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三十六 章 天全敎主는 누구냐!
긴 밤은 소리 없이 가버리고 이제 붉은 해는 다시 온 누리를 밝게 비춰 준다.
어느 비탈진 산을 끼고 한 그루 큰 소나무가 서 있다. 요원과 운소진은 나무에 기대어 서서 시름 많은 눈을 허공에 던지고 있다.
요원(姚畹)은 문득 손을 내밀어 꽃 한 송이를 딴다. 그리고는 코끝에 대고 한 번 냄새를 맡은 다음 옆에 선 소진(小眞)의 귓가에다 흔들며 바름을 일으킨다.
그 동작은 한 눈에 그녀가 우울한 운소진의 마음을 기쁘게 해 주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운소진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어린다.
하늘에는 새털구름이 한가로이 날며 바람을 따라 북쪽으로 흘러간다.
잠시 장난을 치던 요원이 손가락 끝으로 꽃송이를 튕겨내 버리며 말한다.
『운씨 동생! 어제 그 한씨 오빠는 정말 괴상한 사람이야!』
소진은 담담한 어조로
『본래 삼형제였던 것이 둘이 다 없어졌으니 화가 안 나겠어?』
요원은
『그의 칼의 솜씨는 굉장히 무섭거든. 바로 우리들 코 앞을 다섯 치 정도로 스쳐 갔으니 말이지, 만일 조금만 더 뻗쳐서 지나갔더라면 싹! 하는 소리를 따라 우리의 머리는 이사 가고 말았을 거야!』
요원은 이렇게 말하면서 손을 들어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해 보인다.
소진은 급히 그 손을 치면서 말한다.
『동생은 농담할 생각을 하고 있구먼! 남은 천전교의 무리를 몇 사람이나 죽여 치웠는데……』
요원은
『흥!』
하고 코웃음을 친 뒤에
『그가 무엇 때문에 사람을 죽였는지 그건 아무도 모릅니다.』
요원은 이렇게 말하고 잠시 말을 끊는다. 그리고는 잠시
『운씨 언니, 지난번 다 허물어진 사당에서 머리가 없는 두 시체가 뒹굴고 있는 것을 못 보았나?』
소진은 얼굴이 해쓱해진다.
요원은 다시,
『동생! 생각나지?』
소진은 자기도 모르게 두 손을 들어 가슴을 누른다.
『또 그 말이야? 나는 떨려 죽을 지경이야.』
그러나 요원은 침착하다. 그녀는 그녀의 둥글고 큰 눈동자를 고정시키며
『어제 그의 장검이 우리 몸의 어느 부분을 스치고 간줄 알아?』
소진은 잠시 멍청하니 섰다가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를 만진다.
『아마 목 근처가 아니야? 바로 요 목젖 있는데……』
그녀는 손으로 목의 중심을 누른다.
요원은 손뼉을 치며 말한다.
『아! 그 머리가 없는 중들의 상처는 바로 그곳이다!』
그러다가 별안간 긴장해지며
『아! 정말 이상하다!』
소진은 요원을 돌아본다. 무엇이 이상하다는 말이냐―― 하는 듯이
요원은 다시
『그렇다! 어제 밤에 죽은 그 두 천전교도들은 칼을 채 뽑지도 못하고 죽었고, 또 그 한씨의 그런 옷차림, 그렇지 않으면……』
소진은 발을 한 번 구르고 나서
『너는 또 지레 짐작을 해서 말하는구나. 이번에 만일 네가 충분한 이유를 들어 설명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는 네 말이라면 한 마디도 믿지 않겠다!』
요원은 입을 삐죽 내밀어 보이고 나서 말한다.
『난 물론 이유가 있지. 그렇지만 듣든지 안 듣든지 그것은 소진이 마음대로야!』
소진은 얼른 요원의 두 팔을 껴안으며 말한다.
『그래, 그래, 난 듣는다면 꼭 듣는다. 언니, 제발 화내지 말어!』
요원은 입을 꼭 다물며 엄하게 보이나 눈은 반쯤 웃고 있다.
『얌전하게 앉아 있어! 이제 이 언니가 네게 이야기해 주마!』
소진은 얌전하게 앉는다.
요원은 이야기를 잇는다.
『어제밤 우리가 숲속에 있을 때 그가 확실히 약(藥)의 효과가 좋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지!』
소진은 고개를 끄덕인다.
『우리 복파보의 장대가가 나한테 이야기해 준 일이 있어요? 장대가는, 사형령주가 그 허물어진 사당에서 두 사람을 죽인 후 그와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을 들었대요! 말하자면 영지초(靈芝草)는 참 좋구나, 하고 말이야!』
그러나 소진은 믿기지 않는다는 눈치다.
소진은 말한다.
『그 말은 이유가 되지 않아! 우리 무당파만 해도 거의 삼백 가지 영약이 있어요! 그리고 모두 영지초라고 하거든.』
요원은 말문이 막히는 모양이다.
소진은 다시
『요원 언니는 한약곡 그 사람이 어느 한 가지 영약을 들어 말하는 줄 아나?』
요원은 대답을 못한다. 그러나 무엇인가 잠시 생각하더니 급히 두 손을 비비다가 문득 손뼉을 치면서 좋아한다.
『그렇지만 이유가 있다 있어! 있어! 그는 어제 밤 하마가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 긴장해서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잖아? 생각해 봐! 그가 형제간의 정으로 그와 헤어졌다면 그렇게 긴장할 수가 있겠어? 응당 반가워 할 것이지……』
운소진은 두 눈을 끔벅 감았다가 다시 뜨며 요원을 올려다본다.
요원은 거의 단정하는 말투다.
『한약곡은 하마가 이미 이 세상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렇게 긴장한 것이야.』
소진은 요원의 말이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듯하다.
소진은 잠시 생각하고 나서
『그가 만약 사형령주라면 우리 운학 오빠는 벌써 없어졌을 거 아니야?』
요원은 머리를 숙이며 말한다.
『그러나 지금은 그리로 가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소진이 생각해 보니 과연 운학과 하마는 다 같이 좋은 결과를 본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이 두 사람에게로 생각이 미친 운소진은 다시 가라앉았던 슬픔이 솟아나며 옷소매로 눈물을 훔친다.
요원은 화제를 돌려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나는 처음부터 한약곡 그 사람을 의심했다. 소진! 생각나?』
소진은 눈물을 닦고 요원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요원은 계속해서
『그는 천전교도 두 사람을 죽인 후 말했어―― 이제(二弟)! 또 두 원수를 죽였노라―― 그리고는 허공에다 되고 자기는 천하무적이라고 떠들지 않았어.』
소진은 머리를 끄덕거려 보인다.
요원은 계속해서
『이런 사람이 어찌 좋은 사람일 수가 있어? 옛날 사람들이 말하기를―― 대장부는 말을 함부로 하는 일이 없으며, 또 우리가 나타나자 뭐 운대가(鄆大哥)의 원수를 갚아 주겠다고――, 이것이 바로 그 자신이 자기 뺨을 때리는 것이 아니고 뭣이냐?』
운소진은 이 말을 듣고 어제 밤의 정황을 가만히 생각해 본다. 그러자 온몸이 떨리고 쭈삣하고 소름이 끼친다.
소진은 놀라는 소리로
『과연 그때 사여안이 그 자리에 오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위험할 뻔 했지 않아!』
요원은 그 말에 얼굴이 험악하게 거칠어지면서 말한다.
『됐어! 너는 이제야 내 말을 알아듣는구나!』
그때 홀연 소녀들이 배후에서 차디찬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믿지 않는다.』
요원은 깜짝 놀랐다. 급히 장검에 손이 갔다.
그러나 소진은 얼른 요원을 제지한다.
찬바람이 스치고 지나간다.
운소진은 그대로 앉은 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로
『하(何)대협! 우리 기억나지요?』
이 말은 ‘하대협! 나를 기억하지요?’ 이렇게 하려고 한 말이었으나 소진은 자신도 모르게 요원(姚畹)까지 집어넣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때 하마의 음성은 시시각각으로 운소진의 가슴 속에 스며들어 가슴이 뭉클하여지고 슬픔이 눈을 막는다.
