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당전쟁1 - 신라군과 고구려 부흥군 압록강을 건너 만주를 기습 공격하다!
669년 토번과 당군이 충돌하니... 평양 안동도호부의 설인귀가 군대를 거느리고 급히 티베트
국경으로 달려가는지라 기회를 잡은 신라는 670년 3월 사찬 설오유(薛烏儒) 신라군 1만과
고구려 부흥세력 고연무(高延武) 1만 합계 2만은 압록강을 건너 요동의 오골성을 기습합니다.
김춘추와 당태종은 고구려는 당이 차지하고 백제는 신라가 차지하기로 약조했지만 당 고종은 백제땅
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유인궤에 이어 부여융을 도독으로 임명하니, 신라는 부여융과 취리산
회맹등의 분함을 참고 견디다가.... 마침내 토번과 당이 충돌하는 것으로 기회로 백제 땅을 취하기
위한 양동작전으로 당의 시선을 고구려 옛 땅으로 돌리기 위해 2만명을 기습에 나서도록 한 것입니다.
역사를 배우면서 비굴하게 이민족인 외세를 동원해 동족을 멸하고 반쪽짜리 통일에 그친 신라가 아닌
고구려가 3국을 통일했더라면..... 저 광활한 만주 벌판이 우리땅으로 남았을 것이고, 그럼 한국은
동북아는 물론이고 세계에서 G7에 들어가는 강대국이 되었을 것인데 라며 안타깝게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순을 넘기면서 다시 생각하니 660년 이후에 백제는 당나라의 내번국이 되고,
신라는 외번국이 되어 중국의 속국으로 떨어졌을 수도 있었는데..... 감연히 떨쳐
일어나 당나라와 싸워 비록 국경선이 황해도와 원산만으로 쪼그라 들었을지언정
나라의 독립을 유지했다는 점에서 신라인들에게 고마움과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고구려가 성장한 계기는 314년에 미천왕이 낙랑을 손에 넣었기 때문인데, 중국에서 수백년간 낙랑군 태수
를 임명하다가 “진(晉)이 8왕의 난” 내란으로 쑥대밭이 되고 304년 진(晉)나라가 흉노족에게 멸망하자,
중국과 연결이 끊어져 끈 떨어진 연(鳶) 신세로 태수 조차 임명되지 못하니 고립되고 무역통로 마저
닫히니 외로운 처지가 되어 군(郡)으로서 역할을 상실하자 요동에서 온 군벌 장통(張統)의 지배를 받습니다.
중국과 단절된 낙랑군은 더 이상 이어갈수 없는 상태에서 백성들이 망국을 예감하고 달아나니 인구가
급격히 준 가운데 314년 10월 고구려 을불리(미천왕) 왕은 낙랑을 침범해 남녀 2천인(400호)을
사로잡아 가니 낙랑군이 망하는데... 그러니까 고구려군은 낙랑군 군대와 전쟁이나 전투 없이 낙랑을
얻었으니, 1910년(1905년?)에 일본이 조선군(관군)과 전쟁이나 전투 없이 나라를 취한 것과 같습니다!
자치통감에 보면 이때 왕준은 민호 1천여호(5천명)를 이끌고 달아나 요동의 선비족 모용씨(摹容氏)
에게 투항하니.... 모용외는 “요서 지방에 낙랑군” 을 설치해서는 장통을 태수로, 왕준을
참군사로 임명하니 "낙랑군" 은 전연과 후연을 거쳐 북연 까지 요서 지방에서 100여년간 존속합니다.
진(晉)서 지리지에 보면 서기 280년에 낙랑 인구는 3,700호 1만 5천이라고 했는데 30여년만인
314년에는 절반으로 줄어든 것이며, 낙랑군의 전성기인 서기 2년에 인구 40만에 비하면
고구려 미천왕 공격 당시 인구는 무려 98% 가 줄어들어 50분지 1만 남았던 것인데.... 요서에
설치된 낙랑군은 5세기 중엽 북위의 문성문명황후 풍시의 친정어머니는 낙랑왕씨이고 왕정과
왕가의 묘비에 낙랑인 글귀가 보이니 요서땅에서 낙랑이란 정체성은 유지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대방이 망한후 그 지역인 황해도의 지배권을 놓고 고구려와 백제가 대립하였으니 전연에 수도 환도성
(국내성)이 함락되고 5만명 백성이 잡혀간후 세력을 만회하려는 고국원왕이 황해도로 남하했으나
백제 근초고왕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자.... 소수림왕은 저족이 장안에 세운 전진(前秦) 에서 불교를
받아들이고 율령을 반포하며 태학을 설립해 유교를 불교와 같이 통치이념으로 삼아 국력을 기릅니다.
소수림왕이 국력을 기른 덕분에 고구려가 3국을 통일할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으니 광개토대왕은
즉위하자마자 철천지 원수인 백제를 공격하니.... 397년 광개토대왕이 아단성과 미추성등
수십개성을 함락하고 한성을 포위하자, 백제 아신왕은 항복하고 남녀 1,000명과 세포 1,000필을
바치면서 '지금부터 태왕 폐하의 영원한 노객(奴客 노비)이 되겠다(從今以後 永爲奴客)라 했습니다.
