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과 반대 앞에서
성경본문 ; 느헤미야 4: 1-6
1. 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을 비웃으며
2. 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3. 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4.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컨대 저희의 욕하는 것으로 자기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5. 주의 앞에서 그 악을 덮어 두지 마옵시며 그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저희가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의 노를 격동하였음이니이다 하고
6.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락되고 고가 절반에 미쳤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들여 역사하였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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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친구가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라는 게 대체 뭐지?”
“간단하게 설명하면 하나의 물체가 관련성 여부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는 이론이야.
예를 들면, 자네가 잠옷을 입고 뜨거운 난로 옆에 앉아 있다면 1분이 한 시간처럼 여겨지겠지. 그런데 만일 잠옷 입은 여인이 자네 무릎에 앉아 있다면 그때는 아마 한 시간이 1분처럼 여겨질 걸세. 이것이 상대성 이론이라네.”
설명을 듣고 난 후 집에 돌아갔습니다.
밥을 먹으려고 보니까 국에 부인의 머리카락이 들어있습니다.
어떻게 했을까요?
“여보! 내가 오늘 상대성 이론을 배웠거든.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머리카락이 당신 머리에 한 가닥밖에 없다면 너무나 적은 것이지. 그러나 머리카락 한 가닥이 국에서 발견된다면 머리카락의 수는 너무 많게 여겨지지 않겠나?”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수많은 말 중에 칭찬과 격려의 말은 아무리 많아도 적게 보이고 비판과 반대의 말은 한 마디라도 크게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많은 성도들이 설교를 듣고 있지만 한 사람이라도 졸고 있으면 그 분 때문에 외로워지고 가슴 아파지는 것이 설교자의 마음입니다.
비판과 반대의 말은 듣는 이의 용기를 꺾습니다.
무언가 선하고 바른 일을 시작하고자 할 때 특히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마음을 정하고 나아갈 때 부딪히는 비판과 반대는 낙심과 절망을 가져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기 때문에 남을 비판하는 비판으로 자기 자신도 판단 받을 수 있습니다. 문제의 원인은 외부에 미루고 자신은 의롭다는 전제 아래 사람들과 일을 평가하는 교만이 뿌리를 두고 있는 마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비판대신 분별하라고 말씀합니다. 비판은 개인과 공동체를 무너뜨리기 위한 사단의 전략이 배후에 있기 쉬운 반면, 개인과 공동체를 세워 가는데 관심을 두고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분별이기 때문입니다. 분별의 동기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분별은 상대방의 잘못을 거울삼아 자신을 돌아보며 추스리게 하는 기능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고 사모하던 예루살렘 성이 극적으로 세워지는 현장 속에서 산발락과 도비야, 게셈은 구체적으로 예루살렘 성 쌓는 일을 반대하고 비난하는 사건이 나옵니다. 목표를 세우고 어떤 일을 정성스럽게 하고자 할 때 누군가 비판하고 반대하면 분노가 일어나는 것을 여러분도 경험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어떤 사람은 한 대를 맞으면 두세대를 때립니다. 그 결과 전면전이 벌어지고 성경말씀과 같이 피차 망하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일단 싸우기 시작하면 승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분은 뒤로 물러섭니다. 비판과 반대라는 첨예한 공격 앞에 뒤로 물러나지만, 패배의식 때문에 마음에 한을 품고 병을 얻거나 기회가 되면 폭발합니다.
마음의 상처가 해결되지 않아 반대했던 사람에 대해 좋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기도 합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진행하는 중에 사람들이 반대하고 조롱하고 경멸하며 나올 때, 그리스도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보면서 문제를 풀어가는 느헤미야의 지혜를 함께 나눠보고 싶습니다.
첫째 느헤미야는 기도했습니다.
