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현 교수 간증 글. 011-402-0324.
<55년 된 곱사등이 등을 펴주시고 “나를 찬양하며 나를 널리 알리거라”하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드립니다>
<까페소개 : http://cafe.net/praiseamen 간증문, 집회일정, 동영상, 치유받기전 사진 등을 보실 수 있습 니다>
여러분 저의 모습을 통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증거합니다. 저는 몸과 마음이 모두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시며 기다리십니다. 여러분 회개 없이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우리 입술로 회개가 않되면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회개할 수 있도록 제 입술을 주관하여 주세요”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는데 우리가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가 있나요. 예수님의 피흘리신 모습을 바라보면서 왜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는지를 예수님에게 물어보세요. 지난날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시고 축복하신 일을 생각하면서 감사하지 못한 것을 회개하시고 용서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버지라고 불러보십시요.
저는 1951년 8개월의 미숙아로 태어난 지 2살이 되던 1952년에 8살 된 친척의 손에 끌려 마루위에 놓여있던 책상위에 이끌려 갔다가 책상위에서 마루로, 마루에서 뜰팡으로, 뜰팡에서 마당까지 떨어지면서 몸을 다쳐, 곱사등이가 되어서 50평생을 열등감과 분노 속에 살면서 열등하나님까지 원망하며 살아왔습니다
사춘기가 되기 전에는 저의 슬픔을 몰랐습니다. 다른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저에게도 아름다운 추억이 있었습니다. 저는 성악가의 길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성악을 공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한의사가 되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평생을 진료실에서 숨어 살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후에 성악교수까지 되었지만, 이로인하여 열등감과 분노는 더욱 커지기만 하였습니다. 무대에서 연주를 하는 것이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이었습니다. 나의 슬픔을 내가 해결하면서 성악가의 무대를 피하고자 1991년에 오페라단을 만들어 스스로 단장이 되었습니다.
1998년부터는 오페라 이순신을 제작하여 내 자랑과 욕심으로 국내, 해외공연을 추진을 하다가 10억에 가까운 빚을 해결하지 못하고 마지막 세상을 등지고 죽음을 선택하고 있던 지난 2005년 2월 4일, 장향희 목사님(일산 든든한 교회)이 인도하신 도곡 기도원 부흥집회에서 기적의 하나님치유를 받고 굽었던 등이 바르게 펴진 은혜를 입었습니다. 저
는 이날 또한 그동안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했던 죄까지 사함 받고 이때부터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확신하여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날 밤의 기적과 기쁨을 증거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의 찬양을 올립니다
- 출 생 / 1951년. 충남 공주시 정안면 화봉리 2구 394번지
- 연락처 / 011-402-0324. 041-850-8318(연구실). khbaik@kongju.ac.kr
- 학 력 / 공주중학교 졸업(1968년 졸업)
공주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졸업(1971년, 고 1부터 성악공부 시작)
서울음대 성악과 졸업(1976년) 서울음대 대학원 성악과 졸업(1979년)
오스트리아 비인국립음대수학(1984년) 오스트리아 모짜르테움 음대 연수(1986년)
이탈리아 아르츠 아카데미 수학(1999년)
- 이 력 / 서울 KBS합창단(1975-1979), 선화예술고등학교강사(1978-1979), 목원대학교 전임강사(1979-1980)
- 현 재 / 대전중앙감리교회권사. 국립공주대학교 음악교육과 교수(1980년부터 -)
공주영상대학교 이사(1990년 - ), 충남교향악단 운영위원(1995년 -)
성곡오페라단장(1991년- ) 오페라 이순신 제작자(1998년 -)
- 교회력 / 공주제일감리교회 첫 출석(1968년). 서울숭덕교회, 서울영락교회, 서울초동교회, 서울충현교회
대전목원대학교회, 대전중앙장로교회 및
오스트리아 비엔나 할브가세 교회. 독창자 및 찬양대 지휘자역임
- 수상 / 국무총리상(1995년, 오페라 구드래 전국공연)
충청남도문화상(1998년, 오페라 이순신 세계초연공연)
화관문화훈장(2002년, 오페라 이순신 세계화 추진)
---------- 미숙아로 태어난 어린아이
저의 고향은 교육과 문화의 도시며 백제의 고도인 공주입니다. 지금은 교통이 발달하여 전국 어디를 가나 한 두 시간 내에 도착할 수 있는 쾌적하고 아름다운 도시가 되었지만 제가 태어난 공주시 정안면 화봉리는 지금도 공주시내에서 한참을 가는 마을 깊은 곳에 위치고 있습니다. 그곳은 차령산맥 한 줄기에 자리 잡고 있으며 홍길동이 기거하였다는 무성산 끝자락에 위치하고 있는 관계로 더 이상 갈 곳이 없다는 뒴막골(뒤가 막힌 골짜기)이었습니다
