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기, 나라는 점차 쇠약해지고 많은 문제점들이 드러나고 있었다. 권문세족과 신진사대부들 사이의 대립은 점점 심해지고 원나라의 쇠퇴와 명나라의 등장속에서도 갈등했다. 이제 사람들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과연 나라를 그대로 지켜나갈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나라를 열 것인가? 이성계李成桂는 신진사대부들과 결탁하여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이성계는 조선의 입장에서 본다면 혁명이었지만 고려와 최영의 입장에서는 반란을 일으킨 셈이었다. 과연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처음에 최영과 이성계는 고려왕조의 무장으로서 같은 길을 걸었다.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고 우왕 때 불법을 자행하던 이인임 일파를 제거하는 데에도 뜻을 같이하였다. 그러나 곧 전혀 다른 길을 갔다. 최영이 대체로 권문세족의 이익을 대변하는 쪽으로 갔다면 이성계는 신진사류들과 뜻을 같이 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첫째는 나이 때문이었다. 이성계는 최영보다 나이가 19년 아래였기에 최영보다는 훨씬 진보한 생각을 가졌고 덕분에 새롭게 떠오른던 신진사류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둘째는 그들의 출신 배경이었다. 최영은 고려 전기부터 문벌을 형성한 철원 최씨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이성계는 토착적인 기반 없이 정계에 진출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이성계는 중앙에 큰 기반이 없던 신진사류들과 뜻을 같이 할 수 있있다. 또 군사적인 면에서도 최영의 군사력은 주로 국왕의 친위군대인 우달치가 중심이었던 반면에 이성계는 그의 선대가 동북면 지방에서 거느려왔던 가별초와 지방민들을 주요 기반으로 하였다. 따라서 최영은 근왕勤王적인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었고 이성계는 왕들을 폐위하면서까지 자신을 옹호했던 것이라 생각한다.
최영은 국가를 유지하고 보호해야 하는 임무를 띤 군인의 입장에서 본다면 충실한 무장이었다. 또 성공 여부는 둘째 치고라도 명나라에 굽히지 않고 오히려 정벌하고자 했다는 면에서는 그의 확고한 자주성과 용맹성을 높이 살 수 있다. 그러나 당시의 부패하고 모순된 현실을 개혁하려 하지 않았으며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을 갖지 못했다는 측면에서는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 마찬가지로 이성계의 경우 하극상을 일으킨 반역자로 볼 수 있지만 당시의 모순된 현실을 개혁하고 나름대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 있으리라. 내부적인 안정이 있어야 밖으로도 뻗을 수 있는 법. 그래서 예로부터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하지 않았던가.
김갑동 지음 <옛사람 72인에게 지혜를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