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碩士學位論文
金復鎭의 佛敎彫塑에 관한 一考察
指導敎授 洪 潤 植
東國大學校 文化藝術大學院
文化財專攻
盧 正 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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碩士學位論文
金復鎭의 佛敎彫塑에 관한 一考察
盧 正 龍
指導敎授 洪 潤 植
이 論文을 碩士學位 論文으로 提出함
2001年 6月 日
盧正龍의 文學 碩士學位 論文을 認准함
2001年 6月 日
審査委員長 (印)
審査委員 (印)
審査委員 (印)
東國大學校 文化藝術大學院
목 차
Ⅰ. 머리말 1
Ⅱ. 金復鎭의 生涯와 佛敎 4
1. 金復鎭의 生涯 4
2. 佛敎와의 因緣 13
Ⅲ. 金復鎭의 佛像藝術 17
1. 金山寺彌勒大佛 22
2. 法住寺彌勒大佛 28
Ⅳ. 金復鎭 佛像藝術의 現代的 意義와 傳統의 再創造 34
1. 金復鎭 佛像藝術의 現代的 意義 34
2. 傳統의 再創造에 대한 反省과 課題 40
Ⅴ. 맺음말 52
참고 문헌 56
ABSTRACT 60
참고도판 64
Ⅰ. 머리말
井觀 金復鎭(1901∼1940)은 1920년대 후반과 30년대 후반 조소활동을 통해 서구조소의 이식과 함께 한국 근대조각의 형성기를 마련한 인물이다. 짧은 생애동안 약 40여 편의 작품을 남겼으며, 미술비평과 문학, 그리고 활발한 사회활동을 하기도 했다.
김복진이 조각가로서 활동한 것은 10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조각가로 평가를 받을 만큼 조소 예술계의 선구자였다. 특히 서구에서 이식한 조각의 기법을 조선에 전달했고, 조선미술에 대한 깊은 통찰로 조선 역사의 성격을 강하게 반영하는 조선미술의 전통과 재창조를 강조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행적은 당시를 살았던 대부분의 조각가들이 식민지 상황과 그로 인한 전통조각의 단절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시대조류에 영합하거나 시대상황과 무관하게 지내는 현상과는 다른 것이었다. 예컨대 그는 암울한 시대상황을 명확히 이해하면서 조선의 향토성과 민족성을 구현하는데 노력했다. 또한 근대조각의 도입과 제자를 양성하여 오늘날의 한국조각이 있게 했다.
김복진의 행적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전통 불상조각을 계승 발전시켜 새로운 형태의 불상조각을 남긴 것이다. 金山寺 彌勒殿의 미륵대불과 미완으로 끝났지만, 법주사의 시멘트 미륵대불은 晩年 作品으로 그의 조소인생의 완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이 불상들은 전통의 계승과 재창조라는 시대적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들에게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내포하고 있어 주목된다.
그 동안 한국미술사에서 김복진에 대한 연구는 활발히 진행되었다. 비록 그의 遺作이 적기 때문에 행적과 작품에 대한 자료발굴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기는 했지만, 제자를 비롯한 후학들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그의 생애와 작품세계1), 미술비평2), 그리고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차지하는 그의 위상이 밝혀지는 성과3)가 있었다.
한편 임복진에 대한 그 동안의 활발한 연구성과에도 불구하고 김복진의 향토성과 민족성을 뚜렷이 표방하고 있는 불상예술에 대한 기왕의 연구는 거의 일천한 실정이다.4) 그것은 김복진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가 아직 초기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탓도 있지만, 김복진을 현대조각의 입장에서만 조명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복진의 불상예술은 그가 지향했던 전통의 계승과 재창조를 가장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불상예술이 종교예술이라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지만, 김복진이 시대상황과 예술을 가장 뚜렷하게 표현하고 있는 부분이다.
필자는 본고에서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전통과 그 계승 그리고 재창조를 강조하고, 향토성과 민족성을 표방했던 김복진의 불상예술을 고찰하고자 한다. 우선 김복진의 생애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그의 삶과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는 불교와의 인연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약 10여 점의 불교와 관련된 작품과 대표작인 금산사와 법주사의 미륵대불을 다각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또한 김복진 불상예술의 현대적 의의에서는 그가 한국근대미술 뿐만 아니라 현대미술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정리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김복진의 불상예술은 일차적으로 그의 행적과 불교작품에 대한 연구지만, 궁극적으로 오늘날 불교 조각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과 과제를 점검하는 하나의 계기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 오늘날 한국의 불교 조소계는 조각인구의 증가와 사찰의 양적인 팽창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적지 않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작가의 불교교리나 신앙에 대한 이해 등 불교적 정서가 온전히 갖추어져 있지 않다. 기능적인 측면 또한 산업사회의 발달로 재료나 제작기법이 과거와는 달리 경박하기까지 하다. 이렇듯 불교이해에 대한 부재와 기법의 경박함은 이 시대 불교 조각계가 안고 있는 대표적인 문제이자 극복할 대상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보다 객관적이고 냉철한 입장에서 한국현대 불교조소에 대해 거론하고자 한다.
Ⅱ. 金復鎭의 生涯와 佛敎
1. 金復鎭의 生涯
井觀 金復鎭(1901∼1940)의 생애는 그가 좌익운동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 활동으로 체포당해 옥중생활을 했던 1928년부터 1934년까지를 기준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구분할 수 있다.
김복진은 1901년 충청북도 청원군 남이면 팔봉리 팔봉산 기슭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세도가 당당했던 安東 金氏 가문으로 많은 농지와 야산 그리고 임야를 소유했던 부유한 집안으로 비교적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김복진은 1917년 충청도 영동에서 경성으로 온 후 동생 김기진과 함께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응시했지만, 낙방하여 당시 신설학교였던 배재고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배재고보시절의 김복진은 교육자의 입장에서는 심각한 문제아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치열한 과정을 겪고 있었던 진보적 청년이기도 했었다. 예컨대 1학년 때는 <매일신보>에 수필을 투고하여 실린 적이 있었다. 이른바 문학청년으로 자부심이 컸던 것이다. 한편 그는 단성사나 우미관 그리고 광무대를 출입하면서 연극과 영화에 심취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재능은 당시 문학청년들 사이에서 주도적 인물로 부상하여 박영희·이서구·김기진 등과 반도구락부를 만들기도 했다.5)
한편 김복진은 1919년 학우들과 3·1운동을 위한 준비에 가담했는데 이 때 그가 맡은 임무는 경성일부 지역을 담당하여 학생들을 동원하는 한편 <독립신문>을 제작하는 일이었다.6) 그들의 이와 같은 준비는 민족총궐기 때 배재고보의 조직적인 항일투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김복진은 이 때의 조직운동 가담과 대중투쟁의 주도로 영동으로 내려가 부모 밑에서 근신생활을 해야 했다.
김복진이 그의 삶에서 전환기를 맞이한 것은 1920년으로 이때 그는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東京美術學校 彫刻科에 입학했다. 김복진은 조각을 시작하게 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어느 날 우에노(上野)공원을 지나가다가 지금의 일본미술원 전람회를 구경하게 되었는데 작자의 이름은 기억되지 않으나 <노자>라는 제명으로 석고착색을 한 조각을 보게 된 것입니다. 자, 여기서 나는 이리저리 훑어보고 나대로 궁리를 하기 시작하였지요. 이날 동행으로서 八峰과 같이 갔는지라 형제가 공원 의자에 앉아 가지고 토의를 거듭한 나머지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을 하여 보자는 결론을 얻었습니다."7)
예컨대 김복진은 일본미술원 전람회를 구경하다가 <노자>라는 작품을 보고 동생 김기진과 상의하여 조각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한 걸음 앞장을 서 보겠다는 야심도 작용했다.
동경미술학교는 1890년대 일본사회가 前時期의 서구추종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자신의 전통을 새롭게 인식하고자 하는 시대정신에서 창설되었다. 그 주도자는 김복진의 스승이기도 했던 高村光雲(1852∼1934)으로 당시 전통을 잇는다는 명분으로 木造를 중심에 두었다. 1899년에는 목조부와 소조부를 설치하여 藤田文藏(1861∼1934)을 교수로 받아들여 전통목조와 서구소조가 나란히 공존했다.8)
김복진은 동경미술학교에서 당시 建 大夢(1880∼1942)의 門下에 들어갔지만, 高村光雲이 강조했던 전통계승의 사실적 경향과 建 大夢·朝倉文夫(1883∼1964)가 추구했던 서구이식의 사실적 경향을 모두 받아 들였다.
김복진의 동경미술학교에서의 초기생활은 방황의 시기였다.
"입학을 하여보니 조각가 전체의 학생이라고는 25명밖에 되지 않았는데 조선사람은 나 하나이고 하니 쓸쓸하기도 하고 할뿐더러 처음부터 영문 모를 것이 많이 있는지라 한편으로는 조각을 시작한 것을 후회도 하여 보다가 다카무라 고운이라는 선생에게 여러 가지로 말을 듣고서 다시 한번 결심을 하여 보기로 하였던 것입니다."9)
김복진의 일본 유학생활 초기는 스승 高村光雲의 조언으로 공부에 매진했지만, 외로움과 열정만 앞선 미술학도였다. 그러나 그는 예술을 지향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한번씩 경험하는 예술에 대한 철학적 성찰로 고민하기도 했다. 예컨대 '예술은 무엇이냐' '예술을 위한 예술이냐'라는 묵은 숙제의 긴급한 해결을 얻지 못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스승인 建 大夢에게 질문을 해보았지만, 명쾌한 답보다는 자꾸 모델과 싸우고 粘土와 싸우다 보면 자연히 알아진다는 대답뿐이었다.
김복진의 이러한 동경유학시절의 고뇌는 한국의 근대미술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조각은 그 동안 예술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석공 또는 목공이라는 직능별 기술로서 인식하고 또 그것을 만들고 있는 사람 자신도 작가적 覺醒이 없는 工匠으로 그것을 다루었다.
"조선에서 이곳 태생으로 조각을 조선에 직수입하기로 결심한 사람은 나보다 4, 5년 전에 김진국이라는 이가 있었다가 이는 불행히도 연구 도중에 요절하고 그 뒤를 내가 밟았고 그 다음으로는 진남포의 郭胤模 형이 생기었다가 애처롭게 병사하니 당시 동경미술학교 재학중의 金斗一 형을 통계하여 불과 4, 5명이 전부였고, 문자 그대로 한참 싸우던 시절이라고 할까요. 나는 이때를 가리켜 胎生期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먼저 말한 바와 같이 김진국은 요절하고 곽윤모는 어떤 사정으로 천명을 줄이고, 김두일은 극도의 신경쇠약이 지금껏 쾌유하지 못하고, 具本雄은 본래부터 건강치 못하였고 張基南, 梁熙文은 가정의 곡서로 재기하지 못할 사정이며 나는 나대로 십여 년 간 명암의 길을 밟게 되어서 조각계의 태생기는 다른 부문의 예술보다는 훨씬 쓰라린바 많았다."10)
인용문은 김복진이 자신의 조각생활을 회고한 글이다. 그러나 이 글은 김복진과 동경미술학교 재학시절 조선인 유학생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한국의 현대조각이 형성되고 성장하게 된 사정을 알아내는데 큰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김복진의 동경미술학교 유학은 개인뿐만 아니라 한국현대미술의 시발점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일본 유학시절 불교와도 깊은 인연을 맺는다. 그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수감생활(1928.8∼1934.2)을 한다. 그는 이 시기 동안 많은 木造佛像을 만들었다. 일본 유학시절부터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었던 그로서는 불상제작이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감옥에서의 불상과의 인연은 1936년 조선미술전람회에 <불상습작> 출품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금산사와 법주사의 대형 불상제작을 맡게 된다.
김복진의 불교와의 인연은 한동안 승려생활을 했던 개인적인 측면에서 끝나지 않는다. 불교는 그에게 조선의 전통을 재창조하고 계승하고자 했던 자신의 고뇌를 해결해 주는 실마리로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유학시절 스승 高村光雲에게서 영향받은 것은 조소의 기법뿐만 아니라 전통을 새롭게 인식하고 재정립하는 시대정신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일본에서의 전통에 대한 인식문제는 김복진으로 하여금 식민지 조선의 전통문화에 대한 인식으로 이어지게 했던 것이다.
그는 석굴암을 비롯한 이 땅의 많은 불교문화재의 답사를 통해 조선 예술의 원형을 발견했고, 그 속에서 전통의 계승과 재창조라고 하는 자신의 사명감을 정립한 것이다. 그는 10여 년 동안의 감옥생활에서 목조불상을 만들고, 감옥에서 나온 이후에도 불상을 중심으로 작업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불교조각을 통해 식민지 조선이 안고 있는 패배감과 암울함을 극복하고 민족의 주체성과 우월함을 선양하고자 했던 것이다.
김복진은 1925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해 그 해 2월에 모교인 배재고보통학교에서 도화교원이 되고 고려미술원·토월미술회·청년미술원(YMCA미술과)·경성여자상업학교·조선미술원의 미술강사를 지내면서 김창섭·이영복과 일제식민지 체제하에 한국의 서구식 조각양식을 수용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이 무렵 鮮展에 매회 출품하여 상을 타는 등 조각가로서의 의욕을 계속 보였다. 아울러 한국 현대조각의 선각자답게 여러 곳에 미술연구소를 차려 조각의 정착에 진력했다.
"靑田 李象範씨와 墨鷺 李用雨씨 등의 同硯社나 春谷 高羲東씨가 주재하는 書畵協會나 以堂 金殷鎬씨 외 諸氏의 高麗美術院을 골고루 찾아다니며 폐를 끼쳐 드리고 사람 대가리인지 알 수 없는 것을 제작하면서도 잠시나마 분위기를 만들어 보았고 그 분위기에 직접 들어가지는 못하드라도 율동이나마 感觸하여서 자위하다가 靑年學館과 공영으로 미술연구소를 가장 근대적인 시설로서 시작하였드랍니다. 서양화의 책임자는 김창섭 형이었고, 조각부는 내가 담당하여서 연구생이 시세 좋을 때는 30여 명이었지요. 그중에 선전의 성격으로 본다면 특선급으로 구본웅 형이 있었고, 다음으로 본다면 장기남, 양희문 등이랍니다."11)
한편 1923년 8월에는 김복진, 안석주 등이 정동의 正則美術講習院, 土月美術硏究會를 설치하고 서양화는 안석주, 조각은 김복진이 교수하였다. 토월미술연구회는 바로 연극단체인 토월회의 멤버 중에서 무대미술을 담당했던 김복진, 안석주 등이 별도로 차린 미술교육기관이었다.
