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읍 신발시리즈 ‘와라지’에 얽힌 사연들
(작성중 : 신발 시리즈 1회)
우리들의 고향 외동읍(外東邑)에는 ‘와라지’라는 신발이 있었다. ‘와라지’는 한자로 ‘草鞋(초혜)’라고 쓰는데, 우리나라 사람, 특히 경상도사람들은 이를 경상도사투리로 알고 있지만, 우리말이 아니고 일본말이다.
‘와라지’는 일본인(日本人)들의 전통 짚신을 일컫는 말로 일본어(日本語) ‘히라가나’로 ‘わらじ’라고 쓴다. ‘와라지’가 경상도 사투리로 와전되어 있는 것은 다른 어느 파일에서 설명 드린 대로 일제 때부터 대다수의 일본(日本) 말이 경상도에서부터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와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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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도 비행기(飛行機)도 없던 시절, ‘와라지’를 신은 왜놈들이 부산(釜山)과 울산 등 경상도(慶尙道) 해변으로 먼저 들어왔고, 그 ‘와라지’라는 말을 경상도 사람들이 제일 먼저 사용했기 때문에 ‘와라지’가 경상도 사투리로 인식(認識)되어 버린 것이다.
“고무신은 핵고 갈 때 신꼬, 집에 오머 ‘와라지’로 가라 신어라”라는 용례(用例)가 있다. “고무신은 학교 갈 때 신고, 집에 오면, ‘와라지’로 갈아 신어라”라는 뜻이다.
‘와라지’는 일본(日本)의 전통 짚신으로 ‘조리’와 혼동(混同)되기 쉽지만 모양이 약간 다르다. ‘와라지’는 발목을 둘러 묶는 형태이기 때문에 ‘조리’보다 발에 밀착되어, 산행(山行)이나 장거리 보행(步行)에 알맞아 예전에는 여행의 필수품이었다. 전통적(傳統的)으로 발가락이 약간 튀어나오게 신는다.
산행용 와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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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승려(僧侶)들이 가끔 신는데, ‘와라지’와 비슷한 형태의 백제시대(百濟時代) 짚신이 1995년 부여군 궁남지에서 발견된바 있어 일본의 ‘와라지’가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역사적(歷史的)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植民地)가 되면서부터는 일본인들의 짚신인 ‘와라지(わらじ)’가 거꾸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이때 ‘조리(草履 ; ぞうり)’라는 것도 같이 들어왔다.
조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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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말하는 ‘조리’는 짚으로 만든 ‘와라조리(藁草履 ; わらぞうり)’를 말하는데, 이 말도 경상도(慶尙道)에서는 경상도사투리로 분류하고 있다. ‘조리’는 짚으로 삼은 ‘샌들’을 말하는데, 네 날 박이 바닥에다 ‘ㅅ’자 형으로 끈을 꿰어 만든다.
“신이라 캐야 그 때너 ‘개다’ 아이머 집(경상도 사람들은 ‘짚’이라는 발음이 되지 않아 ‘집’이라고 했었다)으로 삼아가 신넌 ‘조리’지, 우짜다가 고무신이나 ‘와신또’가 생게따 카머 그기 딸글까바 기양 들고 댕길 때가 만었따”라는 용례가 있다.
와라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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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라 해야 그 때는 ‘개다’ 아니면, 짚으로 삼아서 신는 ‘조리’지, 어쩌다가 고무신이나 운동화(運動靴)가 생겼다 하면, 그 것이 닳을까봐 그냥 들고 다닐 때가 많았다”라는 뜻이다.
일본어(日本語)인 ‘ぞうり(조우리)’는 우리말 독음(讀音)으로 ‘조우리’ 또는 ‘조오리’라고 하는데, 여기에서는 그동안 우리들의 입에 익은 ‘조오리’라 부르기로 한다.
지금의 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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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오리’는 짚·골풀·죽순껍질 등으로 엮은 바닥이 평평하고 ‘개다’와 같은 끈을 단 일본(日本) 신발을 말하는데, 짚으로 엮은 것을 특별히 ‘와라조리(わらぞうり)’라고 한다. ‘와라(わら)’는 ‘짚’이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와라조리’란 ‘와라지’와 비슷하게 생긴 것으로 짚으로 만든 ‘조리’라는 뜻이며, 일본의 짚신 중에서 가장 원형(原型)에 가까운 것이다.