소진은 이 예기치 않은 외딴 곳에서 하마를 만나 그 등 뒤로부터 말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녀는 곧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더 무엇을 일러 말하랴! 그처럼 오랜 세월동안 소진의 가슴에서 살아온 이 목소리……
소진(小眞)은 수백의 무리가 왁자지껄 떠드는 가운데서도 쉽사리 하마의 음성을 가려낼 수 있을 것이다.
이윽고 하마는 그들 앞에 나타났다.
『운소진(鄆小眞)!』
그의 목소리는 감격에 떨고 있었다.
요원은 재빨리 하마를 돌아보고 나서 말한다.
『나는 물을 길어와야겠군!』
그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하마를 향해 눈을 살짝 흘겨 보이고 또 다시 그 궁색한 모습에 기분이 좋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찌하랴! 이 혼탁한 세상을 피안(彼岸)에 바라보며 떠돌아다니는 훌륭한 공자(公子)를 한눈으로 요원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운소진은 창피하다는 뜻으로 머리를 들지 못하고 한 손을 내밀어 요원의 옷깃을 잡는다.
『너 정말 갈 테냐?』
그 목소리는 애원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요원의 눈에 비친 운소진의 표정을 너무나 벅찬 감격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요원은 그 천성이 본래 외향적인 것이다. 그녀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한 마디로 잘라 말한다.
『오…… 먹을 물이 없으니 목이 말라 죽겠어!』
그때 하마가 한 발 나서며 말한다.
『요원 아가씨! 나도 한 마디 할 이야기가 있는데……』
순간 요원은 멈칫한다. 그리고는 이상하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요원은 마음속으로
(정말 이상한 일이구나! 하마는 어떻게 나를 알아볼까?)
그러나 사실 요원은 지난번에 운학이 하마로 변장을 해서 복파보에 모험을 갔던 사실은 모르고 있다.
그리고 또한 하마는 그 드잡이질의 어둠 속에서 운학과 요원을 한 눈으로 알아보았던 바 있는 것이다.
요원은 짐짓 얼굴을 찡그리면서 말한다.
『하대협! 또 무슨 알려 줄 말이 있습니까?』
하마는 본래 예민한 사람이다. 그처럼 너무나도 예민한 탓일까? 그는 운소진의 앞에 있으면 그는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다.
그는 잠시 우물쭈물하다가
『방금…… 나는 다섯 분 노선배와 작별하고 왔는데……』
이렇게 서두를 떼놓고 또 잠시 망설이고 있다가
『…… 그들은 모두 요원 당신에게 만나거든 문안을 전하라고 했소, 에 또 그리고 또 있습니다.』
하마는 말을 끊고 운소진의 눈치를 살핀다.
요원은 남은 이야기가 소진에게 관계되는 말임을 즉시 알아차리고 고의로 하마를 골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다시 그의 말을 재촉한다.
『빨리 말씀 하세요!』
하마는 얼른 눈길을 돌리며 길게 한숨을 쉰다.
그는 떨리는 마음을 억지로 진정시키면서
『운학 이가(二哥=이때의 이가는 둘째형이라는 뜻)는 아무 일도 없소! 그뿐만 아니라, 그의 무술은 놀랄 만치 늘었습니다.』
운소진은 처음 이 말을 듣고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다가, 별안간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그때 옆에 있던 요원은 느닷없이 달려가 소진을 껴않으며 큰 소리로 떠든다.
『난 또 맞혔다! 운대가(鄆大哥)는 죽지 않았다. 죽지 않았어!』
요원은 기뻐서 손과 발을 가릴 것 없이 아무렇게나 춤추면서 마치 실성한 여자같다.
『흑…… !』
그때 소진은 비로소 참았던 눈물이 소리 없이 터져 나왔다.
『오라버니! 오라버니…… !』
그녀는 더 말을 맺지 못한다.
하마는 그러한 소진을 부축하면서 목이 메이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소진은 비로소 살아온 환희를 깨닫는 것이다. 이 순간의 이 감격, 오! 하늘이여……
요원은 흐느끼며 소진을 붙잡고 춤이라도 추고 싶은 모양이다. 그녀는 소진을 보며
『소진! 울기는 왜 울어? 춤을 추고 웃어야 할 일인데?』
소진은 문득 부드러운 느낌이 들어 눈물을 훔쳐 닦으며 가볍게 웃어 보인다.
그러는 소진의 마음속은 실로 의아스럽고 놀랍다. 요원은 어떻게 모든 사실을 그렇게도 잘 알아맞힐까?
(――그녀는 운학 오라버니를 강호 제일의 영웅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던가? 필시 그래서 오라버니가 죽지 않은 것으로 믿고 있었을까?)
이 경험으로 보면 그녀는 필시 하마의 위치도 이미 짐작했을 것이 틀림없었다.
소진은 이처럼 기쁜 순간에 요원의 그 총명한 지혜가 더욱 놀랍고 그래서 마음속에는 기쁨의 강물이 대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소진의 마음속에는 문득 불길한 그늘이 지나간다.
요원의 그 밝은 총명! 높은 지혜! 그것은 소진에게 크게 위안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만일――
만일 한약곡을 향하여 사형령주 그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고 단정한 사실이 또 다시 적중한다면――
그것은 동시에 소진(小眞)에게 공포를 안겨다 주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어림한다.
(한약곡은 마침내 사형령주의 화신(化身)이란 말인가?…… 아니, 아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야!)
요원은 처신을 가리지 않고 기뻐서 어쩔 줄 모른다. 그의 마음을 충동한 회보는 그를 아무것도 거리낌 없는 천진한 소녀로 만들었다.
하마는 이렇게 기뻐 날뛰는 요원을 보며 자신의 처지는 알지 못한 채, 은근히 뒷일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그는 몸을 돌리며 큰 소리로 떠들었다.
『요원 아가씨! 내말 좀 들어보시오! 마교오웅(魔教五雄)과 운학 형님의 결전의 결과를 알고 싶지 않소?』
그때 요원은 문득 자세를 멈추고 하마를 바라본다.
소진이 묻는다.
『결과는 어찌 되었습니까?』
하마는 말을 잇는다.
『운학 형님은 지지 않았소.』
요원은 순간 너무 기뻐서 눈물까지 흘리며 웃는다. 그 순간에 그녀는 오웅과의 남매의 의를 맺은 것은 까맣게 모르는 듯하다.
그러자 홀연히 그 사실이 요원의 생각 속으로 이르는 것 같았다.
요원은 갑자기 엄숙하고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그것은 무공을 쌓아온 사람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다. 말하자면 운학의 승리를 기뻐함은 본능적인 것이요, 반대로 오웅의 패배를 슬퍼함은 도의적인 일인 것이다.
그러나 운소진은 그 얼굴 가득히 가벼운 미소를 띠고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하마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임여 노선배님을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은 모두가 패배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오. 그리고 다만 승리하지는 않았던 것이라고 변명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소진은 양쪽에서 다같이 패배한 것이라 생각하고 마음속이 뜨끔해졌다.
그러나 요원은 이러한 소진의 등을 치면서 웃는다.
『동생! 안심해요, 만약 그 다섯 노인이 졌다고 인정한다면 아마 황하(黃河)의 물이 마를 거야!』
소진이 그 말뜻은 몰라 멍하니 요원을 바라보자 요원은
『그 다섯 노선배들은 절대로 자기들이 졌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소진은 그제서야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소진은 요원을 바라보았다. 그러는 소진의 마음속에는
(――만약 내가 하마를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한다면 요원은 노할 것이다.)
소진은 이렇게 단정을 내리고 다시 요원을 보았다. 그러는 사이에 마음은 가라앉고 태연한 표정으로 돌아간다.
그녀는 하마를 향하여
『당신 병(病)은 다 나으셨습니까?』
하마는 무슨 뜻이냐는 표정으로 되묻는다.
『내 병(病)……?』
하마는 모를 일이었다.
원래 미친병에 걸린 사람은 완치된 후에 그 즉시는 자기 자신이 걸린 병에 대해서 그 경력을 모두 망각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시일이 오래 경과되는 가운데 그 어떤 국면에서 문득 자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하마(何摩)가 걸린 병은 요즘 말로 바로 그 뇌진탕(腦震蕩)이었으므로 그것은 바로 기억상실증(記憶喪失症)이었던 것이다.
요원은 의학에 대하여 다소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비록 일가를 이루지는 못할망정 상당하게 알고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요원은 한 마디 한다.