김복진이 조각가로서 활동한 것은 1925년부터 1933년 이후 그리고 1940년 그가 죽을 때까지로 불과 몇 년에 불과하다. 그것은 1928년 8월 25일 좌익운동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에 관계되어 체포당해 1934년 2월 21일까지 옥중생활을 겪게 된 이유도 있다.12)
김복진은 20대에 좌파운동 혹은 진보적인 문예운동을 활발히 전개한다. 김복진의 이러한 사상체계는 역시 동경유학 시절에 형성되었다.
"예술의 大道는 민중의 대도이다. 예술은 결코 예술을 위하는 예술이 아니고 민중을 위하는 예술이 아니면 안 되겠다. 따라서 예술은 독자적으로 존재할 것이 아니다. 예술로서 도덕·정치·종교와 융합하도록 할 것은 물론이고 상공업과도 악수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 우리는 또 한 번 불려진다. 예술로서 인간의 노동에 在한 欣喜의 표현이 되게 하여 노동과 예술을 융합 일치케 하자고....."13)
1920년대 김복진은 매우 진보적인 예술론을 견지했다. 예컨대 예술을 위한 예술, 그리고 예술과 노동과의 융합이라는 주장을 적극적으로 피력했다. 김복진의 이러한 진보적인 미술운동은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동맹(KAPF, Korea Artista Proletaria Fadertio)의 참여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동맹의 중앙위원으로 박영희·김기진 등과 주도적 역할을 했으며, 사실상 구성원 사이의 서열 제1위로서 비중 있는 역할을 담당했다. KAPF는 기왕의 파스큐라 계열과 염군사 계열이 합쳐진 것이었다. 초기의 맹원은 김복진을 비롯 박영희·김기진 이외에 이상화·안석영·송영·심훈·조명희·이기영·박팔양 등이었다. 김복진은 이 운동으로 1928년 8월에 체포되어 1934년까지 감옥생활을 했다. 그는 출옥 후에는 조선중앙일보 등의 학예부장으로 있었고, 고려미술원과 조선미술원 등 창립에 참가하여 만년을 후진양성과 작품제작에 바쳤다.
김복진의 조소작품은 40여 점에 이른다. 이 가운데 조선미전 출품작은 <3년전, 1925>, <불상습작, 1936>, <나부, 1937>, <백화, 1938>, <소년, 1940> 등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김복진은 <최송설당여사동상, 1936> 등 여러 점의 기념동상 작업을 했다. 이 가운데 여인 나체 좌상 <여(女)>는 1926년 조선미술전람회 공모전의 출품작이다. 이 작품은 이전의 <나체습작>이나 <소녀>가 안고 있는 결점들을 제거했다. 어깨와 팔, 손의 흐름이 자연스럽고 어느 곳이든 힘이 빠져버린 곳 없이 고른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꺾어 세우고 있는 왼쪽 무릎에 오른 손을 얹고 다시 그 위에 숙인 머리를 거의 닿을 듯 이어놓고 있는데 이는 눈길을 한 곳으로 이끌어 내는 효과를 발휘한다. 또한 오른쪽 다리와 오른쪽 손은 조금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는가 싶더니 문득 오른쪽 발을 잡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복잡한 구조인데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통일감과 균형감을 잘 유지하고 있는 것은 뛰어난 조형 능력의 결과로 해석된다. 김복진의 조소작품 가운데 대표작은 <금산사 미륵전 본존불, 1936>, <백화, 1938>, <소년, 1940> 등이다.
이와 같이 김복진의 인생은 다사다난했지만, 그가 한국근대미술사에서 이룩한 업적은 지대하다. 더욱이 우리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측면에서의 기여는 사회주의라고 하는 진보적인 사상과 함께 주목할 만하다. 특히 전통의 창조적 계승은 그의 예술관과 작품세계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우선 김복진의 주된 관심사는 조선의 향토성과 민족성을 복원시키는 것이었다.
"조선의 자연의 일부는 시일을 거듭하는 데 있어 이민 취미에 적합하도록 개변되어 간다. 자본주의의 문명이 전원에 향촌의 곳곳마다 침윤해 들어온다. 이 덕분에 조선미술의 향토성(혹은 민족성)이 感却하여 가게 된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조선의 미술이 移民美術과 대립하며 항쟁하는 데에 가장 많이 그 힘을 依囑하고 자부하였던 향토성은 자본주의 문명으로하여 域線이 무너지며 이민취미로 말미암아 개변되어 가는 도정에 서 있다. 조선미술의 유일한 무기는 이와 같이 하여 나날이 좀이 먹어 가는 것이다."14)
위의 인용문은 김복진이 1926년 『개벽』지에 실었던 글 가운데 발췌한 것이다. 이 글에서 김복진이 강조한 것은 향토성 곧 민족성으로 조선미술에 있어 유일한 무기인 향토성의 터전이 무너지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본주의 문명의 침식으로 조선 고유의 자연과 민족의 취미가 시간이 흐를수록 '이민 취미에 적합하도록 변화되어 간다'고 탄식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김복진의 민족주의적 각성의 촉구는 일본에서 귀국한 1925년 <시대일보>에 발표했던 작품 <석굴암>에서 뚜렷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스케치 <석굴암>은 석굴암 본존불을 약간 측면 쪽에서 위로 치켜 본 형상으로 얼굴표정을 읽을 수 없지만 균형 잡힌 몸매에 형상도 대단히 강건해 보인다.15) 그는 비록 신라의 불상이 생활과 민중으로부터 거리가 멀고, 퇴폐 심정으로 물든 것이라고 보았지만 그것이 독자적인 조선미술의 경지이며, 조선미술의 굳건한 地盤이라고 지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김복진은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서 대상물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과 형식미를 주관화시켜야 된다고 주장했다.16)
김복진은 전통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 그것에 함몰되지 않고 변화된 시대의 필요와 감각에 부응하는 새로운 조각의 조형을 찾고자 한 法古創新의 정신을 표방했던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김복진은 당시 미술계를 풍미했던 현실 도피적 유미주의나 혹은 척박한 식민지적 상황에의 굴종이라는 의식의 공백을 메우는 근대지식인의 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가 1938년에 제작한 <百花>는 한국 근대조각에서 사실주의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그가 조소예술의 화두로 삼고 있었던 '전통의 계승과 창조'를 엿볼 수 있는 뛰어난 작품이다.(도판 1) 백화는 고려시대의 名妓로 알려지고 있다. 1932년 박화성이 <동아일보>에 연재했던 장편소설을 인생극장 창단 기념으로 무대에 올렸는데 이때 주연을 맡았던 배우가 한은진이다. 김복진은 이 여배우를 모델로 이 작품을 제작했다. 작업은 서울 사직공원 부근 그의 작업실에서 이루어졌다.(도판 2) 한은진 모델에 김복진 조각이라는 사실은 대중적 관심사로까지 떠올라 조각가와 여배우 라는 제목으로 <조선일보>에 보도될 정도였다.17)
<백화>는 한복을 입고 족두리를 쓴 여인이 두 손을 다소곳이 잡고 서 있는 형상으로서 목조로 제작되었다. 이 작품은 나무 색깔이나 무늬가 아니라면 소조로 착각할 만큼 특출한 기술적 완결성을 지니고 있다. <백화>가 한복을 입었다는 이유로 김복진이 전통의 계승을 강조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김복진은 이 작품을 통해 우리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새로운 세계를 개척해야 하는 부담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 작품은 고전적인 수법을 잘 살린 것은 물론이며 그 사실력에 있어서도 우수한 작품이다. 족두리를 쓰고 화려하게 단장한 백화의 얼굴은 약간 앞으로 수그려 사색하는 듯하고 두 손을 모아 잡고 조용히 전진하는 모습은 정연 아름다운 것이었다. 선생은 이 작품을 형상화함에 있어 연극배우 한은진을 매일같이 고전의상을 차려 입히고 백화가 갖는 감정을 포착함에 가진 고심을 다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동하다."18)
그의 일상적인 전통에 대한 의식과 그 표출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1940년 제 19회 선전에 출품한 윤승욱의 <어떤 여자>에 대해 "조각과 우상의 혼동, 이는 비평 이외"19)라고 했으며, 제자들에게 한국의 고전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 하지 말 것을 채근하였다.
제자 박승구는 "선생은 조선 고전에 대해서도 관심이 깊었으며 이를 계승함에 있어서 적극적이었으며 자기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기회만 있으면 여러 친구 제자들과 함께 친히 古刹을 찾아서 그 건축물과 조각의 역사적 유래와 구조 및 그 조형성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들려 주었는 바 그 설명에서 우리 선조들의 아름다운 영위에 대하여 칭송하고 경탄하였다." 또한 고전적인 조선의 불상에 대해서도 그 당시 인민들의 고귀한 품격과 수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전통적인 조소예술의 수법과 품격은 그대로 김복진의 작품에도 반영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김복진의 민족정신 표방과 전통의 재창조에 대한 정신은 불상제작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자신의 삶에서 불교와 맺은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다.
2. 佛敎와의 因緣
김복진이 불교와 인연을 맺었던 시기는 동경 유학시절이다. 당시 김복진이 조각과 철학 사이에서 갈등하고 방황하고 있을 때, 그를 조각으로 이끌었던 사람은 동경미술학교 목조 교수이자 일본 근대조각의 거장인 高村光雲(1852∼1984)을 만난 이후부터였다. 스승 高村光雲 교수는 그를 불러 연장을 갈아주기도 하고, 조선 사정도 묻기도 하고, 어떻게 조각을 배울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다. 김복진이 언급한 高村光雲은 승려로 경성 장충단에 있는 博文寺의 本尊佛을 조각했으며, 근대 일본의 목조를 부흥시켰던 인물이었다고 한다.20) 김복진이 이 때 고촌광운에게서 배운 것은 傳統과 함께 佛敎에 대한 영향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김복진은 동경유학 시절 이미 불교에 귀의하여 출가경력이 있었다.
"같이 중 생활을 한 동지가 한 사람있다는 말이며, 또 동경유학시대에 淺草 어느 절에서 得度하였단 말이며 나(이광수)는 白檀觀音像 하나를 새겨다 달라고 하였다. 이 말에 그는 품 속에서 백단관음상을 내어서 내게 보이기로 정관이 손수 새긴 것을 달라고 하였다. 정관이 동경서 돌아 왔노라고 나를 찾았을 때에는 퍽이나 바쁜 듯하고 또 무슨 근심이 있는 듯하였다. 동경에서 백단을 못 구하여서 관음상을 못 새겼노라고, 차차 구해서 새겨 주마고 하고는 들어오지도 아니하고 문전에서 무슨 더 할말이 있을 듯 하면서 작별하였다. 이것이 나와 정관의 永訣이었다."21)
이 글은 春園 李光洙가 김복진의 추도식에서 읽은 <미완성관음상>이라는 제목의 弔辭내용이다. 예컨대 위의 글은 김복진이 이미 출가하여 道伴과 함께 승려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광수가 동경여행 선물로 관음상을 부탁하자 김복진이 품속에서 관음상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이미 불교에 깊은 이해뿐만 아니라 불교승려로서의 생활을 기반으로 한 작가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제4회 조선미전 전시평에서 崔禹錫의 <불상>이라는 작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모든 선남선녀여, 千古不朽의 劣作 <불상>이 미전 회장의 일우를 더럽히고 있는 것을 보았느냐. 無名 無慈悲한 佛體구도의 不非, 作意의 몽롱애매, 어디로 보든지 금년도의 대표적 졸작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韓末 당시 경영한 불상을 모아놓고 賤利 탐욕에 눈알 붉던 승려배와 동격화가라는 것만 광고한 그림이다. '나무아미타불 금은 山積을 伏願' 화면 전체의 하반부는 잘라 없애면 좀 낫게 보일 듯하다."22)
김복진은 예컨대 <불상>의 작품성에 대해 '손발문제가 아니라 대뇌 부족'이라는 혹독한 비판을 가했다. 그의 이러한 비판은 작품성 이외에도 평자의 불상, 혹은 불교에의 애정에 비해 화가의 소재주의적 시간 혹은 형식적 취재에 더욱 분노 같은 심정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김복진은 평상시 古刹 등지를 답사하면서 전통미술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표명했다. 그의 불상예술의 기초는 평상시의 생활방식과 관심의 산물이라는 의미이다. 김복진은 옛 미술품의 조형성에 대하여 찬탄했으며, 특히 불상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도 불상을 가까이하며 살았다. 한 기자의 가정방문 기사에 의하면 그의 집안은 현관에서부터 2층 서재까지 불상을 비롯한 각종 서화로 가득 차 있었다고 전했다.23)
이와 같은 김복진의 불교적 성격은 그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창립과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에 참가하여 활동하다가 1928년 체포되어 투옥생활을 하면서 더욱 뚜렷해진다. 김복진의 동생 八峰 金基鎭은 김복진이 참담한 감옥살이 중에도 먹지 않고 남긴 밥을 주물러 점토처럼 만들어 인물상과 불상을 만들며 조각가로서의 조형충동과 갇힌 자의 절망감을 달래곤 했다"24)고 회고했다.
"선생은 감옥 내에서 조선 풍속고전에 대한 연구를 하는 동시에 많은 우수한 목조각 등을 창작했다. 혹 자재가 없을 때에는 먹다 남은 밥을 개어 차지게 한 것을 이용하여 많은 조각들을 만들었다."25)
김복진은 형무소에서 우리 민족의 근간이자 결정체인 조선고전과 고유의 풍속을 연구했다. 이 가운데는 한국미술사에서도 양적 질적인 면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던 불교사상과 조선에서의 전통을 공부했을 것이다. 김복진의 이러한 國學과 佛敎에 대한 관심은 감옥에서 목조불상을 제작하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김복진의 불교적 성향은 그의 만년에 더욱 심화된다.