1절부터 3절까지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집요하게 경멸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의 말이 나옵니다. 이에 대해 4절과 5절에는 느헤미야가 하나님께 나아가 속상한 마음을 기도 중에 토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우리 하나님이여 들으시옵소서 우리가 업신여김을 당하나이다 원컨대 저희의 욕하는 것으로 자기의 머리에 돌리사 노략거리가 되어 이방에 사로잡히게 하시고 주의 앞에서 그 악을 덮어두지 마옵시며 그 죄를 도말하지 마옵소서 저희가 건축하는 자 앞에서 주의 노를 격동하였음이니이다 하고”
기도의 내용을 우리가 쓰는 말로 “하나님, 우리가 너무 창피스럽고 고통스럽게 되었습니다. 우리를 욕하는 그 욕이 저들의 머리에 그대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뿐만 아니라, 저들도 우리와 똑같은 상황을 경험하게 하셔서 비참하게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경험하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저들이 와서 잘못했다고 빌 때도 절대로 용서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리고 작살을 내주시옵소서.” 라고 바꿔볼 수 있습니다. 속이 시원하십니까?
여러분 이렇게 기도해 보신 적 있습니까?
아마 이런 기도 따라 하나님께서 응답하셨다면, 지금 여기 앉아 있을 사람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분명 다른 누군가에게 분노의 대상이 된 적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느헤미야가 기도한 기도의 내용보다는 느헤미야의 자세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노하지 말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분노를 품지 말라 하셨고, ‘해를 넘기지 말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일정 시간을 정해 주셨을 뿐입니다. 화가 마음에 있는 것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죄가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무엇보다 자신이 눈물 흘려 기도해왔을 뿐 아니라, 민족의 생존이 달린 일을 이제 막 시작하려는데 자신의 이익 때문에 반대하고 나서는 무리 때문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성경에 소개되었기 때문에 표현이 완화된 것이지 느헤미야가 진짜 기도한 내용은 더욱 심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어쨋든 우리는 느헤미야가 안타깝고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하나님께 토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속상하고 어려운 일을 또 다른 사람에게 토해 내고 공격합니다.
자기입장을 설명하려고 하며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이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만큼 분노와 속상함을 온전히 받아주는 사람이 있던가요?
오히려 허무하지는 않았습니까?
사람은 모두 자기 입장에서 이해하려고 합니다.
있는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도 할 수 없습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감정을 하나님께 표현합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온전히 받아들여주고 이해해 줄 수 있는 분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평생에 분노할 일의 연속인 삶을 살았던 다윗, 시편 62편을 통해 자신에게 분노가 있고 반대와 비판에 부딪힐 때 어떻게 처리하였는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 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구원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중략)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나의 구원과 영광이 하나님께 있음이여 내 힘의 반석과 피난처도 하나님께 있도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토할 때 아까워하시는 분이 있습니까?
속에 있는 것을 그냥 다 토해내지 않습니까? 다윗은 안타깝고 억울한 심정을 하나님께 다 토했다고 했습니다. 소망이 하나님께만 있고 내 마음과 소원을 알아주시는 분도 그분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를 풀 수 있을 듯이 보이는 사람에게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쏟아내고 있습니까?
오히려 쏟아 내었기 때문에 큰 아픔을 경험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가슴에 묻어두면 병이 됩니다. 어딘가에 쏟아 부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정을 속이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감정도 창조하신 분이 우리가 얼마만큼 분노하고 속상해 하는지 알고 계십니다.
주님 앞에 쏟아내십시오.
주님이 그 마음을 받으시고 위로해 주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대와 비판에 직면하여 좌절과 절망을 느낄 때 해야할 일은 사람들에게 불평과 원망 그리고 분노를 쏟아 붓는 것이 아니라, 기도입니다.
먼저 기도하는 것이 비판과 반대를 해결하는 신앙인의 첫째되어야 할 방법입니다.