저의 증조부께서는 높은 벼슬을 하시다가 임금님으로부터 많은 땅을 하사받고 낙향하여 이곳에 기거를 하시게 되었고 신학문을 공부하시던 할아버지, 그리고 공주사범을 졸업하신 아버지까지 이곳에서 사시면서 저 또한 이곳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저의 어린 기억을 되살려 보면 저의 집은 높은 지대에 다른 집들보다 크고 위엄있게 보였으며 마당에서 뜰팡까지가 매우 높았고 뜰팡위에 뒤딤 돌이 있었으며 뒤딤돌에서 마루까지의 높이도 매우 높았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할아버지가 따로 쓰시던 사랑채도 있었으며 넓은 앞마당과 바깥마당 그리고 별채가 또 있었으며 항상 저의 집에는 인근 동네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저를 데리고 다니던 머슴 아저씨, 아주머니가 있었습니다
좋은 환경에서 건강하게 태어났을 제가 8개월 반만의 미숙아로 태어난 것은 6.25의 혼란기 영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성년이 되어 저는 어머니께 들은 것은, 밤마다 들여오는 포탄소리, 총소리 그리고 괴뢰군들이 뒴막골까지 와서 내일이면 동네사람들을 모두 죽인다는 소식을 매일같이 듣고 불안해하시던 어느 날 일찍 해산을 하셨다 하셨습니다
------------- 뜻하지 않은 사고
8달 반만에 태어났지만 장손으로 태어난 저를 두고 할아버지를 비롯하시어 모든 가족들과 동네 이웃사람들까지도 좋아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2살이 되던 어느 날, 8살 된 친척의 손에 이끌리어 마루위에 놓여있던 책상에 함께 올라갔다가 떨어지면서 저는 그 친척과 함께 마당까지 여러 차례 구르면서 떨어졌다 합니다. 나약한 미숙아였기 때문에 더욱 많이 다쳤던 것 같습니다. 그 후 저의 몸속에 결핵균이 침투하였고 이후 시름시름 아프면서 몸에 균형이 비툴어 지는 구르병(곱사등이)으로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온 집안에 슬퍼졌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어머니는 저를 등에 업고 일곱 번을 저수지에 갔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일찍 죽는다고 저를 절에 팔았다는 이야기도 들었으며 스님을 수양어머니로 삼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논과 산을 팔아서 당시에 비쌌던 항생제 주사(마이신)주사를 놓게 하셨고 호랑이 한 마리를 통체로 달여 먹였다고 들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심한 곱사등이를 면하게되었고, 죽음 지건의 상황에서 목숨을 건졌던 것 같습니다
---------- 아름다웠던 동심의 시절
제가 자란 뒴막골은 큰 마을은 아니지만, 매우 아름다운 마을이었습니다. 집 옆 양쪽으로 흐르는 개울은 언지든지 먹을 수 있는 깨끗한 물이었으며, 어느 곳을 가든지 진달래꽃을 꺾어 먹을 수 있었고 나뭇가지 마다 항상 먹을 수 있는 감, 밤, 호두, 대추, 자두 그리고 오이, 참외, 수박, 가자, 고구마, 감자 등이 픙부하게 있었습니다. 개울에서는 가재와 게, 뱀장어, 미꾸라지, 송사리, 붕어 등을 잡았고 추녀 밑에서는 새끼 새도 잡아 키울 수 있었고, 산속의 다람쥐와 들새들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겨울이면 논과 언덕에서 썰매를 탔었고 얼은 몸을 녹이느라 집동가리에 불을 놓았다가 꾸중을 듣기도 하였지만 그때마다 양반집 손자를 혼낸다고 역정을 내시던 동네 어른들이 생각납니다
저의 어린 시절은 꿈같은 동화였습니다. 제 자신의 아픔도 몰랐고 창피함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름다운 동산과 맑은 시냇물, 언제든지 만나서 즐겁게 지낼 수 있었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높지는 않았지만 2개의 산을 넘고 3개의 골짜기 시냇물을 건너 학교에 가던 길도 즐겁기만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다시금 돌아가고 싶은 아름다운 추억이었습니다
------------창피함을 알게 된 고교시절
국민학교 시절에는 전혀 의식하지 못하였으며 중학교를 다닐 때도 어염푸시는 창피함을 알았지만 고등학교에 다니면서부터 저는 슬픔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련시간을 통하여 나 자신을 알게 되었고, 교무실에서 선생님들이 나의 등어리를 만져보았을 때에 창피함을 알게되었습니다
몸에 짝 달라붙는 교복을 입고 학교에서 공부하고, 체육하고, 청소하고 하던 시간이 정말로 힘들었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열등감을 감추기 위하여 요령을 부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겉으로 성실하고 착한 척 하면서 예절바르게 살았지만 마음속에는 분노가 깊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교회생활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바닥에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일은 저에게는 육체적 힘이 들었으며 더욱 힘들었던 것은 뒤에서 누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에 나를 괴롭혔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도 마음을 집중 할 수가 없었습니다
