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에 아름다운 수(繡)를 놓는 작업(釋評)
윤슬 문현정 시인
글 김광한(소설가 문학평론가)
시인(詩人)이란 무엇인가를 알기 전에 시(詩)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넘쳐나는 시인들의 숫자, 그들이 쏟아낸 수많은 언어들이 시집(詩集)을 통해,거리 공원의 늘어선 팻말속에,오늘도 열리는 시화전 행사속에, 지하철 승강구의 유리창을 통해 우리들의 눈을 현란하게 만든다. 과연 어떤 시가 , 어느 시어(詩語)가 사람들의 메마른 가슴에 박혀 감정의 물결을 만드는지 알수없는 시인들의 범람시대에 살고 있다.시란 문자로 이어진 짧은 시어로 이뤄진 어휘(語彙)모음에 담은 개인의 희로애락(喜怒哀樂)과 같은 감정을 표출한다고 정의한다면 문자를 알고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시인이 될 자격이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시인과 시인이 아닌 사람과의 모호한 경계는 눈에 보이는 물질과 외부를 중요시하는 속인(俗人)보담 내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넉넉한 감정의 소유란 것과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우리가 일반적으로 외부에 나타나는 사람의 존귀함을 권력과 물질의 과다 그리고 지식의 상징읜 교수 학자군들이 아닐까요?그러나 이것들보다 더 귀중한 것은 외부로 보이지는 않지만 정신의 고상함과 영혼의 단단함 그리고 사랑으로 뜨거워진 가슴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는다.
이웃 나라 일본의 경우, 권력과 부의 상징인 국가공무원, 경찰 자위대원,그리고 먼저 시대 사무라이들에게 인간의 둔중함을 나타낸 것이 바로 시(詩)라는 형태의 하이쿠(俳句) 단카(短歌)와까(和歌) 등이었다.같은 경찰이라도 하이쿠(5.7.5로 이뤄진 정형시)를 할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인간을 얼마나 이해하는가 하지 않는가의 차이와 같아서 많은 사람들이 하이쿠를 공부하고 이를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고있다..단카(短歌)시인으로 국민적 추앙을 받는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琢木)같은 요절한 시인은 우리나라의 김소월과 같이 우러러 보고있다.일테면 정신이 뒷바침하지 않는 겉테보다 정신이 중심이 된 인간이야말로 진정한 사람의 값어치란 것이다.프라다 가방을 들고 시화전에 참석해 남들이 알지 못하는 용어를 뒤섞어 사랑을 노래한 사모님 시인들,그리고 여러 출판사에서 급조(急造)한 많은 시인들의 질서없는 문장,재래식 한복을 입고 특출하게 시인티를 내는 체격좋은 자칭 시인들, 이들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순결한 영혼을 훼방했는가,
윤슬 문현정 시인의 시집(詩集) <바닷가에 그려진 오선지>에 상재(上梓)된 일련의 시에서 본 첫 느낌은 바로 인간애이다. 인간을 맨 밑바탕으로 놓고 여기에 시인의 아름다운 희구와 상상을 그려놓은 시들의 모음이다.제 1부 유년의 초상에서는 어린 시절시인 나이또래 사람들이 가졌던 일반적인 감정 이외에 <삼팔선을 긋다>에서는 책상에 옆자리의 친구가 범접하지 못하게 줄을 그어놓고 그것을 삼팔선으로 은유하는 회상을 적었다.민족 분단의 아픔이 어린 시인의 마음에 한이 되어 이웃을 증오로 보는 찢겨진 유년의 상처로 남았던 것이다.그런가 하면 모두가 가난했던 시절, 동심을 잃지 않고 동시처럼 써내려간 한편의 그림같은 시어는 시인의 티없는 순수한 마음이 그려져있다.착하고 여린 시인의 모습을 상상할수가 있다.결코 누구에게 배워서 쓴 시가 아니다.