『소진이 자신 상사병(相思病)에 걸렸는데, 왜 하필 남을 보고 병에 걸렸다고 하지?』
이 말은 가장 시의(時宜)를 얻은 말이었다.
왜냐하면 지금 하나는 바보 취급을 받기 알맞은 형편에 놓인 것이다.
그러나 반면 이 말은 운소진의 마음속 깊이 간직된 비밀을 바로 찔러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그때 운소진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조금 성난 어조로
『내 너 그 혓바닥을 가만 놔 둘 줄 아느냐?』
요원은 장난처럼 혓바닥을 내밀며 귀신의 모습을 해 보인다.
『흥! 너는 다리(橋)를 요행히 발견해 가지고 건너고서는 이제는 다리를 부숴 버리겠다는거야? 양심도 없지?』
요원은 이렇게 말하고는 휙 돌아 서서 나무 사이로 숨어버린다.
소진은 그 말을 듣고 한편 약이 오르고 또 웃음도 났다.
소진은 요원을 쫓아 숲속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자 마침 옆에 섰던 하마가 소진의 앞을 막았다.
하마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운진인(鄆眞人)! 제가 당신에게 좀 할 말이 있는데요!』
소진은 섰던 자리에서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저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고 하십니까?』
하마의 표정이 약간 당황하는 것 같았다.
소진은 약간 미소를 띠었으나, 그것을 깨닫자 문득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숙인다.
하마의 표정은 얼른 보매 아무 것도 할 말이 없는 사람 같다. 그러나 그는 문득 용기를 내어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다.
『운학 형님은 좋아요, 참으로 좋은 사람입니다!』
운소진은 그 말을 듣자
『푸……』
하고 웃는다. 그러는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소진은 목구멍에서 괴상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가볍게 한 번 한숨을 몰아낸다. 그리고는 몇 걸음 걸어 거기 피어있는 꽃 한 송이를 꺾어 가지고는 한손으로 만지작거리고 있다.
하마는 머리가 어지럽다. 소진을 만나기 전에는 그렇게도 많이 하고 싶던 말이 이때는 한마디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 것이다.
머릿속에서는 가지가지 말이 맴돌고 있으나 적당한 말은 좀체로 떠오르지 않아 마침내 엉뚱한 말을 하고 만다.
『감사합니다. 당신이 약간 나의 의문을 풀어 주셨습니다.』
운소진은 또 자기도 알 수 없는 괴상한 소리를 토해내고 말았다.
비록 운소진은 일가의 무공을 터득한 여장부라고는 하지만 이때만은 한갓 소녀다운 당혹한 빛을 감추지 못한다.
하마는 말을 잇는다.
『방금 당신들 두 사람은 한약곡 형을 의심하고 있었소이다. 지금 깨달으니 그것이 저윽이 일리가 있는 말이라는 것을 나는 알았습니다.』
운소진은 그 말을 듣고 움칫 놀라면서 말한다.
『그 말은 무슨 뜻인지요?』
하마는 걸음을 옮겨 소진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한다.
『지난 번 내가 단장애(斷腸崖)에서 영호진(令狐眞)과 백삼광(白三光) 두 사람에게 양쪽으로 협격을 받았을 때 무척 고전을 했었지요!』
하마는 여기서 일단 말을 끊는다.
소진은 문득 눈을 들어 하마를 쳐다보았다.
하마는 무엇인가 심상한 빛을 띠우면서 말을 잇는다.
『오랫동안 분전하던 나는 마음속으로 은근히 한형과 안씨 부자의 안부가 걱정이 되어서 그 자리에서 즉시 화전(火前)을 쏘아 올렸습니다.』
하마는 말을 끊고 잠시 생각을 더듬더니 다시 말을 계속한다.
『…… 그리고 얼마 후에 산 위에서 한 검은 옷을 입은 대한이 바람보다도 더 빠르게 내려왔습니다. 그때 마침 영호진이 아! 하고 놀라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지요. 그러나 그때 백삼광은 저를 향해서 맹렬히 공격을 했지요?』
그때 운소진은 이야기 속에 차츰 말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별빛 같은 눈을 반짝이며 열심히 하마의 입을 응시하고 있었다.
하마의 이야기는 책을 읽듯이 줄줄 흘러나온다.
『그래서 그때 나는 다만 한형이 나를 도우러 온 줄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 검은 옷의 대한은 나를 향해…… 하삼제(何三弟)! 안심하라……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백삼광과 계속하여 싸우면서, 영호진은 그가 맡으리라 생각하고 그대로 놔두었습니다.』
이때 소진의 목에서 꿀꺽하고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그때 뜻밖에도 그 흑의의 사람은 내 곁으로 날아오더니 손을 번뜩이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순간 심한 장풍(掌風)이 몸으로 날아오는 것을 느끼고 얼른 옆으로 한 발자국 피했지요. 그것은 뜻밖에도 만 길이나 되는 깊은 못이었습니다.』
소진은 비록 하마가 이미 건강이 회복된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놀라 고함을 질렀다.
하마는 소진이 자기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을 느끼고 마음속이 흐뭇했다.
그는 새로운 힘이 솟는 듯한 희열감을 느끼며 명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그때 절벽에 솟아나온 나뭇가지를 잡을 생각을 했습니다마는 몸이 흔들리는 순간 실패하고 말았지요, 그리고 다음 순간에는 뒷머리가 믿을 수 없는 충격으로 단단한 석벽과 부딪쳤습니다.…… 그 후 내가 깨어났을 때는 내 몸은 천 리 밖에 와 있었고 여러 달이 지난 후였습니다……』
소진은 후…… 한숨을 내 쉬었다.
하마는 다시
『나는 그것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어서 거기 있는 다섯 선배님에게 아무리 애원을 하고 설명을 해달라고 해도 그들은 모두 끝내 그것을 얘기해 주지 않았습니다.』
운소진은 하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 자신이 그를 따라 한 달 동안 온 천하를 주유한 일을 생각하고는 그것을 모르는 하마가 한편으로 야속하기도 하고 자신이 억울하기도 해서 금시에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러한 운소진의 마음을 조금도 알 리가 없는 하마는 소진이 자기를 동정하는 줄 알고 있다.
그는 운소진의 눈물이 글썽히 고인 얼굴을 바라보자 자기도 모르게 가슴이 뛰놀면서 운소진이 그 아름답고 부드러운 손을 잡으며 간신히 한 마디를 토해낸다.
『운소진…… ! 저는 부상(負傷)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리고 또한 예전과 마찬가지로 나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마가 나중에 한 말은 자기 자신의 애정을 고백한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소진은 순간 온 전신에 찌르르 전기가 통하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사실 그녀는 자기 자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래 지금 이 순간까지도 직접으로 이성(異性)의 손을 잡아본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의 격동……
사랑하는 사람의 손에 잡힌 그녀의 가슴은 모닥불을 끼얹은 것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호흡은 짧고 급하게 변하고 얼굴은 이미 귓속까지 빨개졌다. 소진은 몸 둘 바를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다.
하마는 멍청하니 수줍어하는 운소진의 손을 잡고 얼빠진 듯 멍청하니 서 있다. 그러는 그의 가슴 속에서도 우당탕! 방망이질이 일어나고 있었다.
하마는 갑자기 꿈에서 깬 것처럼 잡았던 손을 놓는다. 그리고 떨리는 몸을 나무에 의지하여 기대선다.
그는 말했다.
『저는 비록 한씨 형과는 오랫동안 사귀어 본 바이지만 그러나 운학 이가(二哥)와 저는 다같이 그의 깊은 내심을 모르는 터입니다.』
그는 잠시 말을 끊는다. 소용돌이치던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는 듯싶었다.
하마는 계속해서
『…… 지금 생각하면 그와 같이 있는 시간은 별로 많지 않았습니다. 그는 늘 혼자서 떠돌아다니고 모든 행동이 비밀에 싸였지요!……』
하마는 침을 꿀꺽 삼킨다. 그의 시선은 먼 허공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빛나고 있었으며 공포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간다.
그는 거의 중얼거리는 것처럼 말을 잇는다.