느헤미야는 반대와 비판 앞에 낙심하지 않고
둘째 자신의 일을 더욱 충성스럽고 견고히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6절 말씀 “이에 우리가 성을 건축하여 전부가 연락되고 고가 절반에 미쳤으니 이는 백성이 마음 들여 역사하였음이니라” 백성들이 한 마음으로 오히려 더욱 열심을 내어 성을 쌓았다고 말씀합니다. 비판과 반대 앞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에게 있을지 모를 잘못을 살펴본 다음에는 백성들을 격려하며 목표를 이루어가는 느헤미야를 보며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옳은 일인 줄 알지만 사람들이 동조하지 않고 칭찬하지 않으면 하고 싶지 않습니다. 더구나 비판하고 비난하면 더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공동체에 꼭 필요한 일을 포기하게 되면 우리는 사단의 전략에 항복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단은 주님의 역사를 이루는 일에 온갖 방법으로 우리 의욕과 용기를 꺽어 중단시키고 전략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습관적 중독을 끊으려 할 때 이런 문제를 자주 만나게 됩니다. ‘술을 안 먹어야지, 노름 하지 말아야지, 가족을 위해야지. 이제는 복잡한 관계를 청산해야지.’ 라고 결심하지만, 작은 문제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지는 자신을 발견할 때 낙담합니다.
10절 말씀 이스라엘 공동체 내부로부터 좌절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나귀 한 마리도 지나갈 수 없는 무너져내린 성의 흙더미를 치워야 하는데 나를 사람과 힘이 없어 자신들의 힘으로는 성을 세울 수 없다고 절망하는 절망감이 일하는 백성들 사이에 파고들기 시작했습니다.
‘산발랏과 도비야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구나.’ 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8절, 반대와 비판의 말이 점점 더 많이 생깁니다. 선한 일을 한다고 해도 사람들이 우리 앞의 돌멩이를 치워줄 것으로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슈바이처박사가 아프리카를 갈 때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한 길을 갈 때 사람들이 앞길의 돌멩이를 치워 줄 것으로 기대하지 말라. 사람들은 더 큰 돌멩이를 던질 것이다.”
12절 말씀, 대적의 근처에 유하는 유대사람들이 일하러 나간 자신의 남편에게 이야기합니다. ‘여보 그 일을 꼭 해야 되요? 그들이 쳐들어간다던데, 당신 살아야 되잖아요. 그만 하고 돌아와요. 우리는 그 일하고 상관 없잖아요.’ 격려해야할 가족들이 오히려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비판과 반대가 있으면 사람들의 생각이 많이 나누어집니다. 갈등이 생기고 내부분열이 생기며 어려워집니다.
이때 느헤미야는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을 권면하고 용기와 힘을 줍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느헤미야 자신은 부족하지만 능력과 권세 있으신 하나님이 허락하시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적은 수지만 취약지구에 군대를 배치합니다.
일하는 사람에게 한 손에는 쟁기를 한 손에는 무기를 들게 하고, 서로 나팔을 불게 하여 적들이 쳐들어올 때를 대비할 수 있는 비상 연락망을 짜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듣고 적들은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 땅에 해야할 일은 너무 많으나 우리 힘은 연약하고 부족해서 좌절할 때가 참 많습니다.
여기에 비판과 반대를 만나면 더 큰 자괴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꼭 이렇게 해야 인생이 잘되는 것은 아닐텐데.’ 라는 회의로부터 시작해서 결국에는 의미를 잃고 일을 중단하게 됩니다.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안 되는 이유를 수십 수 백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된다고 하는 사람은 신기하게도 되는 이유가 또 그만큼 나옵니다. 안된다고 마음 먹으면 안되는 일이 많습니다. 생각이 굳어지기 때문입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느헤미야가 담대한 이유는 자신은 약하나 하나님의 역사는 놀라우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실패와 연약함의 상징이었지만, 가장 무기력한 십자가를 통해서 인류는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작은 지팡이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게 하셨습니다.
기드온은 작은 등불과 나팔로 적군을 물리쳤습니다.
견고하고 단단한 여리고 성은 수양의 뿔의 나팔로서 무너졌습니다.
다윗은 거대한 골리앗을 작은 돌맹이로 무너뜨렸고,
방주는 작았지만 하나님의 구원을 담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노예로 온 죄수출신 요셉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엘리야의 외투는 보잘 것 없었지만 요단강을 가르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우리 자신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질그릇 속에 보배를 가졌기 때문에, 질그릇은 깨지기 쉽지만 질그릇 속에 담긴 보배가 질그릇을 존귀한 존재로 만든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인류최초의 무선전신기, 핸드폰의 시초가 되는 무선전신기는 마르콘이 10여 년 동안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실험한 결과 인류에 소개할 수 있었습니다.
