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서는 최고의 군인이었고 죽어서는 대왕이 된 사내, 삼국통일을 완성한 김유신입니다.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적이 없습니다.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정치적인 파트너, 신라의 몰락한 왕족, 김춘추, 그들에게 오로지 복수심과 가문의 영광 밖에 없습니다. 어마 어마한 복수극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 비밀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김유신과 삼국통일의 진실, 천년 신라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땅, 경상북도 경주입니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입니다. 발이 닫는 곳마다 천년 보물이 숨어 있습니다. 송화산 초입 화려한 무덤 하나, 무덤이 하나 있습니다. 왕릉입니다. 그런데, 저기 묻혀있는 사람이 왕이 아닙니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얼마나 위대한 일을 했기에 저렇게 왕이 아님에도 왕릉에 묻혀 있을까요? 살아서는 최고의 군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죽어서는 왕, 그것도 대왕이 된 사내, 김유신입니다. 삼국통일을 완성한 사람입니다.
그 업적이 워낙 대단했던지라 분단 시대가 첨예하게 진행되고 있던 1970년대, 대통령 박정희는 이렇게 경주 한 가운데 북녘을 바라보는 군인의 동상을 세워놓았습니다. (경주 황성공원에 세워진 김유신 장군의 동상). 그렇게 이념 갈등이 있었던 때문만이 아닙니다. 김유신은 그 예전부터 위대한 사람으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고려시대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 그 역사 속에는 김유신에 관한 이야기가 열전으로 세권이 있습니다. (열전 제1 김유신 상, 열전 제2 김유신 중, 열전 제3 김유신 하). 그만큼 위대한 사림이었죠. 여기까지는 우리가 아는 이야기입니다.
좀 이상한 사실이 있습니다. 첫째 김유신은 경주 사람이 아닙니다. 경주 김씨가 아니라 신라가 멸망시킨 가야의 후손 김해 김씨입니다. 두번째 놀라지 마십시오!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한 적이 없습니다. 무슨 일일까요? 자, 그 비밀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가야 왕국의 시조 수로왕의 탄생 설화에 등장하는 노래, 구지가입니다.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라
-------------------구지가(龜旨歌)---------------
일연이 쓴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그 설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상남도 김해 땅 구지봉 산 아래에 살던 사람들이 하늘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구지가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황금색 상자가 내려옵니다. 상자 속에는 알 여섯개가 들어 있습니다. 알에서 깨어난 사내 아이 여섯이 후에 여섯 가야 우두머리가 됐다는 이야기입니다 (성산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금관가야 고령가야 소가야). 그 중에서도 가야 연방국의 중심 금관가야를 세운 사람이 바로 김해 김씨 시조 수로왕입니다. 하지만 주변 열강의 침입이 계속되면서 가야는 490년 역사를 끝으로 멸망합니다.
서기 532년 국운을 건 신라와의 전투에서 크게 패한 부영왕이 나라를 통째로 신라에 넘깁니다. 경상남도 산청군, 지리산 자락에 거대한 돌무덤 하나가 보입니다 (왕산 등산로 초입 특이한 형태의 무덤). 높이가 7m가 넘습니다 (전구형 왕릉 사적 제214호). 크고 작은 돌맹이들을 일곱 집단으로 정결하게 쌓은 자태가 꼭 이집트 피라미드 같습니다. 경상남도 산청 깊은 산골짜기에 커다란 돌무더기가 있습니다. 돌무더기가 아니라 무덤입니다. 무덤 중에서도 왕릉입니다. 비석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가락국 讓王陵, 가락국은 고대국가 가야를 뜻하고 양왕(讓王)은 그 국가를 다른 나라에 넘겨준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능(陵)입니다. 왕릉이란 뜻이죠. 공식명칭은 ‘전(傳)’ 구형 왕릉입니다. 가락국 마지막 왕의 구형왕의 능이라고 전해지는 왕릉이란 뜻이죠.
전덕재/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1798년에 조선왕조에서는 공식적으로 그것이 구형왕의 무덤이라는 승인을 내려줬어요. 그 다음부터는 김해 김씨 종친들이 그곳을 구형왕릉이라고 믿고 제사를 지내고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그런 전승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데요. 그곳이 100% 구형왕의 무덤이라고 하는 증명이 되지는 않는 전승이라는 것이죠.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이 김해 가 아니라 산청 골짜기에 묻혀있답니다. 그것도 이렇게 범상치 않는 돌무덤에 이유가 뭘까요?
박종인/조선일보 여행전문기자: 고대국가 가야는 신흥국가 신라의 끊임없는 침략에 시달립니다. 나라가 시달린다 함은 왕뿐만 아니라 백성이 시달린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 백성들을 위하여 나라를 신라에 넘긴다는 겁니다. 서기 532년 법흥왕대에 벌어진 일입니다. 그리고 구형왕은 바로 이 산청, 지금의 왕산이라 불리는 산으로 들어가서 죽었습니다. 자, 그가 죽을 때 이렇게 유언을 합니다. 나는 나라를 넘긴 사람이니 나 같은 죄인은 흙을 덮지말고 돌을 덮어라. 그래서 이렇게 돌무더기가 된 무덤에 구형왕이 묻혀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을 하죠.