『그렇습니다. 그날 감숙(甘肅) 근처에서 헤어질 때 일입니다. 그는 거기서 운형님을 해치려고 작정한 것이 틀림없어요!…… 저보고 물을 길어오라고 했었지요. 그러나 요행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지요! 그래서 운학 형이 대신 물 뜨러 갔던 것입니다.』
듣고 있던 소진의 몸에는 오싹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아, 오라버님! 운학 오라버님!
하마는 소진이에게로 시선을 돌린다. 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조용히 말한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았더라면 그때 한약곡은 기어이 뜻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하늘의 도우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三권 二十一章에 나온다)
운소진은 자신도 모르게 옆에 있는 나무에 의지하여 섰다. 그녀는 하마를 그윽히 바라보며
『참으로 괴이한 일이군요! 어제 밤의 일입니다. 그의 앞에 사여안이 나타났습니다. 사여안이 한대가(韓大哥)에게 물어 보았을 때 그는 당신의 마지막 행방을 모른다고 하고 도리어 궁금히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당신이 단장(斷腸)의 절벽에서 떨어진 사실 같은 것도 전혀 모르더군요!』
하마는 심중에 크게 놀라며 의심쩍다는 듯이 고개를 눕힌다.
『그렇다면 정말 이상하군요!』
그리고는 혼잣말 비슷이
『그럼 나를 그곳에 밀어 넣은 사람은 그 이가 아닌가?』
운소진은 본래 마음이 사려 깊은 여자다. 그는 말하여
『이 말을 다시 한 번 잘 고려하세요! 당신은 그와 평소에 지냈던 사실들을 하나하나 잘 더듬어 생각해 보시고 그때 판단을 내리셔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마는 한 번 생각하고 곧 입을 열었다.
『사실 지금 말이 나왔으니 말입니다만 처음부터 나는 그의 은밀한 거동에 대해서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당초에 그가 운학 형을 해치우려는 생각을 가졌다고 생각했을 때, 단순한 무림의 위명을 탐내서 한 짓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여기서 일단 그는 말을 끊었다가 단정적으로 말한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어요! 그는 바로 사형령주(蛇形令主)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맹랑한 일이지요.』
하마는 쓰디쓴 웃음을 짓는다.
『우리가 화산(華山)에서 결의형제를 맺을 때 그 마지막 목적은 결국 사형령주를 타도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의 목적대로 사형령주를 추적했지만 언제든지 꼬리가 잡히지 않았었지요. 언제든지 우리가 당도했을 때는 공교롭게 한 발 늦고 했던 것입니다.』
하마는 의지하고 섰던 나무에서 가지 하나를 꺾어낸다. 입술을 꾹 다물고 가지를 꺾는 자세가 몹시 비위가 상하는 모양이다.
소진은 차츰 그의 이야기에 말려 들어가는 자신을 깨달았다. 그의 눈언저리에 한약곡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다시 사라졌다가는 다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차츰 심장이 얼어붙은 것처럼 싸늘하게 식어갔다.
하마는 흥! 하고 자신을 비웃는 소리를 내더니 다시 이야기를 계속한다.
『모두가 한약곡(韓若谷)의 장난이었소. 그렇지! 그때 어느 날 길에서 철연옹(鐵煙翁) 장청(張靑)의 시체를 발견한 일이 있었소! 그것을 보고 셋이 모두가 사형령주의 소행이라고 단정했던 것이거든. 우리는 얼마간 더 말을 달려 삼거리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나는 그 길이 반드시 끝에서 합친다고 했고 그는 절대로 합쳐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흡사 그는 그 길을 무수히 왕래한 사람 같았습니다.』
하마는 다시 쓰디쓴 미소를 짓고 나서
『이 몸이 생각이 없는 사람이었지요! 그때 나는 이상한 느낌을 가졌지만 결코 그를 의심하지는 않았던 것입니다. 결과는 뻔한 것이었습니다. 운형님과 저는 결국 왕사성(枉死城) 속으로 빠져 들어갔던 것이지요!』
운소진의 미간이 흔들거리며, 놀랜 목소리로 말한다.
『왕사성(枉死城)?』
하마는 소진이 다른 생각으로 오해하는 것을 알자 웃으면서 말한다.
『그것은 하나의 작은 골짜기입니다.』
그리고는 말을 이어
『그 후 우리는 황산의 규염객 안오와의 약속 모임에 갔었지요. 그때 그는 신녀봉(信女峰) 밑에서 먼저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그가 표시해 놓은 기호를 따라 그를 찾아갔으니 그때마다 사형령주는 반드시 범행을 남기고 사라진 뒤였습니다. 결국 우리는 한약곡이 사형령주의 뒤를 계속 추적하는 것이라고 감쪽같이 속았던 것입니다!』
하마는 자기 자신이 어이없이 속은 것이 민망스럽다는 눈치다. 그는 말을 이어
『그리고 범행은 우리가 이르기 전, 반드시 하루나 이틀 전에 벌어지곤 했던 것입니다. 그때 나는 운형님께서 흡사 사형령주는 우리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가 범행을 저지르는 것이 아닙니까, 하고 물어댔습니다. 우리는 결국 난주성(蘭州城)에 들어가서야 사형령주에게 놀림을 받았다는 걸 깨달았던 것입니다. 거기에는 또 웃지 못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운소진은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아이와도 같이 흥미 있게 귀를 기우리고 있다.
하마는 다시
『난주성에 들어가던 날 밤, 우리는 노상에서 편지 한 장을 받았습니다. 물론 누가 던졌는지 모르는 사이에 말안장으로 날아든 것입니다. 우리는 그 편지에 적힌 대로 흥륭산(興隆山)으로 갔지요! 거기에는 의외에도 온가(溫嘉)의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까맣게 속은 것입니다.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편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사형령주는 난주(蘭州) 성중(城中)에 있는 안복언(安復言)의 저택에 들어가 난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소진이 말한다.
『당신들은 너무나 자신을 공개했던 것이 아닙니까?』
하마는 한 마디로 부인한다.
『아닙니다. 우리는 헌 마차 한 대를 구해가지고 나는 한 사람의 서생으로 변장하고 운학 형님은 일개 마부로 변장했지요! 이러니 누가 눈치를 챘겠습니까? 그뿐인가요 우리는 한약곡의 표시를 따라갔는데도 도중에서 번번이 천전교의 고수들을 만나 일전을 치루고 하였습니다. 생각하면 그때 그는 중도에서 우리를 없앨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운소진은 급히 말한다.
『그 다음은 바로 천전교 회천분타의 지주를 만난 것이지요? 그래서 서로 일전을 겨루려고 했을 때 한약곡이 나타난 것이 아닙니까?』
하마는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소진은 다시
『틀림없지요. 더구나 당신은 사형령주의 복면을 찾아 들고 격노한 마음이 풀리지 않아 격노하고 있었지요?』
그때 하마는 크게 놀라며
『당신이 어떻게 그 사정을 환히 알고 계십니까?』
그때 운소진은 하마의 표정을 보고
(당신의 일을 왜 내가 관계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소녀의 몸으로서 소진에게는 그렇게 말할 용기는 없었다.
소진은 스스로 부끄러워지며 자기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하는 하마가 야속하였다.
그러나 하마는 여인과 교제한 일이 한 번도 없는 무협이다. 그러니 운소진이 아무 말도 없는 것이 이상히 생각되었지만 그처럼 아기자기한 여성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있으랴!
하마는 소진의 안색이 붉게 변하는 것을 보고 갑자기 자기 자신이 무슨 잘못이나 저지르지 않았는가 싶어서 얼른 화제를 바꾸었다.
하마는 시선을 돌려 다시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며 말한다.
『그러나 더욱 이상한 것은 그때부터 사형령주가 밤에 입고 다니던 옷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천전교의 구미신구(九尾神龜) 육당주를 베고 그 입을 막아 버렸던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자 운소진은 아! 하고 놀랜다. 하마는 이상한 눈빛으로 운소진을 바라보았다. 운소진은 짐작이 간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거려 보이며 말한다.
『방금 요원이가 말했습니다. 사형령주는 바로 그 사람이라고요! 그렇지만 소녀는 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제 생각으로 왜 그가 밤에 천전교도를 죽였을까, 생각하면 전혀 그를 사형령주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마는 비로소 알아들었다는 눈빛이었다.