와라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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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슬리퍼’나 ‘샌달’ 비슷하게 생긴 것으로 신고 벗기에 아주 편리(便利)한 짚신이었고, 특히 뒤쪽에 아무것도 걸리적거리는 것이 없어 짚신이나 ‘와라지’ 같이 발뒷굽을 갉아먹는 일이 없어 그만큼 편했다.
그러나 뜀박질을 하거나 길이 나쁠 경우 잘 벗어지는 단점(短點)이 있었다. 필자도 어릴 적에 아버지께서 삼아 주신 ‘와라조리’를 신어 본 일이 있는데, 여름이라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시원하고 편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와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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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라조리’를 삼아 처음 신을 때는 첫째 발가락과 둘째 발가락 사이에 끼우는 ‘총’이 너무 거칠어 발가락 사이에 상처(傷處)가 나기도 했고, 이 때문에 다리를 절룩거리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개다’는 일본인(日本人)들이 신는 ‘나막신’으로 일제(日帝) 강점기에 우리나라에 전해져 많이 신던 나무신발이다. 일본어(日本語)로는 ‘게타’라고 한다.
언급한 ‘나막신’은 비가 온 진땅에서 신는 나무로 만든 신으로 처음에는 목혜(木鞋)·목극(木屐)·각색(脚濇) 등으로 통칭되었는데, ‘나막신’은 ‘나무신’이 잘못 전해진 말이다.
우리나라 ‘미투리’와 일본의 ‘와라조리’
우리나라 ‘미투리’ |
일본의 ‘와라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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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게타(下馱)’와 비슷한 초기의 ‘나막신’은 나뭇바닥에 끈을 매어 신고 다녔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나막신’은 보통 오리나무나 소나무를 파서 ‘신’과 ‘굽’을 만들었다.
삼국시대(三國時代) 때부터 전래되던 일본의 ‘게타’형 ‘나막신’이 고무신 같이 만든 모형으로 변화된 것이다. 이에 관한 사항은 ‘나막신’ 파일에서 구체적(具體的)으로 소개드리기로 한다.
어쨌드 ‘나막신’은 남자용은 거칠었고 여자용은 무늬를 넣어 맵시 있게 만들었다. 또 마모(磨耗)를 방지하기 위해 ‘굽’ 끝에 ‘쇠발’을 달았다.
‘나막신’은 신분과 남녀노소(男女老少)를 가릴 것 없이 모두 신다가 1910년 이후 고무신이 등장하자, 차츰 쇠퇴하여 1940년대를 전후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삿갓 쓰고 나막신 신은 ‘추사’ 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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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는 1840년 10월 제주도에 유배되어 1848년 12월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위의 그림은 ‘추사’가 유배된 제주도에까지 여러 차례 찾아와 글과 그림과 학문을 배운 남농화의 대가 ‘소치’ ‘허련’이 그린 유배시절 ‘추사’의 모습을 그린 ‘완당선생 해천일립상(海天一笠像)’이다. 병조참판까지 올랐고 최고의 문장이요 필치로 자부했던 꼿꼿한 ‘추사’가 삿갓(笠) 하나(一) 쓰고 나막신을 신은 차림이지만, 소탈한 모습에 얼굴은 그지없이 인자하고 편안해 보인다)
본론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와라지(わらじ)’와 ‘와라조리(わらぞうり)’의 생김새가 그게 그것 같기도 하여 특별히 이 둘을 구별하지 않고 통틀어서 ‘와라지’라 부르기도 했었다.
어쨌든 일제(日帝) 때 우리나라에 들어 온 일본 짚신에는 두 종류가 있었는데, ‘와라지’와 ‘조오리(草履 ; ぞうり)’가 그것들이다. ‘와라지’는 우리의 짚신과 비슷했고, ‘조오리’는 ‘개다’처럼 끈을 발가락 사이에 끼워 신도록 되어 있었다.
조 오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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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들 일본(日本) 짚신들은 우리의 짚신처럼 ‘총’과 ‘뒤축’과 ‘갱기’가 뚜렷한 것이 아니어서 신으면 발에 잘 붙지 않고 착용감(着用感)이 떨어졌다. 한마디로 우리 짚신은 신는다고 한다면, 일본(日本)의 것은 걸치거나 끄는 것이라고 해야 옳다.
