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보면 별별 세대가 다 있다. 굳이 편가르기라고 낮춰 말하고 싶진 않지만, 어쨌건 어디엔가 소속되어 있어야 안심을 하는 인간의 본질적 무의식도 작용 했을 것이다. 물론 나는 세대를 어떻게 나누는지에 대해 말하고자 이글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엎어진 김에 쉬어 간다는 말처럼, 말이 나온 김에 대략 훑어보고 넘어가자.
더글러스 코플란트가 80년대 후반에 쓴 ‘Generation-X’라는 소설에서 유래되었다는 X세대, 디지털 기술과 함께 성장해서 디지털 기기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이른 바 N세대(Net Generation), 전후 베이비붐 세대가 낳은 2세들을 일컫는 말로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10세 전후의 어린이를 지칭하는 Y세대(Young Generation)가 있다.
또한 사이버(Cyber)와 컴퓨터(Computer)와 반도체 칩(Chip)과 신용카드(Credit Card)과 유선방송(Cable)속에서 살면서 비판(Criticism)적 시각으로 기존 질서의 변화(Change)를 요구하는 C 세대, 녹색을 뜻하는 `Green’과 세계화를 뜻하는 `Global’의 의미가 잘 보여 주듯이 건강하고 적극적이며 세계화된 미래 지향적 젊은 세대를 나타내는 G세대도 있다.
더 나아가 스스로 사업체를 일으켜 경영인이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E 세대 (Enterpriser)에 이르기 까지, 그야말로 우리는 이처럼 ‘세대’의 홍수 속에서 살고있다. 물론 이미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386 세대’라는 말도 빼놓을 수 없다.
가장 최근에는 월드컵과 광화문 촛불시위, 대선 등에 앞장섰던 새로운 신세대층을 일컫는 말로 '참여'(Participation), '열정'(Passion), 사회 패러다임의 변화 주도(Paradigm-shifter)을 뜻하는 P 세대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P세대의 특징으로는 기존 질서에 대한 '도전', 네트워크를 통한 '관계', 다양성에 바탕을 둔 '개인', 다양한 분야에 대한 '경험', 재미와 즐거움을 추구하는 '감성'을 꼽을 수 있다고 한다. 또한 이들은 ‘나도 사회를 바꾸는데 참여한다’는 강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인터넷을 통해 인식을 공유하고 담론을 생산하고 확산시켜 나가며, 주도세력과 동조세력의 구분이 모호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P세대의 특징에 대하여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어디서 많이 보던 모습이다.
그렇다. 바로 시대소리에서 매일 매 시각 벌어지는 모습, 바로 그것 아닌가. 누구나 필자 (주도세력)가 될 수 있고, 동시에 누구나 독자 (동조세력)도 될 수 있는 구조 속에서 서로의 인식을 나누고 담론을 형성해 나가는 것, 바로 지금 이 순간 시대소리에 접속해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에 이미 기성세대이면서 동시에 P세대로 편입되어 있는 것이다!
P세대는 과거의 기성세대와는 개념이 다르다. 기성세대의 사전적 정의는 사회적으로 경제활동을 하는 나이 든 세대의 일반적 호칭, 즉 나이에 의한 생물학적 구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경제활동을 하는 30-50대 청장년 층이라고 범위를 더욱 한정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 보니 ‘기성세대’하면 얼른 떠오르는 뉘앙스는 시대의 흐름에 잘 따라가려 하지 않고 변화와 도전을 두려워하며, 적당히 3점만 나고 말지 굳이 쓰리고를 부르는 무모함은 저지르지 않는 소시민적 관념으로 다가온다.
우리도 분명 기성세대로 분류가 되겠지만, 그래도 우리 역시 이런 소극적 모습이라고 수긍하기에는 좀 억울하다. 생각은 깨어있고 사회참여의 열정은 높은데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기성세대라는 ‘낡은’ 칸막이에 갇히는 것은 왠지 손해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오히려 어찌보면, 우리 P세대형 기성세대들이야 말로 그간 살아온 경험과 쌓아온 지식과 나름대로 길러온 소양이 있기에 개혁에 대한 더 ‘적확한’ 개념을 잡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시대소리에 글을 쓰는 우리 기성세대들은 누구나 ‘왜 쓰려 하는가’ 하는 목적 또는 바램이 있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많은 독자에게 읽혀지기를 원하여'와 '문제 해결 (problem solving)을 위하여'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잘난 것이 없긴 하지만, 적어도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하여 시대소리에 글을 쓴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내 글은 독자들에게 인기가 없을 지 모르지만,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자부해본다.