뉴딜정책으로 국가적 어려움을 몰아내며 미국역사상 4번이나 연속해서 대통령에 당선되는 영광을 누린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소아마비라는 절망을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파리군사학교에서 51명중 42등으로 겨우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펄벅의 ‘대지’의 초고는 무려 14곳의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했던 작품입니다.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의 커널 샌더슨은 65살에 사업에 실패해서 모든 것을 날려버렸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 세계적인 켄터키 후라이드 치킨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열거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무엇입니까?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잘못과 부족한 점을 보완해서 끝까지 도전하는 자세는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고 위대한 일을 이루는데 밑거름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반대와 비판은 낙심할 일이 아닙니다. 내게 있는 부족함이 무엇인지를 살펴본 다음에는 낙담하지 말고 중심으로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고 두려워 할 것을 두려워 할 때 반대와 비판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14절 말씀을 보면 느헤미야는 백성들에게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두려워하고 있는 대상은 동서남북으로 우겨 싸기 시작하는 산발락과 도비야 그리고 게셈의 군사들이었습니다. 자기 재산과 생명을 위협하는 무리들을 두려워했습니다.
이러한 사건이 일어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왜 남을 비판하고 반대합니까?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산발락과 도비야와 게셈을 통해서 볼 수 있는 것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잃어버릴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도 반대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을 잘 살펴보면 사실은 자신의 영향력을 잃어버릴 것 같아 반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산발락이 사마리아 지역의 총독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북방 이스라엘을 통치하고 있던 사람입니다. 산발락의 야심은 남방의 유다까지도 자기 영향력 아래 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바사왕의 친서를 가지고 총독으로 오는 것을 보니 자기 영향력이 줄어들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사마리아로 들어오는 교통과 무역의 통로가 예루살렘과 연결되어 있었는데, 예루살렘에 성을 쌓으면 경제적인 이윤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람들이 비판하고 반대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주로 자기 이해관계가 얽혀있을 때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귀신들린 여종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사람이 바울과 실라가 여종에게 들렸던 귀신을 쫓아버리니까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한 영혼이 살아나는 것보다 자기 이익이 우선되는 것이 인간의 현실이자 바로 나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모습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생명과 재산을 적들에게 빼앗길까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너희 육신의 생명을 빼앗는 자보다 영혼의 생명을 빼앗는 자를 두려워하라.’ 고 그리고 ‘저들이 힘이 있어 빼앗을 수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사람들의 반대와 비판은 두렵지 않게 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때 우리는 하던 일을 계속해야 할지 중단해야 할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 뜻보다 내 뜻과 이해관계, 내 생각과 전통의 관철에 관심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이 좌절되고 절망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 자신을 통해 하나님의 일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원하는 분별력을 갖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바램대로 십자가를 피할 수 있는 길을 선택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를 피하고 싶었으나 자기로 인해 하나님 뜻이 좌절되는 것을 허용치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으로 인류를 구원하는 쪽을 선택하셨습니다. 자기를 못 박는 로마병정보다 모든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두려워하였기에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쏟아진 비난과 반대의 말을 성경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리와 창기의 친구다. 율법의 파괴자다.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정신 나간 참람한 자다. 자칭 유대인의 왕이다.’
정말 듣기 어려운 비난의 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의 하는 일은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는 것이라 말씀하며 쏟아지는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뜻을 이루고자 정진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간직해야 할 것은 반대나 비판하는 입장에 서거나 반대로 받는 입장에 서거나, ‘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나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가, 내 생각의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정하신대로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시대는 비판과 반대로 인해 소중한 것을 너무 많이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무엇을 위한 비판과 반대인지를 살펴보면서 역사 앞에서 후에 어떻게 평가될 것인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를 살피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육군사관학교 교장인 김충배 장군의 편지를 인터넷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함께 생각해 볼만한 내용인 것 같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장래를 짊어질 개혁과 신진의 주체 젊은이들이여’ 라고 시작되는 이 글은 지난 50대 60대가 걸어왔던 수모와 고통의 모습을 역사 속에서 나름대로 정리하며 60년대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습니다.
