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는 삼각지’ 노래로 유명한 동네
서울 용산구 삼각지에 공유사무실을 한 좌석 얻어서 앞으로 자주 가게 됐다. 서울시에서 활동가들에게 제공하는 ‘공익활동공간 삼각지’에 입주하게 된 것이다. 공유공간은 삼각지역 용산초등학교 뒤 트리스퀘어 지하 1층 전 층을 사용해서 넓고 쾌적하다. 문화지평을 비롯해 단체와 개인 등 29개 활동 단체가 입주해 서울시민을 위한 공익활동에 대한 공간 지원을 받는다.
문을 열었지만 코로나19로 인해 정상적 운영은 어려운 상태다. 일상이 정상으로 돌아오면 ‘공익활동공간 삼각지’는 24시간 운영되면서 활동가와 공익단체들의 열기로 뜨거울 전망이다. 이 지역을 예전엔 주로 맛집 탐방으로 많이 다녔다. 맛으로 이름난 저력 있는 노포가 많은 곳이다. 물론 맛집 이전에 우리가 알아야 할 역사를 되짚어보면 그리 가볍게 다닐 공간은 아니다.
후암동부터 남영동, 삼각지로 이어지는 공간은 민간의 영역이기보단 군대의 영역, 그리고 외세의 영역이었다. 예부터 삼각지를 포함한 용산지역은 한양과 포구를 연결하던 지역이다. 수운(水運)을 통한 물류가 용이해서 일찌감치 군 주둔지와 보급기지로 많이 활용됐다.
조선 말기부터 내리 외세가 점유한 땅
▲ 미7사단사령부(옛 일본 조선군사령부) 일대 전경.
처음 외국 군대가 주둔한 것은 고려 때 원나라 군대다. 고려를 침략하고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원나라는 용산 일대에 병참기지를 뒀다. 조선 시대 들어서는 임진왜란 때 평양전투에서 패한 왜장 고니시가 가토가 이끄는 군대와 합류한 후 용산 원효로, 청파동 일대에 잠시 머물렀다. 조선말에 벌어진 임오군란 때는 명성황후의 요청으로 들어온 청나라 군대 3000여명이 이 일대 주둔했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청나라 군대가 머물던 용산 일대에 주둔했다. 1905년 러·일전쟁까지 승리한 일본은 만주와 한반도 지배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용산 일대를 거대한 군영지로 만들었다. 조선 주둔 일본군 사령부와 조선총독부 관저, 일본 20사단 사령부가 설치됐다. 이와 더불어 일대는 군납을 위한 일본 민간인들까지 속속 터를 잡았다. 지금도 이 지역에 일본식 문화주택이 많이 남아 있는 이유다.
군납을 위한 각종 공장이 들어섰고 민간인들을 위한 시장이 생겼다. 특히 일본은 서양식 과자를 일찍 받아들여 제과 산업이 발달했고 군납으로 대량 납품됐다. 그 때문에 대형 제과 회사가 용산과 삼각지 일대에 몰려 있었고, 해방이 되면서 적산으로 불하됐다. 해태제과는 해방 직후 일본인이 경영하던 영강제과 직원이었던 박병규 씨 등 4인이 인수하면서 탄생됐다.
해태제과는 제과업 이외 몸집 불리기에 나서서 한때 재계 24위까지 올랐으나 국제통화기금(IMF) 지배를 받는 외환위기 때 해체됐다. 롯데제과, 오리온에 이어 제과 부분 3위인 해태제과는 외국인 투자자에게 팔렸다가 2005년 4위인 크라운제과에 인수돼 지금의 크라운해태가 된다.
오리온도 일본인이 운영하던 풍국제과가 뿌리다. 오리온의 모태인 동양그룹 창업주 이양구 회장은 풍국제과를 사들인 후 동양제과공업으로 이름을 바꾸고 둘째 딸인 이화경 오리온그룹 부회장과 사위인 담철곤 오리온그룹 회장에게 물려줬다.
오리온은 풍국제과가 있던 자리에 본사와 공장이 있다. ‘공익활동공간 삼각지’와 철길을 두고 마주 보고 있다. 남영 아케이드는 일제 때 만들어진 상설시장으로 지금도 일부 시장기능을 하고 있다. 요즘은 유용욱바베큐연구소가 입점해 핫플레이스로 뜨고 있다.
해방이 되면서 용산의 일본군 병영은 미군 제7사단이 잠시 머물다가 철수했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북한군이 지휘소로 사용하다가 미군이 다시 들어와 주둔했다.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그해 8월 15일부터 미군은 ‘주한미군’이란 이름으로 아예 눌러앉게 된다.