또 399년 신라 사신이 말하기를 “나라에는 왜인이 가득하고 성들은 파괴되었으며 노객(奴客 내물왕)
은 천민이 되었으니 왕에 의탁하려 명을 청한다”고 하니... 광개토대왕이 구원을 허락하는데
“400년에 5만 보기(步騎)를 파견하니 남거성에서 신라성에 이르기 까지 왜군이 가득한데 관군이
이르자 왜인이 퇴각하는지라 추격해 임나가라(任那加羅) 종발성(김해 분산성) 에 이르니 항복하였다.”
400년에 김해 금관가야는 사실상 멸망했으니 후퇴하는 왜군을 따라 일본으로 도주한 것으로 보는데
(532년 신라 법흥왕때 이사부의 침공을 받고 항복하는 구형왕은 금관가야 이름을 쓰지만 잔존
세력으로 근거지는 부산 동래의 복천동 고분군?).... 고구려군 5만이 신라와 가야를 장악했으니
"고구려에 의한 한반도 통일" 이 이루어질 순간에 고구려군은 황급히 철수해서 북쪽으로 돌아갑니다.
광개토대왕은 400년 정월에 고구려군 남진 사실을 숨기려고 후연에 정성스레 조공했으나
그 보람도 없이 2월에 후연의 모용희가 3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공격해 신성과 남소성을
함락하고는 고구려인 5천명 포로에다가 700리 땅을 차지하니..... 광개토대왕은 도성에
병력이 없는지라 두 성을 구원하지도 못하고 5만 대군에 황급히 철수를 지시한 것입니다.
오호십육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니 5년전인 395년 화북의 최강국 선비족 후연의 모용수는 태자 모용보
에게 8만을 주어 북위로 진격시키니..... 탁발규는 유인전술로 후퇴하다가 11월 참합피에서 기습해
후연군을 격파하자, 이듬해 모용수는 직접 대군을 이끌고 북위를 정벌하던중 서전에서는 승리했으나
참합피에서 병이 깊어져 죽으니 모용보가 황제에 오르는데 북위는 396년 9월부터 후연으로 진격합니다.
397년 10월 북위에 수도 중산을 뺏긴 후연은 반란까지 일어나자 요하의 용성으로 후퇴하니 영토와
인구가 25% 정도로 쪼그라든채 북위와 대치하던중.... 고구려군이 남진했다는 소식에 세력을
만회하기 위해 고구려를 침략한 것인데, 이후 후연에서 반란으로 황제 모용성이 죽자
광개토대왕은 가야에서 철군해 2년간 휴식한 5만 대군중 일부를 소집해 402년에, 빼앗긴
신성과 남소성은 적의 방비가 굳은지라 그 대신에 우회해서 멀리 후연의 숙군성을 공격합니다.
그러니까 고구려에 의한 3국 통일을 결정적으로 방해한 것은 후연을 세운 선비족이니 우리 민족의 원수
인데..... 선비족(鮮卑族) 모용씨(慕容氏) 전연(前燕)은 342년 고구려를 공격해 수도 환도성(국내성)을
함락시키자 고국원왕은 단기(單騎)로 달아나니 모용황은 궁궐을 불사르고 도성을 파괴한후 미천왕릉
(美川王陵)을 발굴해 시신과 왕모(王母)와 왕비에 도성 백성 전부라고 할수 있는 5만명과 노획한
보물을 끌고가는지라 고구려는 수도를 동황성(東黃城 강계) 으로 옮겼으니 대를 이은 원수들 입니다.
하지만 선비족 전연이 장안에 저족이 세운 전진에게 망한 덕분에 고구려는 다시 일어설수 있었는데....
전진(前秦)의 부견이 383년 비수대전에서 동진(東晋)의 사현에게 참패하지 않았으면 나라를 유지
했을테니 모용수가 후연을 건국할수가 없고, 고구려는 전진과 우호관계를 이용해 가야와 신라를
아우른후 북,동,남 3면에서 백제를 도모했더라면 고구려에 의한 3국 통일이 될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고구려 수도 환도성(국내성)이 함락된게 저게 처음은 아니고 백년 전인 244년 고구려 동천왕은
2만 병력으로 비류수에서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과 대진해 서전에서는 6천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고
추격하다 역습을 당해 대패하니 90%가 죽고 불과 1~2천명만 고구려로 도망쳤는데..... 관구검은 추격해
환도성(국내성)을 점령하니 왕이 낙랑으로 도망치는지라 관구검은 숙신까지 진격해 기공비를 세웠습니다.
