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一章 귀향(歸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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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사(豹賢梭)는 흥청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천천히 걸음을 떼어놓았다.
해안소의 풍경은 어느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배를 놓친 길손들을 상대로 한몫 잡으려는 사람들의 아귀다툼이 지겹게 펼쳐진다.
그 중에서도 역겨울 정도로 분을 찍어 바른 여인네들과 그녀들에게 빌붙어 사는 사내들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유별나게 기승을 부린다.
"참한 계집이 새로 왔는데……"
"어머! 어쩜 이렇게 멋있을까? 하룻밤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아볼 생각없수?"
"재수 더럽게 없네. 야! 이 새끼야! 돈이 없으면 없다고 진작 이야기해야 헛김을 안 뺄 것 아냐! 이게 초장부터 사람 기운 빠지게 만들고 있어. 빨리 안 꺼져!"
"이 계집애야! 내가 먼저 찍어 논 손님이란 말야!"
"이게 어디서 헛소리야! 썩을 년! 네 서방이라도 되니? 어디서 헛수작질을 하고 있어!"
웃음소리와 패악소리가 뒤범벅이 되어도 하등 이상할 곳이 없는 곳이 해안소다. 설혹 심한 몸싸움이 벌어지거나 칼부림이 오고가도 누구 하나 간섭하려 들지 않는다.
표현사는 긴장된 기색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목적한 기방(妓房)이 빨리 나타나기를 간절히 갈구했다.
그는 태연하게 걷고 싶었다. 하지만 걸음걸이는 누가 보아도 서두르는 기색이 역력했다.
"오라버니……"
누군가 지독한 분 내음을 풍기며 팔목을 붙들었다.
"초월(草月)이 찾아간다."
"쳇!"
기녀는 두말하지 않고 붙들었던 팔목을 놓아주었다.
그 후에도 두어 명인가 더 다가섰지만 초월이라는 말을 듣고는 한결같이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으리라. 하다 못 해 농지거리 몇 마디라도 주고받았고, 생각이 동하면 가슴어림이라도 슬쩍 만져보았을 터였다.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목줄을 움켜쥐는 듯한 살기가 피부 깊숙이 파고든다. 필경 누군가가 독수리 같은 눈으로 예의 주시하고 있으리라. 그러다 때가 되면 잘 갈아진 검날을 틀어박겠지.
향루(香樓)라고 쓰여진 깃발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거리는 십 장.
전신에 깃든 긴장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두 다리도 맥이 풀렸는지 걸음을 떼어놓을 적마다 후들거린다.
'다 왔어. 이제 다 왔어. 조금만 더 가면……'
십 장 거리가 삶과 죽음의 갈림길인 셈이다.
그는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신법 중 가장 빠른 비류성(飛流星)을 떠올렸다.
비류성이라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향루 안으로 파고들 게다. 하지만 신법을 전개한다면…… 신법을 펼치는 바로 그 순간, 꼭 어디선가 검날이 날아올 것만 같았다.
이제 십 장만 더 가면 살 수 있는데. 과연 향루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다시 사방을 둘러보았다.
쌀가게가 있고, 안에는 손님 두어 명이 쌀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주인은 익히 아는 사람이다. 그는 무공을 전혀 모르지만 타고난 신력(神力) 덕분에 해안소에서는 나름대로 대접받는 위인이다.
그가 유살검일까? 어림없는 소리…… 저런 위인이 유살검이라면 해남오지의 위명(威名)은 벌써 땅에 곤두박질쳤으리라.
그럼 누가 유살검일까? 눈곱도 떨어지지 않은 촌부(村夫)는
더더욱 아니고, 배가 태산(泰山)만하게 부풀어 오른 임신부는……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목숨에 위해(危害)를 가할 만한 사람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도 한 걸음씩 떼어놓은 발걸음이 제법 옮겨져 향루와 오 장 거리를 남겨두었다.
그 때 문득 낯선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거적을 깔고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복자(卜者).
꾸부정한 등허림하며 윤기 없는 머리칼, 쭈글쭈글하게 늙어버린 얼굴을 보면 그 누구도 무인이라고 믿지 않겠지만 표현사는 복자가 유살검일 것이라는 의구심(疑懼心)을 떨치지 못했다.
