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고 성공할려면 자기만의 길을 가라.
1, 발상의 전환으로 자기만의 길을 가므로써 사상 최초로 60戰 60勝 全勝을 낚아낸 무사시의 二刀流
시골에서 중학교를 다닐때는 호롱불에 머리카락을 태우면서 삼국지, 열국지, 초한지, 사기열전, 요재지이, 섹익스피어전집 등을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중 섹익스피어전집은 등장인물이 너무 복잡새서 완주하지를 못했고, 고등학교 다닐때는 일본전국시대의 기록이라고 할수있는 미야모토무사시와 대망(일본제목: 도쿠카와이에야스)를 재미있게 읽었는데 등장 인물이 너무많고 이름도 길고해서 섹익스피어전집을 읽을 때처럼 도표를 그려서 벽에 붙여놓고 이를 보면서 읽었다.
이 때 읽었던 책 중 한때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던 '미야모토무사시[宮本武藏(1584 ~ 1645)]'라는 소설에 '二刀流'라는 새로운 형태의 검법이 등장한다.
그전까지는 칼(刀)이나 劍 하나만 들고 싸웠는데, 칼 두자루를 들고 싸우는 새로운 기술이 나타났다. 발상의 획기적인 전환이 아닐수없다. 즉 二刀를 사용하는 니텐이치류(二天一流)를 창시하고 간류섬에서 사사키 코지로와 겨룬 이야기로 유명한 미야모토 무사시가 나타난 것이다.
그의 오륜서에서는 칼(타치, 우치가타나)은 한 손으로 다뤄야 남은 다른 손을 다른데 쓸 수 있으므로 보다 더 유용하며, 한 손으로만 공격하기 힘들 때에서야 비로소 양손으로 강하게 휘두르라고 권한다. 보다 더 정확하게는 상황에 따라 양손검을 한 손으로 다루는 게 유리할 수도 있고 단검이 유리할 수도 있으며 반대로 난전이나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는 양손에 각각 검을 두 자루 다 쥐는 것이 유리할 수도 있기 때문에 한 가지 방법에 집착하지 말라는 취지이다.
미야모토 무사시는 二刀를 썼다는 것으로 유명한데, 이도를 전문으로 하는 무사시의 니텐이치류는 대+소 조합이라는 설과 대+대 조합이라는 설이 공존하지만, 현재의 니텐이치류는 전부 대+소 조합을 가르치고 무사시도 오륜서 '땅의권'에서 무사가 기본적으로 패용하는 도검구성은 타치와 와키자시라며 대+소 조합임을 언급하고있다.
무사시가 창시했다고 전해지는 니텐이치류, 엔메이류(복원) 이외에 이도를 교수하는 유파는 가토리신토류 정도가 있다.
오륜서에서 무사시가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60여 회 실전을 치렀다고 한다. 이 시절에는 아직 대결에서 호구와 죽도가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실전이란 목검이나 진검으로 싸워서 둘 중 하나가 머리가 터지거나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혹은 죽어야 끝나는 혹독한 승부를 뜻한다. 만약 이런 것을 실제로 60회나 한 번도 지지 않았다면 대단한 실력가였을 것이다. 무사시의 자칭이긴 하지만, 만약 이 실전이라 할 승부가 진짜라고 가정한다면, 그 횟수는 일본 검사 중에 최다이고 그때까지 살아남았다는게 불가사의하다.
당시 일본의 한 검술가는 "무사시의 검술은 귀신의 검술이며, 다른 사람이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미야모토 무사시에게서 나온 유파로 엔메이류(円明流), 니텐이치류(二天一流)와 분파인 니텐류(二天流)가 존재했으며, 엔메이류는 젊었을 때 자기 검술을 자처하고 다닐 적에 쓰던 이름이고, 니텐이치류는 늙어서 다시 정리해서 세운 유파이다. 엔메이류는 계보가 끊어지고 관류등에 일부 남아있지만 니텐이치류는 아직 계승되고 있다. 니텐류도 계승자가 있으나 대외적으로 활동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왼손잡이라서 후학을 길러내지 못 했다는 설도 있다.
이도류로 유명한 무사시지만, 말년에 저술한 오륜서를 살펴보면 '니텐이치류는 긴 대도로도 이기고, 짧은 소도로도 이긴다. 따라서 대도의 길이를 이렇다 저렇다 정하지 않고, 어떠한 무기로도 이길 수 있다는 정신이 니텐이치류의 도인 것이다'는 내용이 있으며, '병법에서는 무기의 효용을 알아야 한다'라는 식으로 서술하는 것으로 보아 니텐이치류는 이도류를 고집하기보다는 상황과 상대에 맞춰 무기를 사용한다는 이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게 올바르다고 생각된다. 오륜서의 '땅의 서'에 보면 각 무기가 쓸모있는 상황과 장소를 써 놓는다. 예로 창과 나기나타는 넓은 곳에서 강하지만 좁은 곳에서 불리하고, 단도는 좁은 곳에서 유리하다라고.