소수림왕이 쌓은 국력을 물려받은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침략에 시달리던 백제는 신라는 혼인동맹
맺고는 함께 군사를 내어 북진해 고구려군을 공격했으니 충북 일대와 경기도 및 강원도를
점령하고 신라 진흥왕은 비록 일시적이었지만 함경남도 영흥까지 빼앗았으나 이후 신라가 약속
을 어기고 백제의 몫인 한강 남부를 공격해 빼앗는 불화를 보고서도 고구려는 반격하지 못했습니다.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 두나라가 함께 공격해온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 돌궐과 전쟁중이라 주력이 북만주
에 있었기 때문에 남쪽의 땅들을 빼앗겼으니 남과 북 2곳에서 전쟁을 벌이는게 어려운 것인데, 북위가
397년에 후연의 수도를 점령했음에도 이후 30여년간 후연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못한건 북위 주변에
북량, 남량, 하나라 및 후진이 존재해 많은 병력을 장기간 동쪽에 파병해 주둔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백제의 침공에 시달리던 풍전등화 같은 나라 신라의 김춘추는 고구려에 갔다가 실패하고 이번
에는 왜국에까지 원군을 청하러 갔다가 빈손으로 귀국한후 3번째로 당나라로 갔으니...
당태종과 밀약하기를 “백제는 신라가 차지하고 고구려는 당나라가 차지한다” 고 약속했고
이후 평양을 함께 함락했으나 통일 신라의 국경선은 황해도에서 원산까지라! 이를 어찌하리오!
342년 고국원왕이 전연(前燕)에서 정동대장군 영주자사 낙랑공에 책봉된건 부득이한 일인 반면에 광개토
대왕이 396년 후연(後燕)의 모용보로 부터 "평주목 요동대방이군왕" 에 책봉된건 5호 16국 시대에
후연이 가장 강한 나라인 탓도 있지만, 조부를 죽인 백제를 침략하면서 “후방의 안전” 을 도모하기
위한 것인데.... 전연도 배후인 동쪽 고구려를 제압해야 서쪽의 전진과 싸울수 있는 것과 같은 이유 입니다.
배후에 적국이 있으면 다른 나라와 전쟁하기 어려우니 독일과 소련, 소련과 일본은 불가침조약을 맺었으며
일본의 전국(戰國)시대에 가이국 다케다 신겐과 스루가국 이마가와 요시모토, 사가미국 호조 우지야스
는 원수지간이었으나... 3중 결혼으로 3국 동맹을 체결한후 배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신겐은 북쪽
시나노(나가노) 로, 요시모토는 서쪽 오와리(나고야) 로 우지야스는 동쪽 무사시노(도쿄도) 로 출진했지요?
태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백제왕과 경쟁이라도 하듯 북위에서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중랑장 고구려왕
에 책봉되고 남조인 동진에서 사지절 도독 정동장군 낙랑왕에 책봉된후 다음 왕조인 송나라에서
정동대장군으로 승급되는데.... 이는 한성의 백제를 침략해 멸망시키기 위해 “배후를 안정” 시켜야
하니 불가피한 일이라 봅니다만 이후 영류왕 까지 모든 고구려왕들이 모두 다 중국의 책봉을 받습니다.
666년 연개소문 사후에 대막리지 남생은 동생 남건과 남산에게 평양성을 뺏기고 내란
에서 패해 국내성으로 도주한후 아들을 보내 당나라에 귀순하니.... 계필하력이
군사를 이끌고 대막리지 남생을 맞이했으며 이제 기회가 무르익었는지라 당나라
는 12월에 이적을 요동도행군 대총관에 임명해서 고구려로 침공할 준비를 시작합니다.
667년 9월 이적이 신성에 이르니 신성 사람 사부구는 성주를 묶어 항복했고 이에 주변의 16개
성이 따라서 항복했는데.... 천남건이 신성을 되찾기 위해 군대를 보냈으나 설인귀에게 격파
당했으며, 고간의 군대가 깊숙이 들어오다가 고구려군에게 패했는데 설인귀가 협공해
이 고구려군을 격파하고는 남소성, 목저성, 참암성을 함락시킨후 연남생의 군대와 합세합니다.
당나라 곽대봉의 수군은 서해로 들어와 대동강 하구에 상륙했으며 안시성 아래 주둔한 당군 학처준을
고구려군 3만이 공격했으나 고구려군은 격파되었고.... 668년 1월 당 고종은 유인괘를 부대총관으로
삼아 신라 김인문을 부장으로 함께 파병하니 2월 부여성을 함락한후 주변 40개성에 항복을 권유합니다.
연남건은 부여성을 탈환하기 위해서 5만 대군을 파병했으나 금산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한
설인귀와 연남생의 항복한 고구려 군대를 향도로 거느린 이적은 연합해 고구려군을
격파해 3만을 죽이고 대행성으로 진격하니.... 다른 길로 온 당군과 압록책에서 합세한후
고구려군 패잔병을 200리를 추격해서 욕이성을 함락한후 평양을 한달간 포위하게 됩니다.