앞서 기술한 대로 일본의 ‘와라지’는 6~7세기경 우리나라 백제인(百濟人)들이 신었던 짚신에서 유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백제의 짚신과 일본의 와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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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짚신은 충남 부여 궁남지에서 출토된 것이다, 아래쪽은 와라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최근 2년 동안 충남(忠南) 부여 궁남지 유적과 관북리 백제유적에서 출토된 64점의 백제시대(百濟時代) 짚신을 조사하여 ‘백제의 짚신’이라는 책을 발간하고 이같이 밝혔다.
여기에서 발견된 짚신은 사비시대(서기 538~660년)에 만들어진 것으로 날줄과 씨줄이 매우 가늘고 섬세(纖細)한 것이 특징이다.
와라지 착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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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에 의하면 신발 바닥만 있는 구조, 앞총(짚신 맨 앞쪽으로 굵게 박은 낱낱의 울)이 없는 점, 돌기총(짚신 허리 양쪽에 박은 울)이 짧다는 점 등에서 백제(百濟)와 일본의 짚신 ‘와라지’의 형태가 매우 유사(類似)하다고 분석되고 있다.
그리고 최근 국립부여박물관(國立夫餘博物館)이 발굴한 판자형 ‘나막신’도 일본의 ‘게타’와 흡사한 것으로 볼 때 백제(百濟)의 짚신과 나막신 등 신발 제작기술이 일본으로 전해진 것으로 봐야 한다는 설명이 정립되고 있다.
나막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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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추정(推定)의 근거로는 일본(日本)에서 서기 701년 제정한 고대법전인 대보율령(大寶律令)에 왕이 하사하는 화(靴 ; 목이 긴 신발), 이(履 ; 관리의 예복용 신발), 안(鞍 ; 말안장)을 백제출신 장인들이 제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중 ‘이(履)’에는 초리(草履), 즉 짚신이 포함되어 있다.
필자들도 어릴 때는 ‘와라조리(藁草履)’를 자주 신었다. 학교에 갈 때는 검정고무신을 신고 갔다가, 집에 돌아오면 고무신은 깨끗하게 씻어 굴뚝 벽에 엎어놓고 선친(先親)께서 만들어 주신 ‘와라조리’로 바꾸어 신곤 했었다.
와라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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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기 어렵겠지만, 우리나라 국군(國軍)의 전신인 국방경비대(國防警備隊) 창설당시의 병사(兵士)들도 ‘와라지’를 신고 훈련을 받았다.
그 연유와 사정을 알아본다. 그 당시 국방경비대에 자원하여 모집(募集)된 병사들의 몰골은 사실상 말이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엽전군대’였다.
국방경비대 훈련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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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들은 일본군이 버리고 간 '일본도'를 갖고 있다)
운동화(運動靴)와 고무신을 신고 온 병사는 그래도 고급이고, 짚신을 신고 온 병사, ‘지카다비(발가락이 갈라진 일본인의 신발)’를 신고 온 청년들도 있었다.
물론 일본군 출신 장교(將校)들로 구성된 지휘관들은 미 군정당국이 제공한 비까번쩍한 미제 군복과 군화를 착용하고 있었다.
일본의 ‘지카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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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국방경비대(國防警備隊) 창설에 참여한 일본군(日本軍) 출신 조선인 원로 장교들은 대부분 일본육군사관학교(日本陸軍士官學校)를 1914년과 1915년에 졸업하고 임관(任官)한 제26기생과 제27기생들이었다.
그리고 당시의 국방경비대 주요지휘관 역시 일본육사 출신과 일제의 괴뢰국(傀儡國)이었던 만주국의 만주군관학교(滿洲軍官學校) 출신들이 독식하고 있었다. 당시의 지휘관들을 소개한다.