소진은 말을 이어
『지금 하대협의 이야기를 듣고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달은 것 같습니다. 결국 그들을 죽인 목적은 자신의 비밀을 감추기 위한 행동이었군요!』
소진은 계속 고개를 끄덕이며
『어젯밤 그 두 사람은 검도 빼내지 못한 채 죽었습니다. 그리고 사여안 대협께서도 한약곡 그 사람의 옷이 이상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맞았습니다! 모든 것이 맞았습니다. 그의 옷은 사형령주의 그것과 비슷했습니다.』
하마는 어젯밤 사건을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물어 보지 않아도 다 알 수 있다는 태도였다.
하마는 눈을 감으면서 말했다.
『그 다음은 바로 제가 당신과 만나던 날입니다. 그 후 이야기를 듣건대, 운학형님과 사여안 대협이 함께 힘을 모아 천전교의 세 사람 고수들을 상대로 일전을 겨루었답니다. 그때 사형령주는 백삼광과 영호진 두 호법을 시켜 운학 형님과 맞서게 하고는 자신은 운학 형님을 피하여 사여안 대협과 드잡이질을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운학 형님과 맞서 드잡이질을 하게 되면 자신의 정체가 들어날까 하여 의식적으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바로 저는 운학 형님과 함께 무당산(武當山)으로 갔었습니다.』
하마는 자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화제를 이끌어 자기와 운소진이 만나던 후산(後山)의 근처로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 두 사람은 동시에 마음속에 일어나는 부끄러움과도 같은 야릇한 기분에 빠졌다.
운소진은 가벼운 웃음을 띠운 채 묻는다.
『그래서 그날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마는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얼굴에 가벼운 웃음을 띠우면서
『제가 산에서 내려와 운학 형님을 찾아가는 길에 마침 도중에서 사형령주를 만났습니다. 사형령주는 대나무 숲속으로 도망하고 그때 만난 운형님과 나는 사형령주의 뒤를 따라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하마는 문득 말을 끊고 아! 하고 한 번 탄식을 하고
『그때 한 사람이 죽림(竹林)에서 뛰어나왔습니다. 누군지 알겠습니까? 바로 한약곡(韓若谷)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모습은 바로 사형령주에게 일격을 당했다는 몸짓이었습니다. 그는 말했어요…… 사형령주다! 사형령주의 일장이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가슴팍은 흐트러져 있었습니다. 흡사히 사형령주의 일장을 맞은 것 같았지요.』
소진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하마를 주시하고 있다. 하마는 그 눈을 잠시 바라보고 난 뒤
『그렇지만 아닙니다. 그 자리는 장풍을 맞은 흔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손으로 찢은 것입니다.…… 아마도 내가 그때 깨달아 곧 죽림 속으로 들어가 보았더라면 그가 벗어 놓은 사형령주의 옷과 가면을 발견했을 것을!』
하마는 저윽이 분한 몸짓이었다.
운소진은 이처럼 후회하는 하마의 마음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하마는 거의 매일과 같이 사형령주의 흔적을 뒤쫓았고 끝내 천전교(天全教)라는 사교(邪敎)의 무리를 파멸시켜 없애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이 어찌하랴!
사형령주는 곧 천전교주이니 또한 하마 그 사람의 큰형님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또한 하마 일신상의 불미스러운 현상이며 치욕적인 것이었다. 결의형제(結義兄弟)란 자고 이래로 이 세상에 태어난 시간을 비록 다를지라도 그 깊은 의의는 결국 죽음의 순간까지 함께 뜻을 같이 하는 것이다.
운소진은 상심하는 하마를 바라보며 무엇인가 위로의 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진은
『비록 사람이 속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두 번 속지는 않은 것입니다.』
하마는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떤다.
『저는 한 번만 속은 것이 아닙니다. 그 뒤에도……』
『그러면?』
『아! 번번이 속았던 것이지요!』
그러자 뒤를 이어 산언덕에서 한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흡사 메아리와도 같은 것이었다.
『아! 번번이 속았던 것이지요.』
그 소리에 하마는 흠칫 놀란다.
소진은 황망히
『원아(畹兒)! 너!』
그러나 요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토끼처럼 뛰어 바위틈을 이리저리 누비며 내려온다.
소진은 창피스럽고 한편으로는 괴상한 생각이 들었다.
『요원! 너무 지나치지 않아요?』
요원은 그 말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하마의 곁으로 다가서면서
『누가 당신을 속였습니까? 우리 운씨 동생입니까?』
그러나 하마는 조금도 노여워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도리어 공경하는 말투로
『정말 고맙습니다. 미궁에 쌓였던 안개를 풀어주셔서…… 만일 요원 아가씨가 이야기 하지 않았더라면, 이 하마는 평생토록 한약곡에게 속아 살 뻔하였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요원은 고개를 흔든다.
『참으로 당신이 간직했던 미궁(迷宮) 속의 비밀은 많았습니다. 아! 정말 운씨 동생의 의문도 모두 풀어 주시고 또 저에게도……』
하마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미 요원은 자기들 두 사람의 이야기를 전부다 엿들은 것이다. 괴이하기도 하고 아니꼽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비록 운소진과 사담(私談) 같은 것은 하지 않았지만 꼬리가 밟힌 것처럼 꺼림칙하고 창피스럽다.
운소진은 우연히 이렇게 두 사람이 오랫동안 동석하여 이야기를 나눈 것을 생각하고 또한 요원이 그 전말을, 또한 그 감정적인 거동을 다 보았으리라고 생각하니 부끄러워져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는다.
요원은 천연스럽게 웃으면서 말한다.
『사실대로 말씀하면 하대협(何大俠)은 소녀와는 결국 한 집안사람이나 마찬가지랍니다!』
요원의 말은 갈수록 가관이다. 운소진은 무슨 뜻인가 몰라 물끄러미 요원을 쳐다 볼 뿐이다.
하마는 물론 운학과 요원 두 사람 사이에 심상치 않는 감정의 교류가 있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요원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곧 알 수 있었다.
하마는 입을 열어
『맞았습니다. 운학 형님은 바로 우리가 결의(結義)한 형님입니다.』
그러나 요원은 그를 흘겨보면서
『누가 운대가(鄆大哥)를 말했습니까?』
요원은 일단 말을 끊었다가 다시 하마의 눈을 한 번 힐끗 살피고 나서 엉뚱한 말을 한다.
『당신의 그 의형제인 한약곡(韓若谷)은 바로 나의 사질(師姪)입니다!』
그 말을 들은 두 사람은 너무 놀라 거의 이구동성으로
『무엇이!』
하고 말하며 아연실색한다.
그러나 요원은 득의의 웃음을 띠고
『당신네들은 참으로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요!』
하마와 소진에게는 점점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요원은 다시 목소리를 낮추어
『두 분은 들으십시오! 그 사람의 사부는 바로 김인달(金寅達) 그 사람이며 그리고 김인달 그 사람으로 말하면 바로 나의 사형(師兄)입니다.』
요원은 말을 끊고 큰 소리로 한 번 웃음을 날려 보내고 나서
『결국 당신들은 모두가 나의 후배(後輩)입니다.』
하마와 소진은 다 같이 놀라며 요원의 지혜에 혀를 내둘렀다.
운소진은 약간 골이 나서
『원아는 창피하지도 않나! 무엇으로 우리의 선배구 어쩌구 하지?』
그러나 요원은 손을 들어 하마를 가리키면서
『무엇 때문이냐고요? 한약곡은 바로 하대협의 큰형님이 아닙니까?』
그때 비로소 하마는 엄숙한 어조로 한 마디 한다.
『요원 아가씨! 당신은 형제들이 없습니까?』
그러자 요원은 짐짓 화난 얼굴로
『당신은 그것을 물어서 무엇합니까?』
하마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야기를 한다.
『노대 풍륜 선배님이 이르시기를 저보고 알아보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복파보에 가서 다른 요원(姚婉)이 있는가를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운소진은 이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하마가 일부러 요원을 조롱하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속으로
(왜 이분은 자꾸 요원이란 이름을 부를까?)
하고 질투심 비슷한 감정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요원은 알고 있다. 자기 언니였던 요원(姚婉)과 자기의 이름 요원(姚畹)은 발음이 같은 것이다.