9월 보장왕은 연남산과 수령 98명을 성에서 내보내 항복했으나..... 연남건은 저항을 계속
하는데, 남건으로 부터 군사 사무 일체를 위임받은 승려 신성이 배신해 성문을 여니
마침내 평양성은 함락되고 보장왕과 남건 등은 포로로 잡히니.... 80세의 노장 이적은
10월에 수많은 고구려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 귀국해 장안에서 고종에게 전승 보고를 합니다.
12월 당나라 고종은 보장왕은 실권이 없었다면서 사면해 벼슬을 내리고 항복한 연남산은 사재소경,
승려 신승은 은천광록대부에 연남생은 우위대장군 벼슬을 내리고는 연남건은 검주로 유배
보냈으며, 669년 2월 설인귀를 안동도호로 삼아 2만 당군을 거느리고 평양 일대를 진무하게 합니다.
669년 4월 당나라는 평양성등에서 잡은 부유한 고구려인 3만 8천 3백호(23만명)를 강,회 남쪽과
산남등지 빈 땅에 몰아넣었으며 또 3만호(18만명)는 실크로드로 가는 외진 곳인 오르도스에
추방했고, 그 외 일부는 전쟁에서 공을 세운 장수와 병사에게 노비로 주고 또 용병으로
참전한 거란에게도 전리품으로도 주니 30년후 그 일부가 거란의 영주에서 도주해 발해를 세웁니다.
저 강(장강, 양자강), 회(회수) 남쪽에 농노로 가둔 고구려인들 중에 일부는 훗날 안사의 난이나
황소의 난때 혼란을 틈타 남쪽으로 도주해.... 운남과 광서성 등지에 거주하다가 다시 남쪽
으로 달아나니 미얀마와 태국 국경에 거주하는 라후족과 아카족에 이수족이 아닌가 짐작합니다.
당나라가 동쪽 백제와 고구려 전쟁에 몰두하다 보니 그 틈을 노려 변방의 이민족들이 들고
일어나는데.... 660년 서돌궐이 그리고 661년에는 철륵이 반기를 들자 당나라는 662년
에 설인귀를 보내 진압했으나, 세력을 기른 티베트의 토번은 663년 당나라의 속국인
토욕혼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서돌궐은 그 틈을 타서 665년에 기어이 독립을 달성합니다.
당나라는 수당제국의 숙적인 고구려를 멸망시키고는 당태종과 김춘추 사이 약조와는 달리 신라에 주기로
약속했던 백제 영토는 물론 한반도를 집어삼키려(?) 했으니... 결국 나당전쟁이 일어나 요동으로 후퇴
하는데, 고구려 멸망 30년후 고구려 유민 출신 대조영(아버지는 성이 없고 이름은 걸걸중상!)은 거란족
이진충의 반란으로 당군의 공격을 받아 혼란에 빠진 거란땅 영주에서 도망쳐 진국(辰國 발해)을 세웁니다.
당나라는 고구려에 국력을 쏟아부은 결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에 7년간 파병하느라 여진족의 흥기를 막지
못한 것 처럼, 토번과 돌궐이 다시 발호하는 결과를 낳는등 당나라 입장에서도 이득이 적은 전쟁
이었으나 그럼에도 만주의 심각한 안보적 위협은 사라졌다는데서 고구려 정벌은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가 남쪽 신라와 백제를 정복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돌궐 및 중화 제국들과 접경한 북서쪽
지역에 최정예 전력을 항상 주둔시켜야 했기 때문인데... 신라가 진흥왕 시기 함경도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신라의 국력이 급성장하기도 했고 고구려 내정이 엉망이기도 했지만, 그
시기 고구려가 돌궐과의 분쟁으로 인해 서쪽 요동 지역에 모든 군사력을 집중시킨 때문 입니다.
중국인들이 유독 만주를 자신들의 안보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으니 산지가
많아 방어가 쉬우며, 중국 입장에서 정복을 위해선 엄청나게 긴 보급선을 유지시켜야
하는데 그렇다고 정복을 포기하자니 이곳 만주 지방에 터를 잡은 국가들은 언제든지
10만 이상 단위의 정예병들을 중국 침략에 동원할 국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당나라는 고구려 원정에 힘을 너무 쏟아버려서 서쪽의 토번이 커지는 걸 막지 못해 실크로드
가 막힐뻔했으며, 측천무후 시절에는 당태종이 힘써 눌렀던 돌궐과 거란이 부활했고 게다가
점령한 고구려 영토도 관리를 못한 탓에 발해가 성립하는걸 막지 못했으며 요동 지방도
안록산의 난 이후 떨어져 나갔고 토번은 당나라 혼란기 때 침입해 수도 장안을 약탈합니다.
고구려와 당나라는 국력 차이가 너무 크니 당나라는 본토는 위협받지 않는 강대국이기 때문에 외세
의 압력을 덜 받았지만, 고구려는 중원 통일왕조와의 전쟁에서는 병력이 적으니 야전 대신에
성에서 농성전으로 일관해야 했으니... 들판의 곡식을 불태우고 민가에 불을 지르며 우물에
독을 푸는등 고구려 땅의 손실이 심할수 밖에 없었고 결국 점점 피폐해져서 무느지게 된 것입니다.