당시 한국은 자원도 돈도 없는 세계에서 가장 못사는 나라였다.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등
이때, 한국은 76불이었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세계 120개 나라 중에 인도 다음으로 못 사는 나라가 바로 우리 한국이었다.
1964년 국민소득 100달러! 이 100달러를 위해 단군 할아버지부터 무려 4,600년이라는 긴 세월이 걸렸다.
이후 그대들이 말하는 이른바 우리 보수 수구세력들은 머리카락을 잘라
가발을 만들어 외국에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를 동원하여
"머리카락 파세요! 파세요!"
하며 길게 땋아 늘인 아낙네들의 머리카락을 모았다.
시골에 나이 드신 분들은 서울간 아들놈 학비 보태주려머리카락을 잘랐고,
먹고 살 쌀을 사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랐다.
그래서 한국의 가발산업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곰 인형을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전국에 쥐잡기 운동을 벌렸다. 쥐털로 일명 코리안 밍크를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다 만들어 외국에 팔았다.
이렇게 저렇게 해서 1965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다.
세계가 놀랐다.
"저 거지들이 1억 달러를 수출 해?"
하며 '한강의 기적'이라고 전 세계가 경이적인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조국근대화'의 점화는 서독에 파견된 간호사들과 광부들이었다.
여기에 월남전 파병은 우리 경제 회생의 기폭제가 되었다.
참전용사들의 전후 수당 일부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우리 한반도에 동맥이 힘차게 흐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올림픽을 개최하고, 월드컵을 개최하고, 세계가 우리 한국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국력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그대들이 수구 보수세력으로 폄훼 하는 그 때 그 광부와 간호사들, 월남전 세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대들이 명심할 것은 그 때 이방인의 시신을 닦든 간호사와 수 천 미터 지하 탄광에서 땀흘리며 일한 우리의 광부, 목숨을 담보로 이국전선에서 피를 흘리는 우리 국군장병, 작열하는 사막의 중동 건설현장에서 일한 5,60대가 흘린 피와 땀과 눈물이 있었기에 그대들 젊은 세대들이 오늘의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반전과 평화데모를 외치며 거리로 몰려나와 교통질서를 마비시키는 그대들이 과연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를 수구세력으로 폄훼 할 자격이 있는가...
그대들이 그때 땀 흘리며 일한 오늘의 5,60대들을 보수 수구세력으로 폄훼하기에 앞서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라.
국가경영을 세계와 미래라는 큰 틀 전체로 볼 줄 아는 혜안을 지녀야 하지 않겠는가? 보다 낳은 내일의 삶을 위해 오늘의 고통을 즐겨 참고 견뎌 국민소득 4만 불대의 고지 달성 때까지 우리들 신,구세대는 한 덩어리가 되어야 한다.
이제 갈라져 반목하고 갈등하기에는 갈 길이 너무 멀다.
이제 우리 모두한번쯤 자신을 돌아보며 같은 뿌리에 난 상생의 관계임을 확인하고
다시 한번 뭉쳐보자.
우리 모두 선배를, 원로를, 지도자를 존경하고 따르며, 우리 모두 후배들을 격려하고, 베풀고, 이해해주면서 함께 가보자.
우리 대한민국의 앞날에 더욱 밝은 빛이 비추어 지리니!!
이 내용에 수긍하지 않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은 어제가 없었다면 오늘도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오늘 없는 내일도 없습니다.
지금 비판과 반대보다 우리가 먼저 찾아야 할 것은 분별입니다.
민족을 세우고 공동체와 개인의 삶을 세워나가는데 있어 사랑이 동기가 되어야 하고, 사랑이 동기가 되어 현실을 직시하는 눈을 소유해야 할 것입니다.
반대보다는 분별을 통해서 개인과 공동체가 살아날 길이 무엇인지를 고민해봅시다. 그들의 헌신과 땀으로 오늘 누리는 풍요로움이 있다면, 오늘 우리의 헌신과 희생이 없을 때는 당연히 미래도 있을 수 없습니다.
역사는 지금의 세대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생각해 보고 역사의 심판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판단할 것인지, 나는 어떤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할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대를 분별하며 지혜로운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