요원은 수줍어만 하던 하마가 이렇듯 단호하게 물어오는 데 대해서 저윽이 당황하였지만 이제 와서 사실을 이야기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른 요원(姚婉)이 있습니다. 그분은 저의 돌아가신 언니랍니다!』
운소진은 문득 머리를 들었다. 그 눈에는 놀라움과 기쁨의 감정이 알알이 떠돌고 있었다.
하마는 생각지도 못했던 남의 비밀을 끄집어낸 셈이 되었다. 그는 어쩔 줄을 몰라 다만 마음속이 떨리기만 하였다.
그때 요원은 품속에서 조그마한 한 장의 깃발을 꺼냈다.
그녀는 차근차근히 설명을 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사형 김인달(金寅達)에 대한 믿음의 상징입니다.』
요원은 말을 끊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 더 묻지 마십시오! 그 후의 일을 설명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하마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 요원의 손에서 그 기(旗)를 넘겨받아 자세히 들여다본다. 그 옆에 어느새 호기심이 어린 소진의 눈길이 와 있었다.
왜냐하면 복파보는 무림 중에서도 항상 신비로운 장막에 싸여 있었으니 자연 복파보 하면 폐관자수(閉關自守), 곧 문을 닫고 스스로 지키기만 하고 바깥과의 교섭은 일체 안해 왔기 때문에 지난 백 년 동안 요씨(姚氏) 집안의 인물을 본 사람은 정말 드물다. 그런 형편이니 이러한 신표(信表)는 더욱 남의 눈에 뜨일 기회가 적었던 것이다.
운소진은 그 물건을 보자
『어디서 많이 보던 물건인데……』
하고 고개를 기웃거린다. 그러자 하마가 돌연
『아!』
소리를 낮게 부르짖으며 말했다.
『운형도 이런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요.』
하자 요원은 화살에 맞은 노루처럼 펄쩍 일어서며
『운 오빠의 성씨는 운씨지요?』
하고 불쑥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이 한 마디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질문이 되었느냐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마는 목구멍까지 웃음이 올라왔으나 미안쩍은 생각이 들어서 억지로 참았다.
그러자 운소진이 까르르 웃으면서
『아이 언니두, 내 오빠니까 성이 운씨가 아니고 또 뭐겠어……』
요원은 와락 운소진의 어깨를 감싸 안고 감격에 찬 음성으로 외친다.
『동생, 우리는 모두 한 집안 식구였어, 응 그렇지?』
정이 복받친 요원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으며 운소진과 하마는 어리둥절하니 말이 없다.
얼마 후 마음이 진정된 요원이 입을 연다.
『동생, 네 집이 강남(江南)의 양주(楊洲) 땅에 있는 적이 있었어?』
『……』
운소진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이 없다. 그 모습을 본 요원은
(아차!)
하고 크게 뉘우쳤다. 운소진 그녀는 어릴 적부터 집을 잃고 고독과 서러움 속에서 자라난 가련한 여인이 아니던가. 그러한 그녀가 어떻게 기억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퍼뜩 들었던 것이다.
요원은 얼른 입을 열었다.
『미안해, 내가 생각 없이 지껄였어. 그러고 보니 나도 이제 생각이 나는구만. 언젠가 청목도장께서 내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어. 그때 청목도장께선 강남 양주 땅에서 운학 오빠를 구출했다고 그러셨거든 맞았어! 큰 오빠가 찾는 사람은 바로 운학 오빠들이었어. 그래, 그래! 그리고 청목도장께서 말끝에 이 세모진 깃발과 복파보의 이야기도 하셨어.』
이렇게 한바탕 지껄이고 난 요원은 비로소 멍하니 앉아 있는 운소진과 하마를 보자 자기도 그만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러자 요원은 문득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어떤 생각이 있어 얼른 운소진의 두 어깨를 잡고 말한다.
『동생, 잘 생각해 봐요! 동생의 아버님은 한 팔이 없는 분이 아니었어? 동생은 세모진 깃발을 본 적이 없어?』
『……』
운소진은 고개를 다소곳이 숙인 채 골똘히 생각한다. 여린 안개와 같은 희미한 기억 속에서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 모양 같았다.
그러나 그게 어떤 생각안지 도무지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또렷한 윤곽을 잡아낼 수가 없다.
눈을 감고 두 손은 간추려서 무릎 위에 놓고 운소진은 생각한다――
이윽고, 그녀는 손을 들고 움직였다.
『아!』
운소진은 고개를 약간 쳐든다. 영롱한 두 눈을 반짝 떴다. 별안간 그녀의 머릿속에 지나간 한 장면이 떠오른 것이다.
환하게 밝은 대낮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어떤 어른의 무릎 위에 달랑 올라앉아 있었다. 그 어른은 아마 아버지인 것 같다. 당시의 자기가 몇 살이었는지 모른다. 다만 어른의 무릎에 안겨 재롱을 떨고 있었으니 무척 어릴 적이라는 막연한 생각뿐이다.
아버지의 무릎에 앉았던 그녀는 별 생각 없이 아버지의 옷소매를 잡는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 옷소매 속에 응당 있어야 할 팔이 없었다.
또렷하게 기억을 더듬어 낸 운소진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요원이 묻는다.
『동생, 무슨 생각이 났어? 응?』
『……』
운소진은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는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다.
요원은 아앗 소리를 지르며 그녀를 얼싸안고 자못 반가와 죽겠다는 듯, 소리친다.
『우리 복파보만이 오라버님과 같은 훌륭한 인물이 나타났어! 동생의 아버님은 내게는 둘째 사형이 되니 우리는 모두 한 집안 식구야. 동생 반갑지!』
이때 하마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는 속으로
(요원은 운학의 사고(師姑)가 되는 셈이 아니냐. 그렇다면 너무 가혹한 얘긴걸!)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그는 별안간 소리를 질른다.
『누구냐!』
그 소리가 나기가 바쁘게 요원과 운소진은 재빨리 몸을 엎드렸다.
하마난 형형히 빛나는 두 눈으로 인기척이 난 쪽을 노려본다. 과연 그쪽 산언덕에서 아무 소리도 없이 두 사람……
사씨(査氏) 남매가 나타났다.
하마를 본 사여안은 약간 놀라는 기색을 보이더니 곧 크게 웃으며 묻는다.
『하형(何兄)께선 저를 모르시오?』
하마는 너무나도 연속적으로 우연히 일어나자 잠시 어리둥절했다. 자기 자신이 어느새 새북(塞北)땅에 와 있는 사실이며 한약곡과 사형령주가 뜻밖에도 같은 사람이며 김인달 사도(師徒)와 운학의 선친(先親)은 복파보의 동문제자(同門弟子)이며, 그리고 요원(姚畹)이 하필이면 운학의 사고(師姑)가 된다는 사실들…… .
아무리 기이(奇異)한 것이 세상사이지만 기이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마는 얼른 정신을 가다듬고 말했다.
『사형(查兄)의 행동이 신출귀몰하시니 이 하마(何摩)가 착각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와 동시에 요원과 사여명은
『앗!』
『아!』
소리를 질렀다. 요원은 산언덕을 향해 뛰어가고 사여명은 만면에 웃음을 띠며 산 밑으로 달려온다.
그녀들은 서로 얼싸안았다. 두 사람 모두 눈물을 글썽이면서……
끝없이 많은 사연들이 튀어나올 거 같았지만 웬일인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운소진도 그녀들 사이에 끼어들어 반긴다.
사여안은 정상적인 정신을 회복한 듯한 하마를 보자 내심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하마가 미쳤다는 소문은 아무 근거도 없는 뜬소문 이였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다만 이렇게만 물었다.
『저어 한약곡에 대해서……』
하마는 그의 말을 가로채고 말았다.
『사형령주?』
사여안은 하마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만 고개만 끄덕끄덕 했다.
하마는 의아로운 듯이 반문했다.
『사형은 어떻게 그이를 의심했습니까?』
사여안은 하마를 설득시키려면 무척 힘들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쉬울 줄은 뜻밖이었다.
그는 미리부터 생각해 둔 말이 있기 때문에 자신만만하게 그의 심중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사형령주의 야심은 무척 컸습니다. 그는 평소에는 천전교주라는 신분으로 행세를 했고 자기의 본신을 나타내는 시간은 극히 짧았소. 전번 천전교의 총타가 전멸됐을 때 나는 한 발 늦게 거기에 갔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잿더미가 된 천전교의 산채에서 튀어나오는 그를 몰래 봤더란 말입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죠. 그는 싸움 현장에 있지 않았다고……』
『……』
하마는 잠자코 귀를 기울인다.