손마디가 강인하다. 투박한 것이 아니라 강인하다. 동백기름 냄새가 배어 있는 손이다.
하루가 멀다하게 검을 손질했음이 틀림없다. 무엇보다 낯설다. 그리고 향루와 자신의 길목을 가로막고 있다.
엄밀히 말해서 길목을 가로막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보기에도 촌스러운 천하만사(天下萬事) 무불통지(無不通知)라는 깃발을 걸어놓고 양광(陽光)을 즐기는 고양이처럼 담벽 한 귀퉁이에서 졸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무인이 검을 날리기에는 충분한 거리. 다리를, 허리를, 머리를…… 전신 어디든지 공격할 수 있으리라.
'여섯 걸음.'
걸음을 떼어놓을 때마다 솜털이 쭈빗 곤두섰다.
'다섯.'
'넷.'
세 걸음이 남았을 때 표현사는 손을 품안으로 찔러 넣어 자신에게 마수광의(魔手狂醫)란 작호(爵號)를 안겨준 세우침(細雨針)을 움켜잡았다.
파란 하늘에 먹구름이 깔리듯 허공을 빼곡히 채우는 세우침 무더기는 적어도 한 생명을 보존해 주리라.
이제 향루까지는 두 장 남짓 남았을 뿐인데 제 아무리 하늘을 쪼개는 검공(劍功)을 소지했다 한들 무엇을 어찌 할 수 있으랴.
단 일 초만 피하면 된다. 단 일 초만……
그래도 다행이지 않은가. 유살검은 해남오지 중 제일 난폭한 자다. 난폭한 자는 사람을 죽일 때도 쉽게 죽이지 않는다.
아마도 사지(四肢)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려고 할게다. 검공 또한 그에 버금갈 테고……
만약 손속이 가장 깨끗하다는 청혼검이 나섰다면 일초를 피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으리라.
향루와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에서 죽이려 한다는 점도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다. 유살검은 자신이 있어서 하는 행동이겠지만 못난 짓…… 호랑이도 토끼를 잡을 때는 전력을 다한다는데 그는 너무 방심했다.
'일초만 피하면 향루로 들어갈 수 있어. 둘.'
'하나.'
드디어 복자의 앞을 스쳐 지났다. 그 때까지 복자는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러나 표현사는 분명히 느꼈다.
그의 손끝이 꿈틀거리는 것을.
다시 한 걸음, 복자와의 거리가 소멸되었다. 찰라,
파라락……!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복자의 손이 번쩍 빛났다. 그리고 하늘을 가려버린 작은 비늘들.
파라락……!
표현사의 손도 품에서 빠져 나왔다. 복자가 공격을 가해온 것과 거의 동시였다.
허공에서 난무하는 작은 비늘과 작은 비늘.
복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마주 쳐가는 대신 향루를 향해 전력으로 신법을 전개했다는 점 뿐.
"커어억!"
참담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복자는 표현사를 너무 몰랐다. 표현사의 성명무기(聲名武器)가 세우침이란 걸 진작 알았더라면 공격과 동시에 앞으로 지쳐오지는 않았으리라. 그러고도 죽음을 모면한다면 그야말로 무신(武神), 불행히도 복자는 무신이 아니다.
"컥!"
표현사도 눈에 별똥이 튀기는 아픔을 느끼며 신음을 토해냈다. 비록 복자가 전신으로 피를 내뿜으며 나뒹굴었지만 표현사의 몸도 복자와 마찬가지로 고슴도치가 되는 신세를 면할 수 없었다. 그나마 사력을 다해 신형을 물린 것이 목숨을 구해준 모양이다.
"빌어먹을! 세우침……"
뜻밖이었다. 유살검이 검을 버리고 세우침으로 공격을 가해오다니. 어쨌든 죽은 자는 유살검이고 산 자는 자신이다.
표현사는 믿을 수 없는 결과에 얼떨떨했다.
해남오지 중 일인이라는 유살검이 겨우 이 정도밖에 안될 줄이야.