미야모토 무사시와 간류(사사키 코지로)의 대결로 유명한 간류지마(巖流島)는 실제로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시 앞바다에 있는 섬인데, 간류지마에서의 결투 역시 실제로 존재는 했었던 것으로 보이나 그 과정은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무공전에 따르면 미야모토 무사시는 승부를 겨룰 시간을 알리는 파발꾼이 계속 와도 늦잠을 자다가, 일어나서 천천히 아침밥을 먹고서는, 유유자적 노를 깎아 목도를 만든 후에야 비로소 결투장에 나타났다고 한다. 그리고 '칼집을 버렸으니 넌 진거나 다름없다'라는 패기를 시전하고는 간류를 패죽였다고 한다.
한편 동시대의 부젠국(豊前国)의 고쿠라번[小倉藩:당시에는 호소카와(細川)씨]가문의 장로, 모지성(門司城) 성주대리 누마타 노부모토(沼田延元)의 문서『누마타가기(沼田家記)』의 기록은 이것과는 조금 다르다. 여기에서는 무사시와 간류의 제자 사이에 어느 쪽의 병법이 더 우위인가 언쟁을 벌이다 사부 간의 대결로 우위를 가리자로 결판나서 무사시와 간류가 맞붙게 되었는데, 간류가 결투에서 패배한 후에 무사시의 제자들에게 살해되었다고 적혀있다.
여기에는 의문점이 많다.
누마타가기는 전국 시대의 실존 가문인 누마타가(沼田家)에 관한 기록이므로 그 신빙성은 비교적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즉 간류지마 결투와 간류(사사키 코지로)의 실존에 대해 중요한 증거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록을 따른다면 의문스러운 점이 보인다. 엄연히 일대일 결투에서 간류는 혼자 나타난 데 반해 미야모토 무사시는 혼자 오지 않고 4명의 제자들과 같이 왔다는 점, 스승이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제자들이 간류를 죽일 충분한 이유가 없다는 점, 게다가 미야모토 무사시가 승자임에도 불구하고 섬의 이름이 간류지마가 되었다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차라리 승자의 이름을 딴 무사시지마가 되었다면 더 납득이 갔을 수도 있다.
이에 관해서 간류지마가 있는 시모노세키 지방에는 한 가지 색다른 일화가 전승되고 있다.
"무사시는 제자를 여러 명 거느리고 먼저 후나지마로 건너갔습니다. 다수에 혼자서는 불리하고, 또 혼자서는 당해낼 수 없으니 돌아가 주십시오." 라고 어부들이 만류했지만, 간류는 이렇게 말하며 억지로 후나지마로 건너갔다.
"무사는 두 번 말하지 않는다. 굳게 약속한 이상, 오늘 건너가지 않는 것은 무사의 수치, 만약 다수로서 나를 치려 한다면 부끄러워해야 할 것은 무사시다."
어부가 말했던 대로 무사시의 제자 4명이 가세해, 마침내 간류를 죽였다. 그러나 간류를 말렸던 어부들이 간류의 의로운 마음에 감동해 묘를 세웠고, 지금처럼 간류섬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사실이든 정확한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어느 정도 의심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도쿄박물관에 보관된 일본에서 제일 오래된 무술비전인 아이스카게노류모쿠로쿠(愛洲陰之流目録, 1576)에도 이도를 든 그림이 있고,
야규신카게류의 쿠미타치에서도 이도가 등장하며 나기나타 유파로 알려진 텐도류(天道流)는 중+중 이도를 사용한다.
명나라 장군인 胡宗憲의 '주해도편(籌海圖編) 왜국사략'에 의하면 쌍검술이 왜구의 간교한 술수 중 하나이며 위를 공격하는 척 속이면서 아래를 공격하기 때문에 방어하기 어렵다고 한다.
결국 무사시의 발상의 전환인 쌍검술이 중국인들까지 떨게 만들었으니 무사시의 자기만의 길은 성공을 거둔셈이다.
2, 중국, 일본 한국의 세기의 바둑 대결에서 스승
"세고에 겐사쿠"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바둑으로 '전쟁의 神'이 된 조훈현
1988년 중국의 재벌 "잉창치"는 국제적인 바둑대회를 구상하고 상금으로 거금 100만 달러를 내걸었다
당시 바둑은 일본이 제패하고 중국이 뒤따라 가는 모양새였는데 자존심 상한 중국은 '네웨이핑" 이라는 불세출의 바둑 천재를 앞세워 일본을 누르고자 했다.
