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해를 보는 것이
전도서 11:7-12:2
참 좋으신 우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빕니다. 어제가 24 절후 가운데 열한 번째 절기인 소서(小暑)였습니다. 농촌 분들의 일손이 분주한 때가 되었습니다. 논밭은 물론이고 집터 울 밑의 잡풀을 뽑아내는 일만 해도 여간 고된 게 아닙니다. 도시에 사는 우리야 계절을 ‘덥다, 춥다’라는 기준만 가지고 가늠하지만, 땅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이들은 이 시간을 전혀 다르게 경험합니다. 농가월령가는 이때의 힘겨움과 즐거움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날 새면 호미 들고 긴긴 해 쉴 때 없이 땀 흘러 흙이 젖고 숨 막혀 기진할 듯. 때마침 점심밥이 반갑고 신기하다. 정자나무 그늘 밑에 좌차(坐次)를 정한 후에, 점심 그릇 열어 놓고 보리 단술 먼저 먹세. 반찬이야 있고 없고 주린 창자 메운 후에, 청풍에 취포(醉飽, 취하고 배부름)하니 잠시간 낙이로다.”
저절로 어떤 광경이 그려지지 않습니까? ‘맑은 바람에 취하고 배부르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들려옵니다. 계절은 이렇듯 어김이 없습니다. 시류에 따라 변하는 것은 우리 인간뿐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전도서> 하면 뭔가 염세주의적인 분위기의 책일 거라는 선입견을 갖게 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1:2) 헛되다는 말이 다섯 번이나 반복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합니다. 전도서 1장 1절은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라고 시작하는데 여기서 ‘전도자’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코헬렛입니다. 코헬렛은 ‘모으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꼭 사람을 모은다는 뜻일 필요는 없습니다. 금언집이나 사상집을 모아 하나의 격언 모음으로 만드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는 자기 경험을 가지고 인생에 대해 말합니다. 그는 “내가 했다, 내가 살아봤다, 내가 경험했다, 내가 추구해봤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의 이야기는 추상적인 공론이 아니라 경험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그는 돈도 많이 모아봤고, 권력도 누려봤습니다. 남에게 뒤지지 않을 만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경험을 냉철하고 차분하게 돌아본 후에 그것이 다 헛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마치 무대에 올라가 자신이 행한 모든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준 후 그것이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코헬렛은 철저한 반체제주의자입니다. 사람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사람들이 마음을 담아 살고 있는 것들을 향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니 그렇게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는 우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착하게 산다고 다 잘 사는 것도 아니고, 죄를 짓는다고 하여 꼭 벌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 예컨대 돈이나 명예나 권세, 지혜 같은 것들이 우리 삶의 영원성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그는 우리에게 스스로를 속이지 말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렇게도 소중히 여기고 애착하는 것들이 사실은 안개와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헛되다고 번역된 히브리어 ‘헤벨’은 본래 ‘안개’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안개는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불면 흩어지고 맙니다. 그렇기에 안개는 지속될 수 없음을 가리키는 은유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맥이 빠집니다. 그는 가혹한 집달리처럼 다가와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에 대해 ‘헤벨’이라는 빨간 딱지를 붙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전도서는 나이 든 사람에게는 상당히 위로를 주는 책이지만, 젊은 사람들에게는 맥이 빠지게 하는 책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는 세상에 만연한 악에 대해서 눈을 부릅뜨지 않습니다. 세상은 으레 그런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 모든 일들에 대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말을 하기는 합니다만 왠지 시원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세상의 이치를 다 알고자 하지만 그것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지혜를 추구해보지만 결국 죽음이라는 한계 앞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그것도 결국은 덧없음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여기서 우리는 코헬렛의 가르침의 핵심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인생이 모순임을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다고 하여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어제의 우방이 오늘의 적이 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어제의 기쁨이 오히려 더 큰 슬픔의 씨가 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런가 하면, 어제 내가 경험했던 너무나 고통스럽고 낙심됐던 상황이 오히려 오늘 내 생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일도 우리는 허다하게 경험합니다. 무엇이 좋을지 알 수 없습니다. 삶에는 일관성이 없습니다. 뒤죽박죽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코헬렛은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라는 말로 우리를 위로하지 않습니다. 그는 냉혹한 리얼리스트로서 현실을 그려냅니다. 결국 그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겸손하게 한계를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모든 일을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다만 내게 주어져 있는 순간을 아름답게 살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자! 이것이 코헬렛의 가르침입니다.