"으음……"
나지막이 신음을 토해낸 표현사는 마지막 남은 기력까지 전부 뽑아 올려 신법을 전개했다.
이 장 거리를 움직이는 것은 눈 깜짝할 순간이었다.
향루는 허름한 객사(客舍)와 비린내가 역겹게 풍기는 어물전(魚物廛) 사이에 위치했다.
객사, 향루, 어물전……
어느 곳이나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지만 지금은 모두 한가롭기 이를 데 없었다. 객사는 마치 빈집처럼 싸늘함만 가득했고, 어물전에도 파리만 극성을 부릴 뿐 소금을 뿌려놓은 생선 몇 마리만 흉물스럽게 늘어져 있다.
향루도 마찬가지였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주루(酒樓)와 별반 다를 바 없어서 손님이라고는 값싼 백주(白酒) 한 잔에 하루를 죽치는 주정뱅이 몇 사람이 있을 뿐, 활기찬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이 과연 기루(妓樓)인가?
의심이 절로 들었다.
다른 곳과 다른 것이 있다면 선뜻 발을 들여놓을 수 없을 만큼 깨끗하다는 것. 나무로 된 바닥은 얼마나 쓸고 닦았는지 반질반질하게 윤기가 흘렀고, 주탁(酒卓)도 가지런히 정돈되어 흐트러짐이 없었다.
"초월이를 만나러……"
표현사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타 들어가는 것처럼 아팠다.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생각할 틈도 없었다. 그가 지금 간절히 바라는 것은 빨리 초월이라는 미지(未知)의 여인을 만나 약속대로 이 지겨운 바닷가로부터 멀리 도망치는 일이다.
"존성대명(尊性大名)은 어찌 되시는지?"
점소이인 듯 싶은 자는 표현사의 처참한 몰골을 보고도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리고 보니 주루 안에 있는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늘 대해왔던 광경을 또 본다는 듯 덤덤했다.
"마수광의…… 마수광의 표현사요."
표현사는 얄미울 만큼 태연한 점소이를 보면서 아픈 기색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수천 마리의 벌떼가 물어뜯는 듯한 고통은 내색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나타나지 않을 성질이 아니었다.
"따라오시지요."
점소이는 여전히 서둘지 않았다. 주정뱅이처럼 할 일 없이 앉아있는 손님들도 태연하게들 술잔을 집어 들었다.
점소이는 계단을 밟으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도둑괭이가 살금살금 걷듯이 발걸음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 걸음걸이로 미루어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것도 표현사 자신마저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무공이다.
"끄응!"
표현사는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토해냈다.
지금 상처로는 평지를 걷기도 힘든데 계단을 밟아 올라가려니 그야말로 입에서 단내가 풀풀 피어올랐다. 단내보다도 송곳으로 쑤시는 듯한 고통이 전신 곳곳에서 뼈마디로 전달되었다.
그는 아직도 복자에게 당한 상처가 어느 정도인지조차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나마 육신이 움직이니 다행이랄까.
이층도 먼지 한 올 없이 깨끗했다.
회랑(回廊)에는 붉은 천이 깔려 있지만 누가 밟은 흔적은 없었다.
"루주(樓主), 초월이를 찾아온 손님이 계십니다."
문밖에서 고하는 점소이의 태도는 표현사를 대할 때와는 천양지차(天壤之差)였다. 문밖이라 보이지도 않건만 허리를 깊숙이 숙이고 음성마저 지극히 공손했다.
예상했던 대답은 바로 나오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천천히 삼십쯤 수를 헤아렸을 때 루주라는 사람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들어와."
점소이는 문소리조차 내지 않으려는 듯 살그머니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초월이가 사내? 빌어먹을!'
표현사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다른 생각은 할 겨를도 없었다. 세우침에 극독(劇毒)이 발라졌는지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오한이 치밀며 전신이 자르르하니 마비되어 왔다.
"마수광의 표현사? 앉아."
루주라고 불리는 사내는 뇌주반도나 해남도 같은 촌구석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귀골 풍의 사내였다.
깨끗하다는 것이 첫인상이다.