혼자만 보는 일기가 아니고 공개적으로 쓴 글이니 기왕이면 많은 이가 읽어주길 바라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것이다 (칼럼은 아니고 서너줄짜리 글이나 혹은 특정인을 비하하는 본문 글들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문제는 두번째 이유, 즉 문제해결을 위해 글을 쓸 경우이다.
문제 해결, 더 정확히 말해서 사회 또는 공공 문제의 해결을 위한 글은 당연하게도 “왜?” 라는 의문점에서 출발한다. 의문을 가져야 문제점이 보이고, 문제의식이 있어야 사회 현상 (정치 포함)을 깊이 들여다 보는 노력을 하게 된다. 당연히 각각의 문제의식의 차이에 따라 겉으로 표출되는 형태가 달라진다. 누구는 이회창을 찍는가 하면 누구는 노무현을 찍는 것이다.
개혁도 마찬가지다.
개혁을 논할 때 가장 먼저 부닥치는 문제가 이것이다.
“왜” 개혁을 해야하는 것인지,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로드맵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설계도없이 막연하게 벽돌을 쌓으며 언젠가 빌딩이 완성되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문제의식? 역사의식? 현실참여? 다 좋다. 하지만 ‘기성세대’인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한가지 딜레마에 빠진다. ‘개인의 필요’와 ‘사회의 필요’가 늘 일치해 주는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소방도로가 없어서 작은 화재가 크게 번졌다고 하자. ‘사회의 필요’를 위해서는 소방도로를 내야하지만, 그렇다고 내집 마당의 절반을 뚝 떼어서 주자니 ‘개인의 필요’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특히나 이 두 가지 상반된 ‘필요’ 사이의 갈등은, 거둘 것 많고 챙겨야 할 입이 많은 우리 기성세대를 종종 압박한다.
그렇다고 입을 다물 수도 없다. 침묵하기에는 우리 기성세대들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혔으며, 이러한 우리의 침묵은 개혁의 동력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결국 대안은 동 시대를 사는 기성세대들의 목소리를 합치는 것이다. 기성세대지만 우리 안에 내재되 있고 이미 시대소리를 통해 훈련된 P세대적 요소를 모아 합치자는 것이다. 나는 이럴때의 '군중심리'에서는 때때로 긍정적 요소를 발견한다.
넓은 의미로 보아 기성세대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신문도 마찬가지다. 신문 발행인들은 신문도 기업이며, 따라서 ‘읽히는 신문’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러나 신문이 ‘기업’으로 살아 남기 위하여 (돈벌이를 하기 위하여) 독자들의 취향에 영합한다는 미명하에 권력의 편에 서고, 그럼으로써 사회 발전에 해악적인 존재가 된다면 그런 신문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미국 저널리즘은 기사 쓰기의 큰 기준으로 '정보가 풍부하고 (informative)’, '교육적이고 (instructive)’, '재미있고 (entertaining)’ 의 세가지를 든다. 그러나 조중동을 보면 나는 위 세가지 기준 중에서 가운데 것을 쏙 빼버리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런 문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는 기성세대는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선정성 (sensationalism)도 알고 보면 재미의 일종이다. 인터넷에 의한 정보 공유는 매우 획기적이지만, 올라오는 글들 중 어느것들은 문제가 있다. 거의 전부가 욕지거리아니면 비방으로 뒤덮인 글들을 보면 이건 영락없이 명예훼손감이다. 그런데도 어떤 정치 웹진을 보면 이를 방조하거나 혹은 부추기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왜 그곳은 그런 글들을 그대로 싣는가? 혹시 선정성 때문에 클릭을 하는 독자층을 붙잡아 두기 위한 장사 속은 아닌가?
인터넷, 특히 정치 웹진은 정보 제공과 교육 기능과 토론을 통한 여론 수렴으로 사회 발전을 돕는다. 새로운 정보는 사람들이 몰랐던 사실을 깨닫게 해주고 의식을 깨우쳐 행동을 유도한다.