"(보보를 잃고) 2주일 되던 날은 자기가 불상을 조성하던 청주 용화사에 다녀온다더니 자기 수첩에 붙여 품속에 다니던 보보 사진을 두고 왔다고 합디다. 49재까지 축원하여 달라고 먼저도 말하였거니와 그는 늘 사람은 역사 속에 살아야 한다고, 나는 이번에 동경으로 간다는 것은 인제 내 일생을 바쳐서 예술의 진미를 알아내고, 미증유의 예술품을 남긴 뒤에 속리산 법주사대불, 청주 용화사 불상을 완성하여 놓고 나서, 최후로 동양미술사를 편집하여 놓을 일 등등, 그런지 이상의 理想案은 쉰 안에 나 해놓고 나서는 산수가 좋은 고요한 곳에 은퇴하여 갖고 조용히 독서하고 있다가 안면하기가 소원이라는 것이었습니다."26)
위의 글은 아내 許河伯이 술회한 것으로 김복진의 만년생활이 불교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컨대 귀하다는 뜻으로 '寶寶'라는 아명을 지어 불렀던 40에 낳은 山瑢이가 죽었을 때 49재까지 축원을 부탁한 일이나, 법주사와 용화사의 불상 조성 등의 일이 나타나고 있다.
요컨대 김복진은 동경유학시절 스승 高村光雲에게서 불교적 영향을 받았으며, 승려생활을 통해 불교사상과 신앙으로서의 의미를 깨달았던 것이다. 또한 그는 감옥생활에서 불교를 통해 자신의 암울한 처지를 달랬으며, 조각가로서의 조형 그리고 궁극적으로 조선미술사가 개척해야 할 전통의 계승과 재창조에 고민했던 것이다. 불교는 김복진이 작가와 사회활동을 했던 10여년에 불과한 세월동안 자신의 삶과 예술, 그리고 조선미술 고유의 향토성과 민족성의 토대가 되었던 것이다.
Ⅲ. 金復鎭의 佛像藝術
김복진이 그의 삶에서 불교와 관련한 작품활동을 한 시기는 출옥 이후인 1935년부터 1940년까지 약 5년에 불과하다. 이 짧은 기간 동안 그는 흙·석고·시멘트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觀世音菩薩像과 彌勒佛像을 중심으로 작품활동을 전개했다. 그의 불교관련 작품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1. 김복진작품일람표
N0 |
작 품 명 |
재 료 명 |
제 작 연 대 |
1 |
석굴암 |
소묘 |
1925 |
2 |
관세음 |
목조 |
1930 |
3 |
계룡산 소림원 미륵입상 |
석고 |
1935 |
4 |
김제 금산사 미륵전 본존상 |
소조 |
1936 |
5 |
불상습작 |
석고 |
1936 |
6 |
서울 영도사 석가모니불입상 |
석고 |
1936 |
7 |
불상 |
|
1937 |
8 |
관세음 |
석고 |
1937 |
9 |
청주 용화사 불상 |
|
1940 |
10 |
속리산 법주사 미륵대불 |
시멘트 |
1940 |
1925년의 스케치 <석굴암>은 그가 일본에서 귀국한 직후 발표한 작품으로 <시대일보>에 스케치만 소개되었을 뿐 어떤 설명이나 평가도 없었다.27) 그러나 이 작품은 석굴암 참배를 통해 이루어진 것으로 불교에 귀
의했던 김복진으로서는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더욱이 이 작품은 그로 하여금 전통예술에 대한 깊은 이해와 조선미술에 대한 통찰력을 함양시켜 이후 전개되는 그의 미술인생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도판 3)
<불상습작>은 1936년의 작품으로 김복진의 불상예술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어 주목된다. <불상습작>은 김복진이 제 1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이다.(도판 4) 김복진이 한동안 불참했던 조선미전에 일반 작품이 아닌 불상작품을 공모전 형식의 전시에 출품했다는 사실은 특이하다. 김복진은 몇 차례 조선미전에 참여한 바 있는데 영어생활 등으로 오랜 동안의 공백기를 딛고 참여한 첫 번째 출품작이 불상이었던 것이다.
그가 후반기 작가생활의 본격적인 출발지점에서 대중적으로 첫선을 보인 것이 전통적 형식의 불상이었다는 것은 매우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는 출옥 후 본격적인 제2의 작가생활의 출발점에서 彌勒佛로 가치를 높였던 것이다. 이러한 면모는 1937년 조선미술원 낙성기념 소품 전에서도 확인된다. 김복진은 이 소품전에서도 역시 불상을 출품한 것이다. 조선미술원은 김은호·박광진·허백련 그리고 김복진이 설립한 비중 있는 미술기관이었다.
1. 조각부의 김복진씨는 그의 연구생활과 함께 섞이어 가지고 저력있 고 소박하게 그러나 예지에 빛나고 있다. <불상>은 오히려 씨로서 는 수작이 아닐까 한다. 씨의 온축있는 교양의 사색과 그의 才稟과 함께 연구생으로 하여금 다수한 로댕이 되게 할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28)
2. 김복진은 그의 得意作인 <불상>을 출품, 조각의 새로운 경지를 보 여 주었다.29)
이 글은 윤희순이 당시 소품전에서 김복진의 출품작 불상을 보고 수작이라며 상찬한 대목이다. 김은호 역시 김복진의 불상이 得意作이며, 조각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 주었다고 했다. 그러므로 김복진에게 불교와 불상은 예술이자 인생으로 그의 후반기의 삶을 지배했다. 그가 불상작품을 출품한 것은 결국 독창적인 우리 문화를 찾고자 했던 의도로 생각된다. 그가 일본에서 서구조각을 공부한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은 서구조각을 기초로 조선에서 도외시된 채 망실되어 가는 우리의 조각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김복진이 1935년에 제작한 <소림원불상>과 그 대략적인 형태가 매우 흡사하다. 立像이라는 점과 手印의 모습이 施無畏與願印, 그리고 通肩衣를 하고 있는 모습 등에서 그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더욱이 <소림원불상>이 <금산사 미륵대불>의 축소모형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 예컨대 <불상습작>은 비록 <소림원불상>보다 1년 늦게 발표되었지만, 이미 김복진이 1935년 <금산사미륵대불>의 축소모형으로 만든 원형이었던 것이다.(도판 5·6·7) 그는 이러한 축소모형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많은 기술적인 면을 축적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축소모형이 대불로 완성되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기법상의 문제점을 축소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소림원불상>과 관련된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다. 1935년 12월 김복진은 전북 김제에 있는 금산사의 주문으로 높이 11m의 彌勒殿 本尊佛을 만들기 시작했다. 1935년 가을 금산사는 전국 각지의 유명한 조각승과 석공들을 초청하여 조성하기로 한 대불의 1/10크기로 축소 석고 모형을 만들도록 한 뒤 그 가운데 최우수작을 선별하여 그 작가에게 대불 조성을 맡긴 것이다.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이 시기에도 작품공모를 통해 우수하고 역량 있는 작가의 작품을 선별하여 불상을 조성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례는 현재 우리 불교조각계가 신앙심과 기법을 기초로 한 훌륭한 불상을 조성하는 것보다는 인맥과 가격의 차이에 의해서 불상조성이 이루어진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 후 김복진의 축소모형 불상은 금산사에서 보관하다가 당시 住持 黃成烈이 계룡산 新元寺에 있던 도반 沈圓昊 스님에게 보냈다고 한다.30) 이 작품은 현재 계룡산 자락의 아담한 소림원이라는 암자에 본존 예배상으로 봉안되고 있다. 주지 庾鳳萊 스님의 증언에 의하면 해방 이전에 금산사에서 모셔 왔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은사 심원호 스님이 소림원을 신축하고 정진 중에 있었지만, 불상을 제대로 봉안하지 못하고 있던 중 금산사의 황성렬 주지를 만나게 되었다고 한다. 두 스님은 신원사의 道伴으로 친숙한 사이였다. 황상렬 주지는 심원호 스님이 불상도 없이 새 암자에서 정진중이라는 말을 듣고 금산사의 '축소생'이 있으니 모셔가라 하여 이관하게 되었다는 사연이다. '축소생'은 미륵전 본존불의 모형이라는 의미이다.
<소림원 불상>은 높이 117센티미터로 좌대를 제외한 佛身의 크기만 해도 1미터이다. 김복진은 이 축소된 모형을 기초로 11배로 확대 제작하여 금산사 불상을 완성했을 것이다. <소림원 불상>의 전체적인 인상은 금산사의 불상과 형식적으로 흡사하다. 원만한 상호에 당당한 체구, 그리고 유려한 옷 주름들이 그렇다. 전체적인 비례감각이 우수하며 두상부분이 약간 크다. 이는 고대불상의 일반적인 예로써 예배자의 위치가 바닥에서 위로 고개를 들고 바라보기 때문에 佛身의 안정감과 경건성 등을 고려하여 두상 부분을 다소 크게 강조하는 예와 일맥상통한다. 앞가슴과 두 다리는 전진적인 자세이다.
수인은 금산사·법주사의 경우와 같이 시무여원인 형식이다. 특히 소림원 불상은 뒷모습의 유려한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 불상의 뒷면은 적당히 마무리하는 것이 흔한 예였다. 그러나 김복진의 이 작품은 양쪽 어깨로부터 U자형으로 흘러내린 가사의 주름이 빼어난 감각을 나타내고 있다. 옷 주름의 유연하면서도 짜임새 있는 선의 처리는 탁월한 조형감각의 결과인 것이다. 조각이란 동서남북과 상하좌우 어느 각도에서든 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깊이와 넓이까지도 보면서 제작해야 한다.
어깨부근의 겹쳐지면서 촘촘한 옷 주름이 팔 뒤꿈치 부분에 뭉쳐지고 흩어지는 강세를 보이다가 편안한 평면적 흐름이 무릎 아래 부분에서 가볍게 끝나는 뒷모습의 주름선과 형태가 유연한 형상력으로 입체감을 살린 것이다. 옷주름은 강·약 중간의 3단계로 이루어져야 그 깊이가 생기며, 사실성과 생명력이 태동한다.
이와 같은 불상 뒷면의 개성적 처리는 불상의 측면처리에서도 확인된다. 역시 부드럽게 흘러내린 옷 주름과 날씬한 佛身의 처리, 또한 佛身의 신체적 비례와 적당한 볼륨감, 그리고 두 손의 안정적인 자태가 이 불상의 우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볼륨감은 강건하고 탄탄한 인상과 강조하여 인위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31)
한편 <영도사석가모니불입상>은 미술평론가 윤범모의 노력으로 김복진이 작가라는 사실이 규명되기도 했다. 永導寺는 1396년 무학대사가 창건한 사찰이었으나, 정조 3년(1779)에 開運寺로 寺名이 바뀌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그런데 서울근교의 사찰에 관한 자료인 『奉恩寺本末寺志』32)는 김복진의 영도사 불상에 관한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즉 1943년 安震湖는 "1936년 11월 김복진에게 의뢰하여 主尊 釋迦立像을 조성 봉안했다"33)고 기록하고 있다. 김복진이 개운사 대원암의 의뢰를 받고 높이 3m가 넘는 석고 석가여래입상을 제작했다는 것이다. 비록 작품은 현존하지 않지만 김복진 불상작품의 존재와 출처가 밝혀졌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큰 것이다.
한편 김복진의 불상예술 가운데 <금산사미륵대불>과 <법주사미륵대불>은 그의 작품 가운데 그 규모나 한국근대불교미술의 입장에서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더욱이 김복진의 불교관과 예술 그리고 한국미술의 전통성과 재창조에 대한 그의 주장을 이해하는데 척도가 되는 것이다.
1. 金山寺彌勒大佛
<金山寺彌勒大佛>은 현재 彌勒殿에 봉안된 본존불이다. 미륵전은 조선 佛殿式 3층 木造瓦葺으로 일명 龍華殿이라 했다. 법상종 시대부터 미륵본존을 봉안했지만, 朝鮮 宣祖 30년(1597) 丁酉再亂 때 소실된 것을 仁祖 5년(1627)34) 守文大師가 다시 조성하였다. 그 뒤에 영조 23년(1747) 금파대사가, 고종 광무 초에는 용명스님이 3천여 금으로 중수했으며, 또 1926년에는 금호스님이 조선총독부의 지원금 4만 6,000여 원을 받아 중수하고, 다시 1938년에는 황성열 주지가 신도의 시주금 2,000여 원으로 다시 중수했다. 미륵전의 총 높이는 63척에 전면 62척, 측면의 높이 51척, 각 기둥내의 建坪은 88평, 첨하낙수내(下落水內) 건평이 143평이다.
한편 이와 같은 미륵전의 내부에 봉안된 미륵삼존상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본 불상은 미륵전에 봉안한 법상종 시대로부터 숭봉하는 본존상이다. 신라 경덕왕 23년 갑진 6월 9일 始鑄하여 혜공왕 2년 병오 5월 1일에 畢鑄한 開山祖 진표율사의 所鑄像은 無補處의 단독상으로서 此는 이조 선조 30년 정유병화에 소실되었다. 현재 삼존상은 인조 5년 정묘에 수문대사의 所塑像으로서 그중에 主佛 一像은 昭和 9년(1934) 3월 9일 夜의 失火에 소실되였더니 주지 黃成烈 사가 海光 金極仁, 三能 趙永讚, 普應 金時澤, 內藏寺住持 梅谷 鄭奉謨 구암사 주지 일헌 김종렬, 신사 김부곤, 비구니 유지승 등의 조력을 빌려 가산거사 金水坤 등 大方檀家의 施金 16.000여 원의 경제적 지원을 받아 良工 김복진에게 명하여 소화 13년 9월 3일로서 소성하였다. 본불상은 도금소상으로서 주불상은 높이가 39척의 立像이요, 보처상은 각각 29척 높이의 입상이다."35)
이 기록은 금산사 미륵전의 삼존불이 그 동안 논란이 되어 왔던 작자문제를 규명하는 실마리가 되었다. 그 동안 일각에서는 미륵전의 삼존불이 김복진의 작품으로 추정할 뿐 규명 내지 진전되지는 못했다.36) 그러나 본존불은 제1차 진표율사에 의한 조성으로부터 제2차 수문대사의 조성을 밝힌 다음 이어 1935년 3월 9일 燒失이 있은 후 김복진에 의해 다시 제작된 것이다.