----------- 교회로 인도하여 주신 장로님을 원망하였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저의 부모님은 저를 보고 “너는 몸이 약하니 의과대학을 가야한다”고 말씀하셨으며 저는 한의대학을 가서 한의사가 된 다음에 환자와 앞만 보고 살아가려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1학년 음악시간에 음악선생님께서(당시 공주제일감리교회 장로님) “너는 목소리가 좋으니 성악을 하라”고 권하시었고 노래와 함께 찬송가(갈보리 산위에)를 가르쳐 주신 후 공주제일감리교회에 첫 등록(1968년)을 시킨 후 찬양을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저는 그 후로 공부보다는 노래가 좋아서 매일같이 노래 부르는 일에 정신을 잃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옆에서 저를 보고 “노래를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는 소리를 듣고는 점점 노래 부르는 일에 빠져들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성악을 하기보다는 한의사가 되는 길이 더 평탄한 길이었을 것입니다. 청년기를 거쳐 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나서 나는 성악가의 길로 간 것이 후회되었습니다. 그리고 장로님을 원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를 성악가의 길로 인도하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히 한의사가 되었을 텐데, 왜 나에게 노래를 가르쳐주고,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다니면서 무대에 세워놓고 여러 사람 앞에서 창피를 당하게 하였는지 도저히 장로님의 의도를 이해 할 수가 없었습니다
대학을 다니면서 제가 불렀던 노래들을 회상하면 매우 슬프고 어두웠던 모습이었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고, 지난날 대학 동창으로부터 들은 것은 “학교에서 네가 항상 무엇인가 어두움을 지니고 있어서 우리는 너에게 가깝게 가기가 어려웠다”고 옛날 추억이야기를 하는 것을 듣고 저는 한동안 슬픔에 잠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이 좋아서 성경을 읽으면서 요한복음 9장 1절-3절에서 저는 흐르는 눈물을 거둘 수 가없었습니다. “ 예수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이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고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이 말씀은 저에게 모든 답을 주시었습니다. 제가 어려서 높은 곳에서 떨어져 불구자가 되어 평생을 슬프게 살았지만, 하나님이 저를 지극히 사랑하시어 병도 고쳐주시고 마음도 고쳐주신 후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증거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이라고 저는 확신하게 되었으며 모든 것을 용서하게 되었습니다
------------ 하나님 찬양을 거짓으로 부른 어리석었던 시절
제가 서울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다닐 때 많은 교회에서 저를 독창자로 부르셨습니다. 약 7년에 걸쳐서 서울의 충현교회, 영락교회, 초동교회, 용산교회, 평화교회, 숭덕교회, 대전목원대학교회에서 독창자로 찬양을 하였으며 1984년부터 1986년 사이에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있는 할부갓세 교회에서 독창을 하였고 귀국 후에는 공주의 제일감리교회, 중앙장로교회 그리고 대전의 대전중앙장로교회, 대전중앙감리교회에서 독창자로 찬양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찬양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사모하지 못했고 오히려 찬양을 하면서 제 자신의 슬픔과 원망을 호소하는 어둡고 슬픈 찬양을 불렀던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신앙이 깊은 것처럼 위장을 하고 찬양을 불렀는데, 이러한 저의 겉모습으로 많은 목사님들을 속였고, 성도님들을 속였던 죄인이었습니다
제가 대학교수가 27세에 일찍 된 것은 제가 잘나서도 아니고 실력이 있어서도 아니었으며, 저의 이 같은 겉모습에 속은 충현교회 성가대 지휘이셨던 김연술 교수님(목원대학에 근무를 하시다가 전남대학으로 자리를 옮기신 후 2007년 2월에 퇴직)이 저를 목원대학에 추천을 하시어 교수가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저는 목원대학교 학장님을 뵈웠다면은 교수가 안되었을 것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교수가 된 후에도 저는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였고 제가 잘 나서 교수가 된 것으로 교만한 생각뿐이었습니다
------------ 하반신을 못 움직였던 대학시절
서울음대 1학년 시절 몸이 너무도 아파 지도교수님에게 마지막 편지를 드린 후 죽음을 생각하면서 학교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39Kg의 왜소한 몸으로 성악을 전공하기에 어려움이 컸었고, 남 들 앞에서 성악을 연주하는데 창피함과 괴로움이 컸었습니다. 수업이 많았던 날에는 남모르게 벤취와 나무, 담장에 저리고 시린 굽은 등을 마사지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숙집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밥상까지 가는데 2시간이 걸리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왜 그렇게 온 몸이 아프고 팔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는지 알수 없었으나 나중에 병원에 밤새 잠자는 동안 척추 마디마디에 고인 화농이 하반신으로 신경을 눌러서 사지를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 수술대에서
1971년 5월, 대학교 1학년 때 몸이 너무도 아파서 교수님(이인영 교수님)께 마지막 편지를 발송 한 후 학교를 떠나 죽음의 길을 나섰지만, 용기가 없어 공주의 고향집에 도착되어 몇일 후 병원에 실려 갔고 24시간에 걸친 수술을 하고나서 1년 동안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에 2차례에 걸쳐서 호흡이 중단되는 죽음의 순간을 체험하기도 하였으며 몸통을 석고로 기부스를 한 채 살았던 세월은 정말로 악몽의 힘든 시기였습니다
