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3 천국가는 알곡과 지옥가는 가라지의 비유
마3:10-12, 13:24-30, 36-43
내가 복음을 전할 때 늘 하는 말들은 예수님 믿으시고 죄사함받고 천국가십시오 하면 이 말을 들었던 사람은 천국이 정말 있냐고 아니 누가 천국갔다왔냐고 반문하거나 지옥이 정말 있냐고 누가 지옥에 갔다온 사람있냐고 반문을 하는 것을 여러번 들었다. 맞는 말이다. 이 세상 누구도 천국과 지옥을 갔다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죽음이란 유한함을 가진 인간은 어떻게 하면 죽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오래 살 수 있을까 소망해 왔다. 우리가 병에 걸려서 죽게 되었다고 하면 그 죽음을 피하려고 병원에 가서 수술도 하고 약도 먹으면서 그 죽음의 고비를 넘기고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온들 죽음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단지 죽음을 조금 연장했을 뿐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 살아온 이래로 죽음을 패싱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이다. 다른 동물들도 죽음을 두려워할까? 내가 생각하기로는 다른 동물들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맞지만 우리들이 두려워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를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만은 예나 지금이나 죽음이후 사후세계란 것에 대해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이 죽음을 피할 수 있을까 그래서 인간보다 더 능력있는 신을 믿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들이 믿는 신이라는 것이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다 인간들이 만든 모조품 신이다. 왜냐하면 어느 신도 죽음을 극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공생애 생활을 하시면서 처음으로 선포하신 말씀이 회개하라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4:17)는 말씀이였다. 하나님의 나라 하늘의 왕국 다른 말로 천국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로 질병과 죽음이 없는 영원한 나라가 있다는 말씀이며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셨고 그 후에는 제자들과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셨던 정말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 되어서 이 땅에 오셨던 구세주이시다. 그 분은 하나님이시며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기에 역사가들이 그분의 탄생을 기준으로 인류역사를 B.C(Before Christ)와 A.D(Anno Domini)로 나누었는지 생각은 해봤는지요? 성경 첫 장은 우주만물의 창조에 대해서 기록을 하면서 마지막은 인간이 어떻게 이 세상에 나왔는지를 알려주었다. 만약 이런 이야기를 성경이 아닌 다른 책에 기록되었다면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읽지도 않고 믿지도 않겠지만 하나님말씀을 기록한 성경에서는 우주만물의 창조에 대해서 기록을 해났으므로 어느 누구도 거기에 대해 의문을 할망정 이것은 말도 안되는 말이라고 할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인류역사상 가장 이름 있는 사람들조차도 성경을 읽고 믿어 왔는데 당신이 뭐라고 성경을 비난할 수는 없지는 않은가! 정말 죽음이 두렵다고 생각하면 죽었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이 누구신가 알아보시고 그분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이 없던 시대에도 자연을 통해서도 창조주 하나님을 깨닫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살아서 농사를 짓지 않지만 농업은 인간의 삶의 기본이었다.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되면 땀 흘려 씨 뿌린 씨앗들이 무르익어 황금물결로 넘치는 들에는 오곡이 무르익어가는 풍년을 맞이한다면 농사를 지었던 그 농부는 얼마나 기뻐할까? 우리가 사는 이땅에서 이처럼 좋은 환경에서 배고프지 않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 누구에게 그 고마움을 전해야 할까?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주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추수의 계절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교훈에 대해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세상에는 왜 가라지 같은 거짓이 더 위세를 떨치고 알곡들을 괴롭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를 인정하면서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어디를 가나 알곡과 가라지는 있게 마련이다. 어떤 나라, 어떤 조직, 어떤 교회에도 알곡과 가라지는 공존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알곡을 참이라면, 가라지는 거짓인 것입니다. 거짓과 진실이 공존하고, 선과 악이 함께 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란 말입니다. 이것을 전제로 해야 신앙생활도 잘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 한쪽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또 다른 한쪽에서는 육신의 법을 따라 살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이러한 갈등을 느꼈기에