나라가 망했습니다. 그 후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삼국사기에 그 관련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법흥왕 19년(532년) 금관국의 왕 김 구해(仇衡王)가 왕비와 세아들인 큰 아들 노종, 둘째 아들 무덕, 막내아들인 무력을 데리고 나라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 왕이 예로써 대접하고 상등(上等)의 벼슬을 주었으며, 금관국을 식읍(食邑)으로 삼게하였다.------삼국사기 법흥왕-----
나라를 내주고 지리산 자락에 숨어 살다 돌무덤에 잠든 왕, 망국의 후손들은 신라 진골귀족의 대접을 받고 신라인으로서의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 뒤 구형왕(가야10대)의 셋째 아들 무력은 군사적으로 활약을 펼치며 신라에 큰 공을 세웁니다. 김무력은 용맹함과 정보력으로 백제와의 관음산 전투를 크게 승이로 이끕니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리의 기세를 타고 크게 이겨서 좌평(佐平) 네명과 군사 2만9천6백명의 목을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삼국사기 진흥왕----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단양 신라 적성비,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진흥왕 이사부와 비하부 무력(武力) 등 10명의 고관에게 하교하여 신라의 척경(拓境)을 돕고-------진흥왕 순수비 해석내용中----------
진흥왕이 영토를 확장하며 세운 비석에는 그의 이름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김무력은 진흥왕때 진골귀족만 오를 수 있는 3관등 잡찬 벼슬에 오릅니다. 무력의 아들 서현 또한 백제와의 전투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워 능력을 인정받았지요. 하지만 정통 신라진골과 가야출신 진골 사이에는 신분의 벽이 존재했습니다.
전덕재: 이들이 전통적인 귀족들로부터 차별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상징적인 사건이, 많이 알려진 이야기지만, 숙흘종이라고 해서, 진흥왕의 동생입니다. 숙흘종의 딸이 만명부인이죠. 김서현과 만명부인이 결혼을 하려고 하니까 숙흘종이 자기의 허락을 받지 않고 야합을 했다는 이유로 그 결혼을 반대한 거죠. 금지된 사랑을 하게된 가야의 후손 서현과 왕족의 딸 만명, 서현의 신분이 못마땅했던 숙흘종은 딸 만명을 별채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때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고 그 틈을 타 만명은 별채를 빠져 나왔죠. 그 길로 두 사람은 경주를 떠나 만목으로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으로 도피행각을 벌립니다. 진천태수로 임명된 서현과 아내 만명부인이 살던 곳입니다. 여기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했고 자식도 여럿 낳았습니다.
삼국사기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진흥왕의 조카 딸 만명과 김서현이 야합을 했다고 했습니다. 야합, 별로 어감이 좋지 않죠? 안좋은 어감 그대로 입니다. 야합野合[야:합] 1. 좋지 못한 목적으로 서로 어울림 2. 부부가 아닌 남녀가 서로 정을 통함
성골과 진골 처럼 차이가 나는 왕족과 귀족이 만나도 환영받지 못하던 시대입니다. 그런데 김서현은 망국, 신라가 집어삼켜버린, 망국 가야의 왕족 후손입니다. 그런데 승리한 나라, 신라의 왕녀가 둘이 만나서 정을 통했다? 사랑을 나눴다?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찌됐던 그렇게 모든 사람들의 반대를 무릎쓰고 둘은 결혼했습니다. 그 두 사람이 축복받지 못한 결혼을 해서 낳은 아들이 모르면 간첩, 이 사당의 주인공, 김유신입니다.
길상사는 신라의 명장이자 삼국통일의 주역으로 꼽히는 김유신을 모시는 사당입니다. (가야 구형왕의 증손자이자 진천출신 무장 김유신). 김유신의 고향이 경주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김유신 장군 태실 사적 제414호). 그런데 김유신은 바로 여기 진천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의 태가 묻힌 김유신 태신, (진천 길상사 충북 기념물 제1호), 김유신의 공적을 기린 길상사는 글의 표현답게 김유신의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합니다.
지금으로 치면 식민지 출신의 사내가 이렇게 어마 어마한 사당의 주인으로 들어 앉았습니다. 도대체 김유신이 태어나고 무슨 일이 벌어졌길래 이렇게 어마 어마한 사당에 남아서 그를 기리고 있는 걸까요? 진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김유신은 부모님이 경주로 거처를 옮기면서 경주를 주무대로 삼습니다. 신라 전성기 때 경주에는 금입택이라는 집들이 있었습니다. 金入宅, 그러니까 금이 드나드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어마 어마한 부자집이라는 뜻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재벌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금입택 이라는 집이 모두 39채가 있었습니다. 그때 경주에는 온통 초가집 없이 기와집이었고 기와집이 서로 달리 맞붙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 많은 금입택 39대 재벌 중의 한 집이 바로 여기 재매정(財賣井) 집입니다. 어마 어마하죠. 이 넓은 곳입니다.-재매정 택지 여기가 바로 김유신의 집터였습니다. 재매정택 이라고 불리는 김유신 일가의 집터입니다. 마당 한 쪽에 김유신과 가족이 사용했던 財賣井 이라는 우물이 남아 있습니다.
우물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있죠. 자,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의 위대한 이 세 단어를 말하기 위해서 인용하는 이야기가 바로 우물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서기 645년 김유신이 백제와 전쟁을 치루고 돌아오던 때입니다. 그때 다시 왕명이 떨어집니다. 백제가 다시 쳐들어왔으니 전쟁터로 나가라고요. 그때 김유신이 자기 집에 거의 다 도달해서 다시 돌아갑니다. 대신 50보 바깥에서 부하들에게 명령을 해서 바로 이 우물터의 물을 떠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바가지에 든 물을 맛보고는 “우리 집 물맛은 변하지 않았구나” 하고 전쟁터로 향합니다. 이를 본 부하들이 감동을 해서 다시 전쟁터에서 백제를 무찔렀다는 이야기입니다. 자, 그런데 그 위대했다는 김유신, 어린 시절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비행소년에 가까웠습니다.
김유신의 집터 재매정터에서 1km 정도 떨어진 곳, 작은 개울을 건너면 한 벌판이 눈에 뜁니다. 여기가 바로 어린 시절 김유신이 비행을 저질렀던 장소, 사적 제340호 경주 천관사지입니다. 가야의 옛 왕족과 야합 끝에 낳은 아들입니다. 만명부인, 이 아들이 잘 자라줘야 자기도 인정을 받고 가문도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 시절 김유신, 아무리 해도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어린 마음에 객기를 부립니다. 기생집을 드나듭니다. 나쁜 친구들을 사귀죠. 천관이라는 기생과 늘상 붙어 다닙니다. 이를 보다 못한 만명부인이 김유신을 만나 꾸짖죠. 너, 이래 가지고 어떻게 가문을 살릴 수 있겠니? 그랬더니 김유신이, 엄마, 두번 다시 안 그럴게요. 며칠 못갑니다.