수술 전에 의사선생님께서는 저의 볼을 치시면서 “안됬구나, 얼굴도 잘생겼는데, 이거 어쩌면 좋아”라고 하시면서 제 몸에 마취를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수술을 하다가 50% 이상은 죽을 수도 있다고 하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수술이 잘되어 퇴원 후 1972년 3월에 복학하여 대학원까지 마치었지만 등이 굽고 키가 적다는 이유로 종전과 마찬가지로 많은 고통이 뒤따랐으며, 대학시절의 음악회와 각종 연주행사에서 챙피를 당하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몸은 비교적 회복이 되었지만 수술 시에 투여한 20여병의 혈액 속에 있던 B형, C형 바이러스 간염균이 침투한 것을 1990년 공무원 신체검사에서 알게 되었으며 그후 저는 간염 보균자로서 항상 병원으로부터 주의를 받으며 인터페론을 쓰자고 의사선생님으로부터 권유를 받았지만 오페라 이순신으로 인한 많은 부채로 인하여 인터페론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 축복에 감사하지 못한 시절
저는 하나님의 은혜와 좋은 부모님 덕분에 2살 때 죽음의 고비에서 목숨을 건졌고, 하나님의 축복으로 27세의 젊은 나이에 대학교수가 되었고, 대학교수인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하였으며, 교수가 된 후 국비지원으로 가족과 함께 2년간 해외유학을 하는 등 정말로 하나님 축복을 많이 받았지만,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지 못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였던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대학시절에는 저의 목소리가 좋다고 서울의 충현교회 ,영락교회의 독창자로, 비엔나 유학시절에는 할브갓세교회의 독창자로 부름 받았지만, 하나님께 찬양을 온전히 드리지 못하고 저의 울분을 대변하는 한풀이 찬양을 하였던 죄인이었습니다
또한 성가대 지휘자로도 교회의 직분을 받았지만, 지휘를 할 때 마다 뒤에서 나를 지켜보는 성도들이 싫었으며, 목사님께서 나를 왜 성가대 지휘자로 임명을 하셨는지 원망을 하면서, 온전히 충성치 못하고, 많은 목사님께서 수도 없이 외치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예수께서 못 박히셨다”는 말씀에 진정한 아멘으로 답하지 않았던 죄인이었으며 신체적으로 어려울 때, 하나님 앞에 나가 나의 어려움을 고백하지 못한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 왜 하나님께 나가지 못했었나
은혜를 받고 나서 신앙생활 40년을 회상하면서 왜 내가 나의 슬픔을 하나님께 고하지 못하였는가를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그렇게 억울하고 분할 수 가 없었습니다
제가 젊은 날에 하나님께 “하나님 제 아픔과 눈물을 아시잖아요, 제가 어떻게 앞으로 살아가야되나요”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할 수 있었다면은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아들아 슬퍼말아라, 내가 너를 지키고 있지 않느냐, 나를 의지하고 따르거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 내 자랑을 위한 오페라 이순신 공연
1980년에 대학교수가 된 후에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열등감을 감추면서 위축된 삶을 살다가, 마음의 공허함을 메우기 위하여, 낚시, 분재, 고스톱 등을 즐기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이를 통하여 그때그때 슬픔을 잊어버리는 것을 즐겼습니다. 그것도 마음에 충족이 되지 않아 1991년부터는 인구 10여만 밖에 않되는 공주에서 오페라단(성곡오페라단)을만들어 지방공연을 시작으로 서울공연까지 하면서 내 자랑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1998년부터 창작오페라 이순신을 만들어 한국, 이탈리아, 러시아에서 공연을 하면서 해외공연 업적을 자랑하며 오페라를 우상처럼 여겼습니다
오페라를 시작한 것은 오페라가 좋아서라기보다는 나의 열등감을 가리기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시작하였던 것이며, 명예와 돈을 벌기위한 목적도 적지 않았고 그동안에 성악계에서 당한 창피함을 분플이 하고 싶은 생각이 더욱 컸었습니다
그러나 큰일을 하면서도 정작 하나님께 기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일이 더욱 좋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제 아내와 아내의 교회 동료들은 저를 위하여 수 많은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그 분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오페라 이순신에 많은 축복을 주시어, 8년 동안(1998 - 2005) 90억에 가까운 돈을 모금하게 해주셨고 한국오페라 역사 최초로 이탈리아(2000년), 러시아(2003)공연을 허락하시었고, 이로 인하여 정부로부터 화관문화훈장(2002년)까지 받게 되었지만. 하나님께 감사는커녕, 더욱 크게, 더욱 멋지게 잘 해보려고 130억 규모의 공연을 진행하다가 결국 10억에 가까운 빚을 남기고 행복하였던 가족의 행복을 다 망가트려 놓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모두 잊어버리고 죽음의 길을 찾게 되는 시점까지 도달하였습니다
