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무굴제국 샤 자한 황제의 타지마할 건설 - 세계 7대 불가사의
2017. 5. 27.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는 인도 타지마할은 무굴제국 황제인 샤 자한이 아내를 위해 만든 것입니다.
타지마할의 뜻에서도 그 사랑이 묻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계적 예술품을 만들고 왕비에 대한 애정을 간직하려고 했지만 샤 자한 황제의 마지막은 불행했습니다.
다만, 오늘 날 타지마할은 인류의 문화유산이 되었지만 말입니다.
인도의 타지마할 뜻 : 마할의 왕관
인도 '타지마할'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으로 손꼽힙니다.
인도에서 번성했던 무굴제국은 제5대 '샤 자한'황제에 이르러서 최전성기를 맞이하였는데,
인도의 타지마할은 샤 자한이 사랑하는 왕비를 위해서 건설한 것입니다.
샤 자한 황제가 그토록 사랑한 왕비는 '뭄타즈 마할'이었습니다.
타지마할의 뜻을 보면 왕비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애틋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진: 인도 타지마할의 두 연인. 무굴제국의 샤 자한 황제와 문타즈 마할이라고 불리운 바누 베굼.
[인도의 타지마할 뜻 : 마할의 왕관]
샤 자한 황제에게는 5000명의 후궁과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랑해서 결혼한 사람은 뭄타즈 마할 뿐이었습니다.
뭄타즈 마할의 뜻은 '궁전의 꽃'이란 뜻인데
타지마할의 뜻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샤 자한의 정치상의 적인 계모 '누르 자한'이 뭄타즈 마할의 이모였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의 결혼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애틋한 사랑을 지킨 끝에 결국 결혼에 성공합니다.
이후 그들은 17년간의 행복한 결혼생활을 했습니다.
사진: 로미오와 줄리엣같은 사랑의 전설이 있는 인도 타지마할.
뜻은 궁전(마할)의 왕관이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인도의 타지마할 뜻 : 마할의 왕관]
뭄타즈 마할로 불렸던 왕비 '바누 베굼'은 자식을 14명이나 낳았고,
심지어 전쟁터에도 함께 다닐 만큼 샤 자한과 애정이 두터웠습니다.
그런데, 뭄타즈 마할은 아기를 낳다가 39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샤 자한 왕의 충격은 매우 컸습니다.
사후세계에서 다시 만나겠다고 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며칠 새 백발로 변했다는 얘기도 전해집니다.
실제로 샤 자한 황제는 2년간이나 상주가 되어 뭄타즈 마할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합니다.
사진: 세계 7대 불가사의 타지마할 묘지.
왕과 왕비의 묘지는 지상에 가묘가 있고 지하에 진짜 관이 따로 있다. 고급 대리석으로 되어 있다.
[인도의 타지마할 뜻 : 마할의 왕관]
샤 자한 왕은 왕비 뭄타즈 마할이 죽기 직전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추모 궁전을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22년간이나 투자되는 대공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 건축물이 바로 인도의 타지마할입니다.
죽어서도 사랑하려는 남녀의 애정이 묻어 있는 건물인 것입니다.
타지마할 뜻은 "마할의 왕관"이며, 흰두어로는 "ताज महल"라고 합니다.
샤 자한이 건너편에 '검은 타지마할'을 건설하려고 했었다는 일화도 있지만,
공식적으로 발견된 증거는 없습니다.
인도 무굴제국의 샤 자한 황제
인도의 대표적인 건축물 '타지마할'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입니다.
흔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덤"이라고 비유되는데,
인도의 서울인 '뉴델리'의 남동쪽 도시 '아그라'에 여행을 가면 볼 수 있습니다.
인도는 힌두교 국가지만, 이슬람 국가인 무굴제국의 수도였던 아그라는 이슬람 문화가 많은 곳입니다.
아그라의 성벽에서는 세계가 심판을 받고 멸망할 때 샤 자한 왕과 뭄타즈 마할 왕비가
부활할 것이라는 예언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사진: 인도 무굴제국의 제5대 황제 샤 자한은 1600년대의 왕이다.