어느날 술에 취한 김유신을 말이 천관녀의 집에 도착합니다. 습관적이었겠죠. 술에서 깨어난 김유신, 애마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립니다. 그 후 화랑의 우두머리가 된 유신은 용화향도라 불리는 자기 낭도를 이끌고 열심히 무예를 닦습니다 (단석산 바위-김유신이 수련중 칼로 내려쳐 쪼개졌다는 바위). 무예 실력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나이 열일곱에 단석산 큰 바위를 단칼에 쪼갰다는 전설도 있습니다. 629년 낭비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김유신, 무예와 지휘력을 바탕으로 승승장구 합니다. 신라 최고관직인 각간과 대각간에 이르러 태대각관에 오른 김유신은 사후 흥무대왕으로 추존됩니다.
609년 15세에 화랑이 되어 낭도를 이끔
629년 낭비성 전투승리
644년 상장군에 오름
648년 상주행군 대총관 임명
660년 황산벌 전투승리, 대각간에 오름
668년 태대각간에 오름
835년 사후 흥무대왕에 추존
살아서는 최고의 장수였고 죽어서는 대왕이 된 남자, 경주 통일전에는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의 영정 옆에 김유신의 영정이 모셔져 있습니다. 김서현과 만명부인, 정말 자식 농사는 잘 한 것 같습니다. 그들의 아들 김유신, 혁혁한 전과와 다양한 공을 세우면서 나중에는 위풍당당하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원래 출신성분은 망국 가야의 왕족입니다. 감히 이렇게 추앙을 받기까지 쉽지가 않았겠죠. 철저한 신분사회, 그리고 망한 나라의 왕족입니다. 여전히 비주류였습니다. 그 비주류의 신분을 탈출하고 신라의 권력층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김유신은 또 다른 전략을 짭니다. 바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정치적인 파트너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고른 사람이 또 다른 신라의 몰락한 왕족, 촉망받는 젊은이 김춘추 였습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화랑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촉망받는 사람이었던 유신과 춘추, 어느날 유신이 춘추와 함께 축국경기를 합니다. (蹴鞠-가죽공을 여럿이 발로 차고 받는 놀이). 그런데 유신이 춘추의 옷자락을 밟아서 옷고름이 찢어집니다. 자, 그렇게 조기축구에서 옷이 찢어진 김춘추를 데리고 김유신이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자기 여동생에게 김춘추의 옷을 꿰매주라고 시키죠. 옷고름이 찢어졌으니 상의를 벗습니다. 그 젊은 청년 앞에 여동생 문희가 나타납니다. “옅은 화장과 가벼운 옷차림을 하였는데 빛이 곱게 사람을 비추는 모습이었다----삼국사기中------
한 방에 함께 있게된 젊은 남녀, 그 뒤는 불문가지입니다. 그 뒤에 벌어진 이야기는 이야기 안해도, 당연히 벌어질 일이 벌어진 겁니다. 세월이 조금 흐릅니다. 바로 금입택, 이 어마어마한 집 마당에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습니다! 김유신이 동생을 죽이겠다고 노발대발한 겁니다. 이유인즉슨 부모의 허락도 받지 않고, 혼인도 하지 않고 동생 문희가 아기를 가졌다는 겁니다. 아기의 아빠는 누구? 때는 서기 625년 정월, 그 날은 마침 선덕여왕이 집 근처 남산에 행차한 날이었습니다. 저것이 누구의 소행이냐? 여왕이 놀라서 연기가 나는 까닭을 묻자 옆에 있는 김춘추가 얼굴을 붉힙니다.
왕이 ‘그것은 누구의 소행이냐?’고 물었다. 마침 춘추공이 왕을 모시고 앞에 있다가 얼굴색이 붉게 변했다.---삼국유사 태종 춘추공----이는 너의 소행이니, 속히 가서 그녀를 구하도록 하여라. 임금의 명을 받은 김춘추, 김유신에게 왕명을 전하고 문희를 살려냅니다. 그리고 곧 바로 혼례를 올리죠. 한마디로 쇼였습니다. 불태워 죽일 마음도 없었고 불타 죽을 마음도 없었습니다. 김유신은 왕의 행차 시간을 계산한 다음에 바로 그때 불을 질러서 왕의 눈에 띄게 만든 겁니다. 계산된 일들이었죠.
자, 그렇다면 김춘추, 그렇게 잘 나가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폐위된 왕의 후손으로서 왕족에서 진골로 강등한 집안이었습니다. 도대체, 김유신은 왜 잘 알지도 못하는 김춘추와 자기 여동생을 쇼를 벌이면서 맺어지게 했을까요? 김유신의 전략적 파트너, 김춘추는 어떤 인물일까요? 진흥왕의 둘째 아들 진지왕(금륜)은 정치를 어지럽히고 음란한 왕으로 4년만에 쫓겨납니다. 그의 손자가 바로 김춘추입니다.
전덕재: 김춘추는 원래 부인이 있었습니다. 실질적으로는 혼인한 상태였는데 불륜을 저지른 거죠. 김유신이 자기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김춘추와의 결합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김춘추로 봐서는 전통적인 진골 귀족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소외된 김유신과의 결합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거죠. 폐위된 왕의 손자, 그리고 망국의 후예, 비슷한 처지에 같은 야망을 가진 두 사람이 만났습니다. 경상남도 합천입니다.
