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 속의 진도' '민속의 보고'로 불리는 진도군 지산면 소포리 하면 '어머니 노래방'을 운영하는 한남례 할머니를 떠올리지만 정작 소포리 소리의 좌장(座長)은 바로 이 박병임씨다. 1921년 소포리에서 나고 자랐는데, 할아버지가 스물 예닐곱 청년일 적만 해도 이 마을은 '하루 들 천냥 날 천냥'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돈이 많은 부촌(富村)이었다. 염전이 성했을 때 이야기다. 외항선이 뭍에 닿을 때 여기를 꼭 거쳐야 했으니 사람과 물건들로 바글바글했고 하숙집들도 수두룩했다고 한다. 이만한 '물적 토대'를 갖춘 예향 진도 마을에 소리꾼들은 또 얼마나 넘쳐남을 것인가.
*이즈음 진도에서는 영화 <휘모리>에 나오는 이임례 명창의 소리 스승이자 부군인 이병기 명창, 명고(名鼓) 김득수 등이 활약하고 있었다. 청년 박병임은 이병기 명창의 제자였다. "스물 일곱 때부터 3년동안 시한(겨울) 내내 병기씨 선생님한테 소리를 배웠지. 판소리 중에서 좋은 대목을 솔찬히 배왔어." 옛날에 뭘 배웠는지 가물가물하다면서도 그 시절을 추억하는 박병임 어르신의 표정은 소년처럼 밝다. "그때만 해도 소리 배울 때 천시 많이 받았지. 같이 배웠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고, 나는 그 뒤로 소리 할 일 없이 농사짓고 살았지. 누가 장단 쳐주는 사람도 없고..."
*이렇게 평범한 농부로 살아가던 박병임 할아버지가 '무대에 데뷔'한 것은 작년. 해년마다 진도에서 열리는 <전국 남도민요 경창대회>엔 나가보라고 누가 권했던 모양이다. "그런 대회가 있다니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번 가보고 싶더라. 낙선만 안되면 쓰겄다 싶은 마음으로 대회를 사흘인가 남겨놓고 육자배리를 해봤지." 지금도 수준급 소리꾼과 고수들이 드글거리는 소포리에서 전주대사습 판소리고법 분야 수상자인 박금영씨와 장단을 맞춰본 박병임 선수. '왕년의 가락'은 죽지 않았다! 박할아버지는 짧은 준비기간을 극복하고 당당히 노장부 최우수상을 받는 기염을 토한다. 수상의 후광일까. 소포리 사람들이 박병임 어르신의 문하(門下)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생각도 안하고 있는데 와서 갈쳐주라고 해쌌더라고. 그냥 썩이기는 아깝고 그래서 시한이면 선생질을 하고 있제." 소리 배운 삯으로 '술 한병'을 받는다는 어르신이 소포리에 '도제 시스템'을 만들게 낸 내력 이야기다.
*우리가 박병임이라는 분을 만나게 된 계기는 작년 가을 작심하고 소포리 민속들을 담으려고 중계차 녹화를 할 때다. 지금은 잊혀진 판소리 마당 가운데 하나인 <숙영낭자전>을 갖고 있다길래 솔깃해서 모셨던 것이다. 정작 당신은 그때 생전 처음으로 카메라 앞에 서봤다고 했다. 소포리 경로당에는 이런 분들이 고즈넉하게 살아가고 있다. 남도민요의 최고봉으로 불리면서도 정작 "고나헤~"하고 나면 다음 가사를 따라부르기 어려운 <육자배기>. 그 원형을 갖고 있는 박병임 할아버지 같은 분들이 앞으로도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고, 그 제자들이 오래오래 남도민요의 원형을 이어주었으면 좋겠다
<윤행석의 블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