사여안은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반드시 또 다른 신분으로 강호를 횡행하지 않았겠느냐? 하는 의문이죠.…… 다음은 최근 며칠 동안에 천전의 잔여 분타 타주들은 모두 다 실종됐습니다. 이상히 여긴 나는 있는 힘을 다하여 한 농북(隴北) 분타의 타주(舵主)를 미행했습니다. 나는 그 놈을 족쳐서 천전교의 모든 사람들의 행방을 알아보려고 한 것인데 뜻밖에도 그놈마저 어제 밤에 숲속에서 피살되었던 것이요. 그를 죽인 놈은 너무나도 재빠르고 너무나 악독스러웠소. 그러나 그놈이 사람을 죽인 다음 그 현장을 떠날 때까지의 일거일동을 이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 그리고 그가 마침 두 아가씨를 죽이려고 할 때 내가 나타났지요.』
하마는 결코 그 이유를 밝히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자기의 추측이 틀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물었다.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사여안의 안색이 갑자기 침울해 지더니
『사형령주(蛇形令主)! 따라서 그는 천전교주(天全教主)이며 한약곡(韓若谷)이기도 하오!』
하고 내뱉는다. 하마는 고통을 이기지 못하는 표정으로 묻는다.
『그는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그 이십칠 명의 무사들은 그와는 아무 인연도 없고 아무런 원한도 없을 것인데 왜 죽였을까?』
『나는 지난 일 년 동안 온갖 노력을 다해서 이 원인을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이십칠 명의 무사들은 비록 고향은 남북으로 갈라져 있고 또 그들의 신분이 중도 있고 속인도 있습니다만 그들에겐 하나의 공통된 목적이 있었습니다.』
『어떤 목적이었소?』
하마가 묻는다.
『그것은 그들이 사십 년 전부터 복파보의 반도(叛徒) 김가(金哥)라는 자와 싸워 왔기 때문이요.』
하마는 계속 묻는다.
『그래 그 김가라는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말에 듣자니까 복파교의 두 고제자(高弟子)…… 장천행(張天行)과 운계안(鄆季安) 두 사람이 그 김가를 죽였다고 하는군요. 그러나 이것도 복파보주의 입에서 나온 말 뿐이지 그 진상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는 몇 번이나 복파보에 갔었지만 만나본 사람은 장천행뿐이지 그 운 아무개라는 또 한 제자는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 후 김가라는 사람의 소식은 없습니까?』
하마가 묻는다.
사여안은 고개를 흔들며
『나뿐 아니라 여러 사람이 김가를 찾은 모양이지만 종무소식입니다.』
하마는 웃으면서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침사곡 가에 있는 김인달(金寅達)이가 바로 그 김가라는 사람이오.』
이 말을 들은 사여안은 소스라치게 놀래며 말한다.
『누가 그런 말을 하던가요?』
『요원 아가씨가 그러더군요.』
사여안은 양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한약곡은 은사(恩師)를 대신해서 복수를 한 셈이구려. 허지만 너무나 비겁하고 악독한 술법을 썼소. 그리고 한약곡 그 사람은 사람됨이 그리 충실한 편도 아닌데 어째서 사부를 위해서 목숨까지 걸고 복수를 하려고 하였을까? 아마도 그들은 보통의 관계가 아닌 것 같소이다.』
하마는 갑자기 풍륜이 자기에게 일러주던 말, 침사곡 그의 동굴 밖에서 엿들었던 이야기를 생각했다.
그가 이 말을 사여안에게 들려주려고 입을 열려고 하는데 사여안이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면서 은근히 말한다.
『부탁이 하나 있소이다.』
『?』
『잠시 후 내 동생이 운학에 대한 안부를 물어 볼 것이오!』
『……』
『그때 하형께서는 무사하니까 마음을 놓으라고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러자 하마는 빙그레 웃으며
『구태여 거짓말까지 할 것은 없습니다. 운형은 침사곡에서 위험을 모면했을 뿐 아니라 하늘의 도움인지는 몰라도 공력도 크게 진보해서 마교오웅(魔教五雄)까지 패배시켰으니까요.』
『정말이오?』
사여안은 저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그걸,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마는 사여안이 어째서 운학에게 이다지도 관심이 클까, 하는 의심이 일었지만 표정에는 나타내지 않고 대답했다.
『오웅이 나에게 말해 주더군요. 아마 거짓말은 아닐 것입니다.』
사여안은 이 소식을 조금이라도 빨리 사여명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하형, 고맙습니다. 곧 동생에게 알려줘야 하겠습니다.』
하자 하마는 그의 소매를 잡으며
『잠깐만, 영형(令兄)의 남매는 무엇 때문에 운학에게 그다지도 관심이 큽니까?』
사여안은 놀랍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말했다.
『좌우지간, 하형은 외인이 아니니 이야기해 드리죠. 하형은 운학의 손목에 끼고 있는 옥환(玉環)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 위에 무슨 글씨가 새겨져 있는가도?』
하마는 놀라면서 묻는다.
『그럼 영형의 매씨의 이름이 사여명(查汝明)이라 하오리까?』
사여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소. 운형은 나의 매부(妹夫)가 될 사람이외다.』
그 말을 들은 하마는 갑자기 하늘과 땅이 어지러이 돌며 거꾸로 쏟아져 내리는 듯했으며 그의 심중에는 사여안의 음성이 마치 우레와 벼락이 떨어지는 듯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사형, 당신은 요원 아가씨의 일을 아십니까?』
하고 물었다.
사여안은 처량하게 한숨을 쉬며 대답한다.
『복파보에서 며칠씩이나 기거한 적이 있는 내가 왜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나의 그 누이동생의 한바탕 치정(痴情)을 내 입으로 차마 말할 수야 없지. 내가 누이동생을 권하여 요원 아가씨에게 양보하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마가 말한다.
『운학 형님은 알고 있습니까?』
사여안은 그렇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하마는 한 마디 더 물어
『그의 반응은 어떠합니까?』
사여안은 고개를 떨구며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마의 마음속은 훤히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때 저편에서 세 아가씨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사여명은 크게 웃으면서
『좋다! 내가 말하지. 너희들 더 나를 감질나게 하지 마라!』
두 아가씨가 또 웃는다.
사여명은 말을 이어
그 침사곡의 괴인(怪人)이 한 말로
- 성하결빙(盛夏結氷=한 여름에 얼음이 얼도다)
- 엄동한림(嚴冬汗淋=한 겨울에 땀이 흐르도다)
- 한열지곡(寒熱之谷=한열곡 골짜기는)
- 천하기경(天下奇景=천하 괴이한 경치로다)
운소진은 재미있다는 듯이 말한다.
『이 네 마디는 정말 풀기 힘들구나! 그렇지요?』
요원은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려 본다.
『한지곡(寒之谷), 한열곡(寒熱谷), …… 한약곡(韓若谷), 오! 한열곡(寒熱谷), 한약곡(韓若谷), 그렇다! 한약곡(韓若谷)은 바로 한열곡(寒熱谷)을 비꼬아서 한 말이다.』
두 아가씨의 놀라는 음성이 들렸다.
요원은 계속해서
『김사형은 한열곡(寒熱谷)에서 떨어지고, 그리하여 자기가 죽지 않은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자기 아들의 이름을 한약곡(韓若谷)이라고 지은 것이구나!』
『아!』
두 아가씨의 탄성이 또 들린다.
그러나 요원(姚畹)은 끊지 않고 계속해서
『아! 맞았다. 한약곡은 바로 김사형의 아들이다! 틀림없다! 한열곡(寒熱谷)!…… 한약곡(韓若谷)!』
그와 동시에 소진과 사여명은 다같이 소리친다.
『맞았다! 틀림없다! 한열곡! 한약곡…… !』
그리고는 손뼉을 쳐가면서 웃는다.
사여안은 의미 있게 하마를 바라보면서
『나의 동생은 이미 몇 달 동안 웃음을 흘리지 않았소이다! 지금 나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소이까?』
하마는 신중하게 생각하고자 고개를 쳐든다.