황강이 흐르는 합천은 삼국시대 신라 서쪽 국경이자, 백제의 동쪽 국경입니다. (涵碧樓-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59호). 경상남도 합천입니다. 황강변에 나와 있습니다. 합천하면 보통 해인사를 많이 떠올리죠. 합천에는 다른 볼거리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있는 자그마한 정자, 함벽루도 그렇습니다. 여기에 기나긴 역사가 있습니다. 여기 이 작은 정자에 수많은 선비들이 와서 글을 남기고 다시 이름을 새겨 놨습니다. 우상 송시열(1607~1689) 남명 조식 (1501~1572) 그리고 퇴계 이황(1501~1570). 이 세사람 빼고는 조선 중기 이후에 성리학과 유학과 정치를 논할 수 없는 어마 어마하고 쟁쟁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이 시와 이름을 남겨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구한말 의병장 이범직의 글과 글씨도 남아 있습니다. 그 사람 옆에는 을시늑약 당시 고종황제에게 윽박질러서 도장을 찍게한 을사오적 중의 한 사람 이은용(이지용)의 이름도 커다랗게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함벽루 뒷산 여기에서 우리는 역사 속 피비린내를 맡을 수 있습니다. 바로 신라와 백제의 운명을 바꾼 대야성 전투가 벌어졌던 대야성입니다. 서기 642년 8월 김유신과 김춘추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의기투합하게 된 사건이 벌어집니다. 바로 대야성 전투입니다.
아이고~, 논란은 있지만 이 작은 매봉산이 바로 그 대야성 전투가 벌어진 대야성터입니다. 아이고~, 아이고~, 백제군이 올라오다가 다 미끄러져 죽겠다. (얼기설기 쌓인 삼국시대 옛성터). 영토 쟁탈전이 치열했던 시대, 합천은 백제와 신라의 국경지대 였습니다. 당시 백제는 이 지역을 틈틈히 넘봤고 신라는 돌과 흙으로 대야성을 쌓아 백제를 견제했죠. (여기 저기 남아있는 대야성의 흔적).
7세기 초, 신라와 백제는 격렬한 영토쟁탈전에 들어갔습니다. 격렬이란 말로는 제대로 표현이 안됩니다. 왕을 죽이는가 하면 무작정 서로의 국경 바로 한 가운데로 들어와 살육전을 벌이죠. 그리하여 서기 642년(선덕여왕11년) 합천 대야성에서 또 다른 복수극이 벌어지죠. 백제 장수 윤충이 이끄는 백제 대군단이 대야성을 총공격에 들어갑니다. 그때 대야성 성주 이름은 김품석이고, 김푼석의 아내 이름은 고타소였습니다. 고타소는 김춘추의 딸입니다. 그러니까, 사위가 지키고 있었던 성에 백제가 쳐들어온 겁니다. 윤충이 이끄는 1만 백제군의 공세에 성주 김품석은 성문을 열고 항복합니다. 화염에 휩쌓인 성은 아수라장이 됐고 성주 김품석과 아내 고타소는 처참하게 죽습니다.
군사요새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진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내부에 적이 있었기 때문이죠. 성주 김품석에게 아내를 빼앗긴 부하 검일이 배신을 하고 백제와 손을 잡은 겁니다. 품석이 막객(幕客)인 사지(舍知) 검일(黔日)의 아내가 예뻐서 그녀를 빼앗았다. 검일은 그것을 한스러워 하였다.-------삼국사기열전 죽죽---------탐욕스러운 남자고 못난 성주였고 그리고 비겁한 군인이었습니다. 김품석은 졸개의 여자를 탐한 끝에 성을 내주고, 자기 목숨을 잃고, 자기의 여자 아내의 목숨까지 내던져 버렸습니다.
그들의 아버지이자 장인이었던 김춘추, 그 못난 사위를 비난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럴 정신이 없었죠. 자기 딸과 사위를 잃었으니까요. 자, 김춘추 복수심이 불탑니다. 그 복수심이 활활 타올라서 거대한 복수극을 준비합니다. 김춘추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삼국사기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김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온종일 눈도 깜빡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삼국사기 선덕여왕-----
슬픔은 백제로 향한 분노로 바뀝니다. 복수극이 시작됩니다. (복수계획을 세워 여왕을 찾아간 김춘추). 김춘추는 선덕여왕을 찾아갑니다. 백제에 원한을 갚고자 하오니 고구려 군사를 청하도록 허하여 주시옵소서. 그대의 의중이 그렇다면 다녀오도록 하라. 고구려에 원조를 청하기로 김춘추는 김유신을 찾아갑니다. 운명을 함께 하기로 한 파트너일까요? 제가 만약 고구려에 가 해를 입는다면 공은 무심할 수 있겠습니까? 공이 만약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저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와 백제 두 왕의 뜰을 밟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나눠 마십니다.
그렇게 대야성 전투가 일어난 642년에 김춘추는 고구려 보장왕을 만나 원군을 요청합니다. 보장왕은 김춘추에게 신라가 가진 옛 고구려 땅을 돌려 준다면 도와 주겠다고 합니다. 한강 상류 노란자위 땅을 내놓으라는 말이죠. 김춘추, 제안을 거절하고 감옥에 갇힙니다. 그러자 김춘추는 대놓고 거짓말을 합니다. 생각해 보니 고구려 땅이 맞소. 돌아가서 왕에게 고구려에 돌려주겠다고 말하겠소.
김춘추가 돌아오지 않자 김유신은 3천 별동대를 고구려 국경에 집결시킵니다. 김춘추의 말을 듣고 김유신 부대에 놀란 보장왕은 김춘추를 풀어주고 맙니다. 김춘추의 거짓말과 김유신의 압박이 똘똘 뭉쳐서 김춘추가 풀려납니다. 그러자 우리 김춘추 이번에는 일본으로 향합니다. 용모가 아름답고 담소를 잘 한다는 칭찬을 받았지만 타국의 군대를 빌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신라가 상신 대아찬 김춘추 등을 보내고(---) 춘추는 용모가 아름답고 담소를 잘 하였다----일본사기 647년-----위로 고구려와 바다 건너 왜 나라 까지도 김춘추의 청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김춘추는 목숨을 위협당하는 지경에 빠지고 말죠. 그리하여 김춘추는 마지막 담판의 대상으로 당나라를 선택합니다. 唐나라, 그 당시 아시아 아니 어쩌면 세계적으로 강력했던 군사국가였습니다.