당나라는 돌궐과 거란등 주변 민족을 정복한 결과 2차 고구려-당 전쟁 부터는 거란족이 당군과
함께 평양성까지 침공해 왔는데.... 고구려가 고립되는 형국이 되면서 당나라군은 겨울에도
고구려 땅에서 전선을 형성하여 장기 주둔(!)을 할수 있었으며, 신라군으로 부터 군량미를
보급받고, 고구려의 가장 불안전한 남부 전선을 신라군으로 하여금 괴롭히는 성과를 올렸습니다.
고구려가 남방에 우군이 없던 시절, 돌궐과 전쟁하는 도중에 한강 유역을 상실했고, 수나라와 싸우는
도중에 신라에게 500리의 땅을 빼앗겼으며 백제와도 교전이 있었으니... 연개소문이 동맹을 맺기
이전까지 백제, 신라 할것 없이 당나라에 고구려 견제를 요구할만큼 양면 전선의 위험은 존재했으니,
백제는 옷칠 갑옷을 진상품으로 보내며 당나라에 고구려를 공격해 달라고 서신을 보낸일도 있었습니다.
고구려 패망의 일차적인 책임은 연개소문의 세 아들에 있겠지만, 권력을 독점하며 세 아들의
후계 구도마저 명확하게 정해놓지 않은 무책임한 연개소문 본인의 실책 역시 매우 크니,
특히 고구려는 가뜩이나 신라와 당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전선이 점점 뒤로 밀리고 남북
양면 전선 끝에 수도 지역에서 공방전을 벌이는 등 국력이 한계에 달하고 있던 시점이었습니다.
신라가 나중에 설치한 9주 5소경만 보더라도 백제나 신라 지역들은 행정구역도 오밀조밀하게 구성
되어 있지만 구 고구려 지역인 한주, 삭주, 명주는 그에 비하면 훨씬 광활하며 중심 도시도 한주
와 삭주의 남쪽 경계선에 각 하나밖에는 없으니 인구도 없고 개발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증거
인데.... 한주의 경우 삼국의 치열한 전쟁터 변방인데다가 한강 하류 유역은 늪지대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나는 예전에 연개소문을 위대한 영웅이라고 생각했으며 30여년 전에 동아일보에 연재된
소설에 개소문이 흑벌무 지보와 함께 활약하는 소설을 손에 땀을 쥐고 읽었는데.... 나이가
들고 보니 생각이 바뀐게 연개소문의 쿠데타가 없었더라면.... 그럼 수나라와 전쟁에서 수군
을 평양성으로 유인해 격파한 왕제 영류왕(건무)은 전쟁의 참상을 뼛속 깊이 알았던 사람입니다.
건무가 영류왕이 된후 욱일승천하던 당나라에 고개를 숙이고 칭신(稱臣)하며 수나라
병사들의 시체로 쌓은 경관을 허물고 심지어는 고구려 강역도(!) 지도를 당나라에
바치면서 바짝 엎드렸으니.... 연개소문의 쿠데타만 없었더라면 당나라는 사방
에 적인데 궂이 동쪽 변방에 머나먼 땅 고구려를 침략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봅니다.
위기때 나라 지도자는 엎드릴 때와 일어설 때를 구분해야 하는 법이니, 당나라가 무섭게 일어설때니
구부리고 칭신하며 조용히 국력을 키우다가.... 훗날 당나라가 안사의 난등 내란이 일어나거나
주변 여러 민족과 충돌하면 그때는 도광양회(韜光養晦), 가면을 벗어 던지고 일어서서 중국을
침략해 화북을 점령해서 중국 한인(漢人)들을 백성으로 삼아 다스릴 기회가 올수도 있었다고 봅니다?
중국은 사실상 4번이나 멸망했으니 몽골족 원나라와 만주족 청나라는 중국 전체를 점령해 다스렸고
흉노, 갈, 선비, 강, 저족등 5호는 낙양과 장안등 화북을 점령해 5호 16국으로 군림하다가 무천진
탁발씨 군벌은 북위에 이어 수나라를 개국했으며, 여진족 금나라는 송나라 황제를 포로로 잡아
하남성의 개봉등 화북 지방을 점령하자 중국인들은 양자강 이남으로 달아나니 남송(南宋) 입니다.
거기다가 거란족 요나라는 연운 16주를 강탈하고 돌궐 처럼 중국 송나라에서 조공을 받았으며, 토번
(티베트)은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약탈하는등 중국 북쪽과 동쪽에 12개 민족 중에 11개 민족이
중국을 정복했는데, 오직 “한국인만 중국을 정복하지 못한 유일한 민족”입니다? 12개 민족
중에 단 하나라..... 한민족만은 어째서 중국을 정복하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3가지 정도로 봅니다?