1990년 6월 용산기지 이전 한·미 기본합의서와 양해각서 체결을 시작으로 2003년 한·미 정상 간 용산기지 이전 합의를 계기로 급물살을 탄다. 2004년 용산 기지 이전 협상 국회비준을 거쳐 2005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도시공원 조성 발표와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2007년 ‘용산공원조성특별법’이 만들어졌다. 이듬해 1월부터 법이 시행됨에 따라 지금까지 긴 호흡으로 공원 조성이 차분하게 추진되고 있다.
한때 서울 명물이던 삼각지 입체교차로
▲ 철거 전 삼각지입체교차로의 변천 모습.
용산 일대에서도 삼각지는 특별한 공간이다. 정전협정 후 미군 부대가 장기간 주둔하면서 이들을 위한 상권이 발달했다. 대표적인 것이 미군 장병을 위한 미술품 판매와 초상화 같은 상업 미술이 발달했다. 1960·70년대 호황을 띤 이들 미술품을 키치 아트(Kitsch Art)로 불렀다. 이는 ‘속악한 것, 가짜 또는 본래의 목적에서 벗어난 사이비’를 뜻하는 미술 용어다.
진품을 카피하거나 저급하고 현란한 붓 터치로 유명했다. 특히 미군들이 귀국할 때 초상화를 그려가는 게 유행이어서 호황을 맞았다. 이들의 작품 일부는 미군들에 의해 해외로 팔려나갔고 내수로는 식당과 이발소 등이 단골이었다. 그래서 속칭 ‘이발소 그림’이란 소리도 들었다. 지금도 여러 미술상과 화랑들이 남아서 당시를 추억하게 하고 있다.
삼각지는 1967년 12월에 준공된 삼각지 교차로가 있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우리나라 최초 타원형식 입체교차로로 당대에는 서울을 대표하는 곳 중 하나였을 정도다. 이후 강남이 개발되고 날이 갈수록 심각한 교통체증을 유발하기 시작했다. 또 설계 규모와 구조결함의 문제가 생기면서 결국 1994년 철거됐다.
1968년 서울의 전차 운행이 중단되자 신용산 방면 차고지였던 삼각지 차고지가 역할을 상실했다. 서울시는 1966년 한국전력으로부터 전차 사업을 인수할 당시의 채무와 운영 적자를 갚기 위해 차고지 일부를 매각했다. 이때 들어선 것이 낡은 외관을 자랑하는(?) 삼각지 맨션이다.
현 우리은행 용산지점 자리는 일본계 은행인 조선실업은행이 1921년 용산지점을 개설한 곳이다. 이후 경영이 어려워지자 1924년 민족계 은행인 조선상업은행에 합병됐다. 1950년 한국상업은행, 1999년 한일은행과 합병 한빛은행으로 통합했다가 2002년 지금의 우리은행이 됐다. 현 건물은 70년대 재건축한 것으로 보인다.
삼각지 홍보대사 격 배호의 흔적들
▲ 삼각지에는 ‘돌아가는 삼각지’를 부른 배호를 추모하는 노래비, 만남의 광장 등이 조성돼 있다. 배호길도 있었지만 도로명 시행과 더불어 없어졌다.
삼각지 입체교차로가 완공되던 해 때마침 가수 배호가 ‘돌아가는 삼각지’를 발표해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배호는 1960년대 후반 ‘누가 울어’, ‘돌아가는 삼각지’, ‘안개 낀 장충단공원’ 등을 히트시키고 29세에 신장염 재발로 요절한 비운의 가수다.
광복군 부모 밑에서 중국에서 태어난 배호는 해방과 함께 귀국해 1946년부터 창신동에서 살았다. 독립군 후손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 역시 가난에 시달렸고 중학교도 제대로 못 마쳤다. 방송국 악단장을 지낸 외숙의 영향으로 드럼을 치며 음악을 시작해 후일 12인조 악단까지 결성했다.
1967년 삼종숙부(9촌) 배상태가 작곡한 ‘돌아가는 삼각지’를 발표했고 1971년 요절 당시 그는 만 29세로 미혼이었다. ‘돌아가는 삼각지’는 발표 후 1967년 KBS 가요프로그램 ‘가요톱텐’에서 22주간 연속으로 정상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가수 생활 5년 동안 10여개 음반사에서 20여장의 음반을 발매하고 200여곡의 노래를 남기는 등 불꽃 같은 인생을 살았다.