어느 날 김춘추는 아들과 함께 당 황제 태종을 만나 최종 담판에 들어갑니다. 김춘추가 당태종에게 이렇게 설득합니다. “신(臣)의 나라는 천자(天子)의 조정을 섬긴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함부로 침략해 왔습니다.” 신라는 당나라를 열심히 섬기려 하는데 백제가 방해된다. 그러니 당나라를 잘 섬길 수 있게 백제를 없애는데 힘을 보태달라고 말합니다.
”폐하께서 당나라의 군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의 인민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이며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회도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삼국사기 진덕여왕---- 그랬더니 당태종이 원병을 허락합니다. “태종이 매우 옳다고 여겨서 군사의 출동을 허락하였다”---삼국사기 진덕여왕----그런데 조건이 있었습니다.
박종인: 그때 당나라에 청병했을 때 조건이 뭐였습니까?
김구석/경주 남산연구소장: 삼국사기에 나오는 당 태종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국토와 백성과 보배는 충분히 있다. 두 나라가 평정되면 대동강 이남의 땅은 너희 신라가 가져서 길이 평안케 하라” 그런 기록이 삼국사기에 나와요. 김춘추와 당 태종의 밀약은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하면 패강 이남의 땅을 신라가 갖는 것으로 한 것이죠. 처음에 갈 때도 김춘추가 당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당 태종에게 공물을 바치고 조회(朝會)하며 청병은 입 밖에 내지도 않습니다.
박종인: 입도 뻥긋 안하다가?
김구석: 네, 김춘추가 한 달 동안이나 계속 열심히 문묘에만 다니니까 당 태종 생각에는 ‘쟤가 분명히 뭘 부탁하러 왔을텐데?’ 말을 안하니까 오히려 당 태종이 김춘추를 먼저 불러서 “그대는 무슨 생각을 갖고 왔는가?” 하고 되레 묻습니다.
박종인: 김춘추가 협상 기술이 있는 사람이군요.
김구석: 김춘추는 외교 수완이 뛰어났던 사람이에요.
박종인: 그렇군요.
김구석: 상대의 마음을 다 알고 철저히 움직일 수 있었던 분이었죠. 그러니까 패강, 대동강 남쪽 땅만 신라에게 주고 고구려 땅은 당 나라가 차지하겠다는 겁니다. 이에 김춘추는 전혀 반대하지를 않습니다. 이게 바로 삼국통일의 첫번째 진실입니다. 삼국통일은 계획에 없었다는 말이죠. 김춘추와 김유신은 역할분담을 합니다. 김춘추는 외교를 다니는 사이 김유신은 군사작전에 돌입합니다.
김춘추가 나당 연합을 위해서 당나라로 떠난 648년 김유신은 옥문관 전투에서 백제군에게 큰 승리를 거둡니다. 그리고 백제 장수 8명을 생포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8명과 그보다 6년전 백제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딸 고타소의 유해를 맞교환합니다. 김춘추 그리고 김유신, 두 사람의 연합에 빛이 비치는 순간이었죠. 적장 8명을 돌려주면서 김유신이 차지한 것은 단지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딸 고타소의 뼈였습니다. “우리 군주(軍主) 김품석과 그처 김씨의 뼈가 너희 나라 옥중에 묻혀 있고 지금 너희 비장(裨將) 8명이 나에게 잡혀 엉금 엉금 기면서 살려달라고 청하는 것을 보니 너희가 죽은 두 사람의 뼈를 보내 살아있는 여덟 사람과 바꾸는 것이 어떠한가?”------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마치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 본 것 처럼 하나가 되어 세력을 키운 김춘추와 김유신, 선덕여왕의 비호 아래 두 사람의 힘은 점점 더 강력해 졌습니다. 그런데 당시 진골 귀족 중 일부는 선덕여왕과 그 무리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이가 상대국, 지금의 국무총리였던 비담입니다. 여자 왕은 나라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
선덕여왕의 통치가 16년째 되던 해 비담은 여자 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며 반란을 일으킵니다. (비담의 주도로 여왕을 폐위하려는 귀족세력). 서라벌 한 복판에서 맞붙은 반란군과 정부군, 어느날 별 하나가 정부군 쪽으로 떨어집니다. 반란군 기세가 오릅니다. 불안해 하는 군사들에게 김유신이 큰 연을 하나 들고 나타납니다. 연에다 불을 붙인 뒤 산 높이 날려보냅니다. 전세는 역전돼죠. 김유신은 이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여 연에 실어 날려 보냈는데,
“어젯밤 떨어진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고 말하여 적군으로 하여금 이상하게 여기도록 하였다”-------삼국사기 열전 김유신-------반란은 진압됐지만 선덕여왕은 세상을 뜨고 선덕여왕의 사촌 승만이 왕위를 계승합니다. 진덕여왕입니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진덕여왕을 보좌하며 권력을 다지지만 진덕여왕의 통치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재위 7년 만에 진덕여왕이 후사 없이 세상을 뜹니다. 후계자를 논의하는 귀족회의가 열립니다.
김유신이 김춘추를 추대하여 왕좌에 올립니다. 최초의 진골 출신 왕 태종 무열왕이 탄생합니다. 김유신과 김춘추, 김춘추와 김유신, 이 두 사람의 연합이 성과가 있었습니다. 김춘추가 왕이 됩니다. 그리고 김유신, 몰락한 왕족 김유신, 왕의 처남으로 위풍당당하게 신라의 최고 권력층에 편입 됩니다. 이제 하나 남았습니다. 김춘추의 복수극입니다. 드디어 660년 3월, 18년전 김춘추와 당 태종의 조약대로 당 나라 10만 대군이 백제를 공격합니다. 김유신은 황산벌 전투에서 승리를 이끕니다. 나당 연합군의 공세에 웅진성으로 대피했던 의자왕은 항복을 선언합니다. 백제 역사가 막을 내립니다.