2003년 11월, 추운나라 러시아의 피터스부르크 발틱극장에서 한국과 러시아 예술가들 300여명을 데리고 3회 공연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지만 정부로부터 지원을 약속받은 6억을 못 받게 되는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2000년부터 오페라 이순신을 앞장서서 반대해오던 지방의 고급관리가 중앙의 주요부처에 와있었는데 러시아 공연에 관련된 오페라 이순신의 정부지원금 지급을 저지당하는 묘한 악연을 만난 것이었습니다
결국 오페라 이순신과 저는 수난을 겪고 말았으며 세상과 사람을 믿고 내 자랑을 앞세웠던 오페라 이순신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아내의 권면을 외면하였던 시절
1991년부터 오페라 공연을 시작할 때부터 아내는 하나님께 먼저 기도하기를 권하면서, 올바른 신앙생활을 요구하였지만, 저는 눈앞에 보이는 것이 오페라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1998년부터 시작한 오페라 이순신으로 인하여 많은 빚을 지고 나서도 “하나님 빚을 갚아주세요”만을 기도하였지 “하나님, 저의 불순종과 죄를 용서하여 주세요, 기도하지 못하고 시작한 저의 잘못을 용서하여주세요”를 간구하지 못하였습니다. 또한 아내는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좋은 목소리로 주셨으니 다른 일을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면하였지만, 저는 “성악가가 어떻게 쉬운 찬송만을” 부를 수 있느냐며 아내를 나무라기까지 하였습니다
오페라 이순신을 가지고 해외공연을 할 때에 저를 위하여 많은 분들이 기도를 해주었지만 정작 저는 하나님께 기도하지 못하고 모든 것이 제가 잘나서 되는 것으로 생각하며 교만의 극치를 떨었습니다
저는 중매로 만난 아내에게 나의 불구된 모습을 교묘히 숨기고 결혼을 하였던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지금까지 불편한 말이나 불편한 눈길을 단 한 번도 주지 않고 오히려 용기를 심어주고 기도로서 위로하여주었습니다
제가가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을 때 아내는 “하나님 백 교수가 몸이 불편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어요, 이로 인하여 본인이 좋아하지도 않는 오페라로 혈기를 부리고 있어요, 백 교수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도록 하나님 도와주세요”라는 기도를 결혼 초부터 해온 것을 나는 후에 알았습니다. 제가 아내의 마음을 일찍 알았다면은 저는 오페라 공연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 자살을 생각하였던 순간
많은 빚을 지고, 가족을 어둡게 해놓고 나서야, 저는 마지막 단계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였지만 빚 문제를 해결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정말로 부끄럽고 챙피하기까지 하면서 가족을 대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2004년부터는 모든 후원자들도 제 곁을 떠나기 시작하였습니다. 학교를 가도 동료교수나 학생들을 대하기가 부끄러웠으며 친구들을 만나기가 싫었습니다. 집에 가기가 어려워, 차안에서 잠을 자기도 하였으며, 차를 몰고 낭떠러지에도 가보았고 저수지 가에도 가보았지만 용기가 없어서 죽지를 못하였습니다
애국심을 가지고 오페라 이순신을 하다가 목숨을 스스로 끊었다하면 세상이 시끄러울 것이고, 수사를 할것이고, 죽은 원인이 나올 것이고, 이리하여 오페라 이순신은 누군가가 아니면 정부에서 대책을 마련하게 되지 않을까, 이로인하여 우리가족은 조금은 도움을 받겠구나 하는 심정으로 죽음을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 저를 부르신 하나님
2005년 2월 4일, 구정기간, 햇살이 가득한 어느 날 아침, 아내와 함께 방에 있었지만 빚 문제로 인하여 편치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빚쟁이 남편이 된 저는 아내의 얼굴을 볼 수 가 없었습니다. 이때, 아내의 동료교수인 이양숙집사(대전대흥침례교회)가 아내에게 “최 교수 오늘 가까운 기도원에 부흥회가 있는데 이 권사를 데리고 가자”라는 전화를 하였습니다
아내는 전화를 끊고 친구인 이 권사(대전 중앙감리교회)에게 전화로 함께 기도원에 가자고 하였지만, 이 권사가 “나는 오늘 정기검진이 있어 못가니 두 사람만 가라”고 하는 바람에 친구의 제안이 무산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내와 이 집사, 그리고 이 권사는 기도의 동역자로서 무슨 일을 하든지 중보기도로서 기도의 힘을 모으고 있는, 제가 옆에서 보아도 신실한 신앙이었습니다
이때 나는 무의식적으로 아내에게 “내가 기도원에 가면 안돼?”라고 묻게 되었습니다. 평소 기도를 하라고 해도 거역하였던 나, 찬양을 하라고 해도 거역했던 나, 새벽기도에 나가는 아내를 방해하였던 내가, “내가 그 곳에 가면 안돼?”라는 말을 하였지만 나는 정말로 부흥회에 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부흥회에 가겠다고 하면 빚 문제로 인하여 힘들어 하고 있는 아내와의 마찰을 조금이나마 피해갈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아내에게 나의 미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표시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제 마음의 50%였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 갔다가 오면, 하루는 아들도 안보고, 부모님도 안 볼 수가 있을 것 같은 마음이 40%로 정도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내가 지금 갈 곳이 없잖아, 내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 내가 갈 곳은 그곳밖에 없잖아, 내가 지금 어디로 갈수 있단 말인가”라고 떨리는 감동이 일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 마음 중에 10%로 안되는 적은 것이었습니다
