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라는 말보다는 '나'라는 말에 더 익숙해져 있는 여러분들이 어려움에 빠졌을 때 여러분을 도와 줄 이웃이나 동료가 주위에 얼마나 있습니까? 또 그들은 누구입니까? 또한 나는 누구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인가요?
전도서의 저자는 7절에서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이 홀로 있으나'(7절)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홀로 있는 사람'은 친척이나 친구가 없는 '고독한 자'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탐욕 때문에 생깁니다. 재물의 욕심 때문에 아들도 형제도 돌아보지 않는 이기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비애인 고독과 불안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고 전합니다. 전도자는 앞부분 7절에서 홀로 일하는 자의 비극을 통해 상호 친교와 협력 관계의 아름다움을 강조합니다. 결혼 관계 뿐 아니라 우정과 상호 교제의 유익을 말하는 격언- '둘의 지혜는 하나보다 낫다' -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9절).
여기서 '상'은 10절에서의 '화'와 함께 그 출처가 하나님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의 존재와 그 분이 제정하신 법칙을 의지하여 서로의 유익을 위해 협력할 때에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은 8절의 말씀처럼 친지조차도 돌보지 않고 자신의 물질적 유익만을 추구함으로써 삶의 허무를 극복하지 못하였던 자의 행동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10∼12절에서는 9절의 말씀처럼 신본주의적인 삶의 원리에 따라 서로 협력하여 서로의 유익을 함께 도모하는 행동이 자신만의 유익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사고를 바탕으로 한 행동과 비교할 때 어떠한 장점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본문은 세 가지를 들어서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킵니다(10절).
주로 거친 광야와 산악 지대로 이루어진 팔레스타인에서는 여행 중에 다치거나, 도둑이 나타나서 예상하지 못한 화를 당하는 경우가 흔히 있었습니다. 이 때 동행하는 친구를 가진 자는 그로부터 위로와 도움을 받고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홀로 행하다가 화를 당한 자는 쉽게 좌절하고 갈 길로 나아가는 것조차 어렵게 되고 맙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보면 홀로 산길을 행하다가 어려운 상황을 당한 이의 고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둘째,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합니다(11절).
팔레스틴 지역은 한 여름일지라도 독특한 사막성 기후의 영향 때문에 밤에도 매우 춥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행 중에 동행하던 자와 끌어안고 체온을 유지하는 것은 사막 여행의 상식과도 같은 지혜였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다'는 말씀은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과 협력하여 서로의 유익을 도모하는 일의 중요성을 암시해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셋째,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습니다(12절).
나그네가 혼자 인적 없는 길을 여행할 경우에는 강도의 범행 표적이 될 확률이 매우 높았습니다. 그러나 둘 이상이 함께 이동하는 여행객에게는 강도라도 함부로 덤벼들지 못했다고 합니다. 본문의 '세 겹줄'은 문자적으로는 세 가닥의 삼으로 꼰 밧줄 혹은 끈을 의미하지만 본문에서는 그 이상의 많은 가닥을 겹쳐 만든 튼튼한 동아줄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줄'은, 단 한 가닥만의 끈이나 그 가닥들이 각기 나뉘어져 있는 경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성(引性)이 강합니다. 이러한 문자적 의미 외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3이란 완전성을 암시하는 숫자로 여겨졌습니다. 본문의 세 겹줄은 인성의 강도가 완전하다고 할만큼 강한 줄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고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창조 역사 속에는 공동체성이 담겨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협력함으로 얻게 되는 유익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홀로 만의 삶보다는 협력하여 사는 두 사람의 삶이 나음을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 목요일에 유종우 형제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고 축복송을 멋있게 부르는 모습도 지켜보았습니다. 신랑 신부의 모습 속에서 오늘의 말씀 -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 '한 사람이 넘어지면 다른 사람이 일으킨다', '두 사람이 누우면 따뜻하다' 그리고 '한 사람이면 패하겠으나 두 사람이 맞설 수 있다' - 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은 두 사람이 되기 위해서 멋있는 데이트를 했을 것입니다. 이 시간에 결혼을 위해 배우자를 놓고 기도하는 청년들과 함께 '데이트'에 대해서 생각하고자 합니다.
왜 데이트를 해야 할까요?
데이트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데이트해야 할까요?
여러분!
이런 문제들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결혼하기 전에는 어떤 의미로 보나 미성숙한 상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여자 없는 남자는 여자 크기 만한 공백이 있고, 남자 없는 여자는 남자 크기 만한 공백이 있습니다. 데이트는 이러한 공백을 사회적으로,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메움으로 성숙해지는 기회입니다. 우리는 데이트를 통해 성숙해진다는 것입니다.
잠언 27장 17절에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 같이 사람이 그의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사람은 누구나 모난 부분들이 있습니다. 진실한 친구라면 친구의 모난 부분들을 부드럽게 깎아줍니다. 특별히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교제를 하면 서로 모난 부분들이 깎여 성숙하는 것입니다.