백설처럼 고운 백색 단삼(短衫)이 어쩌면 저리 잘 어울리는지. 주름 하나 없이 깨끗하게 다려 입은 것은 성격이 그러해서이리라.
살결도 햇빛 한 번 쐬어보지 못한 사람처럼 하얗다.
외지인인가? 해남도 사람들은 살인적인 폭염(暴炎) 탓에 검게 그을린 살결을 가지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검은 피부를 가지고 태어난 것처럼. 그런데 루주라는 사내는 창백하리만큼 하얗다.
뚜렷한 이목구비(耳目口鼻)는 더욱 눈에 띈다. 아름답기까지 하다.
군중들 틈에 섞여있어도 한눈에 띌만한 사내였다.
그는 다탁(茶卓)에 앉아 부드러운 미소로 맞았다. 그의 앞에는 비어진 찻잔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그렇다면 차를 마시기 위해서 손님을 문밖에 세워놓았단 말인가. 그건 그렇고 앉아? 아들 뻘 밖에 안 되는 놈이 감히 반말을?
표현사는 꿈틀거리는 분노를 목구멍 안으로 삼켜버리고 대신 점소이처럼 공손하게 포권지례(抱拳之禮)를 취했다.
"마수광의 표현사…… 초월이와 약조(約條)가 되어 있어……"
향루주는 접선(摺扇:부채)을 부치며 농(弄)처럼 말을 건네 왔다.
"이런! 많이 당했군. 이래서야 어디 뇌주반도는 고사하고 십 리나 벗어나겠나?"
표현사는 숨을 헐떡거리는 가운데도 작게 진저리 쳤다.
그도 사람을 볼 줄 안다. 산전수전 다 겪어 내심 능구렁이라고 자처하기까지 한다.
그런 그가 보기에 향루주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냉혈한(冷血漢)이었다. 아마 앉은자리에 풀도 자라지 않으리라. 생긴 것은 연약해 보이지만 움직였다 하면 질풍보다 빠르리라.
표현사는 사람을 제대로 골랐다는 안도감과 너무 강한 자를 골랐다는 불안감이 동시에 엄습했다.
"초월이를 만나게……"
"하하하!"
향루주가 잘게 웃었다.
"초월이는 찾을 필요 없어. 왜, 그런 것 있잖아? 그냥 신비스럽게 보이고 싶어서 만들어 낸 가공인물. 후후! 그 정도는 해안소에 사는 촌무지렁이들도 다 알지. 표현사…… 상태도 안 좋아 보이는데 말을 아껴야지."
짐작했던 일이다. 전권(全權)은 향루주라고 자신을 소개한 눈앞의 젊은이가 쥐고 있으리라.
루주라는 놈……!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게 도대체 뭐하는 수작인가? 가공인물이면 가공인물이지 그런 걸 가지고 비비꼬아서 꼭 배알이 틀리게 만들어야 되는가.
"그런데…… 미안하지만 이번 거래는 없던 것으로 해야겠어."
루주는 냉정했다.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용건이 끝났다는 듯 탁자에 수북히 쌓인 죽간(竹簡)을 뒤적거렸다.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어, 어째서……? 루주, 어째서 약조를 파기하는지 이유라도……"
표현사는 눈앞이 캄캄했다.
성한 몸일지라도 해남파(海南派)의 손아귀를 벗어나기 힘든데 하물며 중상(重傷)을 입은 몸으로야. 아마, 향루를 벗어나기 무섭게 싸늘한 시신으로 변하고 말리라. 지금쯤 복자, 유살검의 죽음이 알려졌을 테니까.
향루주는 죽간 하나를 펼쳐들고 읽었다. 표현사와는 관계없는 죽간이 분명했다. 그는 표현사와는 더 이상 말을 나눌 가치도 없다는 듯 철저히 무시했다.
"루주, 이유라도……"
죽간을 들여다보던 향루주가 귀찮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기를 잠시. 무엇인가 생각하던 루주는 이윽고 결심을 굳힌 듯 죽간을 내려놓고 표현사를 쳐다보았다.