이때 아내가 “왜 안되? 지금 곧 가자”라고 했습니다. 나는 속으로 “아니 구정기간에 일은 안하고 어디를 간단 말인가, 내가 실수를 했구나, 정말로 가자고 하는데 피할 수도 없고 어떻게 한단 말인가” 라고 하면서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내가 부흥회에 가자고 하는 말을 듣고 또 다시 무의식적으로 “빨리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좋아서 빨라가자고 한 것이 아니라 “빨리 가서 벽에 불편한 몸을 기대고 앉거나, 기둥 앞에 앉아서 굽은 등을 감추고자” 말했던 것입니다. 아내도 이때 나의 마음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 하나님 치유와 기적
아내와 함께 기도원에 도착한 나는 어두운 마음으로 마루 바닦에 시선을 두고 “하나님 빚을 갚아 주세요”라는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의 기도는 믿음도 없었고, 확신도 없었던 요행만을 바라는 기도였습니다. 40여년 교회를 다녔지만 평소 저의 기도는 이와 같이 하나님께 달라고만 하던 어리석은 기도가 전부였으며, 이 날도 저는 빚을 갚아달라는 기도가 전부였습니다
이때 부흥목사(장향희 목사님, 일산 든든한 교회)님께서 단에 올라오셨는데 그날따라 목사님은 위, 아래 옷 그리고 구두까지 모두 하얀색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목사님이 무슨 옷을 저렇게 입고 다니시는가?라고 생각하면서 옆에 있는 처에게 “아니 목사님이 어제 밤에 나이트클럽 갔다 오신 거야?” 라고 말하면서 40년 교회생활 때와 같이 목사님을 외모로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은혜 받기 전까지는 목사님을 바라보던 눈이 잘못되었고, 혀가 잘못되었던 죄인이었습니다. 항상 목사님을 바라보는 눈과 교회를 바라보는 눈이 잘못되었던 사림이었습니다. 이때 목사님이 등단하시어 말씀을 전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잠시 후에 목사님이 갑자기 소리를 높이시면서 “여러분 고개를 드세요, 앞을 보세요,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그리고 하나님을 사모하세요, 하나님을 사모하실 때 성령님이 함께하시고, 성령님이 함께 하실 때 기적이 있습니다. 믿으시면 아멘하세요”를 여러 차례 주문하시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계속하여 증거하신 후 우리들에게 “예수의 피로 죄사함 받았다”를 계속하여 부르짖으라고 하셨습니다
목사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실 때 마다 저는 속으로 “목사님, 좀 조용조용 말하세요 그리고 한두 번만 말하셔도 다 듣고있어요, 부훙회가 이래서 제가 오고 싶지 않았다구요”라면서 목사님 말씀에 거역하고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계속하여 저와 같이 순종하지 못하는 입을 열게 하시고 막힌 귀를 뚫어 주시고, 닫힌 마음을 펴주시려고 애를 쓰셨지만 그때는 목사님의 의도를 몰랐지만은 은혜를 받고 나서, 하나님이 좋아서 감사기도를 드릴 때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또한 내가 40년 신앙생활 동안에 많은 목사님이 동일한 말씀을 전해주셨는데 왜 그 당시에 순종하지 못하였던가가 그렇게 억울할 수 없었습니다
저와 같은 사람이 많이 있었는지 목사님은 계속하여 아멘으로 화답하기를 권면하시면서 이제는 “저기도 고개를 드세요, 저기도 드세요”라고 말씀하시면서 저를 향하여 더욱 큰 소리로 외치시면서 여기저기를 손으로 가르치기 까지 하셨습니다
저는 이때, 큰일 났구나 이제 내가 들켰구나, 생각하면서 더 이상 고집부리다가는 챙피를 당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보고 일어서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내가 일어서다가는 굽은 등이 여러 사람에게 보여 지겠지” 라고 생각하면서 그때서야 나의 체면과 고집을 버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순간에 저는 목사님 말씀에 제 마음이 흡수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제 몸에 이상한 느낌이 생겼습니다. 부드러운 솜사탕 같은 것이, 아니 바람결 같은 것이 저의 오른쪽 옆구리를 누르는 것을 느꼈지만 나는 그것이 나의 착각에서 느낀 일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잠시 후 약간 더 세게 나를 누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때에도 나는 누가 나를 만졌나보다 하면서 주위를 보았지만 아무도 나를 만진 흔적이 없어서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오늘은 내가 이렇게 몸이 불편해 지는가 보다”라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습니다
잠시 후, 이번에는 자도 나도 모르게 “할렐루야 아멘”을 나지막하게 외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저의 자아가 외친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인도함에 의하여 제가 입을 열게 되었던 것입니다
제 입에서 “할렐루야 아멘”이 떨어진 후 곧바로 저의 팔, 다리, 고개, 어깨, 허리, 등이 제 뜻과는 달리 꺾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저는 50년 동안 시리고, 저리고, 불쾌하였던 등줄기가 시원하여 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으나 저는 처음 겪는 일이라서 두렵기 그지 없었습니다