보름뒤 백제 수도 사비성에 입성한 무열왕 김춘추, 18년 동안 갈고 갈았던 칼날을 휘두릅니다. 딸과 사위를 죽게 만든 배신자 검일을 찾아내 낱낱이 죄를 묻고 사지를 찢어서 강물에 던져 버립니다. 검일을 잡아서 죄목을 세면서 말하기를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하여 백제의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에 불을 질러서 없앴기 때문에 온 성 안에 식량이 모자라게 하여 싸움에 지도록 하였으니 그 죄가 첫번째이고, 품석(品釋) 부부를 윽박질러서 죽였으니, 그 죄가 두번째다. 백제와 더불어서 본국을 공격하였으니 그것이 세번째다” 라고 하였다. 이에 사지를 찢어서 그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삼국사기 의자왕-----
백제를 멸망시키고 배신자 검일을 처단해, 벼르고 벼른 복수를 완성한 김춘추, 한 남자의 지독한 복수심에 나라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그 뒤로 신라 땅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요. (경주 무열왕릉 사적 제20호).
서기 660년, 마침내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가 멸망합니다. 의자왕을 비롯해서 만 2천명이 넘는 백성들이 당 나라로 끌려가고 김춘추의 복수극은 그렇게 화려하게 막을 내립니다. 그런데 복수극을 위해서 김춘추가 당나라에 가서 맺은 조약 가운데 이면계약이 있었습니다. 옛 백제 땅은 신라에 주고 이북은 당 나라가 차지하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백제를 멸망시키고나서 당나라군은 철수를 하지 않고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합니다. 백제를 당나라 직활로 두겠다는 겁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금의환향한 나당 연합군 사령관 소정방에게 당 황제가 이렇게 묻습니다. 신라는 왜 가만히 놔뒀냐? 신라까지, 이제 복수극은 커녕 신라 본국까지 사라질 대위기에 처합니다.
그러던 와중, 661년 복수극의 주인공 김춘추 태종 무열왕이 죽습니다. 김춘추의 청에 흔쾌히 군사를 지원한다고 약속했던 당 태종, 그의 진짜 속내는 무엇이었을까요?
박종인: 그런데, 그건 어찌 됐던 태종이 약속을 했잖아요. ‘패강(대동강) 이남은 너희 것이니 우리는 안 건드리겠다’ 라고 그런데 나중에 약속을 어기지 않습니까?
김구석: 당 태종은 그렇게 약속을 한 뒤 죽었고 당 고종 때 발명(發兵)을 했잖아요. 당 고종은 당연히 신라까지 집어삼키려고 했죠. 그런데 일단 백제 멸망시키고 고구려 멸망시키면 작은 나라 신라는 하루 아침에 멸망시킬 수 있다는 것이고, 신라는 두 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결국은 고구려의 부흥군이 신라를 후원해 주니까 계속 당나라와의 전쟁을 함께 해나가죠. 백제 멸망 8년 후 고구려도 사라집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673년 7월, 김유신은 7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둡니다. 160년 뒤, 왕이 됩니다.
“후일 흥덕왕이 公(金庾信)을 봉하여 흥무대왕(興武大王)이라 하였다.”-------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김유신 무덤 오른쪽 비석에는 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1934년 김유신의 후손인 김용이가 쓴 비석입니다. 그런데 이 비석이 세상의 화제가 됐습니다. 비만 내리면 陵 자 대신 墓 자가 시커멓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건립 당시 墓 라고 새겨진 글자를 누군가가 평평히 만든뒤 陵 으로 덧대어 쓴 겁니다. (확연히 드러나는 墓와 陵)).
자, 이렇게 이야기 하면 어떨까요? 1710년에 太大角干金庾信墓 라고 쓰여졌습니다. 그리고 1934년에 후대에 세운 開國公純忠壯烈興武大王陵 이라고 쓰여있었습니다. 이때 조선 숙종 때에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관등성명은 그대로 하고 왕이 아니었기 때문에 墓라고 했지만 저 때는 사후 왕으로 추론을 받았으니 王陵이라고 나중에 덧대어버린 거죠. 한 사람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평가에 대한 기준은 시대가 정하는 것이겠죠. 이 사람이 나중에 왕이 되느냐 안되느냐 진정한 왕이냐 아니냐 그런 의미도 달라집니다.
(1710년 숙종때 세운 “묘비”, 1934년에 세운 후 글자가 바뀐 ‘왕릉비’). 이 사람을 올리느냐, 내리느냐 도 이렇게 볼 수 있을까요? 20미터 정도 거리가 되는데 이 두 비석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의미의 거리는 몇 광년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입니다. 그런데 김유신이 죽고 경주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경주 미추왕릉 사적 제175호).
그가 죽고 106년 뒤, 김유신의 혼백이 군사를 이끌고 나와 여기 13대 미추왕의 무덤에 찾아왔답니다. 서기 779년의 어느 여름날 이야기입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날, 김유신의 墓에서부터 여기 신라 13대 왕 미추왕릉까지 회오리 바람이 불고 미추왕릉 안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고 합니다. 삼국유사에 좀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유신의 무덤에서 한 장수가 사십여 군사를 이끌고 회오리 바람을 타고 미추왕릉까지 와서 왕릉 안에서 이렇게 하소연 하였다고 합니다. 나의 후손들이 죽고 그리고 군사들이 제대로 환영을 받고 있지 못하다. 억울하다. 이렇게 하소연을 했어요. 전설같죠? 전설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요? 김유신, 신라의 전성기를 가져온 사람입니다. 적국,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키고 그리고 신라의 찬란한 시대의 문을 연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 그가 죽고, 후손들은 이런 저런 반란을 핑계로 모두 흔적이 사라지고 그리고 그들의 흔적은 역사에서 완전히 없어집니다. 김유신,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위대한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 건 먼 훗날의 이야기입니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가 끊임없이 신라 땅을 침략합니다. 하지만 매초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에서 당나라가 패하고, 서기 735년 당나라는 마침내 패강 이남의 땅을 신라에게 인정한다고 발표합니다. “김의충(金義忠)이 돌아가는 편에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주었다”----삼국사기 성덕왕----딸과 사위를 잃은 사내, 김춘추의 복수극이 백제 땅을 완전히 신라 영토로 만들면서 막을 내립니다.