그러나 오늘과 같이 다분화된 사회에서 그것만으로는 복잡한 사회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실제로 종이신문과 인터넷에서 매일처럼 무수한 정보가 흘러 다니고 뜨거운 논쟁이 벌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우리 사회가 별반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 이를 잘 증명한다. 다만 조금씩 조금씩 임계점 쪽으로 변화하고 있는것은 확실해 보인다. 우리 기성세대는 먹고살기 바쁜 힘없는 소시민이지만 그래도 우리에 의해 이만큼이나마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 기성세대는 정보를 나누고 얻어야 하고 비판적 시각도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반대 for 반대’가 아닌, 함께 길을 밝히기 위함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른바 대안 제시다.
대안 제시를 위해서는 “왜?”라는 질문을 늘 가져야 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분석과 설명을 필요로 한다. 우리 기성세대 개개인들이 내놓은 분석과 설명은 넓게 공유되 가면서 다시 우리들 스스로에게 교육으로 되돌아 온다. 기성세대 의식화의 공론장이라는 점에서, ‘시대소리’로 상징되는 인터넷 정치웹진의 필요성은 그래서 강조되는 것이다.
언론을 사기업에게 맡기면 타락하기 쉽고 공기업으로 만들면 권력의 시녀가 된다. 정치웹진도 일종의 언론임을 생각할 때, 이러한 딜레마의 해법은 인터넷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우리 기성세대 속에 함유된 P세대 성분을 뽑아내 스스로의 수준을 높이는 길 뿐이다.
정치웹진에는 기사(펌 기사), 사설, 논평, 설득이 모두 들어 있다. 뉴스보다 더 넓은 개념인 모든 메시지의 창고다. 이 흐름을 중요시하는 이유는 그에 따라 사회구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정보가 사람에게 가 닿으면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다. 결국 정보의 흐름이 기성세대 개개인의 영향력을 바꾸고, 이는 곧 사회 전체의 구조를 재편시킨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이것을 ‘개혁’이라고 부를수 있는 것이다.
‘개혁’은 우리 사회의 화두다.
그러나 무엇을 어디서부터 개혁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은 여전히 분분하다. 마치 월드컵 때 우리 국민 모두가 축구전문 해설가가 된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는 정책 입안자도 아니고 집행자도 아니다 (패배주의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기성세대는 매우 중요한 일을 해야하고, 또 할수 있다. 그것은 바로, 정책 입안자와 집행자가 기성세대의 ‘거대한 의식화 흐름’에 대해 엄청난 위압감을 느끼도록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시대소리 같은 정치웹진에의 참여라는 ‘도구’를 통해 구체화된다.
우리 기성세대에게 있어서의 개혁의 의미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직접 내 손으로 뭘 해야만 한다는 생각도 성급하다. 우리 모두가 대통령, 장관, 국회의원, 혹은 정당 대표가 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손으로 ‘직접’ 국가와 사회를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를 일선에서 바꿀 사람들 (예컨데 대통령과 정부와 정치인 등)에게 우리 기성세대의 힘을 보여주고 압력을 가해서 ‘간접’적으로 해 나갈 수는 있다. 그들의 눈에 우리 기성세대가 이미 지닌 지식과 경험과 연륜에 더하여 P세대의 장점마져도 고루 장착했다고 보여질때, 그들은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리하여 비로소 세상은 우리에 의하여 바뀌는 것이다.
시대소리에 지금 접속해 있는 기성세대여 힘을 내자. 마음껏 군중심리를 즐기자. 혼자서는 움추려 있다가, 여럿이 모였다고 목소리를 내는것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개혁이란 별게 아니다. 정치웹진에 접속하여 글을 읽거나 쓰고, 다양한 토론의 장을 지켜보며 의식이 성숙되어 가는 것이 바로 개혁의 힘이 된다. 결국 우리들 하나 하나가 바로 ‘개혁’의 진짜 실세인 것이다.
첫댓글 라이더? 너가 쓴 논문? 어려운 얘긴데, 가산36회 카페모임도 어쩌면 개혁의 한부문이라고 생각하는데 틀린야그는 아닐런지? 이해해라 뭐 아는게 있어야쥐 호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