(롬7:23-24) 23 내 지체들안에서 다른 법이 내 생각의 법과 싸워 내 지체들 안에 있는 죄의 법에게로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내가 보는도다. 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해 낼 수 있으랴 하고 탄식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모르면, 신앙생활에서 낙심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습니다. 빛과 어두움이 함께 있듯이 세상은 알곡과 가라지가 공존한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서 말씀을 봐도 우리 마음 속에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함께 거하여 이 두 마음이 언제나 싸우며 투쟁합니다. 이 두 마음 중 성령의 소욕이 이길 때 우리는 요셉과 다윗같은 인물이 될 수 있지만 육체의 소욕이 우리를 사로잡을 때 아간같이 사특하고 가룟유다같이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과 악이 모두 공존하는 세상에 살지만 거짓에 의해 오히려 진리가 빛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것을 삶의 역설이라고 할까요? 다음 글을 읽으면서 생각해 보세요. 날아오르던 연줄을 끊으면 연은 더 높이 날 줄 았았으나 그 연은 땅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철조망을 없애면 가축들이 더 자유롭게 살 줄 알았으나 사나운 짐승에게 잡혀 먹히고 말았습니다. 관심을 없애면 다툼이 없는 줄 알았으나 다툼이 없으니 남남이 되고 말았습니다. 간섭을 없애면 편하게 살 줄 알았으나 곧바로 외로움이 뒤쫓아 왔습니다. 바라는 게 없으면 자족할 줄 알았으나 삶에 활력을 주는 열정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불행을 없애면 행복할 줄 알았으나 무엇이 행복인지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편안을 추구하면 권태가 오고 편리를 추구하면 나태가 옵니다. 나를 불편하게 하던 것들이 사실은 내게 반드시 있어야 할 것들이었습니다. 오래 사는 것을 선택할 수 없지만 보람있게 사는 것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얼굴의 모양은 선택할 수 없지만 얼굴 표정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주어지는 환경은 선택할 수 없지만 내 마음과 살아가는 자세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행복도 나의 선택이고 불행도 나의 선택입니다. 사람의 마음이 즐거우면 종일 걸어도 힘들지 않지만 마음속에 근심이 있으면 십리만 걸어도 싫증이 납니다. 인생행로도 이와 같습니다. 이처럼 빛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늘 명랑하고 유쾌한 마음으로 각자의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야 하지 않겠는가요!
다시 씨뿌리는 말씀으로 돌아가면 봄은 씨뿌리는 계절이고 여름은 뜨거운 태양빛을 받으며 성장하다가 가을이 되면 추수하고 겨울에는 추수하여 저장한 것으로 생활한다. 사계절 중 겨울은 일을 안해도 집안에서 평안히 쉴 수 있는 계절이다. 사계절은 우리 생애와 비교하면 인간이 태어나서 성장하다가 생을 다하면 죽게 되는데 마치 겨울을 죽음의 계절이라고도 하지만 겨울은 일년 중 일을 안해도 먹고 살 듯이 인생이 이 땅에서야 이마에 땀이 나도록 수고를 해야 살 수 있지만 천국 가면 이 땅에서 일하는 수고 없이 영생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마치 사계절 중 겨울은 천국생활을 어렴풋이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면서 중요한 것은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지가 궁금합니다. 복음서에서 가장 먼저 천국에 대해 외친 사람이 침례요한인데 그가 외치기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놀라운 선포에 이어서(마3:2) 천국에 들어갈 자 들에 대해서도 외치기를 곧 손에 키를 들고 자신의 타작마당을 철저히 정결케 하사 자신의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되 껍질은 끌 수 없는 불로 태우시라라(마3:12)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천국의 주인께서 자신의 알곡만을 천국 곳간에 들어가게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천국의 주인되신 예수님도 공생애를 시작할 때 처음으로 외치신 말씀이 침례요한과 같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이셨다(마4:17). 침례요한은 이사야가 예언한 선지자로 예수님을 이 땅에 소개하기 위해 특별히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이었는데 그가 한 말 중 반드시 기억해야 할 말은 그가 소개한 예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성령과 불로 침례를 주실 것이고 곧 손에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결케 하사 알곡은 모아 천국 곳간에 들이시되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태우시리라는 무서운 말씀이다. 알곡과 쭉정이는 농부가 이른 봄밭에 씨뿌리고 나면 곡식과 함께 쭉정이도 가라지도 생기는데 그 가라지를 뽑아주면서 곡식을 거두는 것이 농부의 삶인데 농부가 이른 봄에 논밭에 씨앗을 뿌리고 정성 들여 가꾸는 이유는 가을에 풍성한 알곡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알곡과 가라지에 대한 말씀인데 결론부터 말하면 침례요한이 예수님에 대해 선언했던 것처럼 예수님께선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먼저 가라지를 함께 모아 불태우게 단으로 묶되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마13:30).
