다. P 대표는 평사원 L을 대표실로 직접 불러 무슨 일인지 물었다. L은 평소 하던 대로 브리핑을 했는데 P 대표 맘에 쏙 들었다. 숙습난당熟習難當이었다. 얼마 후에 나도 부하직원 교육 잘 시켰다는 칭찬을 들었다. 그때 나는 어렴풋하게나마 L이 훗날 임원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선배님, 오랜만에 제가 소맥 제조상궁을 하겠습니다”
예전에는 유난히 술자리가 많았고, 으레껏 폭탄주로 끝났다. 아끼던 직장 후배와 함께 옛 추억을 더듬는 분위기가 편안했다. 공기처럼 감싸주던 전 직장은 돌아갈 수 없는 세상이다. 회사 안에 있을 때는 정글 같았는데 이제는 밖에서 어항 속 물고기들이 노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L과 나는 새콤달콤한 추억들을 안주 삼아 대취해버렸다. L은 진즉 혀가 꼬부라졌다.
“선배님, 진짜 승진 비결이 뭐냐믄요, 제가 P 대표님께 기가 막힌 브리핑을 한 날, P 대표님께서 제게 하신 말씀이 있어요. ‘사관학교 신입생도들의 꿈은 전부 별을 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절실한 자만 장군이 된다. 꿈꾸는 데 돈이 드냐?’라고 하셨어요.”
사람 보는 눈은 다 같은 모양이다.
이튿날 L에게서 카톡이 왔다.
‘노벨문학상 타시면 술 한 잔 사주십쇼. 큰 꿈 이루시기를, 김 작가님 파이팅~~^^’
2페이지짜리 수필도 마감 날짜를 못 맞추는 주제가 술김에 별소리를 다 했는갑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인 것 같습니다, 와 ~입니다, 에서 답이 나온 거지요.
요즘 TV에서 인터뷰하는 걸 보면 젊은 사람들의 대답이
대부분 ~같습니다, 답을 해서 화가 나기도.^^
잘 읽었습니다. 글로 만나뵈어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