그리고 그 당시 '한국은 실력 차이가 너무 난다' 라는 이유로 일본과의 바득 교류전 조차 거절 당하는 바둑 약소국이었다.
물론 세계 대회였기 때문에 한국도 초대를 받을 수는 있었지만 한국에 주어진 참가권은 단 한장뿐
이었다.
이때 참가한 단 한 명의 한국기사 '조훈현'.
그는 혈혈단신으로 일본과 중국의 기사들로부터
연달아 승리를 따냈고 마침내 중국의 네웨이핑까지 꺽어버리며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대회를 주최한 잉창치는
"도대체 저 한국놈은 뭐냐" 하며 화를 내었지만 최대 규모의 바둑대회 "응씨배"의 첫 우승은 바둑의 약체국인 한국에서 온 무명의 조훈현이 거머쥐었다.
사람들은 그를 한국에서 온 戰神, 즉 전쟁의 신이라 불렀다. 그를 시작으로 한국은 순식간에 바둑 약체국에서 바둑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고 수년간 일본과 중국은 한국을 단 한번도 넘어 서지 못했다
그의 특이한 점은 그의 스승 "세고에 겐사쿠"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바둑이라는 점이다.
소위 청출어람이다.
그가 키워낸 한국의 바둑 천재 "이창호" 또한
스승인 조훈현과는 전혀 다른 기풍을 보인다.
스승과 제자가 닮기 마련인 바둑에서 이는 매우 특이한 사례인데 이는 그만의 철학이 반영된 결과다.
최고의 스승을 만나서
최고의 가르침을 받더라도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지지 않으면 진정한 고수가 될 수 없다.
"과감하게 자신만의 길을 가라. 시키는 대로만 해서는 절대로 최고가 될수 없다. " --- 조훈현
무사시나 조훈현의 사례에서 보듯이
결국, 이기고 성공할려면 남을 따라해서는 안되고 자기만의 길을 가야만 된다는 것이다.
3, 1등을 벤치마깅해서 2등만 하겠다.
반면, 이와는 달리 1등한 사람을 벤치마킹해서 2등을 하는게 개발비와 시행착오에 따른 수업료를 내지 않아도 되고 도전 받을 필요도 없고, 안전하기에 더 실리적이라는 견해도 있다.
수출만하던 대우실업에서 근무할 당시인 1985년 '하이파이브'라는 국내 내수판매 의류브랜드를 런칭하고 패션Design 공부를 하고자 당시 아주 유명했던 도코에 있는 반탄디자인연구소로 해외연수를 갔었는데, 이때 LG, 웅진 그룹 등 재계의 유명오너들도 함께 같이 갔었다.
나는 그때 당시 웅진그룹회장이던 윤석금씨와 같은 조로 한달간 합숙연수를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생겼다.
이때 웅진의 윤회장이 나에게 한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저는 절대로 1등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1등을 할려면 엄청난 개발비 투자가 들고, 또 성공유무도 확실치 않기에 시행착오에 따른 수 많은 수업료를 내야 하며, 늘 2위업체로 부터 도전 받아야 하기에 불안하다.
반면, 2등은 1등이 걸어갔던 길을 벤치마킹하면 되기에 개발비와 시행착오에 따른 수업료를 내지 않아도 되고, 또 도전 받을 필요도 없고, 안전하기에 더 실리적이고 안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리아나 화장품도 1등을 하지 않고 2등만 할 것이다."라고 했다.
사실 그의 말도 일리가 있다.
나는 회사생활할때 늘 남이 안갔던 길없는 황무지를 개간해서 길을 닦으면서 도로 포장하는 등 길을 개척하는 일만 했는데, 그 때 보니 이게 보통 힘드는 작업이 아니었을뿐만 아니라 개발비용과 수업료가 엄청 들어갔었기에 웅진 윤석금씨의 말도 일리가 있다라고 생각되었기도 했다.
결국 남이 안간 길을 모험하면서 개척해서 1등을 할 것인지, 아니면 1등을 따라해서 적은 수업료로 안전하게 갈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기는 하나, 이기고 성공할려면 자기만의 길을 가야 한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할 것이다.
좋은글입니다
오늘도
좋은날 되세요
출석합니다~
감사합니다.
고운 날 되세요
사랑합니다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행복하세요
하루가 빨리도 지나가네요~~
번개여~
목요일 출석합니다~
감사합니다.
고운밤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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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고운밤 되세요
좋은글 대단히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감사합니다.
행복한 저녁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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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불금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