송편 같은 초승달
예쁘게도 떠있네
어느 사이에 배불리
세월을 먹고 보름달 동동
정월 한가위
풍년을 부르세
도안 어귀에 높이 떠서
우리동네 비추니
<둥근 보름달의 일절>
사모곡(思母曲)에서는 어머니에 대한 가없는 사랑과 한맺힌 이별의 아픔같은 것이 묻어있어 읽는이들의 눈시울을 젖게 한다.불교에서 말하는 애별리고(愛別離苦)처럼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아픔, 그것이 숙명인지 그 숙명을 원망스럽게 생각하는 시인의 또 다른 아픔이 깊게 색인(索引)돼있다.젊은 나이에 사랑하는 가족들과 영원히 이별한 어머니, 그 어머니를 잃고 살아온 세월,이제 어머니가 되어서 생각하는 세상,이를 끈끈하게 맺어주는 것은 사랑이다.
안면도 남면
썰물에 띄우는 아픔
그 자리에 주름살 깊게 박히니
얼마나 많은 만남과 사랑을 보냈기에
애끓음음이 깊어 주름패였나
어릴적 포근하던 어머니
잔잔한 미소에 단아한 모습
애처럽게 37년 사신 그리운 어머니
<주름진 갯벌의 일절>
시인이 미처 철들기 전에 세상을 하직한 어머니에 대한 초상,그것은 시인의 삶속에 그리움과 동시에 아픔이란 구렁을 만들었다.시인이 세상을 살면서 결코 떠나지 못할 영상,무엇이 그리 바빠서 가족들을 뒤에 두고 허이허이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는지 이해할 수없는 운명의 사슬이 시인의 남은 생애동안 아픔의 그림자가 되어서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한다.그것은 눈물이다.바닷물이 밀려간 주름진 갯벌을 거닐면서 시인은 무엇을 생각햇을까. 그것이 바로 시로 남았다.
자연에 대한 사랑
무릇 시인이 된 자로서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을 노래하지 않자가 어디있거늘,윤술 문현정 시인의 자연에 대한 사랑은 유별나다.작곡가 비발디의 사계(四季)처럼 문현정 시인의 시속에 사계가 들어있다.시인이 마음이 허전해서 돌아다닌 고향의 모든 발길이 시가 되어서 현존하고 있다.화가가 캔버스에 그림을 집어넣듯이 시인의 시속에 자연을 각인하고 그 자연속에 입맞춤을 한다.<타다 지친 산수화>에서 보듯 시인은 눈에보이는 자연은 모두가 아름답고 이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싶은 소녀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자연속에 들어있는 옛 그림자, 거기에는 사랑하던 사람과 이별하던 사람, 장다웠던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미운 사람은 없다. 미움을 사랑으로 보듬은 시인의 신앙심이 이를 희석시키고있기 때문이다.성서 코린도 전서에 나타난 아름다운 문장, 세상에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이 있으니 이중에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이다.그것을 실천하는 시인이 바로 윤슬 문현정이다.
자연을 보는 눈,일시적인 관광객의 눈이 아니라,진정 조국(祖國), 자신을 낳고 키워준 땅, 그 자연은 바로 어머니의 품이기 때문에 윤슬 문현정의 자연에 대한 사랑은 지극하다.
새털 구름 흘러가는
갈대숲 오솔길
바람이 살래살래 불어
휘청휘청 꺾어질듯
호숫가에 드리워진 그림자
구름넘어 오는 바람이
코끝 간질이는데
코스모스 은빛 호수에
보석되어 찰랑찰랑
<가을 수채화의 일절>
감각적이고 현학(衒學)스런 표현, 그 시어(詩語)하나없이풀어나간 자연 예찬은 마치 조미료 치지 않고 맛을 낸 우리 고유의 음식같아 정감이 간다.남이 써놓은 온갖 좋다는 형용사를 모아뒀다가 자신의 시어로 만드는 도형(盜形)이 아니라 한국인의 토속적인 정서가담뿍 담긴 시어속에 자연이 그림처럼 자태를 뽐낸다.