여기서 예수님은 좋은 씨를 세상이라는 밭에 뿌리셨는데 추수할 때는 가라지를 먼저 뽑아 불태우고 곡식은 추수하여 하늘 곳간에, 쭉정이 즉 가라지는 지옥 불에 던져 넣는다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죽는 것 빼고는 늘 진짜와 가짜가 공존하고 있읍니다. 보기에는 가짜가 진짜같이 보여도 가짜는 역시 가짜이고 진짜는 역시 진짜입니다. 가짜를 만드는 사람들은 진짜처럼 짝퉁을 만드는데 짝퉁을 사는 사람들도 짝퉁이라는 것을 알고 사는 사람도 있고 모르고 사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거짓을 빼고서는 뭐든지 하실 수 있지만 마귀는 진리만은 말할 수 없지만 사람들을 속이는 탁월한 능력이 있는 영물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거짓의 아비 마귀가 통치하는 세상이므로 사람들은 마귀에게 속은 것을 모르고 살지만 죽은 후에는 속고 살았던 것을 알게 될 때는 아무리 후회한들 돌이킬 수는 없으며 속았던 자들만 풀무불에 던져지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속으면서 살게 되나? 가짜가 진짜 같으니까 속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꿀에는 진짜 꿀인 꽃 꿀과 가짜 꿀인 사양 꿀이 있다. 진짜 꿀인 꽃 꿀은 꽃의 종류에 따라 아카시아 꽃에서 나온 아카시아꿀. 밤꽃에서 나온 밤꿀, 유채꽃에서 나온 유채꿀 등으로 꽃에 따라 꿀이 분류되지만 벌에게 설탕물을 주어 생산된 사양 꿀 속에는 벌의 날개나 다리 등을 넣어서 진짜처럼 보이기 때문에 진짜꿀(꽃꿀)과 가짜꿀(사양꿀) 여부는 육안으로는 판별하기 어렵고 성분분석을 통해서만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세상은 가짜가 진짜보다 더 좋아 보일 수가 있어서 사람들은 속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짜를 샀다가 나중에는 후회를 하고 손해를 보았다고 하지만 그런 것에 속았다고 목숨을 끊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만약 자신이 가짜 종교에 속아서 종교생활을 하였다면 어떻게 될까?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면 종교에 있어서는 개종을 잘 안합니다. 이제까지 자신이 믿었던 신한데 해나 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진리의 말씀을 알기 전에는 개종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믿었던 종교가 가짜 신인지 아닌지는 죽을 때 까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자기가 믿는 종교가 자신에게는 정말 진짜라고 생각하면 개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교회를 다닌다고 무조건 천국가는 것도 아니다. 우선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야 하고 예수님을 말씀대로 잘 믿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기복신앙과 번영신학을 추구하는 대부분의 한국교회에서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는 교회는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교회에 나가면 인간관계에 얽히고 조직과 사업에 얽히다 보면 늘 바쁘게 사는 것 같지만 정말 내가 천국은 갈 수 있는지 확신이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꿀이야 속아서 가짜 꿀을 먹을 수 있지만 종교에 속은 것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육체에 관계된 것은 육체에 다소 손해를 보는 것으로 끝날 수 있지만 영적인 일에 손해를 보았다면 이것이야 말로 보상을 받을 길이 1%도 없다는 것이다. 죽는 날까지 물질 바치고 시간 바치고 마음주었더라도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천국을 너무 쉽게 생각하므로 죽으면 누구나 가는 것처럼 알고 있으나 천국은 아무나 가는 곳이 아니다. 마태복음 13장은 천국 비유장이라고 하는데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씨뿌리는 비유(1-23), 알곡과 가라지 비유(24-30), 겨자씨 비유(31-32), 누룩 비유(33), 밭에 감추인 보화비유(44), 비싼 진주비유(45-46), 그물에 걸린 물고기 비유(47-52)로 말씀하셨는데 이 모두는 천국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시간에는 여러 가지 천국 비유중 '알곡과 가라지 비유'로 누가 천국에 갔느냐 아니면 예수님을 믿었는데 누가 지옥에 갔느냐예 관한 것으로 신앙생활의 결과를 말씀해 주시는 비유이다. 그래서 오늘은 누가 알곡이 되어 천국 곳간에 들어가는지 누가 가라지가 되어 지옥에 가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1. 알곡과 쭉정이의 비유
알곡과 쭉정이는 추수때 까지는 알 수가 없다. 추수를 한 후 키질을 하면 알곡은 안쪽으로 모이고 쭉정이는 바깥으로 날아가 버린다. 키질을 통해서만 분류될 수 있다. 주님이 오시는 날 심판에 의해 알곡과 쭉정이가 분류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1) 알곡은 생명이 있고 쭉정이는 생명이 없다
알곡이나 쭉정이는 외관상으로 보면 똑같이 보여도 알곡에는 생명이 있어 싹을 낼 수가 있다면 쭉정이는 생명이 없으므로 싹이 나오지 않는다. 우리 인간은 죄로 인하여 죽을 수 밖에 없는 생명으로 태어났으므로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가 없다고 하셨다. 살아서 숨은 쉬고 있으나 실상은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은 생명이 없는 쭉정이므로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영이 살아 있는 자가 천국에 들어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여러분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으면 여러분은 성령으로 거듭난 새 생명을 소유한 자입니다. 예수가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예수가 없는 자는 생명이 없습니다. 쭉정이가 되지 않고 알곡이 되기를 원한다면 이 시간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2) 알곡은 고개를 숙이고 가라지는 고개를 든다
벼가 익어가는 논에 가보면 알곡일수록 고개를 숙이지만 가라지는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알곡 신자일수록 겸손해지고 가라지일수록 교만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을 아는 자가 겸손한 자입니다. 겸손한 자는 은혜를 받은 자요, 은혜를 받은 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자입니다. 그래서 바울처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고전15:10)라고 고백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은 쭉정이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알곡을 원하십니다. 쭉정이 신자는 되지 못하고도 된 줄로 착각하고, 알지 못하면서도 아는 척 하는 자로 천국과는 거리가 먼 자입니다. 그러나 알곡 신자는 하나님 앞에 언제나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한 것 때문에 가슴아파하고, 다른 사람들의 허물과 죄를 자기 탓으로 여기며,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를 하나님 앞에 중보 기도하는 자들이며 이웃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은혜를 바르게 받지 못하면 속빈 쭉정이처럼 교만해 지기 쉽고 매사에 불평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는 알곡 성도입니다.