남녀가 처음 만났을 때는 모난 부분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결혼 상대자인 경우 그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 보이고 좋아 보일 수 있습니다. 사랑은 장님이란 말이 있는 것처럼 사랑하기 때문에 결함이 보이지 아니할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의 모난 부분이 크게 학대되어 보이고 무척 밉게 보이는 것은 사랑이 불붙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상대방의 모난 부분을 보지 않거나 또 확대해서 보는 것은 내가 아직 모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랑스러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난 부분이 있게 마련입니다. 모난 부분을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고 또한 그것을 보았다 해서 교제를 끊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깎아주는 것이 성숙한 데이트입니다.
이성 간에 교제하면서 과거에 못 보던 자신의 결함을 상대의 눈을 통해 발견하는 것이 성숙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또한 상대의 결함을 보고 나서, 상처 난 곳에 소금 뿌리듯 그것을 미움과 공격의 과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감싸면서 고쳐주는 것이 성숙의 길입니다.
데이트는 상대의 모난 부분을 서로 깎아줌으로써 성숙에 이르는 하나의 과정이 될 뿐만 아니라, 상대가 넘어질 때 붙잡아 줌으로써 서로 성숙해 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혹시 그들이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10절).
어떤 남자가 아주 신앙이 독실한 여자와 만나서 교제를 했습니다. 같이 대화하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성경공부를 하러 다니면서 남자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주님에 대해 냉랭했던 가슴에 여자를 통해 불이 붙은 것입니다. 이렇게 데이트를 통해 성숙한 자들이 지금은 결혼생활을 하고 아주 모범적인 가정을 이루고 있습니다. 상대의 뜨거운 신앙을 본받아 함께 뜨거운 신앙인이 됨으로써 아름다운 가정을 이룬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혼생활도 '상호제자훈련'을 통해 서로 성숙해 가는 생활이지만, 결혼 전의 데이트도 이렇게 모난 부분을 깎아주고, 넘어질 때 붙잡아 주고 좋은 점을 통해서 서로 영향을 받음으로써 사회적으로,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대화는 사회생활의 주요 부분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도 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면이 있습니다. 남자가 여자와 대화를 못 하고, 여자가 남자와 대화를 못 하는 것은 많은 손실을 가져옵니다. 따라서 데이트를 통해서 남녀 대화를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데이트할 때 대화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결혼 후에 그 가정은 대화 없는 가정이 됩니다.
어느 주부가 남편 때문에 미치겠다고 하소연합니다. 남편은 상당히 존경받는 직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직장에서 돌아오면, 지극히 형식적인 말 몇 마디 외에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말 한 마디 없이 텔레비전을 보거나 신문을 뒤적이다가 잠을 자고 나서는 직장으로 가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부는 미칠 것만 같다는 것입니다. '벙어리 남편'과 같이 살자니 오죽 답답하겠습니까?
대화 없는 가정은 죽습니다.
그런 가정에서 자녀들인들 밝게 자라겠습니까?
자녀들을 교육하고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가야 할 주부가 미칠 지경에 이르렀으면 그 가정은 이미 커다란 병을 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남편은 속히 부인과의 대화를 회복해야 합니다.
왜 이렇게 대화 없는 '병든 가정'이 생겨납니까?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데이트할 때 대화의 예술을 개발하지 못한 것도 그 한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열지 않고 대화할 때는 얄팍한 대화를 하기가 쉽습니다. 진정한 대화는 피상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마음의 창문을 열고 상대의 희로애락을 같이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성과 대화를 잘 하기 위해 데이트를 하는 것입니다.
세계 2차대전 당시에 스피츠(Spitz)란 독일인이 실험을 해 보았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들을 첫 3개월은 어머니와 함께 있게 했더니 아주 정상으로 발육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후 3개월 동안 그 아이들로 어머니 품을 떠나 탁아원에서 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탁아원에서 좋은 음식도 주고 정기적으로 건강 체크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첫 해 30%가 영양실조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나마 생존한 아이들 대부분이 영구적인 정박아나 심각한 정신장애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온갖 좋은 것을 다 주고 아무리 좋은 환경에서 자라게 해도 어머니의 사랑이 없으면 가뭄에 시드는 곡식처럼 시들어 버립니다.
가정에서 아이들이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랑실조(失調)'에 빠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을 예쁘다고 칭찬해 줘 보세요. 아이들이 아주 밝게 자랄 것입니다.
밉다고 하면서 면박이나 줘 보십시오. 비뚤어지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데이트할 때도 서로가 '영양실조'에 걸리지 않도록 참된 사랑을 주고받는 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사랑을 주지도 않고 사랑을 받지도 않는 자는 '사회 속의 외딴 섬'입니다. 인간관계가 단절된 자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가 이룰 미래의 가정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래서 데이트 중에 진정한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연습을 하십시오. 사랑하고 사랑 받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데이트를 하는 것입니다.