제가 두려운 마음으로 잠시 정신을 차리려할 때에 “두려워 마라, 내가 너의 굽은 등을 편다”라는 하나남의 분명하신 말씀이 들렸고 저의 몸은 다시 성령에 이끌리어 온 마디가 꺾이고, 비틀리는 현상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너무도 감사하고 고마웠습니다. 등의 시원함과 함께 굽은 등이 펴졌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계속하여 호흡까지 동원하시어 등을 피시면서 하늘에서 내린 하얀 빛이 저의 오른팔을 묶은 후 하늘로 당기셨습니다. 그리고 오른쪽 팔꿈치를 360도 회전을 시키시는데 팔이 돌아갈때마다 그 각도에 따라서 제 등의 뼈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날 너무도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많은 감사를 드렸습니다
----------- 간사한 사람의 마음
사람은 정말로 기대 이하의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가 3시간 전에 부흥회 장소에서 하나님 음성을 듣고, 치유를 받고 ,회개, 감격,감동 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제가 3시간도 못되어서 하나님을 다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니 신앙생활40년 동안 교회에 나가 목사님 말씀을 듣고 예배를 마친 후 성전 문 나서면서 하나님을 다 잊어 버렸었다는 과거를 회상하면서 보잘 것 없었던 제 자신이 불쌍하기 조차 하였습니다
예배를 보면서도 성전이 어떤 곳인지도 분별하지 못하고, 성전 안에서 세상만 즐기고, 세상 이야기 나누던 지난날이 얼마나 많았던지 하나님께 너무 많은 죄를 지고 살아왔음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기도를 하여도 확신 없는 기도, 믿지 않는 기도, 요행만을 바라는 기도를 하면서 내가 필요할 때 만 하나님을 찿았고 아쉬울 때에 만 하나님을 찾고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지금 좋으신 하나님을 잊지 않으려고 입술에 찬양을 달고 다닙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저를 왜 사랑하셨어요, 하나님 감사합니다”가 제가 순간순간 부르는 찬양이 되었습니다
---------- 내가 너의 등을 다 폈다
부흥회 첫날이 끝나고 집에 와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메스껍고, 어지럽고, 현기증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1971년도에 수술할 때 감염되어 1985년부터 치료를 받아온 간염이 갑자기 문제가 된 줄 알고 큰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페라로 인하여 생긴 빚에다가 아프기까지 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면서 두 손을 가슴에 얹고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첫날 부훙회가 끝나갈 무렵 장향희 목사님께서 “여러분 집에 가실 때 그냥 가시지 마시고 밖에 있는 저의 간증 테이프를 가지고 가세요, 돈이 있으시면 두고 가시고 없으시면 그냥 가지고 가세요, 다만 댁에 가셔서 주무실 때에 꼭 저의 간증을 듣고 주무세요, 하나님께서 성령님이 함께하십니다. 기적이 있습니다, 하나님 치유가 있습니다”라고 주문을 하셨습니다
나는 그때에는 새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목사님의 그 말씀을 확신하게 되었으며, 목사님 간증 테이프를 한 개가 아닌 열 개를 산후 집으로 왔으며, 밤 1시경 잠자리에 들면서 목사님 간증 테이프를 녹음기에 걸어놓고 잠을 청하고 있었습니다
잠이 들 무렵에 앞서 말씀드린 바대로 저의 몸에 이상한 느낌이 있었는데 저는 경험이 없었고 들은 바도 없어서 그것이 성령님이 저를 만지시고 계셨음을 몰랐고 저의 간염이 갑자기 진전이 되어 급성의 간염으로 변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슬퍼지면서 지난날 죽지 못한 것이 후회가 되면서 두렵기 조차 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두려워 마라 내가 너의 굽은 등을 다시 편다”라고 하신 후 저를 반듯이 뉘워 놓고 팔과 다리의 각도를 이리저리 변화시키시면서 성령의 힘과 팽창된 호흡을 이용하여 계속하여 등을 펴주시었습니다
양손의 두 엄지손가락으로는 저의 두개골 밑을 강력하게(피부가 탈정도로)압박을 하면서 문지르게 하시면서 50여년 동안 긴장하여 살면서 생긴 어깨와 목의 살덩어리를 모두 제거시켜주신 태어날 때부터 없었던 오른쪽 눈까풀의 신경을 새롭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잠시 후, 하나님은 예리한 면도칼로 저의 정수리를 가르시고 검은색의 대못만한 쇠막대기를 뽑아주셨는데 이때 정말로 아팠습니다. 나는 너무도 아파서 “하나님 그만 하세요, 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요”라고 외쳤는데 이때 하나님은 저에게 “예수가 너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힐 때의 아픔을 생각이나 해보았느냐”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이때 하나님께 너무도 죄송하여 “할렐루야 아멘”을 외쳤고, 이후 곧바로 저의 아픔은 모두 사라지고 하나님께서는 저의 머릿속에 있던 못을 두개나 뽑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저에게 “너의 죄가 무엇인지 아느냐”를 물으셨고, “잘 모르겠습니다”로 답하는 저에게 “내가 너의 아버지인 것을 네가 네 입으로 왜 외치지 않았느냐”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제가 “하나님 잘못했어요, 이제부터 하나님을 저의 아버지라고 제 입으로 부르겠어요”라고 답을 하자만자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좋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네가 50년 동안 너무도 마음이 아팠구나, 이제 내가 너를 위로하노라” 하시면서 “나를 찬양하라, 그리고 널리 알려라”는 말씀과 함께 “자 이제 너의 굽은 등을 다 폈다”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새벽 6시, 눈물 코물로,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옷을 벗고 거울 앞에 서서 보니 정말로 굽었던 등이 펴졌습니다. 