왕비를 너무 사랑해서 타지마할의 뜻을 왕관이라고 표현했다. [인도 무굴제국의 샤 자한 황제]
인도 타지마할의 뜻과 함께 '무굴제국'과 '샤 자한' 황제에 대해 알아두면 이해가 쉽습니다.
무굴제국은 인도의 마지막 제국이었는데, 1500년대부터 1800년대까지 존재했습니다.
최대 영토는 인도 중북부 대부분이었으며, 현재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도 무굴제국의 일부였습니다.
초기에는 인도 북부 일부에 티무르 제국의 후예가 세웠는데,
티무르는 몽골 제국의 후예이므로 스스로 칭기즈칸의 혈통이라고 자부했었습니다.
사진: 1500년대~1800년대의 무굴제국 최대영토 지도.
인도 북부에서 시작하여 파키스탄, 인도 남부까지 확장했다. [인도 무굴제국의 샤 자한 황제]
힌두교를 지배하며 이슬람이 세운 무굴제국은 처음에는 잔인함으로 공포를 주는 종족이었습니다.
하지만 황제들은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고 문학을 사랑하던 의외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인도 무굴제국의 제5대 황제인 샤 자한 황제는 건축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타지마할의 뜻처럼 사랑하는 왕비를 위하여 약속했던 엄청난 건설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최강의 전성기였지만 초호화 자재와 고급 인력을 대규모로 동원한 것은
나라의 번성을 흔드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진: 샤 자한은 세계의 왕으로 불렸으며, 왕비 뭄타즈 마할 뜻은 궁전의 꽃이고,
타지마할 뜻은 궁전의 왕관이다. [인도 무굴제국의 샤 자한 황제]
샤 자한의 뜻은 "세계의 왕"이란 뜻이고 타지마할의 뜻은 마할의 왕관인 것처럼,
건설공사는 강력하고도 거대하게 추진되었습니다.
그러나 정사에 무관심한 샤 자한으로 인해 정치는 더 어지러워지고,
퍼부어지는 자금으로 국가 경제는 휘청거렸습니다.
마침내 그 아들인 '아우랑제브'는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 샤 자한을 탑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아들에 의해 폐위당한 샤 자한은 죽을 때까지 갇혀 살아야 했습니다.
아우랑제브는 아버지의 장례식도 치러주지 않았지만, 뭄타즈 마할 곁에 안장할 수는 있게 해 주었습니다.
타지마할, 세계 7대 불가사의인 이유
인도 타지마할이 너무나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는 것에는 누구도 다른 의견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타지마할이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들어가는 것일까요?
세계의 왕이라 불렸던 황제의 왕비를 위한 왕관이라는 것이 타지마할의 뜻이니,
샤 자한의 자부심도 높은 건축물입니다.
심지어 샤 자한은 타지마할 보다 더 아름다운 건축물을 짓지 못하도록
타지마할을 만들어낸 장인들의 손목을 잘랐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입니다.
사진: 인도 무굴제국의 수도였던 아그라에 있는 타지마할.
뜻처럼 화려한 왕관이 되지 못하고 샤 자한 왕은 불행하게 죽었다. [타지마할, 세계 7대 불가사의인 이유]
타지마할이 세계 7대 불가사의인 이유는 그 아름다움 외에도 규모와 방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폭 350m, 길이 580m의 크기를 가진 이 무덤은 무려 22년간이나 지어졌으며,
2만 명 이상의 인력이 동원되었습니다.
또한 완벽하게 대칭을 이루는 수학적 완성도를 보였으며,
주변 경관과 어울리는 것까지 고려된 최고의 기획물이었습니다.
더불어 이슬람교와 힌두교 문화가 동시에 어우러지는 건축디자인의 특징도 남다른 점입니다.
(사진: 인도 타지마할을 지은 이유는 왕비의 죽음을 기리기 위한 것이다.