데이트는 또한 서로 마음이 편히 쉴 수 있는 좋은 시간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람쥐 쳇바퀴 도는 것 같은 현대 사회생활에서 스트레스가 쌓입니다. 지금도 벌써 구미에서 발달된 최고의 의술로도 집어내지 못하는 병이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합니다. 컴퓨터화한 의료시설에서 검사해도 병이 없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본인은 심각하게 앓고 있습니다. 이것이 스트레스입니다.
이러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서 같이 놀고 같이 휴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데이트는 스트레스를 푸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금단의 열매를 따는 방식으로 푸는 것이 아니라, 더 심각한 스트레스로 자신과 상대를 묶는 것입니다. 건전한 데이트를 통해서 스트레스를 풀고 재미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현대생활에서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데이트는 마음이 편히 쉬는 재미있는 시간입니다.
누가 나의 이상적인 아내감인지, 누가 나의 이상적인 남편감인지 살피는 데 데이트는 중요한 기회입니다. 눈감고 명상하는 중에 허연 수염을 단 도사가 나타나서, "너의 배우자는 이 사람이다!"고 이름을 지적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의 배우자는 내가 살펴서 발견해야 합니다.
오랜 연애 기간을 통해 오랜 데이트를 하든, 맞선을 본 후 짧은 데이트를 하든 데이트를 통해서 미래의 이상적인 배우자를 발견해야 합니다. 가급적이면 여러 사람을 만나 보고 여러 각도에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P. D. Meister라는 사람은 "나에게 적합한 배우자 타입이 어떤 것인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가급적 많은 이성들과 데이트를 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장난기를 가지고 많은 이성들과 만나는 것은 삼가야 하겠지만, 진지한 마음으로 가급적 여러 사람을 만나보고 이상적인 배우자를 생각하는 것은 건전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데이트에는 많은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그것은 불신자와의 교제를 들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이 말씀은 불신자와 결혼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황소와 말을 함께 묶어 마차를 끌도록 해 보십시오. 말은 다리가 길고 황소는 다리가 짧습니다. 그래서 마차가 제 자리에서 뱅뱅 돕니다. 말과 소는 서로 물면서 싸우기 때문에 같이 마차를 끌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과 소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마차를 끌려고 하기 때문에 같은 방향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불신자와의 결혼이 이와 같습니다.
미끄럼틀 위로 사람을 끌어올리기가 쉽겠습니까, 아니면 밑에서 끌어내리기가 쉽겠습니까? 신자는 미끄럼틀 위에서 불신자인 상대를 위로 끌어올리려고 하고, 불신 상대는 밑에서 끌어내리려고 합니다. 미끄럼틀 위로 끌어올리는 것보다, 밑으로 끌어내리기가 더 쉽습니다.
결혼을 위해서 교제할 때는 일단 결혼만 하면, 쉽게 예수 믿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여자 분은 믿지 않는 남성과 결혼해서, 십 수년간 새벽마다 기도함으로써 마침내 남편을 예수 믿게 하였습니다. 그 동안 그 여자 분이 겪었던 고통은 말할 수 없습니다. 부부가 해로한다 해도 40∼50년인데, 그 기간의 1/4를 갈등 속에서 산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것도 결혼 후 깨가 쏟아져야 할 시기에 말과 소의 갈등처럼 그러한 갈등이 집안에서 벌어진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끔찍하지 않을까요?
지금 불신자와 교제하는 청년이 있다면, 그 교제를 당장 끊지 말고 결혼하기 전에 그(녀)를 주님에게로 인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아야 합니다. 주님의 사람을 만들고 난 후에 결혼을 해야 합니다.
요즈음 한국교회의 형편을 보면, 여성 신자들이 남성 신자들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거의 두 배가 되는 것 같습니다. 청년회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이런 형편에서 불신자와 교제하는 것을 무조건 나쁘다고 매도할 수만은 없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인 면에서 전도의 기회로 삼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남녀 비율이 맞지 않는 현상에서 결혼하지 못하는 청년들이 많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녀 비율이 맞지 않는 청년회는 전도계획을 세워서라도 남자들을 많이 교회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불신자와의 데이트는 어디까지든지 장애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를 주님에게 인도해야겠다는 사명과 목표를 가지고 데이트를 해야 하고, 결혼하기 전에는 상대가 주님의 사람이 되어 있어야 됩니다. 결혼 직전에도 주님에게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결혼을 재고해야 합니다.
"목사님! 누가 제 배우자일까요? 제가 지금 교제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택해 주신 사람이라고 어떻게 판단할 수 있지요?" 하고 많은 청년들이 저에게 묻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다음에 기회가 있을 때 다시 함께 생각할까 합니다.
아무쪼록 사랑하는 청년 여러분 모두, 데이트 많이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택하신 좋은 믿음의 배우자를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상대가 넘어지면 서로 일으켜주고 따뜻하게 사랑하며 한 사람이 악에게 패배할지라도 두 사람이 맞서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주님의 귀한 일꾼들, 미래의 가정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