“패강 이남의 땅을 준 것을 사례하는 표문을 올리다(736년 06월(음) (…) 패강(浿江) 이남의 땅을 준다는 은혜로운 조칙을 받았습니다. (…) 이 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더라도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삼국사기 성덕왕-----. 사람들은 이 시대를 통일신라시대 라고 부릅니다. 정말 통일일까요?
박종인: 삼국통일이라고 하면 주역을 크게 세명을 꼽지 않습니까? 김춘추, 김유신 그리고 문무왕. 이들은 처음부터 삼국 통일을 꿈꿨던 것인가요?
김구석: 그것은 삼국사기 어디에도 안나와요. 관산성 전투 이후 100여년 동안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에 번갈아 가면서 엄청난 핍박을 받죠. 그래도 버텨나갔는데 신라가 대공격으로 바뀌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제가 삼국유사, 삼국사기를 읽어보면 대야성 전투가 아닌가 싶어요. 그때부터 김춘추의 평생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는 것으로 목표를 가지고 살아온 것 같아요.
한 남자의 지독한 복수극에 후대 사람들은 삼국통일이라는 제목을 붙입니다.
박종인: 김유신 동상에 있는 노산 이은상의 글을 보면 자나깨나 삼국통일 염원을 안고 있던 김유신 장군으로 되어 있거든요. 그런 기념비들이 만들어진 것이 1970년대란 말입니다. 그때 김유신을 삼국통일이라는 개념으로 떠받드는 역사적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박임관/경주학 연구원장: 박정희 대통령이 장군 출신이잖아요. 대통령이 되고 보니 우리의 최대 과업은 남북통일이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으니 어떻든 통일을 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통일’이라는 포인트를 어디에 둘 것이냐 봤을 때 ‘아! 신라가 삼국통일 했구나’ 그래서 그때 당시에 신라는 삼국통일, 우리는 남북통일, 이걸 표어로 삼아가지고 밀어부쳤어요. 그러면서 삼국통일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들을 부각하면서 김유신 동상도 세웠죠.
박종인: 김유신 동상의 방향은 원래 저렇게 되어 있었나요?
박임관: 본래는 남쪽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경주 남쪽에는 신라 궁궐인 월성이 있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만들었다가 동상 방향을 북쪽으로 틀었어요. 김유신이 마지막으로 무찌른 곳은 고구려 아니냐? 고구려를 봐야지 왜 신라 왕궁을 보고 있느냐?
남쪽을 바라보는 김유신 동상이 북쪽을 바라봅니다. 역사 속에 벌어진 일은 하나 밖에 없는데 이렇게 역사를 바라보는 방향이 바뀝니다. 1500년전 김유신은 어느 쪽을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몰락한 왕족 사내 김춘추와 역시 몰락한 왕국의 사내 김유신이 만났습니다. 복수심에 가득한 김춘추 그리고 가문의 영광을 부활시키려고 하는 김유신의 소원, 이 두 사내의 소원성취, 이를 후대 사람들은 삼국통일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삼국통일이라는 의도는 전혀 없었습니다. 오로지 복수심과 가문의 영광 밖에 없었죠. 후대에 이르러 사람들은 그들의 노력을 삼국통일 이라고 부릅니다. 역사가 그렇습니다. 삼국통일이라는 봉인을 풀어 보면 보입니다. 역사는 개인이 만드는 것이고, 하나 하나 사람의 손과 발로 역사가 만들어진다. 세월이 흘러서 모든 흔적은 사라지지만 그들의 노력, 그들의 의지는 영원히 남습니다. 끝. (TV조선 땅의 역사 23회 “김유신과 삼국통일의 진실”에서 정리).
① 삼국통일은 신라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그게 처음에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첫째 7세기 초 백제와 신라는 격렬한 영토쟁탈전이 벌어지는데 서기 642년 백제 장수 윤충이 1만군을 이끌고 신라의 대야성을 총공격하여 성은 화염에 휩쌓여 아수라장이 됐고 성주 김품석과 아내 고타소는 무참하게 죽습니다. 고타소는 바로 김춘추의 딸이고 김품석은 사위입니다.
② 대야성이 허무하게 무너진 이유가 있었습니다. 내부에 적이 있었습니다. 성주 김품석에게 아내를 빼앗긴 부하 검일이 배신을 하고 백제와 손을 잡은 겁니다. 검일은 그것을 한스러워 하였다. 김품석은 탐욕스러운 남자고 못난 성주였고 그리고 비겁한 군인이었습니다. 김품석은 졸개의 여자를 탐한 끝에 성을 내주고, 자기 목숨을 잃고 자기의 여자 아내의 목숨까지 내던져 버렸습니다.
③ 김춘추는, 그 못난 사위를 비난할 겨를이 없이, 자기 딸과 사위를 잃었으니까, 복수심에 불탑니다. 그 복수심이 활활 타올라서 거대한 복수극을 준비합니다. 김춘추의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삼국사기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김춘추가 이를 듣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온종일 눈도 깜빡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그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④ 분노로 복수계획을 세워 선덕여왕을 찾아간 김춘추, 원한을 갚고자 하오니 고구려 군사를 청하도록 허하여 주시옵소서. 그대의 의중이 그렇다면 다녀오도록 하라. 고구려에 원조를 청하기로 김유신을 찾아갑니다. 운명을 함께 하기로 한 파트너일까요? 제가 만약 고구려에 가 해를 입는다면 공은 무심할 수 있겠습니까? 공이 만약 가서 돌아오지 않는다면 저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와 백제 두 왕의 뜰을 밟을 것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나눠 마십니다.
