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 산
비에 젖는 청담공원길을 걸으며 우산으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듣는다. 그날의 빗소리와 닮았다. 진흥아파트 모퉁이를 돌자 모란꽃이 한창이다. 그때도 덕수궁에 모란꽃이 피었었다. 나도 모르게 40년 전의 시간 속을 걸으며 유행가 가락을 흥얼거린다.
비 내리는 여름날엔 내 가슴이 우산이 되고
눈 내리는 겨울날엔 내 가슴이 불이 되리라.
‘맞아 그때 그랬어. 누군가 여린 어깨에 빗물이 떨어지면 내가 우산이 되어주고, 가슴 시린 누군가를 만나면 내가 불이 되어준다고 그랬어. 내가 받은 대로 세상을 향해 조건 없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자고 했어.’
40년 전, 우리 집은 보증서류에 도장을 찍어주는 바람에 법정에 출입하는 일이 생겼다. 세상에는 사람끼리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고 서류에 도장을 찍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그때 처음 알았다. 어머니가 증언하는 날, 나는 어머니의 진실을 읽어내지 못하는 새내기 판사가 답답하기만 했다. 그때는 인생의 경험이 짧아서 사건을 객관적으로 읽어야 하는 판사의 어려움까지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그날도 역시 미결로 끝났다.
법원을 빠져 나오자 안개비가 거리를 적시고 있었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보다 차라리 위로가 되었다. 덕수궁 돌담길을 터벅터벅 걸어 나와 어머니를 먼저 보내드리고 다시 걸었다. 혼란스러움을 떨치지 못하고 시청 앞을 막 지날 때이다.
“비켜! 이 미친년아. 죽으려고 환장했냐? 혼자 죽는 건 괜찮은데 나까지 잡지 마. 이 미친년아.”
나는 그만 주눅이 들어 고개를 꾸뻑하고 잠시 멈춰 섰다가 차가 미끄러지듯 지나간 거리를 힘없이 바라보았다. 거리는 다시 휑해졌고 나는 그 길을 터덜터덜 다시 걸었다.
몇 번의 신호가 바뀌었는지 의식이 없다. 남들이 움직이면 나도 따라 걸으며 광교의 건널목 앞에서 멈추었다.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구두 앞부리를 멍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한참 후에 우산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두었다. 어깨에 닿던 찬 기운이 조금 줄었다. 누군가 우산을 받쳐주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였다. 그래도 그냥 두었다. 타인이 내 마음 자락에 닿지 않는 날이라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이 움직인다. 나도 따라 길을 건넜다. 서서히 옆 사람이 마음 쓰였다.
“저 이쪽으로 가야 하는 데요…고맙습니다.”
사람을 보지 않고 인사말만 나직하게 흘렸다.
“아 괜찮습니다. 가시지요.”
굵직한 남자 목소리다. 여전히 부담스럽다. 그래도 그냥 걸었다. 종각이 있는 사거리를 지날 때 다시 한 번 사양하였다.
“저 괜찮은데요.”
“가시지요. 저도 그리로 갑니다.”
조계사를 지나 견지동의 사무실 앞에 이르렀다.
“저 다 왔는데요.”
“아, 예 들어가시지요.”
들릴 듯 말듯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애써 그 사람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그는 내내 아무 말도 걸어오지 않았는데 내가 빌딩 안으로 들어서자 오던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몸조심 하십시오.”
그는 어디서부터 나를 보았을까. 혹시 택시 기사의 말을 그 사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다. 진심을 담아 인사말을 남긴 그는 총총히 빗속으로 걸어갔다. 나는 빗소리에 섞이는 그의 발소리만 잠시 듣고 있다가 계단을 터벅터벅 올라갔다. 그제서야 입술이 파르르 떨리며 흐느껴졌다.
7호선 청담 전철역의 계단을 올라오면서 그날이 생각났다.
같은 날, 봄비 가운데서 만났던 여러 질의 사람들을 기억하며 내 인생은 변해갔다. 재판에 이기기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거짓말을 해댄 사람은 훗날 후회하지 않았을까. 우중에 하마터면 사고를 칠 뻔한 그 기사양반의 가슴 떨린 날을 어떻게 갚아줄까. 인간에 대한 회의로 세상이 비극적으로 보이던 날, 바로 나에게 우산을 받쳐준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무엇하는 사람이었을까. 그래도 사람에게서 세상을 아름답게 보도록 희망을 남겨준 그 사람은 내 일생 동안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산다. 나도 그렇게 세상 사람을 없는 듯 있는 사랑으로 조용히 다가가자고 하지만 다진만큼 쉽지 않다. 그래도 가끔 노랫말 기도를 흥얼거린다.
“비 내리는 여름날엔 내가 내가 우산이 되리.”
([조선문학] 2010년 4월호)
|작법공부|
문학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문학’이라는 용어의 뜻은 ‘창작문학’을 의미한다. 창작문학이 아닌 일반산문문학의 개념도 창작문학론에 근거한 비교를 통하여 그것이 시, 소설 같은 창작문학이 아닌 (비창작)일반산문문학이라는 개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작문학론과 관계없는 문학론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 1세기 수필문학은 전혀 창작론과 접촉된 일이 없는 글쓰기였다. 기존의 수필이 현대문학의 창작론과 관계가 없는 글쓰기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까닭은 현대문학 초창기에 시, 소설, 희곡 등 문학전반과는 달리 현대문학 이론이 아닌 홍매의 ‘붓 가는 대로’를 개념으로 선택한 데에 있었다. 필자는 홍매의 ‘붓 가는 대로’가 고전문학의 개념이었다는 증거를 본일이 없다. 현대문학 이론으로는 다만 어불성설일 뿐이다. 그런 ‘붓 가는 대로’라는 말을 어떻게 글쓰는 일의 개념으로 삼을 수 있었는가? 문학 아닌 다른 일에도 ‘붓 가는 대로’라는 어감이 적용 될 수 있는 일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있었는가?