"과거 신라시대에 찬연했던 우리의 예술작품은 세계적으로 유명하였던 것이 그 후로 침체기에 들어서 아직까지 이렇다 할 만한 작품이 없는 것은 유감이었던 바, 최근에 와서 우리의 인사들 중에도 이 방면에 유의 진출한 사람이 차차 생겨나던 중 시내 사직동 262의 김복진씨는 전북 금산사의 부탁을 받고 미륵상을 제작하게 되어 높이 38척이나 되는 대미륵상을 제작중이다. 이 미륵상은 충북 보은사보다 조금 작은 것으로 조선에서 둘째 가는 대불상이며 이것을 제작하는 데 소비될 시간은 약 270일 가량 되리라 하며 총 비용은 일만사천원이라는데, 이 중에는 순금 금박 약 6천원 어치가 들었다 하며 완성은 8월 말경이나 되리라는데 이것은 근래 조선 사람의 손으로 이와 같은 대작품을 제작하기는 처음있는 일일뿐더러 조선의 조각계에 한 이채라고 보겠다."37)
김복진의 불상작업은 위 기사의 내용처럼 소요시간 270일, 14.000원의 비용이라는 그 규모 면에서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더욱이 조선인에 의한 작업이라는 점에서 미술계뿐만 아니라 민족적인 차원에서도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더욱이 불상의 양식은 조선시대의 그것과는 많은 차이를 나타내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불상은 새로운 양식의 발전도 없고 개성미도 사라지고 단순히 재래의 격식에 따라 불상을 제작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예술적인 아름다움이나 창조적인 양식의 전환을 찾아 볼 수 없었던 것이다.38) 예컨대 인체의 파악이 부족했고, 얼굴에는 개성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속화된 감이 농후하게 나타나 형식적으로 아름답지 못하고 신앙적으로 깊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복진의 불상은 그 규모와 비례하여 믿음을 주는 당당한 체구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도판 8)
먼저 手印은 오른손이 施無畏印으로 어깨 높이까지 손을 올리고 다섯 손가락을 약간 구부린 채로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한 형태이다. 다른 불상 작품처럼 손가락을 평면과 一字形으로 한데 모으지 않고 셋째손가락의 첫째마디는 안으로 굽힌 반면 둘째손가락은 반듯하게 펼치는 등 손에 표정을 부여했다. 반면 왼손은 편안한 자세로 가슴 앞으로 내밀어 옆에서 보면 직각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手印 역시 與願印으로 왼손을 내려서 손바닥을 밖으로 향하게 한 손 모양으로 시무외인과는 반대가 된다. 손은 연꽃송이 모양을 한 붉은 색의 寶珠를 들고 있다. 그것은 연꽃송이 모양으로 강한 상징성을 수반하고 있다. 또한 옷 주름 처리 등에서 세련된 작가의 감각을 감지할 수 있다. 두 손의 손목에서부터 무릎 아래까지 흘러내린 양쪽의 옷 주름 선 등 전체적인 조형능력이 범상치 않은 창조의 산물임을 느끼게 한다. (도판 9·12)
본존불 좌우의 두 보살상은 施無與願印의 모습에 장신구 하나 없는 전형적인 여래상이다. 이는 또한 자연스러운 수인과 지물이면서도 사실 흔하지 않은 자세이기도 하다. 손에 든 연봉은 관음보살상에서 정병과 함께 흔히 볼 수 있는 지물이기도 하다. 삼존상인 경우는 主尊像인 如來를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을 두게 마련이다. 예컨대 주존상 석가여래가 미륵보살과 관음보살을 협시로 삼는 것과 같다. 또한 아미타삼존상의 경우 사랑을 상징하는 관음보살과 지혜를 상징하는 세지보살로 협시를 삼는다. 그러나 미륵이나 약사여래도 삼존형식을 이루기는 하나 이 때 보살들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금산사의 경우는 일반적인 예에 따라 미륵존상의 左右補處像을 대묘상보살과 법화림보살로 신앙하고 있다.(도판 10)
금산사 미륵불상의 양식은 소림원 불상의 양식과도 비교된다. 금산사의 미륵불상이 그 거대한 규모 때문에 압도감으로 두 상의 비교를 다소 저해하지만, 동종형식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두 불상의 전체적인 인상은 같으나 다만 금산사의 불상이 대형이라는 점 때문인지 허리 부분 등 옷 주름의 간격이 넓고 선이 다소 무거운 편이다. 옷 처리에 있어서 두께를 주는 것은 불상의 무게 감이나 중후함을 주기 위한 것이다. 옷이 두껍지 않고 얇게 묘사되면 불상의 전체적인 인상이 가볍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通肩에 의한 노출된 가슴의 양쪽 근육표현과 두 어깨 아래로 흘러내린 옷 주름, 특히 하체 부분 중앙의 옷 주름 끝자락 처리나 두 다리 사이의 S자형의 옷 주름 등에서 유사성을 읽게 한다. 다만 왼손 처리가 금산사의 경우가 다소 위로 치켜들고 있으며 손에 연꽃봉우리의 표현이 복숭아 모양처럼 끝이 뾰족하게 치켜세워졌으나 소림원의 경우는 원형의 보주로 처리되었다. 좌대는 앙련과 복련이 연결되어 불신과 더불어 조성되었다. 현재의 불상조각은 좌대의 중요성은 소홀히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김복진 작품 속의 좌대는 기능성만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본존과 좌대의 비례가 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결국 김복진은 연꽃 좌대의 변화와 안정감을 기초로 좌대까지도 작품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 본존상의 재료와 제작한 이후 이전하여 건립한 사실은 주목된다. 우선 본존상의 재료는 흙으로 알려져 왔다. 김복진은 미륵상을 현지인 금산사의 미륵전 내부에서 전과정을 제작한 것이 아니라 서울의 작업장에서 제작한 것을 이동하여 현지에서 조립한 후 마무리 작업을 했던 것이다. 이것은 작품의 크기가 11미터 이상의 거상이며, 재료도 금동이나 석재, 혹은 석고상만 해도 이동조립이 가능하나 흙으로 빚은 소조상의 분할제작과 이동 후 조립방식은 기술상 쉬운 일은 아니다. 더욱이 금속이나 석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거대한 소조상을 이동, 조립할 수 있다는 기술적 수월성은 주목을 요하는 일이다. 법주사의 시멘트 미륵대불에서도 확인되지만 건축공학적 재료활용이라는 측면에서 작가 김복진의 탁월한 능력이 부각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김복진의 불상제작은 전통을 기초로 한 현대적 기법을 충분히 활용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창조 또한 조선불교미술의 전통과 유리된 창조라기보다는 전통을 토대로 한 창조였다는 점을 주목할 만하다. 이것은 그가 투옥생활 동안 연구하고 고민했던 조선의 향토성 짙은 민족성을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아울러 그의 삶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불교가 조선미술의 전통성과 어울려 나타난 것이다.
금산사의 미륵대불은 불교의 미륵사상과 그 신앙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한편 금산사가 미륵신앙의 성지로서 지니는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김복진의 불상예술과 관련한 이제까지의 연구는 금산사나 법주사와 미륵불과의 관계를 일차적으로 규명하기 보다는 김복진의 불교성향과 미륵대불과의 관계를 강조하였다.39) 금산사가 미륵도량이라는 점, 그리고 당시 주지 황성렬이 김복진에게 요청하여 불상을 제작케 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김복진과 미륵신앙과는 어떤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금산사가 미륵도량으로서의 위치, 그리고 미륵신앙의 성격으로 고찰할 수 있다. 다만 김복진과 불교와의 친연성, 그가 처한 시대적 상황을 토대로 한다면 암울한 현실 속에서 미륵의 도래를 염원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금산사는 백제 法王 元年(600)에 창건되었다고 하는데 창건 당시 사찰의 규모는 초라하고 寺格이 높지 않았다. 그러나 眞表가 彌勒으로부터 戒法을 전해 받고 중창하면서부터 번창하였다고 한다. 이 때 진표는 彌勒丈六像을 조성하여 主尊으로 모셨고, 金堂의 남쪽 벽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그에게 계법을 주던 모습을 그려 모시기도 했다. 금산사는 이 때부터 미륵불을 신봉하는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이 되었다고 한다.40)
미륵신앙의 내용은 멀고 먼 미래에 미륵불이 출현할 것이며, 그 때 이 세상은 樂土로 변할 것이고, 사람의 壽命은 8만세나 된다. 미륵불은 부처님이 아직 제도하지 못한 중생들을 3회에 걸친 龍華法會에서 모두 제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 통속적인 예언의 성질을 띠고 있거나 구원론적인 구세주의 顯現을 의미하거나 간에, 종교적인 인간이면 누구나 품게 되는 이념으로 종교가 지나치게 추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비판을 구체적 신앙형태로 표현할 수 있다.
흔히 미륵신앙은 彌勒下生과 彌勒上生으로 구분된다. 미륵하생은 久遠한 미래에 미륵(Maitreya)이 이 세상에 태어나 佛陀가 되고, 상카왕을 위시하여 많은 중생들을 교화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彌勒上生은 석가모니불의 제자인 미륵이 도솔천이라는 이상세계에 왕생할 것이고, 信者들도 역시 도솔천에 태어날 것이라는 왕생을 강조하고 있다. 요컨대 미륵신앙은 유토피아적 이상세계에 대한 희구에 있다. 먼 장래에 인간의 수명이 84,000歲로 늘어나게 될 때 이상적인 세계가 도래할 것이다. 그 때 자연적인 조건은 인간이 극복하고자 했던 상태로 변모하는 것이다. 대지는 평탄하고 동물·식물 그리고 광물까지도 인간생활에 알맞게 변질될 것이다. 음식이나 식량도 걱정할 필요가 없고 金銀寶石은 무수히 널려 있고 숲과 바다, 강 그 어느 하나도 횡포를 부리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이상세계의 상황은 미륵신앙을 통해 우리의 현실에서 벗어나지 않는 생활의 개선, 생활의 향상을 모색하는 부단한 노력 끝에 실현된다는 것이다. 결국 김복진이 금산사 미륵대불을 조성한 것은 미륵신앙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사 보다는 일차적으로 금산사가 종교적인 인연과 오랜 역사를 통해 미륵신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주지 황성렬이 김복진에게 미륵불 조성을 요청한 것이다.
2. 法住寺彌勒大佛
<법주사미륵대불>은 비록 미완으로 끝이 났지만, 김복진 생애의 마지막 조형작업의 산물이다. 더욱이 그 규모는 33m로 <금산사미륵대불>을 압도하였고, 재료 또한 시멘트를 사용했던 것이다.
법주사는 금산사의 개창조이기도 한 眞表律師가 속리산으로 와 중흥한 미륵신앙의 도량이다. 그러므로 금산사와 법주사는 진표율사와 함께 미륵신앙의 대표적인 도량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진표는 완산주 김제군 대정리 사람으로 어느 날 버드나무 줄기에 꿰인 개구리의 고통을 보고 출가했다. 스승인 崇濟法師는 그에게 『供養次第秘法』 1권과 『占察善惡業報經』 2권을 주면서 미륵과 지장 두 보살 앞에 지성으로 참회하고, 성인들께 계법을 받으면 교화에 힘쓰라는 당부를 받는다. 이후 진표는 용맹정진하여 지장보살에게 인가를 받고, 미륵보살에게 계를 받는다. 그는 또한 미륵불의 도량으로 금산사와 법주사를 창건하고 미륵장육존상을 조성하고, 다시 금당 남쪽의 벽에 천상에서 내려 와 계법을 설하는 미륵불을 그려 모시기도 했다.
미륵대불은 법주사 경내 팔상전의 서쪽 산자락 앞에 조성되었다. 그 건립경위는 지금도 미륵불상조성기념비 에 자세히 수록되어 있다. 예컨대 "진표율사가 금산사에 이어 법주사에 주석하던 가운데 미륵불상을 조성했지만 대원군시대에 망실되었다. 가산거사 김수곤의 시주로 높이 80척의 미륵불을 건립하게 되었다. 작가는 김복진으로 1939년 건립에 착수했지만 1940년 작가의 요절로 완성을 보지 못했다. 20여 년 동안 미완성인 채로 있다가 1963년 재건립하게 되어 1964년 6월에 완성했다."41)는 것이다.
1939년 김복진은 법주사 住持 張石霜과 泰仁의 金水坤의 시주로 100척(33m)의 시멘트 미륵대불 조성을 요청 받는다. 이 때의 상황이 당시 〈조선일보〉에 구체적으로 나타난다.
"우리 미술계의 거장인 동양화의 김은호씨와 조각의 김복진씨가 新春에 들면서 천세에 남길 대작을 경영케 되어 미술계에서 뿐만 아니라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누구나 귀를 기울일 만한 이야깃거리를 던지고 있다. 김은호씨는 가장 아름다운 우리 고전문학의 『춘향전』의 춘향의 영정을 그려 전라북도 남원 춘향의 이야기를 빚어낸 광한루 옆 춘향의 사당에 붙이기로 되었고 김복진씨는 전자에 키가 39척이나 되는 미륵을 만들었는데 이번에 은진미륵보다 키가 크기로는 형님벌이 될 60척의 미륵불을 만들어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에 모시기로 되었다.
김복진씨가 이번에 만들려는 속리사의 미륵은 키가 육십척인 것이라 은진미륵의 오십오척 키보다 다섯 자나 더 큰 것이다. 겸하여 은진미륵은 커다란 갓까지 쓰신 키가 오십오척이었는데 비하여 이번 것은 박박 깎으신 머리라 사실은 키가 훨씬 더 큰 미륵이다. 제작은 금년 봄부터 이개 년간에 이만원의경비로 연인원 약 8.000명의 인부를 사용하여 완성키로 되었다. 재료는 돌로 쌓아가지고 콘크리트로 하는 것으로 독일의 괴스막의 ○○ 이런 재료로 만들었다고 한다."42)
이 기사는 1939년 1월 10일 <조선일보>에 「대작춘향과 미륵 신춘미술계 朗話양제」라는 제호의 기사내용이다. 예컨대 김은호의 춘향상제작과 함께 김복진의 미륵대불제작에 관한 내용을 소개한 것이다. 법주사미륵대불이 은진미륵보다 큰 60척이며, 제작기간은 2년, 경비는 2만원이며, 연인원 8천명의 인부가 동원된다는 것이다.
미륵대불의 양식은 1936년에 완성했던 <금산사미륵대불>과 흡사한 형식이었다. 금산사 미륵대불의 양식은 현재 계룡산 신흥사 소림원에 있는 금산사미륵대불의 축소모형 석고 미륵입상이나 조선미전 출품의 <불상습작>과 함께 모두 동일한 형식이다.
결국 김복진은 동일한 미륵입상을 설정하고 조형하여 이후 재료와 크기만 바꾸면서 미륵사상과 신앙을 대중들에게 조형적으로 심화시켰던 것이다.43) 그러나 일제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인한 물자 통제와 1940년 김복진의 요절로 중단되었다.