(3) 알곡은 바람에 날리지 않지만 쭉정이는 날린다
곡식을 추수 할 때는 알곡도 쭉정이도 거두어 들입니다. 농부는 창고에 보관하게 전에 키질을 해보면 쭉정이는 멀리 날아가지만 알곡은 남게 됩니다. 신자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겉으로 보아서는 누가 알곡 신자인지 누가 쭉정인지 알 수 없으나 인생고난의 바람과 환난의 폭풍우가 불어오면 알곡 신자는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만 쭉정이는 환란의 바람에 멀리 날아가 버립니다. 이 세상 마지막에도 하나님께서는 시험과 환란을 통하여 알곡을 골라내는 작업을 하실 것입니다. 그날에 하나님은 알곡은 알곡대로 골라내어 천국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골라내어 풀무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침례요한은 마태복음 3장12절에서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침례 요한이 말한 쭉정이는 알곡과 같은 종자이지만 속이 차지 않았을 뿐이니 만약 회개하고, 돌이켜 알곡이 된다면 꺼지지 않는 불이 아닌 천국곳간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쭉정이가 알곡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쭉정이 스스로 알곡이 되겠다고 마음먹고,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말씀의 영양분을 받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알곡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농부이신 아버지 하나님이 포도나무로 비유된 예수님에게 붙어서 열매를 맺는 가지인 성도는 더 풍성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보존해 주시지만 예수님인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도 열매를 맺지 않으면 잘라서 꺼지지 않는 불(지옥)에 던져 사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열매는 성도들이 맺는 과실로 성령의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며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입니다.
성도들이 이런 열매를 맺으려면 예수님이 내 안에, 내가 예수님 안에 있는 예수님과 관계를 맺어야 열매를 맺게 됩니다(요15:1-5). 다시 말해서 내 안에 있는 예수님과 함께 생명력 있는 관계를 맺으면 스스로 노력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하나님이 열매를 맺히도록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결실의 계절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맺는 알곡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여기서 알곡은 믿음의 신자요, 쭉정이는 형식적인 신자들이라고 했는데 농부가 논밭에 씨앗을 뿌리고 정성을 들여서 가꾸는 이유는 가을에 풍성한 열매를 바라기 때문이듯이 하나님께서도 알곡같은 성도들을 얻고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피흘려 죽게 하시면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의 씨앗을 세상이라는 밭에 뿌렸으므로 누구든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으면 알곡이 되지만 예수님을 단지 자기 육체의 소욕을 위해 믿었다면 그는 쭉정이로 전락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 교회라는 밭을 만들어 놓아 예수그리스도의 씨를 뿌렸으니 때가 되면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천국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태우시리라는 말씀처럼 교회에 다녀도 진실로 믿은 사람들만 천국으로 가지만 말씀대로 믿지 않았으면 지옥불에 던져진다는 말씀입니다.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알곡 된 성도들만이 들어가는 곳입니다. 그러나 쭉정이가 가는 곳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풀무불인 지옥임(마3:12,13:42)을 성경은 말씀하는 것입니다. 추수의 때가 오면 하나님은 반드시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내실 때에 불타는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지금 이시간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예기치 않는 환란의 바람이 불어와서 혹독한 시험을 치른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시험을 통과한 자만이 천국으로 가는 것입니다.