지상에서 관을 볼 수 있지만, 진짜 묘는 지하에 안장되어 있다. [타지마할, 세계 7대 불가사의인 이유]
오로지 왕비를 위한 사랑으로 지어진 타지마할은
페르시아, 이탈리아 등 세계 각지의 유명 기술자들을 모두 불러 모았으며,
아주 먼 곳에서 최상의 대리석을 운반해 왔고,
우즈베키스탄, 프랑스 등에서까지 진귀한 보석을 가져와서 치장했었습니다.
원근법을 이용해서 멀리서도 직선구조로 보이게 하였고,
지진이 일어나도 13000톤을 지탱하며 관이 있는 쪽으로는 무너지지 않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야말로 기하학의 정석을 구현한 건축물인 것입니다.
사진: 아름다운 정제미, 수학적인 좌우 대칭, 섬세한 조각, 주변과의 어울림 등
인도 타지마할은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타지마할, 세계 7대 불가사의인 이유]
샤 자한 황제의 왕비는 뭄타즈 마할로 불렸고 그 뜻은 궁전의 장미입니다.
그리고 인도 타지마할의 뜻은 마할의 왕관이라고 합니다.
즉 '마할'은 힌두어로 "궁전"을 의미하므로 타지마할의 뜻은 "궁전의 왕관"이 됩니다.
이렇게 봤을 때, 샤 자한은 왕비인 바누 베굼을 왕국 그 자체로 생각했었나 봅니다.
황제이기 보다 한 남자로 영원히 사랑하려던 샤 자한의 욕심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건축물을 남기고 불행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국가도 잘 되고 사랑의 끝도 행복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으니,
고려 말 공민왕의 일화도 떠오르는 타지마할입니다.
무굴제국…타지마할의 저주
아틀라스뉴스 김현민 기자
2023.01.11
5대 샤자한이 황후를 위해 만든 무덤…아들에게 강제 퇴위후 아내 곁에 묻혀
인도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관광명소가 타지마할이다.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무굴왕조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순백색의 대리석으로 장엄하게 꾸며졌으며,
입구엔 수로가 조성되었고, 좌우 대칭의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한다.
궁전인줄 착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무덤이다.
무굴제국의 제5대 황제 샤자한(Shah Jahan)이 황후 뭄타즈 마할(Mumtaz Mahal)을 추모해 만들었다.
건축기간만 22년이 걸려 1648년에 완공되었다.
무굴제국은 물론 이탈리아, 프랑스, 투르크, 페르시아의 외국 건축가와 기술자들이 불려오고,
기능공 2만명이 동원되었다. 최고급 대리석과과 붉은 사암은 인도에서 조달되었고,
궁전 내부를 장식한 보석은 이집트, 중국, 티베트, 투르크, 미얀마 등 세계 각지에서 수입되었다.
이 무덤은 사랑의 금자탑으로 알려져 있다.
황제가 사랑하는 황후의 영생을 기려 만든 사후의 집이다.
황후가 그 집에 먼저 들어가고 황제는 나중에 들어갔다. 살아서의 사랑이 죽어서 이어졌다.
인도의 윤회 철학을 이슬람 묘지에 실현한 것이다.
하지만 무덤을 만들어준 샤자한의 인생은 동화 속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는 냉혹하고 잔인했으며, 그의 인생도 비참했다.
그는 부인 뭄바즈 마할이 죽은 후 타지마할의 저주에 휩싸여 말년을 보냈다.
샤자한의 왕자 시절 이름은 쿠람(Khurram)이었다.
10대였을 때 아그라 궁궐에서 열리는 축제에서 아주만드 바누라는 한 살 아래 소녀를 만나 첫눈에 반했다.
그의 아버지는 황후 누르자한의 오빠 아사프 칸으로 무굴의 실세 장군이었다. 일석이조였다.
예쁜 여자와 결혼도 하고 장인의 힘을 이용할수 있는 기회였다.
스무살이 되던 해 쿠람은 이 소녀와 결혼했는데, 그녀가 뭄타즈 마할이다.
쿠람 왕자는 권력욕이 강했다. 그의 뒤에는 장인이 든든하게 버텼다.
그는 경쟁자인 형 쿠스라우 왕자를 살해했다. 아버지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가 용서를 빌고 목숨을 건졌다.