『사대협께서는 이런 아이들 장난 같은 뱃속 안에서부터의 결혼, 즉 다시 말하면 숙명적으로 맺어진 결혼이란 법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하마의 이 말은 분명히 요원의 입장에서나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사여안은 하마가 요원의 편을 드는 것을 직감적으로 눈치 챘다. 그러자 그의 안색은 크게 변한다.
사여안은 침중한 목소리로
『음, 내 개인의 생각을 말한다면, 물론 나는 찬성하지 않소.』
하마는 상대의 의견을 압도하는 어조로 되묻는다.
『그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사여안은 양미간을 찌푸리면서
『하형은 꼭 제 대답을 들어야 하겠습니까?』
하마는 운학이 요원에 대해서 깊은 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운학으로 말하면 실은 사여명을 더 깊이 사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알 길이 없는 하마는 자기 자신 운학의 일생에 관련되는 곤란하고 어려운 일을 어떻게든지 스스로 도와주어야 하겠다는 심산에서 악착같은 마음이 일어난다.
그는 의연한 음성으로
『말만 가지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가 이렇게 서두를 뗀 것은 자기는 사여명과 운학의 혼인에 대해서 반대한다는 의견을 사여안에게 밝혀 말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사여안은 조용하고도 담담한 표정으로 푸른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다.
사여안은 침착한 목소리로
『저 편에 운진인이 계십니다. 하형은 잘 아시고 계시지요?』
이 말을 듣자 하마는 갑자기 정신이 멍했다.
사여안의 말소리가 한 마디, 한 마디씩 또렷하게 들리었다.
『만약에 이 사(査)모가 한꺼번에 그런 형식적인 혼인에 찬성한다면, 운진인과 바로 원수지간이 될 것이오.』
이 말을 듣고 하마는 더욱 어리둥절해진다.
사여안은 이러한 하마의 태도에는 개의치 않고
『하형, 이걸 보시오!』
하마는 이제 얼굴이 백지처럼 창백해졌다.
사여안은 주머니 속에서 하나의 옥으로 만든 팔찌를 꺼내었다. 그것은 운학이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모양의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 새겨져 있는 글자는 사여안(查汝安) 세 글자가 아닌 운소진(鄆小眞) 세 글자였다.
하마는 가슴이 떨리었다. 그는 사여안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 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운소진은 알고 있습니까?』
그러나 사여안은 말없이 옥팔찌를 하마의 손에서 도루 집어 당긴다.
그는 말한다.
『운진인은 어릴 때부터 집을 잃고 고아(孤兒)로 자라났습니다. 그러니 아마도 그녀가 가지고 있는 팔찌는 이미 잃어버렸을 것이오. 그것은 나로서도 잘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십중팔구 그리하리라 생각하오!』
사여안은 일단 말을 끊고 하마의 몸짓을 물끄러미 주시한다.
그는 다시 말을 이어
『하지만 나는 이런 완고한 풍속을 지키지는 않소이다. 사람과 사람과의 연분에 대해서 어찌 완고하게 강제로 일을 만들 수가 있겠소이까?』
그의 음성에는 차가운 비유가 숨어 있는 듯했다.
사여안은 결론적으로
『그러니 제 동생의 행동에서 대해서 내가 어찌 간섭할 수가 있을 것이며 또 어찌 억제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마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그 총명은 운학도 탄복한 바 있는 일이다.
사여안의 모든 이야기…… 그 한 구(句), 한 자(字)마다 담겨 있는 뜻을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다.
하마는 명랑한 음성으로 말한다.
『사형(查兄)의 말씀, 전부 이해가 가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 반가운 소식을 동생에게 알려 주십시오.』
사여안은 감격한 어조로
『알겠소이다. 하형(何兄)께서 모든 것을 알아주시니 나도 마음속이 명경지수(明鏡止水)와도 같이 시원하오이다.』
말을 마치고 그는 저편으로 발을 옮기려고 한다.
하마다 불러 세운다.
『사대협! 잠깐만, 저 요원 아가씨에게 일러 주시오. 이쪽으로 와서 저와 이야기가 있을 것이니 잠깐 오라고 말해 주십시오.』
『알겠소이다.』
사여안은 숨을 내쉬고 공손하게 예를 차린 후 관목 사이로 걸어갔다.
하마는 사여안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그 어떤 알 수 없는 감동의 물결이 전신을 휩싸는 것을 느꼈다.
잠시 후 관목 사이로 요원의 명랑한 모습이 나타난다. 그녀는 온 전신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토끼뜀을 뛰면서 하마를 향해 왔다.
그러나 하마는 그러한 요원을 바라보면서 칼로 에이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과연 나는 이 말을 그녀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인가? 너무나도…… 잔혹한 이야기가 아닌가?)
하마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요원은 운학의 소식을 들었으리라! 그녀는 지금 형언할 수 없는 희열 속에 빠져 있을 것이다. 그러한 요원에게 이제 나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한 마디를 하지 않으면 안 되니, 무서운 일이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니 차마 눈을 뜨고 요원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만일 지금 사여안과 같이 나눈 이 음모와도 같은 이야기를 그녀가 들었다면 그녀는 자기를 용서하지 않으리라!
하마 그 자신은 결국 운학과 요원과 사여명……
이 세 사람의 행복을 진정 파멸로 이끄는 지옥(地獄)으로 인도하는 사자(使者)가 되는 것인가?
그러나 실은 더 시간을 끌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사랑이라는 것은 결국 진흙 수렁과 같은 것이다. 힘껏 발을 빼려면 더 깊이 빠지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더 크나큰 상처를 받는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순간에 요원을 구할 수 있는 길은 넓은 아량을 가지고 용기를 내야만이 이 위험한 수렁에서 요원은 위기를 벗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요원은 생글생글 웃음 띤 얼굴로 하마 앞에 선다. 다치고 싶지 않은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러니 하마는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다.
하마가 아무 말도 없는 것을 보자 요원은
『하대협! 또 무슨 미궁(迷宮)의 비밀이 있어 저보고 풀라고 하십니까?』
하마는 힐끗 그녀의 눈치를 살피고 나서
『요원 아가씨! 우리 저기 언덕을 넘어 갑시다!』
이렇게 말하고 그는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요원은 이러한 하마의 모습에게 그 어떤 심각한 마음의 고요를 깨달았음인지 아무 말도 없이 그의 뒤를 따랐다.
사여안(查汝安)은 나무 그늘에 서서 이쪽의 공기가 얼어붙은 듯한 괴로움을 느꼈다.
시시각각 시간이 흘렀다.
그러자 언덕 너머에서 비명과도 같은 요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여명과 운소진은 크게 놀라 동시에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는 문득 그 쪽으로 달려가려는 자세를 한다.
사여안이 만류했다.
『잠깐…… 기다려라!』
그러자 얼마 후 언덕 너머로 하마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 걸음걸이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마치 무엇을 잃은 사람처럼 실의(失意)의 그림자가 짙게 어리고 있었다.
불과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것에 불과하건만 어찌 사람의 모습이 이토록 변할 수가 있으랴! 하마의 모습은 십 년은 더 늙은 사람같이 보였다.
하마는 그 심정과도 같이 한 발 한 발 무겁게 떼어 놓으며 가까이 이른다.
사여안은 가슴에서 무엇인가 솟구쳐 올라오는 듯한 아픔을 느끼며 다만,
『요원……』
하고는 다음 말을 잇지 못한다.
하마는 돌연 두 손으로 이마를 짚으면서
『그녀는 갔소!』
하고 침통한 한 마디를 내 뱉는다.
『안 돼요!』
운소진이 부르짖었다.
그러나 사여안이 그녀의 팔을 잡고 있었다.
하마는 다시 어두운 음성으로
『우리는 그를 쫓아가지 맙시다!』
이렇게 말하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여안은 무거운 입을 열어
『우리는 침사곡(沈砂谷)으로 갑시다.』
이렇게 말하고는 성큼 걸음을 떼어 놓았다.
한 사람 또 한 사람 사여안의 뒤를 따랐다.
봄바람은 그들을 향해 불어왔지만 그들의 마음속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하마는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면서도 마음속에 일어나는 양심의 가책을 어쩔 수가 없다. 그의 한 걸음 한 걸음은 세 사람의 잃어버린 행복을 상징하는 것 같았다.
아,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침사곡은 마치 먼 세상의 종점(終點)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