수필문학이 진정으로 문학으로 대접을 받으려면 이제라도 ‘붓 가는 대로’를 부정하고 현대문학의 창작론에 근거한 문학이 되어야 한다.
창작이라는 것이 물이라면 그 물을 길어 낼 수 있는 우물은 상상력이라는 이름의 우물일 것이다. 그런데 소설과 창작수필 습작을 같이 해 보면 그것들이 퍼내는 상상력의 물이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소설은 처음부터 허구라는 이름의 상상력의 물을 길어 올린다. 그러나 창작수필은 사실의 기억부터 길어 올리게 된다. 그것이 어제 경험한 기억이든 40년 전에 경험한 기억이든 수필(에세이)이라는 이름의 문학의 운명은 사실의 기억에서부터 시작하게 된다는 데에는 변함이 있을 수 없다.
수필문학이 창작문학으로 넘어오는 진화의 과정에서 문학 이론적으로 걸림돌이 되어 것이 바로 이 지점에 있었다. 사실의 기억은 상상력의 출발지점은 될 수 있지만 허구적 상상력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에 사실의 기억이 모두 상상력이라고 한다면 역사적 사실을 기억해 두었다가 진술하는 것도 모두 상상력에 의한 창작이 된다는 모순이 발생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창작수필은 사실의 기억이라는 물을 퍼 내 가지고 무엇을 어떻게 해서 상상적 창작의 물로 변화시키는가? 문학이 무슨 마술이라도 부리는가?
그렇다. 예술이란 일종의 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술에 대한 이 같은 마술론은 필자의 생각이 아니다. 이상섭 교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론을 말하다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사실적으로 잘못된 모방이 예술적으로는 정당화될 수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예술적’이라는 말은 무엇을 가리키기에 그러한 마술을 부릴 수 있는가?”([문학이론의 역사적 전개] 이상섭 25쪽)
예술성을 마술적 작용에 비유하고 있는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같은 예술의 마술적 작용의 근거를 플롯론에 두고 있다. “무질서한 인간 행위가 플롯에 의하면 정리되면 그 정리된 상태, 즉 문학과 인생의 사실과는 1:1의 관계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관계를 “개연성(蓋然性 · probability)의 성립”에 두고 있다.(동상 23쪽)
즉 창작수필 작가가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과거(어제의 기억이든 40년 전의 기억이든)의 어떤 사실의 이미지를 끄집어내서 그것을 작품의 제재로 삼아 창작작업을 시작한다는 것은 곧 플롯화 작업의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고, 플롯화 된 작품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닌 ‘있을 법한 · probability’ 상상력의 이야기로 변하게 된다는 것이 예술의 마술적 변화 작용이라는 것이다.
오정순의 「우산」은 이 같은 마술적 작용의 창작행위를 여실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창작발상은 “비에 젖는 청담공원길을 걸으며 … 나도 모르게 40년 전의” 기억을 떠 올린 데에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작가가 창작발상을 얻은 것은 ‘청담공원 길을’ 걷던 그곳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창작발상을 작품화하고 있는 곳은 ‘청담공원 길’ 그곳이 아닌 작가의 서재일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청담공원 길’을 걷다가 창작발상을 얻은 후 며칠이 지난 후이든, 그 즉시로 집으로 돌아와 집필을 시작하였든 창작발상과 집필 사이에는 ‘작품 구상’이라는 작업이 진행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작품 구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곧 소재의 플롯화 작업, 즉 구성 작업에 관계된 일체의 작업을 의미한다.
작가가 ‘청담공원 길’에서 떠 올린 기억 속에는 두 가지의 상반되는 이미지가 있다. 그 하나는 “비켜! 이 미친년아.”라는 한 때는 동방예의지국이었다는 믿을 수 없는 이 땅의 몰상식한 부류의 인물에 대한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끝까지 우산을 받쳐 준 문화민족의 아들다운 상식인에 대한 이미지이다. 작가는 이 두 이미지를 우산의 의미에 접목시키는 구성작업 즉 이야기의 배열작업을 하고 있다. “배열이란 어떤 하나의 전체를 구성하기 위하여 부분들을 의미 있게 엮어짜는 것을 뜻한다.”(상동 21쪽)
이 작품은 작가의 기억 속에 저장되어 있던 오래전의 이미지들을 들추어내서 나훈아의 노래 「사랑」 속의 우산에 접목하여 또 다른 우산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즉 나훈아의 우산이 아닌 오정순의 우산을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조선문학] 2010년 5월호 <이달의 수필비평>)
첫댓글 옛 시간에는 읽지 못했으나, 오늘 문학을 공부하는 저희에게 특별한 가르침이 됩니다.
제대로 분석을 하여 보여줌으로써 제대로 글공부를 하게되는 겁니다.
어떻게 구성하여 직조하는지도 보일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