아버지 자한기르의 임종이 가까워지자 왕자의 난이 격화되었다.
황후는 샤르야르 왕자를 밀었는데, 황후의 오빠 아사프는 사위 쿠람을 밀었다.
자한기르가 사망하자 샤르야르가 황제에 올랐으나 장인이 황제 즉위를 보류시키고
사위가 수도로 올라오길 기다렸다.
쿠람은 군대를 이끌고 수도로 들어와 무력으로 황제 자리를 차지했다.
황제가 된 후 쿠람은 경쟁자였던 동생 샤르야르 왕자의 눈을 멀게 해 감옥에 가두고
형과 동생, 삼촌, 조카들을 모조리 죽였다. 아버지보다 더 큰 권력을 행사했던 계모 누르자한을 유배보냈다.
그러던 쿠람이 황제에 오른 시기는 1628년 36살이었다.
샤자한은 황후를 끔찍이 사랑했다. 둘 사이에 자식이 열넷으로, 아들 여덟, 딸 여섯이었다.
그는 전쟁터에도 아내를 데리고 다녔다.
즉위한지 3년째 되던 1631년, 샤자한은 데칸고원으로 원정길에 나섰다.
뜨거운 여름, 데칸의 천막은 숨도 쉬기 어려웠다. 황후는 열네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
딸을 낳았다. 하지만 황후는 산후후유증으로 죽음을 맞았다. 나이 38세였다.
아내를 잃은 샤자한은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전쟁을 중단하고 회군했다. 오랫동안 정사를 보지 않았다.
뭄타즈 마할은 죽기 전에 자기를 기억하기 위해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샤자한은 아내의 시신을 수도 아그라로 가져와 야무나 강가에 아름다운 무덤을 만들었다.
그는 무덤의 이름을 “선택된 자의 거처”라는 뜻으로 타지마할(Taj Mahal)이라고 했다.
샤자한 시기의 무굴제국은 전성기를 구가했다.
화려한 무덤을 짓기 위해 막대한 국가재정이 투입되었다.
당시 돈으로 500만 루피나 소요되었는데,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0억 달러에 이른다.
이 정도는 무굴 제국에 큰 돈이 아니었다.
당시 유럽은 처참한 30년 전쟁(1618~1648)의 와중에 있었다.
유럽 각국이 인도산 화약을 사가는 바람에 돈이 흘러 넘쳤다.
중국은 명청 교체의 혼란한 시기였다.
타지마할은 당대 최고의 국력을 보유한 무굴제국의 상징이 되었다.
샤자한은 수도를 아그라에서 델리로 옮겼다. 아그라는 도시가 팽창해 길이 비좁았다.
인구가 팽창해 황제가 코끼리를 타고 장엄한 행렬을 펼칠수 없었다.
델리는 무굴제국에 앞서 300년간 다섯 술탄국의 수도였다.
황제는 구도시를 개조해 신도시로 만들었다.
수도 이전은 1638년에 발표되어 10년간 공사를 했다.
1648년 공사를 마쳤을 때 델리는 세계적인 도시가 되었다.
당시 인구 20만이 넘는 도시가 인도에만 9개나 되었는데, 유럽에는 3개에 불과했다.
델리는 1857년 무굴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200년간 수도로서 역할을 다했다.
샤자한의 가장 큰 걱정은 사랑의 씨앗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었다.
황제의 자리는 하나인데 황제가 되려는 아들은 많았다.
딸들도 아버지의 애정을 독차지하려고 서로를 견제했다.
무굴제국엔 장자계승이란 원칙이 정립되어 있지 않았다.
자신도 형제 싸움에서 승리해 황제가 되었기에
그는 아들이 더 크기 전에 교통정리를 해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일찌감치 자신의 후계자로 장자인 다라시코(Dara Shikoh)를 지정했다.
다른 아들들이 아버지의 방침에 반발했다.
반발한 아들은 샤슈자, 아우랑제브, 무라드였다. 왕위계승전에 4파전이 벌어진 것이다.
딸들도 편이 갈렸다.
죽은 어머니를 대신해 왕실 일을 보던 자하나라는 다라시코의 편이었다.