⑤ 김춘추는 고구려 보장왕을 만나 원군을 요청합니다. 보장왕은 신라가 가진 옛 고구려 땅을 돌려 준다면 도와 주겠다고 합니다. 한강 상류 노란자위 땅을 내놓으라는 말이죠. 김춘추, 제안을 거절하고 감옥에 갇힙니다. 그러자 김춘추는 대놓고 거짓말을 합니다. 생각해 보니 고구려 땅이 맞소. 돌아가서 왕에게 그렇게 말하겠소.
⑥ 김춘추가 돌아오지 않자 김유신은 3천 별동대를 고구려 국경에 집결시킵니다. 김춘추의 말을 듣고 김유신 부대에 놀란 보장왕은 김춘추를 풀어줍니다. 김춘추의 거짓말과 김유신의 압박이 똘똘 뭉쳐서 김춘추가 풀려납니다. 그러자 우리 김춘추 이번에는 일본으로 향합니다. 일본에서 용모가 아름답고 담소를 잘 한다는 칭찬을 받았지만 타국의 군대를 빌리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일본 까지도 김춘추의 청을 거부합니다.
⑦ 김춘추는 마지막 담판의 대상으로 唐나라를 선택합니다. 그 당시 唐나라는 아시아 아니 어쩌면 세계적인 강대국이었습니다. 어느 날 김춘추는 아들과 함께 당 황제 태종을 만나 최종 담판에 들어갑니다. 김춘추가 당태종에게 이렇게 설득합니다. “신(臣)의 나라는 천자(天子)의 조정을 섬긴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함부로 침략해 왔습니다.” 신라는 당나라를 열심히 섬기려 하는데 백제가 방해된다. 그러니 당나라를 잘 섬길 수 있게 백제를 없애는데 힘을 보태달라고 말합니다.
⑧ 그랬더니 당태종이 원병을 허락합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습니다. 패강(대동강) 남쪽 땅만 신라에게 주고 고구려 땅은 당 나라가 차지하겠다는 겁니다. 이에 김춘추는 전혀 반대하지를 않습니다. 이게 바로 삼국통일의 첫번째 진실입니다. 삼국통일은 계획에 없었다는 말이죠. 김춘추와 김유신은 역할분담을 합니다. 김춘추는 외교를 다니는 사이 김유신은 군사작전에 돌입합니다.
⑨ 김춘추가 당나라에 있는 사이, 648년 김유신이 옥문관 전투에서 백제군에게 큰 승리를 거둡니다. 그리고 백제 장수 8명을 생포합니다. 그리고 바로 8명과 6년전 백제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딸 고타소의 유해를 맞교환합니다. 적장 8명을 돌려주면서 김유신이 차지한 것은 단지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딸 고타소의 뼈였습니다.
⑩ 선덕여왕의 통치가 16년째 되던 해 비담은 반란을 일으킵니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반란을 진압했지만 선덕여왕은 세상을 뜨고 선덕여왕의 사촌 승만이 왕위를 계승합니다. 진덕여왕입니다. 김춘추와 김유신이 진덕여왕을 보좌하며 권력을 다지지만, 재위 7년 만에 진덕여왕이 후사 없이 세상을 뜹니다. 후계자를 논의하는 귀족회의에서 김유신이 김춘추를 추대하여 왕좌에 올립니다.
⑪ 드디어 660년 3월, 18년전 김춘추와 당 태종의 조약대로 당 나라 10만 대군이 백제를 공격합니다. 김유신은 황산벌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나당 연합군의 공세에 웅진성으로 대피했던 의자왕은 항복합니다. 보름뒤 백제 수도 사비성에 입성한 무열왕 김춘추, 18년 동안 갈고 갈았던 칼날을 휘두릅니다. 배신자 검일을 찾아내 낱낱이 죄를 묻고 사지를 찢어서 강물에 던져 버립니다. 한 남자의 지독한 복수심에 나라 하나가 사라졌습니다.
⑫ 서기 660년, 의자왕을 비롯해서 만 2천명이 넘는 백성들이 당 나라로 끌려갑니다. 백제와 고구려 멸망 이후 당나라가 끊임없이 신라 땅을 침략합니다. 하지만 매초성 전투와 기벌포 전투에서 당나라가 패하고, 서기 735년 당나라는 마침내 패강 이남의 땅을 신라에게 인정한다고 발표합니다. 백제 땅이 완전히 신라 영토로 됩니다.
⑬ 삼국통일의 주역은 김춘추, 김유신 그리고 문무왕입니다. 이들은 처음부터 삼국 통일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삼국사기 어디에도 안나와요. 관산성 전투 이후 100여년 동안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에 번갈아 가면서 엄청난 핍박을 받죠. 그래도 버텨나갔는데 신라가 대공격으로 바뀌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대야성 전투에서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김춘추의 평생은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는 것으로 목표를 가지고 살아옵니다.
⑭ 몰락한 왕족 사내 김춘추와 역시 몰락한 왕국의 사내 김유신이 만났습니다. 복수심에 가득한 김춘추 그리고 가문의 영광을 부활시키려고 하는 김유신의 소원, 이 두 사내의 소원성취, 이를 후대 사람들은 삼국통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복수심과 가문의 영광 밖에 없었죠. 후대에 사람들은 그들의 노력을 삼국통일 이라고 평가합니다. 역사가 그렇습니다. 역사는 개인이 만드는 것이고, 세월이 흘러서 흔적은 사라지지만 그들의 노력, 그들의 의지는 영원히 남습니다.
⑮ 1970년대에 한국의 대통령 박정희가 장군 출신이고, 남북이 대치하고 있으니까 우리의 최대 과업은 남북통일이다. 어떻든 통일을 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당시에 신라는 삼국통일, 우리는 남북통일, 이렇게 표어로 삼았지요. 그러면서 삼국통일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들을 발굴 부각하면서 김유신 동상도 세웠죠.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위치에서 통일은 경제력과 군사력이다. 한국은 극동의 이스라엘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