현실은 모순덩어리입니다.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우리에게 가장 큰 슬픔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안개와 같아서 때가 되면 종작없이 흩어지고 맙니다. 천만금이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을 누릴 수 없다면 말입니다. 연예인들은 인기가 거품이라는 것을 잘 압니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은 어제까지만 해도 환호하던 대중들이 오늘 거들떠보지도 않으면 낙심하고 심지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니 코헬렛이 가리키는 것은 안개처럼 흩어지는 것들에 의지해서 삶을 구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흔들리는 터전일 수밖에 없습니다. 가끔은 내 마음을 사로잡는 것으로부터 나를 구분해낼 필요가 있습니다. 짧지 않은 인생을 살아오고 특히 신학의 길을 걸은 게 어느덧 20년이 넘었는데 그렇게 살아오는 동안 깨달은 것 중의 하나가 ‘집착은 병’이라는 것입니다. 집착은 더 큰 절망의 뿌리라는 것을 느낍니다. 코헬렛은 현실 너머에 있는 하나의 진실을 우리에게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사라는 것입니다. 시간의 주인은 내가 아닙니다. 우리의 오늘은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입니다. 세상만사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낙심할 것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심는 자와 물주는 자는 각기 자기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하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걸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우리는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늘’이라는 선물을 주신 까닭은 투덜거리라고, 빈둥거리라고, 화를 내라고 주신 것은 아닐 것입니다. 코헬렛은 우리에게 모든 게 헛되니까 우울하게 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늘을 즐겁게 기쁘게 살라고 말합니다. “빛을 보고 산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해를 보고 산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7) 물론 어두운 날도 있고 슬픔의 날도 있고, 고통의 날도 있습니다. 하지만 삶은 기본적으로 기쁨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쁨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 뭔지 아십니까? 부유함입니다. 너무 낯선 이야기입니다. 부유해야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부유함이 오히려 우리의 기쁨을 차단하고 있다는 것은 역설적이지만 사실입니다. 안소니 드 멜로가 쓴 『종교 박람회』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북방에서 온 사업가는 남방의 어부가 자기 배 곁에 드러누워 빈둥빈둥 담뱃대나 빨고 있음을 보고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그는 책망하는 투로 말을 건넵니다. “왜 고기잡일 안 가시오?” “오늘 몫은 넉넉히 잡아 놨지요.” “필요한 것보다도 더 많이 잡으면 되잖소?” “그래서 뭘 하게요?” 북방에서 온 사업가는 ‘그러니 당신이 그렇게 가난하게 살지’라고 생각하며 충고 삼아 한마디 합니다. “고기를 많이 잡으면 돈을 더 벌 수 있지요. 그 돈으로 당신 배에 알맞은 발동기를 살 수 있고, 그러면 더 깊은 데로 가서 고기를 더 많이 잡을 수 있고, 그러면 또 돈을 더 장만하여 나일론 그물을 갖출 수 있고, 그러면 또 더욱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고 그만큼 돈을 많이 벌게 되지요. 얼마 안 가서 어선 두 척을 살 수도 있겠고… 그러다가 어쩌면 거대한 어로 함대까지 거느리게 될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되면 당신도 나처럼 큰 부자가 되는 거요.” 어부는 여전히 뱃전에 누워 발끝을 까닥까닥거리며 대꾸를 합니다. “그러고는 또 뭘 하죠?” “그러고는 편안히 앉아 쉬며 삶을 즐길 수 있지요.” 그러자 어부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습니다. “당신은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시겠습니까? 이 사람은 이미 인생을 즐기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부유한 사람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겁니다. 부유함이 그로 하여금 행복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가끔 가난한 나라 어린이들의 얼굴을 보면서 그 해맑음에 제 마음조차 환해질 때가 있습니다. 가난하게 사는데도 그런 표정이 나오는 것을 보면 부유함이 사람을 반드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못 살자는 게 아닙니다. 부유함이 곧 행복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자는 말입니다.
코헬렛은 선물로 받은 오늘을 즐거움과 기쁨으로 채우라고 말합니다. “고생스러운 날들이 오고, 사는 것이 즐겁지 않다고 할 나이가 되기 전에”(12:1) 인생을 좀 누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너무 엄격하게 금욕적으로만 살지 말고 인생을 좀 즐겨야 합니다. 좋은 곳에 여행도 좀 하고, 좋은 음식도 먹고, 좋은 연주회에도 가고……. 무엇보다도 자기가 하는 일을 즐길 수 있다면 더 좋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의 쳇바퀴를 돌리느라 생을 다 허비한 후에 뒤늦게 한숨을 내쉬며 탄식합니다. ‘이렇게 사는 게 아닌 데!’ 저는 젊은 날에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늙어지면 못 노나니∼” 하는 노래를 아주 퇴폐적인 노래로 알았습니다. 젊은 날에 열심히 일해야지 놀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돌아보니 그건 꽤 그럴듯한 노래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삶의 가장 좋은 때,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입니다. 여기엔 남녀노소가 따로 없습니다. 빛을 보고 사는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나름대로 열심히 자기 삶을 연출해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먹고 사는 일과 관계없는 일이지만 자기가 정말 하고 싶어 하던 일을 시작하는 분들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박수를 쳐 주고 싶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악기도 배우고, 춤도 추고, 사진도 찍고……. 우리는 그동안 너무 앞만 보며 달려왔습니다. 조금 숨을 고르고 하나님의 주신 생명의 기쁨을 맛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방만하게 이기적으로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어차피 생명이라는 게 ‘관계’ 속에 있는 것이니까,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것은 우리의 마땅한 책임입니다. 내가 행복하기 위해 남을 불행에 빠뜨리면 그건 잘 사는 것 아닙니다. 그래서 코헬렛은 “네가 하는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만은 알아라”(9) 하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흥겨운 기분에 초를 치는 것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우리를 지켜주는 최소한의 제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신데렐라는 요정의 도움으로 성에 가 멋진 왕자님과 춤을 추며 파티를 즐기지만 열두 시 종소리가 울리기 전에 자기 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때가 지나면 모든 것이 추레한 현실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삶은 그런 것입니다. 지켜야 할 것을 지킬 때 우리 삶은 쾌적해집니다. 老子의 말은 우리 삶의 실상을 꿰뚫고 있습니다.