할렐루야. 저는 곧바로 옆방에서 자던 아내를 깨웠고, 아내도 나의 굽은 등이 없어진 것을 보고 절규에 가까운 “하나님이 함께 하셨어요”를 외쳤습니다. 그 날 밤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의 간염도 다 고쳤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날 새벽 4시, 방안에 상상 할 수 없는 큰 소리가 일었습니다. 나는 전쟁이 난 줄 알고 발딱 일어섰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성경을 펴라고 말씀을 하셨는데, 이에 저는 곧바로 성경을 폈는데 히브리서 4장 12절 “하나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영과 혼과 골수와 뼈를 쪼개신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무도 감사하도 가슴이 벅차, 집 앞에 있는 교회(대전중앙감리교회)에 나가 맨 앞자리에 앉아 십자가를 바라보는데 흘러내리는 눈물과 콧물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이때 하나님께 “왜 저의 등을 펴주셨어요, 하나님, 이 죄인이 무엇을 잘했다고 등을 펴주셨어요, 대답을 해주세요”, 를 수도 없이 외쳤는데, 하나님은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기 때문에 고쳤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하나님이 좋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치유하시고 나서 이제부터 나를 찬양하고 나를 널리 알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때까지 정말로 감동의 찬양을 할 것입니다. 찬양을 하면서 하나님이 “왜 저의 등을 펴주셨는지, 어떻게 펴주셨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만방에 알릴 것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 빚 문제에 눌리지 않고 있습니다. 고난도 삶이라고 시인하고 있습니다. 평생 빚을 갚고 하나님께 가도 좋습니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고난 때문에 하나님의 세계를 알게 되었고 행복과 기쁨을 찿았습니다. 삶의 새 길을 찿았습니다. 하나님이 저를 새롭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저는 오페라 이순신과 저를 험담하고 시기하며 방해하던 분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용서를 할 수 있는 사랑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고백하기는 모든 것이 저의 욕심과 하나님을 멀리하였던 죄로 인함이었습니다
-------------- 바뀐 나의 모습
저는 지금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몸도 바뀌었고, 눈도 바뀌었고, 입과 혀도 바뀌었습니다. 저의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여러분 저의 모습을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하나님께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딸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저는 새 사람이 되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님께서 나 때문에 고통 받으신 아픔을 생각하면서 목 놓아 울었습니다. 회개하며 울었고, 감사하며 울었습니다. 그리고 나를 위하여 예수님이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예배 중에서, 성경에서 듣고 읽고 하였지만 왜 그 당시에 그 사실을 시인하지 못하고 믿지 못하였으는지 지난날의 아까웠전 40년의 세월이 억울하고 아까워서 또 울었습니다
저는 좋으신 하나님을 잊지 않으려고 매일 아니 매시간 아니 숨을 쉴 때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 왜 나를 사랑하셨어요. 하나님 사랑합니다, 사랑합니다” 이것이 저의 찬양입니다. 하나님이 좋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게되었습니다
10억의 빚도 조금씩 갚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믿음대로 이 문제를 관여하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릴 믿음이 생겼습니다. 하나님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 하나님이 주신 건강 만 가지고도 찬양하세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건강을 주신 것 만 가지고도 감사할 것이 너무도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상의 요구는 욕심입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나갈 때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모든 치유와 축복 그리고 위로를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