직 책 |
이 름 |
전직 또는 출신 |
총 사 령 관 |
원용덕 |
만주군 군의(軍醫) 중좌 |
제 1 연 대 장 |
채병덕 |
일본 육사 49기 |
제 2 연 대 장 |
이형근 |
일본 육사 56기 |
제 4 연대장 겸
총 참 모 장 |
정일권 |
만주 군관 학교 |
제 5 연 대 장 |
백선엽 |
만주 군관 학교 |
(표에 기재된 만주군의학교(滿洲軍醫學校)나 만주군관학교는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여 세운 괴뢰정권인 만주국(滿洲國)에서 일본군에 의해 세워진 군관학교로 일제의 천황 (天皇) 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한 군사 훈련기관이었다)
미제 군복차림의 일본군 출신 국방경비대 장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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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 당국이 조국(祖國)의 독립을 위해 생명과 재산을 바친 광복군(光復軍) 출신들은 철저히 배제하고, 일본 천황(天皇)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독립군(獨立軍)을 소탕하던 일본군 출신들을 대한민국 국군의 지도부로 만든 것이다.
그건 그렇고, 당시의 국방경비대(國防警備隊)에 입대하려면 먼저 1개월간의 가훈련(假訓練)을 받아야 했는데, 최초의 국방경비대는 1945년 겨울부터 모병(募兵)이 시작되고, 혹한기(酷寒期)에 가훈련(假訓練)이 시작되었다.
일본군 출신 경비대 지휘관들이 충성을 맹세하던 당시의 일본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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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때 지원한 지원병(志願兵)들은 거의가 남의 집 머슴살이를 했거나, 오갈 데 없었던 실직자들이었다. 일본군 출신들은 모두 장교가 되었고, 그 일본군(日本軍)으로부터 탄압 받던 우리나라 무지렁이들은 졸병이 된 것이다.
제대로 된 막사(幕舍)도 없던 시절, 매서운 강추위가 계속돼 한 곳에 조금만 서 있어도 그대로 동태가 될 지경이었다. 그래서 병사들은 틈만 나면 구보(矩步)를 하였다.
와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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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관(敎官)들이 한 두 시간 가르쳐 준 군가로 ‘무궁화꽃 향기 높은 대동 대륙에’로 시작하는 2연대가(二聯隊歌)나,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 혈관에 파도치는 애국의 깃발’로 시작되는 용진가(勇進歌) 따위를 부르며 뛰고 또 뛰었다. 용진가의 가사를 소개한다.
용진가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
한 손에 총을 들고 한 손에 사랑
넓고 넓은 사나이 마음
생사도 다 버리고 공명도 없다
보아라 휘날리는 태극 깃발을
천지를 진동하는 승리의 함성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
혈관에 파동 치는 애국의 깃발
넓고 넓은 사나이 마음
청춘도 다 바치고 미련도 없다
보아라 우리들의 힘찬 맥박을
가슴에 울리는 독립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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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라지 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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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보니 단 사흘이 못가 고무신과 짚신은 너덜너덜 밑창이 다 떨어져 나가고 헤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신발이 없으니 다른 것을 지급(支給)할 수도 없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일본인(日本人)들의 ‘와라지’였다. 당시 경비대(警備隊)에 지원한 청년들 중 많은 수가 머슴들이나 농부출신들이라 ‘와라지’를 삼을 줄 알았기 때문에 만드는 일은 간단했다.
와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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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兵士)들은 휴식시간(休息時間)이면 수확을 끝낸 논으로 들어가 볏짚을 주워다가 ‘와라지’를 만들어 신거나, 새끼줄을 꼬아 밑창이 닳아 없어진 신발을 발등에 칭칭 감아 묶고 뛰었다.
양말이 있을 리도 없었다. 동상(凍傷)에 걸린 병사들이 속출(續出)했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처지도 못 됐다. 군대는 으레 그러려니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초기의 국군이었고, 일본인들의 짚신 ‘와라지’가 대한민국 국군의 군화(軍靴)노릇을 했던 시절이었다.
‘와라지’ 신은 국방경비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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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국군(國軍)이 일률적으로 군화를 신게 된 것은 해방과 함께 일본군이 물러가면서 두고 간 일본군의 군복과 군화를 미군정(美軍政) 당국이 보급(補給)하면서부터였다.
일본군의 군화 즉, ‘편상화(編上靴)’가 지급되면서 그때까지 신고 있던 짚신이며 ‘와라지’를 벗어버린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편상화(編上靴)’란 높이가 발목에 닿는 돼지가죽으로 만든 군화를 말하는데, 일본어로는 ‘핸조까’라고 했고, 북한에서는 ‘목달이 구두’라고 했다.
