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命
170917
바람빛학당 바람길 양의진
요즘 따라 구름이 너무 예쁘다. 어느 화가가 그렸을 법한 구름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꿈속에서 가 본 하늘나라 구름들이 고요히 빛을 품으며 나를 반긴다. 십칠 년의 인생 동안 구름은 늘 곁에 있었다. 그리고 또 곁에 있는 것. 글. 구름과 함께 글이란 것도 매일 나와 함께했다.
“여러분!! 그러니 글을 써 봅시다.”
아홉 살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초등학생 글쓰기 공모전’을 연다는 소식을 들으신 선생님께서 학생들 모두 글을 써 보자고 하셨다. 주어진 책을 읽고 소감을 쓰라 하니까 썼던 걸로 기억한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80% 정도 틀렸을까, 생각을 정리하는 법도 몰랐었다. 해서 소감문인데 소감이 안 들어간, 팥빵에 팥이 안 들어간, ‘이게 뭐야’ 하는 그런 느낌의 글이 되었다. 스프링처럼 선생님께 내도 돌아오고 내도 돌아오고를 반복하던 나의 글은 오랫동안 안 감은 머리에 모자 쓴 만큼은 됐다. 그렇게 꾸역꾸역 고치고, 더 이상은 읽기 싫어진 그 글을 공모전에 냈다. 상장도 칭찬도, 난 분명히 냈는데 돌아온 건 없었다. 선명히 기억하는 나의 첫 글쓰기다.
열여섯이 되던 해, 뉴스앤조이 전 대표님이셨던 김종희 선생님이 바람빛학당의 글쓰기 수업을 맡게 되셨다. 선생님은 많이 긴장해 있던 우리들에게 부드럽게 숙제를 내 주셨다. 한 달의 시간 동안 글쓰기 책 두 권을 읽고 각자의 주제로 (책과 연관되어 있어야 했다) 원고지 25~30매 분량의 글을 두 개 써 오라는 것이었다. 솔직히 처음에는 기자 체험을 하는 것 같아서 마냥 즐거웠다. 그래서 빨리 한 권의 책을 후딱 읽었다. 읽곤 끝이었다. 한라산에 오르기 전에 아이젠을 힘들게 꼈는데, 끼고 산을 보니 그만 너무 높아 보여서 그냥 집으로 돌아가 버린 셈이었다. 언젠가 힘과 의욕이 생기겠지 하면서.
마감 날을 삼 일 남기고서 조급해진 나는, 다시 그 높아 보였던 산 앞에 서 있었다. 이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산 주위를 맴돌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마감의 마법이라고 했던가. 그로부터 삼 일 동안,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노트북을 피고, 안경을 착용하고, 무거워진 눈꺼풀을 억지로 올리면서, 땅기는 어깨를 자꾸 움직이면서, 매일 네 시간 기절 같은 숙면을 취하면서, 기자 체험을 혹독히 하면서, 근데 ‘글 쓰는 거 재밌다’ 하면서 그 긴 두 글을 아주 촉박하게 마무리했다. 시간에 쫓기며 마감했던 이 글은 의외로 칭찬을 받았다. 글을 잘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홉 살 때부터 오늘날까지 꾸준히 날적이를 쓰고 수업 소감을 쓰고 국어 공부를 하고 책과 만난 덕분이었다. 이 시간 이후로 글 쓰는 것에 자신감이 생겼다.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수록 글을 잘 쓰는 게 능력이 된다는 생각을 한다.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글을 써서 하고 싶은 말을 더욱 영향력 있게 전할 수 있으니 말이다. 역사와 정치를 공부하면서는 기록의 중요함을 깨달았다. 해서 최대한 꾸준히 날적이를 적고 있다. 매일 공책에 쓰는 것들도 결국엔 다 글 실력에 밑거름이 되니 일석이조고, 하루를 돌아보며 성찰하고 성장할 수 있으니 일석삼조다. 신문을 보면서는 기사 쓰는 법과 정치를 탐구한다. <칼의 노래>, <웃는 남자> 따위를 읽으면서는 표현력을 키워 나갔다. 시가 어려운 나기에 진부한 문장에서 벗어나 더 아름다운 문장, 더 기발한 비유를 찾기 위해 노력 중이다.
아홉 살 나에게 글쓰기는 벽돌 같은 느낌이었다. 틀이 정해져 있고 그래서 딱딱하고 진부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팔 년이 지난 지금, 열일곱이 된 나에게 글은 구름 같아졌다. 항상 다른 구름. 햇빛을 머금어 터질 듯한 구름처럼 뜻이 가득 있는 글, 해지기 전 분홍빛 구름처럼 아름다운 글, 층구름같이 흐릿한 글, 양떼구름처럼 같은 의미가 반복되어 배열된 글, 쌘구름처럼 하고 싶은 말이 선명한 글. 이렇게 다양한 글들이 내가 자판을 두드리거나 펜을 들 때 즐거움을 준다. 가끔 구름이 없는 파란 하늘에는 글쓰기를 멈춰 그 높음에 젖어 들고, 구름이 있는 날에는 오늘처럼 글을 쓴다. 하늘이 있고 구름이 뜨는 한, 나의 글쓰기 명은 영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