현재 배호기념사업회가 삼각지에서 활동 중에 있다. 용산구청의 협조로 2000년 11월에는 한국 대중가수로는 최초로 배호길을 명명했다. 배호길은 2011년 시행된 도로명 주소에 의해 ‘한강대로62길’로 바뀌었다. 이 길은 한강로1가 121번지 우리은행 한강로지점에서 221~8번지 국방부 담까지 한강대로 이면도로 약 400m 구간이었다.
2001년에는 삼각지 교차로 교통섬에 ‘돌아가는 삼각지’ 노래비를 세웠다. 그의 노래비는 삼각지를 비롯해 양주 신세계공원 묘지에 ‘두메산골’, 경주시 ‘마지막 잎새’, 강릉시 ‘파도’ 등 전국에 4개가 세워져 있다.
4호선 삼각지역 지하 공간에는 배호를 기념하는 미술 작품과 동상을 설치하고 ‘배호 만남의 광장’을 조성했다. 또 2003년부터는 ‘대한민국 트로트 가요제’를 개최해 신인을 발굴하는 등 그를 기념하고 있다.
생선만 40년 가까이 구운 달인의 식당
▲ 삼각지 노포 대원식당의 생선구이백반 한상차림. 80대 할머니께서 40년 가까이 고등어를 구웠다. 내공은 고등어 맛을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이처럼 삼각지에는 다양한 시층의 여러 가지 이야기가 넘치는 곳이다. 지금도 도시의 오래된 골목과 새로 올라간 각진 대형 빌딩이 공존하는 곳이다. 이곳은 또 오랜 손맛을 자랑하는 전통 있는 노포가 많은 곳이다.
삼각지 맛집으로는 군만두와 탕수육이 유명한 ‘명화원’(1956년 개업), 차돌박이 전문점 ‘봉산집’(1958), 양·곱창구이 전문 ‘평양집’(1973), 대구탕 골목 원조 ‘원대구탕’(1975), 고등어구이 백반집 ‘대원식당’(1978), ‘옛집국수’(1981) 등이 있다. 최근에는 ‘몽탄’, ‘장군집’ 등 육고기집이 신흥 맛집으로 강세를 보이고 있다.
40년 된 생선구이 백반 ‘대원식당’
이들 중 최근에 ‘대원식당’을 찾았다. 기록을 찾아보니 5년 만에 방문이다. 메뉴는 생선구이 백반, 두루치기, 대구뽈찜 딱 세 가지다. 생선구이는 다름 아닌 노르웨이산 고등어다. 점심엔 주로 고등어구이 백반 손님이다.
40년 가까이 한 자리서 연탄불에 고등어를 구우셨다는 할머니께서 반갑게도 여전히 자리를 지켰다. 옆에서 지켜보니 연탄과 고등어의 거리가 제법 돼서 껍질과 살이 타지 않고 노릇하게 익는다. 대원식당 고등어의 풍성한 육즙과 ‘겉바속촉’의 비법은 전적으로 할머니의 노하우에 있다. 하루 전에 생고등어에 직접 소금을 치고 숙성을 시킨 후 구워내는 것이다. 또 독특하게 고안된 화덕도 한몫한다.
생선구이 백반이 9000원이라 조금 비싸다 싶겠지만 엄동염천(嚴冬炎天)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궂은날 마다하지 않고 고등어를 굽는 할머니 정성을 감안하면 아깝지 않다. 일부러 레트로 감성에 비용을 지불하는 시대에 할머니의 노하우와 정성은 금전으로 환산 불가다. 예전엔 2인분 고등어를 한 접시에 담아주던 걸 이젠 따로 내온다. 코로나19 시대 바람직한 상차림이다.
떡볶이, 콩나물무침 등 몇 가지 반찬은 오래전과 같다. 특히 숭늉도 서비스되는데 입안에 고등어 비린내를 씻어내는 데 좋다. 인근에 고등어 백반 집이 한 곳 더 있는데, 그곳을 비롯해 삼각지 맛집에 대해선 다음번에 또 다루기로 한다.
참! 배호는 1971년 작고했으니 대원식당 고등어구이 백반은 맛보지 못했다. 대신 명화원이나 봉산집은 혹시 가보지 않았을까.
유성호 스카이데일리 기자 입력 2021-07-30
첫댓글 근세 용산구 역사와 삼각지 먹방. ㅡ 즐감
하오다
출퇴근하느라 하루에 한번씩 지나가는 길인데
궁금해 하던 돌아가는 삼각지의 의미를
사진을 보고 이번에 확실히 알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