둘째 딸 로샤나라는 아버지가 언니만 이뻐하는 것에 질투를 느끼고 야심만만한 아우랑제브를 지지했다.
아버지 샤자한은 아들 가운데 아우랑제브를 가장 싫어 했다.
그는 자신이 죽기 전에 아우랑제부를 제거할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다라시코와 짜고 아우랑제브에게 편지를 보내 델리로 오라고 했다.
셋째 아들이 수도로 오면 감옥에 가두고 죽일 생각이었다.
이 음모를 로샤나라가 알아채고 아우랑제브에게 델리로 오지 말라고 일러주었다.
다라시코는 증조할아버지 악바르를 닮아 모든 종교에 관용을 베풀자는 생각을 가졌다.
그는 이슬람과 힌두교의 공통점에 관심을 가졌고 종교적 화해를 역설했다.
정통 무슬림들은 황태자의 종교적 견해에 우려를 표시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아우랑제브는 독실한 무슬림이었다.
그는 힌두교를 비롯해 이교도들이 제국 내에 번성하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이런 종교적 갈등이 형제간 권력투쟁을 부채질했다.
1658년 샤자한이 병이 들어 맏아들 다라시코에게 섭정을 맡겼다.
그러자 세 아들이 아버지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일제히 궐기했다.
샤슈자는 벵갈에서, 무라드는 구자라트에서 무기를 들었고,
아우랑제브는 데칸에서 일어나 무라드와 연합했다.
아우랑제브와 무라드의 연합군이 델리를 공격했다.
다라시코가 이끄는 군대가 반군을 제압해 동생들의 군대가 밀려났다.
이때 첩자가 다라시코에게 코끼리에서 내려 말을 타고 반란군을 추격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말을 듣고 다라시코는 말로 갈아탔는데, 그때 다라시코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병졸들이 코끼리를 보니 대장이 없었다. 다라시코의 군대는 빠른 속도로 붕괴되었다.
무라드와 아우랑제브는 전세를 역전시켜 쿠데타에 성공했다.
아우랑제브는 아버지보다 더 잔혹했다. 그는 함께 싸운 무라드를 구금했다.
벵갈의 샤슈자는 아우랑제브에 패해 버마로 도주하다가 살해되었다.
아우랑제브는 아버지에게 퇴위를 요구했다. 샤자한은 강제로 퇴위당한채 구금되었고,
아우랑제브가 꿈에도 그리던 황위에 올랐으니, 무굴제국 제6대 황제다.
아우랑제브는 차마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는 맏형 다라시코를 죽이지 못했다.
누나 로샤나라는 다라시코를 죽이라고 아우랑제브를 압박했다.
동생은 형 다라시코를 더러운 코끼리에 태워 델리 시내에 구경거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나선 겁에 질린 조카들이 보는 앞에서 형을 죽이고, 머리를 잘라 아버지에게 보냈다.
아버지는 대경실색했다. 아우랑제브는 야차 그 자체였다.
다라시코의 시체는 2대 황제 후마윤의 무덤에 매장되었다.
2020년 인도 정부는 다라시코의 유해를 찾기 위한 고고학적 발굴에 나섰는데,
후마윤 무덤에서 나온 140명의 유골 가운데 다라시코의 것을 구분하는데 실패했다.
샤자한은 아들에게 황위를 빼앗긴 후 과거 수도 아그라의 성에 유폐되어 8년을 더 살았다.
그는 아그라 성의 창문 너머로 타지마할을 바라보며
먼저 간 아내를 그리며 남은 인생을 슬픔과 후회로 보냈다.
그의 옆에는 맏딸 자하나라가 시중을 들었다. 1666년 1월 그는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살아 생전 타지마할 건너편에 검은색 무덤을 만들 계획을 세웠으나, 자신의 무덤을 만들지 못했다.
30년간 대제국의 황제를 지낸 샤자한은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채 아내의 곁에 누웠다.
http://www.atla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6087
첫댓글 역사 공부를 잘 해서 감사합니다 _()_
네 감사합니다
저도 이번에 많이 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