신앙(信仰)으로 맺은 님과의 약속
평범하고 규격적인 일상이 어느날 암운(暗雲)이 광풍(狂風)처럼 몰아칠때 인간의 모습은 초라해지고 나약해진다.아무도 도움ㅇ늘 주지 못하고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인간은 주님을, 부처님을, 아니면 더 큰 신을 자신의 가슴속에 묻으려한다.윤슬 문현정 시인이 어떤 급격한 신상의 변화가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그의 여러편에 걸친 시속에 그의 신상변화를 유추할 수가 있다.그가 택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이다.예수를 아버지로 호칭할때쯤 그 예수의 손길이 시인의 몸 곳곳에 스며있을 것으로 보인다.
열병으로 식음을 전폐하고
병상에서 신음할 때
새벽 종소리로 나를 일으키셔서
예배당에 이끌어 소망 주시고
나를 살리신 주님
<"성령으로 나를"의 일절>
친구도 가족도 내게 있던 물질도 모두 떠나고 텅빈 공간에 나 혼자 버려져있다고 생각들대 성경속의 <욥>을 떠올려본다.그 욥이 믿었던 것은 하나님,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산정(山頂)을 올라 가는 주님의 모습에 한때 시인은 <키리네의 시몬>을 자처했지만 ㅇ어느날 주님의 도움을 입는 처지가 되었다.그래서 습관처럼 기도를 올리고 한편의 신앙시를 쓰는 것이 일상화 된 요즘, 기쁨의 날을 보낼 수가 있다.믿음은 시인의 방황하는 정신을 질서로 채워주었고 온전한 영혼의 불길을 붙여주었다.그래서 시인의 새벽 기도는 나아닌 남들, 그리고 국가와 민족 이웃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된다.그래서 적지 않은 신앙시를 썼다.기도를 함으로써 성령이 영혼에 깃들고 그 영혼은 시인의 방황하는 마음을 잡아주었다.
사족(蛇足) 이야기
사족(蛇足)이란 뱀에 있지도 않은 다리를 그려넣는다는 뜻으로 쓸데없는 이야기를 말한다.시인의 시를 평가하고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만남이나 평소의 모범적인 습관을 써서 돋보이게하는 것이 오히려 그 시인에게 폐가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특히 시인의 순구한 정신에 국가관이나 애국관 이데올로기같은 것을 붙여놓아서 시인이외의 또 다른 인격체로 만듬은 물론 흠이 된다.
필자는 가끔 서울역이나 시청엫서 행해지는 애국집회에 찬석해서 윤슬 문현정 시인을 만난적이 있다.불의한 세력이 정권을 탈취해서 죄없는 사람들을 가두고 살해해서 이를 묵과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시위를 하는 현장에서 혼자 태극기를 들고 오도커니 뒷편에 서있는 윤슬 문현정 시인은 한마디로 이 불의가 세상을 뒤덮고 있는 암울한 시대의 한송이 꽃이 아닐수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자그마한 몸에 깃든 애국의 열정,불의에 침묵하는 수많은 지식인들,내 조그만 이익에 나라를 내 팽개치는 시인들 소설가란 이름의 위선자들,선과 악을 분별못하는 문학인들,그 무리속에 한 사람의 천사,일찌기 조선조 시대 신사임당의 초충도(草蟲圖)를 병풍에 새긴 자상한 어머니의 마음에 깃든 애국의 열정은 어디서 왔는가. 유관순의 분노 논개의 열정 그리고 뒷바침하는 주님의 목소리가 함께하는 심포니의 주인공같은 생각이 드는 윤슬 문현정 시인,살아온 고통과 외로움의 시간을 상쇄하는 많은 날들이 이제는 주님의 종으로서 오직 착함을 위해, 그 착한 시를 많이 써서 오늘이 불우하다고 생각하는 많은이들에게 샘물같은 은총을 나눠주고 함께하기를 바란다.
글 김광한(소설가 문학평론가)
1944년 서울 출생
1969년 중앙대 문과대 국문과 졸업
한국문인협회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