핸조까
‘중(僧侶)이 미우면 가사(袈裟)도 밉다’고 하지만, 일본이 미우면 일본 군화도 함께 미워해야 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너무나 발 고생을 많이 한 탓도 있었겠지만, 우리 민족 가슴 저변에 깔린 사대주의(事大主義) 근성 때문이었다.
한때는 두려움과 굴복(屈伏)의 상징이었던 일본군화(日本軍靴)가 우리 생활 속으로 수용되는 계기를 해방(解放)이란 역사적 전환점(轉換點)이 자연스럽게 마련해준 탓이기도 했다.
와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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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일본군(日本軍)의 군화 ‘핸조까’는 해방과 함께 우리들의 일상 속으로 녹아 들어왔다. 대도시의 경우 국민학교(國民學校) 상급생 중에서도 부유층 자녀들은 ‘핸조까’를 신고 다닐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便乘)하여 그 당시에는 일본군화에 대한 적극적인 저항도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일본군화를 결코 용서와 관용(寬容)으로 수용한 것도 아니었다. 그럴 겨를도 없었다.
삼 ‘와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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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여만 명의 일본인들이 도망쳐 나간 한반도에 다른 군화를 신은 군대들이 곧바로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미제(美製)와 소련제(蘇聯製) 군화를 신은 외국군대의 진입을 멍하니 서서 지켜봐야 하는 서글픈 운명의 길에 내몰린 것이다.
지난 1950년대 초에는 초등학교 여자어린이들이 ‘오자미’ 놀이를 하면서 부른 노래에 ‘와라지(草鞋 ; わらじ)’라는 말이 들어간 노래가 있었다.
오자미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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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당시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우리나라 학생들에게 가르친 일본 문부성(文部省)이 만든 ‘소학교 창가’였다. 원문가사와 독음, 우리말 가사는 다음과 같다.
원문 가사 |
독음 |
우리말
가사 |
柴刈り縄ない草鞋(わらじ)をつくり
親の手助(す)け弟(おとと)を世話し
兄弟仲よく孝行つくす
手本は二宮金次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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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까리 /나와나이 /와라지오 /쓰(쯔)꾸리
오야노 /데다스께 /오도또오 /세와시
교오다이 /나까요꾸 /고오꼬오 /쓰(쯔)꾸수
데혼와 /니노미야 /긴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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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를 깎아서 새끼(를) 꼬아 짚신을 만들어
부모를 거들고 남동생을 돌보고(와)
형제간 사이좋게 효행을 다하는 표본은 니노미야 긴지로(にのみや きんじろ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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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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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라지’ 얘기로 돌아간다. ‘와라지’는 짚으로 짠 받침대의 발가락 부분에서 엮은 긴 끈을 받침대 좌우와 발뒤꿈치 부분에 붙은 고리에 걸고 다시 발목에 감아 고정(固定)시킨다.
가벼워 활동적(活動的)이고 싸게 구입할 수 있었던 까닭에 일제(日帝) 때는 토목작업부(土木作業夫)나 서민들이 여행할 때 주로 이용하였다.
‘조리’ 차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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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라지’라는 말은 또 일본인들이 우리 민족을 천시(賤視)하는 말로 사용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예로부터 자기 나라에서도 천민(賤民)을 폄하하여 이를 때 ‘와라지’라는 말을 사용했었다.
그런데 이 말이 일제(日帝) 때에 이르러서는 일본인들이 짚신을 신고 있던 우리나라 사람들을 비하(卑下)해서 부른 이름으로 변해버린다. 그 내력과 사연을 알아본다.
‘조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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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日本)은 명치유신(明治維新) 이후 단발령을 내리고, 모든 국민에게 양복을 입게 하고 구두를 신게 했다. 그러나 경제력이 약한 천민(賤民)들은 이에 따라갈 수가 없어 그대로 ‘와라지’를 신었다.
그래서 부유층(富裕層) 일본인들은 이들을 ‘와라지’라며 천시(賤視)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나라를 무력으로 병합(倂合)한 일본인들은 짚신을 신고 꾀죄죄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고도 ‘와라지’라며 비양거리곤 했었다. 천한 민족(民族)이라는 뜻이다.
