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을 앞둔 청춘 남녀의 갈등과 결혼 생활 중인 부부의 애정 문제는 우리 드라마의 단골 메뉴다. 단골 메뉴라는 게 대개 그러하듯, 결혼을 바라보는 시각은 전통적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상파 드라마도 보수적 결혼관으로 기우는 결말로 가곤 한다.
정통 멜로드라마인 MBC ‘겨울새’와 코미디가 가미된 멜로물인 SBS ‘조강지처클럽’은 장르 면에서는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 결혼관과 부부 관계에 있어서는 똑같이 보수적인 시각을 보인다.
시청자 모니터링단체 ‘미디어세상열린사람들’은 부모와 자식 세대의 그릇된 결혼관을 보여주는 ‘겨울새’와 불륜으로 인한 부부 생활 파탄을 그리고 있는 ‘조강지처클럽’을 비교 모니터하여, 바람직한 결혼관과 부부 관계를 제시했다. 다음은 미디어열사 모니터 보고서의 주요 내용.
젊은 세대의 결혼관
‘겨울새’의 여주인공 박영은(박선영 분)은 고교 시절 부모를 잃고, 부친의 선배인 정회장(장용 분)의 집에서 자랐다. 성인이 된 박영은은 정회장의 아들 정도현(이태곤 분)과 사랑하는 사이가 되지만, 이를 반대하는 정회장 부인 이여사(윤미라 분)의 책략으로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해 고통을 겪고 있다.
박영은이 사랑하지 않는 남자와 결혼한 것은 자신을 거두어준 정회장 부부에 대한 은혜를 헤아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인륜지대사인 결혼을 은혜 때문에 그르쳐도 좋은 것일까. 더더욱 이해되지 않는 것은 박은영은 최고 교육을 받은 27살 성인이고, 자립하기에 충분한 거액의 돈도 있다. 성인이 되어서도 남의 집에 얹혀살면서 눈치 볼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박영은은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한다.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헤쳐 나갈 의사가 없는 박영은이 불행한 결혼을 자초하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닌가 싶다. 드라마는 여기서 더 나아가 약혼자의 과거, ‘마마보이’ 남편, 악의적인 시어머니를 설정해 박영은을 50~60년대의 박복한 여성으로 만든다.
부모 세대의 간섭
‘겨울새’의 정회장 부부와 박영은의 시어머니 강여사(박원숙 분)는 자식의 결혼에서 부부 생활까지 시시콜콜 간섭한다. 청춘 남녀의 결혼 과정이 주 테마가 되는 우리 드라마에서, 부모는 항상 자식의 결혼에 반대하는 입장에 선다. 반대 이유로는 부모 세대의 과거 악연, 자식의 세속적 성공을 바라는 부모 마음을 내세운다.
즉 우리 드라마의 부모들은 악연을 만들어 놓고도 그 업보를 스스로 풀지 않으며, 자식에게 대신 희생하라고 윽박지른다. 더 나쁜 건 이것을 자식 사랑이라고 합리화한다는 것이다. 과거 악연이 없으면, 자식이 데려온 여자(남자)의 세속 조건을 따지며 반대한다.
이처럼 왜곡된 부모 세대 결혼관은 손녀 세대에까지 이어진다. ‘조강지처클럽’의 한복수(김혜선 분)와 이기적(오대규 분) 부부의 어린 두 딸은 할아버지 이화상(박인환 분)의 결혼 상대감을 찾고 있다. 할머니감 사진을 보고는 외모, 나이, 집안, 자식의 직업 등을 운운하는 아이들이 누구로부터 이런 결혼관을 주입받았는지는 자명하다.
우리 드라마에선 인물 됨됨이를 보고 자식의 반려자를 판단하는 부모는 찾아보기 힘들다. 결혼이 사랑하는 이와의 결합이라는 건강하고 당연한 결혼관을 위배하는 부모들이 대부분이다.
대화 없는 부부
‘조강지처 클럽’에 등장하는 네 쌍의 부부는 모두 불륜으로 인해 부부 생활의 위기를 맞는다. 불륜의 원인이 정확하게 언급되지는 않지만, 그 바탕에는 반려자에 대한 애정이 전혀 없는 데서 오는 무시가 깔려있다.
아들을 해외 유학 시킬 능력 없는 남편 길억(손현주), 생선 비린내 풍기는 무식한 아내 한복수(김혜선), 고교 시절부터 따라다니며 발목 잡은 아내 나화신(오현경)에 대한 지겨움이 바람 피우는 정나미(변정민), 한원수(안내상), 이기적(오대규)의 변명이다. 이들의 부모 세대인 한심한(한진희)과 안양순(김해숙) 부부 사이엔 후처 복분자(이미영)가 있어, 과거 완료형 불륜이다.
버림받은 남편과 조강지처는 사회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지만, 사실 이들은 착하고 당당하다. 이들의 결점은 오직 하나, 반려자를 배려하며 열심히 사느라 자신을 돌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두 드라마는 버림받은 남편과 아내의 눈물 소동 대 바람피우는 이기적인 아내와 남편의 당당함이라는 대결 구도를 즐긴다. 부부 생활의 파탄은 어느 한 편의 일방적 잘못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착한 사람은 버림받고 이기적인 사람은 당당하다는 불건전한 설정에서 드라마가 출발한다.
시대착오
‘겨울새’는 1992년에 이미 드라마로 방영된 적 있는 김수현 소설이 원작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겨울새’는 재탕의 의미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원작의 캐릭터와 갈등구조가 그대로 답습되면서 시대에 동떨어진 느낌으로 보는 내내 드라마의 시대 배경을 궁금하게 한다. 현시대에 전혀 공감 받지 못하는 캐릭터로 과거 인기드라마의 향수를 시청자들로 하여금 느끼게 하고 싶었다면 시대배경도 그럴 듯하게 꾸미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조강지처클럽’도 현시대를 살아가는 부부들의 이야기이지만 불륜에 대처하는 방식은 구시대적 묘사로 국한되어 있다.
시청자가 바라는 결혼관과 부부상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해야 하지만, 가공의 현실을 통해 브라운관 밖 현실을 선도할 수 있는 특권도 갖고 있다. 두 드라마는 이 특권을 내침으로써 저질 시비를 자초한다.
결혼은 당사자만 좋다고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게 아니라 두 가정의 결합이라는 것이 우리의 전통 사고라면, 드라마는 이 전통을 지키기 위해 당사자와 부모 세대가 갖추고 배워야할 점은 무엇인지를 제시해주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자식에게 부모 세대의 속물 결혼관을 강요하고, 부부 생활을 시시콜콜 간섭함으로써 자식의 독립을 가로막는 부모는 정상적인 부모라 할 수 없다. 이런 부모상을 계속 그리는 것은 부모 세대에 대한 모욕에 다름 아니다.
부부 생활의 파탄이 어느 한 쪽의 잘못이 아닌 쌍방의 잘못임을 성찰하고, 대화로써 원만하게 해결하고 새로운 삶을 찾는 부부상을 예시하는 것이 이혼율 높은 이 시대에 드라마가 할 수 있는 순기능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