지나치게 사랑하면 반드시 크게 소비하고(是故甚愛, 必大費)
너무 많이 지니면 반드시 크게 잃는다.(多藏, 必厚亡)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知足不辱)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아서(知止不殆)
오래 갈 수 있다(可以長久). [道德經, 44章]
남의 것을 빼앗아 내 배를 불리면 반드시 탈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지나친 욕심은 꼭 화를 부릅니다. 만족할 줄 아는 사람, 그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더불어 살 줄 아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다.
코헬렛은 우리가 삶을 경축하며 살기 위해서는 “근심이 네 마음에서 떠나게 하며 악이 네 몸에서 물러가게 하라”(10)고 충고합니다. 저는 이 대목을 읽다가 슬픔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마음에 내장되어 있는 것임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네 마음에서 근심이 떠나게 하라’ 슬픔과 우울함은 누구 때문에 혹은 무엇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사람을 망쳐놓는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옛사람이 말했습니다. “스스로 망하지 않는 데 누가 능히 우리를 망하게 할 것인가?”(亡我者我也, 人不自亡, 誰能亡之). 옳은 말입니다. 똑같은 여건 속에서도 어떤 사람은 즐겁게 살지만, 어떤 사람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삽니다. 일본의 작가 엔도 슈사쿠가 쓴 회상록 중에 <꽤 잘 살았다>라는 제목의 글이 있습니다. 저는 이 제목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자기 삶을 돌아보며 꽤 잘 살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엔도 슈사쿠는 자기 삶에도 절망과 좌절의 시기가 여러 번 있었다고 말합니다. 큰 수술을 세 번이나 받았고, 신인 작가로 등단했을 무렵 2년 반 동안을 병원에서 지내야 했답니다. 그는 공백기로 인한 좌절감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같은 연배의 작가들이 줄기차게 발표하는 훌륭한 작품들을 병상에서 읽을 때마다, 자신이 독자들과 매스컴으로부터 잊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힘들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자신이 그 좌절과 공백 기간을 꽤 유용하게 활용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그는 그 시절부터 생활과 인생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병에 걸린 것은 분명히 생활상의 좌절이고 실패지만, 그것이 곧 인생의 실패나 좌절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병이라는 생활상의 좌절을 3년 가까이 음미한 덕택에 인생과 죽음, 그리고 인간의 고통과 정면으로 대면할 수 있었다고 회고합니다. 그런 좌절의 시기가 있었기에 세상에서 경험하는 어떤 것도, 인생에서 일어나는 어떤 사건이나 사소한 추억조차도 쓸모없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그는 자기가 “꽤 잘 살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지나친 욕망은 사람의 기운을 약하게 만듭니다. 애증의 마음은 사람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듭니다. 절망과 좌절을 경험했기에 작가는 삶이 고마움임을 알았고 자기 마음에서 슬픔의 쏘는 가시를 제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마음속에서 걱정을 없앤 사람은 죄로 달려가기에 바쁜 자기 육체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장마가 계속되어 날이 축축합니다. 자칫하면 정신까지 우울에 빠지기 쉽습니다. 하지만 오늘을 하나님의 선물로 여기고 충만하게 사는 사람에게는 모든 날들이 보송보송한 기쁨의 날입니다. 진정한 예배는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웃들이 청명한 가을 하늘을 본 듯 마음이 시원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여러분께 묻습니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십니까? 마음속에 새겨두십시오. 다시 시작하는 날입니다. 그러기에 희망에 찬 날입니다. 오늘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늘 새롭게 인생을 시작하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첫댓글 <북방에서 온 사업가> 이야기는 여러 버전으로 많이 들었고 들을 때마다 큰 깨달음을 받았지만 항상 거기까지입니다. 교육 때문인지 결핍 때문인지 미래에 대한 근심 때문인지 즐기고 누리기보다는 저축하고 달려야 마음이 편합니다. "내게 주어진 순간을 아름답게 살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자" 이 결단이 필요합니다. 최선을 다해 사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의지가 되고 집착이 되고 욕망이 되면 아름답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화내고 투덜대고 빈둥대며 모든 것이 헛되다 우울해하며 사는 것도 아름답지 않습니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인정하며 지나친 근심과 욕심으로 피폐하게 만들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입니다.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도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주신 오늘을 감사하며 즐거움과 가쁨으로 채워나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