‘조리’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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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뿐이 아니었다. ‘와라지’는 해방(解放)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을 스스로 비하해서 부르는 자조적(自嘲的) 용어로 변질되기도 했었다. 그 사연을 알아본다.
일본제국주의자(日本帝國主義者)들이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世界大戰)이 종식된 후 이상하게도 패전국(敗戰國)인 일본경제는 놀랍게도 소생(蘇生)하여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조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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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美國)이 무제한으로 퍼다 줬고, 약아빠진 일본은 저들 때문에 발발한 한반도의 6·25동란을 통해 경제적(經濟的) 이득을 철저히 챙겼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상태였던 대만(臺灣)도 1950년대 말기에 가서는 스스로 미국(美國)의 원조를 중단하고, 자립경제(自立經濟) 단계에 이르렀다.
'조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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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는 북한(北韓)의 경제사정도 우리보다 앞섰다. 소련과 중국의 원조에 협동농장 운영과 천리마운동(千里馬運動)이 한 몫 했었고, 일제에 충성하던 썩은 관리들을 철저히 숙청하여 나름대로 청렴한 행정집행(行政執行)이 이루어지게 한 결과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경제(經濟)는 날이 갈수록 나빠지기만 했다. 미국과 유엔의 대량 원조(援助)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천리마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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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사대주의(事大主義) 근성을 모르던 미군정(美軍政) 당국과 스스로 독립투사(獨立鬪士)라고 자처하던 이승만 대통령이 일제(日帝)에 충성하던 일제출신 관리들을 신생 대한민국(大韓民國)의 관리로 그대로 임용하여 모조리 훔치고 착복(着服)하게 했고, 나랏일을 아무렇게나 하도록 내버려 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만 상태가 이렇게 되고 보니 그때부터 힘없는 우리나라 일반국민들은 완전히 용기(勇氣)를 잃고, 스스로를 비하(卑下)하기 시작했다.
“엽전(葉錢)이 별수 있간디”, “와라지 주제에 무엇을 할 수 있다꼬”, “우리 그튼 ‘와라지’ 팔짜에 무신 생광시러분 일이 있겠노”라는 자조적(自嘲的)인 말이 유행하게 된 것이다.
“‘달러’ 세상이 됐는데 ‘엽전(葉錢)’으로 무슨 힘이 있겠느냐”는 뜻이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모두 구두를 신고 다니는데, 우리는 아직까지 ‘짚신’이나 신어야 하느냐”, “우리 같은 천한 팔자에 무슨 영광(榮光)스러운 일이 있을 것이냐”라는 뜻이다.
쪽바리 일본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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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이때 우리 국민들의 사기는 패잔병(敗殘兵)의 심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연합국(聯合國)이 치른 전쟁이지만, 어쨌든 침략군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한 승전국(勝戰國) 국민인데 어쩌다 패전국타령을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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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앞에서 언급한 ‘조리(草履 ; ぞうり)’의 개요와 용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본다. ‘조리’는 굽이 낮은 ‘샌들’ 모양으로 정장이나 외출복(外出服)과 함께 신는다.
조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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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의 형태(形態)는 ‘게타’와 비슷하지만, 용도(用度)에 따라 10여 종류가 있으며, 짚, 골풀, 섬유(纖維), 가죽 등의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하여 만든다.
‘조리’의 모양은 우리가 해수욕장(海水浴場)이나 풀장에서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에 끼고 신는 슬리퍼와 같은 모양이다.
‘와라지’ 신은 왜놈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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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라지 신은 왜놈들이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침공하자 무능한
이 나라의 군왕은 의주까지 꽁무니를 빼야 했다. ‘왜놈’이 가진
조총은 태국 (타일랜드)에서 만들어 왜놈들에게 수출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에서의 ‘조리’는 짚으로 만든 것도 있기는 하지만, 요즘은 가죽이나 천으로 만든 것이 주종(主從)을 이루는데, 수제(手製) ‘조리’는 우리 돈으로 3만원 정도에 거래되기도 한다.
일본에서는 요즘 학교나 직장에서도 실내화(室內靴)로 ‘조리’를 신도록 추진하고 있다. 개인의 발 건강을 위해 고안(考案)된 시도라 할 수 있다.