첫째는 저 11개 민족은 기마민족인데 비해 한(韓)민족은 농경민족이니 전쟁에서 가장
힘든게 "보급" 인데.... 보병은 쌀과 군수물자를 수레에 싣거나 아님 사람이 지게에
지고 가야하니 운반하기도 힘들고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 군량이 떨어진 가운데
적군에게 포위되면 도망칠 수가 없으니 항복하거나 아니면 굶주리다가 몰살당합니다.
기마병은 소를 잡아 끓여 햇볕에 바짝 말린다음 몽둥이로 두드려 가루 수준으로 만든후 자루에 넣는데,
기마병은 1인당 말 5필 정도를 전쟁터로 가져가니 한 마리에는 자루를 싣고 나머지 말 4필을 번갈아
타며 달리는데, 말 한필을 며칠 계속 타면 말이 지쳐서 죽기 때문이며 적진에서 약한 말 한 마리를
잡아 식용으로 쓰고 다 떨어지면 휴대한 솥에 물을 끓여 저 소고기 가루를 한웅큼 타서 마시면 됩니다.
적진 깊숙이 진격해 성채나 강력한 적군을 마주치면 보병은 그냥 싸우는수 밖에 없지만 기병은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도주하는 것이니, 손자병법에 전투는 원하는 시기에,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방식대로 싸워야
한다는데 충실하니... 이틀만 달아나면 점령하기 좋은 곳을 만날수도 있고 적 보병이 추격해오면
일부 기마로 후방의 치중을 습격해서 불을 지른후 적이 굶주리고 피곤하기를 기다려서 격파할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생활방식의 차이인데 농경 정착민족인 한(韓)민족은 모든 물자를 자급자족하는데 비해,
기마민족은 겨울에 눈이 많이내려 가축이 폐사하면 봄에 이웃부락을 습격해 소와 양을 약탈해
보충하는데.... 몇 부락이 합치면 이웃 부족을 습격하고 몇 부족이 합치면 중국을 약탈하는
것이니 이렇게 중국 약탈에 나서기를 반복하다 보면 중국땅에 눌러앉으니 바로 “정복” 입니다.
세 번째는 우린 지도를 그릴 때 북쪽을 윗쪽으로 그리지만 몽골인들은 남쪽을 윗쪽으로 그리는 것이니
항상 풍요로운 중국땅을 응시하는데..... 그들의 꿈은 모든 부족들이 연합하고 민족을 통일해 남쪽
중국을 약탈 또는 정복하는 것이니, 중국의 침략을 받아 굴복할 때 조차도 언젠가는 말을 몰아 중국
을 차지할 꿈을 버리지 않는 반면에 농경정착민족인 한(韓)민족에게는 그런 “꿈” 이 없었다고 여겨집니다.
642년 백제 의자왕이 친정해 신라 서쪽 40여성을 함락시키더니 8월 장군 윤충이 1만
을 이끌고 합천 대야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는데, 사위 대야성주 김품석과 딸
고타소가 목숨을 잃으니 분노한 김춘추는 딸의 원수를 갚기를 원해 643년에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는 사신으로 갔으나 고구려는 김춘추를 붙잡아 가둡니다.
그러자 김유신은 죽을 각오로 1만 군사를 이끌고 북진하니 신라군 움직임을 감지한 보장왕이 김춘추
를 풀어주었으며, 644년에는 백제에 잃어버린 7개성을 수복했고 647년에는 비담과 염종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662년에는 수레 2천량에 쌀을 싣고 평양 인근에서 고구려와 전투중인 당군에 보급을
했으니 73세 노구에도 불구하고 668년 당나라군과 연합해서 평양을 함락시켜 고구려를 멸망시킵니다.
그 전에 김춘추는 백제와 싸우면서 고구려에 군사요청이 실패하자 647년에는 일본에도 갔으나 성과가
없자....... 648년에 당에 가서 당 태종을 만났으니 먼저 국학에 가서 공자를 제사지내는 석전(釋奠)
과 경전 강론을 참관하니 당 태종은 『진서(晉書)』등을 선물로 주며 “무슨 생각이 있는가?” 물었습니다.
춘추는 백제의 침공으로 신라 인민 모두가 포로가 될 것이며, 신라는 당나라에 직공(職貢)을 바칠수 없게될
것이라 말하니 당 태종은 군사를 내어 백제와 고구려 두 나라를 평정하고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을 신라에
주어 영원히 평안하게 하겠다는 약속을 했는데, 660년 백제 멸망후 태종 무열왕은 의자왕에게 자신에게
술을 따르게 함으로서 원수를 갚았으나 정작 1만 2천명 백제 왕족과 귀족에 백성들은 당나라에 끌려갑니다.
춘추는 셋째 아들 문왕을 태종을 숙위하도록 남기고 온후 신라의 중국화를 시행해 나갔으니 649년 정월
신라인들에게 신라 옷을 버리고 중국 조정의 의관을 입도록 했고, 664년 여자들도 신라 옷을 버리고
중국 의복을 입도록 했으며, 650년에는 당나라의 영휘(永徽) 연호를 채택하고 는 654년 신라왕이 됩니다.