2.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
예수님께서 천국의 비유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먼저 '씨 뿌리는 비유'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천국은 마치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마13:24)는 것으로 시작하는 데 밤중에 그의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다(25). 처음에는 몰랐으나 싹이 나고 한참 후에 이삭이 날 즈음에 곡식과 함께 가라지도 자라고 있음을 보고(26) 종들이 주인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리면서(27) 우리가 가서 가라지들을 뽑기를 원하시냐고 물었더니 주인은 그렇게 한 것이 원수의 소행이라고 밝히는 한편(28), 가라지 뽑기를 구하는 종들에게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 것이 염려되니(29)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두라고 하셨다. 또 알곡과 가라지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추수 때가 되면 추수꾼들을 시켜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를 것이고 곡식은 주인의 곳간에 넣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30). 이 알곡과 가라지와 비유에서는 마지막에는 알곡은 천국곳간에 들어가지만 가라지는 지옥불에 던져버린다는 것이니 얼마나 두려운 말씀인가? 이 비유를 하신 후 예수님께서 집에 들어가셨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우리들에게 가라지의 비유를 밝히 말씀하여 달라고(36) 하니 예수님은 이 비유를 설명해 주시기를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사람의 아들이요(37).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자손들이고 가라지는 그 사악한 자의 자손들이며(38) 가라지를 뿌린 자는 마귀요 수확하는 때는 세상 끝이요 거두는 자는 천사들이다(39)이고 가라지를 모아 불에 태우는 것 같이 세상 끝에 예수님이 오시는 날도 그러하리라는 말씀이시다(40). 이 알곡과 가라지에 대한 비유는 읽거나 듣기만 해도 무슨 말인지 이해 못할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아주 간단명료하게 말씀해 주셨다. 다시 말하지만 오늘 말씀에서 농부되신 하나님께서는 독생자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 밭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셨는데 마귀도 세상밭에다 가라지를 뿌렸으니 세상에는 주님의 교회와 수많은 이방종교들도 함께 있다는 것을 경각심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 예수님은 교회내 사람들을“알곡과 쭉정이로 표현했는데 이는 말씀대로 행하면 알곡이고 행치 않으면 쭉정이라고 볼 수 있는데 예수님은 좋은 씨를 뿌렸지만 마귀도 세상밭에 가라지를 뿌렸다는 말씀속에는 가라지는 종자가 다르다고 하시면서 다시 말하지만 가라지는 이방종교인 불신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이 뿌린 씨앗중에서 나온 쭉정이는 교회에 다녔지만 가짜 교인을 말하는 것으로 가라지와 쭉정이는 다르게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성경은 믿는 자들을 위해 기록된 것이므로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알곡과 쭉정이가 나오는데 알곡과 쭉정이 그리고 알곡과 가라지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할까 합니다.
(1) 알곡과 쭉정이와 가라지는 공존한다
알곡은 말 그대로 곡식 알곡이고 쭉정이는 말 그대로 알맹이가 없는 곡식이고 가라지는 겉모습이 곡식과 거의 같기 때문에 처음에는 구분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조밭에 나는 강아지풀과 조는 모양이 너무나도 비슷해서 다 자라야만 비로소 그 모습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이런 가라지를 벼농사로 비유해 본다면 논에 나는 피와 같은 잡초이다. 벼와 피도 처음에는 구분이 안가지만 다 자라면 논에서 피를 뽑아 낼 수 있다. 이처럼 가라지라는 어렸을 때 모습은 너무 비슷하나 다 자라면 곡식에 비해 크고 생명력이 강하다는 근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도시 청년들이 농촌 가서 봉사 할 때 가라지를 뽑으라고 하면 곡식을 뽑아버린다는 우스개 소리가 있는 이유는 가라지가 곡식보다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예수교회보다는 타종교의 신전이나 사원이나 여러 가지 우상들이 더 좋아보인다고 볼 수 있다. 팔레스타인 농부들의 골치거리 가운데 하나는 가라지를 분간해 내는 것인데 가라지와 보리의 차이는 우리나라의 피와 벼 정도가 아니라 너무도 흡사하고 똑같이 생겼는데 가라지는 보리의 뿌리를 부둥켜 안고 있기 때문에 뽑아 버리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가라지를 뽑다가 보리까지 뽑을 수 있기 때문에 그냥 추수 때까지 뽑지 않고 나두라고 하셨다(30). 이 가라지를 뽑아야 하는 이유는 가라지가 밥에 한 알만 들어가도 독성이 있고 쓰기 때문에 먹을 수가 없다. 분명한 사실은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으니까 그들 나름대로 번성하는 것이다. 또 예수님을 믿는 교회안에도 진실로 믿는 사람들과 형식적으로 믿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문제는 믿음의 열매를 맺는냐 아니냐이다. 예수님께서는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셨는데 참 진리의 백성과 거짓 교리에 빠진 교인들이 교회내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다. 불법을 행한 자들은 가라지나 마찬가지이다.