조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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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는 또 앞서 말한 대로 일본(日本)의 전통 신발인 ‘와라지’가 한층 더 개량(改良)된 것이다. 오늘날 널리 사용되는 ‘비치 샌들’의 원형(元型)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중세(中世) 일본에서는 발바닥 절반정도 밖에 없는 ‘아시나카’가 무사(武士)들에 의해 만들어져 전쟁터에서 사용되었다고 한다.
'와라지'와 '조리'용 양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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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아시나카’는 농사일을 하는 일반인(一般人)들에게 보급되었고, 에도시대(江戶時代, 17~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성(城)안에 짚신 장인이 나타날 정도로 짚신의 종류도 다양하게 늘어났다.
그 중에 대나무 껍질로 짠 짚신의 뒷 굽에 가죽을 대고 쇳조각을 댄 ‘셋타(雪馱)’는 당시의 대표적(代表的)인 짚신 중의 하나였다. 그 밖에도 모양에 신경을 쓴 화려한 짚신도 많이 만들어졌다.
아시나카
일본의 나고야 지방 음식점(飮食店)에서는 우리말로 ‘짚신’을 의미하는 ‘와라지 까츠’가 있는데, 우리나라의 ‘왕돈까스’ 정도 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두께가 매우 두툼하기 때문에 식사량(食事量)이 많지 않다면, 혼자서 ‘와라지 까츠’ 하나를 다 먹기에는 무리라고 한다.
‘셋타(雪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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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라지 까츠’ 정식(正食)은 1,575엔이다. 바삭하게 튀긴 ‘와라지 까츠’에 시원한 맥주 한 잔 곁들이면 일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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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주제(主題)와는 다소 거리가 있기는 하나,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인(日本人)들을 ‘쪽발’ 또는 ‘쪽바리’라고 부르게 된 동기를 잠시 설명하고자 한다. 이 용어가 ‘와라지’와 ‘조리’에 연관(聯關)되기 때문이다. 사연을 살펴본다.
향우님들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일본(日本)의 전통신발에는 ‘조리’와 ‘게다’라는 신발이 있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 드린 바와 같다. ‘조리’는 원래 짚으로 엮어 만든 신발이었으나, 최근에는 가죽이나 여러 가지 재료로 만들어서 ‘기모노’를 입을 때 신는다.
족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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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신발을 신는 방법은 ‘슬리퍼’를 신는 것과 비슷한데, 앞쪽 가운데 부분에 ‘하나오(はなお)’라고 불리는 끈이 있어서 그 끈을 두 번째 발가락과 세 번째 발가락 사이에 끼워서 고정(固定)하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일본의 전통 버선인 ‘다비(たび)’를 신고, ‘조리’의 ‘하나오’에 맞춰 발가락을 끼워 신으면, 두 번째 발가락과 세 번째 발가락 사이에 끈을 끼니까 발이 쪼개진 것처럼 보이는데, 마치 길짐승의 ‘발굽’, 즉 ‘족발’같이 보이기도 한다.
기모노와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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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일본인(日本人)들이 우리나라에 보급한 ‘지까다비(じかたび)’는 발가락을 두 부분으로 분리하여 착용(着用)하도록 되어 있어 영락없는 돼지 ‘족발’ 모양으로 보인다.
그래서 저들에게 압제를 받고 살던 조선인(朝鮮人)들은 일본인들을 폄하(貶下)하는 말로 ‘쪽발’ 또는 ‘쪽바리’라는 별명을 붙인 것이다. ‘족발’이 ‘쪽발’ 또는 ‘쪽바리’로 발음이 변한 것이다.
일본인들의 양말 ‘다비’
오늘의 배경음악은 신발(비단구두)에 얽힌 최순애가 작사하고, 박태준이 작곡하여 김치경이 부른 동요 ‘오빠생각’을 게재하여 음미하기로 한다. 오늘은 경음악(輕音樂)으로 들어본다.
오빠 생각
작사 : 최순애
작곡 : 박태준
노래 : 김치경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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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들의 ‘지까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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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파일에서 얘기한바 있지만, 동요 ‘오빠생각’을 좀 더 얘기한다. 회원여러분도 그렇겠지만, 우리나라 사람치고 이 동시(童詩)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도 언니와 누나도 형과 동생들도 우리 모두 이 노래를 부르면서 고향(故鄕)을 그리워하고 가족을 그리워하며, 헤어진 우리의 형제자매(兄弟姉妹)들을 그리워했었다.