그 후 김복진의 제자 윤효중·백문기·권진규 등이 참가했지만 중단되었다가 1963년 申尙均등이 완성하였다. 이 때의 조성은 처음의 설계와는 다소 차이가 났다. 예컨대 두상 위에 면류관을 덮어 씌웠다. 상호가 검게 그을려 비와 새의 분비물 등을 피하기 위해 관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래 시멘트 재료가 백시멘트로, 처음 보다 양질의 재료가 교체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상호가 약간 바뀌어 둔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도판 14)
미륵대불은 이와 같은 변화의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지만 작품의 질은 떨어졌다. 마지막 완성 당시 보수공사에 참여했던 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 김동현 실장은 불상의 모습이 이미 1961년 당시에 이미 완성되었었고, 작업의 이유가 새의 분비물과 먼지, 풍화로 인해 심하게 얼룩지고 더러워졌고 몰타르의 박락으로 보기에 흉했다고 한다. 작업의 범위는 새의 분비물을 제거하고, 표면이 벗겨진 불상을 먼지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관을 씌우고, 장엄의 요소로 철조광배를 설치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작업의 형태 또한 쌍안경을 사용하여 전체를 밑에서 올려다보고는 인부들에게 지시하는 형식을 취했다. 불상의 면류관 형태와 광배는 임천씨의 도안에 의한 것이다. 이로써 보면 법주사 미륵대불은 미완성의 상태가 아닌, 1961년 이전에 이미 완성된 상태로 서 있었음을 재인식토록 한다.44) 그러므로 김복진의 <법주사미륵대불>작업은 그의 사후 제자들이 계승해서 정리된 것이다.
1987년 <법주사미륵대불>은 부식과 균열 등 보존상의 이유로 철거되고(도판 15), 1990년 청동미륵대불로 복원되었다.(도판 16) 1987년 4월, 김복진의 시멘트 불상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밝혀진 것은 단 한 개의 철근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돌로만 쌓아 올린 공법을 실현시킨 대작이라는 점이다. 즉 시멘트 내부의 철근 부식 등의 이유로 도괴 위험을 들어 철거했지만 김복진은 선진기술로 영구성 문제 등을 이미 감안하여 시공했던 것이다.45) 청동미륵대불 조성공사 소위원회는 김복진과 그의 제자들이 제작한 시멘트불상이 한국시멘트문화의 상징물로써 불상의 형체가 원만하여 모형불상을 이 불상으로 하였다. 그러나 현재의 청동상은 상호에서부터 전체적인 느낌이 시멘트 불상에 비해 온화하지 못하다. 약간의 위압감과 함께 친근감을 배제하는 俗氣마저 보이기도 한다.
김복진의 시멘트 불상은 비록 철거되었지만, 전통의 계승과 창조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씨는 '다소 일이 큽니다. 조각이라기보다도 건축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는데 금산사미륵은 서울에서 만들었는데 이번은 속리사에 가서 제작하게 됩니다. 첫째 근세의 미륵은 체격이 그리 좋지 못한데 불만이 있습니다. 이번 것은 체격이 건전한 미륵을 만들려는데 옛날 우리 조각으로 말하면 신라 것에 가까운 것이 될 것입니다.”46)
예컨대 김복진은 근세의 미륵불상이 온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과 반성을 가하면서 <법주사미륵대불>은 당당하면서도 균형 잡힌 불상으로 조성하고자 했다. 사실 조선시대의 불상은 불교의 탄압으로 세련미와는 거리가 멀고 둔중함을 특징으로 삼았다. 옷도 두터운 갑옷 형태요 옷 주름 또한 도식화되어 인체와 관련이 없어 前 時代의 세련됨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조선시대 불상의 쇠퇴는 김복진이 화두로 생각했던 전통의 계승과 재창조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비록 미완의 상태였지만 시멘트를 사용한 새로운 실험의식과 미륵사상 그리고 신앙이라는 종교적 신성성을 표방하고자 했던 것이다. 더욱이 '신라 것에 가까운 건전한 미륵을 만들려는' 전통성을 표방한 미술사적 의의는 대단한 것이었다.
한편 김복진이 제작한 불상은 일정한 양식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먼저 그의 불상은 모두 입상이다. 재료 또한 흙, 석고, 시멘트 등 다양하다. 그 가운데 석고와 시멘트는 20세기 이전의 전통적 불상 조성 때는 관심도 갖지 않는 재료였다.
김복진이 흙과 석고 시멘트를 재료로 사용했다는 것은 근대성을 담지한 작가의 실험의식과 새로운 조형 욕구의 표현인 것이다. 또한 김복진의 불상은 심혈을 기울인 본격적인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금산사 미륵불이 11미터, 법주사의 미륵불이 33미터 크기라는 것은 대형작가만이 실현해 낼 수 있는 작가적 역량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불상은 불교도상학이라는 특성을 충분히 소화한 이후에 제작이 가능하다. 32상 80종호는 물론 전통적 불상 제작의 분위기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착수조차 불가능한 것이다. 더욱이 그 기초는 조형성과 함께 불교에 대한 이해가 필수이며, 신앙심이 전제되어야 한다. 결국 불상예술은 종교성·사회성·예술성이 발휘되어야 한다.
김복진의 불상예술은 첫째, 입상으로 전진적인 당당한 체구에 사실적 형상을 지향했다. 둘째, 전체적인 분위기는 남성적 호방함을 부여하면서도 옷 주름 등 세부의 구체적 표현에서는 섬세하면서도 유연한 자태를 보인다. 금산사의 불상은 장쾌함이 강조되었고, 소림원 불상은 여성적일 정도로 날씬한 몸매의 유려한 운동감을 강조했다. 셋째, 手印은 크게 施無與願印 형식으로 오른손을 어깨 높이로 들어 손바닥을 앞으로 보이고 있고, 왼손은 팔꿈치와 직각을 이루며 持物을 들고 있다. 지물은 연꽃 봉오리로 미륵을 상징한다. 넷째, 손가락은 사실적 표현으로 실제의 사람모습과 같다. 이것은 서양의 인체상, 혹은 현대의 인체상 등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방법이다. 손가락 표현에서 작가의 근대성에 대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다섯째, 입술은 얇다. 조선시대의 불상과 같이 입이 작아 한국적 특성이 깃들여 있다. 그러나 상호는 중후한 원만상으로 전성기 신라불상과 친연성이 있다. 여섯째, 옷 주름의 유연한 표현은 작가의 독특한 기량표현이다. 이전의 불상양식과도 상이한 측면으로 조형성을 제고시켜 준다. 소림원불상의 표현은 매우 리듬감 있으며, 창의성 또한 뚜렷하다. 금산사 미륵대불은 보처상의 둔중하고도 뭉툭한 옷 주름 표현에 비하여 본존상의 유연한 옷 주름 표현은 김복진의 작가적 역량이 발휘된 좋은 예가 된다.
요컨대 김복진의 불상예술은 사실주의적 조형방식으로 위엄있게 표현되었다. 이것은 사찰봉안용이라는 신앙의 대상임을 고려, 불교의 도상학을 존중하면서 나름대로 인체 조소예술이라는 측면을 절묘하게 조화시킨 것이다. 여래로서의 단순한 신체적 특징을 중후하게 표현하면서 조형적 운치를 자아냈고, 佛衣 등에서 작가적 조형성을 발휘했다. 특히 상호의 조선시대적 분위기는 곧 전통의 존중이지만 하체의 표현은 작가의 개성적 표현방식이다. 물론 그의 작품 기저에는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중요한 부분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Ⅳ. 金復鎭 佛像藝術의 現代的 意義와 傳統의 再創造
1. 金復鎭 佛像藝術의 現代的 意義
김복진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약 40여 점의 작품을 만들었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그러나 김복진은 척박한 한국근대조소의 시발점이자 근대조각 형성기의 기점이라는 측면에서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김복진을 단순한 의미를 지닌 조소가가 아닌 한국근대조각사의 차원에서 평가하는 이유다.
한국근대조소가 서구이식의 수용만을 강조하지 않고 전통을 기저로 하여 창조가 가능하고 창조는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 가는 法古創新을 중시한다면 몇 가지 사례는 김복진 예술의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는데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1919년 조성된 高宗의 陵과 1926년 조성된 純宗陵의 능묘석물은 전통과 근대의 기로에서 시대상황과 민감하게 작용하면서 그것을 수용하고 반영했다. 또한 1905년 梵魚寺의 羅漢像은 전통불교조각에서도 근대적인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이와 같이 김복진 이전의 한국조각은 전통적인 도상을 토대로 불교조각과 능묘석물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적인 조소예술의 변화는 서양의 유화기법과 원근법 등 종래의 미술언어와는 다른 실제적인 기법들이 도입되면서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제작태도에서 벗어나 세밀한 묘사와 논리적이고 해부학적인 측면에서 대상에 접근하는 조소기법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다.47)
한편, 1920년대 이후는 서구 조소예술의 이식이 이루어졌고 자기화를 모색하고자 했던 시기였다. 예컨대 김복진은 1920년 일본 동경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한 이후 다카무라 고운(高村光雲)·타데하타 타이무(建 大夢)·아사쿠라 후미오(朝倉文夫)와 같은 일본거장들에게 조소뿐만 아니라 전통과 그 계승에 관해 배워 나갔다. 고촌광운은 승려출신으로 목조를 지속하는 가운데 서구기법을 가미하여 사실성을 극대화해 나간 인물이다. 건전대몽, 조창문부는 모두 사실성을 추구한 작가들로 김복진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 가운데 다카무라 고운은 佛師 高村東雲의 제자인 동시에 그의 누이의 양자로 들어가 개명까지 했다. 그는 明治維新 전후 象牙 조각이 크게 유행할 때도 시류를 타지 않고 목조를 지킨 목조각의 권위자였다.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출품했던 <늙은 원숭이, 1893>같은 목조각 작품은 유명하다. 1890년부터 동경미술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제자를 양성하면서 서양미술의 사실성을 도입한 작품을 시도했다. 그는 일본 근대 목조각의 비조로 불리는 존재이다. 더불어 그의 장남인 高村光太郞(1883∼1956) 역시 유명한 조소예술가였다.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하고 로댕을 연구했으며, 녹색의 태양 과 같은 일본 최초의 인상파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道程』, 『智惠子抄』 같은 시집의 출판, <손>이나 <구로다세이키흉상>같은 다수의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조소예술가, 화가, 시인으로 활동한 이외에 평론, 번역을 통해서 서양 근대 예술사조를 일본에 소개하는 등 계몽사상가로서도 명성을 높인 바 있다.
김복진의 이후의 변화는 4학년 여름 재학시절에 제작한 작품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예컨대 이 때의 작품 <여인입상>은 로댕의 <이브>를 모델로 한 작품인데 이것은 김복진뿐만 아니라 조선에 로댕의 서구 근대사실주의 조소예술이 이식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구이식은 곧이어 전통의 인식과 창조로 이어진다.
김복진은 전봉래의 나체여인 전신좌상 작품 <발(髮)>에 대한 평가에서 "이분의 조각은 어떻게 보든지 너무 버터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확실히 작가의 것이 아니고 잠시 빌어온 것같이 보인다."48)고 하였다. 그러므로 김복진이 당시 주장했고 강조한 것은 빌어온 것이 아닌 작가의 것이어야 한다
고희동 : 대체로 동씨는 화가로서 장래가 대단히 위험한 분이다. 나는 년전에 선전 일회에 출품한 동씨의 작품을 보고서 환멸을 느낀 일이 있다. 서양화의 동양화화 이것이 동씨의 주장인 듯하다마는 대체로는 실패를 거듭할 뿐이다.
이한복 : 이번 작품을 보고서 낙망을 아니 할 수 없게 되었다. <금강전경> <우후>를 가지고 보더라도 직수입한 소화되지 않은 기교를 고집, 배열한데 지나지 않는다.49)
위의 인용문은 김복진이 1925년 <조선일보>에 쓴 작품에 대한 비평이다. 그는 여기에서 '서양화의 東洋化', '직수입한 소화되지 않은 기교'등으로 서구이식을 비판했으며 자기의 것으로 소화를 강조했다. 더욱이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조차도 향토성을 무리하게 짜내려다 실패했다고 고백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요컨대 김복진은 조소예술에서 입체적 정확성과 안정성의 중요성을 거론하고50) 모든 과정이 작가 안에서 정신적 내용의 폭발을 이룬 다음 개성을 가지고 대상이 지닌 생명력과 형식미를 주관화시키는 것이라고 했다.51) 그것은 서구조소예술을 모방하고 수입하지만 '내 생활이 완전히 승복'할 때까지 소화해 나가는 과정을 밟아 나갔던 그의 작품세계와 동일한 것이었다. 즉, 김복진의 조소예술의 방법론은 서구 조소예술 수용과정을 매우 건강하게 자기화해 나갈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이루었다.
1920년대 후반 김복진의 이러한 작가정신은 1930년대 중반의 동상예술에 대한 그의 주장에서도 강렬하게 나타난다. 즉, 그는 동상예술이란 단순히 주문에 의해 제작하는 상품이 아닌 업적과 영향을 헤아리고 표현하는 예술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첫째, 사람을 닮아야 할 것, 둘째, 균제와 양감을 지닌 예술가치가 있어야 할 것을 동상예술의 조건으로 삼았다.
"우선 서울 안에 있는 10여 개의 동상을 본다고 하더라도 사람에 가까운 이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균제가 있고 양감을 가진 예술적 작품다운 것이 몇이나 될 것인가. 용모가 근사하여야 하겠지만 생명을 갖지 않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구리 속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은 오직 조각하는 사람들의 영분(領分)일 것이니 이 생명의 창조를 하지 못하면 조각가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릴 것이다."52)
또한 김복진의 동상예술에서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위의 인용문에서 엿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생명의 창조였다. 생명을 갖지 않는다면 무엇보다도 조각가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더욱이 작가의 주관성 강조와 함께 김복진은 조선다운 것을 논했다.
"조각 및 공예품 중 내 눈에 고운 자극을 준 것은 거의 하나도 없었다. 대체로 향토색이나 조선의 정조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표현될 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조선 특유의 정취는 하루 이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며 손쉽게 모방되어지는 것도 아니다. 조선의 환경에 그대로 물젖고 그 속에서 생장하지 않고서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 사람만이 조선의 진실을 붙잡는다는 것도 아니다."53)
김복진이 이와 같은 조선다운 것을 강조한 것은 다른 한편으로 당시 미술계가 조선다운 것에 대한 집착을 경고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즉 '조선이라는 개념에 붙잡히어 여기에 맞추어 보려고 고분 벽화의 일부를 전제하기도 하고 古器物의 형태를 붙잡아 보아도 이미 이곳에는 조선과 작별한 껍데기만 남는다'고 했다.