또한 진덕여왕은 당나라에 “치당태평송” 을 올리니 “대당(大唐)이 큰 업을 열었으니 높은 황제의 운이 창성
하다. 갑옷 입고 천하를 통일하니 전쟁이 그쳤고 글을 닦아 여러 임금들이 대를 이으셨다. 하늘의 명을
이어 자비를 베풀고 만물을 다스리니 아름다운 덕을 본받으리라. 외적들은 천벌을 받았네. 황제께서 산악
의 정기로 재상을 낳으시고 삼황오제처럼 한결같은 덕을 이루셨으니 우리 당나라 황실 국운이 밝고 밝도다”
666년 연개소문이 죽고 아들 3형제 간에 권력다툼이 벌어져 남건과 남산에게 평양을 뺏긴 막리지
인 장남 남생은 추종자인 여러 장수들과 함께 당나라에 항복하고는 당군을 향도해서 쳐들어
오는데..... 그 전에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자신이 세력인 황해도 지방의 12성 763호의
주민 3,543명을 들어 신라에 바치고 투항한후 당나라에 가서 “고구려를 칠 작전회의” 까지 합니다.
김유신은 668년 북진해 황해도를 지나 당나라군과 연합해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했는데, 문제는 김추추와 당태종 사이에 평양 이남의 백제땅은 신라에 준다는 구절
에서 당나라는 “백제 땅” 이라 해석했고, 신라는 “평양 이남의 땅” 이라 해석한 것
같으니 일단 신라군이 차지한 “황해도” 를 누가 소유하느냐 하는 문제로 분쟁이 생깁니다.
물론 그 전에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시킨후 그 땅을 온전히 신라에 주기 싫으니 당나라는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과 신라의 문무왕이 맹약을 맺게 했으니, 664년 2월, 신라 대표 각간 김인문이 당의
칙사 유인원과 더불어 웅진에서 부여융과 맹세하는데, 유인궤가 고구려를 치러 가고 신라의
반격이 시작되자 부여융은 당나라로 달아나버리는 등 당나라가 먼저 협약을 깬 일면도 있습니다.
그건 나중의 일이고 당나라군의 호위를 받는 부여융의 웅진도독부가 건재하니 백제땅을 차지하지
못한 문무왕은 분함을 감추며 속으로 이를 가는데.... 669년 토번(티메트)이 토욕혼을 공격
하면서 천산남로를 습격하여 실크로드로 통하는 당나라 땅 하서 4진을 점령하자 대경
실색한 당나라는 평양 안동도호부의 설인귀를 급히 소환해서 서쪽 티베트 입구 청해로 보냅니다.
신라는 이런 당나라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고 여겨지는데... 오늘날의 시리아와
이라크 국경에 위치하는 텔 하리리(Tell Hariri)에는 한때 마리(Mari)라고 불리던 도시국가가
있었는데, ‘함무라비 법전’ 으로 유명한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에 의해 기원전 1759년경
초토화되었으며 1930년대 초반 프랑스 고고학 탐사팀에 의해 발견된 후 발굴이 이루어졌습니다.
마리에서는 2만 5,000점이 넘는 점토판이 4천년 이상 묻혀 있었으니....‘마리 서신’이라고 불리는 서신
에는 왕이 주변 국가에 파견한 세작들이 자신들이 담당한 도시국가의 동향을 시시각각 보고한
문서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왕들은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적극적으로 파악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수있으니 조선은 노력을 하지 않았지만 신라는 대비천전투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고 봅니다.
평안도와 만주에서 당군이 고구려인들을 포로로 잡아서 철수하자 신라는 그 공백을 노려 670년 3월에
설오유의 신라군 1만과 고연무의 고구려 부흥군 1만이 압록강을 넘어 만주지방을 공격하니.... 이후
검모잠이 고구려부흥군을 일으켜 7월에 한성(황해도 재령)에서 안승을 왕으로 추대했으며, 설인귀의
10만 당나라 대군은 같은 무렵인 7월 청해 대비천에서 토번군에 전멸을 당하고 천산남로를 상실합니다.
한 해 전인 669년 토번과 당나라군이 충돌하니 신라는 670년 3월, 설오유(薛烏儒)와 고구려
부흥세력 고연무(高延武)가 지휘하는 20,000명이 압록강을 건너 요동의 오골성을 선제
공격했는데, 하지만 웅진도독부등 양면전쟁 위험에다가 원격지인 요동을 점령할 수는
없었고 몇달 일시적 점유에 불과했지만, 이 공격으로 신라는 나당전쟁 초기 주도권을
잡았고 북쪽에서 시간을 번 동안 671년 당군이 지키던 웅진도독부등 백제 고지를 장악합니다.