(마7:22-23) 22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노니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한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교회내에서도 불법을 행하는 위선자들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2) 추수할 때 필연적으로 분리되는 알곡과 쭉정이 그리고 가라지
알곡과 쭉정이의 차이는 뭐일까? 알곡 곡식은 농부가 거름 주고, 김을 매고, 물주는 것 같은 일들을 돌보지 않으면 죽거나 병들게 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가라지는 사람의 손이 안가도 잘 자라며 생명력이 강한 것을 농부 또한 잘 알고 있다. 추수 때 벼를 베고 뿌리가 남는 것은 알곡이고 가라지의 씨를 멸하기 위해 뿌리채 뽑히는 것은 가라지이다. 알아야 될 것은 알곡 때문에 가라지가 있는 것이지 가라지 때문에 알곡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알곡은 농부의 한 평생 꿈이요, 가라지는 농부의 한 평생 근심거리이다. 사실 알곡은 유익된 것이지만 가라지는 백해무익한 것이다. 그럼에도 알곡이 있는 곳에는 가라지도 있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곡식을 씨뿌린 곳에 마귀들이 밤에 가라지 씨앗을 뿌려놓았기 때문이듯이 사람이 사는 곳에 수많은 종교들이 있게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곡식은 가라지의 그늘에 눌려 약해질 수 밖에 없다. 비록 연약하고 세상적인 권세나 명예가 없고 보잘 것 없어도 하늘 곳간으로 들림 받을 존재는 알곡으로 비유된 진리의 백성이지 결코 불법을 행하는 악인들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가라지와 같이 외형적인 모습은 크고 명성도 있는 거짓 교회도 있고 사원도 있고 이단들이 모이는 교회도 있지만 그날에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불법을 행한 자들아 내가 너희들을 도무지 알지 못하니 내게서 떠나가라고 또는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처녀들처럼 결국은 어두운 음부에 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3) 세상끝에 가라지가 심판받는다
예수님은 천국을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비유란 어떤 감추어진 실체를 알기 쉽게 표현하는 것이다. 오늘은 밭에 나는 알곡과 가라지에 대한 비유이다. 어렸을 때는 가라지나 곡식이 너무 비슷하여 구별이 안 되는데 자라면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를 보게 된다. 예수님은 가라지를 비유로 말씀하셨는데 그 비유 속에 담긴 뜻을 하나하나 해석해 주셨다.
(26) 잎이 나고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그냥 두었다가 나중 추수할 때에 가라지는 먼저 뿌리채 뽑아 불태워버리라고 하셨는데 처음부터 가라지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을 때 보인다는 것이다. 교회다니면서 진리의 말씀으로 채워지지 않는 자들은 불신자처럼 거짓으로 채워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온전히 믿지 않은 자들은 쭉정이 또는 가라지가 되어서 지옥불에 던져진다는 말인데 왜냐하면 그 씨가 마귀의 자손들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13:38,40) 38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왕국의 자손들이로되 가라지는 그 사악한 자의 자손들이니라. 40 그런즉 가라지를 모아 불에 태우는 것 같이 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세상은 믿는 자들과 불신자들로 공존하는 사회이므로 너무 불신자들에 대해 원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4) 알곡과 가라지 비유의 핵심
첫째, 이 비유의 핵심은 천국은 마치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린 사람과 같은데 좋은 씨를 뿌리는 분은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고 그를 믿는 자마다 천국 백성이 되게 하는 씨를 이 세상에 뿌리셨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므로 세상에서도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어야 한다. 다시말하면 그리스도인들이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두시는 구원의 열매들(알곡)이다.
둘째, 가라지는 사악한 자의 자손들이며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 곧 사탄이다. 오늘날도 타종교나 이단들이나 다른복음을 전하는 교회들이 이름을 나타내고 있다. 타종교가 아무리 세력이 크다하더라도 그들이 구원받는 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며 교회다니는 교인들중에서도 이단의 교리에 빠져버린 자들은 믿는자 같지만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실족하게 하는 불법을 행하고 있다는 자들이다.
셋째, 알곡과 가라지는 세상이라는 밭에 뿌려지고 주님오시는 날까지 함께 공존한다는 것인데 공존하는 시기는 추수할 때 까지 그대로 두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추수 때 곧 주님의 재림 때 천국 백성과 이방신들을 믿는 자들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확실하게 구분하실 것이다. 주님의 재림 때 천사들이 가라지인 악한 자들을 거두어 풀무불에 던질 때까지 신자와 불신자는 이 세상에서 비슷한 모습으로 함께 살아갈 것이다. 지금은 가라지를 뽑을 때가 아니라 세상 끝날 곧 추수 때에는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이 땅에 보내어서 불법을 행하며 천국 백성을 넘어지게 하던 가라지들을 모아서 풀무불 같은 지옥불에 던져 넣어 거기서 이를 갈며 슬피 울게 될 것이라고 하셨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천국에서 영생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가라지같은 자들과 열매없는 쭉정이들은 지옥불에 던져져서 영원히 고통당하는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드디어 알곡된 의인과 가라지인 불법한 자의 받을 심판을 말씀하셨다.