"마수광의. 말은 바로 해야지. 약조를 먼저 파기한 사람은 마수광의 아닌가? 촌민(村民)을 죽였다? 하하하! 마수광의는 해남(海南) 문도(門徒)와 촌민이 같아 보일지 몰라도 내 눈에는 그렇게 비치지 않는데? 하하!"
향루주는 해남도에서 벌어진 일을 모두 아는 듯 했다. 그러나 거짓말을 알아냈다는 점보다 이어지는 말이 표현사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해남파 검급(劍級)은 하나같이 소중하지. 강임(姜林)을 죽이고 탈취한 잔월검보(殘月劍譜). 무림에 몸을 담은 사람이라면 한번쯤 호기심이 치밀 검급이지. 어때? 광동성(廣東省)을 빠져나가고 싶겠지? 좋아, 좋아. 해줄 수 있지. 해남파가 구대문파(九大門派)의 일익(一翼)을 차지하고 있지만 이곳에서는 내가 왕이니까. 하지만 은(銀) 이십 정(錠:은덩이) 정도로는 일해 줄 수 없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향루주는 당혹해하는 표현사를 조롱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너구리같은 놈. 돈을 더 달라 이거지.'
표현사는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속으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돈을 더 올려달라는 요구는 무리한 것이 아니다. 그 정도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다. 해남파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끄응! 대가를 올려달라면 얼마를 원하시는지……?"
"아니, 돈은 더 이상 필요 없어."
"그럼……?"
"방금 전에 말했잖아? 잔월검보…… 훑어나 보지 뭐. 갖겠다는 것도 아니고 훑어보겠다는데…… 아주 좋은 조건 아닌가?"
'죽일 놈……'
표현사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해남파의 진실한 면모는 감추어져 있다. 그 동안 해남도에 잠복하면서 살펴본 바로는 중원(中原) 대문파(大門派)들이 지닌 위용 같은 것은 어디서도 발견하지 못했다.
허나, 강임을 죽인 순간, 상황이 급변했다.
하루는 지나야 발견되리라고 자신하던 시신이 단 한 시각만에 발견되었고, 사인(死因)을 분석하고 흉수가 마수광의라고 정확히 지목해 내기까지는 그로부터 채 반각도 걸리지 않았다.
그 순간부터 해남도는 거대한 그물로 뒤덮인 듯 삼엄한 경계망에 휩싸였다.
천라지망(天羅之網)이 펼쳐지는 데 걸린 시간은 단 반 시진.
천라지망, 천라지망……
수많은 천라지망이 펼쳐지는 것을 보았고, 몸소 겪어본 것도 있지만 해남도에서 맛본 천라지망은 말뿐인 천라지망이 아니었다.
모든 포구 및 선부(船埠:나루터)가 폐쇄되었다. 해안으로 향하는 모든 길목이 막혔고, 해남도 전역에 화상(畵像)이 나붙었다. 피해야 될 적은 해남파 무인들만이 아니었다.
해남도 주민들. 한족(漢族), 여족(黎族) 할 것 없이 모든 주민들이 두 눈을 치켜떴다.
당분간 아무 산이나 들어가 은신해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것은 좁혀오는 그물을 앉아서 맞이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해남도에서 태어나 해남도에서 자란 사람들이니 시간이 지날수록 포위망은 좁혀지리라.
초월이, 아니 향루주는 모든 포위망을 간단히 풀어버렸다.
향도(嚮導)라면서 길을 안내해준 여족 청년은 경계망의 틈바귀를 용케도 찾아냈다. 때로는 암굴(暗窟)로, 때로는 물 속으로…… 높이가 십장(十丈)이나 되는 절벽 밑에 밀선(密船)이 있는 것을 보았을 때는 놀라지도 않았다.
향루주가 도와준다면 광동을 벗어나는 것은 문제없으리라.
그러나 한편으로는 또 다른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해남파에서 파견한 무인들 중 최고수는 유살검. 그를 죽였으니 몸만 성하다면 광동성을 빠져나가는 것은 일도 아니지 않은가.
몸이 문제다. 지금 상태로는 유살검이 아니라 삼류무인(三流武人)이라 할지라도 상대할 수 없다.
향루주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막다른 골목임을 알고 흥정을 걸어온 것이리라.