이와 같은 김복진의 서구이식과 그 이식에 대한 경고, 그리고 조선다운 것에 대한 강조와 그 집착에 대한 비판은 바로 그 자신의 작품을 통해 현실로 나타난다.
"선생은 조선 고전에 대하여서도 누구보다 관심이 깊으시며, 이를 계승함에 있어서 적극적이었으며 자기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기회만 있으면 여러 친우 제자들과 함께 친히 고찰을 찾아서 그 건축물과 조각의 역사적 유래와 구조 또한 그 조형성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을 들려주었는 바 그 설명에서 우리 선조들의 아름다운 英偉에 대하여 칭송하고 경탄하였다. 고전적인 불상조각에 대해서도 그 당시 인민들의 고귀한 풍격과 수법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하였다."54)
김복진은 박승구의 술회처럼 무엇보다도 조선 고전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전통미술에 대한 연구와 그 계승을 강조했다. 옛 건축물과 조각에 대한 역사적 유래에서부터 구조와 조형성 그리고 조상들의 얼을 숭배했던 것이다. 고전적인 불상조각은 이러한 김복진의 예술적 과제를 해결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실제로 김복진은 1925년 스케치 <석굴암>을 시작으로 <관세음>과 석가모니불상을 조형했고, 만년에는 금산사나 법주사의 미륵대불을 중심으로 불상조각에 대한 연구와 작품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금산사나 법주사의 미륵불은 그 규모나 양식면에서 분명 전 시기를 앞지르고 있었다.
사실 조선시대의 불상은 등이 앞으로 굽고 턱이 내밀리고 있으며, 얼굴에는 개성이 나타나 있지 않고 法衣는 두꺼워 인체표현이 없으며, 衣紋은 사실적이 아닐 뿐만 아니라 형식적이어서 결코 예술적인 아름다움이나 창조적인 양식의 전환을 찾기 힘들었다. 그러나 김복진의 작품은 이러한 조선시대 불상이 지닌 한계를 극복했다.
금산사나 법주사의 미륵대불은 씩씩해 보이는 어깨와 가슴이 멋지다. 거기에 가냘픈 듯 섬세한 옷 주름이 아름답고 좌우 길이가 달리 늘어뜨린 긴 옷자락은 하늘을 나는 듯 가볍다. 또한 장딴지가 대단히 팽팽하여 의연하고 거센 힘을 숨긴 듯 강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전체형상의 시원스러움이 가장 큰 특징이자 매력으로 거론된다. 잘 잡힌 균형과 구석구석 세부가 어울려 빚어내는 조화로움을 일거에 수준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 올리는 힘이 바로 그 시원함인 듯 하다.55)
불상은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이고 최고의 경지인 깨달은 이(覺者)를 상징하는 것이다. 불상은 제작자에 따라 개성이 나타나지만 고전 규범이 가장 완강하게 관철되는 종교예술의 하나이다. 그 개성이나 변화 또한 미묘하고 완만한 것이다. 김복진의 불상 또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세부형식의 변화, 독창적이고 완벽한 구성, 내면에서 솟아나는 탄력 따위를 헤아려 볼 때 20세기뿐만 아니라 우리 조소예술사 전반에 걸쳐 찾아보기 힘든 걸작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요컨대 김복진은 불상예술을 통해 단절된 전통문화의 발굴과 계승에 심혈을 기울였고, 비록 서구조소의 영향을 받았지만, 전통의 재창조를 표방하고 실질적으로 노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작품세계와 역량은 그의 제자들에게 계승되었다. 제자 이국전은 스승 김복진의 교육에 대해 몇 가지로 정리했다. 그 가운데 김복진은 민족고전의 전통을 존중하여서 풍부한 고전 전통이 가지고 있는 내용 예컨대 선진적 천재들이 일으켜 세운 성과를 존경하고 거기서 그 진실을 배우라고 했다. 조선의 불상과 석조·목조 조각의 우수성을 강조한 것이 그 구체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부단히 변화 발전하는 현실을 검토하고 거기서 새로운 싹을 발견하고 이를 발전시킬 것을 강조했다. 그러므로 김복진은 제자들에게 결코 스승을 맹목적으로 모방하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진실한 옳은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예술적 기교의 능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를 위하여 작가는 일생을 통하여 연마해야 한다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는 것이다.56) 김복진이 한국근대기의 단순한 조소예술가의 범위를 넘어서 한국조소예술사에서 반드시 거론되어야 하고 그 역사적 예술적 위상을 규명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상으로 필자는 한국근대 조소예술의 거두 김복진의 불상예술을 통해 그의 생애와 불교와의 인연 그리고 금산사와 법주사의 미륵대불을 중심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살펴보았다. 아울러 그가 한국 조소예술의 세계에 차지하고 있는 위상의 면모를 살펴보았다. 이러한 작업은 김복진 개인에 국한된 연구라기보다는 전통 불교조소의 연구를 기본적 임무로 하고 있는 오늘날의 불교조소가들을 위한, 그리고 한국불교조소의 미래를 설계하는데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연구라고 생각한다.
2. 傳統의 再創造에 대한 反省과 課題
필자는 이상과 같은 김복진의 불상예술에 대한 연구를 기초로 오늘날 불교조소계가 안고 있는 기법상의 문제점과 과제를 마지막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문제는 일차적으로 김복진이 연구하고 작품활동을 했던 불상예술의 현대적 의의를 되살리는 것에 목적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불상예술을 통한 전통의 계승과 현대적 의미에 어울리는 재창조를 위해 기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필자는 개인의 주관적이고 관념적인 차원에서가 아닌 객관적이고 냉철한 사고의식을 바탕으로 현재 한국불교조소가 담당해야 할 반성과 과제를 전개하고자 한다.
첫째, 전통문화에 대한 맹목적 답습을 거론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전통문화가 지닌 의미와 그 성격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것에 이유가 있다. 특히 전통문화는 '전근대적인 것', '개발되지 못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문화는 단순히 "과거의 한 인간집단의 생활양식의 총체"를 가리키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전통문화의 진정한 의미는 '계통을 받아 전한다.'는 뜻과 관습 가운데 역사적 배경을 가지며, 특히 '높은 규범적 의의를 지니고 전하여 내려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전통문화는 단순히 과거의 것을 가리키고 그것을 맹목적으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다. 전통문화는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라는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전통문화의 이러한 개념은 그 성격에서도 나타난다. 전통문화의 지속적인 성격과 변화하는 성격이다. 지속성은 인간이 생활 속에서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터득한 지식을 다음 세대에 전하며, 다음 세대들은 여기에 자신이 새롭게 경험한 바를 더해 다시 그 다음 세대로 전하게 된다. 이렇게 세대간의 지식의 전달과정을 통해서 전통문화는 시간이 흐를수록 지속되고 축적되는 성격을 형성하게 된다. 한편 전통문화의 변화하는 성격은 지속성과 긴밀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다. 전통문화는 세대에서 세대로 전해내려 오는 과정에서 지속되고 축적된다. 전통문화는 이 과정에서 변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다른 사회집단의 문화적 요소가 유입되면서 나타나는 변화, 즉 文化接變과 내부적 요인에 의한 변화로 구분된다. 외부로부터 유입되었거나 또는 내부적으로 새로운 지식이 보다 유용한 것으로 판명되어 전체 사회에 확산됨으로서 발생하는 문화의 변화와 생성과정을 통해서, 그 기능을 상실한 낡은 문화요소들은 사라지게 되며 새롭고 유용한 문화요소들이 그 기능을 대신하게 되는 변화가 항상 계속되는 것이다.
전통문화의 이러한 개념과 성격은 그것이 전연 변화하지 않는다거나 과거의 것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이라는 부정적인 의미를 일소하는 것이다. 전통문화의 생명력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현대 불교조소가들은 전통문화가 지닌 이러한 개념과 특성을 이해하고 있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불교조소에 대한 이론과 실기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교육의 장 또한 마련되지 못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작가들은 전통사찰 등에 조성되어 있는 역사적 전통을 지닌 불상을 통해 獨學으로 불상조소에 대해 수학한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전국 곳곳의 사찰에 봉안되어 불교신자들에게 예배의 대상이 되고 있는 불상들은 일차적으로 불교조소가의 모방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그 모방 또한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라시대는 그 시대 나름대로의 조형의식과 시대미감이 존재했었다. 마찬가지로 20세기는 20세기 나름대로의 美意識이 존재한다. 깨달음의 세계는 불변하지만 그 경지를 조형화하는 방식은 시대나 지역 그리고 민족에 따라 서로 다르다. 사찰건축·불상·범종 등 새롭게 조성된 불교예술은 창의성의 결여와 모방에 국한되어 있으며 표현기술 또한 미치지 못해 조악하다. 오늘날 우리 불상예술가들은 과거 8세기나 15세기 그리고 18세기에 조성된 불상에서 현재의 예술정신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21세기의 불상예술에 과거를 맹목적으로 이식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발상의 대전환이 있어야 한다. 보수적인 시각에서 탄력성이 있으면서도 신선한 감각을 지니고 작품활동에 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둘째, 인체연구와 같은 기본적인 미술이론교육이 부족하다. 불상조각은 대부분이 인체를 기본으로 한 조각이다. 여래상, 보살상, 나한상, 각종 신중상이 모두 인체를 빌려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부처가 인격의 완성자여서 불상 또한 창조자도 아니며, 절대적 존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격의 정도에 따라 인체적 표현이 다양한 모습으로 조각되었다. 대개 불교는 그 인격의 정도에 따라 인체를 빌려 열 가지 양식으로 조각하고 있다.57) 그러므로 인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온전한 불상조각이 표현될 수 없다.
현재의 불상조각은 전통의 맹목적인 답습과 그 답습의 정도가 기준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다. 예컨대 실제 진행되고 있는 작품활동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사례는 불상의 양식과 전체적인 불상의 비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현재 일부 작가들에 의해 조성된 불상의 전체적인 양식은 기본이고 손목과 옷소매에 대한 부조화는 불상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개인에 국한된 수련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지적된다. 더욱이 현대조소의 교육과정은 인체를 통한 실습작업 뿐만 아니라 해부학을 필수적으로 배우게 되지만, 현재 활동하고 있는 전통불상에 기반을 두고 있는 불상조소가들은 이와 같은 인체와 해부학에 대한 이해가 없는 실정이다. 특히 인체에 대한 비례는 서양과 동양이 다르다. 국가와 지역마다 얼굴이나 골격이 그들이 살아 온 풍토에 따라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종교적 조형물은 그 종교가 지닌 특성이나 표방하는 교리를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아울러 신앙적인 면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시적인 면모가 드러나 있다. 현대 불교조소가들은 이와 같은 동서양 인체가 지닌 비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불상의 전체적인 비례가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예컨대 동양의 인체 비례에 입각하여 관찰했을 때 전체적인 비례가 조화롭지 못하여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도판 17·18·19·20·22·24) 佛頭는 입체감이 있지만 가슴과 하체는 평면적인 것도 있으며(도판 23), 상체의 조각은 양감이 풍부하지만 하체는 뼈와 근육, 살이 없고 발이 작게 표현되어 있는 경우도 보인다.(도판 26) 이 밖에 허리부분이 사라지고 다리와 골반으로 바로 연결되어 있거나(도판 29), 허리에서 골반이 빠져버린 상태(도판 30·32)도 흔하게 찾아 볼 수 있다. 그리고 손이 작게 표현되어 있고 오른쪽 다리가 길고 발이 짧은 경우도 볼 수 있다.(도판 34)
현재 조성되고 있는 불교조각이 지닌 가장 큰 문제점은 불상의 전체 비례가 균형이 맞지 않고 심한 경우에는 난쟁이로 표현되어 있다는 점이다.(도판 45·46·47) 어떤 것은 얼굴과 손, 발을 제외하면 뼈대와 근육의 표현이 조화롭지 못하고 옷 처리로 마무리하고 있을 뿐이다. 뼈와 근육을 표현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사항이며, 옷 처리 역시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야 한다.(도판 42)
상체는 佛頭가 적고 하체가 지나치게 큰 경우(도판 20·22·24)와 손이 크게 강조되어 있는 것(도판 21)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혹은 오른쪽 팔과 젖가슴이 너무 강조되어 부어있으며, 어깨선에서 볼 때 어깨가 올라와 목과 머리가 들어가게 보이는 것도 있다.(도판 33) 가장 심한 경우는 전체 볼륨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마치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은 상태인 것이다.(도판 35·36)
한편 상체의 연결부위인 허리가 온전히 표현되어 있지 않아 하체가 빈약하게 보인다.(도판 40) 또한 상체의 어깨부분은 목의 연결부위에서 어깨가 내려 앉아있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는 골격을 생각하지 않고 옷 처리만 생각하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도판 43) 손의 묘사 역시 뼈마디가 표현되지 않고 살만 묘사한 것이다.(도판 44)
하체는 무릎과 발의 연결 부위인 발목이 전체적으로 부어있으며, 발목과 발의 연결부위가 자연스럽지 못하다.(도판 17·37) 다리가 신체구조상 맞지 않고 옷 표현에 치우친 나머지 몸의 형태가 사라져 버린 경우도 찾아 볼 수 있다.(도판 22) 심지어 상체와 하체의 연결부위인 골반에서 다리가 탈골되어 빠져있는 상태도 있다.(도판 25·27·28) 아울러 우측 다리의 무릎부위가 제 위치가 아니고 발은 뼈대에서 빠져나온 상태인 것도 있다.(도판 32)
다리부분은 통나무 위에 천만 표현되어 있으며, 발목 부위가 지나치게 인위적으로 묘사되어 있다.(도판 37·38) 하체의 옷처리 역시 너무 복잡하고 산만하여 정연한 분위기가 사라져버린 경우도 있다.(도판 41) 심한 경우는 머리와 가슴은 있지만 하체가 없어진 경우다.(도판 48·49·50) 그리고 오른쪽 다리가 짧고 발목 부위의 연결부위는 비정상적인 위치에 놓여 있으며, 손과 발이 매우 적은 작품도 있다.(도판 39)
셋째, 현대불교조소가 지니고 있는 뚜렷한 문제점은 佛像의 相好가 종교적인 신성성이나 신앙의 대상으로서, 그리고 양식적인 측면에서 독창적인 이미지를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불상의 相好가 심지어는 작가의 얼굴을 띠고 있기까지 하다는 점이다.