(마13:41-43) 41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42 지옥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43 그 때에 의인들은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예수님은 마지막 지옥불에 던져질 가라지의 정체와 불법을 행하는 쭉정이를 불에 태울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가라지의 마지막 결과를 말씀하신 것인데 가라지는 곧 지옥불에 던져짐을 받을 불법자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불법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는 행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노라고 거짓 행하는 사람들 또는 그들 단체인 거짓 교회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불법을 행한 사례들을 한 번 볼까요.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는 그 날이 되면 알곡과 쭉정이는 예수님의 좌우에 갈라선 양과 염소 같이 갈라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은 양과 염소에 대해 기록해났는데 내가 어느 줄에 섰는지 알아야 합니다.
(마25:33-34, 41) 33 양들은 자기 오른편에 두 되 염소들은 왼편에 두리라. 34 그때에 왕이 자기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오라, 내 아버지께 복받은 자들아 너희는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왕국을 상속받으라. 41 그때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르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존하는 불에 들어가라.
여기서 양과 염소의 기준은 지극히 작은 자들이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받아 들였고 헐벗을 때에 옷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에 돌봐주었고 감옥에 갔었을 때에도 찾아 돌봤다는 것입니다. 이는 지극히 작은 자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실천했느냐 안했느냐가 즉 이웃사랑을 했느냐 안했느냐가 양과 염소의 기준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4:17). 그냥 예수님 믿습니다 한다고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하지 않았고 이웃도 사랑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양의 줄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여기서 가라지는 불신자를 말하는 것이고 쭉정이는 교회다니는 사람들 중에 행함이 없고 사랑을 베풀지 못한 자들이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곡식밭에 가라지 씨앗을 뿌린 마귀는 불법을 만들어 내는 대단한 전략가인데 불법을 행한 대표적인 로마카톨릭에 대해 알아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4세기경 복음이 로마카톨릭에 정착되면서 마귀는 2000년 동안 카톨릭이라는 마귀의 전략적인 교회를 만들어 복음을 부패시키기 하였습니다.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에서 유월절에 지키던 부활절을 폐지시켰고 달의 여신 이스터축제를 부활절로 대체하였고 354년에는 태양신 탄생일을 예수님의 탄생일로 대체시켰고 431년 제 3차 에베소 공의회에서 마리아가 신성시되어 마리아를 하나님의 어머니인 성모로 만들었으며 5세기 경에는 십계명까지도 부패시켜 기독교 성경과 카톨릭 성경의 십계명이 판이하게 다르게 되었고12세기 경에는 예배시간에 사도신경을 암송하도록 하는 전략을 세워서 이와같은 불법행위가 오랫동안 지속되다 보니 이제는 교회의 전통으로 자리잡고 있어서 이렇한 불법전통을 지키지 않는 교회들이 이단처럼 보이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불법은 마귀의 전략무기이므로 불법을 추종하는 것은 곧 마귀의 자녀임을 스스로 시인하는 행위입니다. 이런 불법을 행한 것에 대해 주님의 말씀은 너무 분명합니다.
(마7:21-23)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오늘 말씀처럼 알곡은 모아 천국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모아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던지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일점일획도 변함없이 이루어질 말씀이라는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주님은 악인의 고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시지만 의인의 고통은 결코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며, 어떠한 여건하에서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천명이 네 곁에서 만명이 네 오른쪽에서 쓰러질 터이나 그것이(역병, 멸망 두려움) 네게 가까이 오지 못하리로다(시91:7). 아멘.
2천년전에 예수님은 이 세상에 복음씨앗을 뿌리셨으며 이천년동안 알곡이 성장하는 동안 가라지도 세력을 확장하며 지금까지 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고, 불법을 행하는 자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고 아무리 선지자 노릇을 하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능력을 가지고 이적과 기사와 권능을 행한다고 할지라도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죄와 불법이 성행하고 그로 인한 고통이 있듯이, 지상의 교회에도 가라지 신자로 인한 고통이 생겨납니다. 주님은 이러한 형편을 잘 아시기에 우리에게 이 비유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얼마나 많이 불법을 행하여 지옥불에 떨어지는 사람이 많은지에 자신부터 뒤돌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자칫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기 쉽습니다. 우리가 누가 알곡 신자인지, 누가 쭉정이고 누가 가라지인지를 분별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입니다. 특히, 믿음이 연약한 신자의 영적 미숙함이나 인간적인 약점을 보고 그를 가라지 신자라고 판단을 내린다면 그 때문에 그 어린 신자와 주님의 몸된 교회는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에서 가라지 신자가 악행을 하더라도 무관심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누구든지 거짓된 신자로 명백하게 드러날 경우, 교회는 그 사람에 대하여 경계하고(딤후 2:25,26), 때로는 교회의 출석을 금할 필요도 있습니다(고전 5:13). 단지 어떠한 경우라도 가라지 신자들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은 주님의 몫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인의 관심은 오로지 알곡에게만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은총은 가라지에게도 똑같이 내려집니다. 마치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햇빛과 비가 주어지는 것처럼 그의 은총은 알곡과 가라지 모두에게 동등하게 임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가라지에 대한 주인의 관심이나 사랑 때문만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가라지를 뽑다가 알곡까지도 다치게 할까봐 추수때까지 알곡에 대한 사랑 때문에 심판이 늦춰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이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공평하게 베풀어진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악인을 사랑하시거나 보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도리어 악인을 통해 의인을 보호하기 위함이며 가라지의 때가 추수할 때까지인 것처럼 그들의 때는 최후의 심판 때까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마음을 한번 쯤 헤아려 봅시다. 독생자되신 자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사 우리들을 구원하시고자 십자가에 죽게 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을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지 않겠어요? 그저 하나님의 사랑을 그 크신 사랑이라는 말 밖에는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이런 하나님이 마음을 한 번 헤아려 봅시다.