"끄응! 무슨 말인지 알겠는데…… 검급은 지금 내 수중에 없소."
표현사의 말은 진심이었다.
설혹 유살검에게 죽는다 할지라도 검급을 찾지 못하게 해서 목숨 값을 단단히 치르게 할 작정이었다.
향루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나도 검급이 당신 품속에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이렇게 하지. 검급을 어디다 숨겼는지 말해주면 우리가 찾아오지. 마차를 타고 여기를 빠져나가는 거야. 그 동안 나는 검급을 훑어보고, 당신은 상처를 치료하고…… 광서성(廣西省) 경계에 이르면 검급을 돌려주지. 하하! 사실 나에게 잔월검보 따위는 필요 없어. 내용이 어떤지 궁금할 뿐이지."
향루주는 잘게 웃었다. 마치 네가 승낙하지 않고 어쩌겠냐는 듯이.
그 때였다. 문이 열리며 밖으로 나갔던 점소이가 다시 들어왔다.
"죽은 사람은 염왕사(閻王沙) 동민(東玟)입니다. 강임(姜林)의 외조부(外祖父)되는 사람인데 광동에서는 이름난 무인입니다. 외손자의 복수를 하러 온 모양입니다."
"뭐, 뭐, 뭣!"
염왕사 동민이라는 말에 표현사는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래, 동민이다. 동민만이 세우침을 그토록 정교하게 날릴 수 있다. 왜 그를 잊었단 말인가. 그보다 자신에게 죽은 사람이 유살검이 아니란 말인가. 그럼 유살검이 아직도 뒤를 쫓고 있단 말인가.
표현사는 잠시 잊었던 죽음의 공포가 되살아났다. 한 번 표적을 정하면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는 해남오지. 순식간에 뱀처럼 차갑게 달라붙은 공포가 전신을 경직시켰고, 상처에서 이는 아픔조차 잊게 만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차디찬 눈동자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
향루주는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내왔다.
얄미운 놈이다. 침착한 놈이다. 무엇보다 놈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유살검의 살수를 벗어날 자신이 없다.
"검보는 해남도에 있소."
마수광의는 신음하듯이 내뱉었다.
"아, 그런가?"
"우선 뇌주반도를 빠져나간 다음……"
"아니."
향루주가 단호하게 말허리를 잘랐다.
"검보를 가져온 다음 출발해도 늦지 않아. 물론 알아봤겠지만 나와 거래해서 목숨을 잃은 자는 없어. 해남무인을 두 명이나 격살하고 피신한 옥로(玉露) 진인(眞人). 촌민 일가족을 죽인 망월도마(望月刀魔)…… 그들은 지금도 아주 잘 살고 있지."
순간,
싸아악……!
귀를 쫑긋 곤두세워야 들을 수 있는 극히 미미한 소리가 들리며 다탁(茶卓)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다.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위협이지만 가장 효과적인 위협이기도 했다.
"음……!"
표현사는 가는 침음성을 토해냈다.
그의 눈은 정성을 다해 자른 것처럼 매끄럽게 잘려진 다탁 모서리에 붙박였다.
향루주의 무공은 설혹 몸이 정상이라 할지라도 맞받을 수 없을 만큼 강했다. 접선에 칼날이 숨어 있다니. 속도는 어떤가?
무림에서 사십여 년을 살아왔지만 난생 처음으로 감탄을 터트릴 만한 쾌검(快劍).
만약 다탁을 자른 솜씨로 지쳐온다면…… 막을 자신이 없다. 더군다나 위협적인 말투. 늑대를 피해 호랑이 굴로 찾아든 꼴이지 않은가. 처음에 들었던 예감대로 너무 강한 상대에게 도움을 청했다.
한동안 식은땀을 흘리던 표현사는 마침내 체념 섞인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잔월검보는 서호(西湖)에 묻어놨소. 은서암(隱鼠岩)에서 오른쪽으로 백 걸음을 가면 노송(老松) 다섯 그루가 있는데 그 중 네 번째 나무 밑에…… 이제 목숨을 부탁……"
"하하하!"
향루주는 만족한 웃음을 터트렸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