이러한 치명적인 결함은 불상의 조성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가 이루어지지 못한 탓이다. 대승불교는 불상의 출현으로 크게 융성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상의 조성은 먼저 역사적 인물로서의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절대적 존재로서의 특색을 구비한 부처를 생각할 수 있다. 32상 80종호는 그러한 부처를 다른 일상적인 존재와 구별 짓는 구체적인 특징이다. 32상은 한눈으로 쉽게 구분되는 특징이고, 80종호는 보다 세부적인 특징적 요소를 말한다. 말하자면 절대적 존재로서의 불상은 보통 인간과는 다른 32가지의 큰 특징적 요소가 있고 또한 80가지의 세부적 특징이 있다는 것이다.
그 대체적인 특징은 먼저 32상으로서의 肉 相이다. 이것은 머리 정상에 육계가 있다는 것이다. 다음 白毫相은 이마의 중앙에 백호가 있다는 것이며, 手足千輻輪相은 손이나 발의 바닥에 車輪과 같은 모양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빛을 발하는 金色相이라는 것 등이 있다.
이상과 같이 부처는 32상 80종호라고 하는 보통의 인간과는 다른 여러 가지 특징을 구비하고 있으므로 불상이나 불화를 제작할 때는 이들 32상 80종호의 특징을 살려서 제작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이 32상 80종호는 어떠한 부처일지라도 공통된 것이므로 얼굴이나 신체만을 보고는 그 불상이 무슨 불상인지 알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여러 불상 중에서 무슨 부처인지를 가려내는 방법으로서 양손으로 맺는 印相에 의해 구분하기도 한다. 인상은 結印·印契라고도 하며, 그 맺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어 불상을 구분하는 데 좋은 기준이 된다.
작가의 불상 제작은 적어도 이러한 부처의 상호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기초적인 이해가 무시된다는 것은 불상자체가 그 외형적인 측면에서도 세속화를 극복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세속화는 전통의 진부한 모방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그것조차도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못하는 치명적인 한계를 지니게 된다.
한편, 작가는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 수많은 불상을 관찰하고 습작활동을 통해 보편적인 불상의 양식 가운데 자신만의 개성을 지닌 상호를 창조해야 한다. 이것은 많은 숙련과 불상의 이해를 통해 탈피할 수 있으며, 신앙과 수행을 통해 구체적으로 획득될 수 있다.
불상은 부처를 조각한 것이다. 깨달은 자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조각에 있어서의 量感·面·表面構造 등 조형언어를 통하여 부처가 무엇인지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조각이야말로 經典보다도 더 직접적인 불교사상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추상적인 개념이 가장 물질적인 것으로 구체화한 것이 佛像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조형언어를 올바로 읽어 내릴 줄 알아야 부처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므로 불상예술은 불교교리·종교적 체험·종교사·미술학·미적 체험 등을 통해 형성되었을 때 작가의 얼굴과 닮은 불상의 상호가 아니라 깨달음의 이상을 온전히 담고 있는 작품이 탄생된다고 생각한다.
넷째, 신앙심이 아닌 상업성을 강조한 것은 작품의 질적인 문제와 직결된다. 과거 匠人들은 국가의 경제적인 지원으로 불상을 제작하였으며, 시간이나 경제적인 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더욱이 장인들은 불상 조성을 위한 철저한 수행과 정성을 우선시했기 때문에 우수한 작품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조소인구의 급증 속에 수행과 정성이 강조되고 고뇌 어린 작품성보다는 저급한 상업성이 우선시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자본논리에 의해 예술품의 생산과 소비라는 소통구조의 사회에서는 순수한 작품활동을 기대하기 힘들다. 한편 경제적인 측면을 외면한 채 끊임없는 창작활동을 기대하는 것도 무리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조소가는 무엇보다도 조소활동의 목적을 분명히 정립해야 한다. 아울러 예술가로서의 의연한 면모 또한 지켜야 한다.
한편, 과거의 불상은 국가나 지방 유지들의 경제적 지원으로 제작하게 되었으며, 조소에 재주있는 승려들이 담당하여 독실한 신앙심과 최고의 재료를 선택했다. 예컨대 흙이나 석재를 사용하여 중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러나 현재는 佛事를 담당한 스님들이 경제적인 문제를 이유로 최소한의 비용으로 불상을 조성하고자 하기 때문에 FRP나 폴리코트 등 플라스틱 재료를 빈번하게 이용한다.
오늘날 불상조소에 흔히 쓰이는 이들 재료의 장점은 가볍고 다루기 쉽다. 그러나 천연재료가 아닌 인공재료이기 때문에 화재나 충격을 가했을 경우 쉽게 파손이 되고 무게감이 없어 경박한 단점을 지니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재료는 결국 환경을 저해한 채 재활용이 되지 않는 산업쓰레기로 둔갑하게 된다. 그리고 목재를 사용했을 경우에도 과거에는 통나무 하나에 전체의 상을 조성했지만 현재는 통나무를 조립해서 조성한다.
작가가 조성한 작품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그의 창작품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사원이나 예배장소에 조성된다면 그 순간부터 작품의 의미뿐만 아니라 중생들이 예배의 대상으로 기능한다.
우리 작가는 쉽게 이루어진 것은 쉽게 소멸한다는 보편적인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작가로서의 사명감이 대두되는 것이다. 우리의 작품은 공간의 일부분을 차지하면서 장식이나 전시의 기능만을 담당하기 보다는 중생들의 아픔을 달래고 소원을 비는 부처님으로 혹은 보살님으로 모셔지는 것이다. 재료나 양식 혹은 제작기법은 전통적인 면을 기본으로 하되 현대적 흐름과 결코 멀어져서는 않된다. 그러나 전통의 재창조만을 강조한 채 기초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현대적 요소의 도입과 양산은 결국 한국 불교조소계의 치명적인 손실을 가져 다 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한 작품창작의 차원이 아닌 중생의 고통과 염원을 치유하고 해결하는 불교의 대승적인 자비정신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다섯째, 현대의 불교조소가들은 기능성은 있지만, 불교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불교를 배경으로 한 예배상은 모두 교리에 입각하여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교리에 있는 대로 형상이 만들어져야 하므로 불상이 가지고 있는 교리의 배경을 기본적으로 알아두어야 한다.
佛은 'Buddha(佛陀)'의 약칭이다. '覺者' 곧 진리를 깨달은 사람, 진리에 도달한 사람의 뜻이고 '如來'라고도 한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불이란 곧 '석가모니(Sakyamuni)'를 가리키는 말이다. 실제 역사 속의 인물인 것이다. 그는 자비와 지혜의 덕을 겸비하였고 도를 깨닫고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 석가모니는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으로 생활하다가 드디어 부처가 되신 분으로 應身佛이라고 한다.
한편, 대일여래, 아미타여래, 약사여래같이 인간의 형태로 태어나지 않은 부처도 있다. 이러한 부처를 法身佛이라고도 한다. 대일여래는 마하비로자나여래라고도 하며, 전우주 어디서나 빛을 발하는 참된 부처이며 석가여래는 그 분신으로 태어났다고 생각하였고, 그의 지혜의 광명은 주야의 구별을 주는 해보다 더하다고 생각한다.
아미타여래는 무량광여래, 무량수여래라고도 부른다. 이 부처는 지금도 서방 극락세계에 있으며 그의 광명과 자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무한한 세계에까지 미치고 있으며 이 광명을 받은 자는 일체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약사여래는 동방 유리광세계의 주인이며 大醫王佛이라고도 하여 중생의 병을 치료하고 수명을 연장하며 재화를 소멸하고 의복, 음식 등을 만족하게 하는 등 12대원을 세운 부처이다. 그러므로 이 부처는 항상 손에 약 항아리를 들고 있다.
이 밖에도 여러 부처가 있어서 부처는 석가모니 한 분만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 사실 경전에 보이는 부처만 해도 35불, 53불, 1천불, 1만 3천불 등이 있다.
한편, 보살은 성불하기 위하여 수행에 힘쓰는 사람의 총칭인 '보리살타'의 약칭이다. 곧 大道, 大覺을 바라는 사람으로 부처는 아니다. 보살은 위로는 부처를 통해 불타의 正覺의 지혜이자 최고의 이상인 佛果에 이르는 보리를 구하는 일이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일이다. 그가 얻으려는, 또는 얻은 불타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나 자신만이 가지고 있어서는 아니 되며 중생을 위하여 얻어야 하고 중생을 위하여 남김없이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보살은 부처가 되기 전이므로 그 모습이 부처의 출가상과는 다르다. 보살은 정토에서 부처를 모시는 존재이므로 천상계의 복식을 한다. 실제로 우리가 표현할 때는 귀인 특히 여성의 모습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보살이 여성이기 때문은 아니며, 그의 자비로운 성격을 표현하는 데는 여성이 가장 적당한 모델이 되기 때문이다. 보살은 머리에 관을 쓰고, 몸에는 하늘을 날 수 있는 天衣를 걸치며 목걸이, 귀걸이, 팔찌, 영락 등의 장신구와 손에는 연꽃, 淨甁, 구슬 등을 들었고 얼굴은 아름답고 온화하다.
이와 같은 불과 보살의 개념은 불교의 교리를 형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구조이다. 아울러 그 형상과 복색은 자비를 토대로 이루어졌으며, 몸에 지닌 물건 역시 그들의 기능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이들 불, 보살들이 성불뿐만 아니라 온갖 장애를 겪고 있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모습인 것이다.
조각가는 이러한 불, 보살의 개념과 대승경전의 기본적인 내용을 살펴야 한다. 아울러 신앙심 또한 지니고 있어야 한다. 조각가의 기능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그 동안 많은 발전을 가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인 수양과 연구의 부족으로 인해 불교교리나 도상학적 측면, 그리고 인체구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작품제작에 있어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불상조각가들 가운데는 목조나 석조를 하는 작가들이 많다. 이들은 대부분이 塑造를 하지 못하는데 그 원인이 있다. 소조는 그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조소에서의 기본으로 자리잡았다. 또한 수정이 가능하므로 완성도 있는 작품이 될 때까지 끊임없이 수정을 가하여 제작할 수 있다. 반면 목조나 석조는 그 수정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작업도구가 지나가고 난 흔적은 수정이 불가능하여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작업상 어려움이 나타난다. 때문에 소조로 우선 모형을 제작한 다음 나무·돌등의 재료로 작업에 임했을 때 시행착오를 감소시키고 작품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여섯째, 불교조소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교육기관의 설립이 시급하다. 현재 한국미술계는 순수미술이나 종교미술이 1930년대 이후 김복진의 제자들에 의해 많은 학교가 설립되어 서구조각 분야에서는 많은 학생이 배출되어 왕성한 활동을 전문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전통조각은 조선시대를 기점으로 거의 단절되어 오늘날에는 겨우 명맥만을 이어나가고 있다. 전통조소인을 전문적으로 양성하는 교육기관은 현재까지 없다. 다만 동국대학교에서 현대 서구조각과 전통조소 교육을 병행하고 있다.
동국대학교 미술학과의 조소전공은 기초조소부터 세부조소에 이르기까지 전문적인 조소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기초조소는 미술 해부학적 바탕 위에서 사실적 표현능력을 키우며 두상 및 흉상을 내용으로 학습한다. 또 점토의 가소성을 이용, 그 재질과 기법을 연구하며, 조형적 형태를 학습하기도 한다. 조소전공에서는 이밖에 미술해부학적 바탕 위에서 인체를 대상으로 사실적 표현력을 기른다. 아울러 조소표현의 여러 요소를 감각적으로 학습하여 다양한 재료로 현대적 표현을 구체화하며, 인체 각 부위 비례측정과 공감, 양감, 운동감을 감각적으로 습득할 수 있도록 교육시키고 있다. 이와 함께 불교조소는 불교미술 가운데 가장 중요한 분야인 불교조각의 도상내용과 의미, 미양식과 역사 등에 대해서 깊이 있게 학습시키고 있다. 인도·중국·동남아시아·한국 등의 대표작품을 도판과 슬라이드를 통하여 비교하는가 하면 현장실습도 겸하고 있다.
한편, 전통조소학교 설립에는 문제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학교를 신설한다고 할지라도 지도할 선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 불교미술계에는 전통조각을 연구하면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조소가들이 있다. 그러므로 학교설립과 전통조소학과를 만들어 전통 조소인을 체계적으로 양성해야 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로 등장하고 있다.
Ⅴ. 맺음말
한국 근현대미술은 서구조각과 한국 전통문화의 계승과 재창조라고 하는 과제를 화두로 출발했다. 더욱이 이 시기는 암울한 시대상황과 함께 민족의 자주적이고 독자적인 면을 강조하고 선양하는 기간이기도 하였다. 김복진은 이와 같은 시대적 명제를 일생 동안 화두로 삼고 진력한 인물이었다. 그의 불교조각은 김복진의 서구조각과 전통문화의 계승과 재창조라는 차원에서 그 시대뿐만 아니라 이후 한국 근현대미술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김복진은 1901년에 태어나 비교적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배재고보시절의 김복진은 심각한 문제아였지만, 1학년 때는 <매일신보>에 수필을 투고하여 이른바 문학청년으로 자부심이 컸던 것이다.
한편 그는 단성사나 우미관 그리고 광무대를 출입하면서 연극과 영화에 심취하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재능은 당시 문학청년들 사이에서 주도적 인물로 부상하여 박영희·이서구·김기진 등과 반도구락부를 만들기도 했다. 결국 김복진은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몸부림치며 치열한 과정을 겪고 있었던 진보적 청년이었다.
김복진이 그의 삶에서 전환기를 맞이한 것은 1920년으로 이때 그는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東京美術學校 彫刻科에 입학했다.
동경미술학교는 1890년대 일본사회가 서구추종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전통을 새롭게 인식하고자 설립되었다. 그 주도자는 김복진의 스승이기도 했던 다카무라고운(高村光雲)으로 당시 전통을 잇는다는 명분으로 목조를 중심에 두었다. 1899년에는 木彫部와 塑造部를 설치하여 藤田文藏을 교수로 받아들여 전통목조와 서구소조가 나란히 공존했다.