(1) 잃은 양을 찾으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지금도 집 나간 둘째 아들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 마음으로 교회를 통해 잃어버린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지금도 자신의 백성들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잃어버린 영혼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마태복음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22:9-10) 9 네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라 10 한대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
나쁜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당신의 자녀를 찾고자 외치는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구원의 길은 십자가위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공로때문입니다. 구원받고자 원하는 사람은 일단 주님의 몸된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전도자의 인도를 받아 교회 나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2) 구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마13:48)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 버리느니라.
하나님은 의로운 사람과 악한 사람을 구별하십니다. 양과 염소, 알곡과 쭉정이 중 좋은 것만 그분의 그릇에 담겨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주님의 그릇에 담기고 싶다고 담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그분의 통치권이 그릇에 담기는 기준입니다. 우리는 내 생각과 내 판단으로 결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모든 주권은 하나님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3) 심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이 땅에서 가라지들이 잘 된다고 불평하지 마십시요. 왜냐하면 가라지들의 최후는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마13:49-50) 49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들 가운데서 사악한 자들을 갈라내어 50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에 죽음이 반드시 있는 것처럼, 죽음 이후에 심판도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심판도 피할 수 없습니다.
(히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선 인생이 성공 한다면 원하는 것을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구원받아 천국에 간다면 그것이 바로 행복이며 최고의 성공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땅에서의 축복보다 영혼 구원이 더 중요합니다. 온 세상을 얻는다 하더라도 영혼이 구원받지 못한다면 인생 실패자이며 차라리 이 세상에 태어낳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도 하나님의 그릇에 담기지 못하면 불행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그릇에 담기어서 천국에 갔다 하더라도 모두가 다 같지는 않다는 것은 천국은 평등사회가 아니라 계급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고전15:41)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도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같지만 그 영광은 같지 않습니다. 즉 천국에는 차별은 없으나 구별은 있다. 상급에 따라 영광이 다르고 거처가 다르다. 즉 천국은 하늘에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체도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고 땅에 속한 것의 영광이 따로 있으니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며 별의 영광도 다른데 별과 별의 영광이 다르다고 하였읍니다. 부활의 몸에서 발산하는 빛의 세기가 다르고 또 면류관 영광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보좌 주위에 앉을 때에 앉는 자리가 다르다. 빛나는 영광의 정도가 성도마다 다르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분명히 주님은 우리가 천국에 갔을 때 영광이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에서 상을 받는 사람이 행한대로 상이 다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땅에 있는 동안 주님을 위해 열심히 일한다면 그 보상은 하늘나라에 가서 받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고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오늘 알곡과 가라지 비유는 추수 때에 주인이 추수꾼들에게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고 명령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면 추수꾼들은 그 동안 곡식의 영양분을 빼앗아 잘 자라난 가라지를 한 곳에 모아 뜨거운 불 속에 던져 버릴 것입니다. 이 세상의 마지막에도 주님은 천사들을 보내셔서 교회는 다녔으나 형식적인 신앙생활에 젖어 살던 쭉정이들과 마귀의 거짓된 가르침을 따르던 불신자들이 영원한 지옥 형벌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반면에 마치 곡식 이삭이 혹독한 더위와 가뭄과 병충해를 견뎌낸 후 추수 날에 거두어지고 탈곡되어 창고에 들여지듯이 이 땅에서 온갖 시련과 역경을 믿음으로 견뎌낸 알곡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같이 모든 알곡 신자들이 구원의 하나님을 친히 뵙고 영광과 찬송을 돌릴 뿐 아니라 주님을 위해 바친 모든 수고와 흘린 눈물에 대하여 영광스런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 날의 기쁨에 대해 주님을 위해 고난받은 성도들은 앞으로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는 천국의 영광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롬8:18).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그 날의 영광을 바라보며 충실한 알곡성도 로 끝까지 남은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가라지 신자나 가라지 교회로 인해 고통이 다가 올지라도 낙심치 말고 말씀대로 살아가면서 끝까지 알곡 신자답게 주의 일에 더욱 힘써서 주님 앞에 서는 그 날을 바라보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되어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