3월, 사찬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 정예병 10,000명을 거느리고 압록강
(鴨淥江)을 건너 옥골(屋骨)에 이르렀는데, 말갈 병사들이 먼저 개돈양(皆敦壤)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4월 4일에 맞서 싸워 크게 이겨 목베어 죽인 숫자를 헤아릴수가 없었다. 당나라 군사가 계속 이르렀
으므로, 우리 군사는 물러나 백성(白城 황해도) 을 지켰다.《삼국사기》 제6권 <신라본기> 제6 문무왕 상
해당 기사에서 언급되는 개돈양은 위치를 알기가 어렵고, 비정되는 지역도 없지만 오골성
주변이므로 압록강 이북 지역일 것인데 다만 皆敦壤(개돈양)이 아니라, '모두(皆) 돈양
(敦壤)에 이르러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견해가 있으니 만약 개돈양
을 돈성, 그러니까 신성이라고 한다면 당군을 목표로 이동한 것이 되지만 확실치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압록강 유역으로 진군했다면 평양의 안동도호부의 세력이 설인귀가 티베트로 간 이후로
약화되었다고는 하나 주둔군이 있었으니 설오유 등이 취할수 있는 루트는 크게 3가지이니 첫째, 황해
경기만에서 병선을 타고 압록강 하구로 가는 것인데 가장 수월하긴하나 당나라 수군에 발각되기 쉽습니다.
둘째, 동쪽 강원도와 함경도를 우회하는 것으로 발각될 위험은 적으나 거리가 멀고 보급 문제가 어렵습니다.
셋째, 평양 주둔 소규모 당군을 직접 공격한후, 그대로 북상하는 것이니 거리상으로는 가장 빠르지만,
전투를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요동을 기습 공격하려는 의도라면 실패하기 쉽습니다.
오골성과 평양성을 연결하는 구간은 안동도호부의 주요 간선도로로 고려시대에는 북계서로
라고 불렀으며, 여요전쟁 때는 거란군의 공격 루트이기도 했고 고려시대 교통로가 통일
신라의 교통로를 계승했다는 점을 생각해 볼때, 설오유와 고연무의 연합군은 북계동로를
이용해 평양을 조금 우회하고 전투를 회피하면서 빠르게 북상해 나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들은 요동에서 4월 4일 당나라 소속의 말갈군과 야전에서 승리한후 당군이 이르자 바로 물러나
백성(白城 황해도)을 지켰다니 기병·보병 혼성부대였을 가능성이 높은데 설오유에 대해서는
기록이 보이지 않으니.... 진골 귀족이 아닌 자가 병력을 지휘한 예는 670년의 설오유와
676년의 기벌포의 시득 단 2가지 사례뿐으로, 시득은 진골인 대아찬 철천의 휘하에
있었다고 추측되니 사찬의 신분으로 원정군을 지휘한 사례는 오직 설오유 단 한번 밖에 없습니다.
진골 귀족이 아니라는 점에서 저 군대는 신라사람들이 아니라 고구려의 잔병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니 당시 고구려의 유력층은 다수 당나라로 압송된 상태였지만, 668년의 기록에
11월 5일 문무왕이 포로로 잡은 고구려 사람 7,000여명을 서울로 데려왔다고 하니
이정빈등은 이 고구려인 병사들을 신라땅에 억류 관리하기 보다는 이들을 요동에
보냄으로서 이기면 좋고, 져서 모두 다 죽어도 별로 손해볼게 없다는 계산이었다고 봅니다?
저 요동 기습은 양동작전이라 이 틈을 타서 신라는 웅진도독부를 몰아내고 백제땅을 점령해
소부리주를 설치했으며, 당군은 안시성을 공격해 고구려 부흥군을 격파하고 요동을
통제하는데.... 이후 당나라는 토번과 화친을 한 탓에 여유가 생긴지라 압록강쪽으로
진군해오니 저 신라군 기동대는 당군과 싸우지 않고 후퇴해 백성(白城 황해도) 을 지킵니다.
당군과 말갈이 다시 한반도로 진공하니 670년에 안승은 겁에 질려 한성(재령)을 사수하자는 검모잠
을 살해하고 무리를 이끌고 신라로 도주했으며, 당의 장수 고간(高侃) 은 남진해 672년 8월 황해도
시흥(석문)에서 신라 중앙군을 몰살시키는 대승리를 거두니 "석문전투" 로 서라벌이 위기에 빠지자
문무왕은 사죄문을 보내서 시간을 번 다음 신라군을 재정비해 675년 "매소성 전투" 에서 승리합니다.
나당전쟁은 서기 670년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 연합의 요동 선제공격으로 시작돼 676년 기벌포 전투
까지 7년간 진행된 신라와 당 사이의 전쟁으로, 전쟁터가 신라의 홈그라운드인 한반도라는 점에서
“보급에서 유리한 신라” 가 "토번과 양면전쟁" 에 시달린 당군을 대동강으로 몰아내고 황해도와
원산만 이남의 한반도를 차지하지만, 평양과 평안남북도 및 함경남북도는 이제 남의나라 땅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