김복진은 동경미술학교에서 당시 다테하라 다이무(建 大夢)의 門下에 들어갔지만, 고촌광운이 강조했던 전통계승의 사실적 경향과 건창대몽·朝倉文夫가 추구했던 서구이식의 사실적 경향을 모두 받아 들였다.
이와 같이 김복진은 짧은 인생을 살다갔지만, 그가 한국근대미술사에서 이룩한 업적은 지대하다. 더욱이 우리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측면에서의 기여는 주목할 만하다.
그것은 그의 예술관과 작품세계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우선 김복진의 주된 관심사는 조선의 향토성과 민족성을 복원시키는 것이었다. 불상예술은 그 구체적 표현에 해당된다.
김복진은 동경유학시절 고촌광운에게서 傳統과 함께 佛敎에 대한 영향을 받았다. 더욱이 그는 동경유학 시절 이미 불교에 귀의하여 출가경력이 있었다.
김복진이 그의 삶에서 불교와 관련한 작품 활동을 한 시기는 출옥 이후인 1935년부터 1940년까지 약 5년에 불과하다. 이 짧은 기간 동안 그는 흙·석고·시멘트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觀世音菩薩像과 彌勒佛像을 중심으로 작품활동을 전개했다. 이 가운데 1936년 작품인 <불상습작>은 <소림원불상>을 거쳐 <금산사미륵대불>의 원형이 되기도 한 작품으로 김복진의 불상예술의 진전을 면밀하게 살펴 볼 수 있다.
김복진의 금산사와 법주사의 미륵대불 조성은 미륵신앙에 대한 개인적인 관심사 보다는 일차적으로 금산사나 법주사가 종교적인 인연과 오랜 역사를 통해 미륵신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궁극적으로 조선의 향토성과 민족성을 표방하는데 훌륭한 대상이었던 까닭이었다. 예컨대 김복진은 근세의 미륵불상이 온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과 반성을 가하면서 <법주사미륵대불>은 당당하면서도 균형 잡힌 불상으로 조성하고자 했다.
사실 조선시대의 불상은 불교의 탄압으로 세련미와는 거리가 멀고 둔중함을 특징으로 삼았다. 옷 또한 두툼한 갑옷 형태이며, 옷 주름은 도식화되어 인체와 관련이 없어 前 時代의 세련됨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조선시대 불상의 쇠퇴는 김복진이 화두로 생각했던 전통의 계승과 재창조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비록 미완의 상태였지만 시멘트를 사용한 새로운 실험의식과 미륵사상 그리고 신앙이라는 종교적 신성성을 표방하고자 했던 것이다. 더욱이 '신라 것에 가까운 건전한 미륵을 만들려는' 전통성을 표방한 미술사적 의의는 대단한 것이었다.
김복진은 한국근대미술사에서 근대성을 추구한 미술가로서 남긴 업적은 지대하다. 우선 근대 리얼리즘 미학을 충분히 수용하는 가운데 민족전통을 계승하면서 적극성과 動勢의 미학을 확립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서구의 리얼리즘 양식과 민족전통 양식을 조화롭게 구현했다. 진보적인 사상과 미학을 바탕에 깔고 있으면서도 우리 근대미술이 당면한 문제들 이를테면 조선향토색, 민족성, 근대성, 계급성, 창작방법론 등에 관해 진지하게 연구하고 구현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김복진의 금산사와 미륵사의 미륵대불을 중심으로 한 불상예술에 대한 규명은 단순히 김복진 개인에 국한된 연구라기보다는 전통 불교조소의 연구를 기본적 임무로 하고 있는 오늘날의 불교조소가들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불교조소의 미래를 설계하는데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연구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김복진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 불교조소계가 안고 있는 문제점과 과제를 정리하는데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필자는 김복진의 불교조소에 대한 연구를 기초로 현재 한국 불교조소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거론하였다.
첫째, 불교조소계는 현재 전통문화에 대한 창조적 계승이 아닌 맹목적 답습이 일반적인 추세다. 둘째, 불상제작은 인체연구와 같은 기본적인 미술이론교육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재의 불교조소는 이러한 인체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다만 역사 속의 불상에 대한 연구와 답습이 전부인 것이다.
셋째, 佛像의 相好가 종교적인 신성성이나 신앙의 대상으로서, 그리고 양식적인 측면에서 독창적인 이미지를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넷째, 신앙심이 아닌 상업성의 강조, 다섯째, 현대의 불교조소가들은 기능성은 있지만, 불교교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여섯째, 불교조소를 체계적으로 배울 수 있는 교육기관의 설립이 시급하다.
이상의 여섯 가지 문제점은 현재 활동하고 있는 불상조소가들이라면 대체로 인정하는 사항들이다. 김복진 연구가 후학들에게 미친 영향 가운데 절대적인 것은 '조선다운 것'이나 '향토성', '민족성' 그리고 전통에 대한 계승과 올바른 재창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후학들은 실기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면에서 또한 김복진의 예술혼을 계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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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Kim Pok-jin's Buddhist Sculpture
Noh Joung-yong
Dept. of Buddhist Art & Culture
The Graduate School of Buddhism,
Dongguk University
Jeong-kwan(井觀), Kim Pok-jin(金復鎭: 1901∼1940) is a sculptor who played a pivotal role in Korean modern sculpture in the late 1930s. His art career was so short, but he has been recognized as a precursor of Korean modern sculpturing area.
His leading achievement was transplanting western ways of carving in Buddhist sculpture to the traditional Korean ones. He also emphasized on reproducing of original tradition and spirit of Korean art reflecting Korean history. His art was quite different from others' of that time because, under the ruling of Japan's colonization, most of the other sculptors were either to avert traditional sculpturing and go with the current of the time or to adhere to their own tradition irrespective of contemporary trend. He also tried to embody true ethnical identity and locality of the Joseon Dynasty through his sculpting clearly comprehending the depressive situation of that time.
His works of Buddhist sculpture are considered to be the concrete manifestation of those spirits. Kim Pok-jin was affected on both traditional ways of sculpturing and Buddhism by his instructor, Dakamura Koun(高村光雲) during his study in Tokyo, Japan. Furthermore, he had entered the Buddhist priesthood at that time.
The term over which Kim Pok-jin had done with his works related to Buddhism was just five years from 1935 to 1940. Throughout such a short period he mainly worked on his Kwanseiumbosalsang and Meereukbulsang using materials such as clay, gypsum, cement etc. Among those sculptures he made, Busangseupjak which was made in 1936 changed into Sorimwonbulsang, and fianlly made into the original work of Keumsansameereukdaebul.
The reason he made Meereukdaebul in Keumsansa and Beopjoosa was not that he had personal interest in Meereukshinang, but that those two temples had close relationship with Meereukshinang throughout their long history, that is, they could be ultimately proper objects that embodied the identity and locality of Korea. That's why Kim Pok-jin criticized on the shape of modern Meereukbulsang and tried to make Beopjoosameereukdaebul as a dignified and well-balanced Buddhist sculpture.
In fact, Buddhist sculptures in the Joseon dynasty are characterized as bovinity far from refinement because of oppressing Buddhism. Their clothes seem to be kinds of thick armor and plaits of them are so formalized that it is very difficult to look for so-called their refined beauty of the previous age.
Such declination of Buddhist sculpture in the Joseon Dynasty was his artistic target he focused on with his intention of inheriting old traditions and creating new ones as well. He tried to express religious sacredness in his art with new experiment carried out using cement even if such a trial was not fully successful. That was, however, greatly meaningful in the history of sculpture because he tried to make holy Maitreya similar to that of the Silla Dynasty.
In addition, Kim Pok-jin made a great contribution to the history of Korean modern art as an artist to pursue artistic modernity. He established ways of expressing aesthetic capture of active and dynamic postures reflecting not only Korean modern realistic aesthetics but also Korean tradition. Accordingly, his works were based on advanced thoughts and aesthetics, but many urgent problems such as locality, national identity, modernity, hierarchism Korean modern art faced at that time were also considered.
Therefore, close examination on Buddhist sculpture mainly based on Meereukdaebul in Keumsansa and Meereuksa is thought to be not on an individual artist, Kim Pok-jin, but for many current Buddhist sculptors who are responsible for studies on Korean traditional Buddhist sculpture. Furthermore, such examination is thought to be necessary for the future development of Korean Buddhist sculpture.
To be brief, researches on Kim Pok-jin are thought to be greatly helpful to examine the problems such as follows Korean Buddhist sculpture has to cope with.
First, many artists tend to follow old traditional sculpturing blindly without considering any creative succession and reproduction.
Secondly, Buddhist sculpturing should be based on fundamental theoretical education of art such as body structure, but currently we don't have any kind of study on body structure. They only adhere to the studies on old Buddhist sculptures.
Thirdly, almost of them generally fail to deliver religious sacredness as a religious symbol and original image in its shape through Buddha's face.
Fourthly, they usually focus on commercialism rather than religious sacredness.
Fifthly, most of modern Buddhist sculptors have carving skills, but run short of complete understanding the spirit and principles of Buddhism.
Finally, the educational system in which Buddhist sculpturing can be taught systematically should be established as soon as possible.
In conclusion, almost all of Buddhist sculptors currently agree to those six issues mentioned above. The most important things that researches on Kim Pok-jin have influenced to his juniors are said to be 'things Korean', 'locality of the Joseon Dynasty', 'ethnic identity', succession to predecessors' tradition and true reproduction as well. Therefore, it is thought that Buddhist sculptors, as his juniors, should succeed to his artistic spirit not only in sculpturing skills, but also in theoretical viewpoi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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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김복진이 1940년 잡지 『조광』에 연재했던 글이다.
8. 최문정, 앞의 논문,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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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전집』, pp.295∼296)
25. 이국전,「조각가 정관 김복진 선생」,『조선미술』, 1957.
(『전집』, pp.283∼284.)
26. 許河伯,「조각실에서 暗淚」,『삼천리』, 1940.(『전집』, pp.238∼239)
27.〈시대일보〉, 1925,7. 1.
28. 윤희순,「조선미술원 낙성기념 소품전을 보고」,
〈매일신보〉, 1937.4, 6.
29. 김은호,「서화백년」,〈중앙일보〉, 1977, p.169.
30. 윤범모,「반세기동안의 망각, 김복진의 발자취를 찾아서」,『가나아트』
1995년 1·2월호, pp.32∼33.
31. 윤범모, 「반세기동안의 망각, 김복진의 발자취를 찾아서」,『가나아트』
1995년 1·2월호, p.33.
32. 安震湖,『奉恩寺本末寺誌』, 1943.
33. 대한불교진흥원,『多寶』, 1994년, p.32.(윤범모,「김복진 불상예술의 세 계」,『아세아문화연구』1, 경원대학교 아세아문화연구소, 1996, p.117에서 재인용)
34. 윤범모는 인조 13년(1635)으로 정리했지만 『金山寺誌』에 의하면 인조 5년(1627)으로 표기되어 있다.(윤범모,「김복진의 불상예술의 세계」, 『아세아문화연구』1, 경원대학교 아세아문화연구소, 1996, p.106).
35. 『金山寺誌』, p.154. 한편 최완수는 미륵대불은 장육미륵불입상이 서 있던 연화대좌가 현재는 소실된 대적광전 앞에 놓여 있어 미륵전이 예전에는 현위치에 경영되지 않았다는 가설을 통해 김복진이 조성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최완수, 『명찰순례1』, 1994, p.200.)
36. 최완수, 『명찰순례』1, 대원사, 1994, p.200.
37.〈동아일보〉, 1936,7. 5.
38. 홍윤식,『한국의 불교미술』, 대원사, 1998, p.186.
39. 윤범모,「김복진의 불상예술의 세계」, 『아세아문화연구』1,
경원대학교 아세아문화연구소, 1996, p.108.
최 열,「힘의 미학」,『김복진』, 재원, 1995, pp.103∼125.
40. 한국불교연구원, 『金山寺』, 일지사, 1990, p.20.
김영태,「신라점찰법회와 진표의 교법연구」,『불교학보』9, 1972.
41. 法住寺 住持 朴秋潭, 「彌勒佛像造成紀念碑」, 1964년 6월 14일.
42.〈조선일보〉, 1939,1. 10.(『전집』, p.395.)
43. 윤범모,「김복진의 불상예술의 세계」, 『아세아문화연구』1,
경원대학교 아세아문화연구소, 1996, p.122.
44. 당시 보수공사에 참여했던 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 김동현실장의 증언이다.(윤범모,「김복진의 불상예술의 세계」,『아세아문화연구』1, 경원대학교 아세아문화연구소, 1996, p.123에서 재인용)
45.『사진으로 보는 호국청동대불조성』, 5집, 1990, 법주사.
46.〈조선일보〉, 1939,1. 10.
47. 정준모,「한국근대조소의 역사를 찾아서」,『근대를 보는 눈』,
삶과 꿈, 1999, p.18.
48. 김복진, 제4회 비전인상기 , 〈조선일보〉1925. 6. 2-7일자.(『전집』,
p.76)
49. 김복진,「협전5회평」,〈조선일보〉, 1925,3. 30.(『전집』, pp.67∼68.)
50. 김복진,「제4회 미전인상기」,〈조선일보〉, 1925,6. 2-7.(『전집』,
pp.70∼81)
51. 김복진,「제4회 미전인상기」,〈조선일보〉, 1925,6. 2-7.(『전집』)
52. 김복진,「수륙일천리」,〈조선중앙일보〉, 1935, 8.(『전집』, p.172.)
53. 김복진,「미전을 보고나서」,〈조선일보〉, 1935,5. 20-21.
(『전집』, p.100)
54. 박승구,「김복진선생을 회고하면서」,『조선미술』, 1957,5.
(『전집』, p.275.)
55. 최 열,「1935년부터 1936년까지」,『미술세계』, 1995,6.
56. 박승구,「김복진선생을 회고하면서」,『조선미술』, 1957,5.
이국전,「김복진선생」,『조선예술』, 1957,5.
57. 불교에서 말하는 인격의 정도는 여래상을 인격의 완성자로 하여 그를 지원하는 보살상과 성문, 연각 등으로 구분된다. 이들은 모두 聖子像으로 고통을 여윈 樂의 세계의 인간상으로 조각하지만, 반면 고통에 쌓인 인격 도 그 정도에 따라 天像, 人間像, 아수라상, 축생상, 아귀상, 지옥상 등으 로 구분하고 이들의 세계를 속계라고 한다.(홍윤식,「한국불교조각의 인체 표현」,『문화유산의 전통과 향기』, 민족사, 2000, p.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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