고향마을 고갯마루에서 오빠를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든 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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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국민가요(國民歌謠) 수준에 이른 이 동시(童詩)를 노래한 가수(歌手)만 해도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이 동시가 12살 소녀에 의해 씌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1925년 12살 난 소녀 최순애는 <오빠 생각〉으로 방정환이 발간하던 잡지《어린이》의 동시(童詩)란에 입선 했고, 그 다음 해 16세 소년 이원수는 〈고향의 봄〉으로 입선(入選)했다.
‘오빠생각’ 최순애와 ‘고향의 봄’ 이원수 부부의 노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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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런 사연으로 수원(水原)에서 살던 최순애 소녀와 마산(馬山)에서 살던 이원수 소년은 1936년 6월 부부가 되었다.〈오빠 생각〉과 〈고향의 봄〉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 졌다.
여기에서 잠시 우리들이 그 시절의 ‘누이’가 되어 ‘오빠생각’을 다시 한 번 곰씹어보자. 뜸북새, 뻐꾹새 울 때 떠난 ‘오빠’는 기러기와 귀뚜라미가 우는 가을이 와도 돌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오빠를 그리워하는 누이의 마음속에는 어릴 적 우리 모두들의 마음이 깃들어 있음을 본다.
서울 가신 오빠는 언제나 오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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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정서(情緖) 세계에서 ‘오빠’란 단어는 단순히 손위의 ‘오라비’만을 지칭하는 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라비’와 누이사이의 애틋한 정을 담고 있는 우리의 정서적(情緖的) 감정이 녹아든 가족혼(家族魂)이 깃든 영혼(靈魂)의 부름이요 호칭이다.
동시(童詩)에서 오빠를 기다리는 누이는 뜸북새, 뻐꾹새, 그리고 기러기, 귀뚜라미 소리를 통해서 그 마음을 속속들이 나타내고 있어 우리의 가슴을 더욱 뭉클하게 만든다.
오늘도 산마루에 나가 오빠를 기다리는 그 시절 우리 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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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반주음악이기는 하지만, 음악(音樂)에 잠시 귀를 기울여 보자. 어느 듯 그 시절 뻐꾹새 소리와 귀뚜라미 소리는 들리지 않고, 서울 가신 ‘오빠’의 마음만 정답고 따뜻하게 느껴진다.
예쁜 누이동생 시려 떨던 그 발에 신겨 주려고 ‘비단구두’ 한 켤레 사서 품에 안고, 어두운 밤길 어디선가를 달려오는 그 ‘오빠’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목매어 ‘오빠’를 부르던 그 시절 그 소녀의 마음이 지금 우리들의 귀에 그대로 들리는 듯도 하다.
그러나 그때의 그 소녀들은 거의가 오빠의 ‘비단구두’를 끝내 신어보지 못했다. 서울로 유학(留學) 간다던 오빠들이 항일전선(抗日戰線)에서 순국하여 영원히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놈들과 전투를 벌이는 그 시절 그 ‘오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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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누이들 또한 모두가 ‘불령선인(不逞鮮人)’의 멍에를 메고,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인고(忍苦)의 세월을 살다가 ‘비단구두’ 대신 삼베로 만든 ‘베신’을 신고, 그 오빠들의 뒤를 따라 영겁(永劫)의 세계로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불령선인(不逞鮮人)은 일본말로 ’ふていせんじん(후테이센진)’이라는 말로 일제가 그들의 식민지통치에 반대하는 조선인(朝鮮人)을 ‘불온하고 불량한 인물’로 지칭한 용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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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으로 가슴 저미는 애잔한 내용입니다. 와라지를 신지는 않았지만...보기는 했고요....고무신 신고도 발 씨러워 죽을뻔 했는데...와라지야 말할거 뭐 있겠습니까....정말 감동적인 내용입니다.
아주 생각이 많이 나네요
저는 어릴 때 죽어도 못 신는다고 버티었지요
웬지 발가락이 아파 못 견디겠는 걸
지금 생각하면 늦게 아들을 낳아서 없는 살림에도
포시랍게 컸던 탓이기도 하네요
그런 탓에 아버님을 일찍 여의고 가진 고생을 다 했지요
오랜 기억을 되살려 주시어 고맙습니다
건안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